2011년 2월 3일 목요일

감시 없어도 무임승차 안 늘어 … ‘양심 기차’ 시대 열렸다 - 중앙일보 뉴스

 

감시 없어도 무임승차 안 늘어 … ‘양심 기차’ 시대 열렸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1.02.03 01:17 / 수정 2011.02.03 01:19
코레일 개방형 개찰’ 1년 반 실험 결과는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열차 이용객들이 서울역 개찰구를 넘어가고 있다. 과거 자동 개·집표기와 검표원이 있던 자리에는 대신 ‘고객신뢰선’이 그려져 있다. 최정동 기자

코레일(철도공사)이 2009년 9월부터 서울역 등 전국 주요 역 개찰구의 자동 개·집표기와 검표원을 없앴다. 표 검사는 차내에서만 하고 있다. ‘고객의 양심을 믿어보자’는 신뢰의 실험이다. 검사가 예전보다 허술해진 틈을 타 무임승차가 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거의 늘지 않았다. 덕분에 코레일은 개찰구의 자동 개·집표기와 검표 인력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가장 큰 성과는 코레일이 신뢰가 통하는 선진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신뢰가 지켜지는 사회에서는 통제와 감시를 위해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신뢰가 곧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인 이유다.
설 연휴를 일주일 앞둔 26일 서울역 개찰구. 백화점 입구처럼 텅 비어 있는 이 공간은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자동 개·집표기와 함께 검표원이 서 있던 곳이다. 이제는 바닥에 가로질러 붙여놓은 노란띠만이 과거 개찰구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노란띠의 바탕엔 ‘고객 신뢰선(운임 경계선)’ ‘We Trust You(Only paid customers past this line)’란 한글과 영문 글씨가 뚜렷하다. 열차 이용객들은 ‘언제 개찰구가 있었느냐’는 듯 자연스럽게 노란띠를 넘어 열차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독일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 철도역에서 운영하고 있는 ‘개방형 개찰 시스템’이다. ‘승객이 합법적으로 표를 사서 정직하게 열차를 이용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제도다.
표를 사지 않고 몰래 열차를 이용하면 어떻게 될까. 개방형 개찰 시스템을 악이용하는 무임승차자가 과연 없을까.
코레일의 신뢰실험을 확인하기 위해 기자가 일일 열차 승무원이 돼 보기로 했다. 코레일의 협조를 얻어 갈색 승무원 복장으로 갈아입고 오전 10시 부산행 KTX 123 열차에 올랐다.
열차가 서울역을 빠져나가 한강철교를 건널 즈음 선임 승무원 김영빈씨와 함께 1호 객차부터 ‘점검’에 들어갔다. 김씨의 손에는 무선통신 시스템을 갖춘 PDA가 들려 있다. 가로 7.5㎝×세로 6㎝ 화면엔 객차의 좌석들이 그려져 있다. 실시간으로 어느 좌석이 팔렸는지 아닌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김씨는 “과거엔 객차 안에서 모든 승객의 표를 일일이 점검했지만 이제는 PDA 덕분에 좌석이 팔리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손님을 위주로 검표하면 무임승차 여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전 10시20분. 김씨가 3호차 5·6번 좌석에 앉아 있던 60대 부부에게 기차표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PDA 화면에 비어 있다고 나오는 좌석이다.
남자가 표를 보여줬다. 서울역에서 오전 9시55분에 출발하는 열차표다. 남자는 “이 차가 그 차가 아니냐”며 당당하게 말했다. 옆자리의 아내는 겸연쩍은 표정이다. 승무원 김씨는 “잘못 탄 경우엔 승차 특례를 적용할 수 있다”며 기존 표를 취소시키고 추가요금 없이 새 표를 발권해줬다.

서울역에서 동대구역까지 가는 1시간50분 동안 승무원의 검표로 지적된 경우는 단 두 건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무임승차라고 할 수 있는 경우는 없었다. 이병오 팀장은 “KTX에는 승객이 많아 붐비는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무임승차나 표 부정 사용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대전~서울 구간 무궁화호 1214호 열차에서 다시 승무원과 동행했다. ‘운임이 가장 싼 기차에는 무임승차객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서다.
오후 3시2분. 80대 노인이 검표에 걸렸다. “차가 떠난다고 해서 급하게 올라탔다”며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냈다.
다음 칸에서는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역시 차 내에서 표를 구입했다. 30대 초반의 한 남성은 “인터넷으로 표를 예약했는데 출발 5분 전에 오니 발권이 안 됐다”며 표를 구입했다.
오후 3시56분. 앞 열차 표를 샀는데 늦어서 뒤 열차를 탔다는 50대 남성이 표를 내밀었다. 오후 4시7분. 기차가 오산을 지나 수원으로 향하던 중 객차 사이에 서 있던 육군 소위가 검표에 걸렸다. “대전역에서 탔는데 시간이 없어 표를 사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어디에서 내리느냐”고 물으니 “수원”이란다.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났더라면 무임승차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경우다. 역시 무궁화호엔 KTX보다 검표 단속에 적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병석 여객전무는 “시간이 없었다는 이유로 열차에 탄 뒤 승무원에게 표를 사면 운임의 50%를 더 내야 하고, 무임승차가 분명한 경우엔 운임의 최고 10배까지 부과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무임승차를 단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KTX의 경우 전체 18개의 객차에 두 명의 승무원이 근무한다. 승무원은 검표뿐 아니라 기계점검과 방송, 화장실 점검 등 객차 내에 모든 서비스를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역마다 새로운 승객이 오르내린다. 짧은 구간을 이용하거나, 화장실에 숨고, 승무원의 동선을 미리 파악해서 교묘하게 움직일 경우엔 사실상 단속이 어렵다.
하지만 코레일이 개방형 개찰구 시스템을 도입한 뒤에도 무임승차는 거의 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
다. 개방형 개찰구 시스템을 도입하기 전인 2009년 1~8월과 도입 후인 2010년 1~8월을 비교했다. 2009년엔 전체 열차 이용객 7366만5000명 중 15만7000명(0.213%)이, 2010년 같은 기간엔 전체 이용객 7407만1000명 중 16만 명(0.216%)이 무임승차 단속에 적발됐다. 개방형 개찰구 시스템 도입 뒤 무임승차 건수가 3000명(0.003%포인트) 늘어난 데 불과했다. 반면 자동 개·집표기 유지보수 비용 3억원과 검표원 인건비 55억원 등 연간 58억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허준영 코레일 사장은 “설사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코레일이 솔선수범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신뢰사회가 되지 못해 감시하고 통제하는 후진 사회의 비용을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감시 없어도 무임승차 안 늘어 … ‘양심 기차’ 시대 열렸다 - 중앙일보 뉴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