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8일 일요일

'2011년 미.코 이성혜' 를 보고 느낀 점


실은 나는 '이성혜' 양을 만나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경로를 통해 그녀를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귀중한 인재' 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성혜양의 아버지는 내가 살고 근무하는 울산시에 위치한  병원 원장으로 계신 '선교사'이시다.
'병원원장' 과 '선교사' 가 동격으로 쓰이고 있는것에 의아해 하실 수도 있고 '선교사'에 내가 더 방점을 둔 것에  좀 궁금하실 것 같다.


아프리카 케냐에 미코 상금을 보태 구매한 모기장을 설치하고 있는 이성혜양


아프리카 아이들속의 이성혜양


그녀의 자서전


그분과의 만남은 나의 아버지를 통해서다. 몇년전 아버지께서 울산에 선교에 열심이신 훌륭한 의사분이 있는데 '너를 소개시켜줄 테니 형님처럼 생각하고 지냈으면 한다' 하시면서 관절통으로 불편하신 어머니를 아들의 병원이 아닌 '그분의 병원'에 입원시켜 놓으신 게 아닌가.
얼떨결에 문병가서 만나뵙게 된 그 분은 여러가지로 특이하신 분이셨다. 찾아간 병원안에 고갱의 '황색의 그리스도' 가 걸려있고



그분의 진료실에는 무슨 편지들이 벽면 가득히 빽빽하게 붙여져 있는것이 아닌가?. 몇개 읽어보니 중고등학생들의 감사편지 같은 것이었는데
'선교사님  언제언제 같이 대화해주시고  어찌어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감사하다는 내용이 주류였는데 당시에는 생전 처음보는 낯선 환경에 놀라기도 했고, 저런 편지를 왜 모두 다 보는 데 붙여놓은걸까?, 혹 과시하려고? 하면서 별의 별 생각을 하던 중에  오랬동안 못보았던 동생처럼 환대하시면서 당신은 의사일도 하지만 '청소년, 청년들의 사역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4대째 신앙을 이어오는 가정이었는데. 이선교사님의 아버지께서 부산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당시 부산에서 중,고등시절에 같이 활동했던 분들이 현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 같은 분들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의료봉사, 선교 활동을 하고 있고 그외 여러 신앙모임을 지도하고 있는데 진료와 이런 범인들이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활동들을 병행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들을 쪼개고 또 쪼개써야 하기에 가족들과의 시간도 희생해야 함을 어렵지않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성혜양의 책에서도 어릴때 그런 부모님을 잘 이해 못했을때의 서운함, 커서 이해하게 되었을때의 감사함 등이 나와있다. 후에 들으니 벽면의 편지들도 그들을 늘 잊지않고 기억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아무튼 감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이야기 꺼내기 부끄러울 지경의 나로서는 그 분의 사역과 헌신의 정도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지만 그 이후로 '동생처럼 아껴주시는 그 분의 배려'를 좀 '부담스러워' 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매개로 만남이 이어지게 되었는데 요즘은 쑥스러움이 좀 사라지고 흉금도 털어 놓을 수 있는 '형님-동생'으로서 지내고 있다. (물론 나는 그분을 멘토로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그분이 부족한 나를 전적으로 동생 대우를 해주신다)

2010년경인가 집사람과 선생님 내외간 점심식사를 한번 한적이 있는데 그때 '미국에서 학교다니고 있는 딸이 있는데 '미스코리아'에 나가려 한다. 미.코 가 되어 미의 대사로 선한 일들을 감당하려 한단다. 기도를 부탁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순간 이원장님의 얼굴과 사모님의 얼굴을 다시한번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이원장님을 닮았으면 좀 어려울 것 같고 사모님을 닮았으면 미.코.에 도전해 볼 수 있겠구나  하며 속으로 웃고 넘어 간적이 있었다.

그러다 이후 본격적으로 기도와 함께 준비한다는 소식과 함께 기도 부탁에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바쁘다는 핑게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지는 못했는데  미.코. 진에 당선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야 이거 놀라운 일이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현장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 이후 이성혜양의 어머니를 교회에서 뵐 때마다 근황을 듣게 되었는데 한번은 ' 미코 당선 상금 천만원인가를 아프리카에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모기장 보내기 운동에 내고 모금을 하고 있는데 모금액이 많이 늘었다'. 이번에는 '전달하러 직접 같이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심 '그곳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닐텐데 가서 고생하고 미스유니버스에 나가는데 차질이라도 생기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곳에 가서 내색하러 갔을때에 볼 수있는 몸사림, 드러냄 없이 어릴때 부터 청년사역의 모임속에 자랄 때 처럼 누추함과 더러움에 개의치 않고 더 열심히 헌신하고 돌아오게 되었고 그곳 아프리카를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는 현지인들로 구성된 젊은 청년사역자들과의 뜨거운 만남과 기도를 통해 우정을 나누고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미.코.들에 대한 그녀에게 가졌던 편견들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가 쓴 자서전인 "꽃은 과정으로 피어난다" 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초등 6학년때 유학시절 - 중고등시절의 방황 - 미국에서의 의대진학 후 아이비리그 도전을 위한 그녀의 노력들, 2 시간 이상 안 자면서 새벽기도에 안빠지고 기도하면서 이를 악물었던 시간들 - 이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이야기, 세계 3대의 실력을 인정받는다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학교에서의 노력들을 읽어보면서 그녀의 그 내면의 성숙함에 놀랐고 '정말  이 친구 하나님이 크게 쓰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온갖 무력과 공식, 비공식적인 압박으로 해결 안되는 세상의 분쟁과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면에서는 유엔사무총장이 가서도 해결 안되는 사안도 비공식적인 美 의 사절이 자신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들의 굳건히 닫힌 마음문도 열릴 수도 있다.

미의 기준도 점차 바뀔고 있음을 본다. 얼굴, 몸매의 아름다움 만이 아닌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려는 노력들을 미.코 과정에서도 책을 통해 엿 볼 수 있었다.

이런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은' 내면을 소유한 훌륭한 친구가 미스 유니버스에 당선되어 제인구달 여사((Dame Jane Goodall)와 같이, 오드리햅번(Audrey Hepburn) 같이 또는 에스더(Esther) 같이 세계의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이웃을 위해 선한 사명을 수행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많이 기대되고 기대하고 기도한다.

* CTS 7000 미라클 열방을향하여 - 말라리아 모기장 전달 미스코리아 이성혜 (http://www.youtube.com/watch?v=mVPtFgwXsJ0&feature=related)

* [C스토리 특강] 이성혜 (2011 미스코리아 진) : 하나님 두 손에-in his hand (http://www.youtube.com/watch?v=QEYTLFtrXDw)


2012년 10월 19일 금요일

"슈바이처 꿈 위해 '국경없는의사회'에 들어갔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슈바이처 꿈 위해 '국경없는의사회'에 들어갔죠"

  • 이지은 기자
  • 입력 : 2012.10.20 03:07 | 수정 : 2012.10.20 10:41

    지난 2월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 개설 후 활동 마치고 귀국한 첫 의료인 정상훈씨
    아르메니아에서 의료봉사 "가족 못 보는 생활 고돼도 생명 구할 수 있어 행복"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한 25%의 환자들을 대할 때면 무력감도 밀려왔지만, 나머지 75%의 환자들이 건강을 되찾은 것을 보람이자 희망으로 삼고 이겨냈어요."

    국경없는의사회 현장활동가 정상훈(41·의사)씨는 작년 11월부터 올해 9월까지 열 달간 아르메니아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귀국했다.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가 지난 2월 서울에 개설된 이후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첫 의료인이다. 현재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는 한국 의료인은 18명이다. 전 세계 활동가 3만6000명 중 아주 적은 숫자다.

    정상훈씨는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고등학생 때부터 자연스럽게 '한국의 슈바이처'를 꿈꿔왔다고 했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해 안정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반대의 길을 택했다. 전공의 과정을 마친 2003년부터 국내 의료봉사단체 '행동하는 의사회' 대표로 활동했다. 4년 동안 쪽방촌 노인과 중증 장애인, 노숙자들을 직접 찾아가 치료하는 일에 몸담았다.
    해외 봉사를 마치고 지난 9월 귀국한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의사 정상훈씨. 오른쪽 사진은 그가 작년 12월 아르메니아 북부 진료소에서 결핵 환자를 진찰 중인 모습이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정씨는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가 아직 문을 열기 전인 작년 11월 국경없는의사회 일본사무소를 찾았다. 빈국(貧國)에서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료하고 싶은 오랜 꿈 때문이었다. 정씨가 맡은 첫 임무는 '아르메니아 다제내성 결핵 치료'였다. 결핵은 열악한 환경 및 영양 상태가 원인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가난의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다제내성 결핵'은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결핵으로, 일반 결핵보다 치료가 어렵고 완치까지 2년이 걸린다. 25%의 환자는 치료에 실패한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적으로 결핵 유병률이 높은 곳이다. 주민 대부분은 러시아로 건너가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이주노동자다. 정씨는 매일 밤늦게까지 구멍가게만 한 병원에서 주민들을 치료했다.

    "매일 20알도 넘게 약을 먹고 주사를 맞는 힘든 치료를 받으면서도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던 환자들 표정이 생생해요.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현장에서 활동할 거예요. 다음번엔 에이즈 문제가 큰 아프리카로 가려 해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에게 지급되는 월급은 860유로. 100만원 남짓한 돈이다.

    "넉넉한 생활은 아니지만 제 아들(10)은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럽대요. 열악한 시설에서 환자를 수백 명씩 보며 가족과 몇 년씩 떨어져 사는 생활은 고되지만, 생명을 구할 수 있기에 견딜만한 무게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내 딸, 아빠가…" 딸 상견례 앞두고 실종된 시각장애 남성, 발견된 곳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사랑하는 내 딸, 아빠가…" 딸 상견례 앞두고 실종된 시각장애 남성, 발견된 곳은

  • 부산=권경훈 기자
  • 입력 : 2012.10.20 03:06 | 수정 : 2012.10.20 06:23
    시각장애 4급인 50대 남성이 딸의 결혼 상견례를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 "더 살아봤자 너희에게 부담만 될 것 같다"고 썼다. 이 남성의 아들도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3일 오후 5시 36분쯤 부산 강서구 대저동 낙동강 대저생태공원 습지에서 김모(57)씨가 물에 빠져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시각장애 4급으로 녹내장을 앓고 있었다.

    숨진 김씨는 추석 전날인 지난달 29일 아들(33)과 딸(30)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간 뒤 2주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시신이 발견된 후 김씨의 집 책상 서랍에서 아들과 결혼을 앞둔 딸에게 남긴 유서 1통씩이 발견됐다. 서랍 안에는 자신의 지갑과 휴대전화가 있었고, 영정 사진까지 준비돼 있었다.

    그가 남긴 유서 첫 문장은 각각 '사랑하는 아들에게'와 '사랑하는 딸에게'로 시작됐다. 그는 유서에 "더 살아봤자 너희에게 부담만 될 것 같다, 장님이 되고 뇌경색이 재발해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자살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아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썼다. 또 "장례비도 걱정이니 시체를 못 찾도록 생을 마감하겠다, 저승에서라도 너희를 돕겠다"고 글을 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장애가 있던 눈 상태가 악화되고 지난해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2개월간 병원치료를 받았다. 건강 문제로 생계를 지탱하던 회사 경비원 일까지 그만뒀다. 김씨는 이전에 가구 만드는 일을 하다가 여의치 않아 서울 등지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20여년 전 사별한 부인을 대신해 두 자녀를 혼자 키워왔다고 경찰은 말했다. 특히 김씨는 추석을 지낸 후 하게 될 딸의 결혼 상견례를 앞두고 자신이 결혼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김씨는 아들이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과 병든 자신 때문에 헤어진 것으로 보고 무척 마음 아파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들과 함께 은행에서 4000만원을 대출해 마련한 전세금으로 집을 얻은 것을 비롯해 뇌경색 치료비 등으로 1억원가량의 빚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어려운 가정 형편과 병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김씨의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귀농으로 밝힌 희망의 등불 - 시니어조선

    귀농으로 밝힌 희망의 등불

    • 입력 : 2012.10.17 10:49

    성주 참외로 제2의 성공인생을 이룬 경북 성주 정찬보 씨(45)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은 마을 어귀부터 달콤한 참외 향기로 가득하다. 성주군을 대표하는 특산물인 참외 하우스가 드넓게 펼쳐진 까닭이다. 도시에서 맛본 성공과 실패를 뒤로하고 고향에 터를 잡은 지 어느덧 9년 차에 접어든 정찬보 씨. 귀농으로 인생의 후반부를 멋지게 달려 나가는 그는 ‘좋은 농부’가 되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2012년의 봄을 맞이하고 있다.
    귀농을 결심하기 위해 치른 수고비
    정찬보 씨가 귀농을 결심하기까지는 다양한 성공과 실패가 뒤따랐다. 부침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냐마는 IMF의 그늘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1999년, 6년 동안 근무했던 대구 소재 백화점 역시 명예퇴직 바람이 한창이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할 수 없이 일터를 떠나는 모습을 보자 불현듯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내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대형할인마트을 차렸습니다. 당시 대형할인마트가 붐을 이룰 때라 처음엔 장사가 잘됐죠. 그런데 해가 갈수록 사정이 나빠지더군요. 의성·합천·대구를 거치면서 세 곳에 매장을 꾸려봤지만, 위치 및 경쟁 매장의 할인공세 그리고 유통 구조상의 문제로 제게 남은 돈은 고작 200만 원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을 담보로 대출받아 올인했던 사업이 하락세를 걷자 정씨는 결국 도시 생활을 정리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의 농사를 돕던 기억을 떠올리며, 땀과 노력의 대가를 배신하지 않는 것은 땅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캠퍼스 커플로 만난 아내 또한 방학이면 성주를 찾아 참외 농사를 도운 경험이 있었던터라 그의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인생의 재기를 꿈꾸며 찾은 시골은 그에게 희망을 되찾아 주었다. 달콤한 성공도 맛 봤지만 쓰디쓴 실패의 기억이 더 컸던 도시의 삶 덕분에 귀농하게 됐고 다시 한 번 재기할 기회를 얻었다는 정찬보 씨의 생생한 경험담을 듣노라면 그가 겪은 인생의 쓴맛은 귀농을 위한 수고비라 여겨도 무방할 듯싶다.

    귀농을 통해 평생직장을 얻으려면 초기자금은 기본
    20대 초반까지 직접 도왔던 참외 농사, 돌아가신 부모님의 향수가 배어 있는 집, 형님께서 빌려준 땅,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주민. 고향으로 돌아온 정씨는 그야말로 귀농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보다 참외에 대해 잘 안다는 자부심 또한 귀농에 자신감을 더했다. 그러나 피부로 맞닥뜨린 현실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즘 귀농을 꿈꾸시는 분들은 자료수집부터 품목을 결정하기까지 꼼꼼하게 준비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생계를 위해 무작정 내려온 경우였고, 무엇보다 참외 농사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하우스의 기본은 철근, 비닐, 덮개입니다. 당시 제 귀농자금의 전부인 200만 원은 철근값도 안 나왔어요. 그래서 알음알음 얻어온 중고 철근으로 하우스를 짓고 외상으로 빌린 덮개로 농작물을 덮었습니다. 하우스 작물은 보온이 생명이라 덮개가 굉장히 중요한데 아무래도 중고 덮개는 보온력이 떨어지니 타 농가와의 매출이 3배가량 낮았습니다. 적은 초기자금으로 의외의 복병을 만난 거죠.”

    가진 게 없으니 투자가 어려워 귀농한 지 3년이 되도록 이익을 얻기가 어려웠다는 게 정 씨의 설명. 트랙터며 수확에 꼭 필요한 장비를 살 수 없어 동네 형님 일을 도와주고 품앗이 값으로 장비를 빌려 쓰는 등 동분서주하다 보니 차차 수익이 늘었다. 귀농 4년째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설비를 갖출 수 있었던 정 씨의 참외하우스는 서서히 저력을 보여줬다. 이제는 겨울엔 기름 걱정 안 하고 아이들 학비 걱정 안 할 수 있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게 정 씨의 자랑 아닌 자랑이다.

    “귀농을 꿈꾸시는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농업 초기자금은 창업자금과 맞먹습니다. 아무런 시설 없이 노지에 농사지을 게 아니라면 말이죠. 최근 농자재며 제반 사항 관련 값이 오르는 추세인데요. 요즘 시세로 치면 7천~8천만 원정도는 준비하시는 게 좋습니다. 하우스 농사는 시설이 곧 수익과 직결된다고 해도 무방하니 특히 신경 써야 할 부분입니다. 저부터도 중고 시설로 참외를 재배할 때 보다 새 시설 짓고 장비 들여 재배한 참외가 훨씬 수확이 좋았거든요. 또한, 설비를 기계화하면 일손이 덜 들어 인건비가 적게 나갑니다. 덕분에 작년에는 귀농 이후 처음으로 연 수익이 1억을 넘겼습니다. 귀농 초기 투자만 확실히 한다면 연 수익 억대는 기본인 셈입니다.”

    이제는 농업도 브랜드 마케팅 시대
    “‘도시에서 할 일 없으면 시골 내려가 농사나 짓지 뭐’라는 우스갯소리는 통하지 않을 정도로 시대가 변했습니다. 농사도 사업이라는 마인드로 전문성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농부들도 무조건 생산만 할 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볼 시점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판매관리학을 전공해서인지 몰라도 ‘브랜드 마케팅’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삼한우’의 경우처럼 참외도 브랜드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정 씨가 구상한 마케팅은 ‘좋은 농부’라는 자부심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물론 참외 농사를 짓는 친구 세 명과 함께 만든 작목반을 통해 ‘좋은 농부들’이라는 브랜드 개발도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용암면농협공판장을 통한 경매 이외에도 인터넷 공동구매 판로를 개척한 상태다. 그의 브랜드 마케팅 최종 목표는 소비자와의 직거래다. 곧 도시의 부녀회와 연계해 성사될 예정이며 이는 할인마트 경영 이력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유통에 대한 자신감이 투영된 결과다.

    “생산자와 판매자 사이의 중간 유통 단계를 줄이면 가격이 30% 절약됩니다. 생산자와 판매자 모두에게 이로운 과정이죠. 더구나 직거래의 특성상 당일 생산된 참외를 당일 배송할수 있어 보다 신선한 농작물을 선물할 수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좋은 농부들’이라는 브랜드의 참외는 무조건 믿고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게 남은 숙제입니다.”

    최근 성주군을 찾는 젊은 귀농인들이 증가한다는 정 씨의 전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원인은 안정된 참외값에 있다. 딸기 철이 끝난 후 약 3~4개월 가량은 참외를 대체할 과일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농부들’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브랜드 마케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정찬보 씨의 미래는 참외 전성시대를 맞아 탄탄대로를 준비하고 있다.

    귀농으로 얻은 희망행진은 계속된다
    참외 농사는 의외로 섬세한 작업이 많아 여성의 힘이 절대적이다. 한여름이면 48℃에 이르는 하우스 작업은 피부의 수분을 앗아가기 충분한 조건. 아내의 상한 피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는 그는 산 전체를 펜션화해 야외캠핑장도 만들고 연못을 꾸려 낚시도 할 수 있는 전천후 체험장을 구상하고 있다.

    “요즘은 핵가족 시대잖아요. 귀농한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농사는 가족사업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소한 품이 많이 들어 혼자 감당하기는 벅차거든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귀농 생활을 통해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야외캠핑장 겸 펜션을 만드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먼 미래의 꿈이지만, 귀농 9년 만에 안정적인 정착을 이룬 만큼 곧 현실로 다가오리라 믿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참외로 당당히 재기에 성공한 그는 만족 대신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귀농을 통해 맛본 행복은 누가 뭐래도 화목한 가정이기에, 직접 조성한 펜션으로 도시의 가족에게도 행복을 전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비롯된 단꿈이다. 도시의 각박한 일상 대신 농촌의 여유로운 마음을 품은 정찬보 씨와 그의 가족이 이룬 희망행진은 앞으로도 힘찬 전진을 계속할 것이다.

    2012년 9월 15일 토요일

    "TED Translations Talks in 한국어" 로 영어공부하기


    혹 모르시는 분을 위해 내가 TED를 즐기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고자 한다

    TED가 원지 혹 모르신다면 (헉!!)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새로운 사고의 세계가 열리는 감동을 느끼실것입니다)

    저는 Translations Talks in 한국어 (http://www.ted.com/translate/languages/ko) 사이트를 통해

    자막을 영어로, 한국어로 또는 무자막으로 번갈아가며 TED 강연을 이해하고 청취하고 있다.

    우선 아래 사이트로 가면 다음 화면이 나오고




    다음 원하는 강연을 선택하면 (저는 문어 강의로 재미있는 Mike deGruy 의 강의를 검색했다)




    화면으로 마우스 커서를 올리면 21 language off라는 부위가 나오는데

    그곳을 클릭하여 English, Korean등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화면우측아래 show transcript 박스를 클릭하면 번역된 script가 아래처럼 나타난다


    그러면 그것릏 보면서 참고할 수도 있고 커서로 그래그 해서 저장하기 하여 문서로 저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만든 script 파일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또한 화면하단에 downlord를 클릭하면 동영상, mp3 파일을 저장할 수 있고 내 폰등에서

    시청, 청취 할 수  있다.

    (이내용은 제가 미드동-네이버카페에 올린글을 재편집하여 올렸습니다)

    2012년 9월 14일 금요일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신혼집 전·월세 싸게받는 집주인, 美·日처럼 세금 깎아주자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신혼집 전·월세 싸게받는 집주인, 美·日처럼 세금 깎아주자

  • 전문가 14명이 제시한 해법
  • 런던은 7년치, 뉴욕은 8년치 소득을 모으면 집 한 채 사는데, 한국 수도권은 9년치를 모아도 좀 모자란다. 더구나 다른 나라엔 없는 '전세' 제도 때문에 목돈 마련 부담이 크다. 제일 힘든 경우는 부모는 지방에 살고 자식은 수도권에 취직한 가족들이다.
    "그래도 출구는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부동산·은퇴·가족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이 네 차례 모여 구체적인 해법(解法)을 내놨다.

    ①보증금 5000·월세 50만원짜리 신혼집 많이 생기게

    이상영 명지대 교수는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을 내고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안정되게 살 수 있는 주택이 많아지면 그게 바로 주택 문제 해결"이라면서 "민간 임대시장을 활성화하자"고 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집주인이 2년 계약한 뒤 전셋값을 올릴 수 있다. 전셋값 안 올리고 오래 살게 해주는 집주인에게 세금을 깎아주거나, 낡은 건물 리모델링 비용을 저리(低利)로 빌려주는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있다. 안명숙 우리은행 부동산 팀장은 "미국과 일본은 이미 이런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주택을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②재개발 진행중인 지역, 방 두 개짜리 최대한 짓도록

    김희선 알투코리아 전무는 "작은 집이 사라진 게 제일 큰 문제"라고 했다. 2000년대 중대형 주택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해서 벌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평당 임대료만 따지면 대형 아파트보다 소형 아파트가 비싼 상황까지 벌어졌다.
    취재팀이 서울시 통계와 '부동산 114' 통계를 분석한 결과,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140~163㎡·42~49평) 월세는 평당 12만~19만원, 관악구 A 아파트(32㎡·10평)는 16만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서울 시내에 새로 들어설 아파트도 대부분 중대형이라는 점이다. 2000년 이후 주택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된 지역을 보면, 과거에는 10채 중 7채가 작은 집(60㎡·18평 이하)이었는데 재개발이 끝나면 10채 중 4채로 줄어들 전망이다. 변창흠 세종대 교수는 "이걸 방치하면 중대형은 수요도 없는데 자꾸 늘어 값이 더 떨어지고 소형은 집이 모자라 계속 오르는 현상이 더 심해질 것"이라며 "이러면 부모·자식 모두 괴로운 만큼, 현재 재개발이 진행 중인 지역은 이미 나온 사업계획을 수정해서라도 최대한 소형 주택을 많이 지어야 한다"고 했다.

    ③소형주택 주차장 지자체가 해결… 건설 단가 낮추자

    지금은 건설 업체가 작은 집을 많이 짓는 것보다 큰집을 적게 짓는 게 이익이 많다. 세대 수에 따라 건설 기준을 맞춰야하기 때문이다.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아파트 건설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저렴한 아파트를 많이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성수 주거복지연대 전문위원은 "일본에 가보면 우리처럼 아파트마다 주차장이 다 있거나 벽이 두껍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가 자칫 주민들이 '저질(低質)' 주택에 사느라 고생하게 되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주차장처럼 주민들이 함께 쓰는 시설을 지자체가 지으면 저렴한 소형 아파트를 더 공급할 수 있다"고 했다.

    ④대형 신도시보다 자투리 땅에 작은 집 짓는 시대로

    고성수 건국대 교수는 "정부가 신도시 지어 주택문제 해결하는 시대는 갔다"고 했다. 돈만 들고 효과는 적은 데다 남은 땅도 거의 없다. 또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머나먼 신도시 넓은 집에 사느니 도심 작은 집에서 여유 시간을 갖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 아이 키우려면 신혼부부 어느 한쪽 직장 근처나 양가 부모 사는 곳 근처에 살아야 할 필요도 있다. 김덕례 한국주택금융공사 주택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지자체가 각자 자기 동네에 맞는 모델을 만들어 낡은 집·구역을 정비할 때 다양한 형태로 소형 주택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⑤집으로 재테크도 옛말… 꼭 사야한다는 강박 버려야

    우리보다 저출산·고령화가 빨리 온 일본의 경우, 60대 부부가 각자 80~90대 부모로부터 팔리지도 않는 집을 한 채씩 물려받아 자기 집까지 두 채, 세 채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강민석 KB경영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우리도 앞으로 집값 올라서 재테크 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하미정 삼성증권 은퇴설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집을 '재산'이 아니라 '거처'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조주현 건국대 교수는 "정부도 시장도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저소득층은 비좁은 셋집에 살고 고소득층은 널찍한 자택에 산다고 생각한다. 외국은 고급 주택부터 허름한 주택까지 다양한 수준과 형태의 공공임대주택과 민간임대주택이 시장에 나와 있다. 개개인이 편의에 따라 집을 살지, 임대할지 선택하는 구조다. 월세 산다고 깔보지 않는 풍토다.

  •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신혼집 전·월세 싸게받는 집주인, 美·日처럼 세금 깎아주자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경청할 내용인것 같다

    2012년 9월 3일 월요일

    [월요인터뷰] '독도는 한국땅' 진실 찾아 귀화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독도는 한국땅` 진실 찾아 귀화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조용한 외교는 끝났다…명확한 근거로 일본을 교육시키자"
    日 노다 총리 3가지 논거 대지만 최근 발견된 사료로 충분히 반박 가능
    日 국민에 알려주면 대부분 수긍할 것
    韓·日 선거 앞두고 타협 불가능해…끌려다니지 말고 국제홍보 강화해야
    日 은폐 알고 진실 택해 한국에 귀화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의 억지 주장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증거와 논리를 적극적으로 내세워야 국제적으로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일본은 보수화·우경화돼 가고 있어요. 그 선봉에 서 있는 일부 정치인들은 그것을 이용해 인기를 끌고 있고요. 한국은 가만히 있기보다 그런 사안이 터질 때마다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야 합니다. 일본 국민들은 한국 국민이 침묵하고 있으면 ‘인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 겸 독도종합연구소장(56)에게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일본 국적을 버리고 한국으로 귀화한 그에게 일본인의 ‘심중’을 전해 듣고 싶어서가 아니다.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妄言)’에 대해 누구보다 분노하고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을 바로잡는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 있는 연구실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를 인터뷰했다. 그는 독도를 둘러싼 ‘저 일본인들’의 억지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우리 한국인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 냉철하게 얘기했다.
    ▷일본의 억지주장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8년 전부터 방위백서에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적어놓고 2008년 이후 역사·지리 등 사회과 교과서에도 같은 내용을 담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때마다 강력하게 대응했습니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다는 건 사실 틀린 얘기입니다. ”
    ▷한국 정부의 대응에 일관성이 있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어요.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아계실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죠. 그러자 일본 정부가 엉뚱하게 독도 문제를 언급한 겁니다. 일종의 맞불작전이었어요. 한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해결 요구에 대해 성의 있는 행동을 보이지 않고, 외교 문서에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내용을 삭제하라는 무례한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정부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강행한 것입니다. ”
    ▷일본 정부의 강경 대응이 ‘국내 정치용’ 도발이란 얘기도 있는데요.
    “그것은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오는 11월 중의원 선거를, 한국은 12월 대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
    ▷일본은 왜 억지 주장을 계속하죠.

    “사실 한국인들은 일본이 무슨 논리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지 잘 몰라요. 일본의 주장을 정확히 알아야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노다 총리는 세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첫 번째가 17세기 중반 에도막부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시킨 역사적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는 겁니다. 1620년대부터 일본 어민들이 에도막부로부터 울릉도에 건너갈 수 있는 도해(渡海) 면허를 받아 조업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905년 일본은 법률을 통해 독도를 정식으로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이후 실질적으로 지배해 오던 독도를 일본 영토로 재확인했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2차세계대전 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를 일본이 포기해야 할 한국 영토로 명기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그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첫 번째와 관련해 17세기 후반 ‘돗토리본’의 문서를 보면, 에도막부는 일본인의 울릉도·독도 도해금지령을 내리면서 두 섬은 조선의 부속도서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이런 사실은 ‘1877년 태정관(일본 내각의 전신) 지령’에서도 확인됩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에 ‘울릉도와 독도(外一島)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지시했어요. 두 번째인 1905년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했다는 주장에 반박하려면 그 이전에 대한제국이 확실하게 독도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하죠. 오랫동안 나오지 않다가 최근 2년 새 그 증거가 다수 나왔어요. 1897년부터 대한제국은 울릉도·독도에서 전복 등 어패류를 채취한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매겼어요. 세금 징수는 국제법상 땅을 실효 지배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17세기 중반에 독도에 대한 실효 지배권을 확립했다는 바보 같은 주장을 하고 있어요. 반박도 쉽게 할 수 있는데 한국 정부가 안 하는 게 문제입니다.”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런 주장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노다 총리는 자신들의 주장을 세계에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어요. 반면 한국 정부가 이에 대해 공식적인 반박을 한 적이 있나요. 한국 정부의 유일한 논거는 독도는 역사·지리·국제법적으로 한국의 고유 영토이다, 이것뿐이에요. 1945년 이후 한국 소유로 돌아왔고, 지금까지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우리 주장을 해야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본이 ‘한국 정부는 사실 대답할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ICJ(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120%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은 억지 주장을 계속할텐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일본의 논리를 확실히 극복하고, 일본 국민들이 이를 알 수 있게 홍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홍보를 할 필요가 없다는 우리 측 주장도 많아요. 일본의 ‘유치한’ 거짓말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지요. 해명하고 반박하다 보면 오히려 일본 주장에 말려들어갈 것이란 우려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나 국민들은 ‘독도는 원래 우리 땅인데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하냐’며 공부할 생각을 안 해요. 이러니 세계적으로도 일본 주장만 돌고 있지요. 미국도 독도를 한국 땅으로 보다가 2008년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했지요.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다른 나라들이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일본의 주장이 애초에 잘못돼 있으니 일본 정부와 국민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조용한 외교’는 끝났습니다. 앞으론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명확한 근거를 세계적으로 홍보해야 합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설명해주면 수긍할까요.

    “일부는 감정적으로 반발하겠죠. 하지만 경험적으로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입니다.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에 대한 자료를 70%만 공개합니다. 나머지 30%를 밝힌다면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귀화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일본이 독도 관련 사료를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귀화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학자라면 무엇보다 진실을 알리는 게 중요한 임무이니까요. 일본 내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어요.”
    ▷귀화한 일본인으로서 한국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진 않나요.

    “아니오. 외국 경험이 많은 교수 사회에서 지내다 보니 특별히 외롭거나 힘들진 않습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1956년 일본 도쿄 출신이다. 도쿄대 3학년 재학 중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한·일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198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편입, 2000년 고려대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분석: 조선과 만주, 대만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일 관계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2008년부터는 독도종합연구소장도 맡고 있다. ‘대한민국 독도’ ‘일본 고지도에도 독도 없다’ 등 독도가 한국 땅임을 밝히는 저서를 여럿 썼다. 2003년 한국인으로 귀화했으며, 1989년 한국인과 결혼해 딸·아들 3남매를 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귀화 결심을 굳히게 된 주요한 동기였다”고 말한다. 일본을 방문할 때는 이대호(오릭스 버펄로스)를 응원하기 위해 야구장을 찾기도 한다고 했다.

    [월요인터뷰] '독도는 한국땅' 진실 찾아 귀화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2012년 8월 31일 금요일

    13세에 끌려가 마취없이 임신중절까지…日에 짓밟힌 소녀의 꿈

     

    13세에 끌려가 마취없이 임신중절까지…日에 짓밟힌 소녀의 꿈
    한국… 중국… 동남아… 日, 군홧발 닿는 곳마다 여성 짓밟았다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 위안소 웹지도’로 본 日帝 반인도적 국제범죄 실태 동아일보 | 입력 2012.08.31 03:18 | 수정 2012.08.31 17:20
    • "연극단원을 모집한다기에 갔다가 보르네오 섬으로 끌려갔다. 48명의 소녀 중 절반은 극장이나 식당으로,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교외의 어떤 집으로 갔다. 거기서 신체검사를 하던 군의관에게 먼저 성폭행을 당했다. 그때 나이 13세. '모모에'라는 이름으로 위안소의 11호실에 넣어졌고, 일본 패전까지 3년 남짓 하루에 10∼15명의 일본군에게 계속 성폭행을 당했다. 15세 때는 임신 5개월 상태에서 마취도 없이 중절수술을 당했다."(인도네시아 마르디엠 씨)

    일본 정치인들이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많은 역사자료와 증언들은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태평양지역 여성을 성폭행하고 위안부로 삼은 국제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침공하는 국가마다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자료는 피해국뿐 아니라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에 의해서도 꾸준히 축적돼 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은 일본의 여성인권단체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과 협약을 맺고 WAM이 수집한 약 3000건의 문건과 서적, 증언록 등을 바탕으로 2010년 8월 '일본군 위안소 웹 지도'를 작성했다. WAM은 일본 여성운동가 고 마쓰이 야요리(松井耶依)의 뜻을 이어받아 2005년 8월 도쿄에서 발족한 단체다.
    위안소 웹 지도에 따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국가는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미국 한국 등 22개국에 이른다. 지도에는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1245건, 일본 군인들의 직·간접 증언 1231건, 공문서 702건, 목격담 등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
    위안부와 위안소의 정확한 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아 최대 피해국인 한국은 일제 36년 동안 약 20만 명이 위안부로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태지역 각국 위안부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은 한국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비슷하다. 일자리를 주겠다고 속이거나 강제로 끌고 갔다. 10대 소녀이든 신혼의 새댁이든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구타와 성병, 임신 등으로 고통을 겪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을 당했다. 일본군은 중국에서 대규모 부대에 설치하는 위안소와 별개로 소규모 분대가 중국 여성을 납치 및 감금해 성폭행하는 이른바 '강간소'도 운영했다. 런민(人民)일보는 지난달 중국 내 위안부가 약 20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위안소 웹 지도 제작 업무를 맡았던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위안소 웹 지도를 보면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및 태평양의 20여 개국이 피해를 본 국제범죄라는 것이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최근에 있었던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비뚤어진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중국 홍콩 언론도 비판에 나섰다. 홍콩 원후이(文匯)보는 30일 칼럼을 통해 "일본이 정상 국가가 되고 싶으면 반드시 정상적인 언행을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략자라는 추악한 이미지를 씻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앞서 29일 관영 신화(新華)통신도 "일본이 한국인 위안부를 죽은 후까지 욕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곳곳에 널려 있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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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8월 10일 금요일

    "행복하단 사람 없는 한국… 우리 더 나눕시다"

     

    "행복하단 사람 없는 한국… 우리 더 나눕시다"

  • 이태훈 기자

    입력 : 2012.08.11 03:12

    [만해실천대상 두봉 주교]
    욕심내지 않는 삶이 행복 - 밭농사 짓고는 "맘껏 따가라" "한국, 잘사는 나라 됐지만
    요즘 필요한 건 가난의 영성"
    평생 한국 농민들 위한 삶 - 군사정권에 폭행당한 농민 전국에 알리다 추방당할 뻔
    "두려운 건 폭력 아닌 양심"

    "상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받을 공적도 없는데, 고맙고 감사할 뿐이지요. 실천 부문 상이라는데, 아마 농사지으며 농민들과 함께 살아서 주시는 건가 봐요. 하하하."
    오는 12일 만해실천대상을 받는 두봉(杜峰·83·프랑스명 르네 뒤퐁) 주교는 축하 인사에 "스님들하고도 친하게 지내고, 절에 가면 합장 인사도 곧잘 하니 좋게 보신 것 같다"며 마냥 쑥스러워했다. 두봉 주교는 스물다섯 청년 사제로서 6·25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에 온 뒤, 평생을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해왔다. 1969년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돼 주교 서품을 받은 그에겐 주교의 '특권'인 문장(紋章)과 사목표어가 없다. 처음부터 "시골 신부가 뭐 그런 게 필요하냐"며 사양했기 때문이다. 교구장 재임 중에도 "한국의 교구장은 한국인 사제가 해야 한다"고 교황청에 네 차례 탄원했다. 지금은 경북 의성의 농촌 마을에서 손수 지은 농사로 밥을 지어 먹고살며, 늘 "갖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소중하다"는 자신의 말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두봉 주교를 10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만났다.
    5년 만에 프랑스 고향 마을에 갔다가 이날 아침 귀국한 두봉 주교에게 '오랜만의 고향 나들이는 어떠셨나' 물었더니 언제나처럼 얼굴 한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젠 프랑스가 외국 같아요. 대화도 낯설고 길도 잘 모르겠고…. 내 고향은 대한민국 안동인가 봐요, 하하하."
    천주교 농민 사목의 대부(代父)
    두봉 주교는 프랑스 오를레앙의 전형적 농촌 가정 출신이다. 지금도 직업 농사꾼 못지않은 농사 솜씨는 어려서 익힌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그는 한국에 온 뒤 대전 본당사목을 거쳐 1969년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될 때 초대교구장이 됐고, 1990년 은퇴했다.
    안동에서 그는 본당은 물론 공소까지 찾아다니며 교구민들의 생활을 챙겼다. 지역민들이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문화회관을, 병들고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병원을 세웠고,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재활시설 건립에도 온갖 정성을 다했다. 상주에 상지여중·고를 설립하고, 안동에 가톨릭상지대학을 세우는 일도 주도했다. "제가 아니라 교회가 한 일이에요. 소외된 사람들을 먼저 돌보는 것이 교회의 원래 역할이니까요."

    올해 만해실천대상을 받는 프랑스 출신 두봉 주교. 프랑스에서 25년, 한국에서 58년을 산 그는 “전쟁 후 잿더미였던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며 “갖는 것보다 나누는 것을 우선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무엇보다 그를 '한국 천주교 농민 사목의 대부'로 만든 것은 1979년 '안동농민회 사건'이었다. 군청에서 나눠준 불량 감자씨 때문에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보상을 요구했는데, 기관원들이 농민 대표를 납치해 초주검이 되도록 폭행했다. 안동교구와 정의구현사제단이 이를 전국에 폭로했고,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은 두봉 주교에게 사실상의 추방령인 출국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교황청이 강력 반발하고 국제사회 여론까지 악화되자 추방령도 철회됐다. 이 사건은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과 함께 시대적 약자의 편에 섰던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제가 아니라 김수환 추기경님이 훌륭하게 대처하신 거예요. 두려운 건 폭력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저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내 할 일을 다하자, 떳떳하자고 생각했을 뿐. 교회가 약자를 돌보지 못하는 것은 소금이 짠맛을 잃고 누룩이 발효를 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행복은 소유가 아닌 나눔"
    두봉 주교는 요즘 유기농으로 양파, 상추, 배추, 당근, 감자 등 밭농사를 짓는다. 그는 "올해는 특히 감자 농사가 잘됐다. 나 혼자 먹는 건 아주 조금이면 되니까, 모두 이웃들에게 '필요하면 언제든 따가라'고 한다"고 했다. "얼마 안 되지만 가진 걸 나누면 서로가 좋아요. 만나고 싶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고, 더 나누고 싶고. 그렇게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지. 돈과 물질은 많이 가져봐야 더 많이 갖고 싶을 뿐 행복해지지 않지요."
    두봉 주교는 그런 면에서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가난의 영성'"이라고도 했다. "제가 처음 올 때를 생각하면, 한국은 물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하고 풍요로워졌어요. 그런데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람은 오히려 만나기 어려워졌습니다. 정치인들은 '무슨 혜택을 주겠다' '돈 많이 벌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요. 주님이 날 만드셨으니 필요한 건 다 주님이 주십니다. 갖는 것보다 나눔이 우선이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어요." 주름진 얼굴에 가득한 노(老)주교의 미소가 인제 보니 안동의 하회탈을 닮았다.
    올해 만해대상 시상식은 12일 오후 2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다.

  • "행복하단 사람 없는 한국… 우리 더 나눕시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가난의 영성'" 이란 말씀에 감동을 느낍니다. 이분 같은 삶을 저도 살수 있을까요?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 세계적 콩쿠르 우승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 세계적 콩쿠르 우승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2.08.11 03:11

    17세 문지영양, 동네 교회·학원 돌며 혼자 연습
    예술中 합격통지서 받았지만 돈 없어 입학 포기
    저소득층 지원 행사서 눈에 띄어 교수 지도 받아

    전남 여수에서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온 문지영(17)양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부모님은 장애 2·3급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서 한 달에 80만원씩 정부 지원을 받는다. 4년 전 서울에 있는 예술중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학교 다니는 데 돈이 많이 들어 입학은 하지 않았다. 대신 지영이는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피아노가 있는 동네 교회와 학원을 돌아다니며 하루 8시간씩 피아노 연습에 몰두했다.
    이런 지영이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8일(현지 시각) 독일에서 열린 제13회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중국의 스타 연주자 랑랑(1994년), 한국의 손열음(2000년)과 김선욱(2004년) 등이 모두 이 대회에서 우승하며 세계적 연주자로 발돋움했다. 지영의 연주를 접한 대회 심사위원단은 "음악적 상상력이 17세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고 평했다. 한국 출신으로는 세 번째 대회 우승이다. 20세 이하 청소년을 대상으로 격년으로 열리는 이 대회에는 올해 세계 40개국의 청소년 연주자 251명이 참가했다.

    지난 8일(현지시각) 독일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피아니스트 문지영(17)양.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음악 콩쿠르 제공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졸라서 여섯 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운 지영이는 열두 살까지 여수의 피아노학원에서 배웠다. 열두 살 때는 선화 음악콩쿠르 대상과 음악춘추 콩쿠르 3위에 입상하며 음악 영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 뒤 2년간 선화음악영재아카데미에 다녔다. 2009년 폴란드에서 열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도 공동 1위에 올랐다. 10일 독일 에틀링겐에서 전화를 받은 문지영양은 "아무리 힘들거나 떨려도 피아노 건반 앞에 앉으면 모든 걸 잊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고교 2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벌써 검정고시로 고교 과정을 마쳤다. 어머니 이복례(49)씨는 "부모로서 뒷받침을 제대로 못 해줘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인데 아이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대견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자칫 ‘가능성 있는 음악 영재’ 정도에서 멈출 뻔했던 지영이가 음악적으로 도약할 기회를 맞은 건 3년 전. 당시 한국메세나협의회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예술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자는 취지로 ‘아트 드림 콩쿠르’를 처음 개최했다. 이 대회 중등부 대상을 받은 지영이는 피아니스트 김대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올해 3월 지영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입학, 이들 사제의 만남은 지속되고 있다. 스승 김 교수는 “연습하기 싫다고 투정 부리기 쉬운 나이인데도, 지영이는 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늘 목말라 있었다. 이 때문에 아이의 피아노에서는 어른스러운 깊이가 묻어났다”고 말했다. 예술 각 분야의 영재를 조기 발견하기 위해 2008년 설립된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수업료 전액을 국비로 지원한다.
    다행히 수업료 걱정은 덜었지만, 지영이는 교통비도 아끼기 위해 고속철도(KTX) 대신 무궁화호를 탔다. 열차를 타면 5~6시간씩 걸리다 보니 여수에는 새벽에 도착하는 날이 많았다. 이틀 연속 서울에서 공부할 때는 찜질방에서 잔 적도 있다. 이런 사연을 접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발전재단 이사회에서는 최근 지영에게 피아노를 사주기로 결정했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문지영은 5000유로(700만원)의 상금과 함께 독일에서 독주회를 열 기회를 얻었다. 말수가 적은 지영이 전화기 너머로 수줍게 말했다. “러시아의 명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를 하는 것이 꿈이에요.”

  •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 세계적 콩쿠르 우승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자신의 운명은 만들어 간다는 것을 입증한 멋있는 학생이다. 노력하는 자가 도약할 수 있는 (그 기회가 아주 적고, 작을 수 있지만) 도약대가 또한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다.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ESSAY]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ESSAY]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 남호탁 / 예일병원 원장·일반외과 전문의

    입력 : 2012.07.12 23:30

    "장애 안고 태어난 1080g 아들… ‘아빠가 곁에 있으니 살아만 다오’
    세 살 되자 ‘청각 이상’ 청천벽력‘듣는다’는 유치원 교사에 힘 얻어
    온 가족 가짜 보청기, 치료 노력 관심과 손길이 장애 극복케 해"

    남호탁 / 예일병원 원장·일반외과 전문의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자궁 속의 아이는 교통사고로 막내딸을 잃은 우리 가족에게 희망이자 위로였다. 모처럼 온 가족이 웃음을 되찾은 벅찬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임신 7개월째 되던 어느 날 그만 아내가 임신중독증에 빠지고 말았다. 의사는 아이의 생명이 위태롭긴 하지만 수술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이 태어났다. 칠삭둥이, 1.08㎏, 미숙아였다.
    지금에야 많이 달라졌지만, 십여년 전만 해도 1080g은 생명을 유지하기에 벅찬 몸무게였다. 아이는 내 팔뚝만큼도 안 됐고, 담당 의사를 만날 때마다 의사의 입에서는 암울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 각오하라, 생명을 유지하더라도 정상아로 자라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아이에게선 호흡 곤란, 기흉, 뇌출혈 등 온갖 합병증이 발생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조차 버거운 나날들이었다. 생명을 부지하더라도 장애아로 자랄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부끄럽지만 그런 섬뜩한 생각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나는 비교적 자유로이 신생아중환자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 내가 수련의 생활을 한 병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하루 사투(死鬪)를 벌이는 아이에게 아비로서 뭐라도 해야겠기에 기도에서 분비물을 뽑아내고 환부를 소독하는 일을 자청했다. 그런데 아이와 접촉하며 관계를 맺어감에 따라 놀랍게도 생각이 바뀌어가는 게 아닌가. 어떤 장애가 생겨도 좋으니 살아만 달라, 아빠가 곁에 있어줄 테니 함께 살자. 나는 그때 아무리 아비라도 친밀한 접촉이 없으면 남과 별반 다를 게 없고 접촉과 관계를 통해 비로소 아비가 되는 것을 깨달았다.
    백일이 다 되어 아이는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해맑게 자랐다. 세 살이 지난 어느 날 아이가 말이 늦는다 싶어 병원을 찾은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이가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말이 늦을지언정 아이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흥얼대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런 아이가 듣지 못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전국에 안 다녀본 병원이 없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하나같이 아이가 듣지 못한다며 인공와우(蝸牛·달팽이관) 수술을 권유했다. 부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상태나 부모의 의견보다 기계가 뽑아낸 데이터를 더 신뢰하는 의사들을 바라보며 섭섭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은 아닐지언정 아이가 듣는다고 확신한 아내와 나는 수술을 거부하고 재활치료에 매달렸다. 보청기를 착용시키고 언어치료와 음악치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아내를 면담한 원장선생님은 "아이를 다른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넌지시 아내의 의중을 떠봤다. 불만을 가진 부모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펄쩍 뛰자 다른 반 선생님들도 아이가 잘 못 들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의견은 달랐다. "아이가 듣는 게 확실한데 무슨 소리냐"고 했다. 나는 그날 멀리서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얼굴을 맞대고 바라보는 것은 한참 다르다는 것을 또 한 번 또렷이 알게 되었다.
    주문한 아이의 보청기를 찾아오는 날 보청기 회사가 있는 대구에 강의하러 간 지인에게 찾아다 줄 것을 부탁했다. 연세 지긋한 그의 어머니가 같이 갔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란다.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그 소리를 전해 듣고 우리 가족은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아이가 거부감을 가질까 싶어 가족 모두가 함께 착용할 목적으로 가짜 보청기를 주문했던 것인데…. 웃고 있었지만, 아이에게 보청기를 끼워주는 아내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멋진 무대에 올라 또래 아이들과 독창 실력을 겨루기도 하고, 첼로를 연주하며 오케스트라 단원으로도 활동한다. "아빠 뭐해?" "운전 중이야." "그래? 아빠 위험해, 끊어." "응…." 아이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매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물기가 밴다.
    세상엔 고마운 분들이 참으로 많다. 소아과 의사, 신생아중환자실 간호사, 언어치료 선생님, 유치원 담임선생님, 동료와 이웃들…. 그분들이 없었다면 이렇듯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장애는 영어로 '디스오더(disorder)'나 '핸디캡(handicap)'이라고 부르지 '질병(disease)'이라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관심과 따뜻한 손길이 있으면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상태이기에 질병과 구분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와 함께 험난한 길을 헤쳐오며 나는 생생히 보았다. 장애가 질병과 같은 개념으로 취급되는 기이한 세상을.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많은 장애아들이 소외되고 외면당한 채 방치되는 기막힌 현실을.

  • [ESSAY]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가슴 뭉클한 이야기네요. 필자이자 아이 아버지인 남선생님도 의사이시지만 내 피붙이, 가족이 아니면 보통 일반 상식적인 수준에서 접근하게 되지요. …

    2012년 7월 13일 금요일

    엄마·아빠를 죽인 사람을 30년간… 충격과 경악

     

    엄마·아빠를 죽인 사람을 30년간… 충격과 경악

  • 이한수 기자
    反체제 인사 희생자 3만명 자녀, 軍가정에 강제 입양
    유아 500명, 부모와 이별… 현재 106명이 친부모 확인
    어머니회, 지속적 처벌 요구… 주범 비델라 前대통령 사면·실형 반복하다가 최근 징역 50년 중형선고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는 빅토리아 몬테네그로(35)는 어린 시절 저녁식사 때 신념에 찬 군인인 아버지 에르난 테츨라프 중령이 반체제 인사들을 잡아들여 죽이고 고문한 이야기를 들었다. 빅토리아는 "(고문당하고 죽은) 이들이 아르헨티나에 해를 끼치는 분자들"이라는 부친의 말을, "아르헨티나 군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주변의 말을 믿었다. 2000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빅토리아는 1997년 '테츨라프 중령이 친아버지가 아닐 수 있으니 친자 확인 검사를 받으라'는 법원의 통보를 받았다. 아르헨티나 당국은 1976~1983년 군부독재 집권 시절 '아기 납치' 혐의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빅토리아는 망설임 끝에 유전자 검사에 응했고 자신의 친부모가 군부 독재에 저항 운동을 벌이다 죽임을 당한 사실을 2000년 알게 됐다. 더 놀라운 것은 테츨라프 중령이 자신의 친부모 납치·살해 작전에 가담해 생후 13일 만에 납치된 자신을 입양했다고 고백한 사실이었다. 빅토리아는 올해 봄 친부모의 성 '몬테네그로'로 개명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집권 기간 동안 정권에 반대하는 지식인과 예술가 등 반체제 인사들을 무차별 구금·살해하고 그들의 아이를 빼앗아 군인 가정 등에 강제로 입양시켰다. 전 세계는 이 반인륜 만행을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고 불렀다.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3만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됐으며 강제 입양된 아이들은 500여명에 이른다. 빅토리아처럼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은 사람은 이제껏 106명이 됐다.
    군사정권이 아이를 빼앗은 과정은 인륜 파괴의 극한을 보여준다. 비밀수용소 수감자 중 임신한 여성들은 수갑과 족쇄를 찬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다. 산모는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지는 등 무참히 살해됐다. 갓난아이들은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군인·경찰 등 친정권 인사 집안에 보내졌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법원에서 지난 5일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1976~1983년 집권 기간 중 반대파들을 고문₩살해하는‘더러운 전쟁’을 벌일 당시 자행한‘아기 납치’관련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인권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법정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로이터 뉴시스

    왜 독재정권은 '반역자'의 아이들을 군인·경찰 등 체제의 수호자들이 입양하도록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스페인 정신과 의사 안토니오 발레요 나제라가 정당성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코 정권(1939~1975)을 위해 일한 나제라는 반정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 등의 이념은 일종의 정신 질환이며 이들로부터 아이들을 구출해 스페인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이론을 설파했다. 프랑코 정권도 집권 기간 반체제 인사의 아이 3만명을 납치해 친정부 인사 가정 등에 입양했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은 1970~80년대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볼리비아·파라과이·우루과이 등 6개국 군사정권이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벌인 '콘도르(남미에 사는 큰 독수리를 뜻함) 작전'의 일환이었다. 칠레 피노체트 정권(1973~1990년)이 3000여명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 남미 각국에서 최악의 인권 탄압이 벌어졌다.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의 반인륜적인 '유아 납치'는 1977년 실종 자녀를 찾아 달라며 시위를 시작한 어머니·할머니 등 14명이 '5월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알려졌다. 1983년 군부독재를 끝낸 라울 알폰신 정부는 호르헤 비델라 전 대통령 등 군사정권 인사 370여명에게 반인륜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90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국민화합을 내세워 이들을 전격 사면했다. 이후 2003년 좌파 지도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사면법을 폐기하고 이들을 다시 법정에 세웠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이 들어선 2011년 2월부터 재판이 빠르게 진행됐다.
    아르헨티나 법원은 지난 5일 이들 군사정권 책임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1976년 쿠데타를 일으켜 1981년까지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86)가 징역 50년,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레이날도 비뇨네(84)가 15년형을 받았다. 당시 '유아 납치'에 관여했던 수용소 책임자와 의사 등에게는 징역 15~40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11일 아르헨티나가 더러운 전쟁 책임자들이 죽기 전에 이들을 정의의 법정에 세우는 진전을 이뤘다고 보도했다

  • 엄마·아빠를 죽인 사람을 30년간… 충격과 경악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2년 7월 7일 토요일

    나의 에버노트(Evernote) 활용기

    많은 분들이 사용하고 계시겠지만 저는 이  "Evernote" (www.evernote.com) 를 사용하면서 편리한 점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간단히 설명드리면 이 클라우딩 프로그램은 컴퓨터-집,회사, 어디든, 스마트폰, 태블릿 등등
    정보기기에 상호간 즉각적인 저장 및 동기화-서로 자료가 일치하게 만드는-가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래 그림은 실제 제 에버노트 캡쳐그림인데 내 일상중에 만나는 자료들을 손쉽게 저장하고 스마트 폰에서 확인하여 활용하거나, 혹 회사 컴퓨터에서 업무중에 즉각적으로 메모 등을 해놓고 어디든지 찾아보는등에 도움이 됩니다

    특히 영어 관련 자료도 아래 그림처럼 MP3 자료도 드래그로 끌어당겨놓고 동기화놓으면 어디든지 에서 제 아이폰에서 확인해서 들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구글 크롬을 통해 인터넷 서핑을 하면 '에버노트로 클립 하기' 같은 보조 연동 프로그램이 있어 클릭만으로 인터넷 자료를 내 에버노트 서버로 저장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기능 써보시면 대단합니다. 화면에 보이는 모든자료를 (단 동영상 제외) 저장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awesome note와의 동기화도 가능합니다.

    쓰다보니 활용도가 좋아 현재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단, 폴더단위의 암호화 장치가 되어있지 않아 -문장단위 암호화는 가능- 개인의 중요자료는 조심해야 합니다

    (무자막 미드카페-http://cafe.naver.com/ddole/-에 제가 포스팅한 내용입니다)














    2012년 7월 6일 금요일

    "거짓과 날조를 파헤치고 싶나… 진실을 먼저 공부하라"

     

    "거짓과 날조를 파헤치고 싶나… 진실을 먼저 공부하라"

  • 파리=어수웅 기자

    입력 : 2012.07.07 03:10

    [세계적 석학 움베르토 에코 인터뷰] ① 인터넷의 역설 ② 내가 책 5만권 가진 이유
    장서가 작은 도서관 수준 - 언젠가 꼭 읽거나 참고하고 싶어 필요한 책들이라 보관하는 것
    소설 쓰는 이유는 - 내 욕망은 독자를 창조하는 것… 창작자로서 기쁨을 전하고 싶어
    책 다 쓰고나면 슬퍼져 - 자료 모으고 공부하는 즐거움이 완성의 기쁨보다 더 크기 때문
    별명이 '세상의 모든 지식' - 우주엔, 행동 사이엔 틈이 많아 빈틈을 활용해 사유 연습을 하지

    책 애호가이자 수집가로서 움베르토 에코(Eco·80)의 소망은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을 소장하는 것이다. 그는 동년배인 프랑스의 시나리오 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81)와의 대담집 '책의 우주'에서 자신의 장서가 5만권에 이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작은 도서관'이라 불러도 좋은 양이다.
    ―수치로 따지는 게 민망하지만 장서가 5만권이라고 들었습니다.
    "밀라노 집에 한 3만, 교외에 있는 집에 한 1만, 그리고 볼로냐대학 연구실과 여기(파리) 다 합치면 대략 5만부 정도 될 거요. 솔직히 다 세어 보지는 못했어요. 매일매일 엄청난 새 책이, 헌정본이 집으로 와요. 매월 날짜를 정해 박스에 담아 대학에 있는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보낸다오. 때로는 교도소에도 보내줍니다. 걱정이야, 못된 책으로 교도소 사람들을 오염시킬까 봐(웃음)."
    ―이 시점에서 무례한 질문 하나. 그 5만권을 진짜 다 읽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보통 뭐라고 대답하나요.
    "정말 다 읽었느냐고 무례하게 묻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대답하느냐고 묻다니. 질문이 철학적이군(웃음). 상대방의 기질과 취향에 따라 준비해둔 다섯 개의 대답이 있소. ①번은 "그보다 더 많이 읽었소!" ②"읽었으면 이 책들이 왜 여기 있겠소." ③ "읽은 책들은 다 치웠소. 다음 주에 읽을 것들만 여기 있지." 그러고 보니, ④번과 ⑤번은 생각이 안 나는군요. 어리석은 질문들이 많이 있었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혹은 읽어도 몇 권만 겨우 읽는 사람들은 왜 나 같은 사람들이 서재를 가지고 책을 보관하는지 모를 거요. 언젠가는 꼭 알고 싶고, 참고하며 필요한 책이라는 사실을."

    에코 박사(Dr. Eco), 미스터 에코(Mr. Eco), 아니면 어떤 호칭이 편하냐고 물었다. 그는 입술을 좁게 오므리고“휘익~”하는 소리를 낸 뒤, 휘파람으로 자신을 불러달라며 웃었다. 상대방의 긴장을 일거에 허물어뜨리는 파안대소였다. /파리=사진작가 성지연

    ―안 읽은 책을 갖고 있는 이유겠군요.
    "이런 일이 있어요. 30년 전에 산 책이고 나는 한 번도 읽은 기억이 없는데 내가 그 책을 완벽히 알고 있는 것 같은 경우가 있어요.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지.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일인데, 첫째는 내 지식이 점점 커지면서 이 책의 내용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요. 둘째는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읽다 보니 다 알게 되는 경우지. 셋째는 다른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쓴 책을 읽고 나서 마치 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경우요."
    ―생물학적으로는 팔순이지만, 소설가로는 삼십대입니다.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게 1980년이니까 소설가로서는 올해 서른둘?(웃음) '문학적 청춘'의 비밀은 뭔가요.
    "비밀이 있다고 한들 가르쳐 줄 것 같은가?(웃음) 비밀은 없어요. 단 창작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마음과 참을성이랄까. 내 소설은 6~8년마다 한 권씩 나왔소. 1년에 1권씩 책을 내는 사람은 다른 비밀이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비밀은 기다림의 미학이지. '장미의 이름' 이후 '푸코의 진자'까지 8년이 걸렸소. 쓰는 시간 그 자체가 기쁨이지요. 나는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져요. 완성의 기쁨이 아니라 책을 쓰는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게 더 즐겁죠. 내 소설의 서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는 쪽이죠. 갈릴레오에 관한 책을 읽다가 (세 번째 소설인) '전날의 섬'의 모티브를 찾았던 건데, 이런 조사와 공부가 좋아요. 그런데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 더 이상 관련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되잖소."
    ―소설가로서 독자에게는 어떤 즐거움을 주고 싶은가요.
    "내 욕망은 존재하지 않았던 독자들을 창조해내는 거요. 나는 '이상적 독자'(Model Reader)라는 에세이에서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작가는 은행 창구직원이 아니야. 셰익스피어 비극의 독자들은 셰익스피어가 원했던 독자들인 거야. 나는 창작자로서의 내 기쁨을 내 독자들도 똑같이 느끼기를 원해요. 물론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이 세상 모든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소?(웃음)"
    ―'장미의 이름'부터 곧 출간될 '프라하 공동묘지'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거짓의 힘' '날조의 메커니즘' '음모론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죠. 이유는?
    "그렇게 묻는다면, 왜 단테는 천국과 지옥에 관심을 쏟았고 반대로 발자크는 프랑스 사회문제를 썼느냐고 물을 수 있지요. 제임스 조이스는 왜 다른 곳이 아닌 더블린에 집착했느냐고 할 수 있겠고. 6권 중에서 '전날의 섬'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이 범주에 묶을 수 없을 거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일 뿐이지. 나는 위조와 날조에 관심이 많아요. 나는 철학자고, 철학자는 당연히 진실에 관심이 있는 법이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거짓인가. 거짓이나 위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진짜가 뭔지를 알고 시작해야 해요. 반쪽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어요. 둘은 연결되어 있지. 진실을 모른다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거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뫼비우스의 띠의 딜레마군요. 사람들은 선생을 '세상의 모든 지식'으로 부릅니다. 느낌은?
    "모두 다 위조고 날조야(웃음). 만약에 어찌 그리 정보가 많으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빈틈(empty space)을 이용한다고 말하겠어요. 이 우주에는 행동과 행동 사이, 이것과 저것 사이에 많은 빈틈이 있고, 그 틈을 활용해야 해요. 당신이 1층에서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기까지 3분이 걸렸어. 그동안 나는 어떤 생각을 했지. 일종의 사유 연습이오. 우리 인생은 비어 있는 시간들로 가득 차 있어. 우리 모두가 할 수 있어요. 화장실에 가 앉아 있으면 '빈틈'이 많을걸?"
    ―선생은 이제 80대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또 사회에게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느낍니까.
    "여전히 나는 글을 써요. 볼로냐대학에서는 은퇴했지만 칼럼뿐만 아니라 특강도 하지. 하지만 내 지혜는 너무 늙었어요. 여든 살 된 지식이지. 지난번에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뇌가 가장 좋을 때는 당신들 나이, 24세 때다. 뉴런이 그때가 제일 활발하고 좋을 때라고. 지금보다 더 똑똑할 수는 없다고. 나에게 지혜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혜는 스스로 얻는 거요."

    [새 소설 '프라하 공동묘지']
    세계 문학의 역사 통틀어서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 등장
    “세계 문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일 거요.”
    자신의 새 소설 주인공에 대해 묻자 에코는 이렇게 힌트를 줬다. 올가을 번역·출간 예정인 에코의 여섯 번째 소설 ‘프라하 공동묘지(Prague Cemetry·사진)’의 주인공 이름은 시모니니. 작가가 학자와 소설가로서 평생 천착해왔던 진실과 거짓, 날조의 메커니즘이라는 주제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다. 시모니니가 지닌 천부적 재능은 음모와 위작. 어렸을 때는 공증인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문서 위조의 달인이 되었고, 청년 시절에는 비밀 첩보원으로 일하며 음모를 스스로 창조해냈으며, 마침내는 반유대인 문서 위작에까지 몰두한다. 제목인 프라하 공동묘지는 유대인 랍비들이 비밀회의를 하는 장소. 이 역시 시모니니의 위작이자 창조다. 19세기를 배경으로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주인공이 일기 형식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플롯으로 꾸며졌다.
    [한국에 대한 인상]
    문화강국·출판강국… 알고 지내는 학자 많은데 그중엔 김씨가 너무 많아

    3년 전 에코 교수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요청으로 큐레이터를 맡아 ‘궁극의 리스트’라는 제목의 전시를 연 적이 있다. 삶은 유한하고 리스트(목록)는 무한하다는 문화적 주장이었다. 가령 ‘시적인 것’의 의미를 말할 때 한 줄의 정의를 말하는 것보다 호메로스적인 것, 셰익스피어적인 것 등등의 리스트로 이어가며 설명하는 게 더 합당하다는 얘기였다.

    움베르토 에코가 그린 자신의 캐리커처와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감사 메시지. 에코는 1930년대 이탈리아 만화의 마니아이기도 하다.

    문득 한국에 대한 ‘에코의 리스트’는 무엇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우선 문화강국·출판강국으로서의 한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과 연구를 함께하거나 연락하고 지내는 학자들이 무척 많다는 것. 그런데 한 가지, ‘킴(김씨)’이 너무 많다고 농담을 던졌다. 아마 리스트를 만들면 ‘킴킴킴’으로 이어질 것 같다며 웃었다. 초대 제안을 하자, “죽기 전에 한국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기는 해요. 그런데 너무 늦지 않았나 싶네”라고 말했다.
    에코의 파리 집은 생 슐피스(St. Sulpice) 성당 바로 옆에 있었다. 두 사람이 타면 껴안아야 할 만큼 비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조국 이탈리아 말고) 파리에도 집이 있는지는 몰랐다고 인사를 건네자, “얘기가 길다”면서 60년 전 추억을 들려줬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처음 파리에 왔어요. 내 아들은 네 살 때 처음 해외여행을 했지만, 우리 세대는 스무 살에 여행을 해도 매우 이른 것이었지. 그런데 처음 본 파리가 너무나 멋지더라고. 당시 난 철학도였는데, 파리에서 살 수 있다면 은행원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내 기질상 가장 안 맞는다고 생각한 직업이었거든. 결국 원한 지 40년 만에 소원을 이뤘어요(집을 샀어요). 다행인 것은 은행원을 하지 않고서도 꿈을 이뤘다는 거지. 소원을 이루려면 40년은 한결같이 원해야 하는가 보오(웃음).”

  • "거짓과 날조를 파헤치고 싶나… 진실을 먼저 공부하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2년 7월 2일 월요일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해외입양인, 말걸기] 친부모에 버림받고, 양부모에 버림받고…
    제인 정 트랜카 작가, 입양인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1-10-06 오후 4:08:15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 60년간 한국은 공식적으로 16만4894명의 아동해외입양 보냈고 2010년 한 해에만도 1013명의 아동을 해외입양 보냈다. 이 아동들은 한국정부가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 "국제간의 아동 입양은 자격을 갖춘 중앙정부기관에 의해서만 허가되어야 한다"를 유보한 상태에서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 또 한국은 '국가 간 아동 입양에 있어서 아동보호 및 협력에 관한 헤이그 협약'을 아직 비준하지 않았는데, 이 헤이그 협약에서는 해외입양을 중앙정부에서 관리해야 할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미국의 의사-레스토랑 주인 부부에게 입양됐던 팀
    입양프로그램에 대한 한국정부의 무책임과 관리 소홀의 결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입양인들은 피해를 입고 있다. 미국입양인이었던 팀(Tim)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팀은 1970년대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하지만 34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온갖 풍상과 우여곡절을 겪은 팀은 서울 이태원의 한 길거리로 흘러들어와 노숙인으로 살고 있었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팀은 우연히 길을 지나던 다른 한 해외입양인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1976년 한국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당시 한국은 사회복지보다는 경제발전을 최우선적 목표로 두고 있던 국가였다. 해외입양은 군사정권에 돈이 되는 좋은 사업이었다. 팀은 당시 한 재래시장에서 길을 잃고 고아원으로 가게 된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팀의 한국 이름은 모정보인데, 누가 그에게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알 수 없다. 친생부모가 모정보의 양육을 포기했다는 것을 증빙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팀의 입양을 촉진하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팀의 당시 호적(현 가족관계등록증)에는 팀 외에는 아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후 팀은 지금도 왕성하게 입양사업을 벌이고 있는 사설입양기관인 대한사회복지회에 의해서 미국 위스콘신주의 한 도시로 입양 보내졌다.
    팀의 미국 양부는 의사였고 양모는 예술가이면서 레스토랑 체인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팀의 양부모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양부모의 의무 중의 하나인 입양 자녀에 대한 미국국적 취득절차를 밟지 않았다. 양부모는 친자식 셋을 얻은 후 비교적 늦은 나이에 팀을 입양했다. 나는 지난 9월 팀으로부터 얻은 전화번호로 미국 위스콘신주에 살고 있는 양부모와 통화를 했다. 양부는 "팀은 다루기 힘들었고,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또 팀의 양모는 "팀이 친구들에게만 관심 있었는데 친구들은 흘러갈 뿐이고 가족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양부모는 팀이 8살 때 팀에게 리탈린(주의력결핍장애에 쓰이는 약)을 투여했다. 그리고 팀이 12살 때 그를 기숙식 군사학교에 보냈다. 양부모는 또 팀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팀에게 리튬을 투여했다. 팀이 18세가 되었을 때 양부모는 팀에게 "우리 이제 인연을 끊자. 집을 떠나라"는 말을 했고 결국 팀은 집을 나와야 했다.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팀은 그 다음 20년 동안 미국에서 장애인수당과 교회의 자선에 의존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도중에 팀은 정신병원에서 감금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팀은 코카인이나 각성제 같은 마약을 흡입하기 했다. 팀은 위스콘신, 캘리포니아, 하와이를 전전하며 살았다. 마침내 약 6개월 전, 그는 하와이에서 그가 입양 온 나라인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9.11이후 까다로워진 미국의 정책에 의해서 미국국적이 없고 마약중독과 거래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팀은 미국의 한 주인 섬 하와이로부터 소위 본토인 대륙으로 입국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추방을 면할 수 있을까 하고 변호사를 고용하려했지만 팀의 양부모가 보낸 변호사 수수료는 400불에 불과했고, 그것은 턱없는 비용이었다. 팀의 양부모는 나와의 전화 통화에서"우리가 이제 팀에게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고, 팀은 미국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3살 때인 1977년 미국으로 입양 가서 34년 만에 미국정부에 의해서 한국으로 추방된 팀은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천애고아일 뿐이다. 팀은 34년 전 아마도 한국인 생부모에 의해 포기되었고, 한국 사회로부터 적출되었으며, 미국인 양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미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은 버림당함으로 얼룩졌다.
    입양특례법은 해외입양아동의 국적삭탈절차를 명시하고 있다. 국가가 당사자의 동의에 의하지 않고 국적을 삭탈하는 일이 시민권과 인권을 거스르는 일이 아닌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최소한 이 법은 한국정부와 해외입양기관은 입양아동이 입양된 나라의 국적 취득 여부에 대한 확인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부도 입양기관도 이 의무를 책임 있게 실행해오지 않은 흔적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입양인들에게 별로 큰 손해가 아니어서 문제를 삼지 않아서 그렇지 국내로 돌아와서 장기 거주를 위해 재외동포비자를 받기 위한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많은 입양인들이 자신들이 입양국가의 국적을 취득하고 시민이 된 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주민등록 관청에서 자신들의 주민등록을 여전히 살려두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이는 결국 정부와 입양기관들이 해외입양을 보내고 나서, 이들의 시민권과 국적 취득 여부를 확인하는 일에 실제로 큰 게으름을 피워왔다는 점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팀과 같이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채로 살다가 한국으로 추방되는 입양인들을 발생시키는 이유이다. 생각해보라. 입양 간 나라에서 그 땅 사람들과 부대끼며 30년, 40년을 살고도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서 모국 아닌 모국으로 추방되는 입양인들의 가혹하고도 처참한 운명을. 언어도 가족도 문화도 낯선 땅에서 추방자로 사는 일의 참담함을.
    정부와 입양기관들은 이런 인권 유린과 훼손에 어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입양이 마치 천사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 벌이는 선행인 것을 만천하에 주장하면서, 또 이 일로 온갖 사회적 존경과 찬사를 받으면서 벌여온 일임에랴!
    무국적 노숙인 팀의 불가능에 가까운 국적 회복 과정
    팀이 서울거리에서 내 친구에 의해서 노숙자로 발견되었을 당시 그는 신분증도 없었고 총재산은 1불도 안 되었고 행인들에게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팀은 복용할 약도 더 이상 없었고, 찢어진 바지에 짝짝이 신을 신고 있었다. 팀은 종이컵비닐봉지를 몇 개 갖고 있었다. 정신병 탓인지 팀은 자기 이름, 나이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팀과 차분하게 대화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팀은 자기가 더 이상 미국인이 아닌 것도 몰랐고 스스로를 "세계시민"으로 불렀다.

    ⓒ프레시안(허환주)

    우리 입양인들의 첫 번째 임무는 팀의 한국국적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었다. 미국국적이 없는 팀이 한국국적을 회복하면 극빈자 신분으로나마 최소한의 의료나 복지혜택 등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우리 입양인들은 해외입양인센터 <뿌리의 집>을 운영하는 김도현 목사님과 더불어 10여 곳이 넘는 정부 기관들을 며칠간 문자 그대로 뛰어다녔다. 그런 지난한 과정에서 우리가 겪은 답답한 관료주의를 말로 다 표현 하기는 불가능하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노숙인인 팀이 혼자 이런 과정을 밟기는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모국으로 국제 미아가 되어서 돌아온 해외입양인들의 생존권이 얼마나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은 정부예산에 의해서 운영되는 민간재단의 형태로 2009년 설립되었다. 사실상 법적인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작은 정부론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변명에 기초해서, 정부 예산으로 직원의 급여와 사업비가 지출되는 기이한 형태, 거의 불법에 가까운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기관의 불완전한 설립을 주도했던 정부 관리들은 자리를 옮겼고 이 기관의 설립을 주도하고 이 기관의 이사장이 된 이는 수수방관 내몰라라였다. 결국,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이 주도해서 이 기관의 설립근거를 담은 입양특례법 개정작업을 벌였고, 결국 지난 6월에 국회 통과를 이루어 냈다. 비로소 중앙입양정보원은 법적 근거를 확보한 것이었다.
    사실상, 중앙입양정보원은 2009년 설립되기 전에도 같은 직원들,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거의 10년 동안 존재해왔다. 사실상 유명무실한 기관이었지만 입양기관이 사무실 비용을 대고, 정부가 민간기관 지원의 형태로 예산을 마련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정부 예산으로 급여를 받는 센터장과 직원의 임용권은 입양기관들에게 있었던 기형적인 단체였다. 이 입양정보센터가 중앙입양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전액 정부의 예산에 의해서 운영되기 시작한 후에도, 사실상 입양사후서비스라고 하는 중핵적인 사업에 있어서 아무런 진척도 전문성도 없이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만 있을 뿐이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 기관이 운영되어 왔다고 하면, 그것도 정부의 예산 지원에 기초해서 운영이 되었다고 하면, 그 전문성은 물론 사업의 목표가 착착 성취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어보는 이가 입이 아파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난 몇 주 동안 팀의 문제로 중앙입양정보원에서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중앙입양정보원은 해외입양인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전혀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앙입양정보원은 양부의 이름에 기초해서만 입양인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는 몇 주 전 팀에 대한 입양기록을 찾기 위한 방문약속을 잡고자 중앙입양정보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내가 팀의 이름을 이야기 했을 때 중앙입양정보원 직원은 팀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나를 만나는 약속을 잡을 수 없다고 했다. 대신 그 직원은 내게 이메일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가 알려준 주소로 메일을 보냈지만 반송되었다. 그래서 전화를 몇 번 다시 했지만 통화 중이었다. 결국 <뿌리의집> 김도현 목사님이 대신 전화를 해서 중앙입양정보원 사무총장과 통화를 요청했지만 그 날 외근 중이라 통화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우리는 팀을 김도현 목사님 차에 태우고 중앙입양정보원을 무작정 방문했다. 중앙입양정보원 직원 2명이 우리를 만났다. 한 직원은 입양정보센터시절부터 그곳에서 일해 왔었다. 그녀는 영어를 할 수 있었지만 팀을 쳐다보거나 팀에게 영어로 말하지 않았다. 한 직원은 영어를 좀 했지만 입양제도에는 전혀 문외한인 것 같았다. 우리 해외입양인들이 중앙입양정보원의 직원들이 해외입양사후서비스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인 입양인들로부터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여러 차례 했고, 나아가 입양인을 직원으로 채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수차례 피력했지만, 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팀과 영어를 할 줄 아는 2명의 한국인들과 중앙입양정보원을 방문했지만 해외입양을 다루는 기관의 직원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해외입양인을 만날 때는 영어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원칙으로 나는 반복적으로 직원들에게 팀을 보면서 영어로 팀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직원들은 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데 마치 팀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거의 대부분을 한국어로 이야기 하였다. 내가 만약 통역이 가능한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중앙입양정보원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이다.
    중앙입양정보원의 두 직원은 해외입양인은 그 나라 국적을 취득 할 수 있다고 원론적인 말을 했다. 미국입양인 팀이 미국국적을 못 얻었고 다른 해외입양인들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나는 말했지만 그 두 직원은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의 어려움 끝에 우리는 가까스로 팀의 미국입양기록을 발견했고 중앙입양정보원 직원은 그 기록의 원본이 대한사회복지회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중앙입양정보원 설립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해외입양사후서비스의 원스톱서비스화가 아니냐, 지난 5월 입양의 날에 즈음하여 진영곤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이 해외입양에 관한한 원스톱서비스체계를 갖추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한 일이 신문에도 다 났는데,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거짓 보고를 한 것이냐, 그러니, 여기 중앙입양정보원을 통해서 우리가 그 서류를 받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직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낯설어 했지만 결국 우리 주장은 관철되었고 우리는 사설입양기관을 가지 않고도 팀의 고아호적등본에 유사한 서류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중앙입양정보원 직원들이 준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설입양기관의 권력과 관행에 주눅 든 채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권의 문제를 민간에 위탁한 지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남겨 놓은 이 땅 사람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어두운 유산인 것처럼 보였다. 자국민의 시민권에 관한 문제를 사설기관에 위탁해 놓은 나라의 슬픈 자화상을 나는 거기에서, 내 안에서 거친 파도처럼 일렁이는 분노 가운데서 목격해야 했다.
    진정한 입양사후서비스기관은 입양인, 즉 국제적 미아가 된 팀이 한국국적을 회복하도록 지원하고 그래서 팀이 한국사회에 원만히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앙입양정보원 직원들은 팀에 관한 문서를 김도현 목사님에게 전달한 것으로 자기들의 일이 끝났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래서 김도현 목사님은 자기 자신의 시간을 들여서 팀의 한국국적을 회복해 주기 위해 10여개 기관을 여기저기 며칠 동안 돌아 다녀야 했다. 한국어를 못하는 팀이나 입양 보내어진 나라의 국적이 없는 해외입양인들이 김도현 목사님이 했던 것과 같이 그런 복잡한 국적회복과정을 밟기는 불가능하다. 국적이 없는 한국 해외입양인들의 국적을 회복해 주는 일은 중앙입양정보원 같은 국가기관이나 한국정부가 나서서 마땅히 할 일이지 어느 개인이 자기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중앙입양정보원 같은 한국정부기관이 국가기관간의 연계를 통해서 팀의 국적을 회복해 주도록 힘썼더라면 훨씬 더 시간과 노력이 단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무관심 때문에 한 개인이 그러한 수고를 하게 되었다. 더욱이 동사무소로부터 외교통상부로 가야 한다는 조언을 받고 우리가 외교부를 찾아 갔을 때는 정문을 지키는 경찰이 출입조차 못하게 했다. 중앙입양정보원으로 대표된 한국정부는 국적 없는 한국입양인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을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팀을 해외로 입양 보낼 때는 한국외교부에서 여권을 발행했을 것이고 재외공관, 입양관련기관 등등이 모두 관련되었을 것 아닌가? 우리가 팀의 한국국적을 회복 해 주기 위해서 여러 공무원들을 만났지만 이런 경우들 처음 본다며 모두 어떻게 할지를 몰라 했다.
    간난신고 끝에 마침내 팀은 주민등록번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팀은 아직 주민등록증이 없다. 그래서 팀은 아직도 한국인 극빈자이자 고아이며 정신분열증 환자이지만 의료 등 사회복지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 한국정부는 자국민을 해외입양 보내는 데는 신속하고 의욕적으로 행동했지만 팀처럼 귀환한 자국민인 전 해외입양인을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몰랐고 할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미국으로 입양 갔다 34년 만에 추방된 입양인과 영어로 말하는 것조차도 말이다.
    우리는 국제인권기관이 차라리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이 해외입양인들을 위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또는 안하고 있는지 점검해 주었으면 한다. 과거에는 심지어 사설입양기관이 한국아동을 해외에 판매한 돈으로 중앙입양정보원의 전신인 입양정보센터 같은 정부적 기능을 하는 기관에 재정을 지원해준 때도 있었다. 이것은 물론 이해충돌 행위다.
    토비 도슨과 팀, 성공한 입양인만 환영하는 한국
    팀의 경우를 통해서 또 생각해 볼 것은 한국에서 친생자녀양육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친부모들에 대해 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한국정부는 이제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팀이 3살 때 시장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은 팀의 가족이 그를 양육하고자 3년 동안은 노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팀의 가족은 팀을 양육하지 못할 상황이 되자 그를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몰래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단순히 시장 통에서 팀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스키 선수이자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 중의 하나인 토비 도슨처럼 말이다.

    ▲ 토비 도슨 ⓒ연합

    사실 한국 정부나 사설입양기관들은 토비 도슨처럼 성공한 입양인에게는 열광하고 팀처럼 실패의 늪을 헤매고 있는 입양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존재화 시킨다. 국가가 무엇인가? 성공한 사람들에게 열광하라고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함께 힘을 모아 돌보자고 세운 것이 국가여야 하지 않은가? 시장 통에서 잃어버린 아기에 대해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회와 정부라면 당연히 가족의 품을 다시 찾아 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친생자녀를 키우기에 버거워 포기해야할 지경이라면, 먼저 생뚱맞고 냉정하게도 입양을 제안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도우면 친생가족이 친생자녀를 키울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토비 도슨의 경우 시장 통에서 잃어버린 아이였음에도 해외입양 보내졌다는 사실은 고의로 간과한 채 그의 성공 스토리에만 열광하고 제 2의 국익을 위해 그의 명성을 활용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이 땅의 사설입양기관과 정부와 사회다. 누구는 그러면 제 1의 국익은 뭐였냐고 할 것이다. 그것은 70년대와 80년대에는 한국 정부가 입양을 통해서 국가 재정에 보탬을 도모했었던 것이 제 1의 국익이었다고 할 것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행태에 다름이 아니다. 그것도 이 땅에 태어나는 영아들을 가지고 말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 (가)항은 아동입양과 관련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아동의 입양은, 적용 가능한 법률과 절차에 따라서 그리고 적절하고 신빙성 있는 모든 정보에 기초하여, 입양이 부모, 친척 및 후견인에 대한 아동의 신분에 비추어 허용될 수 있음을, 그리고 요구되는 경우 관계자들이 필요한 협의에 의하여 입양에 대한 분별 있는 승낙을 하였음을 결정하는 관계당국에 의하여만 허가되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현재 한국입양아의 90%는 미혼모 자녀다. 한국인들은 이런 현상은 유교문화 때문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유교문화에서 가장인 아버지는 자녀를 돌봐주어야 책임이 있지 않나? 또 군사부일체인 유교문화에서 정부는 그 백성을 돌보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 않나? 한국에서 미혼모가 아동의 양육을 포기하는 이유는 경제력 때문이다. 미혼모는 정부가 한 달에 미혼모에게 주는 양육비 5만 원으로 아동을 키우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국내입양의 경우 한국정부는 입양부모에게 한 달에 10만 원을 지원한다. 지난 5월에 열린 입양관련 컨퍼런스에서 정부관계자는 이 입양부모에게 지원하는 지원금을 상향 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부의 할 일은 국내입양이나 해외입양을 권장하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아동이 그 친부모와 생이별을 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팀은 자기의 친부모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시장 통에서 발견되어 고아호적이 만들어진 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출생등록제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출생등록제는 팀이 태어났을 때인 1970년대와 같다. 그것은 아이가 탄생한 병원에서 출생등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원해서 임의로 신고하게 되어있다. 그 말은 부모가 출생신고를 안 한 채로 해외로 보내진 많은 입양인들의 경우 한국에 누가 자신의 생물학적 의학적 어머니인지에 대한 자신의 출생사실에 부합하는 기록이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입양기관은 아동을 쉽게 입양 보내기 위해서 소급하여 고아호적을 만들어 준다.
    이런 출생등록제의 허점 때문에 국내입양의 경우 양부모는 남의 아이를 자기 가족등록부에 자기 친자녀처럼 등록시킴으로써 그 아동의 출생을 비밀을 은폐할 수 있게 된다. 부모가 병원에서 발행된 출생증명서를 구청으로 가지고 가서 출생등록을 한다. 그러나 집에서 난 아동은 병원출생증명서가 없이도 출생등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현 제도 하에서는 미혼모가 낳은 아동을 양부모가 입양하되 마치 집에서 난 친자식처럼 출생등록을 할 수 있게 되어있다. 200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행 된 보고서에 의하면 2007년 한해에만 3014명의 아동들이 이런 불법 비밀입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도 정부에 의해서 인가가 난 사설입양기관의 중재를 통해서 자행된 일이다. 사실상 국내입양의 대다수는 이런 비빌입양이다. 온갖 변명과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렇게 해서 입양 아동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진실에 접근할 권리가 근원적으로 차단되며, 거짓 정보에 기초해서 자신의 인생을 구축해야 한다. 비록 입양이라는 선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존재의 근원과 그 의의를 훼손하는 이 제도는 입양 당사자에게는 야만적 인권유린에 다름이 아니지 않은가?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과 김도현 목사님이 운영하는 <뿌리의 집(KoRoot)>은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여 알리고, 친부모의 자녀양육보다 우선해서 제도적으로 입양을 권하는 한국입양제도를 허점을 보완하고자 일하고 있다. 국제공법상, 한국은 1991년 11월 20일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수용했지만 아동권리와 관련한 몇 가지 조항에 대해선 지난 20년간 여전히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국제사법상, 한국은 아직도 국가간 입양에 관한 헤이그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 해외입양인들은 유엔아동권리위원회를 통해 한국정부에 아래와 같은 압력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1) 한국의 모든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국정부는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입양제도를 인정하거나 허용하는 당사국은 아동의 최선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도록 보장하여야 하며, 입양이 권위 있는 관계 당국에 의해서만 허가되도록 해야 한다)와 40조(당사국은 형사피의자나 형사피고인 또는 유죄로 인정받은 모든 아동에 대하여, 아동의 연령 그리고 아동의 사회복귀 및 사회에서의 건설적 역할 담당을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점을 고려하고, 인권과 타인의 기본자유에 대한 아동의 존중심을 강화시키며, 존엄과 가치에 대한 아동의 지각을 촉진시키는데 부합하도록 처우 받을 권리를 가짐을 인정한다)에 대한 유보를 철회해야 한다.
    2) 한국에서 태어난 아동이 해외입양되기 전 그 아동의 권리를 더 낫게 보호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국가간 입양에 관한 헤이그협약을 수용해야 한다.
    3) 한국의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미혼모(가정)에 대한 사회복지지원을 실효적으로 늘려야 한다.
    우리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이 한국의 입양문제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감시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국정부가 헤이그협약을 지키고 수용 한다면, 중앙입양정보원도 그에 걸맞게 한국사회의 약자인 미혼모와 그 자녀들의 권익을 위해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은 사설입양기관의 영향력 아래에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제인 정 트랜카 작가, 입양인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 프레시안

    2012년 6월 25일 월요일

    THE SCIENCE : ‘노벨상은 아무나 타나’…주류 과학계의 핍박을 극복한 연구들

     

    ‘노벨상은 아무나 타나’…주류 과학계의 핍박을 극복한 연구들

    [강기자의 과학카페]<48> 배리 마셜, 스탠리 프루시너, 피터 미첼

    2011년 10월 10일

    결정에서 보이는 다양한 대칭성. 3각형, 4각형, 6각형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만 5각형은 반복성이 없다. 올해 노벨화학상은 원자의 일부가 5각형으로 배열된 준결정을 발견한 이스라엘공대 다니엘 셰흐트만 교수에게 돌아갔다. (제공 노벨재단)

    1984년 호주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33세의 내과 의사 배리 마셜 박사는 위점막에서 발견한, 나선형으로 생긴 한 박테리아에 매료돼 있었다. 난치성 질환이었던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 환자 대부분이 헬리코박터 파이로리라고 불리는 이 박테리아에 감염돼 있다는 걸 발견한 그는 헬리코박터가 궤양을 일으킨다는 가정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다.

    헬리코박터 배양액을 직접 먹어 이 박테리아가 위궤양을 일으킴을 ‘증명’한 배리 마셜 박사.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제공 C. Northcott)

    강한 산성 환경인 위 안에 박테리아가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당시 주류 의학계는 여기에 한 술 더 떠 박테리아가 궤양을 일으킨다는 그의 주장을 일축했다. 따라서 그의 논문은 게재가 거부되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동물을 감염시켜 위궤양을 일으키려는 실험은 잘 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마음이 갑갑해진 마셜 박사는 어느 날 자신이 직접 헬리코박터가 우글거리는 배양액을 마셔보기로 했다. 동물실험 결과도 있고 해서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곧 위궤양 증세를 보였다. 위내시경으로 충분한 ‘증거’(벌겋게 충혈된 위점막)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항생제를 먹었고 2주만에 궤양이 나았다.
    그는 이 경험을 그에게 처음 헬리코박터 연구를 해보라고 제안했던 로빈 워런 박사에게 얘기했고 다음날 워런 박사는 이 얘기를 우연히 통화를 하게 된 미국의 선정적 신문인 ‘스타’지의 기자에게 다소 과정을 섞어(마셜 박사가 죽다 살아났다는) 들려줬다.
    다음날 이 스토리는 ‘기니아-피그 의사가 위궤양의 새로운 치료법과 원인을 밝혀냈다’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됐다. 이 보도 이후 헬리코박터와 위궤양의 관계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고 곧이어 위궤양 환자를 대상으로 한 항생제 치료의 효과를 알아보는 대규모 임상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2005년 마셜 박사와 워런 박사는 헬리코박터가 위궤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바이러스가 아니라 변형된 프리온 단백질이 감염성 질환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힌 스탠리 프루시너 박사. 199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개인 실험실 차려 가설 입증하기도
    197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의대 신경과에서 레지던트를 시작한 스탠리 프루시너 박사는 어느 날 특이한 환자 한 명을 만났다.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CJD)이라는 희귀질환을 앓던 이 환자는 기억력이 점차 떨어지며 몸을 가누지 못하다 결국 사망했다. 병의 치료는커녕 원인도 전혀 알 수 없었던 이 사례를 겪으며 프루시너 박사는 방대한 문헌을 섭렵했고 그 뒤 이 병의 원인을 밝히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는 1950년대 동남아시아 뉴기니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걸린 풍토병인 쿠루의 증상이 CJD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쿠루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그 결과 쿠루는 죽은 자의 뇌를 먹은 아이나 여성들이 주로 걸렸으며 이 풍습을 없애자 거의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양에서 보이는 스크래피라는 증상도 사람의 CJD와 비슷했다. 그러나 쿠루나 스크래피를 일으키는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프루시너 박사는 스크래피에 걸린 양의 뇌조직에서 병원체를 추출하는 지루한 실험을 10여 년 반복했고 결국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생명체’가 병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프리온이라는 단백질 조각이 병원체라는 과감한 주장을 1982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었다. 이 논문이 나가자 생명체는 DNA나 RNA 같은 핵산을 유전자로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무시했다며 많은 생물학자들이 격분했고 프루시너 박사는 학계에서 생매장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프루시너 박사는 스크래피에 감염된 햄스터의 뇌에서 프리온 단백질을 분리하는데 성공했고 1986년 프리온 단백질의 유전자를 찾아냈다. 또 1990년 프리온의 구조가 밝혀짐에 따라 구조가 변형된 프리온이 병원체임이 입증됐다. 결국 프루시너 박사는 1997년 ‘새로운 감염 인자인 프리온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다.

    사설연구소를 차려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밝힌 피터 미첼 박사. 1978년 노벨화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제공 노벨재단)

    1978년 화학삼투이론으로 생체에너지의 전달을 설명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한 피터 미첼 박사는 자신의 이론을 비난하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직장(영국 에딘버러대)을 그만두고 풀이 죽어 있다가 마음을 다잡고 개인 연구소를 차려(다행히 그는 부유했다) 실험을 계속해 마침내 성공한 경우다.
    미첼 박사는 세포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과정, 즉 세포호흡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이미 세포에서 호흡을 담당하는 기관은 미토콘드리아라는 건 알려져 있었지만 문제는 미토콘드리아가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어내느냐는 것.
    미첼 박사는 1961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낸 논문에서 세포호흡이 화학삼투 짝지움에 의해 일어난다고 제안했다. 즉 미토콘드리아의 막 사이에 양성자 농도의 차이가 있어 삼투압이 생기고 그 결과 양성자가 막을 가로질러 이동할 때 에너지 분자인 ATP가 만들어진다는 것.
    당시 세포호흡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생물학자였기 때문에 화학삼투 같은 전기화학 용어가 난무하는 그의 논문은 해독불가였고 결국 그의 생각은 묵살되거나 정신나간 소리로 치부됐다. 게다가 미첼 박사는 다혈질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을 차분히 설명하기보다는 ‘물리나 화학에 무식한’ 생물학자들과 말다툼을 하며 적을 계속 만들어갔다.
    그 결과 그 자신 위궤양이 극도로 악화돼 학교를 떠났고 집에서 쉬면서 폐허로 방치돼 있던 18세기 건물을 개조해 사설연구소인 ‘글린연구소’를 열었다(1964년).
    이곳에서 그는 소수의 연구자들과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는 실험에 들어갔고 그 뒤 10여년 동안 확고한 데이터들을 하나둘 내놓았다. 그동안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1978년 노벨화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는 “새로운 과학개념이 승리하게 되는 이유는 반대론자들을 설득해서가 아니라 반대론자들이 죽기 때문”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1982년 준결정의 전자회절 사진을 처음 얻은 다니엘 셰흐트만 박사. 올해 노벨화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제공 이스라엘공대)

    ●결정학 교과서 건네기도
    올해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이스라엘공대 다니엘 셰흐트만 교수 역시 노벨상에 이르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노벨재단에서 일반인을 위해 만든 자료를 보면 그는 새로운 가설을 내놓다가 면전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에서 학위를 마치고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에서 박사후과정에 있던 그는 알루미늄과 망간 합금을 연구하고 있었다.
    1982년 4월 8일 아침, 그는 전자현미경으로 합금을 들여다보다 희한한 패턴을 발견했다. 전자의 회절패턴이 10각형의 꼭짓점 자리에 배열돼 방사상으로 퍼져 있었던 것. 이 결과에 그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학에서 10이라는 숫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결정이란 물질 전체에 걸쳐 일정한 구조가 반복돼 있는 상태다. 따라서 이런 반복이 가능하려면 가능한 도형은 3각형, 4각형, 6각형 뿐이다. 그런데 10각형이 나왔으니 아무리 짜내도 이게 어떤 구조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 그는 실험을 반복했지만 결과는 같았고 다른 각도에서 찍어본 결과까지 고려할 때 합금이 5각형 대칭구조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5각형 역시 기존 결정 구조에는 없는 배열이다.
    셰흐트만 박사가 동료들에게 실험결과를 말하자 다들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아마도 쌍정(twin crystal, 두 개의 결정이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 결합해 있는 구조)을 찍은 것일 거라고 대답했다.심지어 실험실 보스는 그에게 결정학 교과서를 건네 주기도 했다. 결정학의 기본부터 다시 배우라는 얘기다. 이런 소동이 마음에 안 들었던 보스는 급기야 그를 불러 실험실을 떠나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셰흐트만 박사는 일란 블레흐라는, 특이한 현상에 호기심이 많은 동료와 연구를 계속했고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해 1984년 여름 '응용물리학저널'에 제출했지만 즉각 반송됐다.
    셰흐트만 박사는 애초에 자신을 NIST로 부른 저명한 물리학자 존 칸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공사다망했던 칸은 프랑스의 결정학자 데니스 그라티아스에게 논문을 검토해보도록 부탁했다. 그라티아스는 논문에 하자가 없다고 답했고 이에 흥미를 느낀 칸이 본격적으로 개입해 다시 논문을 써 이해 11월 저명한 물리학 저널인 ‘피지컬리뷰레터스’(PRL)에 논문이 실리게 된다.
    이 논문으로 결정학계가 발칵 뒤집혔지만 불과 한 달 뒤 물리학자 폴 스타인하르트와 도브 르바인이 이들의 결정 패턴이 펜로즈 타일의 패턴과 유사하다는 결과를 역시 PRL에 실었다. 이들은 국소적으로는 패턴을 보이지만 규칙적으로 반복되지는 않는 이런 구조에 준결정(quasicrysta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결국 1992년 열린 국제결정학총회에서 결정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게 된다. 즉 “원자나 분자, 이온이 규칙적인 순서로 채워져 3차원 패턴으로 반복되는 물질”이라는 기존의 정의에서 “독특한 회절 패턴을 보이는 고체”로 바뀐 것이다.
    셰흐트만 박사가 제안한 준결정에 대해 가장 심하게 반대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학자로 195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이었다고 한다. 그 자신 누구보다도 혁신적인 생각의 소유자였지만(종이를 말아보다가 단백질의 알파구조를 생각해낸 사람이 바로 폴링이다!) 어느새 기존 패러다임을 옹호하는 완고한 과학자가 돼 버린 것이다. 프리온을 발견한 프루시너 박사의 아래 말처럼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과학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과학 지식의 틀에 맞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과학자들이 회의적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최고의 과학은 현재의 패러다임과 맞지 않는 결과들을 주의 깊게 모아 놓은 상황에서 튀어나옵니다.”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

    THE SCIENCE : ‘노벨상은 아무나 타나’…주류 과학계의 핍박을 극복한 연구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패러다임

    기존 상식과 다를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중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