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30일 수요일

“영어회화는 공부가 아니라 연습하는 것” - 중앙일보 뉴스

 

영어회화는 공부가 아니라 연습하는 것”
[중앙일보] 입력 2011.03.30 00:01 / 수정 2011.03.30 19:55
30년 경험 책 낸 실용영어교육 전문가 민병철 교수

“영어만을 위해서라면 돈 들여 외국 나갈 필요 없습니다. 정보기술(IT)환경을 잘 활용하고 이를 더욱 확대하면 적은 비용으로 영어공부를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실용영어교육 전문가인 민병철(60·사진) 건국대 국제학부 교수는 28일 “영어는 소통의 도구일 뿐 절대 어렵지 않다”며 이같이 말했다. 최근 그는 30년 영어교육 경험과 철학을 담은 『세상을 끌어당기는 말, 영어의 주인이 되라』를 냈다. 1981년부터 생활영어를 가르친 민 교수는 『민병철 생활영어』 『기초생활영어』 등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책에서 ‘덩어리 영어, 동시 학습법’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화체 영어에 약한데,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 축구선수 박지성, 코미디언 김영철 영어 잘하지 않느냐. 대화체 영어는 사실 공부(study)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practice)하는 것이다. 효과적인 연습이 중요하다. 먼저 내 생활·업무에 필요한 내용을 질문·대답 형식의 ‘덩어리 영어’로 만든다. 이를 원어민 발음으로 녹음한 후 동시에 따라 하며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자신만의 영어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이 인프라를 바탕으로 더듬대더라도 콘텐트를 담아 매너 있게 이야기하면 외국인과 잘 소통할 수 있다.”
-우리 영어교육의 문제점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중·고등학교 수업과 대입시는 여전히 문법·독해 중심이다. 평가의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말하기 평가는 주관적 요소가 많아 어려움이 많겠지만 듣기는 평가에 큰 어려움이 없으니 더 늘려야 한다.”
-영어 사교육비가 만만치 않다.
“적은 돈으로 국내에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돼 있다. 최근 스마트폰용 영어학습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책뿐 아니라 인터넷·전화 등 학습도구는 충분하다. 일부 지자체와 휴대전화 기반의 영어학습 인프라를 구축 중이고, 서울 서초구청과 함께 주민들이 적은 비용으로 양질의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주민영어도서센터’ 를 개발해 운영 중이다. 이런 시설들을 더 늘려야 한다.”
-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 이사장도 맡고 있다.
“2007년 한 여가수가 악플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떠난 일이 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선플(착한 댓글)운동을 시작했다. 나도 악플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건전한 비판이 아닌 악플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피해를 주는지 알아야 한다. 지난해 12월 운동본부 홈페이지에 올라온 선플이 100만 개를 돌파했다. 앞으로 국내 1000만 개, 지구촌에서 1억 개 달성이 목표다.”

글·사진=염태정 기자

“영어회화는 공부가 아니라 연습하는 것” - 중앙일보 뉴스

2011년 3월 29일 화요일

미국 최고 암연구소 떠나 서울대에 둥지 튼 교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미국 최고 암연구소 떠나 서울대에 둥지 튼 교수

  • 연합뉴스

입력 : 2011.03.30 09:26 / 수정 : 2011.03.30 11:21

▲ 이호영 교수
이호영 교수 “국내 암 치료 중개연구 분야 개척하고 싶어”
미국 유명 대학에서 한국인이 종신교수직을 얻는 일은 매우 드물다.
고생 끝에 얻은 종신교수직을 던지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일은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이호영(49.여) 교수는 미국 텍사스대 MD 앤더슨 암센터를 떠나 이달초 서울대 약대로 자리를 옮겼다.
MD 앤더슨 암센터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들이 치료를 받고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갈 정도로 암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병원이다.
이호영 교수는 30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기초와 실용을 접목한 미국의 항암연구를 한국에 뿌리내리는데 일조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1992년 이화여대에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1995년 연구년을 맞은 남편(부산대 교수)을 따라나서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박사후 과정 지도교수의 제의로 텍사스대 전임강사를 맡았고 조교수 시절 미 국립보건원(NIH) 연구지원금을 6개월간 3번 연속 받아내는 등 두각을 나타내 전임강사 시작 3년 만에 부교수가 됐다.
2009년 종신교수직을 받기까지도 지독히 연구에만 몰두했다.
이 교수는 “연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분야다. 개인연구를 하는 4년 동안 1년 365일 중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실에서 일을 했다”고 회상했다.
이 교수가 MD 앤더슨 암센터에서 맡은 연구분야는 기초연구와 임상시험을 연계하는 ’중개연구’ 분야. 폐암과 두경부(頭頸部)암을 전문적으로 연구했다.
종신교수직을 따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대로부터 교수직 제의가 들어왔다. 이 교수에게는 어려운 선택이었다.
“미국에서 쌓은 연구경력을 포기해야 하는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팀 프로젝트도 중간에 빠져야 해서 미안했다. 미국에서 5년만 더 하면 연금이 나오는데 금전적인 부분도 많이 포기해야 했다”고 말했다.
한국행을 선택한 것은 뒤처진 국내 암 치료 중개연구 분야를 개척해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한국의 중개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이곳에서 기초학문과 임상을 겸한 중개연구 분야를 손수 개척하고 싶었다. 과학자로서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세부 분야에 국한된 연구만 해야 했는데 한국에서는 기초학문 연구도 함께하며 연구분야를 넓힐 수 있었다. 모국에서 탁월한 역량을 가진 제자들을 가르치고픈 마음도 생겼다.
한국에 있는 남편과 어머니를 생각하니 결심이 굳어졌다.
이 교수가 한국에 온 것은 이제 한 달 남짓. 너무도 많이 바뀐 서울의 환경에 놀라 차도 구입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미국에서 쌓은 중개연구 경험을 여러 사람과 나누면서 위암과 간암, 췌장암 등으로 연구분야를 확대할 계획이다.
후배 연구자에게 하고픈 조언을 청하자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5~10년 동안 눈 딱 감고 일에만 집중하다 보면 기회가 열린다. 인생에 보장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고자 하는 일에 ’올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최고 암연구소 떠나 서울대에 둥지 튼 교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3월 19일 토요일

[동일본 대지진] 구로다 후쿠미 “누가 울면 같이 울어주는 이가 정 많은 한국인들이죠” - 중앙일보 뉴스

 

동일본 대지진] 구로다 후쿠미 “누가 울면 같이 울어주는 이가 정 많은 한국인들이죠”
[중앙일보] 입력 2011.03.19 10:49 / 수정 2011.03.19 11:42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
일본에 한류(韓流) 소개 26년 … 일본 인기배우 구로다 후쿠미

일본의 인기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54). 아직 미혼인 그녀는 스스럼없이 “한국과 결혼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26년째 한국을 일본에 소개해온 ‘한류(韓流) 전도 1세대’다. 그녀의 한국 사랑은 남다르다. 한류 스타 사인을 받기 위해 집 앞에서 밤을 새우는 그런 게 아니다. 웬만한 한국인보다 한국의 지방 곳곳을 더 많이 여행했고, ‘한국의 아름다움’을 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일본에 널리 알려왔다. 몇 년 전부터는 아예 ‘구로다 후쿠미와 함께 가는 한국 여행’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일본인을 위한 관광 가이드 역할까지 한다.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 여배우, 어떤 사연이 있는지 들어봤다.
그녀는 꽤 유창한 한국어로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말을 아주 잘하시네요(일본에선 그녀가 귀화한 한국계 일본인이란 헛소문까지 나돌아 홈페이지에 이를 해명하는 글까지 올렸을 정도다).
“1984년 일본 NHK 방송이 처음 TV와 라디오에서 한글 강좌를 시작했을 때부터 한국어 공부를 독학으로 했어요. 한·일 월드컵(2002년)을 앞두고 2001년 한국에 살면서 서강대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기도 했고요. 가장 높은 등급으로 입학해 3개월 만에 끝냈어요.”
●왜 한국어를 배웠나요.
“지금은 많은 일본인이 한류, 한류 하지만 84년까지만 해도 일본에선 한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정치적으로 민감한 남북문제 때문에 일본 언론, 특히 TV에서 한국 관련 보도가 거의 없었거든요. 민영방송들은 한국에 관한 것은 요리, 여행, 문화 같은 것들도 아예 보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자칫 시청자가 광고주를 상대로 불매운동을 벌이면 안 되니까요. NHK의 한글 강좌 이름도 한국어나 조선어가 아닌 ‘안녕하십니까. 한글 강좌’였어요. (친한, 친북이란)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요. 그러다 보니 일본 사회에선 과거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도 생길 수 없었지요. 게다가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도 남아 있어서 많은 한국인이 고생을 하고 있었지요. 저는 우리 일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해 오던 차에 한글 교육 강좌가 생긴 것을 계기로 일본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무엇보다 한국어를 알아야 했지요.”
●한국에 왜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지금의 많은 일본인이 한국 배우 배용준씨를 통해 한류에 관심을 갖게 됐듯 80년대에 본 한국 배구선수 강만수씨의 플레이에 매료된 게 계기였어요. 그러나 저는 단순히 한국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 전에 한국에 대해 여러 교육을 받아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문제로 접근했어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가 종종 ‘조선이 식민지였을 때 일본에 끌려온 한국인이 매우 힘들게 살아서 가여웠다’고 말씀하시곤 했거든요. ‘우리 일본인이 과거에 그런 일을 했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고등학교 때는 일본사 선생님이 과거 조선인 강제연행이나 간토(關東) 대지진 때 벌어진 일(일본인이 조선인을 살해한 사건들)을 설명해줬어요. 교과서에는 없는 내용인데, 프린트를 만들어 배포하고는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아 재일 한국인 차별 문제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는 인재가 되고 싶었어요.”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이었나요.
“꼭 그렇다기보다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과거 일본인이 잘못한 일을 지금도 되풀이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 사회의 동반자로서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소박하게 말하면 화가 났어요.”
●생각하신 것을 실천하는데, 한국어가 도움이 됐나요.
“85년부터 한국에 대한 언론의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서울 올림픽(88년)이 다가오는데 더 이상 이웃 나라를 모른 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을 알리는 기획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당시 일본에선 교수나 평론가밖에는 한국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배우로서 한국어를 좀 알고, 84년 말에 한국에도 갔다 왔고,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도 있던 제가 주목을 받았어요. 85년에는 일본 프로듀서협회가 한국 영화감독 배창호씨와 배우 안성기씨를 초청한 파티에서 제가 한국어로 연설한 것을 계기로 한국통 여배우로 눈길을 끌기 시작했지요. 85년 간사이(關西)TV의 아침 와이드쇼에서 처음 한국을 소개하는 리포터를 맡았죠. 이후 88년 올림픽 때까지 ‘구로다 후쿠미의 한국 로드’(후지TV의 한국 소개 정기 프로그램) 등 많은 방송국의 한국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담당했어요. 당시 일본 여자가 미숙해도 한국어로 말하려고 하자 많은 일본인이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래서 87~88년 신문에 소개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한국 관련 프로그램이 하루 3개씩 나올 정도로 많아졌어요. 그때가 1차 한류 시기였던 것 같아요.”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총리 관저에서 노 전 대통령과 인사하는 구로다(위 사진). 지난해 10월 ‘구로다 후쿠미와 같이 가는 한국여행’ 프로그램 진행 당시 관광열차 해랑호 앞에 선 구로다. 40여 명의 일본인이 참가했으며, 열차 한 량을 통째로 빌렸다.

●일본인이 한국을 찾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요.
“90년대 초 일본에서 거품이 꺼지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획기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그 전에 일본인은 돈이 많으니까, 비싸고 먼 나라를 갔어요. 그런데 경기가 나빠지면서 가까우면서도 안전하고 매력 있는 나라를 찾기 시작했지요.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94년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서울의 달인(達人)』이란 획기적 관광책자를 만들어 발간했어요.”
●어떤 책이었는데요.
“그 전까지 한국관광공사 등이 만든 서울 관광책자는 서울의 대표적 지역인 이태원, 명동, 신촌 정도만 소개하고 있었어요. 음식도 불고기 등 대표 상품뿐이었고요. 그런데 외국인인 저의 눈으로 보면 서울에는 더 많은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있더라고요. 일반적 관광 가이드북은 서울의 관광공사에 가면 공짜로 받을 수 있으니까, 그것에 실리지 않은 것을 책으로 소개하자고 생각했어요. 남대문 등 대표적 시장 이외에 경동시장이나 수산물 시장에 가 직접 생선을 사서 회와 찌개를 먹는 방법, 한증막, 시계골목, 웨딩드레스, 안경시장 등을 처음 소개했어요. 관광공사 사람들은 그런 곳이 관광상품이 될 줄 몰랐을 거예요. 『서울의 달인』은 2002년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되기도 했지요.”
●한국 어디 어디를 다니셨나요.
“지난 25년 동안 수없이 한국을 방문했어요. 한 달에 두 번 간 적도 있어요. 그런데 2002년까지는 서울을 집중적으로 소개했어요. 한국의 문화는 모두 서울에 모여 있기 때문에 서울을 잘 소개해야 일본인이 한국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2002년 이후에는 서울도 도쿄와 비슷해지고, 일본인이 충분히 서울에 가고 있으니 지방을 소개하고 싶어졌어요. 일본인은 부산, 경주는 알고 있지만 다른 지방은 잘 몰랐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알아야 한국지방의 매력을 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해 2002년 이후에는 한국에 갈 때마다 전국을 돌기 시작했어요. 2~3일 서울에 머문 후 경상도, 전라도 등 여러 지역을 찾아가는 방식이었어요. 대구에서 경주, 포항을 거쳐 울릉도에 갔다가 묵호에서 태백산, 봉화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어요. 갈 때는 사전 취재를 하고 카메라맨, 코디네이터 등 5~6명이 팀을 구성해 갔어요. 울릉도에선 오징어잡이 배도 탔어요. 한국을 일주하는 관광열차 해랑호를 타고 다닌 적도 있어요. 아마 제가 웬만한 한국인보다 한국의 지방에 대해 더 많이 알 걸요. 지난해 9월에는 일본인이 해랑호를 타는 ‘구로다 후쿠미와 같이 가는 한국 여행’이란 프로그램도 만들었어요. 열차 한 량을 모두 빌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어요. 40명 정도 탄 것 같아요.”
●여행한 곳의 내용은 어떻게 일본에 소개했나요.
“일본에서 일본어로 한국을 소개하는 ‘숟가락’이란 잡지가 2006년 재일 한국인에 의해 창간됐어요. 그때 6회 정도 ‘한국 구르구르(구석구석)’란 제호 아래 제가 다닌 한국의 지방들을 소개했어요. 사정이 생겨 더 이상 못 썼지만, 그 잡지는 지금도 발행돼요. 취재를 하기 위해 제 돈도 많이 썼어요. 어떤 때는 제가 배우라기보다는 기자라는 생각도 들어요.”
●한국에 관한 책도 많이 쓰셨는데요.
“10권 넘게 썼어요. 88년에는 한국으로 인해 나의 인생이 바뀌게 된 내용을 담은 자서전 『서울 마이 하트(My Heart)』를 썼는데, 96년 한국어판이 출판됐어요. 96년 한신(阪神)대지진이 났을 때는 재일 한국인이 많이 사는 피해 지역에서 한국인이 분투하는 모습을 전국에 전달하고 싶어 유명한 일본 사진작가와 함께 사진집을 펴내기도 했어요. 2001년 서강대에서 유학할 때는 아사히(朝日)신문이 창간한 잡지에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는데, 2003년 고단샤(講談社)에서 『이웃한 한국인 경향과 대책』이란 책으로 발간했어요. 2007년에는 도쿄대의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와 대담한 내용이 책으로 나왔고요.”
●왜 한국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열심입니까.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처음 갔던 84년에는 매우 가난한 배우였어요. 일도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그때 한·일 간 가교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영화, 드라마 등에서 30년 넘게 배우로 활동하면서 이제는 연예계의 톱클래스에 올랐지만, 돈을 벌기보다는 한·일 간 가교 역할을 위해 돈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자 의무인 것 같아요. 가족은 ‘왜 시집도 안 가고 그런 일을 하느냐’며 걱정해요. 그런데 25년이 지난 지금 나의 인생에서 이것을 빼고는 남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지금은 한류가 유행하면서 ‘나도 구로다상과 같이 되자’는 사람이 많아져 보람을 느껴요.”
●한류가 왜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두 나라 모두 아시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조금씩 다른 차이점이 매력 포인트가 돼요. 일본은 섬나라여서 폐쇄적인 데다 이성적인 마음과 불교의 영향이 강해 말하지 않는 문화예요. 그러나 한국은 대륙 국가여서 자기 표현력이 강하고 정(情)이 많은 문화예요. 내가 울고 있으면 같이 울어주는 사람들이 한국인이고, 일본인은 차분하게 진정하라고 말을 하지요. 그런데 일본인도 역시 외로울 때가 많기 때문에 따뜻하게 말해주는 것을 좋아하지요. 일본인이 감명받는 것은 한국인의 정인 것 같아요. 한류가 유행하자 다음에는 화류(華流·중국 문화)가 올 것이라고 예상한 일본인도 있었지만, 나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중국 문화는 처세술과 성공을 중시하는 문화여서 한류와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지요.”
j 칵테일 >> 태평양 전쟁 끌려간 한국인 위해 비석도 세워
구로다 후쿠미는 지난해 10월부터 포항시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등 한국과 일본의 교류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 때 만들어진 ‘한국 방문 환영(welcome to Korea) 시민 협의회’의 일본 측 홍보위원(1999), 2002년 한·일 월드컵 일본 측 조직위원회 이사(1999), 한국관광 명예홍보대사(2007), 도쿄 일·한 교류 축제 실행위원(2007) 등도 지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그는 제2회 대한민국한류산업대상(2010년 12월), 한·일문화대상(2007년, 사회공헌 부문)을 수상했고, 2007~8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주일 한국대사·한국관광공사 사장 등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과거사 반성도 실천에 옮겨 2009년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으로 참전해 숨진 한국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서울 근교의 한 절에 ‘귀향 기원비’를 세웠다.
>> “한국인이 못 보는 한국, 나는 볼 수 있어요”
구로다 후쿠미의 가장 큰 소망은 한국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배우로서 가장 소중했던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엉뚱하게 “없다”며 “그것보다 나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한국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한국의 달인(達人)』 책이 가장 소중했고, 지금부터는 ‘한국 구르구르(구석구석)’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죽기 전 나의 소망”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면 곧바로 한국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한국의 다양한 문화, 역사, 먹을거리, 볼거리, 체험거리, 즐길거리를 깊이 있게 담을 생각”이라며 “한국인에게는 안 보이는 것을 외국인인 나는 볼 수 있기 때문에 꼭 하려 한다”고 밝혔다. 또 “이런 프로그램의 경우 일본 방송은 세 달간 13회 방송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계속할 수도 있다”며 “일본에서 먼저 방송한 후 세계 각국에서 방송하면 한국으로선 재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기획안을 만들어 스폰서를 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글=오대영 가천의대 교양학부 교수,
사진=박종근 기자

[동일본 대지진] 구로다 후쿠미 “누가 울면 같이 울어주는 이가 정 많은 한국인들이죠” - 중앙일보 뉴스

2011년 3월 16일 수요일

mk 뉴스 - 최후의 50인 내가 남을테니 당신들은 떠나라

 

최후의 50인 "내가 남을테니 당신들은 떠나라"

모두 대피한 후쿠시마 원전 자원해서 남아

기사입력 2011.03.16 17:13:37 | 최종수정 2011.03.16 19: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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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원자력발전소에 가버렸어. 엄마가 그렇게 우는 것은 처음 봤어. 발전소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해 모든 사람을 지키려고 필사적이야. 모두 살아야해. 진짜 살아야 해. 아빠, 꼭 돌아와."
"후쿠시마 원전에서 작업하는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는데 `우리가 죽더라도 절대로 노심용해는 일어나지 않도록 할 거야`라고만 돼 있었어."
`사호`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 트위터에 올라온 `최후의 결사대 50인`에 관한 글이다. 연쇄 폭발과 함께 방사성 물질 대량 방출로 피폭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후쿠시마 제1 원전에는 직원 50명이 최후까지 남아 일본을 피폭에서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제1 원전에서는 15일 원자로 추가 폭발과 함께 핵연료봉이 녹아내리는 노심용해 위험이 높아지자 작업 중이던 800명 가운데 자원자 50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을 모두 긴급 대피시켰다. 노심용해가 일어나면 최소한 원전 반경 50㎞ 주변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변한다.
현재 남아 있는 50명은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목숨을 내건 인원이다. 인간이 맨몸으로 15분밖에 버틸 수 없는 분량의 방사선이 내리쬐는 환경에서 이들 `최후의 결사대`는 바닷물을 끌어올리고 붕소를 쏟아부으며 원자로를 식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후쿠시마 원전은 냉각장치가 못 쓰게 되자 바닷물로 원자로를 식히고 있다. 바닷물을 투입하면 원자로 압력이 높아져 내부 기체를 빼주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기체에는 방사성 물질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이 작업 자체만으로도 매우 위험하다.
50명 가운데 일부 인원은 핵폐기물을 보관한 좁고 어두운 건물 내부 통로 속에서 손전등과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균열 부위를 찾고 있다. 15일부터 균열 부위를 통해 방사성 물질이 새어 나오면서 원전 주변 방사능 농도가 점차 높아지고 도쿄까지 방사성 물질이 날아가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이들 50명이 모두 피폭을 막는 방호구를 착용하고 있지만 정상인에게 1년 동안 허용되는 양의 400배에 달하는 방사선 앞에서 장시간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2호기 주변에서 측정된 방사선량은 400밀리시버트(m㏜ㆍ방사선 측정 단위)다.
뉴욕타임스(NYT)는 "일본 후생성이 15일 작업자의 방사선 노출 법정 허용치를 100m㏜에서 250m㏜로 높였다"면서 "이는 작업자들이 좀 더 오랫동안 원전에서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일본 당국은 최후까지 남은 직원 50명의 신원과 작업 기간 등에 대해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그저 이들이 자원해 최후 잔류자로 선발됐으며 원전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작업을 한다고만 밝혔다.
한편 지난 12일에는 원전 구조를 잘 파악하고 있는 당직 팀장이 1호기 붕괴를 막기 위해 격납용기 뚜껑을 개방하는 작업을 하다 100m㏜의 방사선에 노출됐다. 그는 피폭 영향으로 구토와 어지럼증 등을 호소해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러나 그의 용기로 1호기는 격납용기가 손상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당시에도 화염을 일으키며 방사성 물질을 뿜어내는 원자로에 모래와 흙을 뿌린 헬리콥터 조종사들은 스스로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 목숨을 잃었다.
[이상훈 기자]

mk 뉴스 - 최후의 50인 내가 남을테니 당신들은 떠나라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잡고있던 딸 아이의 손이…” 日쓰나미 생존자들의 증언 : 야후! 미디어 - 세상을 만나는 창

 

“잡고있던 딸 아이의 손이…” 日쓰나미 생존자들의 증언

[경향신문] 2011년 03월 14일(월) 오후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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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과 함께 몰려온 쓰나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생존자들은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지만 가족과 친구, 이웃들이 물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은 충격과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실종된 미야기현 나토리 북쪽에 살았던 이시카와 타츠로씨는 14일 AP와의 인터뷰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집을 덮쳤을 때 죽는 줄로만 알았다”고 전했다.
그는 “집이 무너지면서 내 몸도 파도 아래로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이제 죽는구나 하는 순간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발코니 아래로 헤엄쳐 들어가 창문을 뚫고 집 밖으로 빠져나와 물 위로 올라갔다”며 끔찍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주민 2만3000여명 가운데 1만7000여명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에 살던 시츠코 오야마씨는 이번 쓰나미에서 간신히 살아났다. 하지만 함께 있던 딸을 잃었다.
그는 NHK와의 인터뷰서 “쓰나미가 집을 덮쳐 물 속으로 휩쓸려 가면서 잡고 있던 딸 아이의 손이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필사적으로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사방에서 벽돌과 잔해들이 가로막았다. 난 뭐라도 붙잡기 위해 몸부림 쳤다. 결국 난 살아남았지만 딸은 어딘가로 휩쓸려 갔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기적적으로 구조된 생존자들도 있다.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갔다 이틀만에 구조된 히모리츠 신카와씨(60)도 그 중 한명이다.
지붕 조각에 의지해 표류하던 그는 후쿠시마현에서 15㎞ 떨어진 해안에서 일본 방위성에 구조됐다. 그는 CNN에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인 줄 알았다. 난 지붕을 붙들어 살았지만 부인은 쓰나미에 쓸려가 버렸다”고 말하며 울음을 떠뜨렸다. 또 “그동안 내가 있는 곳에 가까이 왔던 헬리콥터와 선박들은 모두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도 했다.
이밖에도 쓰나미에 날아가 찌그러진 차 안에서 노인 3명이 구조되기도 했다. 한 여성은 파도에 이곳저곳 휩쓸려 다니다 나무 위에 매달려 목숨을 구했다.
미야기현 미나미산리쿠초 지방정부에서 일하는 한 남성은 “지난 금요일 쓰나미 경보가 울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부 노인과 장애인들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마 이들 대부분이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뉴스팀>

“잡고있던 딸 아이의 손이…” 日쓰나미 생존자들의 증언 : 야후! 미디어 - 세상을 만나는 창

2011년 3월 5일 토요일

취업 합격율 90%, 日 증명사진의 비밀 | Daum 미디어다음

 

취업 합격율 90%, 日 증명사진의 비밀

제이피뉴스 | 안민정 기자 | 입력 2011.03.05 10:07 | 수정 2011.03.05 17:19 | 누가 봤을까? 20대 여성, 대구

아래 위 검은 양복에 꽉 졸라맨 넥타이, 군기가 바짝 들어간 사회 새내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진관 안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반드시 희망하는 회사에 합격하리라'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이력서용 증명사진을 찍으러 온 취업 준비생들이다.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증명사진은 집에서 찍어도 그만이고, 전철역에 널린 즉석 증명사진 기계를 이용해도 그만이다. 어쩌면 이 편이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취업'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있는 새내기들의 마음은 다른가보다. 도쿄 도심에서도 약 1시간 가량 떨어진 가나가와현 타카츠, 눈에 띄지 않는 뒷골목 동네 사진관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이 몰려오고 있다.

졸업시즌을 앞두고 있는 일본에서는 해마다 낮아지는 취업률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해 취업률은 60.8%, 열 명 중 네 명은 취업에 실패했다. 올 3월이 지나면 새로운 기록이 나오겠지만, 60%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일본은 대학 3학년쯤 대부분 취업이 결정된다. 3학년 초부터 취직 활동을 시작하여, 3학년 말에는 거의 대부분이 취업 내정을 받았다. 그러나 요즘은 4학년이 되어서도 취업활동을 계속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상태. 내정을 받고도 취소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취업 재수, 삼수생이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취직 불황시대에 '이력서 사진의 신화', '합격률 90%의 증명사진'이라는 현란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사진관이 있다. 가나가와현 타카츠에서 스즈키 가츠아키(65), 스즈키 요리에(64) 부부가 경영하는 '사진 다나카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다나카야는 1941년에 창업해 3대째 내려오는 전통의 사진관이다. 유난히 몸이 약한데다 결핵을 앓고 있던 스즈키 씨 아버지가 주변의 조언을 얻어 고른 사업이 사진관.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을 대신해 스즈키 씨 어머니가 사진관을 이어나갔고, 1968년 스즈키 씨가 뒤를 이었다.
사진을 특별히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고 당연히 가업을 이어야겠다고 결심한 스즈키 씨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경력을 쌓은 후 다나카야를 맡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상호에 '~야'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은 주인 이름을 넣은 것이지만, 창업 당시 밭 한가운데 있다고 하여 '스즈키야'가 아닌 '다나카야(田中, たなかや)'가 되었다고 한다.
사진관 다나카야는 1977년 스즈키씨가 아내 요리에 씨를 맞이하면서 부부 사진관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남편 스즈키 씨가 빛을 조절하면, 요리에 씨가 메이크업, 코디네이트를 담당했다. 요리에 씨는 코디 역에만 그치지 않고 각 사진에 걸맞는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분위기 메이커로서도 활약했다.
아직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오면 울지 않도록 노래를 불러주었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표정 관리가 안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저것 수다를 떨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특히, 취업을 앞두고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을 찍으러 온 학생들에게는 90% 합격율의 비결을 남김없이 들려주고 있다.
"오래동안 많은 취업준비생들을 봐 오면서 얼굴이나 옷 매무새, 걸음걸이나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격을 파악하게 되었어요.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에도 합격, 불합격이 보이는 것이죠. 현 상태로도 합격할 것 같은 학생에게는 더욱 용기를 북돋워주고, 불합격의 태도가 보이는 학생에게는 따끔하게 조언을 합니다. 제 말을 과연 들어줄까, 어떻게 하면 잘 전달될 수 있을까, 늘 고민합니다" 요리에 씨가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사진관에 있는 서너시간 동안에도 십 여명에 가까운 취업준비생들이 다녀갔다. 증명사진을 찍는데 한 사람당 걸리는 시간은 대기 시간을 포함하여 약 20분 정도. 보통이면 "찍습니다" 한 마디에 찰칵, 찰칵, 찰칵. 1분도 안되는 시간에 촬영이 끝나버리지만 다나카야의 촬영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일단 다나카야에 온 손님은, 자신이 사진을 찍으러 온 이유, 이제까지 사진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 감추고 싶은 얼굴의 특징 등 자세한 앙케이트지를 작성해야 한다. 증명사진 한 장 찍는데 너무 번거로운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신을 나타내는 증명사진 한 장은 때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앙케이트지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면 요리에 씨가 다가와서 사진 찍기 전에 필요한 조언을 해 준다. 카메라에 비추었을 때 눈썹이 살짝 짝짝인 여성에게는 "그냥 볼 땐 괜찮은데 카메라에 비추면 눈썹이 짝짝으로 보인다. 미안하지만, 이쪽 눈썹을 더 그려넣어도 될까"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자신감이 부족해보이는 남학생에게는 "이력서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력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한 글씨와 증명사진, 그리고 지원동기이다. 컴퓨터로 쓰는 이력서도 많지만 글씨에는 사람이 드러나 있다. 글씨를 못 쓰더라도 정성스런 글씨와 아닌 글씨는 표시가 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눈에 띄는 증명사진, 꼼꼼하게 지원동기를 썼다면 합격이 틀림없다"며 각자 개성에 맞는 조언으로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오는 취업 준비생들에게 요리에 씨는 지친 기색없이 격려의 말을 몇 번이고 들려주었다. "인생은 운과 인연과 타이밍, 이 세 가지입니다. 이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이 움켜쥐어야 하는 것입니다" 벌써 환갑을 넘은 머리 하얀 아주머니의 말씀에 갓 스물을 넘긴 청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회사라면 정년 퇴임을 하고도 한참 지났을 나이인 스즈키 부부. 그러나 이들 부부는 젊은 점원들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활력이 넘쳐보였다. 계속해서 손님을 치르다보면 목이 타기도 하고 체력이 모자랄 듯도 한 데, 그런 내색 한 번 없이 그 어떤 손님에게도 애정과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저는 젊었을 때 출산을 도와주는 산부인과 조산부였습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산모에게 힘을 내게 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 제 일이었지요. 그랬기 때문이었을까요. 취직이라는 인생의 큰 산을 앞둔 학생들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학생들이 용기를 낼 수 있겠끔 응원을 해 주는 일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다나카야에는 시끄러운 아줌마가 있대'라는 입소문이 퍼져 많이들 찾아주시더군요"
겸손하게 말하는 요리에 씨지만 그녀의 '시끄러운 조언(?)' 덕분에 다나카야는 일본 전국에 '왠지 운이 좋아지는 사진관', '서류전형 합격을 보장하는 증명사진'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취재를 간 아침에도 나라현에서 야행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려 다나카야에 찾아온 모자가 있었다.
모자가 다녀간 후 도착한 어머니의 편지에서 알게된 내용이지만, 사진을 찍은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였다고 한다. 그랬던 아들이 자신의 꿈을 찾고 간호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첫번째 응시 학교에서는 탈락. 마지막 기회인 학교에서 꼭 합격할 수 있도록 다나카야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사연이 적혀있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다보니 많을 때는 하루에 약 7~80명, 올 해에 들어서만 약 1200여 명의 취업준비생이 다나카야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갔다.

'합격율 90%의 사진관'이라는 놀라운 수식어는 요리에 씨의 실험에서도 검증되었다. 몇 년 전 요리에 씨는 대학 다니는 딸에게 많은 여대생들의 꿈인 방송국 아나운서와 스튜어디스 서류전형에 응시해줄 것을 부탁했다.
딸은 완벽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요리에 씨가 평소 누누히 강조하던 깨끗한 글씨, 좋은 증명사진, 확실한 지원동기를 써 넣은 이력서를 작성하여 방송국, 항공사에 제출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요리에 씨 딸은 4개 메이저 방송국과 항공사 모두 서류전형 합격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달성했다. 합격율 90%의 사진관 신화는 이렇게 증명된 것이다.
그동안 다나카야의 소문을 듣고, 많은 방송국과 신문사, 잡지사가 다녀가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2월에는 NHK에서 사진관 다나카야와 스즈키 부부 이야기를 담은 '4cm×3cm의 응원'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그러자 방송 후, 전국 각지에서 취업활동을 하는 학생들, 학생의 부모님 등 많은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한다.
벌써 오래 전에 은퇴를 하고도 남을 나이이지만, 스즈키 씨 부부는 이들의 응원과 사진을 찾는 손님들 때문에 지금도 마음껏 쉬지를 못한다. 쉬기는 커녕, 급한 부탁이 들어오면 영업시간을 넘겨 새벽까지 꼬박 사진을 만들 때도 있다. 특히 하루종일 손님을 응원하고 파워를 전달하는 요리에 씨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픽 쓰러질 때도 많다고 한다.
그래도, "덕분에 합격했습니다"라며 전국 각지에서 날아오는 기분 좋은 편지, "조언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며 보내오는 소소한 과자 선물들을 받을 때면 마치 자식이 합격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손님들이 기쁨을 느낄 때마다 '사진관을 하길 잘 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는 스즈키 씨 부부. 요즘은 특히 전국에서 배달되는 감사의 과자 덕분에 "살쪄서 고민이예요"라며 요리에 씨가 웃는다.
하지만 영원히 현역에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스즈키 씨는 얼마전부터 슬슬 3대째를 이어갈 아들에게 사진관을 맡기고 여가를 즐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가라고 해도 사진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으로 사진관 협회가 만드는 잡지에서 취재와 글을 쓰기도 하고, 전국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한다.
요리에 씨의 꿈은 현역에서 은퇴하면, 조산부로서의 경험과 자신의 반생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응원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 이야기, 그것을 출판물로 남기고 싶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스즈키 부부에게 합격율 90%의 좋은 증명사진의 조건을 물었다.
"좋은 증명사진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들과 똑같은 포즈에서도 얼마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자기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이력서에 붙여서야 되겠습니까.
등을 곧게 펴고 귀를 드러내고, 눈을 통해 '내가 꼭 이 회사에 들어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 좋습니다. 자신도 만족할 수 있는 자신감있는 표정으로 찍은 사진이 좋은 사진이지요"라고 말하는 스즈키씨.
스즈키 씨 부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우리는 어쩌면 '이력서 같은 거 정성들여 쓸 필요없다'고 판에 박힌 이력서를 제출해오지는 않았을까.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증명사진, 대충 찍어 보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력서의 가장 기본이라는 깨끗한 글씨, 정성들인 증명사진, 열의 넘치는 지원동기도 갖추지 않은 채, 그러면서도 우리는 '요즘 취직하기 힘드니까'라며 세상탓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인생은 운과 인연과 타이밍, 그것을 움켜쥐는 것은 자신'이라는 요리에 씨의 말이 다시 한 번 머릿 속에 맴돌았다.

(사진- 사진관 다나카야와 스즈키 씨 부부, 촬영/ 이승열 기자)

(맨 아래 사진- 조산부 시절에 우연히 잡지에 나왔다는 요리에 씨)

취업 합격율 90%, 日 증명사진의 비밀 | Daum 미디어다음

2011년 3월 4일 금요일

mk 뉴스 - 26세 손녀와 한 대학 다니는 75세 박경희 할머니

 

26세 손녀와 한 대학 다니는 75세 박경희 할머니

전단지 돌리냐며 오해도…80세 넘어서도 공부해야죠

기사입력 2011.03.04 15:51:00 | 최종수정 2011.03.04 17: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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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다섯 된 지금도 공부가 너무 재밌어요. 여든 살 넘어서도 공부할 수 있나 계속 도전할 겁니다." "할머니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랑 같은 학과에 진학하기로 했는데 정말 잘한 결정인 것 같아요." 할머니 박경희 씨(75)의 꺼지지 않는 학구열이 손녀 장재은 씨(26)에게까지 옮겨 붙으며 두 사람이 같은 학교 같은 학과 선후배 사이가 돼 화제다. 박씨가 지난해 원광디지털대학교 약물재활학과 3학년으로 편입학한 데 이어 손녀 장씨도 올해 같은 학과 3학년으로 편입한 것이다.
박씨는 요즘 공부하는 자신의 모습에 너무 행복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부를 권유하고 있다. 손녀도 박씨의 거듭된 권유로 같은 학과 후배로 들어오게 됐다.
"젊은 사람이 한 번 읽을 거 난 열 번 읽어야 돼. 매일 밤늦게 자요. 근데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참 행복합니다. 살림하느라 아무것도 모르다 정신분석, 심리학 이런 것들 배우니까 새록새록 배우는 재미가 커요."
같은 또래 친구들에게도 입학을 권유해 공부해 봤지만 다들 한 학기 만에 그만두기 일쑤였다. 하지만 박씨는 80세 넘어서까지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며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공부를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가 몇 살까지 공부할 수 있나 시험해 보고 싶어요. 일단 여든 살까지 해보고 더 할 수 있으면 계속 공부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박씨의 만학은 2003년부터 시작됐다. 1956년 이화여대 사학과에 입학해 교수의 꿈을 키우다 1958년 3학년 1학기 때 결혼하면서 학교 졸업을 못 하게 됐다. 당시 이화여대는 재학생이 결혼하면 자동으로 학생을 중퇴시켰다. 하지만 이화여대가 2003년 107년 만에 박씨와 같은 경우에 대한 구제책으로 재입학제도를 내놓으면서 박씨는 2003년 이화여대 사학과에 재입학했다.
처음 들어가서는 공부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예전에는 칠판으로 강의를 들었는데 요즘은 파워포인트를 활용한 강의가 대부분이다 보니 뭘 봤는지도 모르겠고 화면도 훌쩍 넘어가서 적응하기 어려웠다. 독수리 타법에 머물러 있던 컴퓨터 실력으로 밀려드는 학과 과제를 처리하는 것도 문제였다.
"재입학했는데 총장님이 요즘은 상대평가니까 점수 봐달라고 하는 게 안 통한다고 겁부터 먼저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공부했어요."
수업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대학에서 공부한다고 업신여기는 분위기도 박씨를 힘들게 했다. 학교 정문을 출입할 때 도토리 줍는 할머니로 오해받아 가방을 열거나, 교내를 걸어가다 홍보전단지 돌리는 사람으로 오해받아 시비가 붙은 적도 많았다. 그래도 공부가 재밌어서 이런 수모들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나이 들어서 다시 대학 들어가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공부하니까 너무 좋아서 안 좋은 일들을 겪어도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그냥 죽기 아니면 살기로 악착같이 공부하니까 젊은 학생들도 따라잡을 수 있었어요. 총장님도 제가 수업에 들어가면 다른 학생들이 할머니에게 뒤질쏘냐 하며 정신을 바짝 차려 수업이 활기차게 된다고 좋아하시던데요."
이화여대 졸업 후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 원광디지털대 약물재활복지학과에 들어가게 됐다. 가족 중에 의사들이 많아서 약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막상 공부하다 보니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요즘 학과 차원에서 교도소, 가평 꽃동네에 가며 봉사활동 하고 있는데 약물의 나쁜 점을 모르고 남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호기심에 그냥 먹는 건데 기가 막혀요. 제가 힘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약물 중독 예방하는 여론을 만들고 도움을 주는 물꼬를 트고 싶어요. 오죽하면 손녀까지 이 길로 끌어왔겠어요."
손녀 장씨도 처음 할머니가 학과 진학을 권유할 때는 시큰둥했으나 점점 할머니의 설득에 이끌리다 보니 이제는 약물재활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얼마 전 할머니를 따라 청주교도소에 처음 봉사활동을 갔는데 한 마약범죄자분이 제가 설명하는 마약 끊는 법에 대해 굉장히 열심히 적더라고요.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여 큰 보람을 느꼈어요. 앞으로 학과 공부를 마친 뒤 미국에 가서 약물재활에 대해 더 많이 알아와 국내에서 마약 오남용을 막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박씨는 늦게나마 약물재활학과에 들어간 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마음공부를 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서 지금 자신이 공부를 하며 살 수 있다는 데 감사함을 느끼고, 약물 중독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데서도 마음이 뿌듯해지는 걸 느낀다.
"얼마 전 프로이트의 `이타주의`를 수업에서 배웠는데, 이타주의가 남을 위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한 거더라고요. 저도 앞으로 계속 봉사하려고 그러고, 손녀에게도 평생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라고 선배로서 조언하고 있습니다."
[김제관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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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뚱뚱한` 사람 건강하고 오래산다 : 야후! 미디어 - 세상을 만나는 창

 

`조금 뚱뚱한` 사람 건강하고 오래산다

[매일경제] 2011년 03월 04일(금) 오후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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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을 받을 때 과체중이라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오히려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최초로 제시됐다.
이에 따라 병ㆍ의원에서 비만의 판정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는 BMI(체중(㎏)을 신장(m)의 제곱으로 나눈 값)지수를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에게 적용하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의료계는 그동안 BMI(Body Mass Index)가 25 이상이면 과체중으로 판정을 내리고 고혈압, 심근경색, 당뇨병 등 성인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며 체중 감량을 권고해 왔다.
하지만 서울대 의대 유근영 교수, 강대희 교수, 박수경 교수가 주도해 7개국 19개 코호트(cohort)로 구성된 114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아시아인들을 평균 9.2년 이상 장기간 추적 관찰한 결과 BMI가 22.6에서 27.5인 경우 사망할 확률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연구는 2005년 출범한 100만명 규모의 아시아 코호트 컨소시엄이 이룬 최초의 연구 결과로 신뢰성이 높은 과학적 증거로 평가된다.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뉴잉글랜드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도 이번 연구 가치를 인정해 2월 24일자에 게재했다.
그동안 BMI지수는 체격 조건이 큰 유럽이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수행된 연구 결과에 근거하는 것이어서 '과체중'(BMI 25 이상)이나 '비만'(BMI 30 이상) 기준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됐다.
하지만 직접적인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인구 집단을 장기간 추적 관찰해야 하는 코호트 연구가 필요해 아직까지 잘못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이번 연구 결과 아시아인 중 특히 한국 중국 일본 사람들은 비만지수(BMI)가 22.6에서 27.5인 경우가 사망할 확률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BMI가 15 이하로 극심한 저체중의 경우 사망할 확률은 22.6~25.0을 기준으로 했을 때보다 무려 2.8배나 높았다. 비만지수가 15.1~17.5일 때에는 1.84배, 17.6~20.0이면 1.35배 높았다. 이에 반해 BMI가 35 이상으로 높은 경우 사망할 확률은 1.5배나 높았다

`조금 뚱뚱한` 사람 건강하고 오래산다 : 야후! 미디어 - 세상을 만나는 창

2011년 3월 2일 수요일

서울경제 : 오늘도 무사히… 일 시작전 입버릇처럼

 

"오늘도 무사히…" 일 시작전 입버릇처럼

■ 감정 노동자들의 비애
생떼…모욕…성희롱 다반사

강희경기자 kstar@hk.co.kr

감정노동자들은 손님에게 성희롱 등 모욕적인 일을 당해도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이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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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자들은 손님에게 성희롱 등 모욕적인 일을 당해도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이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야 이 XX야, 이 곰팡이 안보여?" 지난주 서울의 한 대형 마트. 30대 남성이 떡국용 떡에 곰팡이가 생겼다며 욕설과 함께 떡 봉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던 40대 여성 판매원 A씨는 조심스럽게 "고객님, 떡을 냉장고에 보관하셨죠?"라고 물었다. 남성은 "겨울이라 밖에 뒀는데, 뭐가 문제냐"고 받았다. 날짜를 따져 보니 열흘 이상 떡을 상온에 방치한 것이다.
A씨는 화가 치밀었지만 자세를 가다듬고 환불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 남성은 "언론사에 제보하겠다"며 목청을 더 높였다. 그는 서너 시간 동안의 실랑이 끝에 5만원짜리 상품권을 받고서야 돌아갔다. A씨는 "이런 손님이 어쩌다 나타나야 '희한한 사람 다 있다'생각할 텐데,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런 일을 당하니 마트에는 이상한 사람만 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매일 '오늘도 무사히'라고 기도하며 일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의 계산원 판매원, 호텔이나 음식점의 종업원 등 감정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미소 뒤에는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통이 숨어 있다. 제품에 하자가 있다며 화를 내며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환불을 요구하거나 보상을 바라는 고객은 부지기수고, 제품 구입 후 마음이 바뀌자 수 차례 배송과 반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모욕적인 언사에 성희롱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고통조차 가슴에 묻고 미소로 고객을 맞아야 하는 게 감정노동자들의 슬픈 운명이다.
백화점에서 가구를 판매하는 윤모(51)씨는 얼마 전 '진상' 고객에게 걸렸다. 67만원짜리 식탁을 배송했는데 고객이 사소한 하자를 문제삼아 교환을 요구했다. 일단 반품 조치하고 새 제품을 재배송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품 다리와 패널이 완벽하게 맞지 않아 틈새가 생긴다며 교환을 요구했다. 윤씨가 온갖 항의를 들으며 배송과 반품을 반복한 것만 10여 차례. 배송팀과 함께 제품을 들고 고객 집을 직접 방문해 식탁 위에 널브러진 반찬통까지 정리해 냉장고에 넣고 새 제품 설치와 걸레질까지 해주고 온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윤씨는 허리 굽혀 사과해야 했다. 그러나 고객은 끝내 환불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윤씨는 "처음부터 환불을 요구하면 될텐데 끝까지 판매원을 괴롭히며 물고 늘어지는 손님이 있다"며 "백화점이나 고객 모두 판매원에게만 서비스와 판매 책임의 짐을 모두 지우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성희롱까지 당하는 사례도 있다. 부산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는 이모(40)씨는 몇 해 전 밤 늦게 호텔 바에서 주문을 받던 중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손님 한 명이 다리에 손을 갖다 댄 것. 이씨가 반사적으로 손을 쳐내며 화를 냈지만 손님은 술을 다 마시고 바를 떠날 때쯤에야 건성으로 사과를 했다. 지금도 당시의 굴욕감과 당혹감이 생생하다는 이씨는 "손님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를 하려면 직장을 그만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감정 노동자들의 감정은 세월에 닳아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의 말처럼 감정 노동자들은 인간적 모멸, 모욕에도 참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하루 11시간 근무에 월80만~90만원(대형 마트 계산원 기준)의 박봉이지만 그나마 해고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유영자 홈플러스 노조 지부장은 "대부분의 감정 노동자가 저임금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아 늘 회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며 "정신적 스트레스, 우울증 증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어도 상담 한 번만으로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는 않을까 무서워 혼자 속으로만 삭이며 넘어가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서울경제 : "오늘도 무사히…" 일 시작전 입버릇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