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8일 토요일

[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한국 활에 빠진 독일인 弓士, 칼 자일링거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한국 활에 빠진 독일인 弓士, 칼 자일링거

  • 신동흔

    입력 : 2011.11.26 03:18 | 수정 : 2011.11.26 23:03

    弓하니 通했다···"로빈 후드의 활도, 윌리엄 텔의 활도 날 매료시키지 못했다"
    시작은 엔지니어의 호기심
    젊을 때 동양 활에 반했다 역학 원리·제조법 궁금해
    터키로, 몽골로, 中으로···한국서 긴 여정이 끝났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뒤편 황학정에서 자일링거씨가 활을 들어 과녁을 겨누고 있다. 서양 활과 아시아 여러 나라의 활 을 섭렵한 그는 우리 전통 각궁에 반해 한국 궁사가 되었다. 허리에 두른 궁대에 다섯 발의 화살을 꽂고 사대에 올라 모두 쏘고 내려오는 것을‘한 순’이라고 한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인생 후반기를 한국의 활에 빠져 지낸 독일인, 칼 자일링거(Karl Zeilinger·67). 엔지니어였던 그는 청년시절부터 동양인들이 사용한 각궁(角弓)의 비밀을 찾아 긴 여정을 떠났다. 한편으로 엔지니어로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젊은 시절 마음에 품은 궁금증을 풀기 위한 작업을 쉬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터키와 몽골, 중국으로 '완벽한 활'을 찾아 떠났고, 그 여정은 아시아의 동쪽 끝인 한국에서 끝났다.
    26년 전 한국의 각궁을 처음 접한 이후 그는 해마다 우리나라를 찾아 전국의 활터를 돌며 활 쏘는 법을 익히고, 궁장(弓匠)들의 공방을 찾아가 제조 과정을 탐구해왔다. 국내의 수많은 궁사들조차 "이제 한국 활에 대해 그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그의 집은 한국 활을 포함해 전 세계 활 50여점과 관련 서적 400여 권을 소장한 작은 박물관이라고 한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사직동의 활터 '황학정(黃鶴亭)'에서 자일링거씨는 145m 건너편의 과녁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그는 이곳의 평생 회원이다. 활터 뒤편 사무실 한쪽 벽 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명판들 사이에 그의 한국 이름 '채림거(蔡林巨)' 석 자가 보였다. 그는 지난 10월말 한국에 들어와 육군사관학교 화랑정에서 열린 '장안편사'(長安便射·조선시대 한양에서 지역마다 편을 갈라 벌이던 활쏘기 경기) 행사에 참가한 뒤, 남원 황산정, 안산 반월정, 파주 성호정 등 전국 10 여곳의 활터를 순례한 뒤 돌아갔다. 한국에서 올해의 마지막 활 시위를 당기고 내려오는 그를 만나 활에 대한 열정 하나로 시작된 긴 여정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에서 만난 자이링거씨. 서양 활과 아시아 여러 나라의 활을 섭렵한 그는 우리 전통 각궁에 반해 한국 궁사가 되었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진정한 角弓을 찾아서…
    40여년 전 독일 뉘른베르크의 한 박물관,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있던 20대 청년 칼 자일링거는 터키 활 전시 코너 앞에 서있었다. 활의 특이한 형태가 눈을 사로잡았다. 서양의 전통 활과 달리 둥글게 말려져 있는 각궁이었다. 특수화살을 사용하면 최고 800m나 날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병사들이 사용한 이 활의 위력 앞에 한때 유럽인들은 벌벌 떨어야 했다.
    ―어떻게 활에 빠져들었나.
    "나는 엔지니어다. 어릴 때부터 병장기에 관심이 많았다. 고대 무기는 고대 과학 기술의 집약체다. 그리스와 로마, 페르시아의 유물 구경을 하러 박물관을 자주 다녔는데, 17세기 오스만튀르크 유물에 섞여 있던 강력한 무기 '터키 각궁'(horn bow)에 빠져들었다."
    ―각궁의 어떤 점이 당신을 매료시켰나.
    "서양 활과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어떤 역학 원리가 작동하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미 대학 시절에 각궁의 유래지를 찾아 터키의 이스탄불로 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해답을 얻었나.
    "터키에는 이미 200년 전에 활을 쏘고 만드는 전통이 사라지고 없었다. 활에 관한 지식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시아 지역의 활은 어떻게 알게 됐나.
    "각궁에 대한 자료를 직접 수집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터키 외에 중국과 인도, 중앙아시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각궁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궁은 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오므라져 있는 활을 반대로 뒤집어 시위를 걸고, 한 조각의 나무가 아니라 무소뿔과 쇠심줄 등 여러 재료를 이용한 '복합궁'이란 것도 알게 됐다. 아, 일본 활은 예외다. 일본인들은 긴 대나무 활을 썼다."

    ―한국 활에 대해선 어떻게 알게 되었나.
    "1985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그전에 나는 몽골의 나단 축제에 참가했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몽골 전통 축제에 참가해 그 옛날 각궁을 어떻게 쏘았는지 원형(原形)을 보고 싶었다. 몽골 궁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으로 가는 게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무척 흥분돼 있었다. 몽골에서 '한국 각궁이 가장 강력하고 한국인들이 활을 잘 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에다, 당시 한국의 양궁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휩쓸고 있었다. '활쏘기'가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나라에 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한국 역시 활쏘기가 그렇게 대중적 스포츠는 아닌데….
    "처음 공항에 내려 호텔로 이동하는 사이에 길거리를 유심히 살폈지만, 활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실망스럽기는 했다."(웃음)
    ―황학정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
    "아무도 서울에서 활 쏘는 곳을 몰랐다. 호텔 비즈니스 센터에서 어렵게 황학정 주소를 얻었다. 무작정 찾아갔고,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다. 이곳의 부사두(射頭)였던 김경원 사범을 소개받아 활을 익혔다. 해마다 찾다보니 평생회원 자격도 얻었다. 그렇게 나의 긴 방황은 끝났다."

    ―한국에 와서 당신이 원하던 대답을 찾았나.
    "그렇다. 김 사범에게 활 쏘는 법과 한국 활의 역사를 배웠다. 제조법을 설명해 주신 궁장 고(故) 김박영 선생과 시장(矢匠) 김영집 선생 등 모두 친절하고 인내심이 강한 분들이었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화살이 날아갈 힘을 얻는지 디테일한 부분까지 혹시 귀찮았을지도 모르는 나의 질문에 기꺼이 답해줬다."
    ―활에 대한 관심은 잘 알겠지만, 한국은 너무 먼 나라이지 않은가.
    "나는 공장 자동화 분야의 전문가다. 나의 옛 직장 상사는 내가 아시아의 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경제가 개방되기 시작한 중국에는 나 같은 사람이 할 일이 많았다. 회사의 배려로 나는 1988~91년까지 베이징의 지멘스 중국지사에 근무하게 됐다."
    ―중국에 근무할 때는 한국에 자주 왔겠다.
    "베이징과 서울은 지리적으로 가까웠지만, 당시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 홍콩으로 가서 비자를 새로 발급받아 다시 서울로 들어오는 과정이 번거로워 자주 찾지 못했다. 중국으로 배치될 때는 정말 신이 났는데 오히려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자주 오지 못해 더 안달이 났다. 1년에 3~4차례씩 본격적으로 찾아오게 된 것은 2004년 퇴직한 이후다."
    ―그런데 독일에는 활이 없었나? 유럽에는 명사수로 유명한 로빈 후드나 윌리엄 텔의 전설도 있지 않은가.
    "독일은 약 1000년전 활의 전통이 없어졌다. 그 이후에는 모두 석궁(cross bow)을 사용했다. 로빈 후드는 영국 이야기다. 영국 장궁(長弓)은 거의 직선에 한 조각의 나무로 된 간단한 나무활이다. 한국 각궁처럼 뒤집어 구부려 쓰는 활은 아니다."
    ―각궁은 다 뒤집어서 쓰나, 한국만 그런가.
    "모든 각궁은 뒤집어 쓴다. 그러나 한국 각궁은 무척 특별하다. 거의 완벽한 원 또는 하트 형태다. 다른 나라 각궁은 그에 비하면 한쪽만 열린 반달 모양이다."

    자일링거씨가 소장한 다양한 화살들.

    生弓, 살아있는 활에 매혹되다
    ―활은 언제부터 쏘기 시작했나….
    "나는 70년대 말부터 서양 전통 활을 익혔다. 미국에서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수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합성 소재를 사용하고 복잡한 조준 장치와 각종 보조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올림픽 스타일' 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양식 활과 한국식 활을 모두 다 쏠 줄 안다는 이야기인가.
    "처음에 서양 전통 활로 시작했지만, 한국 활을 알고부터는 오직 한국 활로만 연습했다. 가끔씩이라도 서양식 활을 쏘면 역효과를 낳게 된다."
    ―무슨 차이가 있나.
    "오른손잡이의 경우 한국 활은 오른손에 '깍지'(엄지에 끼는 고리)를 끼고 시위를 잡아당긴다. 반면, 서양활은 손가락 세 개로 시위를 잡는다. 또 각궁은 물동이를 이듯 양손을 들어 올려 내리면서 시위를 늘이지만, 서양식은 왼손으로 활을 단단히 붙잡고 시위만 잡아당긴다. 조준 방식도 다르다. 각궁은 활을 든 왼손 엄지 위에 화살을 놓고, 서양은 그 반대편에 화살을 얹는다."
    ―독일에 있을 때도 한국 활만 쏘나.
    "그것이 지난 수십년 동안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한국 각궁은 사거리가 서양 활의 두배다. 한국 활터는 과녁까지 거리가 145m인데 독일 양궁클럽은 70m에 맞춰져 있어 쏠 수가 없다. 그래서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에서만 활을 쏠 수 있었다."
    ―당신의 고향인 바이에른 지역에는 숲이 많으니까 그냥 숲에서 연습해도 되지 않나.
    "실제로 너무 활을 쏘고 싶어 숲에서 3번 정도 연습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화살을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웃음)
    ―유감스럽다.
    "두 달 전 우리 집에서 40㎞쯤 떨어진 곳에서 과녁까지 거리가 충분히 긴 클럽을 찾을 수 있었다. 늦었지만 행운이다. 이번에 독일에 돌아가면 정통 한국식 과녁을 만들어 그곳에 설치하는 것이 맨 먼저 할 일이다."
    ―활 실력은 얼마나 되나. 최고 기록을 이야기해줄 수 있나.
    "한국 활은 한 번에 5발씩 9번 45발을 쏜다. 그것을 아홉 순(巡)이라고 한다. 최고 기록은 45발을 쏴서 37발을 과녁에 맞혔다. 한국에 처음 오면 22~25발을 맞히기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스코어가 좋아진다. 베스트 스코어로 따진다면 7~8단 정도 되지만, 정식 입단 테스트를 거치지 않아 '무단'이다. 실제 입단 테스트를 하면 심리적 부담이 커 그런 성적에 훨씬 못 미칠 것이다. 최근 충북 진천에서 열린 활쏘기 대회에 나가 4등으로 입상해 상금 10만원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이 실제 대회에서의 내 최고 성적이다."
    ―활을 쏠 때 어떤 느낌인지 말해 줄 수 있나.
    "처음 내가 활을 시작할 때는 스포츠로 받아들였다. 육체적 훈련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계속 배울수록, 지금도 배우고 있지만, 좋은 성적을 내려면 마음과 몸이 '밸런스'(균형)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Upright mind, upright body'(바른 마음과 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정심정기'(正心正己)는 황학정의 모토다."
    ―심리적 안정이 필요한 것은 올림픽 종목인 양궁도 마찬가지 아닐까.
    "몇년 전 은퇴한 한 한국 양궁 대표팀 코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은퇴한 뒤 국궁을 연습했는데, 그 역시 한국 전통 활쏘기와 양궁은 전혀 다르다고 하더라. 양궁은 테크닉이 가장 중요하고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과녁을 맞히고 바람을 계산하는 것 등 서양 활은 테크닉 쪽으로 발달해왔다."
    ―당신은 서양인이어서 그런 느낌을 갖기 힘들지 않을까, 언제 처음 그런 느낌이 들었나.
    "약 5~6년 전이다. 물론 나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을 뿐 서양 문화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한국식으로 활을 쏠 때는 내가 한국인인 것처럼 느낀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이 1985년인데 불과 5~6년 전에 그런 느낌이 들었다면 꽤 오래 걸린 셈이다.
    "나는 처음엔 전통 각궁이 아닌 개량활을 사용했다.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러나 정통(original) 방식으로 만든 내 개인 각궁을 갖게 되면서 조금씩 심리적인 면의 중요성을 깨달아 갔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던 한국 영화 '최종병기 활'의 대사가 생각난다. 그 영화를 본 적이 있나.
    "아직 보지 못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DVD를 구해 볼 생각이다."
    ―쏘아 보니 정통 각궁은 무엇이 달랐나.
    "활을 쏘기 전에 활을 '올리는' 과정이 중요했다. 활을 올린다는 것은 '시위를 활에 거는 것'을 말한다. 각궁은 그 준비 과정이 간단치 않다. 먼저 활을 약 섭씨 27도의 공간에 한 시간 정도 놓아둬야 시위를 걸기 좋은 상태가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러진다. 무소뿔과 민어부레풀, 쇠심줄 등 자연 소재로만 만든 '생궁'(生弓·living bow)이어서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다. 긴 시간을 들여 활을 올리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각궁은 쏘기가 힘든가.
    "한국 활터에서도 1단부터 5단까지는 개량궁을 쓰고, 6단부터 진짜 각궁을 쓴다. 말 그대로 '생궁'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강해지고, 여름에는 약해진다. 그래서 겨울에는 약간 낮춰 조준하고, 여름에는 목표물을 좀더 위로 겨눠야 한다. 한국 궁사들을 보면 자신의 활을 '느끼는' 것 같다."
    ―생(生)은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가.
    "처음 개량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정통 한국 각궁을 쏘고 싶다'고 하니까, 궁사들이 '생궁은 힘들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의미를 몰랐다. 그런데 나중에 뜻을 알고서 매혹되었다. 각궁은 살아 있기 때문에 칠도 하지 않는다. 항상 자연 상태에 있어야 한다. 칠을 하면 활이 숨을 쉴 수가 없다. 비가 올 때도 쏠 수 없다. 장마철에는 비를 맞지 않아도 축축해진다."
    ―당신은 각궁에 직접 시위를 걸 수 있나.
    "내가 직접 활을 올려 보려다 10년쯤 전 하나를 부러뜨렸다. 대나무와 뽕나무를 이어 붙이고, 바깥은 무소뿔, 안쪽은 쇠심줄을 대어 평시엔 거의 원을 이룬 활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 시위를 거는 것인데…, 활을 잘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다. 요즘 내 각궁은 황학정 고수들이 올려주고 있다."
    ―이렇게 번거롭다면, 한국 활이 실제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을까.
    "옛날 전쟁 때는 몇달씩 활을 올린 상태로 썼다고 한다. 한국 활의 사거리는 145m다. 여기에 '애기살'(baby arrow)을 쓰면 300m 이상 날아간다. '편전'(片箭)으로 불리는 애기살은 화살 대신 얇은 대나무 통(통아)을 시위에 걸고 그 안에 한 자(30㎝) 정도 크기의 작은 화살을 넣어 쏘는 것이다. 적진에서 보면 활을 쏘긴 했는데 대나무 통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활을 잘못 쐈구나' 방심하는 순간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화살이 300m를 날아와 박히는 것이다."
    최근 영집궁시박물관에서 애기살의 사거리를 실험한 결과 428.8m를 날아갔다고 한다.
    ―애기살은 한국에만 있었나.
    "인도와 터키서도 사용한 기록이 있다."
    ―당신의 소장품 중에 애기살도 있나.
    "갖고 있다. 옛날 것은 아니고 최근 제작한 것이다. 영집궁시박물관에 몽골과 인도 각궁 두 점을 기증했는데, 그 답례로 애기살 세트를 받았다. 위험하기 때문에 실제로 쏘아 보지는 못했다."

    1 한국의 각궁 2 중국 청대의 각궁 3 일본의 대나무 활‘유미’4 영국 장궁 5 사거리를 두 배 이상 늘리기 위해 좁고 긴 대나무통에 넣어 쏘았던 작은 화살인‘애기살’(편전)./ 영집궁시박물관 제공

    "한국인 시각에서 한국 활에 대해 쓸 것"
    자일링거씨는 독일 지멘스에서 사업개발 및 동아시아지역 담당 부문장(director)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연간 3~4차례 한국에 와 활쏘기를 연마하는 한편, 한국 활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지난해에는 촬영팀과 함께 와 한국의 활터와 주요한 무형문화재 궁장들을 찾아가 제작 과정을 일일이 카메라와 필름에 담기도 했다. 그는 세계 각국의 활 50여점과 수십여점의 화살, 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뿐 아니라 국내에서 이제는 구할 수 없는 고서적도 여러 권 보유하고 있다. 한국 활의 역사를 독일인이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1929년에 간행된 '조선의 궁술'을 두 권이나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언제 어디서 구입했나.
    "서울 인사동에서 약 20년쯤 전에 구했다. 당시 '조선의 궁술'이라고 하는 책이 가장 전통적인 활쏘기의 교본이라는 말을 듣고 인사동의 고서점을 50차례 이상 찾아간 끝에 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인사동은 정말 보물창고였다. 하지만 요즘은 기념품밖에 팔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
    ―한국어로 씌어진 책을 읽을 수 있나.
    "그림과 사진으로도 내용을 대충은 알 수 있다. 책을 '보다가' 직접 읽어야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번역을 부탁한다."
    ―한국인들이 활을 잘 다뤄 과거 중국에서 '동이'(東夷)라고 불렀다는 것을 아는가.
    "알고 있다."
    ―독일 사람들은 활쏘기를 즐기나.
    "활쏘기 인구는 한국이 3만5000명 정도로 훨씬 많다. 활 쏘는 '사정'(射亭)도 300여개나 있지 않나. 독일의 양궁 인구는 3500명으로 한국의 10분의 1이다."
    ―당신이 속해 있는 황학정과 독일 클럽의 교류도 추진한다고 들었다.
    "2007년에 부천활사랑회와 황학정에서 8명의 궁사들이 독일을 방문해 한국 활 쏘는 법을 보여줬다. 하지만 당시에는 70m 과녁에만 쐈기 때문에 한국 각궁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내 고향 인근의 양궁클럽(Archers Guild Saint Helena)과 한국 황학정의 파트너십을 추진하고 있다.
    ―수집품이 다양하다고 들었다.
    "내년 부천문화재단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퍼진 각궁'(가칭)이라는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여기서 내 수집품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각궁을 사용한 나라들을 보면 몽골 중국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모두 실크로드 주변국임을 알 수 있다."
    ―직접 박물관을 열거나 혹시 기증할 계획은 없나.
    "내 수집품에 관심있는 박물관을 찾고 있다. 내가 죽은 다음 여러 전시 기관으로 수집품이 흩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큰 이익을 볼 생각은 없지만,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박물관과 이야기하고 싶다. 무상기증 했다가 수집품이 대접을 제대로 못 받을까도 우려된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공학도 출신이다.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때까지 탐구한다. 그것이 서양과 동양 문화의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간혹 동양인들이 묻는 것을 꺼린다는 느낌은 받았다. 반면, 내가 만났던 장인과 고수들은 누군가 찾아와 묻는 것에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지금 쓰려는 책은 어떤 책인가. 서양인이 탐구한 한국 활에 관한 책인가.
    "나는 한국 각궁을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려 노력할 것이다. 생명을 가진 새로운 타입의 활로 묘사할 것이다."

    [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한국 활에 빠진 독일인 弓士, 칼 자일링거
    ▲ ㅣ 신동흔 dh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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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y] [김윤덕의 사람人] 너는 나의 빛이다… 서로를 구원한 두 남자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Why] [김윤덕의 사람人] 너는 나의 빛이다… 서로를 구원한 두 남자

  • 김윤덕

    입력 : 2012.01.28 03:07 | 수정 : 2012.01.28 14:32

    맹학교서 師弟로 만나 인생의 동지로… 남형두 교수와 김영일 교수의 '특별한 30년 우정'

    1983년 봄, 인연
    맹학교에 과외 봉사 서울법대생, 배움에 목마른 맹인 고교생 만나…
    점자 붙들고 씨름하던 그들… 앞 못보는 학생은 대학에 갔다
    2012년 봄, 희망
    남형두, 잘나가는 변호사 하다 사회 치료하려 로스쿨 교수 돼, 김영일은 특수교육과 교수로 "장애인 복지 함께 만들어간다"

    김영일, 학업에 눈 뜨다
    타자기로 밤새 리포트 쳤죠 잉크 떨어진 줄 모르고…
    매순간 포기하고 싶었지만 희망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남형두, 인생에 눈 뜨다
    16년간 로펌 변호사 하며 비정한 승부사로 살았다
    영일이 보며 깨닫게 됐죠 法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책 디지털 파일만 있으면 단말기 통해 점자·소리로 출판사가 파일 제공하도록 저작권법 함께 개정했죠
    장애를 넘어, 편견을 넘어
    잎 먼저 나는 철쭉은 정상 꽃 먼저 피우는 진달래는 비정상이라 할 수 있는가? 장애도 하나의 개성일 뿐…
    인왕산에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날. 그는 비탈길을 뛰어올랐다. 서울대학교에서 경복궁 근처 국립서울맹학교까지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온 길이었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교실엔 5명의 학생이 눈동자를 허공에 굴리며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을 고르는 그의 기관지로 청명한 산공기가 스몄다. 순간 자기 몸에서 매캐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캠퍼스에 하루도 최루탄이 터지지 않는 날 없던 때였다. 대학생 선생의 당황한 표정이 보일 리 없는 아이들은 책상 위에 수학 점자책을 올려놓고 수업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남형두(48) 교수와 조선대 특수교육과 김영일(44) 교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1983년 봄이었으니 30년 인연이다.

    지난 17일, 남형두 교수(왼쪽)와 김영일 교수가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강의실에서 만났다. 30년 세월이라 두 사람의 기억엔 어긋나는 대목도 있었다. “우리 처음 만난 게 봄이었지.” “단풍 물든 가을 아니었던가요?” 분명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의 인생을 진심으로 격려하며 축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서울대 법대 2학년이었던 남 교수는 서울맹학교 고등부 1학년 학생들의 '무보수 과외선생'이었다. 안마사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지식만 가르치는 맹학교에서 그는 대학진학을 꿈꾸는 시각장애 청소년들에게 입시과목을 가르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마만 하고 살라는 법 없지 않습니까." 그 중 한 명이 김영일이다. 남 교수의 도움을 받아 그는 3년 뒤 연세대 교육학과에 합격한다. 93년엔 풀브라이트 장학생에 선발돼 미국으로 유학, 밴더빌트대 피바디교육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1년 조선대 특수교육과 교수로 임용된다. 지난해에는 임기 2년의 국립중앙도서관 장애인도서관지원센터 소장에 임명됐다.
    김영일 교수는 "공부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남 교수님 성탄카드에 적혀 있던 글귀를 읽었다"고 말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을 거두리로다." 17일, 남 교수의 직장이며 김 교수의 모교인 연세대 신촌캠퍼스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눈물 흘리며 씨를 뿌린 자…김영일 이야기
    ―시각장애 1급이다.
    "선천성 녹내장이었다. 색상과 명암은 구분할 수 있었는데, 여덟 살 때 사고로 다시 눈을 다쳐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안경을 쓰셨다.
    "그냥 멋져 보이려고 쓴다.(웃음)"
    ―장애인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으셨다. 집안이 부유했던 걸까.
    "부모님은 전남 무안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그나마도 내 눈을 낫게 하신다고 논을 팔아야 했다. 아버님은 내가 고1 때 돌아가셨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는 빈곤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피아노를 잘 치신다더라.
    "목포 맹학교에 다닐 때 배웠다. 맹학교에 무슨 행사가 있을 때 우리를 무대에 세우려고 담임선생님이 드문드문 가르쳐주셨다. 피아노가 좋아서 혼자서 매일 1시간씩 연습했다. 일본에서 발행된 점자 악보를 선생님한테 빌려서 통째로 외웠다."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하셨나.
    "책 읽는 걸 좋아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마련해준 '5분 동화책 읽어주기' 시간만 기다렸다. 지리, 사회 과목도 아주 좋아했다. 맹학교 선생님들이 만들어준 세계지도를 손이 닳도록 만져보면서 머릿속에 세계를 그렸다. 각 나라의 수도를 외는 것, 국내 각 지역의 특산물을 외는 게 내 취미였다. 세상의 모든 책이 점자로 돼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교과서만 해도 학년이 시작된 지 한두 달이 지나야 점역된 교과서를 겨우 받았다. 3월 새 학기가 되자마자 받은 책이라고는 '황강에서 북악까지'가 유일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전기였다."
    ―고등부는 서울맹학교에서 다녔다.
    "안마사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직업교육 위주였다. 나 말고도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대학에 가고 싶어했지만 맹학교 수업만으로는 입시를 준비할 수 없었다. 그때 서울법대생이었던 남형두 교수님을 만난 거다. 우리 같은 아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을 꾸려 달려와 주셨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내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서울대 학생들에게 '과외'를 받는다니, 어찌 꿈이나 꿀 수 있었겠는가."
    ―남형두 교수 말고도 '선생님'이 몇 분 더 있었나 보다.
    "김우진(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황덕순(현 한국노동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형님 등 남 교수님의 경성고·서울대 후배들이다. 고3 때까지 영어, 수학을 가르쳐주셨다. 황덕순 형은 우리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경찰이 봉쇄한 대학교 담장을 넘어온 적도 있다. 평생의 은인들이다."
    ―연세대에 합격했다.
    "당시에 시각장애인이 지원할 수 있는 과는 세 군데밖에 없었다. 요즘처럼 장애인 특별전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악물고 공부해야만 했다. 340점 만점에 20점을 차지하는 체력장에서 불리한데다, 한자 문제는 점자가 없기 때문에 예닐곱 문제를 그냥 틀려야 했다. 제도가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을 남 교수님과 후배 형님들이 도와줬기 때문에 대학 문을 뚫을 수 있었다."
    ―대학 4년은 행복하셨나.
    "사실 감격은 잠시였다. 첫 학기에 18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어느 과목 하나 녹음이나 점자로 된 교재가 없더라. 한번은 수동타자기로 밤새 리포트 40장을 쳐서 제출했는데 교수님이 '왜 리포트를 쓰다 말았느냐'고 하신다. 알고 보니 타자기 잉크가 떨어진 줄 모르고 공타를 쳐댔던 거다. 정체성 때문에도 괴로웠다. 2학년 1학기에 남자 동기들은 전방입소란 걸 가는데 나는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도 아니니 제3의 성(性) 아닌가.(웃음) 우울하더라.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 사이로 내가 지팡이를 짚고 지나갔다는 걸 알고 서글펐다."
    ―그래도 대학원에 진학했다.
    "1주일에 서너 권의 책을 읽어야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는 대학원 공부는 주로 녹음 봉사에 의존했다. 논문은 그때 막 나오기 시작한 PC로 썼다. 부팅하고 저장하기까지 모든 스텝을 외워서 작업했다. '한글이 열렸겠지' '저장이 되었겠지' 짐작해가면서. 저장 안 하고 작업을 끝내버린 적이 부지기수다."

    과거 시각 장애인의 유일한 정보 접근 수단은 점자(點字)였다. 그러나 IT 발달로 디지털 파일만 있으면 모든 정보를 점자나 소리로 전환해 습득할 수 있게 됐다. / 연합뉴스

    ―미국 유학 시절은 한국보다 나았을까.
    “알바(ALVA)라고, 컴퓨터 화면을 점자로 전환해주는 단말기를 제공해주더라.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6년을 사용했다. 시스템은 선진적이지만 장애에 대한 개개인의 의식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이 지원되는 5년 동안 학위논문을 마치지 못해 1년을 연장해야 할 상황인데 당장 생계비가 필요해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학교 취업지원센터에 전화했더니 맹인이 일할 자리는 없다며 끊으려고 하더라.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당신의 수퍼바이저와 통화하겠다고 맞섰다. 전화를 건네 받은 센터장이 30여개의 구인광고를 읽어주었고, 그중에서 밴더빌트대학 공공정책연구소 일자리를 신청했다.”
    ―연구소 일자리는 쉽게 얻으셨나.
    “전화로 내 연구분야를 설명했더니 현재 자기네가 진행하는 미국정신보건연구원 프로젝트에 딱 맞는 인재라며 좋아하더라. 그런데 통화가 끝날 무렵 내가 시각장애인이라고 밝히자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었다. 인터뷰할 기회만 달라고 매달렸고, 약속한 날 내가 그동안 미국에 와서 쓴 논문들을 보여줬다. ‘좋다, 해봅시다!’ 하더라. 나중에 그 사람 하는 말이 화장실을 어떻게 다닐까 걱정되어 거절하려고 했단다. 이틀 만에 나는 연구소의 내부 구조와 주변 지리를 다 익혔는데 말이다.(웃음) 그만큼 편견이 심하다.”
    ―남형두 교수와의 교류는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나.
    “유학 오면서 끊어졌다. 한국 있을 때 교수님을 너무 물고 늘어져 늘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사시 합격해 변호사 하고 계시니 툭하면 도와달라고 전화를 드렸지. 동료 시각장애인들 고소고발 사건부터 내 사사로운 문제까지 다 여쭤보고 해답을 달라고 매달렸다.”
    ―금의환향했다. 인간승리의 모델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포기하지 않아서 이룰 수 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 큰 힘이 되어준 건 책이다. 대학 때 읽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잊을 수 없다. 내가 과연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적 물음에 나치를 체험한 프랭클 박사가 답을 주었다. 그런데 내 개인사는 적게 써달라. 일반 장애인들에겐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다. 수퍼장애인 신드롬은 사라져야 한다.”
    로펌 변호사에서 ‘사회적 의사’로…남형두 이야기
    김영일 교수의 ‘멘토’였던 남형두 교수는 나경원·원희룡 의원, 김난도·조국 교수로 유명해진 ‘서울법대 82학번’이다. 86년 사법고시 합격 후 법무법인 ‘광장’에서 16년 동안 변호사로 일했다. 로펌 변호사 시절 미국 워싱턴대에서 저작권법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2005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남 교수는 김영일 교수와 함께 2009년 장애인 관련 저작권법과 도서관법을 개정하는 데 기여했다. 국내에서 발행된 출판물의 디지털 파일을 장애인이 요구할 경우 출판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를 납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유명세를 치른 서울법대 82학번이다.
    “나는 그 대열에 오를 인물이 못 된다. (웃음)”
    ―대학 2학년 때부터 장애인 봉사를 시작하셨다.
    “봉사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나한테는 탈출구였다. 군부독재의 암울했던 시절, 캠퍼스는 최루탄가스로 자욱하고 잔디밭엔 사복경찰들이 진을 쳤다. 캠퍼스에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교회 선배를 통해 스무 살에 시력을 잃은 중도실명자를 알게 됐다. 그 사람이 서울맹학교에 다녔는데, 그를 포함해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장애인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철, 버스를 갈아타고 맹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공부하는 시간이 그 시절 나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이전부터 있었던 건가.
    “맹학교를 오가면서 장애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실감했다. 맹학교의 위치부터 그랬다. 계단이 수십 개나 되는 산비탈에 지어져서 비장애인도 오르내리기 힘들었다. 일곱 계단 오른 뒤 꺾고, 여덟 계단 오른 뒤 꺾고, 하는 식으로 지리를 외워가면서 아이들이 위험하게 뛰어다녔다. 기숙사는 불이 안 들어온 형광등이 더 많아 어둡고 우중충했다. 운동장도 손바닥만 했다. 안 보이니까, 뛰어놀 일도 없다고 생각한 거다.”
    ―앞 못 보는 ‘제자’를 연세대에 보내셨으니 대단한 실력이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지만, 영일이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스무 개를 알아들었다.(웃음) 눈 뜨고 봐도 어려운 수학 그래프와 함수를 영일이는 설명만으로도 기막히게 알아들었다. 그보다 대단한 건 영일이의 집념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이 기숙사를 같이 쓰는데, TV를 못 보니까 다들 라디오를 끼고 산다. 하루종일 프로야구 중계 아니면 음악을 들으니 공부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대학을 꿈꾸던 아이들도 ‘내 주제에 무슨 대학’ 하면서 지레 포기한다. 점역된 영어사전은 A자 한 편만 보통 사전 1권 분량의 두께가 된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한 영일이의 토플 점수가 613점이었다. 나보다도 기십 점이 높다.(웃음) 공부 끝나고 학교 앞 분식점에서 라면 한 그릇씩 나눠 먹던 때가 엊그제 같다.”

    “형님의 오른팔은 언제나 든든하고 따뜻했습니다.” 남형두 교수의 팔을 꼭 잡은 김영일(왼쪽) 교수가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었다. / 이명원 기자

    ―대학에 진학한 후로도 남 교수께 의지를 많이 한 모양이더라.
    “지금도 목엣가시처럼 걸리는 일이 있다. 대학원 때인가, 점자단말기를 한 대 사줄 수 있느냐고 연락이 왔더라. 그때 돈으로 600만원이 넘어서 망설여졌고 끝내 들어주지 못했다. 그때의 미안함, 거절당했을 때 영일이가 얼마나 참담했겠나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2001년 박사학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김 교수가 먼저 전화를 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웃음)”
    ―16년 동안 유명 로펌인 ‘광장’에서 일했다. 고액의 연봉을 포기하고 왜 대학으로 가셨나.
    “치열하고 비정한 승부사들의 세계에서 살았다. 재판에서 승소하고 돌아온 어느 날, 가족들 앞에서 무용담을 들려줬더니 초등학생 둘째 아이가 그러더라. ‘아빠, 그러면 아빠한테 진 상대방이 너무 불쌍하잖아.’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에 의해서 패배를 맛보는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던 거다.”
    ―워싱턴대학에서 저작권법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몇 안 되는 저작권법 분야의 권위자다.
    “광장 시절 속옷업체인 ‘제임스 딘’의 변호를 맡은 적이 있다.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의 유가족이 소송을 제기했다. 우리가 승소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저작권에 흥미를 갖게 됐다. 94년부터 4년간 진행된 소송을 중심으로 석사논문을 썼고, 내친김에 박사까지 했는데, 학위 받고 돌아오니 한류와 함께 저작권이 초미의 관심사가 돼 있더라.”
    ―김영일 교수와 재회하신 뒤 장애인 복지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건가.
    “박사 마치고 돌아온 김 교수와 다시 만난 날 그의 손에 점자정보단말기가 들려 있었다. 아래한글, MS워드 같은 텍스트 파일이 기계 안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점자 또는 소리로 전환됐다. 점자책, 녹음에 비하면 혁명적인 변화였다. IT기술의 발달이 시각장애인들에게 ‘눈’을 제공한 셈이다.”
    ―김 교수와 함께 추진한 저작권법, 도서관법 개정으로 출간물의 디지털 파일만 있으면 점자변환단말기를 이용해 시각장애인들도 그때그때 새로 나온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출판사의 디지털 파일 제공이 강제조항은 아니라고 들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완성된 인쇄활판을 통째로 넘겨주는 셈이니 위험한 일이다. ‘저작권’과 ‘장애인의 정보접근권’이라는 두 개의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저작권이 도로의 턱 같은 존재다. 그들을 위해서 턱을 깎아주자는 거다. 반칙하는 사람도 물론 생길 거다. 마치 장애인 주차구역에 비장애인들이 가짜 발급증을 받아 주차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 주차면을 없앨 것인가. 출판사의 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의존하는 조항이다. 지난해만 해도 270여개 출판사가 파일을 보내주었다. 김 교수는 요즘도 틈만 나면 출판사를 찾아다닌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판사로 임용될 최영만 해도, 그를 사법시험에 합격시키려고 사회복지관 전 직원이 매달려 타이핑하고 녹음 봉사를 했다더라.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다.”

    미국 유학 시절의 김영일 교수가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관을 찾은 모습. / 조선일보DB

    ―장애인의 책읽기를 왜 그리 강조하시나.
    “헌법재판소 구성원이 바뀔 때마다 스포츠마사지협회가 위헌소송을 낸다. 안마사를 시각장애인들만 할 수 있게 허용한 것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거다. 99마리 양을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양 1마리를 빼앗는 격이다. 시각장애인은 안마사라는 직업밖에 선택할 길이 없지만, 비장애인은 만 가지의 직업 중 하나를 못하는 것뿐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을 기회와 권리를 우리 사회가 부여해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책을 읽어야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안마사 외의 다른 직업을 추구해볼 수 있지 않겠나. 위헌소송이 제기될 때마다 시각장애인들이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사건이 사라지려면 그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줘야 한다.”
    ―30년 전엔 스승과 제자 사이였는데, 이제는 두 사람이 협업하는 관계가 됐다.
    “영일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작권이 장애인들에게는 도로의 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다. 매 학기 우리 대학에 와서 특강을 해주는데 김 교수가 강단에 서는 것만으로도 감동의 도가니가 된다. 그는 언제나 로스쿨 학생들에게 ‘사회적 의사’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메디컬 닥터’가 사람의 질병을 낫게 한다면, 법을 공부하는 여러분은 사회를 고치는 의사가 되어달라고. 내가 한 학기 강의한 것보다 그의 한 시간 특강이 훨씬 강력해서 어느 땐 질투가 난다.(웃음)”
    ―연세대 장애학생지원센터 소장을 3년째 맡고 계신다. 신문에 장애인 복지와 관련한 기고도 참 열심히 하시더라.
    “연세대는 사립대로는 처음으로 장애인 콜밴을 도입해 운행하고 있다. 전체 3만명 구성원 중 50명에 불과한 장애학생을 위해 전용차량이 캠퍼스 이곳저곳을 누빈다. 그러나 나는 장애인 콜밴보다 계단이 없는 저상버스가 도입되는 것이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본다. 버스에 오르기 위해 휠체어 리프트가 가동되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며 불편을 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권교육, 소수자 배려교육이다. 특수교육은 반드시 통합교육으로 가야 한다. 잎이 나온 후 꽃망울을 터뜨리는 철쭉은 정상이고,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진달래는 비정상인가? 신체적 장애를 서로 다른 특성의 하나로 본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따뜻해질 것이다.”
    눈물보다는 땀을 흘리고 싶다…에필로그
    인터뷰 내내 남 교수는 김 교수에게 양팔을 빌려주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강의실로 갈 때, 화장실에 다녀올 때, 구내식당으로 갈 때 김 교수는 남 교수를 의지했다. 그러나 남 교수는 “우리의 관계가 봉사나 재능 기부의 차원이었다면 이렇게 오랜 우정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남 교수가 실수담을 하나 들려줬다. “밥을 먹는데, 딴엔 김 교수를 도와준다고 밥을 뜬 숟가락에 콩나물과 고기를 올려줬지요. 그런데 영일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형님, 반찬 위치만 알려주세요’ 하는 겁니다. 과잉친절이 실례가 된 거죠.(웃음)”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남형두(48) 교수와 조선대 특수교육과 김영일(44) 교수의 30년된 빛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김영일 교수는 비장애인 여성과 결혼했다. 연애담을 묻자 한사코 사양한다. 남 교수가 농담을 했다. “외모를 보고 결혼하지 않은 건 확실해요.(웃음)” 흥미로운 건 아내가 운전할 때 김 교수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앞이 안 보이지만 ‘○○수퍼 앞에서 좌회전, △△학교 앞에서 우회전’ 하는 식의 동네 지리는 물론 서울과 광주를 오가는 고속도로까지 훤하단다. “자주 오가는 길은 익숙하니까요. 특별한 재능이 절대 아닙니다.”
    웃음이 많은 김영일 교수에게 “눈물도 많으십니까” 물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웃음엔 눈물을 감추려는 목적도 있을 거예요”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김 교수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눈물’에 대한 추가답변이었다. “대학 시절 자취방이 있던 공항로 육교를 올라 귀가하는 길에 힘들었던 하루를 한숨과 눈물로 정리하면서, 보이지 않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 서울 하늘 아래 나처럼 장애로 인해 눈물 흘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지요. 그래서 유학을 갔고, 그래서 한국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고 자신과 약속했어요. 저는 가능하면 눈물보다는 땀을 흘리고 싶어요. 눈물을 흘리더라도 날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수많은 장애인과 함께 나누는 눈물이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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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5)

    이 글을 통해 수많은 나날을 눈물을 삼키며 역경을 이겨낸 김영일 교수님과 그가 말한 ”  내 개인사는 적게 써달라. 일반 장애인들에겐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다. 수퍼장애인 신드롬은 사라져야 한다.” 의 그와 같은 길을 걸어보고자 했지만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을 수 많은 지체 장애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묵묵히 양손이 되어주신 남형두 교수님의 조용한 헌신의 울림에 귀 귀울이게  되었다.

    사냥꾼들 앞에서 '애끓는 모정'보인 오랑우탄 모녀 구출기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사냥꾼들 앞에서 '애끓는 모정'보인 오랑우탄 모녀 구출기

  • 김성모 기자

    입력 : 2012.01.28 15:27 | 수정 : 2012.01.28 15:33

    오랑우탄 어미가 겁에 질린 자신의 딸을 사람처럼 꼭 안아주고 있다. /사진=데일리메일

    건장한 ‘현상금 사냥꾼’들이 모녀(母女)를 둘러싼다. 죽음을 당할 운명에 처한 어미는 마치 사람처럼 자신의 딸을 꼭 안아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에서 사냥에 나선 남성들이 오랑우탄 모녀를 둘러싸자 오랑우탄 어미가 겁에 질린 자신의 딸을 사람처럼 꼭 안아주는 장면이 포착됐다고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이 27일 보도했다. 애끓는 모정(母情)을 보인 이 오랑우탄 모녀는 다행히 국제 동물 단체 포파우즈(Four Paws)팀에 발견돼 구출됐다.
    이 신문에 따르면, 보르네오 섬 야자유 농장에서는 오랑우탄이 마치 해충(害蟲)처럼 여겨진다. 야자유는 초콜릿에서부터 과자류까지 수백 종류의 제품에 쓰이는데, 야자유 농장주들은 앞다퉈 보르네오 섬에 남은 삼림을 벌채하며 사업을 확정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들 농장주들이 삼림을 없애고 농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랑우탄은 하찮은 방해물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농장주들은 일꾼들에게 오랑우탄 한 마리에 70파운드(12만원) 정도의 현상금을 내걸고 오랑우탄 사냥에 나서고 있는데, 이는 서식지 파괴로 그 수가 급감하는 오랑우탄들에게는 또 다른 위험이 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에서 사냥에 나선 남성들이 오랑우탄 모녀를 둘러싸고 있다. /사진=데일리 메일

    한때 25만 마리에 이르렀던 야생 오랑우탄은, 현재 서식지 파괴와 남획 등의 이유로 숫자가 크게 줄면서 5만 마리 정도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네시아에서 오랑우탄 사냥은 불법이지만, 사냥 금지 법안에 강제성이 없어 사냥은 계속되고 있다고 포파우즈 대변인은 설명했다. 성체 오랑우탄은 죽임을 당하고, 남은 새끼들은 국제 동물 거래 암시장에서 팔려나가기도 한다.
    한편 포파우즈 구출팀은 이날 오랑우탄 모녀를 구하고 깊숙한 삼림 속으로 다시 풀어주는 데 성공했다. 구출팀 사인 프레우쇼프트(Preuschoft) 박사는 “우리가 현장에 몇 분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오랑우탄 모녀는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며 “구출한 오랑우탄에는 라디오 전파 장치를 달아 안전하게 살아가는지를 지속적으로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데일리메일은 보도했다.

  • 사냥꾼들 앞에서 '애끓는 모정'보인 오랑우탄 모녀 구출기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저 사냥꾼 자리에 나도 있었을 수도.. 유구무언…

    2012년 1월 23일 월요일

    암을 3번이나 이긴 이 사람, 인터뷰 공개 - 당신의 건강가이드 헬스조선

     

    암을 3번이나 이긴 이 사람, 인터뷰 공개

    입력 : 2012.01.23 08:35

    “자연과 함께 생활하면 희망을 찾을 수 있어요”
    - 백운쉼터 강석진 원장의 자연치유 이야기

    우리 몸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지만 동시에 그것에 대응하고 , 공격으로부터 손상된 조직을 복구하는 자연치유력을 갖췄다. 자연치유 전문가들은 인체를 만성질환과 암 등이 자리잡을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두 번의 암 수술을 받고 암환자의 희망이 된 백운쉼터 강석진 원장의 자연 생활 이야기를 들어봤다.
    몸이 아프면으레약을먹거나병원에 간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 경우가 많다. 인체는 고유의 방어와 복구 능력을 갖추고 있어 스스로 치유하는 자연치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웰빙과 건강한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자연치유가 주목받고 있다. 벼랑 끝에 몰린 암환자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자연치유를 시작하기도 한다. 현대의학은 자연치유를 대체의학 범주에 둔다. 자연생활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백운쉼터 강석진 원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암환자에게 대안이 아닌 희망을 주고 있다.

    30 대 초반에 찾아온 두 번의 암
    1991년, 강 원장은 담낭암 진단을 받았다.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암 선고를 받았지만 수술하면 완치되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3년 후, 어머니가 췌장암에 걸려 심적으로 힘들 때 강 원장은 두 번째 암 판정을 받았다. 두 번째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다시 한 번 수술대 위에 오른 때는 33세였으며, 아내는 만삭이었다.
    “위의 3분의 2를 잘라내고, 십이지장과 소장도 일부 잘라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니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샘솟더군요. 반드시 암을 이겨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병원치료를 받고, 여러 요양원 생활을 하던중 자연치유에 대해 알게 됐죠. 단식, 명상 등을 직접 해보고 제나름대로 몸이 좋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연생활 요법으로 희망을 보다

    강 원장은 2007년 전남 광양 백운산 자락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그의 하루는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5시에 시작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고 30분 정도 풍욕을 한다. 무, 무청, 표고버섯, 우엉, 당근을 달인 채소수프를 한 잔 마신 뒤, 다시 풍욕을 하고 생즙을 마신다. 발목 펌프 운동을 비롯한 간단한 운동을 한 후 오전 8시가 되어서야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는 육식을 배제한 자연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 자연식이다. 편백숲 산책과 운동, 냉온욕, 휴식 등으로 하루를 보낸 후 다시 명상과 풍욕 등으로 마무리한다. 암 투병과 극복의 경험이 여러 암환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그는 광양 백운산 자락에서 암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이 자연생활과 자연식으로 면역기능을 높이고 생활습관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돕는다.
    “현대의학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증상치료는 의사를 믿고 맡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대신 생활습관을 개선해 병과 싸우는 힘을 키우는 것이 자연치유의 역할입니다. 병마를 이겨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의 습관, 적절한 영양공급과 절제된 생활, 체력에 맞는 운동 등이 어우러지면 큰 힘을 발휘합니다. 마음이 육체를 이끄는 법이니, 마음이 편안해지면 몸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암을 극복한 사람으로서 제 경험이 다른 환자들에게 힘이 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암환자들이 건강하게 투병하고, 또 완치되어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고, 강 원장을 포함한 7남매 중 4명이 암 판정을 받았다. 직계가족 8명 중 5명이 암에 걸린 가족력이 있는 걸 보면 암에 걸릴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가족이 암에 걸린 것을 보면 먹는 음식과 생활습관이 주요 원인인 것 같습니다. 암진단을 받은 형제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치료했습니다. 병원치료만 하거나, 생활습관 교정을 병행하기도 하고요.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지만, 생활습관을 바꾼 셋째 형님은 건강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암의 치료 결과는 ‘5년 생존율’로 판단한다.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한 뒤 5년 동안 재발하지 않으면 일단 ‘완치’되었다고 본다. 강 원장이 걸린 담낭암과 담도암은 조기진단이 어렵고, 예후가 좋지 않은 암이다. 강 원장은 수술 후 10년이 훌쩍 넘어 받은 건강 검진에서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강석진 원장이 말하는 암을 이기는 자연치유법
    긍정적인 생각 :
    마음이 육체를 이끈다. 부정적인 생각은 몸도 병들게 한다. 마음을 비우고 치유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과 의지가 있으면 좋은 결과가 찾아온다.
    적절한 식이요법 : 육류 섭취를 줄이고 자연에서 나는 채소 위주의 식습관을 유지한다. 현미, 잡곡, 산에서 나는 채소, 텃밭에서 가꾼 채소, 두부 등을 골고루 먹는다. 화학조미료 사용을 줄이고, 우엉 ·연근·사과·양배추·케일 등을 생즙으로 마시면 좋다.
    체력에 맞는 운동 : 투병생활에서 체력을 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잘 먹고 꾸준히 운동한다. 숲 속 걷기는 맑은 공기와 살균력 좋은 피톤치드까지 마실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자연의 기운 받기 :
    공기와 태양, 자연의 기운을 받는다.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것처럼 따뜻하고 좋은 날은 햇빛을 쪼인다. 햇빛은 멜라토닌 생성에 도움을 줘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몸을 따뜻하게 해 피부를 열어 몸속 노폐물과 활성산소를 배출하고, 피부를 닫는 풍욕도 도움이 된다. 호흡을 통해 피부는 강화되고, 몸의 요산요독은 빠져나간다.
    휴식 : 몸과 마음을 쉬는 것은 중요한 자연치유법이다. 피로하거나 지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한다.
    해독 : 자연치유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효과가 뛰어난 해독 프로그램은 단식이다. 음식물 섭취를 중단해 체내 노폐물과 과잉축적물, 이물질을 배설한다. 몸을 완전히 비우고 새로운 것을 채우자는 원리인데, 몸속 자연치유력을 깨우는 방법이다. 굶으면 큰일 날 것 같지만 오히려 기운이 넘치는 사람도 있다. 무턱대고 단식하면 안 된다. 체력에 따라 3~10일 단식 기간을 정하고, 효소나 생즙 등으로 최소한의 영양분을 섭취한다.
    절제 : 무엇이든 과해서 좋은 것은 없다. 채식이 좋다고 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데 억지로 먹거나, 영양공급이 필요한데 곡기를 끊어서는 안 된다. 억지로 하거나 과하게 하는 운동은 역효과만 낸다.
    / 취재 한미영 헬스조선 기자 hmy@chosun.com
    사진백기광(스튜디오100)

    암을 3번이나 이긴 이 사람, 인터뷰 공개 - 당신의 건강가이드 헬스조선

    대한민국서 가장 잘나가던 의사 겸 교수가 쪽방촌으로 간 건…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주간조선] 대한민국서 가장 잘나가던 의사 겸 교수가 쪽방촌으로 간 건…

  • 글·사진 조동진 기자

    입력 : 2012.01.19 17:17 | 수정 : 2012.01.23 11:31

    설 특집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
    의대 교수·병원 과장직 던지고
    2009년 쪽방촌 무료병원으로

    서울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에서 신도림 방향으로 1~2분, 불과 30여m를 걸어가면 ‘이곳이 서울일까’란 생각이 들 만큼 초라한 동네가 눈앞에 나타난다. 집과 집을 양철지붕으로 서로 이어 붙인 쪽방들. 어른 두세 명이 나란히 서기만 해도 꽉 차는 좁디좁은 골목. 그 골목 어디쯤에서 시작된 건지 알 수조차 없을 만큼 동네 전체를 휘감고 있는 퀴퀴한 냄새까지. 세상이 숨찰 만큼 빠르고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거꾸로 시간을 30~40년쯤 뒤로 돌려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432번지 쪽방촌 모습이다.
    이곳 영등포 쪽방촌 골목 한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3층 건물의 요셉의원이 있다. 이 요셉의원에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아파하는 이들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이가 있다. ‘영등포 슈바이처’ 신완식(61) 박사다.
    요셉병원은 1987년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 불리던 고(故) 선우경식 박사가 ‘세상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위해 세운 무료병원이다. 선우경식 박사가 2008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그와 함께 사라질 뻔했던 이곳을 지키겠다며 나선 이가 신완식 박사다. 신 박사는 감염내과 분야 한국 최고 권위자다. 2년 전만 해도 신 박사는 가톨릭의대 교수이자 여의도성모병원 내과과장, 가톨릭중앙의료원 세포치료사업단장과 가톨릭 생명위원회 위원까지 겸직했던,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의사이자 교수였다.
    이곳에선 늘 부끄러워진다
    그가 2009년 2월, 정년까지 6년이나 남아 있던 교수직을 내던지고 단 한 푼의 보수조차 받지 못하는 요셉의원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지금 치료비 한 푼 낼 수 없는 노숙자와 행려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들과 함께 이곳 영등포동 쪽방촌을 지키고 있다.
    1월 6일, 2012년의 첫 금요일에 찾은 요셉의원 2층. 진료실에서 만난 신완식 박사의 얼굴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는 “이곳에서 가슴으로 웃는 법을 알았고, 세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찾았다”고 했다.
    “제가 이곳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입니다.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또 교수로 부족한 것 없이 나만을 생각하며 살 때는 좀처럼 꺼내지 않았던 말이지요. 제가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저보다 일찍 나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청소를 해 주시는 분들. 술 취하고, 더러운 행색으로 밀려드는 환자들을 마치 자기 몸을 씻어내듯 닦아주면서도 단 한 번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을 하루도 빼지 않고 마주하게 됩니다. 그분들을 마주하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란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더군요. 이분들뿐 아니지요. 차가운 우리 사회로부터 상처받고 쓰러졌던 분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하루에도 수십 번 ‘감사하다’는 말을 하게 되더군요. 그분들을 통해 오히려 제가 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거지요.”

    쪽방촌 요셉의원의 천사들
    요셉의원에서 그는 너무나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신 박사가 “이곳에서 만나는 천사들로 인해 늘 한없이 부끄러워진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요셉의원에 종종 들러 목욕봉사를 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얼마 전 그분이 병원에 오신 날 하반신을 못 쓰는 행려 환자가 실려 왔지요. 얼마나 안 씻었는지 몸 전체에서 심한 악취가 났어요. 치료를 위해 발과 항문을 반드시 씻겨야 했는데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저조차 발과 항문 주위를 씻길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봉사자 분께서 조용히 행려 환자의 옷을 벗기더니 환자의 발에 따뜻한 물을 몇 번 적시더군요. 그리곤 그 발에 입을 맞추셨지요. 그 순간 봉사자 분의 표정에선 더 이상 악취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발과 항문 주변까지 깨끗이 씻겨 주셨지요.” 그는 “불과 30여분쯤이었다”며 지금껏 자신의 기억이 담아낸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고 했다. “‘천사가 살아있다면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지 못했던 제 자신에게 ‘부끄럽다’란 게 어떤 건지 처음 알게 됐습니다. 또 하루하루를 반성하며 사는 법을 그제야 알게 됐지요. 지금은 그분 같은 천사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한 것임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신 박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있다는 말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감사함을 배울 수 있어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잘나가던 의사이자 교수였던 그가 영등포 쪽방촌의 무료 진료소에 둥지를 튼 이유는 무엇일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 의대교수를, 그것도 정년을 6년이나 남겨 두고 왜 그만뒀냐’는 게 가장 궁금한 모양입니다. 사실 딱히 답할 수 있는 이유가 없어요. 저도 그 이유를 잘 모르니까요.”
    그는 “막연히 ‘의사 신완식, 교수 신완식’으로만 인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의대 졸업과 레지던트 과정까지 마치고 전문의가 됐을 때 ‘이제 개업해서 돈 많이 벌어야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힘들게 공부한 만큼 세상과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시더군요. 그 말에 개업을 접고 학교에 남아 교수까지 했던 겁니다. 근데 50줄에 접어들면서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 또 생각나더군요. 물론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까’를 그려 놓은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2008년 말부터 2009년 초 사이, 신 박사는 곧 60줄에 들어서게 될 자신을 생각하니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냥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사표를 냈던 겁니다. 어쩌면 막연한 공명심이나 정의감을 하늘에 계실 아버지나, 제 주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뭐 그렇게 의대와 병원에 사표를 냈던 겁니다.”
    2009년 초 사표를 낸 그 길로 신 박사는 작별 인사를 위해 자신을 마냥 믿어주기만
    지난 1월 6일 서울 영등포 쪽방촌 요셉의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노숙자, 행려자, 외국인 근로자들.
    “행복한 자원봉사자 얼굴 보며 대학병원 과장 때는 잘 하지 않던‘고맙습니다’를 말하게 됐다”했던 가톨릭중앙의료원장 최영식 신부를 찾아갔다.
    “사표 내고 처음 찾아뵌 분이 최영식 신부님이었지요. 자리에 앉자마자 ‘제가 사고를 쳤습니다’라고 고백했어요. 신부님께선 ‘행여 그런 말 하지 마시라’며 농담인 줄 아셨나 봐요.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긴 했지만 언젠가 그렇게 할 거라 짐작은 했었다’며 웃으시더군요. 그리곤 ‘이제 뭐하시게요?’라고 물으시기에 ‘아직 계획이 없어요’라고 솔직히 말씀 드렸어요. 그러자 ‘전부터 상의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며 2008년 돌아가신 선우경식 박사님과 요셉의원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입으로 꺼내진 않으셨지만 신부님 눈이 ‘신 박사님 그곳에 둥지를 터주실 수 있으신지요’라고 계속 말씀하시는 걸 알았어요. 사실 제가 어른들 말씀 참 잘 듣습니다.(하하하) 고민이고 뭐고, ‘아 왜 그런 자리 이제껏 얘기 안 했냐’고 말한 후, 다음날부터 요셉의원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겁니다.(하하하)”

    몸보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참 많이도 아파하는 이들을 만나야 했다. “몸 아픈 사람이야 X레이 찍어주고, 약 주고, 정 안되면 수술이라도 해주면 되지요. 그런데 여기 영등포 쪽방촌 사람들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가 아니라서 더 아픈 거랍니다. 고쳐 주기도, 보듬어 주기도 힘든 마음의 상처에 아파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요. 가난해서, 배우지 못해서, 뜻하지 않았던 단 한 번의 실수로 세상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을 향해 너무 깊고 가혹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도 울고, 요셉병원 사람들도 울고, 쪽방촌 사람들도 함께 울었던 기억 하나를 꺼내 놓았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노숙자나 행려자입니다. 돈도 없고, 연고도 없지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마 여기에 오기 전까지 병원은커녕 약국에서 감기약 한번 얻어 먹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견디다 견디다, 더 이상 못 견딜 지경이 돼서야 이곳을 찾아오지요. 근데 그때는 대부분 손쓰기 힘들 지경이랍니다.”
    그가 처음 이곳에 둥지를 틀고 얼마 안됐을 때 일이라며 입을 열었다. “교도소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떠돌던 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욱’ 하는 바람에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군요. 그 죄로 20년을 교도소에 있다 나왔지만 그를 받아줄 이가 우리 사회엔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 병을 얻었어요. 알고 보니 폐암이었지요. 손쓸 수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았던 겁니다.”
    신 박사는 의사도, 이곳 원장도 아닌 그냥 그와 같은 인간으로서, 그에게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서울대병원에 사정했더니 치료는 해주겠지만 입원은 안 된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데리고 있으면서 항암치료를 받아보게 했지만 이미 몸이 견디지 못했어요. 마지막엔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더군요. 죽었습니다. 제 품에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한 생명을 보냈단 생각에 저도 모르게 울었습니다. 20년을 넘게 대학병원에 있으면서 수없이 죽음을 경험했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접니다. 근데 눈물이 나더군요. 머리를 아주 세게 맞은 것 같았어요. 이곳에서 할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더군요.”
    그의 눈이 붉어졌다. 신 박사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촉촉해진 눈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는 우리 사회가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의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막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이곳이 지금처럼 하루 100명이 넘는 노숙자와 행려자, 외국인 노동자들로 붐비는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할 일이 더 이상은 없어 제가 백수가 되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 아닐까요.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건 결국 우리 사회가 약자를 끌어안아 줄 만큼 포용력 있는 따뜻한 사회가 못 된다는 말이잖아요. 나와 다른 이도 품어 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정부·서울시 지원 한 푼도 없어
    요셉의원은 매일 노숙자, 행려자, 외국인 노동자 등 100명이 넘는 환자가 밀려든다. 기자가 찾았던 1월 6일 오후 1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 역시 초라한 행색을 한 노숙자와 행려자들의 행렬이 요셉의원 정문을 지나 밖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환자들을 볼 때마다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이 가득했던 대학병원에서만 생활해 온 신완식 박사에게 요셉병원의 상황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어찌하겠습니까. 요즘은 조금 아쉽고, 빠듯한 이곳 살림이 저뿐 아니라 요셉의원 가족 모두를 좀 더 열정적으로 만드는 에너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가 요셉의원의 상황은 비슷한 전국의 다른 무료진료소들에 비해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고맙게도 주말이면 자원봉사 오는 의사와 간호사가 꽤 됩니다. 또 수술이나 정밀검사가 필요한 환자를 부탁하면 내치지 않고 응해 주는 몇몇 큰 병원과 의사들도 있지요. 이런 혜택조차 받을 수 없는 지방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요셉의원은 정부나 서울시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는다. 코흘리개 꼬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보통 사람들이 한 푼 두 푼을 모아 보내준 성금과 자원봉사자들의 열정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신 박사는 그분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진 못하지만 꼭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 [주간조선] 대한민국서 가장 잘나가던 의사 겸 교수가 쪽방촌으로 간 건…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2년 1월 11일 수요일

    강영우 박사, 기부로 '아름다운 이별' 준비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강영우 박사, 기부로 '아름다운 이별' 준비

  • 조선닷컴

    입력 : 2012.01.11 11:19 | 수정 : 2012.01.11 15:19

    로터리 평화장학금에 25만弗..“세상에 되갚고 싶어”
    한달 시한부 삶 판정받고도 밝은 표정 ’나눔 실천’

    국제로터리 재단이 9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평화센터 장학금으로 25만달러를 기부한 전 백악관 정책차관보 강영우 박사와 부인 석은옥 여사에 감사패를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주고 지탱해준 힘인 ‘사랑’에 대한 빚을 갚으려 합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백악관 차관보급 직위까지 올랐던 시각장애인 강영우(69) 박사가 기부를 통해 세상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했다. 지난해 12월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강 박사는 지난 성탄절을 앞두고 지인들에게 생애 마지막 이메일 인사를 보내기도 했다.
    9일(현지시각) 밤 워싱턴 DC 시내 중심부의 한 사무실에서 국제로터리 재단 주최 행사가 열렸다. 강 박사와 두 아들 폴 강(한국명 진석) 안과 전문의, 크리스토퍼 강(진영) 백악관 선임법률고문이 국제로터리재단 평화센터의 평화장학금(Peace fellowship)으로 25만 달러(약 2억 9000만원)를 기부하기로 한 것에 대한 감사 행사였다. 강 박사가 20만 달러를 내놓았고, 아버지 제안에 동의한 두 아들이 각각 2만 5000달러씩을 냈다.
    이날 부인 석은옥 여사의 부축을 받고 행사에 참석한 강 박사는 전보다 여윈 모습이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강 박사의 오랜 벗인 법무장관 출신의 딕 손버그 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부부와 피터 카일 미 의회 로터리 클럽 총재를 비롯, 몇몇 로터리 지구별 총재도 함께 자리를 했다.
    1972년 국제 로터리재단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유학한 강 박사는 박사가 된 후 로터리 회원으로 활동하며 나눔의 삶을 실천해 왔다. 강 박사는 “너무 많은 축복을 받고 살아온 삶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기부금을 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없애고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기부하고 싶었다”면서 “재단에는 우리 기부금이 이왕이면 평화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국 학생들을 위해 사용했으면 한다는 뜻도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가 받은 축복을 되갚기 위해 기부를 하자는 나의 제안에 흔쾌히 응한 두 아들에게도 너무 고맙다”고 했다. 강 박사의 둘째 아들도 “40년 전 아버지를 위한 그 장학금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 가족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작지만 이를 갚을 기회를 갖게 돼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손버그 전 주지사는 축사에서 “강 박사는 신체적 장애는 장애가 아니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준 분”이라며 “기부 소식을 듣고 정말 가슴이 따뜻해지고 뭉클했다”고 말했다. 강 박사와 손버그 전 주지사는 1975년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우산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학교로 향하던 낯선 한국인 시각장애인 유학생과 길모퉁이에 차를 세워 그를 태워준 연방검사장으로 처음 만난 이래 36년간 우정을 이어 왔다.
    이 장학금은 듀크대와 노스 캐롤라이나대에 설립된 로터리재단 평화센터 학생들의 학비로 사용된다. 두 대학의 평화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호주, 캐나다, 브라질, 일본, 수단, 아이티, 멕시코 등 세계 각국의 학생들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행사가 끝난 후 학생들은 줄을 서서 강 박사와 악수했다.

  • 강영우 박사, 기부로 '아름다운 이별' 준비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2년 1월 10일 화요일

    이태리 최대 기업은 연간 200조원 매출의 마피아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이태리 최대 기업은 연간 200조원 매출의 마피아

  • 조호진 기자

    입력 : 2012.01.11 13:56

    이탈리아 최대 은행은 ‘마피아’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미국 CNBC는 마피아가 확보한 현금이 최소 650억 유로(약 96조원)이며 연 매출 규모는 1400억 유로(약 207조원)로 이탈리아 GDP의 10%에 육박한다고 10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매출 중에 1000억 유로가 순익인 것으로 알려져 사실상 마피아는 ‘이탈리아 최대 기업’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범죄 조직인 마피아는 주로 남부 시칠리를 근거로 활동한다.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 나폴리의 카모라, 칼라브리아의 은드란게타 등이 마피아 3대 조직으로 불린다.
    마피아는 기존의 마약, 무기밀매, 매춘 도박 등에 이어 기업들을 상대로 고금리로 자금을 대출해 최근 매출을 늘렸다고 CNBC는 전했다. 최근 유럽 재정위기로 기업, 금융 부문이 취약해지자 이를 매출 확대의 기회로 삼아 매출을 늘린 것이다.
    여기에 마피아는 환경분야인 유독성 폐기물 처리, 건설 분야, 스포츠, 의료, 택배업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마피아의 폭리 대출을 받은 기업이 20만개에 달하는 것으로 방송은 추정했다.
    이탈리아 중소기업협회 콘페세르첸티의 마르코 벤투리 회장은 "현재 이탈리아에서 마피아는 투자 여건을 갖춘 유일한 곳"이라며 "기업에 마피아와의 동업은 생존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 말했다.

  • 이태리 최대 기업은 연간 200조원 매출의 마피아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2년 1월 6일 금요일

    한국일보 : 히틀러가 네 살 때 익사했더라면?

     

    히틀러 4살 때 구사일생 급류 휩쓸렸다 극적 구조

    생명의 은인은 '사제의 길'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 아돌프 히틀러

      1894년 1월 독일 바이에른주 파사우시. 살얼음이 낀 강물에 네 살 소년이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급류에 휩쓸려 죽기 직전의 소년을 구한 이는 요한 쿠에베르거라는 이름의 같은 마을 소년. 만약 쿠에베르거가 목숨을 걸고 강물에 몸을 던져 소년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역사가정은 없다. 하지만 물에 빠진 소년이 훗날 유럽을 포연에 휩싸이게 하고 유대인 수백만명을 학살한 '괴물'로 성장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소년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쿠에베르거는 히틀러가 그토록 경멸했던 종교에 입문, 사제의 길을 걸었다.
      6일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죽을 뻔 했던 히틀러와 그의 목숨을 구한 쿠에베르거 신부의 엇갈린 운명보도했다. 이 이야기는 파사우 기록보관소에서 당시 지역신문의 기사가 최근 발견되면서 확인됐다. 기사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소년이 강물에 빠져, 같은 마을의 소년에게 구출된다는 내용이 있다.
      이전에도 비슷한 얘기는 있었다. 쿠에베르거 신부의 후배 막스 트레멜 신부는 1980년에 이미 "쿠에베르거 신부가 어릴 적 익사 직전의 히틀러를 구해 줬다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 줬다"고 밝힌 적이 있다. 독일 소설가 안나 엘리자베스 로스무스가 파사우에 살던 시절을 그린 회고록에도 히틀러가 강물에 빠졌다는 얘기가 소개된 적이 있다. 결국 이번에 발견된 기사, 트레멜 신부의 증언, 로스무스가 남긴 기록을 종합하면 구출된 소년이 히틀러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한국일보 : 히틀러가 네 살 때 익사했더라면?

      한국일보 : [조재우의 공감] 한비야 세계시민학교 교장

       

      젊은 시절 난 지독한 루저였다… 그때 맷집을 키웠다"

      [조재우의 공감] 한비야 세계시민학교 교장"… 기획연재 전체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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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시간 : 2012.01.07 02:37:21
      • 한비야 세계시민학교 교장은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세계시민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불쏘시개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세계시민학교 교장 ' 취임
      학교 만들려고 광고까지 출연, 재능 열정 인간관계 기부… 3년간 공익근무한다고 생각
      서른셋에 떠난 여행
      10살때부터 꿈 꿔 왔던 일, 걸어서 지구 세바퀴 돌아… 오지서 치한 만나 위기 순간도
      가슴을 뛰게 하라
      어떤 세상 만들고 싶나, 나서라… 이기기보다 멋진 경기가 좋아… 이제 50대, 전반전 끝났을 뿐
      청소년의 롤모델로
      칭찬이자 십자가… 그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어, '내가 뭐가 될까' 아직 진행형

      '바람의 딸' 한비야는 이름 그대로 평생 세계의 들판을 날아다녔다. 날 비(飛)에 들 야(野).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 한국국제협력단 자문위원 등의 중책도 맡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직책은 정초에 취임한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이다. 그의 꿈을 펼칠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가 시원한 세상, 공평한 세상,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이다. 그의 말은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54세의 나이에도 그의 눈은 강렬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지독한 루저(패자)의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때 평생 받을 모욕과 차별을 다 받았다. 하지만 그 시절이 그의 인생을 단단하게 하는 뿌리가 됐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무엇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계속 꿈을 꾸기 때문이란다.
      -요즘 활동이 많다.
      "올해까지가 원래 안식년이다. 반은 중국, 반은 백두대간에서 보내고 내년 1월1일부터 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10월에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이 됐다. 갑자기 공적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미뤘던 일을 10월부터 하다 보니 바빠졌다. 직함이 많이 생겼다. 예전에는 월드비전 구호팀장, 그전에는 오지여행가, 바람의 딸, 희망의 딸이었다. 최근에 대박이 났다. 유엔 자문위원, 이화여대 초빙교수에다 국제구호요원자격증을 확보해서 정식 강사가 됐다. 거기에 고 이태석 신부가 있던 남부 수단 파견근무도 확정됐다. 코이카 자문위원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시민학교 교장이다. 교장선생님이라는 직함이 좋다. 5,000만 국민이 재학생이다. 초대 교장으로 이 멋진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시민으로서 책임과 역할, 즐거움 등을 느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 3년이 임기다."
      -월급은 주나.
      "그런 건 없다. 통 큰 기부다. 재능 열정 에너지 인간관계 기부다. 3년간 공익근무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저서 <그건 사랑이었네> 에 '왜 세계시민학교가 중요한가'라는 것이 나온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1,000~2,000원에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2001년에 월드비전에서 연락이 와서 처음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를 했다. 1년 중 반은 현장에 가고, 나머지 반은 그 현장 실태를 알려 도움을 청하고 모금을 해서 다시 갔다. 한번 방송에 나가면 6억원씩 걷혔다. 하지만 5년쯤 지나면서 이런 방식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좋지만, 내가 사람들을 자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장면을 내보내고 말로 잘 설득을 하는 것이다. '자극을 하니 그 반응으로 돈을 주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왜 이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인가'를 얘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잘 설명을 하고 이해를 시켜서 그것에 대한 실천이라는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했다. 월드비전에서도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다른 현안에 밀리고 있었다. 세계시민학교를 만들자고 했더니 회장이 나보고 돈 벌어오라고 했다. 그래서 생전 안하던 광고를 했다. 신발 등산복 광고는 꺼렸다. 마침 SK광고 섭외가 들어왔다. "
      -세계시민의식이 뭔가.
      "세계시민의식은 시대정신이고 이 시대의 화두가 될 수 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이 시대정신이다. 전쟁 때는 재난복구, 그 이후에는 산업화, 민주화 등으로 옮겨갔고 복지사회, 공정사회로 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라는 범위가 확 넓어져야 한다. 대한민국 수준은 안 된다. 우리가 필요한 나라 뿐 아니라 우리를 필요로 하는 나라도 골고루 있어야 한다. 도울 곳이 있으면 도와야 한다. 무역1조 달러, 경제력 10위 등으로 볼 때 이 일을 하는 것이 이 시대에 꼭 맞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유엔 자문위원은 어떤 역할을 하나.
      "구호현장에는 3가지 주체가 있다. NGO, UN이나 적십자사, 국가 등이다. 이들이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효과적으로 구호활동을 할 수 있다. 이들이 정맥 동맥 실핏줄처럼 얽혀있다. 그래서 유엔을 가고 싶어했다. 자문위원이라는 것은 국가 대 국가라는 큰 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18명중에 한국사람 한 명이 들어간 것은 큰 영광이다. 풀타임은 아니다. 나는 현장사람이다. 나의 '베스트 페이스'는 현장에서 말라리아에 걸리기 직전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다. 자문위원도 현장을 발판으로 해야 한다. 세계 시민학교 교장도 그런 차원에서 맡은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자 세계시민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마중물, 불쏘시개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열정의 불이 붙어 세계로 확산되어 세계 전체가 사랑과 열정의 불바다가 되었으면 좋겠다."
      -서른 셋에 왜 떠났나.
      "어느 날 갑자기 떠난 것은 아니다. 10살 때부터 하고 싶었다. 세계지도를 보면서 전 세계가 나의 무대라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이 세계 무대로 살기를 원했다. 집에 세계 지도가 늘 붙어있었다. 세상을 한 바퀴 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한번 돌 거라고 생각했다. 걸어서 지구 세 바퀴를 돌았다. 7년간 오지여행을 했다. 33살부터 40살까지. 홍보회사에 있으면서 3년간 번 돈과 중간중간 기고한 것으로 여행했다."
      -위험한 것은 없었나.
      "많았다. 치한을 만나면 길거리에서 따귀를 갈긴다거나 소리를 질렀다. 오지에서 남자가 치근대면 에이즈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한다. 위험한 일을 당하면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가슴을 뛰게 하라고 강조하는데.
      "한국일보 인터뷰를 한다고 했을 때 가슴이 뛰었다. 한국일보는 해외에 나가도 독자가 많다. 아버지가 한국일보 기자였다. 나중에 다른 신문사로 옮겼지만 가슴이 뛰었다. 바로 가슴이 뛰는 사람의 얼굴이 지금의 내 얼굴이다.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이야기 한다.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 누가 시켜서 대충하면 가슴이 뛰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100도로 끓어야 한다. 99도까지는 아무나 잘 끓을 수 있다. 하지만 100도로 끓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르다. 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예쁜 얼굴이다. 100도와 99도는 1도의 차이지만 끓느냐 안 끓느냐의 차이다. 1도는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를 매일 매일 생각하면서 그쪽으로 한발한발 다가가는 사람들이 내는 열기다. 한번 맛본 사람들은 그 뜨거움을 못 잊는다. 어느 정도 열심히 몰두해야 그 뜨거움을 맞볼 수 있는지를 안다."
      -가슴이 뛰게 하는 방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습을 해야 한다. 스스로 꿈꾸는 세상이 먼저 있어야 한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거기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나는 모두가 시원한 세상, 공평한 세상,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것을 위한 각론은 구호팀장, 세계시민학교 교장, 유엔 자문위원이 되는 것이다. 수단일 뿐이지 목표는 아니다. 꿈으로 가는 하나의 길일 뿐이다. 50대라면 이제 전반전이 겨우 끝났다. 멋진 경기를 펼칠 시간이 남았다. 이기는 경기도 좋지만 나는 멋진 경기가 좋다. "
      -구호활동은 언제부터 생각했나.
      "처음 여행을 할 때는 그런 생각까지는 아니었다. 꿈은 내가 정말 관심이 가는 일, 남이 시키지 않아도 밤새는 일, 돈이 안되고 계속 기웃거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면 그 다음이 보인다. 나도 세계일주를 하면서 오지를 다니다 1,000원으로 죽고 살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말발, 글발이 있다. 이걸 나를 위해서만 쓸 수는 없다. 구호활동을 하다보니 너무 멋진 세상이 펼쳐졌다. 강자가 약자를 돌보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청소년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다.
      "그게 놀랍다. 나는 아무런 타이틀이 없던 사람이다. 얼마 전까지 백수였다. 근데 어디서 조사를 하면 내가 롤모델이라고 한다. 남자 롤모델은 이순신, 여자 롤모델은 한비야였다. 농담으로 나에게 장군급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 진행형이다. 앞으로 내가 뭐가 될까 궁금하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칭찬이자 십자가다. 실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지도밖으로 행군하라>가 100만권이 팔렸다.
      "살 빼자는 것도 돈 버는 얘기도 소설도 아닌데 그렇다. 하루아침에 크리넥스에 불붙듯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005년 이후 꾸준히 해서 100만권이다. 다른 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책이 100만권씩 팔린 예가 없다. 출판사 사람들이 외국에서 사람들 만나 얘기하면 깜짝 놀란다. 독자들이 신기하고 훌륭하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용 책도 나왔다. 수익금으로 유학도 하고 세계시민학교도 만들었다. 그 책을 한 권이라도 산 분은 나를 유학시킨 분들이다."
      -젊은 시절 패자의 인생을 살았나 보다.
      "고교를 졸업한 뒤 6년만에 대학을 갔다. 그 시기가 나를 가장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때 아르바이트라는 아르바이트는 다 해봤다. 클래식다방 DJ, 가정교사, 임시 세무공무원 등 별것 다했다. 그때 고졸 디스카운트를 알았다. 그때 평생 받아야 할 모욕과 차별을 다 받았다. 그때 생각했다. 사회적 약자를 이렇게 대하는 구나. 한글을 모르는 돈 많은 아줌마도 가르쳤다. 어찌나 거드름을 피우는지 토하고 싶을 정도로 거만했지만 참았다. 그런 6년 때문에 단단해졌다. 그때 인생의 뿌리가 생긴 거다. 뿌리를 내리는 작업은 괴롭고 힘들었다. 용광로에서 쇠를 달구는 작업이다. 그 기간을 자청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내린 것이었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그때 맷집이 강해진 것이다. 그랬더니 웬만한 것은 힘들지 않았다. 죽지만 않으면 강해지더라. 6년간 나를 홀대했던, 인간적인 가치와는 관계없이 고졸이라는 타이틀만으로 나를 하찮게 봤던 사람들이 지금은 고맙다. 그때는 그들이 미웠고 두고 보자고 했다. 내 평생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을 월드비전에서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내가 한비야를 잘 키웠다'고 했다. 가장 나를 심하게 대했던 사람이다. '고졸이 뭐가 되겠나'라고 폄하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람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 조련사였다. 지금은 모두를 용서했다."
      -결혼은 왜 안했나.
      "맨날 받는 질문이다. 지겨워죽겠다 정말. 누가 안하고 싶겠나. 사람을 찾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다정한 남자가 좋다. 돈은 정말 필요 없다. 무조건 연하가 좋다. 나랑 같은 스피드로 산을 타려면 나보다 젊어야 한다. 10년 정도 연하. 깔깔."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때문에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음에 드는 내가 좋아서 가슴 뛰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런 일을 할 때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찾지 말고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라. 그것부터 시작해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 한비야는 누구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영문과, 미국 유타대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국제홍보회사 버슨마스텔러에 근무하다 사표를 내고 33살에 오지여행을 시작, 7년간 지구를 세 바퀴나 돌았다. 그 때문에 '바람의 딸'이 됐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을 거쳐 지금은 세계시민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 한국국제협력단 자문위원 등도 겸하고 있다. 다양한 그의 저서 중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100만부 이상 팔렸다.

      한국일보 : [조재우의 공감] 한비야 세계시민학교 교장

      디지털시대 ‘99% 선언’…프로그램을 점령하라 : 책 : 문화 : 뉴스 : 한겨레

       

      디지털시대 ‘99% 선언’…프로그램을 점령하라

      [한겨레] 구본준 기자 기자블로그 기자메일

      등록 : 20120106 18:59

      소수 엘리트가 개발한 기능…대중 ‘상시접속 상태’ 유도
      맥락 잘라버린 지식만 유통…프로그램 이해·개입이 필요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 더글러스 러시코프 지음, 김상현 옮김/민음사ㆍ1만4000원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한 것 같아 꺼내보면 아니었던 적이 있는가?

      ‘환상 진동 증후군’이란 말까지 등장하는 세상이 됐다. 디지털 시대는 사람들을 점점 더 옥죈다. 인터넷을 확산시킨 첫 계기였던 이메일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어쩌다 한번 메일함에 들어가 시차를 두고 일을 처리했다. 그때는 우리가 이메일에게 ‘갔다’. 지금은? 이메일이 우리에게 ‘온다’. 쏟아지는 메일을 시시각각 확인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평범한 모든 사람들이 마치 항공관제사나 119 긴급구조 담당자들이나 겪을 정신적 피로를 느끼는 시대다.

      새로운 디지털 기기들과 프로그램이 줄줄이 등장하는데, 정작 일은 줄어들지 않고 그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게 정상이 아닌 듯하다는 것은 실감하지만 스스로를 추스를 방법은 없어 보인다. 미국의 미디어 이론가이자 디지털 전문가인 더글러스 러시코프의 새 책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는 이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는 책이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인류사회학적 위기의 본질, 그런 위기가 부를 수 있는 문제점을 짚어나가며 개인들이 각성해야 할 것들을 정리했다.

      러시코프는 1990년대 인터넷 디지털 혁명 초기부터 이 범지구적 현상에 대해 분석해온 저술가다. 초창기 디지털 전문가들 중 상당수가 잘못된 예측과 혼자만의 주장으로 설득력을 잃은 것과 달리 러시코프는 꾸준히 독자들에게 호평받는 통찰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작 <카오스의 아이들>에서는 전자오락과 인터넷 속에서 성장하는 젊은 ‘영상 세대’의 특징과 이들이 만들어낼 변화를 분석했고, <미디어 바이러스>에서는 권력 유지 수단으로 활용되어온 미디어가 이제 거꾸로 권력을 견제, 압박하기 시작한 변화를 들여다보며 문화 촉진제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주목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소문과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는 것을 지칭한 ‘바이럴 미디어’, 텔레비전 등 영상매체의 세례 속에서 자라난 청소년을 일컫는 ‘스크린에이저’ 등이 그가 만들어낸 신조어들이다.

      »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 더글러스 러시코프 지음, 김상현 옮김/민음사ㆍ1만4000원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에서 그는 인류를 바꾼 도구이자 기술이자 미디어인 ‘문자’ ‘인쇄술’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 등의 디지털 기술’이 각각 인간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비교한다. 핵심은 지금의 디지털 문화는 앞선 문자와 글, 책, 영상매체들과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르냐는 점이다. 러시코프는 ‘편향성’의 힘이 실로 강력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총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총이란 것은 사람을 죽이는 데 편향된 기기란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텔레비전은 사람들이 소파에 눕도록 편향된 것이고, 자동차는 사람들을 돌아다니게 만들도록 편향된 것이다. 디지털 기기와 소프트웨어들은? 한두가지 특정 기능쪽으로 사람을 편향시키는 앞선 발명품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모든 것을 편향시키는 속성을 지녔다. 그리고 프로그램에 맞게 사람들을 최적화시키고 있다.

      애초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수시로 접속하는 편리함이 중요했던 ‘비동기적 저장장치’였던 인터넷은 사람들을 상시 접속 상태로 몰아가 ‘시간’의 차원을 바꿨다. ‘공간’ 차원의 변화는 어떤가. 사람들은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해서도 스마트폰으로 자기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바쁘다. 가상과 현실이 뒤섞이면서 장소의 의미가 흔들린다. 인터넷이 가까운 사람들을 이어주기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편향성을 지닌 탓이다. 이런 디지털 미디어들은 ‘선택’의 문제에서 결정적으로 현대인을 옭아맨다. 디지털 세상에선 모든 정보를 ‘예’와 ‘아니오’, 그리고 다양한 분류 항목 중 하나를 클릭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용자의 선택권이 커진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런 선택들은 마케팅을 위한 정보수집으로 활용되는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도 있다는 빤한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더욱 근본적 문제로는 ‘단순화’ 현상이 있다. 지식과 정보는 맥락이 중요한데, 웹 상에선 이런 맥락을 잘라버리고 단순화한 인스턴트 지식 정보만 반복 소비된다.

      이런 편향성의 원천이 바로 ‘프로그램’이라고 지은이는 잘라 말한다.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며 그 속에 무슨 편향성을 심어놓는지 대중들은 모르는데 소수 엘리트들만이 이런 기능을 장악해 독점하고 있다. 때문에 이제는 대중들이 프로그램 자체를 알아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러시코프는 역설한다. 디지털의 문제인 ‘편향성’을 극복할 방법으로 그가 기대하는 것은 디지털의 또다른 속성인 ‘개방성’이다. 더욱 많은 이들이 프로그램의 속성을 이해해 프로그램 개발 과정에 목소리를 낼 때 인간친화적 프로그램들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우리가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프로그램을 하는 소수, 그리고 프로그램의 지배를 받아 프로그래밍되는 다수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책은 경고한다. 말 그대로 ‘생각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디지털시대 ‘99% 선언’…프로그램을 점령하라 : 책 : 문화 : 뉴스 : 한겨레

      [특집2012] 디지털 공룡들의 네티즌 약탈전

       

      디지털 공룡들의 네티즌 약탈전

      [Special ReportⅠ] 웹 4대천왕 전쟁- ① 게임의 법칙과 전리품


      [21호] 2012년 01월 01일 (일)
      필리프 베트게 外 economyinsight@hani.co.kr

      웹 4대천왕 전쟁, 최후 승자는 누구?

      디지털 4강 서바이벌게임, 누가 이기든 미국 업체… 전리품은 세계 시민

      애플·구글·아마존·페이스북, 이들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업 4인방이다. 모두 미국을 근거지로 한다. 미국이 여전히 디지털 세상에서 초강대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4인방은 이제 서로 물어뜯는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펼치려 한다. 아니, 이미 교전 중이다.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인류의 행복’이라는 명분 아래 치르고 있다. 과연 누가 축배를 들며, 누가 쓴잔을 마실까. 또한 인터넷 사용자들은 전쟁으로 인해 과연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까. 이와 관련해 4인방에게는 네티즌이 ‘농부의 농작물과 같은 존재’라는 주장도 있다. 농부는 농작물을 정성껏 기른다. 그러나 수확철이 되면 그 농작물은 가차 없이 베어질 것이다. _편집자

      디지털 공룡들의 네티즌 약탈전

      애플·구글·아마존·페이스북, 사이버 ‘팍스 아메리카나’ 권좌 놓고 일전

      디지털 초강자들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정정당당한 스포츠가 아니다. 4인방 모두 네티즌에게 한 조각의 편안을 주는 면이 있으나, 동시에 한 조각의 자유를 빼앗아간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을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고객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애플·구글·아마존·페이스북은 이 시대 최고의 인터넷 기업이다. 우리의 일상과 사고를 이처럼 크게 변화시킨 기업은 인류 역사상 많지 않았다. 디지털 세상을 나눠가진 네 기업은 이제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돈이다. 아이디어·발명·특허, 이 모든 것이 좋고 대단하지만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바로 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이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기업가치는 현재 1천억달러 이상이다. 2004년에 세워진 기업의 가치가 단 7년 만에 1천억달러가 된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이런 일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얼마 전 페이스북이 2012년 상반기에 기업 공개를 계획하고 있다고 발표하자, 진지하고 냉철한 경제잡지마저 ‘메가 상장’이라거나 ‘페이스북 열병’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은 아마존(900억달러)과 함께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업 4곳 중에 오히려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구글의 총 주식 가치는 약 2천억달러이고, 아이폰·아이팟·아이패드를 만들어낸 애플의 시장가치는 심지어 36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다임러의 8배, 도이체방크의 10배다.

      네 기업이 가진 경제적 파워만 해도 엄청나다. 애플이 새 아이폰을 공개하면 전세계가 마치 이전에는 인터넷이 연결되는 휴대전화를 만든 기업이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 관심을 기울인다. ‘검색엔진계의 거인’인 구글 앞에 한 산업 분야 전체가 떨고 있고, 아마존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인터넷 쇼핑의 대명사나 마찬가지다. 친분 네트워크 페이스북은 8억 명의 사생활에 둥지를 틀었다.

      네 거대 기업의 가치를 합하면 총 7500억달러에 달한다. 7500억달러! 비슷한 규모의 금액으로 유럽에서는 무너져가는 국가들을 구출하려고 한다.

      미, 4대 웹기업 통해 문화적 주도권

      애플·구글·아마존·페이스북은 이 시대 미국의 주도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군사적이 아닌 경제적·문화적 주도권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재강화 혹은 마지막 불꽃이기도 하다.

      미군의 명성은 실패한 두 전쟁으로 인해 손상당했다. 스페이스 셔틀은 더 이상 발사되지 않고, 자동차산업 분야는 시대에 뒤떨어진데다, 월스트리트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국제적으로 볼 때 미국은 더 이상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애플이 만들어내는 ‘손 안의 기쁨’인 제품들, 구글의 놀라운 무료 혁신, 아마존이 제공하는 초스피드 쇼핑의 즐거움, 페이스북을 통해 이루어지는 친분 관리의 쿨함은 완전히 다르다. 여기에는 과거 ‘미국식 삶의 방식’(American Way of Life)이라 불리던 것에 대한 욕구가 남아 있다. 이들의 영역에서 미국은 예전에 할리우드 영화, 항공모함, 그리고 코카콜라가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성공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디지털 세상의 초강자인 네 기업 사이에는 평화가 없다. 이들 중 자신이 이뤄놓은 것에 만족하는 기업은 없다. 이 기업들은 모두 다른 기업을 밀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창조적인 거대한 광기에 빠져 있다. 네 기업이 겨루는 것은 웹의 지배권, 즉 세계의 지배권이다. 누가 미래의 주인이 될 것인가?

      게임의 법칙은 이제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구글은 휴대전화 시장에서 애플을 위협하고, 페이스북은 검색엔진 구글의 필요성을 없애려 한다. 아마존은 아이패드를 뛰어넘는 독서용 기계로 애플을 사냥하고, 애플은 TV 시장 정복에 나서면서 유튜브를 통해 인터넷 동영상의 세계를 지배하는 구글을 불쾌하게 한다.

      그럼, 세상의 나머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4인방이 거의 단독으로 우리의 삶과 문화와 경제의 마지막 구석구석까지 정복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네 개의 인상적인 개별적 성공 사례가 뭉쳐져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하나의 시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터넷으로의 역사적 전환점이다.

      인류의 일상 문화 지배 위한 사투

      네 기업의 사투는 청량음료 업계에서 기계제조 업계까지 모든 산업 분야에서 벌어지는 단순히 선두에 서기 위한 다툼이 아니다. 이들은 인터넷이 우리의 문화와 일상,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그리고 어떤 이상과 이념이 미래를 지배하게 될지를 두고 싸우고 있다.

      인터넷은 자체적인 목적도, 의지도, 도덕도 없다. 인간과 기업이 웹의 모습을 만들고,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웹에 시험하고, 신대륙을 정복했다. 이들 중 가장 성공한 자가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이다.

      인터넷의 대부분이 마치 이들 ‘사위일체’의 창조물처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웹과 그 이용자들의 거대한 이상을 이 네 기업이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총체적 지식 공유의 이상- 최종적인 실현에 구글보다 더 가까이 도달한 자가 어디에 있는가? △총체적 이동성의 이상- 애플 말고 누가 이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단 말인가? △총체적 상품 제공의 이상- 아마존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이것이 거의 현실이 되었는가? △총체적 투명성의 이상- 누가 페이스북만큼 지속적으로 이 이상에 따르는가?

      이것은 네 가지 꿈의 실현이지만 가끔은 악몽의 실현이기도 하다. 전세계의 거의 모든 기업과 서반구의 거의 모든 인간이 이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의 4인방 중 최소 하나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지 않고는 삶과 일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총체적 지식 공유, 총체적 이동성, 총체적 제공성, 총체적 투명성의 이상이 자리를 잡은 뒤 세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디지털의 우주는 애플·구글·아마존·페이스북이 거의 수십억의 수익과 함께 대부분 차지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다른 이의 구역에서 사냥하는 일뿐이다.

      아마존 창립자인 제프 베저스와 다투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책방 주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애플이 그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2011년 9월14일부터 아마존은 미국에 아이패드의 경쟁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제품 명칭은 ‘킨들 파이어’다. 가격은 199달러로 애플의 기적의 기기에 견줘 절반 정도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수백만 개가 팔려나갔다.

      무주공산 없다… 남은 건 침략뿐

      이것은 애플에 대한 정면 공격이다. 베저스는 “애플이나 아마존 같은 기업들은 가끔 서로 상대방의 발가락을 밟는다”면서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두 기기 모두 태블릿에서부터 음악 다운로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마존과 애플 사이에만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네 거인 사이에는 모두 4인방에서 3인조로, 혹은 듀엣으로, 솔로로 변하기 위한 밀어내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어쩌면 느닷없이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다섯 번째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이들이 싸우는 시장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고, 모두가 어떻게든 쫓기고 있다. 모든 사냥꾼은 동시에 사냥감이기도 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구글의 최고경영자(CEO) 에릭 슈밋마저 미 의회 반독점 청문회에서 아마존·애플·페이스북, 그리고 구글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이 경쟁은 우리를 발전시킨다. 경쟁은 경쟁자들을 발전시키고,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우리 상품을 발전시킨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더 좋은 상품이 이긴다’라는 모토 아래 스포츠정신으로 하는 단순히 정당당한 힘겨루기가 아니다. 네 기업 모두 이용자에게 한 조각의 편안을 주는 대신, 이용자들에게서 한 조각의 자유를 빼앗는다. 아마존과 애플은 가능한 한 고객을 다시 풀어주지 않는 닫힌 시스템을 선호한다. 구글의 철학은 약간 정신분열적이다. 구글은 한편으론 자유로운 네트워크가 필요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사의 이용자들을 독점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페이스북이 의미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인정보 보호의 완전한 포기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모두가 모두를 탐색하고, 때로는 증오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는 구글이 만든 휴대전화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가 애플의 아이폰을 베낀 거라면서 아주 많이 구글에 화가 나 있었다. 잡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필요하다면 내가 죽는 날까지 은행에 있는 애플의 400억달러의 자금을 모두 사용해서라도 이 문제에 대해 끝장을 보겠다”라고 호통치고 있다. “나는 안드로이드를 부숴버릴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표절 제품이다. 나는 이를 위해 핵전쟁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그의 분노는 이해할 만하다. 구글은 그저 숨이 막힌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애플의 스마트폰 지배력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안드로이드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전설적인 개발자 중 한 사람인 앤디 루빈에 의해 개발됐다. 자사의 기기에서만 작동하는 애플의 운영 시스템과 달리, 그의 시스템은 300종 이상의 휴대전화와 태블릿에서 사용됨으로써 보급 속도가 더 빠르다.

      성공의 수치를 읊어댈 때면 루빈의 목소리에서 구글 특유의 열광적인 톤을 들을 수 있다. 루빈은 구글 본사의 상담실에 앉아 장난감 상점에 들어선 어린이처럼 흥분해서 떠들고 있다. 그와 그의 팀은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애플의 뒤를 좇고 있지 않다. 그들은 공격을 하고, 인류의 공익을 위해 휴대전화가 미래에 해야 할 일에 대해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이폰을 완전히 잊어버리도록 만들려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애플 매장에 2011년 숨진 애플 창립자 스티브 잡스를 추모하는 스티커들이 가득하다. 지구촌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가히 ‘애플 왕국’이었다. 하지만 애플이 수장 자리를 지켜낼까? 아니면 새로운 제왕이 나타날까? 웹 4인방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뉴시스 AP.

      사냥하고 사냥당하며… 쫓고 쫓기다

      하지만 구글 역시 3면 전선 시장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경험하고 있다. 한쪽에서 새로운 영토를 차지해도 거대 제국의 다른 쪽에서 절대 우위가 다시 흔들린다면 기뻐할 수만은 없다. 성공에 익숙해진 기업의 기술 엘리트들은 페이스북을 단 몇 년 사이에 거대 기업으로 키운 트렌드를 놓쳤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더 이상 지식을 찾는 데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디어를 통해 친구들의 삶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페이스북이 얼마나 구글에 위협이 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두 기업이 서로를 상대로 벌이는, 때론 코미디 같은 직원 스카우트 전투에서 현재 자주 이기는 쪽이 페이스북이라는 사실이다.

      구글은 최고 인재들에게 몇백만달러의 보너스를 제시하면서 이직을 막으려 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일반 사원을 두고 전투가 벌어진다. 한 구글 프로그래머는 50만달러의 보너스와 15%의 연봉 인상을 제의받았음에도 경쟁사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 페이스북으로 이직했다. 기업공개를 할 예정인 페이스북에서는, 주식 옵션만으로도 연봉의 몇 배를 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단순한 계산이었다.

      구글은 필사적으로 그에 저항하고 있다. 구글은 최근 ‘구글플러스’(Google+)라는 이름하에 자체적인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경쟁사인 페이스북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이용자는 지인들과 접촉할 수 있다. 구글 이용자가 검색창에 기입한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도 이미 과거의 검색 질문을 기반으로 개별적 질문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만약 구글이 자사의 검색엔진을 소셜 네트워크와 연동하면 검색 결과는 친구의 취향과 그의 질문, 그리고 이용된 검색 결과가 반영돼 나타난다.

      구글에서는 이를 단지 기술적인 세부사항에 불과한 것처럼 말한다. 구글 정보학자 아미트 싱할은 “지금까지 우리는 누가 누구를 알고, 누가 누구의 의견을 존중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인도 사람인 싱할은,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의 온라인판에 따르면 2010년 기술 분야에서 전세계적으로 스마트한 50명 중의 하나다. 그는 “구글플러스로 검색 질문에 지금보다 조금 더 개별적으로 응답하고, ‘진정한 소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 한 번 세계 혁명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기업 눈에 우린 고객 아닌 농작물”

      하지만 전 애플 개발자 존 칼라스는 “페이스북과 구글의 전투에서 최종적인 전리품은 일반적인 인터넷 사용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기업의 눈에 우리는 모두 그저 ‘배추 포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고객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최근 <디 차이트>에 “우리는 공짜로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구글과 페이스북, 그리고 다른 인터넷 기업의 고객은 광고를 내는 기업이죠. 이 기업들이 구매하는 것이 바로 우리, 우리의 눈길, 우리의 관심입니다. 바로 우리가 상품입니다”라고 썼다. 물론 구글과 페이스북은 이용자의 편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농부가 자신이 키우는 배추 포기가 크고 건강하게 잘 자라서 충만한 채소의 삶을 누리기 바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수확할 때가 되면 농부에겐 자비는 없습니다.” 존 칼라스의 말이다.

      필리프 베트게 Phillip Bethge & 마르쿠스 브라우크 Markus Brauck 외 5명 이상 <슈피겔> 기자
      ⓒ Spiegel·번역 황수경 위원

      [특집2012] 디지털 공룡들의 네티즌 약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