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1일 금요일

전기 만들고, 꽃밭 일구고 … 백석동 ‘쓰레기의 기적’ - 중앙일보 뉴스

 

전기 만들고, 꽃밭 일구고 … 백석동 ‘쓰레기의 기적’
[중앙일보] 입력 2011.10.21 00:40 / 수정 2011.10.21 00:40
쓰레기 매립지 세계가 주목

매립지 가스로 발전 … 하루 18만 가구 전력공급 12일 인천광역시 서구 백석동에 위치한 수도권매립지 내 제2매립지 위로 폐기물 운반 차량이 지나고 있다. 이곳에 설치된 699개의 가스포집관을 통해 모인 가스는 인접 폐기물매립발전소로 보내진다. 이 발전소의 하루 전력생산량은 120만㎾h이며 이는 18만 가구에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 [김도훈 기자]

20일 낮 인천시 서구 백석동 수도권매립지 입구. 서울·경기·인천에서 생활쓰레기를 싣고 온 덤프트럭들이 잇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수도권 58개 시·군·구의 2200만 인구가 배출한 것으로 하루 1만6000여t에 달한다. 계량·검수대를 통과한 트럭들은 제2매립장으로 이동해 쓰레기를 차례로 쏟아부었다. 쓰레기가 넓게 펼쳐졌고 그 위로 50㎝ 두께의 흙(복토재)이 덮였다.

가연성 폐기물을 모아 만든 폐기물고형연료(RDF). 주로 보일러 보조연료로 사용된다. 이곳에서는 하루 200t의 가연성 폐기물을 처리해 100t 가량의 RDF를 생산한다. 생산된 RDF는 t당 2만 5000원에 판매된다. [김도훈 기자]

2000년 10월까지 6400만t의 쓰레기가 매립된 제1매립장은 이제 광활한 잔디밭으로 변해 있고, 내년 봄이면 36홀짜리 대중골프장이 들어선다. 매립장 인근 야생화단지에서는 7일부터 시작된 ‘가을꽃 개방잔치’가 한창이다. 86만㎡에 이르는 억새밭·국화화원·자연습지에다 코스모스 꽃밭도 7만㎡가 조성돼 23일까지 공개된다.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박병록 차장은 “과거 연탄재를 묻었던 곳에 꽃밭을 조성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의 6.7배, 축구장 2800개 넓이로 세계 최대 쓰레기 매립지(면적 2000만㎡)인 이곳이 혐오시설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2007년부터는 매립가스를 연료로 하는 발전소가 가동에 들어가 시간당 50㎿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중국 등 외국의 폐기물 매립 관계자 2750명이 이곳에 다녀갔다. 한국이 20년 만에 이뤄낸 ‘쓰레기 처리 기적’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권매립지에는 1992년 2월부터 쓰레기 매립이 시작됐다. 초기에는 난지도 시절을 벗어나지 못해 침출수와 악취 공해로 주변 지역과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복토용 흙 공급을 둘러싼 비리도 일어났다. 하지만 서울·인천·경기도 등 3개 시·도가 함께 운영하던 조합 대신 2000년 환경부 산하의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가 출범하면서 효율적인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16~20일 대구에서 열린 2011년 국제폐기물협회(ISWA) 세계대회에서도 한국의 폐기물처리 기술 발전은 60개국 800여 명의 참가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관심사였다. 대회조직위원장인 이동훈 서울시립대 교수는 “침출수와 악취, 먼지가 들끓었던 난지도에서 벗어나 위생적인 수도권 매립지를 건설·운영하게 된 것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훌륭한 모범 사례로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시설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앞서가고 있다. 1995년 전국이 동시에 쓰레기 종량제를 도입하고 음식물 쓰레기 분리 수거도 성공적으로 정착되면서 전체 폐기물의 81%, 생활폐기물의 61%를 재활용하는 ‘선(善)순환 관리체계’가 자리 잡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세계적인 환경저술가인 미국 지구정책연구소 레스터 브라운 소장은 최근 펴낸 『앵그리 플래닛』에서 “종이 재활용률이 일본과 독일이 70~80%인데, 한국은 무려 91%에 달한다”며 “모든 나라가 한국만큼 종이를 재활용한다면 전 세계 목재 펄프 생산량은 30% 정도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인천=정기환 기자,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전기 만들고, 꽃밭 일구고 … 백석동 ‘쓰레기의 기적’ - 중앙일보 뉴스

2011년 10월 20일 목요일

Cells of the Immune System

Cells of the Immune System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20 00:34 | 최종수정 2011-10-20 10:39 기사원문

소프트뱅크를 알려라 … 100억엔 들여 프로야구단 인수 결단
[중앙일보 이나리] 손정의(왼쪽) 소프트뱅크 회장이 2005년 초 소프트뱅크 호크스 왕정치 당시 감독(오른쪽), 소속 선수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손 회장은 왕 감독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구단 운영의 전권을 맡겼다. [소프트뱅크 제공]
경쟁의 힘은 놀라웠다. 2003년 드디어 일본의 초고속인터넷 요금이 한국보다 싸졌다. '작지만 매운 고추' 소프트뱅크와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가 치열하게 겨룬 결과다. 물론 고비도 있었다. 2004년 2월 가입자 정보 425만 건이 유출됐다. 나는 단호히 대응했다. 범인의 협박전화를 받자마자 경찰에 알렸다. 용의자 체포 뒤 피해 규모를 파악하곤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이 막 본궤도에 오른 참이었다. 임원들은 내가 전면에 나서는 걸 말렸다. 이를 뿌리치고 카메라 앞에 섰다. “보안 시스템이 허술했다. 고객정보 취급 부서가 비정규직 위주로 짜여 있었다”고 곧이곧대로 알렸다. 비난이 쏟아졌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도 토 달기 힘든 과감한 대책들을 잇따라 내놨다. 그중엔 고객정보 담당 정규직 3000명 채용 계획도 있었다. 그대로 시행했음은 물론이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소프트뱅크의 도전으로 일본에 초고속인터넷 세상이 열린 뒤 나는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까 세상이 문제네, 정치가가 잘못이네, 경기가 나쁘네, 그런 푸념 따위 해본들 소용 없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불평은 결국 본인의 그릇을 작게 만드는 거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목숨 던질 각오로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왕정치 … 소년 시절 우상을 만나다

2004년 12월 나는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깜짝 놀랄 만한 뉴스를 발표했다. 다이에 호크스 구단을 인수키로 한 것이다. 호크스 구단의 근거지는 후쿠오카. 내가 태어나고 또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거기서 보낸 어린 시절 나는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내겐 하늘 같은 우상이 있었으니 바로 왕정치(王貞治·오 사다하루) 선수였다. 마침 매물로 나왔을 당시 다이에 호크스 감독은 왕정치였다. 그와 함께 팀워크를 맞춰볼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총 100억 엔에 이르는 딜에 뛰어들 순 없는 일이었다. 사업적 필요도 분명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하기 전까지 소프트뱅크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회사가 아니었다. 야후재팬이 일본 사이버 스페이스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유명한 건 '야후'이지 '소프트뱅크'가 아니었다. 초고속인터넷 브랜드를 소프트뱅크BB가 아닌 야후BB로 지은 연유다. 소프트뱅크가 대중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또한 일본프로야구협회의 새 구단주 영입 심사는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3개월간 기업의 재무상태는 물론 오너의 도덕성, 주요 납품처가 어디인지까지 따진다. 그런 만큼 일본에서 프로야구 구단주가 된다는 건 그만큼 깨끗하고 믿을 만한 기업이란 뜻이다.
“드라마 '겨울연가'처럼 운영하겠다”
2004년 11월 30일 구단 인수를 공식 발표하며 나는 드라마 '겨울연가' 얘기를 꺼냈다. 당시 일본에선 한창 한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 중심에 겨울연가와 '욘사마(연기자 배용준)'가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시절의 왕정치. “겨울연가 제작진은 하루 2~4시간밖에 못 자는 강행군 속에서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팬들의 의견을 매회 반영해 스토리를 다듬었다고 합니다. 저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하겠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발맞춰 구단과 팬 사이에도 양방향 의견 교환이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 것이다. 그 바탕엔 '야구 팬도 고객'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구단주 회의 내용을 언론에 투명하게 알리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음 날 '스포츠닛폰' 신문은 이런 논평을 내놨다. '욘사마는 수일 전 폭풍처럼 일본에 왔다 곧 돌아갔지만 손사마(손정의)의 개혁은 일본 야구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게 틀림없다”고.

인수 한 달 뒤 나는 주주총회를 열고 구단 이름을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바꿨다. 이어 왕정치 감독을 부사장 겸 제너럴 매니저로 승격시켰다. 현역 프로야구 감독으론 일본에서 두 번째로 임원이 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오 간도쿠(왕 감독), 뭐든 당신이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구단 운영의 전권을 넘긴 것이다. 2006년 왕 감독이 위암 투병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냈다.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자발적으로 나서 쾌유를 비는 종이학을 접어 전달했다. 위의 90%를 잘라내고도 그는 초인처럼 다시 일어섰다. 2008년 퇴임할 때까지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대만 국적으로 온갖 차별과 역경을 딛고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신이 된 왕정치. 내가 그에게 품은 마음은 단지 존경심이 아닌 어떤 동류의식일지 모른다. 왕 감독의 피와 땀이 스민 호크스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일본 퍼시픽리그에서 우승했다. 후쿠오카인의 구단 사랑 또한 대단하다. 500만 주민 중 절반이 소프트뱅크 모바일 가입자일 정도다.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2006년 설립한 이동통신기업이다. 이제 일본 역사상 최대 빅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꼴찌' 이통사, 일본 역사상 최대액 인수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인수하던 해 나는 마흔일곱 살이었다. 곧 해가 바뀌었고 50대가 2년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또 한 번의 결전을 준비했다. 일본 '꼴찌' 이동통신사인 보다폰재팬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이동성이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동통신은 피할 수 없는 승부처였다.
2005년 말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500만 명을 넘어서자 나는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이번에도 단번에 전 재산을 던져야 할까 숙고했다. 답은 “그렇다”였다. 당시 소프트뱅크 시가총액은 2조 엔으로 회복돼 있었다. 야후BB 시작 때 2000만 엔까지 떨어졌던 것이 5년여 만에 열 배로 불어난 것이다. 그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로 했다. 11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2006년 3월 인수를 마무리 지었다. 가격은 1조7500억 엔. 당시까지 일본 역사상 최고액의 인수합병 프로젝트였다. 여기저기서 “손정의가 이번엔 정말 미쳤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렇든 말든 나는 직접 새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기로 했다. 다시 백척간두의 사투가 시작됐다.
정리=이나리 기자
◆왕정치(王貞治) =일본 이름 '오 사다하루', 중국 이름 '왕전즈'. 대만 국적을 가진 일본 최고의 홈런왕이다. 1940년 중국계 부친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이란성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났다. 쌍둥이 누나는 출생 1년3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도 몸이 약해 세 살 때까진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학교 입학 뒤 야구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몸담았던 와세다실업고를 고시엔(선발 고교 야구) 정상에 올려놓았다. 최고 몸값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처음 3년간은 성적이 나빠 '왕은 왕인데 3진왕'이란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다. 초인적 노력으로 슬럼프를 극복, 통산 홈런 868개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의 첫 수상자가 된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 요미우리 구단에 이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으로서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소프트뱅크가 호크스를 인수한 뒤엔 손정의 회장의 절대적 신임하에 구단 전체의 경영까지 책임진다. 2006년 위암 발병으로 2008년 결국 현역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여전히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사회 회장이자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 네이버 뉴스

2011년 10월 18일 화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18 00:40 | 최종수정 2011-10-18 10:47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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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인터넷 올인하자, 믿었던 기타오 회사 살림 걱정하며 떠나
[중앙일보 이나리]
2001년 6월 19일, 드디어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보다 훨씬 빠른 서비스를, 그 8분의 1 요금에 제공한다고 선언했다. 야심 찬 출발이었지만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회선과 기지국을 빌려 줘야 할 NTT는 느리고 비협조적이었다. 가입 과정은 복잡했고 고객들의 인식도 낮았다. 서비스 체계 또한 손볼 곳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이 모두를 개선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 없었다. 융자를 얻고 싶었지만 은행들이 상대해 주지 않았다. 증자도 여의치 않았다. 나는 가진 걸 팔기로 했다. 전략사업이라 생각해 온 것들까지 내놨다. 미국 야후 본사 주식도 넘겨 버렸다. 야후BB(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위해 설립한 야후재팬 자회사)를 살리는 게 소프트뱅크가 살 길이요, 내가 꿈꾸는 디지털 정보혁명에 성큼 다가서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산매각 과정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고통과 맞닥뜨렸다. 최고재무책임자(CFO)인 기타오 요시타카(北尾吉孝)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 것이다. 노무라증권 뉴욕지점장 출신인 기타오는 1990년대 초부터 나와 정말 많은 일을 같이 해온 '동지'였다. 수많은 인수합병(M&A) 뒤엔 어김없이 기타오와 그가 이끄는 무적의 재무팀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내게 등을 돌린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초고속인터넷에 '몰빵'하느라 회사 재무상태를 심각한 상황으로 모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
# 초고속인터넷 '몰빵'에 회사 뛰쳐나간 CFO
2002년 결국 기타오는 이사회멤버로서의 권한을 이용해 소프트뱅크 본사 일부분을 뚝 떼어내 독립했다. SBI홀딩스란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창업자의 오른팔이자 재무책임자가 회사를 떠나다니, 주가는 떨어지고 뒷소문이 난무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나는 서둘러 새 CFO를 물색했다. 후지은행 부사장으로 은퇴한 65세의 가사이 가즈히코(笠井和彦)를 영입했다. 기존 임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령인 데다 평생을 대형 은행에 몸담았다 명예롭게 퇴임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안정적이고 발도 넓어 기타오가 떠난 후유증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었다.
사업하는 이에게 재무책임자의 의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돈 계산만을 앞세우다가는 도약을 위한 혁신과 모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기타오는 다시 없이 탁월한 인물이지만 내가 무턱대고 그의 의견만 따랐다면 오늘의 소프트뱅크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기타오를 만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신다. 여전히 그의 고견을 고맙게 듣는다. 하지만 판단을 하고 책임을 지고 미래를 여는 건 결국 내 몫이다.
# 사장실 버리고 회의실서 하루 19시간 집무
그렇게 돈 마련하랴, NTT로 정부 부처로 뛰어다니랴 새 사업을 시작한 지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2001년 말 지금까지 실적을 체크하는 8시간 마라톤 회의를 진행했다. 나는 절망했다.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개통된 사용자는 2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업 시작 1년 안에 100만 가입자를 모으겠다고 큰소리 친 나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비서에게 “앞으로 1년간은 그 누구와도 골프 일정을 잡지 마라”고 말했다. 또 "내일부터 내 집무실은 야후BB 추진팀이 있는 4층 회의실이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나는 골프광이다. 집 지하에 세계 10대 골프장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깔아놓은 개인 연습실까지 마련했을 정도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그 연습실을 보고 반한 나머지 시애틀 집에 똑같은 시설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런 내가 1년 동안 골프채를 잡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회의 참석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다음 날부터 나는 정말 손바닥만 한 4층 소회의실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 열다섯 시간, 열아홉 시간…. 내가 누군가에게 “3시에 보지”라고 말하면 그건 꼭 오후 3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새벽 3시에도 회의를 소집했고, 필요하면 언제든 밤을 새웠다. 사무실엔 온통 직원들의 땀 냄새, 며칠 동안 목욕을 못한 나의 시큼한 냄새가 가득했다.
# 승리로 끝난 '오케하자마 전투'
그렇게까지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나에게 초고속인터넷 사업은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였다. 일본 전국시대,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단 2000명의 병사로 수만 대군을 물리친 역사적 전투다. 당시 나와 소프트뱅크의 '적'은 NTT였다. 규모도, 노하우도, 자금도 비교가 안 되는 회사에 맞서 일본에 진정한 인터넷 시대를 열겠다는 일념으로 싸우고 있었다. 또 우리는 자신이 있었다. NTT는 거인이다. 그래서 무겁고, 느리고, 따져야 할 것도 많다. 우리는 몸이 가볍다. 소수 정예 결사대다. 서로를 동지라 믿고 함께 몸을 던진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듯 죽도록 노력한 결과 정말 11개월 만에 우리는 100만 가입자를 유치했다. 그 사이사이 진행된 강렬한 프로모션들도 효과가 컸다. 지하철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가정용 초고속인터넷 셋톱박스를 나눠줬다. 가당치 않게도 “가입 신청 뒤 개설까지 열흘 안에 끝내 드린다”는 '10영업일 집중' 캠페인도 벌였다. '규모의 경제'와 혁신의 모습으로 시장과 소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지려 애썼다.
그렇게 매년 1000억엔 씩 적자를 보는 사업을 4년간 흔들림 없이 진행했다. 경쟁사들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떻게든 소비자들이 야후BB로 가는 걸 막는 데 치중하던 그들이 본격적 서비스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적은 적이 아니었다. 소프트뱅크와 NTT는 넓은 의미에서 소비자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일종의 '친구'가 된 것이다. 2004년 6월 소프트뱅크는 일본텔레콤 인수에 성공했다. 일본텔레콤은 철도선을 따라 개설된 전화 네트워크를 보유한 일본 내 주요 통신사업자다. 덕분에 야후BB의 서비스는 빠르게 안정화돼 갔다. 2005년에는 드디어 흑자 전환이 이루어졌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이베이와 야후재팬의 8년 전쟁=소프트뱅크가 초고속인터넷 분야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데엔 야후재팬의 힘이 컸다. 2000년 초 닷컴버블 붕괴와 시장의 불신 속에서도 야후재팬은 성장을 거듭했다. 1999년 8월 시작한 인터넷경매 사업이 주요 동력이 됐다. 손정의 회장은 애초 일본 진출 예정인 세계 최대 인터넷경매 기업 이베이와 조인트벤처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협상이 여의치 않자 이베이가 일본법인이 설립되기 한 달 전 서둘러 경매사업을 시작했다. 이베이재팬이 본격 영업을 시작할 때쯤엔 이미 야후재팬이 시장을 선점한 뒤였다. 초기 야후재팬은 모든 경매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직원들은 “서버 운영비라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손 회장은 '공짜'를 고집했다. 적자 상황에서도 뚝심을 발휘해 먼저 시장 키우기에 몰두했다. 사업 시작 2년여 뒤에야 조금씩 유료화를 진행했다. 일본 인터넷경매 시장은 이미 야후재팬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이때부턴 이베이재팬이 “수수료 무료!”를 외치며 대대적 반격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베이는 2002년 3월 결국 일본 사이트를 폐쇄하고 철수했다. 2007년 12월, 야후재팬과 이베이는 “새 시장 창출을 위해 제휴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베이가 일본 시장 진출을 위해 택한 카드는 결국 야후재팬이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13 00:03 | 최종수정 2011-10-13 13:23 기사원문

사업 막혀 “분신하겠다”는 내게 … 공무원 “여기선 하지 말게”
[중앙일보 이나리]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미지의 분야에 신규 투자할 때 작게 시작할까, 아니면 크게 밀어붙여야 할까. 열 중 아홉은 '작게 간다'가 답일 것이다. 하지만 한두 번쯤은 큰 승부를 걸어야 한다. 소프트뱅크로 보자면 2001년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할 때가 그랬다. 일본 최초로 전국 규모의, 기존보다 5~10배 빠른 서비스를 선뵈는 일이다. 일본 최대 IT기업 NTT의 텃세를 이겨야 한다. 정부 정책도, 네트워크도 미비하다. 경험은 없고 시장도 아직 활성화돼 있지 않다. 누군가는 “그럴수록 반찬 간 보듯 조심스레 가야 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내 생각은 달랐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그만큼 경쟁자가 적다는 뜻이다. 당장의 시장은 작지만 곧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터이다. 압도적 공세로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나는 폭풍처럼 몰아쳐 해일처럼 집어삼키기로 했다. 손정의가 아니면, 소프트뱅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리라 마음먹었다.
주가 폭락에도 소프트뱅크 주주들은 '일본 최초 초고속인터넷 사업'이란 도전에 박수를 쳐주었다. 2000년 여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사장실을 뛰쳐나가 사흘 만에 100여 명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통신 분야 엔지니어라면 무조건 데려다 놨다. 회사 조례 중 “거기 서 있으니 자네가 이 일을 하게” 하며 차출하기도 했다. 초고속인터넷 전문 통신업체 '야후BB'의 시작이었다(BB는 초고속인터넷을 뜻하는 '브로드밴드'의 약자다).
# 2000년 포브스 선정 '올해의 비즈니스맨'
이때 한국의 도움이 컸다. 나는 “디지털 사업에서 한국이 나의 스승”이란 말을 종종 한다. 당시 한국은 이미 ADSL 방식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전면 도입한 상황이었다. 네트워크 설계부터 장비 구매, 서비스 운용까지 한국 기업과 전문가들로부터 많이 배웠다.

새 사업 준비로 바쁘던 2000년 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나를 '올해의 비즈니스맨'으로 선정했다. 이유는 이랬다. '일본의 경기 회복 지연 속에서도 회사를 의욕적으로 키웠다. 파산한 일본채권은행(현 아조라은행)을 인수해 벤처·중소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융자를 해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규 사업에 힘을 쏟았다.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하려면 NTT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법에 따라 NTT는 신규 업체에 기지국을 임대해주고 네트워크 구축도 대행해줘야 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힘들었고 이런저런 기술적 난관 또한 적지 않았다.
2001년 6월, 드디어 도쿄 시내에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전국 서비스를 하고 싶었다. 임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NTT와의 협상이 어려운 데다 기술적 검증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비스 출시 행사 전날, 나는 야후BB의 모회사이자 서비스 신청 접수를 대행할 야후재팬으로 달려갔다. ADSL 접수 홈페이지 담당자를 직접 찾아 도쿄에서만 서비스 신청을 하게 돼 있는 공지 내용을 전국에서 가능한 것으로 고쳐버렸다. 큰 승부를 위해,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다음 날인 2001년 6월 19일, 출시 행사가 열리는 도쿄 오쿠라호텔 연회장은 1000여 명의 기자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로 붐볐다. 나는 분홍색 셔츠와 흰 바지 차림으로 당당히 무대에 올랐다. 나는 선언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NTT의 IDSN보다 5배 빠른 초고속인터넷을 NTT 요금의 8분의 1인 월 990엔에 서비스하겠습니다. 초기 설치비는 무료, 프로모션 기간 중엔 가정용 모뎀을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엄청난 선언을 했건만 박수 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아랑곳 않고 외쳤다.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소프트뱅크는 곧 파산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 제 방식대로 세상을 봅니다. 이 사업은 성공합니다!”
# 모건스탠리 “아무리 노력해도 적자” 전망

2007년 5월 한 일본 남성이 소프트뱅크 통신 서비스에 대한 광고 이미지로 감싸여 있는 기둥에 기대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2001년 출시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조기 안착시키면서 단번에 일본의 주요 통신업체로 부상했다. NTT와 경쟁하며 초고속인터넷 2위 업체가 됐고, 2004년 6월에는 일본 국토의 80%를 커버하는 유선전화 네트워크사 일본텔레콤을 인수했다. 2006년에는 보다폰재팬 인수로 이동통신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블룸버그]
매스컴의 반응은 과연 비판 일색이었다. 모건스탠리는 “소프트뱅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최소 1억2000만 달러의 영업손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달랐다. 도쿄는 물론 전국 여기저기서 서비스 신청이 빗발쳤다. 두 달여 만에 신청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문제는 네트워크였다. 8월 시작하기로 한 정식 서비스를 9월로 미뤘으나 답을 찾기 어려웠다. 신청자들의 항의가 쏟아져 정상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가장 큰 이유는 NTT의 지극히 비협조적인 자세였다. 나는 총무성(한국의 행정안전부에 해당)으로 달려갔다. 담당 과장을 찾아 책상을 내리치며 피 토하듯 소리쳤다.
“여기서 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내 손으로 불을 지르겠소! 총무성 당신들이 NTT에 똑바로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독점적 네트워크를 무기로 이런 불법 행위를 일삼는 걸 묵인한다면 100만 고객을 볼 면목이 없는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총무성 관료는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게. 제발 여기서만은 일을 벌이지 말아주게!”
나는 더더욱 악에 받쳤다. 그럼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서 죽으면 된단 말인가?
“무슨 소리요? 지금 그게 문제요? 당신들이 책상이나 차지하고 앉아 책임을 회피할 때 우리는 피가 마른단 말이오!”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우고서야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 과장은 지친 목소리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댁들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인허가권이 있지 않나. NTT 사장에게 전화해 공정하게, 법대로 하라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요청했다. 과장은 그대로 했고, 덕분에 간신히 파국을 면할 수 있었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의 '늑대론'=손정의 회장은 벅찬 목표에 도전하는 임직원들에게종종 '늑대론'을 강조한다. “호랑이나 버펄로가 왜 늑대를 두려워하는지 아는가? 늑대는 한 마리로 안 되면 떼로 덤비고, 그래도 안 되면 그룹으로 에워싸 상대가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여러분이 경영하는 회사는 늑대 한 마리가 될 수도, 늑대 떼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덤비다 아예 죽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가 똘똘 뭉쳐 열정과 비전으로 몰아붙이면 언젠가 반드시 승리한다. 가족, 친구, 동료에게 존경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늑대의 정신을 본받아 열정을 다해 일하라.
◆ADSL과 ISDN=2000년 당시 일본 최대 통신사인 NTT는 인터넷 전송방식으로 ISDN을 채택하고 있었다.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4배가량 빨랐다. 소프트뱅크가 이에 맞서 내놓은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가 바로 ADSL이다. 진화한 ADSL은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100배 이상 빠르다. 손정의 회장은 “한국이 1990년대 말 ADSL를 적극 도입해 인터넷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에 큰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 네이버 뉴스

2011년 10월 16일 일요일

<다문화 현장사람> ⑨ 공익변호사 장서연 | Daum 미디어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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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현장사람> ⑨ 공익변호사 장서연

연합뉴스 | 양태삼 | 입력 2011.10.16 08:02 | 검사직 버리고 취약한 이주민 위해 변론


(서울=연합뉴스) 양태삼 기자 = "약한 사람이나 소수자들의 인권 상황은 곧 그 사회 인권의 척도가 됩니다.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들의 인권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의 인권도 자연스럽게 높아지기 때문이죠."
공익변호사 그룹인 '공감'에서 일하는 장서연(33) 변호사는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등 이주분야와 관련한 법률적 문제를 주로 다룬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지방 검찰청에서 1년간 검사 생활을 하다 2007년부터 공감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어떤 계기로 공감에서 일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중고등학교 때부터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 대해 관심이 컸고, 사회를 변화하는 데 기여하고 싶어 법대(이화여대)에 진학했다"며 "특별히 이것이라고 꼽을 만한 계기는 없지만 일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고 소개했다.
검사 생활을 접고 공감에서 일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집안의 반대, 특히 할아버지께서 심하게 반대했지만 지금은 잘 이해해주고 부모님께선 공감 후원자가 될 정도로 지지해준다"며 "좋아하는 일을 돈을 받으면서(연봉 약 3천만원)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장 변호사를 포함해 모두 9명인 공감 소속 변호사들은 '초임 변호사 연봉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급여를 받고 이주민, 장애인, 소수자 , 난민 등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무료로 변론한다.
그는 자신이 맡았던 사건 가운데 현재 2심이 진행 중인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의 파업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이 사건은 인천 신항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베트남 건설노동자 10명이 올 1월 업무 방해와 폭력 행사 등 '파업'을 주동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가 지난 6월 1심에서 업무방해는 무죄 선고를, 폭력행위는 '선고 유예' 판결을 각각 받은 사건이다.
재판과정에서도 통역 문제 등 어려움이 컸지만 결국 핵심 쟁점인 업무 방해죄에 무죄 선고가 내려져 보람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 장서연 변호사 >
그는 최근 헌법재판소가 이주노동자의 작업장 이동횟수를 3회로 제한한 것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다.
"작업장 폐쇄나 회사 부도 등 외국인 노동자가 불가피하게 직장을 옮겨야 할 때도 있는데 무조건 '3회로 제한'은 문제가 있습니다. 헌법에 인간으로 존엄과 행복 추구권을 갖는 주체를 '국민'으로 한정했지만, 외국인에게 귀책사유가 없다면 이들에게도 작업장을 옮길, 나아가 직업 선택의 자유가 보장돼야 합니다."
이어 외국인 노동자 탓에 '일자리를 빼앗긴다'거나 '저임금 구조가 고착화했다'는 일부 지적에 대해 그는 "적대감 과잉의 측면이 있다"며 "가구 제조업체가 밀집한 경기도 일부 지역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없으면 문을 닫는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부의 불법체류자 합동 단속이 암묵적으로 이주노동자를 범죄자 또는 위험한 이들로 간주하는 바람에 이들에 대해 '적대적 감정의 과잉'을 조장하는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장 변호사는 정부의 다문화 정책에 대해서도 "행정부가 다문화 담론을 주도하는 게 불만"이라며 "결혼이주여성을 한국인으로 만들려는 동화주의를 기반으로 정부 정책이 이뤄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문화주의 본뜻과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소수자나 이주민 등 낯선 이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아직도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서 "가장 열악한 조건, 취약한 상황에 놓인 이들의 인권과 권리가 보장된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의 인권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거리 집회에 참가한 장 변호사 >
tsy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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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우리 민족의 진정한 主山은 백두산이 아닌 의무려산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Why]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우리 민족의 진정한 主山은 백두산이 아닌 의무려산

입력 : 2011.10.15 03:13 / 수정 : 2011.10.15 19:16

이젠 중국 땅이지만 원래 고조선의 主山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 크게 치료하는 산

우리 민족의 주산은 고조선의 '의무려산'이다.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이름은 조선이다. '고조선(古朝鮮)'을 말한다.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땅을 포함한 드넓은 대국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왜 조선이라 하였을까? 국호를 조선이라고 이름 지은 이는 이성계가 아니라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의 창업동지였다. 그가 쓴 '조선경국전'은 조선 최초의 헌법서이다. 이 책에 조선이란 국호가 정해진 내력이 소개된다. 당시 명나라 천자(주원장)는 후보국가명 '화령'과 '조선' 가운데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그 이름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도 고조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단군을 국조(國祖)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조선의 후예가 바로 조선이다'라는 국사의식을 정립하고자 한 것이다. 신화 속으로 사라질 고조선을 우리 역사에 되살린 것은 정도전과 조선왕조의 덕분이었다. 이와 같이 고조선에서 정통성을 끌어낸 정도전의 영토관은 무엇이었을까?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중국을 제패하여 천자국이 된 변방민족으로 거란족(요), 여진족(금), 몽고족(원)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정도전은 군사훈련을 엄격하게 제도화하여 전국적으로 실행케 하였다. 고조선의 옛 땅 요동을 수복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임으로써 끝이 난다.
고조선이 실존하였음은 일찍이 신채호, 최남선, 정인지 선생 등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였지만, 그 실체를 구체화한 것은 단국대 윤내현 교수이다. 기존에 고조선을 연구할 때 기초 사료로 활용하는 것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한정된 것뿐이어서 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반면 윤 교수는 중국의 다양한 사료들 속에 언급된 고조선 관련 기록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고조선의 실체를 밝혔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고조선은 광대한 제국이었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도 만주와 한반도의 고대 옷차림과 장신구 문화를 통해서 고조선의 영토가 어디인지를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두 학자가 밝힌 고조선 영역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미 중국 땅이 되어버린 고조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괜스레 외교 문제만을 야기하는 것 아닌가?' 중요한 것은 지금도 북한과 만주 땅에 우리 민족이 거주하면서 고조선 이래 민족의 맥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고조선의 주산은 어디일까? 조선조 이래 많은 학자들이 요령(遼寧)성 북진(北鎭)시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고조선의 주산으로 보고 있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란 뜻의 의무려산은 흰 바위로 되어 있어 백악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명산이다.
'진산(鎭山) 의무려산 아래 고구려 주몽씨 졸본부여에 도읍하다'(허목).
'의무려산은 동이족과 중국족이 만나는 곳으로서 동북의 명산이다'(홍대용).
'북방 영토의 주산이 의무려산인데 그 내맥이 백두산이 되었다'(장지연).
의무려산이 고조선이 활동 무대로 삼은 중심축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주산은 백두산이 아니고 의무려산이다. 이제는 남의 땅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영토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수천 년을 헤매었지만 마음의 성전을 쌓을 수 있었기에 돌로 된 성전을 쌓을 수 있었다. 여기서 '마음의 성전'이란 다름 아닌 '민족의 주산'을 말한다.

[Why]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우리 민족의 진정한 主山은 백두산이 아닌 의무려산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10월 15일 토요일

[Why] [신동흔의 휴먼카페] 하루 최대 3만명 찾는 요리사이트 '나물이네'의 김용환씨… 그 '밥상'의 비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Why] [신동흔의 휴먼카페] 하루 최대 3만명 찾는 요리사이트 '나물이네'의 김용환씨… 그 '밥상'의 비밀

  • 15 03:13 / 수정 : 2011.10.15 11:06
40세 노총각의 '생존 요리'에 주부들이 반했다… "친정엄마보다 낫네"

'나물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40세 노총각 개인 홈페이지에 주부들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벌써 10년째다. 오고가는 대화는 대부분 요리에 관한 것. 비오는 날엔 손쉽게 전 부치는 요령이 올라오고, 평소엔 쉽게 맛내기 어려운 조림이나 찜을 만드는 비결도 들려준다.
중앙대 미대를 졸업한 뒤 웹디자이너로 일했고, 한동안 아동도서 삽화 그림을 그렸던 '나물이' 김용환이 31세이던 2002년, 월드컵 끝나고 실직(失職) 상태에서 오픈한 홈페이지 '나물이네'(www.namool.com)는 그의 인생에 전기(轉機)가 됐다. 20대 내내 이어진 자취 10년의 '부엌 내공'은 웬만한 주부들도 따라오기 힘들었다. 전공을 살려 맛깔나는 음식 사진에다, 웹디자인과 커뮤니티 운영자의 경험까지 더해져 그의 사이트는 하루 최대 3만명이 찾는 인기 사이트로 부상했다. 한동안 국내 개인 홈페이지 부문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 만든 요리를 직접 촬영하는‘나물이’김용환씨. / 영진닷컴 제공

그가 소개한 것은 '요리 선생님'의 거창한 요리가 아니라 쉬운 '밥상 차리기'용 반찬들이었다. 냉장고 안 처치 곤란한 식재료를 일순에 없애주는 아이템도 많았다. 야채칸 썩기 직전 당근이나 냉동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만두가 그의 손을 거쳐 훌륭한 요리로 탄생하는 모습에 초보 주부들은 열광했다.
2003년 말 처음 출간한 요리책 '2000원으로 밥상차리기―나물이의 생존전략'(영진닷컴)이 130만부 이상 팔린 것을 비롯해 '나물이 시리즈'(5권) 요리책은 모두 스테디셀러가 됐다. 일본에서도 번역돼 지난 7월부터 일본 후지TV에서 '나물이표 요리'를 직접 만들어보는 'K-쿡'이란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다.
40대로 접어든 그는 요즘 20대 주부들로부터 가끔 "나물님이 친정 엄마보다 낫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그가 감기라도 걸리면, "몸은 괜찮으신 거죠? 나물님 몸은 나물님만의 것이 아니란 거 꼭 알아주세요"라는, 남편들이 알면 펄쩍 뛸 것 같은 댓글이 올라온다.
전국의 수많은 주부가 매일 만나는 이 남자의 일상은 온 종일 뭔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요즘은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마당 넓은 집을 얻어 부모님 모시고 텃밭을 가꾸며 살고 있었다.
요리를 하지 않을 때는 전동대패·타카·스킬톱 같은 목공장비로 뭔가를 만들었다. 오색패랭이꽃과 코스모스, 다알리아가 피어있는 마당 한쪽에 김장용 무·배추와 바질·타임·방아·호박·부추·씀바귀·취나물, 금방 식재료로 쓸 수 있는 허브와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지난 7일 오후, 그의 집 앞마당에서 버너에 끓인 물로 탄 이과수 커피와 장작불에 구운 고구마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 그의 홈페이지‘나물이네’에는1500여 가지의 요리가 소개돼 있다. 1년이 365일이니까 10년 3650일 동안 이틀에 하나꼴로 꾸준히 음식을 만들어 올려온 셈이다. 뜻하지 않은 실직 후 시작한 나물이네는 이제 그의 삶이 됐다. / 이준헌 기자 heon@chosun.com

백수에서 베스트셀러 저자로
―여성들, 특히 주부들한테 인기가 대단하다.
"내 책이 아마 주부들이 갖고 있는 요리책 중에서 가장 지저분할 것이다. 너덜너덜해지고 고춧가루가 묻어 있는 책 사진을 보여주며 '이만큼 잘 활용하고 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수많은 요리 사이트 중 노총각이 만든 사이트가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노총각이 만드는 생존형 요리란 점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보의 질(質)'이다. 당시엔 블로그도 없었고, 전문 요리사들은 조리법을 무슨 비법(秘法)이라도 되는 양 꼭꼭 숨겨두고 웹에 공개하지 않을 때였다. 그걸 개인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 보여줘 버렸다. 간편하게 만드는 자취생 요리인 데다 맛도 좋았고…."
―요리는 언제부터 좋아했나.
"사남매 중 맏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음식을 잘했다. 부모님이 모두 일을 하셔서 아침 일찍 나가시면 부엌을 턱 하니 차지하고 찬장 뒤져서 비빔밥에 떡볶이, 볶음밥 이것저것 만들어 동생들과 나눠 먹었다."
―홈페이지를 만들 생각은 어떻게 했나.
"대학 졸업 후 서울 연신내에 월세 20만원 주고 작업실 겸 자취방을 얻었다. 월세 내면서 회사 다니다 보니 집에서 잠만 자는 게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궁리했다."
―그래서 요리 홈페이지를 만들었나.
"처음에는 동화 작가가 되려고 했다. 그러자니 자료 사진을 찍어두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가 필요했다. 음식 사진이 잘 찍히는 카메라가 좋을 것 같아서 디지털카메라 음식동호회를 드나들었다."
―그게 직접 요리하는 것과 관계가 있나.
"나도 사진을 올리고 싶었다. 당시 사람들이 맛집에서 먹은 음식 사진을 많이 올렸는데, 나는 그런 데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한 달 월세 내기도 빠듯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든 음식 사진을 올렸다. 조리법을 알려달라는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이것이 내 독자 홈페이지를 만들자는 발상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낸 책마다 '나물이의 생존 전략'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무슨 의미인가.
"말 그대로다. 첫 책이 나올 무렵, 나는 수입이 없었다. 월세 20만원이 버거운 '백수'였다. 닭 한 마리를 재래시장에서 1000원 주고 사와 삼등분한 뒤 세 가지 요리를 만들어 사이트에 올릴 정도로 아꼈다. 그래서 '생존 전략'이란 말을 썼다. 지금도 요리책이 생계 혹은 생존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10년 전이나 마찬가지다."
―'나물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얻었나. 나물 요리를 잘했나.
"관계없다. 개그맨들도 많이 따라 했던 코미디언 이주일의 '콩나물 팍팍 무쳤냐'를 잘 흉내 낸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일본 후지TV에서 당신의 음식을 주제로 'K-쿡'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데.
"책 다섯 권 중에서 두 권이 일본어로 번역됐다. 최근 K-팝 바람이 불면서 일본 내 한국 요리에 대한 관심도 커져, 지난 7월부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현재 후지TV 인터넷에서 시즌 1을 끝내고, 10월부터 시즌 2에 들어갔다. 시즌 1은 100만 뷰(view)를 기록했다. 반응이 좋은 편이어서 본격적으로 케이블 TV용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직접 출연하는 것인가.
"아니다. 일본 MC와 번역자가 나와 내 책에 나온 대로 요리를 만들어보고 한류 연예인이 출연해 시식해보는 순서로 진행된다. 인터넷 방송용 콘텐츠라서 인사말을 아이폰으로 촬영해 보내준 적은 있다."

▲ 나물이의 쉽게 만드는 요리

한국식 밥숟가락 계량법의 원조
그의 요리법은 '실전형'이다. '듬뿍 넣는다'거나 '한두 방울' 같은 애매한 표현은 없다. 대신 밥숟가락 1개, 2분의 1, 3분의 1 등 1~2인분을 기준으로 숫자를 제시한다. 특히 그는 서양식 '큰술', '작은술' 계량을 몰아내고 우리 밥숟가락을 계량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밥숟가락 계량법의 '원조'로 통하던데.
"자취 시절 보던 요리책마다 하나같이 큰 술, 작은 술이나 밀리리터(mL) 단위로 표기돼 있었는데 나한테는 계량스푼이나 서양식 숟가락이 없었다. 솔직히 간장이나 된장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감(感)을 잡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만의 한국식 '밥숟가락 계량법'에 익숙해졌다."
―어떤 차이가 있나.
"요리책에 나오는 '1 큰술'과 '1과 2분의 1 작은술'은 똑같이 15mL다. 서양 사람들이 자기들 식탁에 올리는 수프용 큰 숟가락(15mL), 디저트용 작은 숟가락(5mL)을 계량 단위로 사용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 밥숟가락은 10mL여서 훨씬 편리하다."
―첫 요리책이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팔렸다.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과거 요리책을 예쁘게 만들려고, 완성된 요리 사진만 크게 싣고 조리 과정을 보여주는 조각 사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반대로 갔다. 끓기 직전이나 재료를 배합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줘 '실패가 두려운' 초보자들이 눈으로 확인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해줬다. 또 내가 직접 요리하고 사진 찍고 글을 썼기 때문에 조리법상의 오류가 적었다. 요리사, 사진작가, 작가 등 5~6명이 달라붙어 한 달 만에 뚝딱 만들어내는 요리책에는 오류가 많다. 나는 지금도 '하루에 요리 한 가지만 만든다'는 원칙을 지킨다."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요리 가짓수는 얼마 정도 되나.
"1500가지 정도 된다. 1년이 365일이니까, 10년 3650일 동안 이틀에 하나꼴로 꾸준히 음식을 만들어 올려온 셈이다."
―10년인데 더 만들 요리가 남았나.
"아직도 경험해보고 싶은 요리가 더 많다. 10년을 꾸준히 하다 보니 칼질 실력도 늘었고, 요리를 보는 시각도 깊어졌다. 밥상만 갖고도 '아내와 함께 먹는 밥상', '아이와 함께 먹는 밥상'처럼 주제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다."
"10년간 가꿔온 세계가 내 힘의 근원"
그의 홈페이지는 짧지 않은 우리나라 인터넷 역사에서 독특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과거에 이름을 떨쳤던 개인 홈페이지들이 파워 블로거나 카페, 커뮤니티에 권력을 내준 지 오래다. 하지만 '나물닷컴'은 이런 흐름에서 무척 동떨어져 있다. 어느 날 그가 홈페이지에 독백처럼 올려둔, "요즘 나는 바보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꾸민 내 세상 속에는 행복함이 있다. 누구도 나를 바보라 하지 못할 것이다"는 말처럼 그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자신이 꾸려온 세계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는 조금만 유명해지면 '패거리'가 만들어지는 인터넷의 습성과도 무척 다르다.
―개인 홈페이지라는 형태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뭔가.
"정보의 공유와 개방이라는 초창기 인터넷 정신에 나는 공감한다. 하지만, 요즘은 포털 내부로 들어가지 않으면 대중과 만날 기회조차 사라진다. 지금 내 사이트는 국내 포털보다 구글에서 더 검색이 잘 된다. 만약 내가 네이버에서 블로거로 활동한다면 상황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폐쇄적인 것 아닌가. 내가 그리로 들어갈 수는 없다."
―원래는 회원 가입도 없었다던데….
"요리 정보를 공유하자면서 주민등록번호를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유명 사이트들이 회원 수를 일종의 '가치'로 보는 것도 싫었다. 그런 사람들이 떼를 지어 나중에 '패거리'가 됐다. 하지만 나도 나중에는 해킹 때문에 최소한의 가입 절차는 마련했다. 스팸이나 해킹은 장 담글 때 구더기 같은 존재다."
―요즘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와 비교하면 당신의 홈페이지는 너무 조용하다.
"내 홈페이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의 치유가 된다는 분도 있다. 이곳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올리고, 교류하고, 일기를 쓰는 잔잔한 공간이다.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지만, 동시에 교류도 이뤄지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너무 요란하다."
―요리 정보제공 사이트로 시작해 기업처럼 운영되는 곳도 있다. 다른 사업은 시도해보지 않았나.
"잠시 반찬가게를 열었다가 이내 접었다. 품질을 포기하면서까지 단가를 낮추는 것이 싫었다. 또 요리 만드는 내 본연의 삶을 원했다. 끊임없이 사람 만나고 가격 협상하는 것은 나의 삶이 아니더라."
―홈페이지에서 공동구매나 정육 판매를 하지 않나.
"거기선 단돈 1원도 가져오지 않는다. 모두 위탁했다."
―요리 쪽의 일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는 있나, 요리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나.
"거의 교류가 없다. 결혼 안 한 총각 주제에 여자들이 드나드는 사이트의 주인장이다 보니 딱 구설에 오르기도 쉬운 조건이다. 혼자 사는 남자 집에 주부가 찾아오면 이상하지 않겠나. 회원 모임은 지금까지 두 번 했다. 지난 7월 다섯 번째 요리책인 '나물이네 집밥'(중앙북스) 출판 기념회 때 우리 집 앞마당에 300명 정도가 모였는데 다들 남편 손을 잡아끌고 왔더라. 그날 남편들한테 눈총을 많이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어떤 사업을 구상 중인가.
"작년 말 이곳으로 이사했다. 도시에선 하기 힘들던 장 담그기, 김치 담그기 콘텐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혼자서 이 모든 것을 하기는 힘들어, 내년이나 후년쯤 결혼을 생각 중이다."
―'노총각'이 당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아닌가.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하려면 결혼해야 한다. 마당 한쪽에 요리 스튜디오를 꾸미고 있는데, 이곳에서 개인 방송을 해보고 싶다. 유튜브에는 정말 다양한 요리 영상이 올라온다. 그동안 혼자 해왔지만, 방송은 사람 손이 더 들어간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 함께 밥 먹을 사람도 절실하다."
―당신에게 요리는 뭔가.
"요리는 삶의 일부다. 요리 속에서 진정한 삶을 느낀다. 또 요리를 하면 식재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는 자연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보는 느낌이 달라진다."

[키워드] 나물이네2000원으로 밥상차리기밥숟가락 계량법개인 방송

▲ 미대를 졸업하고 요리책을 쓰고있는 '나물이'시리즈 저자 김용환씨가 경기도 광주 자신의 집에서 요리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이준헌 기자

[Why] [신동흔의 휴먼카페] 하루 최대 3만명 찾는 요리사이트 '나물이네'의 김용환씨… 그 '밥상'의 비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10월 13일 목요일

Full text of Lee's address to U.S. Congress | YONHAP NEWS

 

Full text of Lee's address to U.S. Congress

WASHINGTON, Oct. 13 (Yonhap) -- 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South Korean President Lee Myung-bak's speech at a joint session of the U.S. Congress on Thursday.
   _____________
Mr. Speaker, Mr. Vice-President, distinguished members of Congress, ladies and gentlemen,
It is a great privilege to speak to you from this podium, in this great institution representing democracy and freedom. And I am particularly grateful to the leadership of both parties for their hard work in trying to get this agreement passed and to all the esteemed members of Congress for their support, in ratifying the Korea-US free trade agreement last night, in a swift manner which, I am told, was quite unprecedented.
   I flew halfway round the world to be here today among friends, thinking about and deeply grateful for the friendship between our two countries.
   For Korea, America is not a distant land.
   America is our neighbor and our friend. America is our ally and our partner.
There is a Korean expression that describes our sixty-year partnership: "katchikapshida".
  In English, it means "We go together."
   Yes. We have been going together for sixty years.
   For the last sixty years, remarkable changes took place in both of our countries.
   For the United States, it has been a journey to new frontiers - on this planet and beyond.
   It has been a journey of achieving fantastic breakthroughs in science and technology which led to the advent of the information age.
   It was a journey of developing new cures and making advances in machineries. And throughout this journey, you served as the greatest inspiration for peace and prosperity the world has ever known.
For the Republic of Korea, the last sixty years has been an incredible time of transformation and renewal.
   It was an epic journey from poverty to prosperity;
from dictatorship to a thriving democracy;
from a "hermit nation" to a "global Korea".
   Korea's story is your story, too.
   And that fact is clear in our capital city, Seoul.
   During the Korean War, Seoul was almost completely destroyed.
   Today, however, Seoul is reborn.
   Where there was once rubble now stands the Seoul Tower, looking out over a thriving modern metropolis. In the streets where women and children searched the wreckage for fuel, soon vehicles powered by magnetic strips will roam the streets. Seoul is also the most wired city on the planet.
   Seoul is also one of the most dynamic and cosmopolitan cities in the world. Last year, Seoul was host to the G20 Summit and next March it will host the second Nuclear Security Summit which will be attended by more than fifty heads of state and government.
   To mark the 6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we invited American veterans back to see the land they helped liberate. And when they visited Korea, they found very few landmarks that they recognized from the war. Instead, they saw in Korea what you see here in the United States today.
   The pace and the pulse of modern life.
   A creative entrepreneurial spirit that knows no bounds.
   A sense of self-confidence, optimism and pride.
   And an unshakable faith in freedom; in free-elections, a free press and free markets.
   Ladies and gentlemen, these are the values that we share.
   Your great president and statesman, Thomas Jefferson, said that the only safe place to locate "the ultimate powers of the society" is in the hands of "the people themselves."
   These same values can be found in Korea, too.
   One of Korea's greatest kings, King Sejong, said 600 years ago that "The people are heaven. The will of the people is the will of heaven. Revere the people as you would heaven."
   Here, an ocean away, in the People's House, these ancient words of our ancestors that calls us to revere our people, still ring true.
We also share a belief that political freedom and economic freedom must go hand in hand.
   During the 1960s, Koreans demanded democracy and freedom. As one of the student leaders who organized protests calling for democracy, I was caught and imprisoned but this only strengthened my conviction that universal rights such as democracy, dignity of man and human rights must never be compromised.
   At the same time, the Korean people yearned for another kind of freedom - freedom from poverty.
   Back then, Korea's per capita GDP was less than $80.
   University graduates roamed the streets, unable to find a job.
   Opportunities were scarce.
   It was difficult for people to have hope for the future.
   This is when I realized that even if we had political freedom and democracy, we would not be truly free without economic freedom.
   So, after I was released from prison for my political activities, I joined a small local company. This company, which had less than hundred employees at the time, later evolved into a global conglomerate with over 160,000 employees. And as one of its youngest-ever CEOs, I was privileged to be part of Korea's remarkable economic rise as Korea's economy grew into being near the global top ten. Along the way, I was able to escape poverty myself but being able to contribute to my country's growth will always remain one of my proudest moments.
   As you can see, we have won the fight to win two very important freedoms- our political freedom and our economic freedom. Very few countries were successful in their quest to win freedom from poverty and freedom from oppression. And Koreans are proud of this.
   And they also know that your friendship - and our alliance - has been indispensible throughout this remarkable journey of hope. And this is why all of you should be proud of what Korea and the Korean people have achieved.
Nevertheless, I still get asked by many foreign leaders: how did a country with no natural resources, no technology, no capital and no experience manage to achieve so much in just one generation?
   My answer to them is simple: the power of education.
   The Korean War, as I've said, completely destroyed my country.
   The people had nothing to eat and nothing to wear.
   For years, we relied on foreign aid.
   But the Korean people believed in one thing and that was education.
   Even if parents had to work day and night and drink nothing but water to chase away their hunger, they spared nothing when it came to their children's education.
   My parents were the same. They were determined to give their children hope by giving them a chance to learn.
   And I was determined to learn. I used to be a street vendor selling anything and everything during the day and attended night school.
   After night school, however, going onto college was but a dream; yet, I managed to get in through the help of others. Although I had to wake up every day at 4 am to haul garbage to pay my way through college, I knew that learning was the key.
   My parents, all Korean parents, believed that education was the best way to break that vicious cycle of poverty.
   These children later became the lead actors in this great drama.
   Their sweat and tears is what transformed Korea from being one of the poorest countries in the world to one of the most dynamic today.
Our desire for learning continues.
   Currently, there are more than 100,000 Korean students studying in your schools. These young students will become the leaders of tomorrow; they will become scientists and doctors, bankers and engineers, teachers and artists; they will continue to contribute to making both of our countries stronger. And they will bring our two countries closer together.
Distinguished members,
Today, the United States and Korea have one of the closest, most important economic relationships in the world. For both countries it has brought untold benefits and opportunities. Our trade in goods, services and mutual investments has grown dramatically.
   We invest in you - and you invest in us - because we are interdependent.
   When we trade together, we grow together.
   When we build together, we rise together.
   And when we work together, we win together.
We see this in the towns and cities and states this Congress represents.
   We see it in West Point, Georgia, where a new Kia automotive plant is expected to create 1,400 new businesses and more than 20,000 new jobs nearby. We see it in Midland, Michigan, where Dow Chemical, a distinctly American company and Kokam Engineering, a distinctly Korean company, have joined together to make some of the world's most advanced batteries - the building blocks for a new era of electric vehicles.
   And we have more than 10,000 Korean companies, including global conglomerates such as Samsung and LG, doing business and investing all across America.
   And we see such cooperation in Korea, as well.
   Just west of Seoul, a GM Korea joint venture is manufacturing and selling Chevrolets to Korean consumers. Sales are up 27% in just the first six months since the brand was launched. And 55% of Koreans say they would consider buying one.
   And our cooperation is not just limited to automobiles. Many others, from microchips to biotech, provide similar examples. Our mutual investment is yet another good example.
   Mr. Speaker, distinguished members of Congress,
Thanks to all of you in this chamber, our economic ties are becoming even stronger.
   The Korea-US Free Trade Agreement was ratified by this Congress here last night. Here, where the Mutual Defense Treaty was signed by Korea and the United States in 1953, a new chapter in our relationship has opened. Our relationship has become stronger.
The Korea-US free trade agreement is a historic achievement, a win-win for both countries. This agreement is a major step toward future growth and job creation. It is a win for our corporations. It is a win for our workers. It is a win for small businesses. And it is a win for all the innovators on both sides of the Pacific.
Perhaps you have heard what the experts have said: that America's economic output will grow more due to the Korea-US free trade agreement than from America's last nine trade agreements combined.
   This deal also has fair labor provisions. It has rigorous environmental standards. And it has strong protections for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These provisions will improve our business environments. These provisions will allow for us to widely share the benefits of trade more than ever.
In this century, much has changed but not this basic truth: open markets build strong economies.
   And in this 21st century, I firmly believe economies must be green to grow.
   Unfortunately, this was not always our way. For far too long in my country, growth came at a cost. Rapid economic growth cast a dark shadow - in our environment, in the air that we breathed and the water that we drank.
   This is why when I was mayor of Seoul, I considered it my calling to restore Seoul's Choenggycheon stream which was neglected for decades. The restored stream revitalized the surrounding landscape; revived commercial activity and enriched the lives of the people in countless ways.
   As president, I announced a new national vision: low carbon green growth.
  And it is our goal to become the world's seventh-largest green economy by 2020.
The benefits of green growth are real. This is why we are investing heavily in the research and development of next-generation power technologies such as the smart grids. This is why we are trying to become the leader in renewable energy sources. This is why we've required our biggest carbon-emitting companies to set greenhouse gas targets this year. They will, of course, work to deliver on their promise.
   I am aware that the US is also taking measures to ensure a sustainable future. Some of those steps we are taking together.
   For example, in 2009, our governments signed a statement of intention to work together on renewable energy, energy efficiency and power technologies. The Chicago Smart Building Initiative is a good example of our cooperation. And during my visit this time, our two governments signed a statement of intent on the Joint Research Project on Clean Energy. Joint investments and cooperation will only increase; our work will lead to tangible results that will benefit mankind.
   As our countries move down this path, we will be moving even closer together. We will move forward together.
Distinguished members, ladies and gentlemen,
The strength of a country is not measured in dollars alone.
   Our mutual defense keeps us strong. And it keeps us safe.
   Ours is an alliance forged in blood. That is how we Koreans describe it.
Fifty-eight years ago today in October 1953 here in Washington DC,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signed the Mutual Defense Treaty. In the words of that treaty, we pledged our "common determination to defend (ourselves) against external armed attack so that no potential aggressor could be under the illusion that either of (us) stands alone in the Pacific area."
   But, we know that defending freedom is never easy.
   It is never free of cost or free of risk.
For this, I want to thank you. I thank you, on behalf of the Korean people, for standing by us in times of darkness.
We also want to thank the 28,500 American men and women in uniform who serve today in Korea. We want to thank you for keeping faith with the generation of your parents and grandparents, defending freedom on the Korean Peninsula.
Today, I would also like to thank the Korean War veterans who are here with us today. They are Representatives John Conyers. Charles Rangel. Sam Johnson. And Howard Coble. We thank these gentlemen for their service. Thank you.
   To these gentlemen and to millions of others, the Korean War or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are not abstract concepts.
   They are not abstract concepts for me, either.
   My older sister and younger brother, both just children, were killed in that war. I will never forget them. I will never forget how my mother tried so hard to keep them alive. With the war raging all around us, there were no doctors and we couldn't afford to buy medicine. My mother stayed up all night, praying to God. Many Koreans still live with such pain.
   I recognize the reality that Korea has been split in two.
   But I will never accept it as a permanent condition.
The two Koreas share the same language, history and customs. We are one people. In both Koreas, there are families who have never spoken to their loved ones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My hope is that these people and all 70 million Koreans will enjoy real happiness, real peace.
   And for this, we must first lay the foundation for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upon this foundation we must strengthen cooperation between the two Koreas. We must seek the path that will lead us towards mutual prosperity.
   And we must achieve peaceful unification.
   A unified Korea will be a friend to all and a threat to none.
  A unified Korea will contribute to peace and prosperity, not only in Northeast Asia but far beyond.
We therefore must achieve th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nd North Korea must give up their nuclear ambitions.
Korea and the United States stand united.
   We are in full agreement that the Six Party Talks is an effective way to achieve tangible progress.
   We are in full agreement that we must also pursue dialogue with North Korea. However, we must also maintain our principled approach. A North Korea policy that is firmly rooted upon such principles is the key that will allow us to ultimately and fundamentally resolve this issue.
North Korea's development is in our collective interest and this is what we want; however, this depends on its willingness to end all provocations and make genuine peace. We will work with you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so that North Korea makes the right choice.
Distinguished members,
Our mutual defense treaty has ensured stability and prosperity to flourish not only on the Korean Peninsula but across Northeast Asia.
   Northeast Asia today is a more dynamic region than ever. And economic change in this region brings geopolitical change. It brings shifts in the balance of power that has long prevailed.
   The United States, as a key player of the Asia-Pacific region and as a global leader, has vital interests in Northeast Asia. For Northeast Asia to play a more constructive role in global affairs there must be peace and stability in the region.
   And your leadership that has ensured peace and stability of Northeast Asia and beyond in the 20th century, must remain supreme in the 21st century.
The ideals that you represent and the leadership that allows for such ideals to become true, must continue.
There remain many challenges in the world today and your leadership is vital. Terrorism, proliferation of WMD, climate change, energy security, poverty and disease - these are just a few of the challenges that require your leadership.
   In this regard, our free trade agreement has significance because it will be a force for stability. Because lasting stability, again, depends on economic opportunity being open and robust. Our relationship can be the catalyst that generates growth all along the Pacific Rim. And in doing so, it will make clear how fully our fates are connected.
More than ever, Korea is looking beyond the horizon. It will willingly embrace its international responsibilities. It will work to resolve global challenges.
   Since becoming President of Korea, my vision for Korea in the coming decades is for a global Korea.
   Global Korea has joined United Nations peacekeeping operations in East Timor, Lebanon and Haiti. Korea was the third-largest contributor of troops to the coalition forces in Iraq. We have sent reconstruction teams to rebuild Afghanistan. Our naval vessels support the US and EU in fighting against piracy off the coast of Somalia. We will take part in the international effort in bringing democracy to Libya and rebuilding its shattered economy. We have pledged to double our overseas development assistance by 2015. Next month, the High Level Forum on Aid Effectiveness will be held in Busan, Korea's second-largest city.
   In these and countless other ways, Korea will carry out its duties as a responsible member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s we face the many global challenges that lie ahead of us and as we promote universal values, Korea will remain your partner and friend.
   In 2009 when President Obama and I signed the Joint Vision for the Future of the Alliance, we agreed to work closely together in resolving regional and international issues, based on shared values and mutual trust.
   During our summit today, we renewed this commitment. We also reaffirmed our commitment to face the challenges of today for the generation of tomorrow.
   Our alliance will grow and evolve.
   And it will prevail.
Mr. Speaker, distinguished members of Congress, ladies and gentlemen,
Before I part, I want to thank you again for the honor of addressing this Congress. I would also like to thank President Obama and Mrs. Obama for their invitation.
   I also take this opportunity to pay tribute to the 1.5 million Korean-Americans who have been contributing to this great country. As president of Korea, I am proud that they are giving back to the country that gave them so much. I am also deeply grateful to you and the American people for giving them the chance to make their dreams come true.
Your ideals and aspirations have been ours as they have been for much of the world.
   Half a century ago, young Americans served in the Korean War "for duty beyond the seas." Today, our peoples hear the same call. Not always active combat. Not always to brave the rugged mountains or bitter winters. But it is an important duty nonetheless - a charge to help create a more peaceful, more prosperous world.
   In the 21st century, duty and destiny calls us once again.
   As before, let us rise to meet the challenges.
   Let us go together.
   Together, and forward.
   God bless you, God bless America.
   Thank you.
  (END)

Full text of Lee's address to U.S. Congress | YONHAP NEWS

이 대통령 美의회 연설서 45차례 박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이 대통령 美의회 연설서 45차례 박수

  • 연합뉴스

입력 : 2011.10.14 06:50 / 수정 : 2011.10.14 07:16

▲ 이명박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각) 미 상·하원 합동회의가 열리고 있는 의회를 방문해 연설을 하며 기립박수를 받고 있다. /출처=AP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의 13일(현지시간) 미국 의회 상ㆍ하원 합동회의 연설은 의원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약 45분간 진행됐다.
당초 연설 소요시간을 약 30여분 정도로 예상했지만 이 대통령의 입장과 퇴장 때를 포함해 모두 45차례나 의원들의 박수가 터지면서 연설시간이 길어졌다.
45차례의 박수는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상ㆍ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한 외국 국가원수 가운데 최다 기록이다.
오바마 정부에서 상ㆍ하원 합동연설을 한 외국 정상은 이 대통령까지 모두 6명으로, 이전 최다 기록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세운 26차례였다.
45차례의 박수 가운데 기립 박수도 5차례에 달했을 만큼 이 대통령의 연설은 미 상ㆍ하원 의원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검은색 정장에 붉은색 넥타이를 맨 이 대통령이 이날 오후 미 하원 본회의장에 입장하자 의원들은 열렬한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부인 김윤옥 여사는 차녀 승연 씨와 함께 귀빈석에서 이 대통령의 연설 모습을 지켜봤다.
이 대통령은 연단으로 오르면서 의원들과 반갑게 악수를 했고, 연단에 오른 뒤에도 기립 박수가 계속되자 손을 흔들며 영어로 ‘땡큐(감사합니다)’라고 사례했다.
이 대통령은 존 베이너 하원의장의 소개를 받은 뒤 연설을 시작했고 미 의회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신속 비준을 높이 평가하자 첫번째 갈채가 터졌다.
그리고 의원들과 미국 국민을 향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신의를 지켜나가고 있는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고 한 대목에서 두번째 기립 박수가 나왔다.
이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의원들을 일일이 호명하자 상ㆍ하원 의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다시 기립박수를 쳤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 참전 의원들에게 영어로 “You are still young. You look a young boy.(여전히 젊어 보인다. 소년같다)”고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상ㆍ하원 의원들은 이 대통령이 북한의 핵 포기를 촉구한 대목과 퇴장 전 연설 말미에 영어로 “God bless you, God bless America.(신의 가호가 있기를)”라고 덕담한 대목에서 역시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두 차례의 ‘영어 덕담’은 연설 원고에 없던 ‘애드리브(즉흥 연설)’였다.
이 대통령은 한미 양국이 공유하는 가치들을 나열하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프라이드 치킨도 좋아한다”고 재차 애드리브를 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연설이 끝나자 상ㆍ하원 의원들은 앞다퉈 이 대통령에게 몰려와 사인을 받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8일 청와대에서 연설 최종 독회를 할 때 프롬프터까지 설치하고 초 단위로 시간을 맞추는 연습을 해가면서 연설의 완결성을 기했다는 후문이다.
이에 앞서 이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오전 백악관에서 단독ㆍ정상회담을 각각 1시간20분, 40분간 진지하고도 격의없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단독회담은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Oval office)에서, 확대회담은 각료회의실(Cabinet room)에서 진행됐다.
이 같은 분위기는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도 그대로 묻어났다. 우천으로 인해 로즈가든에서 이스트룸에서 장소가 변경됐으나, 두 정상은 각각 모두 발언을 하면서 악수와 깊은 포옹을 나누면서 돈독한 우위를 과시했다.
이어 이 대통령 내외는 낮 국무부 벤자민 프랭클린 룸에서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내외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주최 국빈 오찬에 참석했다.
오찬에는 공식ㆍ특별수행원과 경제인을 비롯한 우리측 인사와 미국측 인사 등 모두 250여명이 참석하는 ‘매머드 행사’로 진행됐다.
한국측 인사로는 ‘피겨 퀸’ 김연아, 하버드 법대 첫 동양계 여성 종신교수인 지니 석(석지영)씨,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부인인 우정은 버지니아대 학장, 나이트라인 앵커인 주주 장(장현주), 드라마 ‘ER’에 출연했던 여배우 스미스 조, 하워드 고(고경주) 미국 보건부 차관보 등이 초청됐다.
미국측 인사로는 존 티렐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도널드 그레그ㆍ토마스 허바드ㆍ스테판 보스워스 전 주한 미국 대사,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 등이다. 이 대통령의 차녀 승연(38)씨도 가족대표로 참석했다.
바이든 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은 환영사와 건배사를 통해 이 대통령의 국빈방미와 국무부 방문을 환영하며 이 대통령의 한미동맹 강화에 대한 기여와 G20(주요 20개국) 등 국제무대에서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바이든 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이 한미관계 증진에 기여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점과 미국의 여수 엑스포 참여에 큰 역할을 해준 데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특히 바이든 부통령이 건배사를 통해 “이 대통령이 예전에 불도저 개선방법을 찾기 위해 완전히 해체했다가 재조립해 별명이 ‘불도저’”라고 하자, 이 대통령은 “그 불도저가 미국 캐터필터사 제품”이라고 해 좌중에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다음은 이 대통령의 합동회의 연설 전문.
존경하는 베이너 하원의장, 바이든 부통령, 상하 의원 여러분과 내외 귀빈 여러분,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인 이 곳 미국 의회 의사당에서 의원 여러분과 미국 국민 앞에 연설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오기에 앞서 어젯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상하원 의회 지도부의 각별한 노력과 의원 여러분의 전폭적인 지지로, 전례없이 신속하게 통과시켜 준 것을 높이 평가하고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먼 길을 날아와 여러분 앞에 선 지금 나는 대한민국과 미국의 오랜 우정을 생각하며 깊은 감회를 느낍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은 먼 나라가 아닙니다. 가까운 이웃이자 친구이며, 동맹이자 동반자입니다. 지난 60여 년의 한미 동반자관계를 나타내는 한국어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같이 갑시다’입니다. 영어로 하면, ’We go together’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60년을 함께 해 왔습니다.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미 양국 모두 놀라운 변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미국은 지구를 넘어 새로운 프런티어를 개척해 왔습니다. 우주시대를 열었고, 정보화시대를 열었습니다. 과학기술, 의약, 기계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개척정신은 미국을 넘어 세계 평화와 인류 번영을 이끄는 강력한 동력이자 위대한 영감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지난 60년 또한 심대한 변화의 시대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고, 독재에서 벗어나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했습니다. ’은둔의 나라’는 ‘성숙한 세계국가’로 거듭났습니다. 한국의 이야기는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서울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황폐했던 남산 위에 이제는 서울타워가 우뚝 서 있고 그 아래로는 번영하는 현대적 도시가 펼쳐져 있습니다. 엄마와 아이들이 땔감을 찾으러 다녔던 거리에는 머지않아 전기자동차들이 달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서울은 지구상에서 인터넷이 가장 잘 연결된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제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국제화된 도시, 가장 활력이 넘치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난해에는 G20정상회의를 개최했고, 내년 3월에는 50여개국 정상이 참가하는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작년 6.25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한국 정부는 참전용사들을 한국에 초청했습니다. 그들이 전쟁 때 기억하던 대한민국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곳 미국에서 언제나 보고 경험하는 것들을 한국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빠르고 역동적인 현대 사회, 끊임없이 도전하고 혁신하는 기업가 정신, 낙관적 태도로부터 나오는 자신감과 긍지, 자유민주주의, 자유로운 시장, 언론의 자유, 즉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렇습니다. 이 모두는 한미 양국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지도자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한 사회의 궁극적인 권력의 원천은 바로 국민 자신”이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이러한 가치는 한국의 가치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성군으로 존경받는 세종대왕은 약 600년 전 “백성이 하늘이고, 민심이 곧 천심이다. 하늘처럼 백성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태평양 건너 이 곳, 미 의사당에서 국민을 섬긴다는 양국 선조들의 가르침이 그대로 울려 퍼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한미 양국 국민들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함께 가야 한다는 신념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당시 한국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원했습니다. 나는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되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민주주의, 인간의 존엄성, 인권과 같은 가치들이 결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더욱 분명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한국 국민들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대학 졸업생들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길거리를 방황했습니다. 기회도 별로 없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경제적 자유가 결여된 민주화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요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이후 나는 작은 기업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종업원이 채 백 명도 되지 않았던 그 기업에서 나는 얼마 후 최연소 CEO가 되었습니다. 그 회사가 성장하여 종업원 16만 명이 넘는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대한민국도 세계 10 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도 가난에서 벗어났지만, 국가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일생의 크나큰 보람이었습니다.
한국은 전후 두 가지 자유, 즉 ‘빈곤으로부터의 자유’와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동시에 성취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국민들은 이에 큰 긍지를 느낍니다. 한국이 이렇게 성장하는데 미국의 도움과 방위공약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한국의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외국 정상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아무런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경험도 없는 나라가 어떻게 단 한 세대 만에 오늘의 한국을 이루었는가? 나는 바로 ‘교육의 힘’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했기 때문에, 우리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고 해외 원조에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물로 허기를 달래는 배고픔 속에서도 자녀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나의 부모 또한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자녀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나 자신 낮에는 길에서 장사를 하며 야간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대학 진학은 꿈조차 꾸기 어려웠습니다. 그 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나는 새벽 4시부터 청소를 하며 학비를 벌어야 대학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와 같이 한국의 부모들은 대부분 교육만이 가난의 대물림을 끊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육받은 인재들이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땀과 눈물, 피나는 노력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은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육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 내 한인 유학생은 10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이들은 장차 과학기술, 의학, 금융, 교육, 예술, 사회 각 분야에서 한국과 미국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한미 양국을 더욱 가깝게 이어줄 것입니다.
의원 여러분, 오늘날 한미 양국은 강력한 경제협력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는 양국 모두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기회를 가져왔습니다. 양국간 상품과 서비스 무역은 빠르게 증가해 왔습니다. 투자 또한 같은 추세로, 상호 보완적인 한미 양국은 서로에게 투자해 왔습니다. 이처럼 한미 양국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노력하면서 함께 번영하고, 함께 일하면서 함께 승리를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양국 간 경제협력 사례들은 여기 계신 의원 여러분의 지역구 곳곳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조지아주 웨스트 포인트의 경우, 신축된 기아 자동차 공장이 그 주변에 1천400개의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면서 2만 개가 넘는 일자리를 만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미시간주 미드랜드에도 있습니다. 미국의 다우화학과 한국의 코캄엔지니어는 ‘다우 코캄’이라는 합작회사를 세워, 내년부터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 배터리를 제작하며 새로운 전기자동차 시대를 열어갈 것입니다. 이 외에도 삼성이나 LG 같은 총 1만개가 넘는 많은 한국 기업들이 미국 전역에 진출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역시 한미 경제협력의 사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GM의 한국 자회사는 쉐보레를 한국에서 생산, 판매하고 있으며, 판매 개시 6개월 만에 27%나 판매량이 증가했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55%가 쉐보레 차를 구입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미 경제협력이 자동차 산업 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반도체에서 바이오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미 양국은 상호투자를 통해서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베이너 하원의장, 바이든 부통령, 그리고 의원 여러분, 이제 한미 양국 관계는 의원 여러분의 노력에 힘입어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마침내 미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통과된 바로 이 자리에서, 2011년 한미자유무역협정도 비준됨으로써 한미관계의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이로써 한미관계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한미 FTA는 양국 모두 윈윈하는 역사적 성과입니다. 한미 FTA를 통해 두 나라는 모두 미래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향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우리 양국의 기업인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소규모 상인, 그리고 창조적 혁신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로 인해 미국이 얻게 될 경제적 혜택은 최근 미국이 체결한 9개 무역협정의 효과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또한 한미 자유무역협정에는 공정한 노동 조항과 엄격한 환경보호 조항, 강력한 지적재산권 보호 조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를 통해 오히려 경제 환경을 개선하고 우리 양국의 무역 이익을 그 어느 때보다 광범위하게 증가시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금세기 들어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무역을 통한 시장개방이 경제를 강화시킨다는 기본적인 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21세기 경제성장은 친환경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이 친환경적 경제성장을 오래 전부터 추구해 온 것은 아닙니다. 빠른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환경, 대기, 수질 오염이라는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울특별시장 시절, 수십년 동안 서울한복판에 버려져 오염된 청계천을 복원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새롭게 태어난 청계천은 경관을 아름답게 할 뿐 아니라 시민들의 생활을 더욱 쾌적하고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나는‘저탄소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정 비전으로 제시하고 2020년까지 대한민국을 세계 7대 녹색 경제대국으로 성장시켜 나간다는 목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녹색 성장의 혜택은 실질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스마트 그리드 같은 전력기술의 연구·개발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으며,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세계 선도국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기업들은 금년 중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미국 또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한미 양국이 함께 추진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양국 정부는 2009년 재생 에너지, 에너지 효율, 그리고 전력기술 분야에 관해 함께 협력해 나가자는 의향서에 서명했습니다. 시카고 스마트 빌딩 구축사업도 이러한 협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방문 중에 ‘클린에너지 공동연구개발사업에 관한 이행약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양국간 공동투자와 협력은 보다 구체화되고 본격화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양국이 이러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수록 우리는 더욱 긴밀하고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국력은 단지 경제 수치만으로 측정될 수 없습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해주며, 우리를 더욱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로써 맺어진 동맹’입니다. 한국인들은 한미 동맹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1953년 10월 이 곳 워싱턴에서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우리는 외부의 무력공격에 대해 서로를 방어한다는 공동 결의를 서약했습니다. 이를 통해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들도 태평양 지역에서 한국과 미국이 홀로 있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자유를 수호해 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나 위험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미국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해 준 데 대해 나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2만8천500명 주한 미군의 헌신에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여러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의 신의를 지켜나가고 있는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 자리에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존 코니어스 의원, 찰스 랭글 의원, 샘 존슨 의원, 하워드 코블 의원께 각별한 사의를 표합니다. 이들에게는 6.25전쟁이나 남북 분단이 결코 추상적 개념이 아닐 것입니다.
이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누나와 동생은 전쟁 통에 어린 나이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내 눈 앞에서 쓰러진 그들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의사의 도움은 커녕, 약조차 구할 수 없었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러한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한반도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반도의 분단을 결코 영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남북한은 언어, 역사, 관습이 같은 한 민족입니다. 남쪽과 북쪽에는 부모, 형제가 서로 헤어진 채 반세기 이상을 살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한반도 7천만 전체가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먼저 한반도에 평화의 기반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간 경제협력을 강화하여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가고,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통일한국은 어느 국가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고 이웃 국가들의 번영을 촉진할 것이며, 동아시아의 안정과 세계평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가 달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은 향후 대응에 있어 매우 분명하고도 일치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6자회담이 북핵문제의 진전을 이루는데 있어 유용한 수단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또한 북한과 대화를 해 나가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현실적인 인식의 기초 하에 원칙에 입각한 대북 접근을 일관되게 유지해 나가는 길만이 북한 핵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북한의 발전은 대한민국과 미국 모두 바라는 바이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평화를 유지하고 도발하지 않겠다는 북한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국제사회와 함께 계속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의원 여러분, 한미 동맹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동북아시아는 그 어느 곳 보다도 역동적입니다. 이 지역의 경제적 활력은 지정학적 변동과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세력 균형에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미국은 아시아 태평양 세력의 일원으로, 특히 동북아시아에 핵심적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가 세계에 보다 건설적인 기여를 하려면 무엇보다 지역 내 평화와 안정이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20세기와 마찬가지로 21세기에도 미국의 지도력은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여전히 중요합니다. 전 인류를 위해 헌신하려는 미국의 이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테러위협, 대량파괴무기 확산, 기후변화, 에너지 위기, 빈곤과 질병 등 새로운 도전이 제기되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도 이러한 측면에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한미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기회의 창이 계속 열려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미 관계는 환태평양지역에서의 안정과 성장을 견인하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한미 두 나라 관계가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반도를 넘어 범세계적 문제 해결을 위한 역할을 담당해 나가고자 합니다. 나는 대통령 취임 이후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비전으로 ‘성숙한 세계국가’를 제시했습니다. 한국은 동티모르, 레바논, 아이티 등에서의 유엔평화유지 활동에 적극 참여해 왔습니다. 한국은 이라크에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고, 아프가니스탄에 지방재건팀을 파견했습니다. 소말리아 해역에도 군함을 보내 미국, 유럽 등과 함께 해적퇴치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리비아의 민주화 정착과 경제재건을 위해서도 국제사회의 지원노력에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2015년까지 대외원조 규모를 지금보다 두 배로 늘려나갈 예정입니다. 다음 달에는 세계개발원조총회가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에서 개최됩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보편적 가치를 증진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2009년 나와 오바마 대통령이 합의한 ’한미동맹 미래비전’에서 한미 양국은 공동의 가치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지역 문제와 범세계적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이러한 약속을 재차 확인하였고,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가 현재 직면한 도전에 함께 대처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한미동맹은 계속 성장하고 진화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존경하는 베이너 하원의장, 바이든 부통령, 그리고 의원 여러분, 연설을 마치기에 앞서 오늘 의회 연설을 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신 데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국빈방문을 초청해 주신 오바마 대통령 내외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또한 150만 재미동포들이 미국 사회 각 분야에서 기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한국 대통령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우리 동포들이 이곳에서 땀 흘려 일하여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여러분과 미국 국민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이상과 목표는 바로 우리의 이상과 목표이며 나아가 세계의 이상과 목표입니다. 반세기 전 미국의 젊은이들은 ‘대양을 넘어선 의무’를 안고 6.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양국 국민들은 동일한 소명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비록 혹독한 겨울 험악한 산중에서의 전투는 아닐지라도 보다 평화롭고 번영하는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실로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21세기 세계의 의무와 운명이 다시 한 번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항상 그래 왔듯이 도전에 함께 맞서 나갑시다. 같이 갑시다. 함께 전진해 나갑시다. 감사합니다.

이 대통령 美의회 연설서 45차례 박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10월 10일 월요일

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 네이버 뉴스

 

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11 00:10 | 최종수정 2011-10-11 13:42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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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⑩ “배 앞을 보면 멀미 나지만, 몇백㎞ 앞을 보면 바다는 잔잔하다”
[중앙일보 이나리.심서현]
내 40대 초반은 화려했다. 19세 때 계획한 '1조 엔, 2조 엔 규모의 큰 승부를 한다'는 목표를 조기 달성한 셈이었다. 내 포부를 몽상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했던 이들도 그때쯤엔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쳐주었다. 1999년 소프트뱅크는 10여 개 자회사와 120개 이상의 손자회사를 둔 대그룹이 됐다. 야후를 비롯해 클릭 수가 세계 1, 4, 9, 12위인 사이트가 우리 소유였다.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50%가 여기서 발생했다. 매달 130종, 900만 부의 잡지를 찍어냈다. 한창 주가가 오를 땐 재산이 일주일에 1조원씩 불어나곤 했다. 그해 타임과 뉴스위크는 각각 나를 '올해의 아시아 인물'로 뽑았다. 그런데 이듬해 3월 '하늘'이 무너졌다. '닷컴 버블'이 한순간에 꺼져버린 것이다.
주당 1200만 엔(약 1억2000만원)을 넘나들던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다. 내 재산 또한 7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내려앉았다. IT기업가들은 졸지에 범죄자 취급을 당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야후의 제리 양,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창업자의 처지도 비슷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돈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빚이 재산보다 더 많았다. '아차' 싶었지만 또 그럴수록 전투력이 치솟았다.
나는 99년 이미 주주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앞으로는 인터넷 사업에 올인할 거다. 그 외 사업은 모두 정리하겠다. 전화·컴퓨터가 그랬듯 등장 5, 6년 만에 흑자를 내는 신사업은 없다. 우리도 한동안 적자를 각오해야 할 거다.”
# 디지털 정보혁명, 꿈을 버리지 않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랬다지만 2000년의 버블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그렇더라도 인터넷은 결국 부활할 거란 내 믿음엔 변함이 없었다. 외려 기업 가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이때야말로 투자의 적기라 판단했다. 2000년 한 해에만 투자사를 600여 개로 늘렸다. 나는 이전부터 “예측 못할 앞날은 없다”고 믿어왔다. 배를 타고 가며 바로 앞을 보면 멀미가 나지만, 몇백㎞ 앞을 내다보면 바다는 잔잔하고 뱃속도 편안해진다.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아울러 나는 진짜 큰 승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에 초고속 인터넷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일본 인터넷은 속도가 느리고 요금도 매우 비쌌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 사업을 처음 구상한 건 인터넷 주가가 한창 고공행진을 할 때였다. 돈이 없다고 지레 포기하긴 싫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밀어붙이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돈도 없다, 욕도 먹을 대로 먹었다, 겁날 게 뭔가.
계획을 밝히자 주위의 반대가 대단했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한다는 건 곧 일본 최대 IT기업인 NTT에 정면 도전함을 의미했다. 임원들은 여기 덧붙여 “경쟁사 좋을 일을 왜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맞다. 이 사업은 잘되면 나 하나 덕 보는 게 아니다. 야후재팬(소프트뱅크 자회사)의 경쟁자인 다른 인터넷 기업들도 톡톡히 혜택을 보게 돼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배포가 그리 작아서 어찌할 건가. 야후재팬이 잘되면 그만인 거지, 경쟁사 잘되는 것까지 왜 걱정이야? 야후재팬 이용자만 싸게 주자고? 이런 멍청한 놈들!”
# “당신을 믿는다” 주주 눈물에 이 악물어
내 뜻은 정말 그랬다. 소프트뱅크를 왜 만들었나.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싸고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까. 혹자는 “그렇게 애써봤자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누구 덕분이었는지 얼마 안 가 다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꾸했다.
“그럼 어떤가.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필요 없다는 남자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일본 개화기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한 말이다. 그렇듯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인간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주주들을 설득해야 했다. 안 그래도 주가 폭락으로 주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총일,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주주들 앞에 서서 그들의 비난과 타박, 호소를 마음으로 들었다. 시간을 이유로 말을 끊지도 않았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이 지나자 주주들의 표정이 한결 담담해졌다. 한 할머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남편 퇴직금을 몽땅 털어 소프트뱅크 주식을 샀어요. 그게 99% 하락해 1000만 엔이 10만 엔이 돼버렸어요. 절망스러웠는데 오늘 얘기를 듣고 보니 당신 꿈에 투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믿을게요. 부디 열심히 해주세요.”
주주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박수로 나를 격려해주었다. 깊이 감사의 절을 올리며 나는 이를 물었다. '저 마음, 저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결과로 돌려드리겠다'.
정리=이나리 기자
◆닷컴 버블(dot-com bubble)=인터넷을 중심으로 IT 분야에서 1995부터 2000년 초까지 이어진 거품 경제 현상. 2000년 3월 10일 미국 나스닥에서 절정을 이룬 버블(거품)은 그 다음 날부터 붕괴하기 시작해 단 6일 만에 주식가치의 9%가 사라졌다. 이후 2004년까지 살아남은 닷컴기업은 절반에 불과했다.
손정의·저커버그·베조스
WSJ '제2의 잡스' 꼽아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이 '포스트 잡스' 시대를 이끌 혁신가로 지목됐다. 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헨리 포드와 토머스 에디슨의 뒤를 이었듯 혜안을 지닌 또 다른 혁신가가 나타날 것이라며 손 사장을 주요 후보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의 끊임없는 기업가 정신과 도전이 잡스를 닮았다며, 2008년 애플을 설득해 일본의 대형 통신사 NTT도코모를 제치고 소프트뱅크의 아이폰 출시를 따낸 것을 한 예로 들었다. 중국 알리바바의 잭 마 사장도 '아시아의 잡스'로 주목받았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는 걸어온 길이 잡스를 닮은 '리틀 잡스'로 꼽혔다. 그도 잡스처럼 대학을 중퇴하고 창업가의 길을 택했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는 '잡스에 가장 가까우며 애플에 가장 위협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전자제품, 가구뿐 아니라 영화·음악 콘텐트를 유통하는 거대 온라인 업체로 키웠다.
WSJ는 '새로운 잡스'의 깜짝 등장 무대로는 에너지와 건강 진료시스템 분야를 주목했다.
심서현 기자

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 네이버 뉴스

2011년 10월 9일 일요일

[MD앤더슨 종신교수 김의신 박사의 癌이야기] 암환자 몇년 살 수 있는지 의사도 사실 잘 몰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MD앤더슨 종신교수 김의신 박사의 癌이야기] 암환자 몇년 살 수 있는지 의사도 사실 잘 몰라

  • 김의신 박사·MD앤더슨 종신교수

입력 : 2011.10.10 02:58

[2] 10년 넘게 사는 말기암 환자들
의사들 "기적같은 일" - 암 걸린 뒤 태평양 보이는 곳서
쉬다가 죽겠다던 후배의사, 10년째 매년 안부인사 보내
약물로 암정복, 아직은 요원 - 폐암유발 유전자만 100개 넘어
암 발생·성장과정 너무 복잡… 사람마다 유전자 구조 달라 암환자 생존기간 확신 못해
카레 많이 먹어라 - 카레성분 큐커민 항암효과 여러 실험 통해 입증돼
암 환자를 보다 보면 의사인 우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나의 의과대학 후배 이야기다.
재미(在美) 이비인후과 의사인 그는 어느 날 코에서 피가 나왔다. 코피는 흔한 일이고 자신의 전공 분야이기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코를 둘러싼 얼굴 뼈에 생긴 암(癌)으로 밝혀졌다. 그의 나이 40대의 일이다.
처음 우리 병원에 와서 얼굴 뼈 상당 부분을 드러내는 수술을 받았다. 계속 재발해 15번 수술을 받았다. 방사선 치료도 이어졌다. 나중에는 암이 두개골 바닥과 안구(眼球)까지 퍼져 뇌 일부와 한쪽 눈도 절제했다. 그러니 상상을 해봐라. 암은 둘째치고 얼굴을 차마 쳐다보기 미안할 정도가 됐다. 암 치료는 이제 더 할 것이 없게 됐다.
▲ 세계적인 ‘암 전문의’ 김의신 박사(미국 MD 앤더슨 종신교수)가 최근 서울대병원 암병원에서 암진단 첨단장비인 PET-CT 모니터를 보고 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선배님, 내가 이제 죽게 됐는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 죽이면 큰 손해 아닌가요?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나야 전도가 잘 될 텐데…."
그는 이렇게 농담 아닌 농담을 하며 태평양이 보이는 곳에서 쉬다 죽겠다고 캘리포니아로 집을 옮겼다. 다들 앞으로 6개월을 못 넘길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매년 그에게서 연락이 온다. 죽을 줄 알고 기다리는데 안 죽더라는 것이다. 그러길 10년째이다.
난소암으로 16년째 사는 60대 초반 재미교포 여성도 있다. 발병 당시 그녀는 아직 아이들이 어렸기에 "5년만 살게 해달라"고 했다. 수술도 하고 항암치료도 받았다. 다행히 5년을 버텼다. 하지만 암은 이제 횡격막까지 올라와 숨쉬기도 힘들고 통증도 심했다. 치료를 포기하고 약도 끊었지만 난소암 지표인 'CA125' 수치가 정상보다 수십 배 높은 800을 넘었었는데 점점 떨어지더니 정상으로 돌아왔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난소암을 앓았던 두 명의 재미교포 여성은 동일한 수술과 항암제를 썼는데도 모두 4년 안에 세상을 떠났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암 환자들은 의사들에게 "몇 년을 살 수 있느냐"고 자꾸 묻지만 사실 의사들은 그것을 알기 어렵다. 사람마다 유전자 구조가 다르고 항암제에 대한 반응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병원 의사들은 이 두 사례를 '기적'이라고 말한다. 암이 없어진 것은 아니고 남아 있는데 더는 진전이 안 되는 상황이니 말이다. 학술지에는 암이 저절로 나은 사례가 아주 드물게 보고되곤 한다. 논리를 따지는 사람에게는 정말 이해 못 할 일이다.

그런데 내 경험상 이런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죽음을 앞두고 마음을 완전히 비웠다는 점이다. 하다 하다가 정말 안 돼 어느 날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통증도 사라졌다고 말한다.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기실 암 연구를 하다 보면 암이 발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너무 복잡해 막막할 때가 잦다. 암은 기본적으로 세포 안의 핵(核)에 유전자 변이가 발생해 시작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발암(發癌) 요소가 세포핵 안으로 들어가는 채널이 있어야 한다. 통상 세포막 표면의 수용체에 달라붙어 그 문을 통해 들어간다. 항암제도 암세포 치료효과를 내려면 수용체에 붙어 세포 안으로 들어가는 채널이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 통로를 찾아내는 데 '연구 인생'을 건다.
그런데 이런 채널을 찾아내 "이제 이 암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채널이 또 생긴다. 그 통로가 수십 가지가 나온다. 암처럼 복잡한 병이 없다. 사람은 동물보다 이런 과정이 훨씬 복잡해 동물실험에서 성공한 신약이 사람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것도 있다. 폐암만 해도 발암 유전자가 100개나 넘게 발견됐다. 유전자 하나 차단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설사 모든 채널을 다 찾아내 약물로 차단한다면 아마도 사람 몸이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병원에서 항암제를 3개 정도만 섞어 쓰는 것도 그런 이유다. 물론 어떤 암은 그 과정이 단순해 약물치료가 효과적으로 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아직 약물로 암을 완전히 정복하기란 요원하다. 그래서 암을 연구하는 과학자 중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많다. 알면 알수록 이것은 신의 영역인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역설적으로 암을 정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암을 예방하는 데 힘쓰고 조기 발견해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면 암과 함께 자기 수명대로 살 수 있다. 그게 암을 정복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밝고 긍정적으로 생활하고, 스트레스 잘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운동하고, 적절한 체중 유지하면 암 발생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인도 음식 카레 성분인 큐커민의 항암효과는 여러 실험을 통해 입증된 것이니 자주 먹길 추천한다. 미국에서는 큐커민을 알약으로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셀레브렉스라는 관절염 약은 우리 병원에서 암 예방 약물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대장암 발생 위험이 큰 사람 등에게 권하고 있다.

[MD앤더슨 종신교수 김의신 박사의 癌이야기] 암환자 몇년 살 수 있는지 의사도 사실 잘 몰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10월 7일 금요일

"먼저 갈게" 태평하게 농담하는 환자가 癌 이기더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먼저 갈게" 태평하게 농담하는 환자가 癌 이기더라

  • 김의신 박사
  • 기사

입력 : 2011.10.08 03:01 / 수정 : 2011.10.08 09:41

▲ /조선 DB
[MD앤더슨 종신교수 김의신 박사의 癌이야기] [1] 암 낫는 사람, 안 낫는 사람
유난히 근심 많은 한국 환자 - 치료 받으면서도 일 집착하고 항암제는 부작용만 달달 외워
시골 환자가 치료 잘 돼 - 큰 병원에 온 것에 만족, 밥도 잘먹어 암에 잘 견뎌
수치에 일희일비 말라 - 약간만 나빠져도 잠 못이뤄… 제풀에 암세포 더 키우는 꼴
웃는 자, 저항력도 높다 - 항상 밝고 믿음 강한 사람, 면역세포 수치 1000배 높아
30년 동안 매일 암 환자들을 봤다. 환자를 처음 맞닥뜨리면 '이 환자는 치료가 잘 되겠구나!' 아니면 '안 되겠구나!' 짐작이 간다. 결론부터 말하면, 암에 걸렸어도 담대하고 비교적 표정이 밝은 환자는 치료가 잘 되고, 암 치료를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걱정이 태산인 사람은 이상하게 잘 낫지 않는다.
가만 보면 재미교포나 한국서 온 환자들은 유난히 근심이 많다. 어느 중년의 유방암 환자는 수술도 받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남편이 어떤 여자랑 재혼할까 걱정한다. 회사 중역은 자기 아니면 회사 결딴난다고 생각하고, 정치가는 자기 아니면 한국이 망한다고 초장부터 안절부절못한다. 직업이 의사인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항암제 관련 자료를 뒤져서 유독 부작용 관련 내용만 줄줄 외운다. 그리고는 이 약이 괜찮으냐고 따진다. 그런 상태에서 약이 들어가니 치료가 잘 되겠나 싶을 때가 잦다.
백혈병을 앓았던 한 의사 환자는 암 치료 1년 후 재발해 왔다. 이 환자는 빌딩을 몇 채 가진 재력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숨이 넘어갈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됐다고 해서 급히 병실에 가봤다. 사정을 들어보니 부부싸움이 발단이 됐다. 남편이 입원비(하루 1000달러)가 너무 비싸다며 내일 무리해서라도 퇴원하겠다고 하기에, 부인이 "휴가 한 번 안 가고 일만 해서 돈 벌어 놓고 죽을 판인데 당신 미쳤느냐"며 말렸다는 것이다. 그 환자는 6개월 후 세상을 떴다. 그런 면에서 대개 시골에서 온 환자들이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온 환자보다 치료가 잘 된다. 시골 환자들은 큰 병원에 왔다는 것에 만족하고 표정이 밝다. 병원 밥도 맛있다며 잘 먹어 암 치료에 잘 견딘다.
한국 환자들이 암센터에 와서 예외 없이 하는 질문 2가지가 있다. "내가 얼마나 살 수 있나?" "치료 효과는 얼마나 있나?"이다. 물론 그것이 제일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 미국 의사들은 그 질문에 절대 대답 안 한다.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치료 효과가 80%라도 나머지 20%에 속하면 효과는 '제로'(0)이기 때문에 섣불리 그런 말을 안 한다.
▲ 그래픽=김충민 기자 kcm0514@chosun.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그러나 한국 환자들은 수치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 암이 얼마나 치료됐는지를 알기 위해 CT를 찍으면, 그날부터 결과에 목숨을 건다. 밤새 초조해하다가 새벽에 전화를 걸어와 물어보기도 한다. 약간 나빠졌다고 말하면, 그때부터 환자는 잠을 못 이룬다(항암 치료 과정에서 병세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일주일 뒤 병실에 가보면 그동안 밥도 안 먹어 바짝 말라 있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제풀에 자기가 죽는 꼴이다.
항암 치료가 잘 되던 어느 환자가 한 달 뒤, 거의 다 죽어 온 적이 있다. 사정을 물어보니, 요양원에서 야채만 먹었다는 것이다. 고기를 먹으면 암이 더 자란다는 잘못된 속설을 따라 했다가 몸이 망가진 것이다. 항암제는 몸속 단백질을 깨뜨린다. 그래서 암 환자는 살코기 같은 양질의 단백질을 계속 먹어야 잘 견딘다. 영양이 부실하면 빈혈이 생기면서,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진다. 그 수치가 낮으면 항암제 효과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잘 먹어야 병이 낫는 법이다.
근심과 스트레스는 뇌에서 나오는 '10번 부교감 신경'을 자극한다. 이로 인해 위(胃)와 장운동이 떨어지고 식욕이 감소한다. 잠도 못 잔다.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죄다 수면제를 줘야 겨우 잠을 자는데, 수면제는 위장 활동을 떨어뜨려 더 식욕을 잃게 한다.
미국 환자는 환자 같지 않은 환자가 많다. 항암 치료 사이에 태평스럽게 골프를 치거나, 악기를 신나게 연주하는 이도 많다. "하늘나라에 먼저 가 있을 테니 나중에 보자"라고 농담을 하는 환자들도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런 사람이 잘 낫는다. 한국 사람들은 일만 하다 살아서인지 고통을 잊고 항암 치료의 무료함을 달랠 방법을 모른다. 일을 못하면 인생이 끝난 것 마냥, 그냥 방에 갇혀 근심 속에 시무룩하게 지낸다. 암세포가 좋아할 일이다. 아무 거나 잘 먹고 배짱 좋은 환자, 종교를 믿고 모든 것을 신에 맡기는 담대한 사람, 취미가 뚜렷해서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는 사람, 매사에 긍정적이고 희망을 찾는 환자들의 암 치료 결과가 좋다. 물론 예외도 있다. 확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몸에서 암세포를 잡아먹는 대표적인 면역세포가 '자연 살해(殺害)세포'(NK·Natural Killer Cell)다. 이게 많으면 암 치료가 잘 되고 암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이 세포의 수치를 조사했더니, 항상 웃고 즐겁게 사는 사람에서 수치가 높게 나타났다. 교회 성가대 찬양대원들은 일반인보다 그 수치가 1000배 높게 나와, 나도 놀란 적이 있다. 기쁨 속에서 노래하고, 감사 기도하고, 인생을 밝게 사는 사람이 암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것이다. 이는 이제 의학계에서 정설이 됐다. 어느 종교를 믿건, '찬양대원의 NK 세포 천배'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가길 바란다.

"먼저 갈게" 태평하게 농담하는 환자가 癌 이기더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06 00:04 | 최종수정 2011-10-06 10:34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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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 200만 달러 야후에 1억 달러 투자 … “일본 거품남” 비아냥 쏟아졌다
[중앙일보 이나리]
1994년 7월 소프트뱅크의 주식 공개 뒤 1년6개월간 나는 미국에서 총 31억 달러 규모의 인수합병(M&A)을 진행했다. 덕분에 세계 최대 IT 전시·출판 그룹의 수장이 됐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이제 겨우 인터넷 세상을 헤쳐갈 보물지도와 나침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95년 가을, 막 인수한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의 에릭 히포 사장에게 주문했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하면 없어서는 안 될 회사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지프 데이비스의 정보력을 동원해 물색해 주세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한 회사를 추천했다. “야후라는 벤처가 있습니다. 창업한 지 반년밖에 안 됐지만 아주 유망해요. 실리콘밸리의 가장 믿을 만한 벤처투자사인 세콰이어캐피털이 이미 200만 달러를 집어넣었답니다.”
야후. 드디어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야후가 있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공동 창업자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 직원 여남은 명이 늦도록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콜라와 피자를 시켜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열 살 때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는 제리 양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나는 곧 투자를 결정했다. 우선 5% 지분을 확보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야후의 대주주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걸림돌이 많았다. 창업자들도, 기존 주주들도 내가 거액을 투자해 대주주로 올라서는 걸 원하지 않았다. 주도권을 내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다음해 1월 다시 제리 양을 만나 간곡하게 말했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선점이 중요합니다. 라이코스, AOL 같은 경쟁사들이 속속 치고 올라오고 있어요. 하루빨리 더 큰 자본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해야 해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또 컴덱스와 지프 데이비스를 통해 전방위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5시간의 지루한 협상 끝에 결국 내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1억 달러를 더 투자해 야후 지분 29%를 추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거래를 완료하기 전 나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넷스케이프의 짐 클락, 시스코의 존 챔버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매닐리 최고경영자(CEO)에게 e-메일을 보냈다. '야후의 대주주가 되려 한다. 하지만 당신들 중 누구라도 적극 반대한다면 포기하겠다. 의견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IT업계 생리를 잘 알았다. 이후의 여러 비즈니스를 위해 이런 거물들과 척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모두 내 투자에 오케이 사인을 보내줬다. 당시 야후는 연 매출 100만 달러에 적자가 200만 달러인 보잘것없는 회사였다. 그런 야후가 불과 한두 해 뒤 세계 인터넷 시장을 석권하리라는 걸 이들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투자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언론들은 나를 '일본에서 온 거품남'이라며 대놓고 비웃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외려 서둘러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했다. 소프트뱅크가 지분 51%, 야후 본사가 49%를 보유한 합작 회사였다. 나는 야후재팬을 아시아 최대 인터넷 포털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야후재팬은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나는 미디어산업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세계 최대 미디어재벌은 호주의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었다. 96년 4월 미국 할리우드에 있는 머독 회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일본에 오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2개월 뒤 정말 머독에게서 “도쿄에서 파티를 열려 하는데 인사말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파티 전날 저녁, 도쿄 긴자의 한 고급 일식당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머독은 일본에서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기회를 낚아챘다.
“나와 함께합시다. 일본엔 강력한 경쟁자가 많아요. 이들과 싸우려면 최소 2000억 엔은 필요합니다. 내가 1000억 엔을 대지요.”
머독은 내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만남이 있은 지 열흘 만에 합병회사를 설립했다. 머독과 나는 417억 엔을 투입해 오분샤 미디어가 보유한 테레비아사히 지분 21%도 매입했다.
그러나 이 거래는 “소프트뱅크가 외국 자본과 손잡고 일본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는 비난에 부닥쳤다. 다음해 나는 지분을 미련 없이 재매각했다. 대신 머독과 함께 설립한 위성방송 J스카이B 운영에 매진했다. 97년엔 또 다른 일본 내 위성방송 퍼펙트TV와 합병을 실현했다. 이로써 나는 유통·인터넷·미디어·전시회에 이르는 주요 디지털 인프라를 손에 쥐게 됐다. MS·시스코와의 합작, 미국 메모리보드 시장의 60%를 장악한 킹스턴테크놀로지 인수 등으로 네트워크와 테크놀로지 인프라 부문에서도 세계적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처럼 숨가쁜 투자와 M&A의 결과는 곧 '돈'으로 나타났다. 96년 5월 30일 야후 본사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됐다. 97년에는 야후재팬이 일본 자스닥에 상장됐다. 두 회사 주가는 그야말로 고공 행진을 계속했다. 99년 말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야후 주식 총액은 1조4586억 엔에 이르렀다. 초기 투자액의 360배였다. 같은 시기 야후재팬 주식도 주당 1050만 엔까지 올랐다. 나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E트레이드·지오시티즈 같은 실리콘밸리 유망 벤처에 잇따라 투자했다. 재산은 점점 불어나 99년 가을에서 2000년 2월까지는 “손정의의 재산이 또 10억 달러 늘었다”는 기사가 세계 언론에 종종 보도됐다. 단 사흘이지만 빌 게이츠를 누르고 IT업계 제1 부자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졌다. 백화점에 가도 '이 건물을 통째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쇼핑할 재미가 나지 않았다. 97년엔 지금껏 살던 임대주택에서 나와 40억 엔을 들여 새로 지은 3층 집으로 이사도 했다. 세계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부와 명성의 절정을 누렸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00년 3월,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가 시작됐다.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고, 나는 사기꾼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세상과의, 나 자신과의 진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야후(Yahoo!)=1995년 4월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이던 제리 양, 데이비드 파일로가 창업한 포털. '야후'는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종족 이름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세계 1위 검색 포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이후 구글에 밀려 현재 미국 검색 시장 점유율은 16% 안팎이다. 소프트뱅크는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기 전인 2001년 야후 주식 대부분을 매각했다. 이 자금으로 일본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 네이버 뉴스

2011년 10월 6일 목요일

스티브 잡스 … 갈망하라 무모하라 그렇게 살아라 - 중앙일보 뉴스

 

스티브 잡스 … 갈망하라 무모하라 그렇게 살아라
[중앙일보] 입력 2011.10.07 00:57 / 수정 2011.10.07 01:23
스티브 잡스 1955~2011

‘혁신의 아이콘’이자 이 시대 최고의 기업인으로 칭송받아온 애플의 공동 창업주 겸 전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5일(현지시간) 영면했다. 56세. 출생 직후 다른 가정으로 입양됐던 잡스는 대학 중퇴, 애플 창업,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에서 축출과 복귀, 희귀암 발병과 투병, 아이폰과 아이패드 출시 등으로 숱한 화제를 만들었다. 그는 2005년 6월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항상 갈망하고 항상 무모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라”고 말했다. 그는 생전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관과 끊임없는 혁신을 추구하는 경영철학으로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잡스의 스탠퍼드대 연설은 많은 이를 감동시킨 명연설로 꼽힌다. 스마트폰으로 왼쪽의 QR코드를 찍으면 당시 연설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사진은 2008년 샌프란시스코 맥월드 전시회에 나왔던 잡스. [중앙포토]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래도 나는 지금 하는 이 일을 계속할까
그 답이 ‘아니오’임을 알았을 때
나는 무언가를 바꿔야 함을 깨달았다

-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

스티브 잡스 … 갈망하라 무모하라 그렇게 살아라 - 중앙일보 뉴스

“잡스의 숨막히는 혁신, 세상을 바꾼 홈런이었다” - 중앙일보 뉴스

 

잡스의 숨막히는 혁신, 세상을 바꾼 홈런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1.10.07 00:48 / 수정 2011.10.07 08:14
‘잡스의 왼팔’ 엘리엇 전 애플 수석부사장, 중앙일보에 추모사

제이 엘리엇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의 초석을 다진 제이 엘리엇(69) 전 애플 수석부사장이 중앙일보에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그는 ‘잡스의 왼팔’(잡스는 왼손잡이다)로 불리며 가까이에서 잡스를 지켜본 인물이다. 그는 “스티브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먹먹했다”며 “친구이자 이 시대 최고의 혁신가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혁신이다. 잡스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신가 중 한 명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잡스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토머스 에디슨 정도가 있지 않을까 한다.
나는 스티브가 혁신가가 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축복을 누렸다. 그가 초창기 프레젠테이션 무대에 섰을 때였다. PC 신제품 매킨토시를 소개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리틀 야구에서 홈런을 친 소년 같은 그의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건 세상을 바꾼 홈런이었고, 30여 년이 지난 뒤 지금도 그는 여러 차례 홈런을 쳤다.
어떤 사람은 스티브가 시장조사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것을 신기해했다. ‘제품의 황제’였지만 역설적으로 스티브는 사람들이 뭘 원하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세계 최고의 소비자였다. 그는 늘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유별나게 촉각을 곤두세웠다. “내 상품을 원하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해. 사지 말라고 해”라고 외치는 걸 여러 번 들었다.

그는 우리 삶을 더 만족스럽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묘한 촉수를 갖고 있었다. 그런 감각이 매킨토시와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를 만들어냈다. 다른 상품들이 따라갈 수 없는 독특한 외양과 스타일, 사용자 친숙한 환경을 가진 상품들 말이다. 스티브의 상품들은 숨막히는 디자인을 지녔다. 그의 디자인의 원천은 잠시 다니던 대학에서 캘리그래피(손으로 쓴 아름답고 개성 있는 글자체)에 심취했던 영향 덕분인 것 같다. 그런 그래픽에 대한 열정이 기존 PC들의 흉측한 글자체 대신 매킨토시가 다양한 글자 모양과 크기·굵기를 변주해 아름다운 글자체를 갖게 하는 데 기여했다. 좋은 디자인에 대한 그의 갈증은 애플의 모든 제품이 독특한 멋을 뽐내게 만들었다. 상품 자체는 물론 포장박스나 이어폰 같은 작은 디테일에도 그는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디테일이야말로 스티브의 영혼이 깃든 것이다.
스티브의 ‘혁신 수신장치’는 늘 켜져 있었다. 그와 함께 일하던 시절, 나는 월요일에는 꼭 아침 일찍 그와 미팅을 했다. 주말을 지내고 온 그는 새롭게 발견한 무언가에 ‘꽂혀서’ 흥분한 상태로 출근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또 한번 천재가 만들어내는 혁신적인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느 월요일 아침 그는 어느 레스토랑 메뉴판을 들고 출근했다. 멋진 그래픽과 글자체로 만든, 정말 아름다운 디자인이었다. 그가 메뉴를 내 코밑에 들이대면서 말했다. “제이, 우리 매킨토시엔 바로 이런 그래픽이 필요해.” 매킨토시 그래픽은 레스토랑 메뉴에서 시작된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스티브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먹먹하다. 지난 6월 스티브가 한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보면서 그가 많이 힘들다는 걸 알았다. 아이클라우드를 소개하는데, 몸짓이나 말투가 예전 같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지난 1년 또는 1년반 동안 그가 무척 속도를 내며 달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은 시간,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해 내놓으려는 그를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웠다. 내 인생은 스티브와 함께한 뒤 완전히 바뀌었다. 앞으로도 그는 내 오랜 친구로 가슴에 남을 것이다.
정리=박현영 기자

“잡스의 숨막히는 혁신, 세상을 바꾼 홈런이었다” - 중앙일보 뉴스

안정된 교직 버리고 가난한 흑인 섬긴 '억척 엄마'

 

입력 : 2011.10.07 00:07

▲ 김용애 선교사
[남아공서 20년간 봉사, 김용애 선교사]
유치원 세워 아이들 가르치고 에이즈 고아들 거둬 길러…
11일 '언더우드 선교상' 수상
"힘들 때마다, 넘어지려 할 때마다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다 주시는데 내가 왜 걱정하나…."
공주사대를 나와 교사로 26년을 근무했다. 1991년, 안정적이고 행복했던 교직생활을 돌연 박차고 생면부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쪽으로 130㎞ 떨어진 포체프스트룸의 빈민가에 정착했다. 그 뒤로 20년간 그곳 사람들과 살았다. 결혼도 않고,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유치원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에이즈 고아들을 거둬 길렀다. 김용애(67) 선교사, '포체프스투룸의 억척 엄마'다.
오는 11일 연세대 '언더우드 선교상'을 수상하는 김 선교사를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얼굴과 손목 등에 아직 남아 있는 흉터들을 보여줬다. "지난 7월 12일 자정쯤이었어요. 숙소에 흑인 강도 6명이 들이닥쳤죠. 매주 약 2500명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거든요. 그러니까 대단한 부자라도 된다고 생각했나 봐요." 강도들은 김 선교사를 의자에 앉혀 두 손을 뒤로 묶고 5시간 동안 때리고 위협했다. 이들은 결국 약간의 음식과 옷가지, 먹을 것을 나눠줄 때 쓰는 자동차를 빼앗아 동트기 전 달아났다.
치료를 위해 한국에 휠체어를 타고 돌아온 김 선교사는 두 달간 입원했다가 최근에야 퇴원했다. "사고 소식이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더군요. 몸도 다 나았으니 이제 돌아가야죠."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듯 김 선교사가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고 살이 썩어들어가듯 퍼렇게 물들었다. 제대로 된 약도 없던 시절이었다. "의사가 '집에 데려가서 죽으면 묻어주라'고 어머니에게 절 안기셨대요. 하지만 어머니는 차마 묻을 수가 없어서 나를 눕혀 놓고 밤새 기도하셨다더군요." 하룻밤 뒤, 기적처럼 다시 숨이 붙었다.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김 선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모든 걸 다 버리고 따르겠다"고 결심했다.
▲ 20년 교직생활을 훌쩍 떠나 47세에 혼자 남아공으로 건너간 김용애 선교사는 이제 매주 2500여명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직업훈련센터와 유치원, 에이즈 보육원 등까지 운영하며 현지 흑인 빈민들과 함께 살아간다. 포체프스트룸의 에이즈 보육원 앞에서, 현지 아이들과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김 선교사 일행이 음식을 나눠주길 기다리는 모습. /포체프스트룸 뉴 비기닝 센터(PNBC) 제공

그렇지만 서울 연희동 원천교회를 다니던 1990년 처음 아프리카 선교사 제안을 받았을 때는 거절하고 싶었다. 가기 싫다고 울며불며 여섯달 동안을 매달리며 기도했다. "안 갈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해서 살려두셨는데, 하나님과 약속을 어길 수는 없잖아요." 1991년 2월 28일 학교에 사표를 내고, 3월 4일 남아공행 비행기를 탔다. 47세 때였다.
처음엔 한숨과 눈물뿐이었다. 학교 운영자로 초빙된 줄 알았는데, 정작 현지엔 함께할 교사도 학교 건물도 없었다. 맨바닥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억지로 기부를 요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때그때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착 3년 만에 구제와 선교 사역의 본부 격인 '포체프스트룸 뉴 비기닝 센터(PNBC)'를 세울 땐 병상의 아버지가 건물 부지를 기부했다. 돈이 필요할 때면 어디선가 기부가 들어왔다. 현지인들에게 나눠주는 음식도 모두 현지에서 기부받아 해결한다. 대형 수퍼마트 체인이 유효기간이 얼마 안 남은 빵, 채소, 고기, 조리 음식 등을 하루 소형 트럭 한 대 분량씩 넘겨준다. 닭공장에서 매주 월요일 닭을 한 차 실어오고, 현지 언론에 보도된 에이즈 보육원 기사를 보고 한 달에 10㎏짜리 옥수수 100포대를 기부하는 독지가도 생겼다.
지금은 PNBC 건물에 냉동고가 13개나 되고 일주일에 학교 3곳, 교회 5곳 등을 통해 2500여명의 흑인 빈민들에게 음식을 나눠 줄 정도로 규모도 커졌다. PNBC에서는 교회와 유치원, 목사 자격증을 줄 수 있는 신학 코스, 직업훈련학교, 에이즈 보육원 등을 운영한다.
선교는 쉽지 않았다. 흑인들은 "백인의 신은 죽어도 안 믿겠다"고 버텼다. "예수님이 흑인이냐 백인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 선교사는 말한다. "저 하늘의 해는 흑인의 해인가요, 백인의 해인가요? 태양이 어떤 인종의 것도 아니듯,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구하러 세상에 오신 거예요." 신기하게도 동양에서 온 자그마한 체구 여성의 말에 흑인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현지 교회도 9곳이나 개척했다.
남아공에는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많았다. 부모에게서 에이즈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열 살도 되기 전에 죽어갔다. 김 선교사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에이즈 고아 여섯 아이를 위탁받으면 집 한 채를 주는 방식을 고안했다. 현재 6채가 완공돼 6가족이 입주했고, 2채가 건설 중이다. 목표는 50채로 잡았다. 최소 300명의 에이즈 고아들이 새 부모를 만나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온 삶에 정말 후회는 없을까. "한 번은 하나님께 막 떼를 부렸어요. 너무 힘들다고. 왜 나한테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키시냐고. 그때 '내가 네게 준 것이 부족하냐'고 물으시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아뇨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하고 답했지요." 남아공으로 '귀국'을 준비하는 김 선교사가 해맑게 다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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