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해외입양인, 말걸기] 친부모에 버림받고, 양부모에 버림받고…
제인 정 트랜카 작가, 입양인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1-10-06 오후 4:08:15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 60년간 한국은 공식적으로 16만4894명의 아동을 해외입양 보냈고 2010년 한 해에만도 1013명의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 이 아동들은 한국정부가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 "국제간의 아동 입양은 자격을 갖춘 중앙정부기관에 의해서만 허가되어야 한다"를 유보한 상태에서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 또 한국은 '국가 간 아동 입양에 있어서 아동보호 및 협력에 관한 헤이그 협약'을 아직 비준하지 않았는데, 이 헤이그 협약에서는 해외입양을 중앙정부에서 관리해야 할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미국의 의사-레스토랑 주인 부부에게 입양됐던 팀
입양프로그램에 대한 한국정부의 무책임과 관리 소홀의 결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입양인들은 피해를 입고 있다. 미국입양인이었던 팀(Tim)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팀은 1970년대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하지만 34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온갖 풍상과 우여곡절을 겪은 팀은 서울 이태원의 한 길거리로 흘러들어와 노숙인으로 살고 있었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팀은 우연히 길을 지나던 다른 한 해외입양인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1976년 한국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당시 한국은 사회복지보다는 경제발전을 최우선적 목표로 두고 있던 국가였다. 해외입양은 군사정권에 돈이 되는 좋은 사업이었다. 팀은 당시 한 재래시장에서 길을 잃고 고아원으로 가게 된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팀의 한국 이름은 모정보인데, 누가 그에게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알 수 없다. 친생부모가 모정보의 양육을 포기했다는 것을 증빙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팀의 입양을 촉진하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팀의 당시 호적(현 가족관계등록증)에는 팀 외에는 아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후 팀은 지금도 왕성하게 입양사업을 벌이고 있는 사설입양기관인 대한사회복지회에 의해서 미국 위스콘신주의 한 도시로 입양 보내졌다.
팀의 미국 양부는 의사였고 양모는 예술가이면서 레스토랑 체인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팀의 양부모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양부모의 의무 중의 하나인 입양 자녀에 대한 미국국적 취득절차를 밟지 않았다. 양부모는 친자식 셋을 얻은 후 비교적 늦은 나이에 팀을 입양했다. 나는 지난 9월 팀으로부터 얻은 전화번호로 미국 위스콘신주에 살고 있는 양부모와 통화를 했다. 양부는 "팀은 다루기 힘들었고,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또 팀의 양모는 "팀이 친구들에게만 관심 있었는데 친구들은 흘러갈 뿐이고 가족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양부모는 팀이 8살 때 팀에게 리탈린(주의력결핍장애에 쓰이는 약)을 투여했다. 그리고 팀이 12살 때 그를 기숙식 군사학교에 보냈다. 양부모는 또 팀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팀에게 리튬을 투여했다. 팀이 18세가 되었을 때 양부모는 팀에게 "우리 이제 인연을 끊자. 집을 떠나라"는 말을 했고 결국 팀은 집을 나와야 했다.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팀은 그 다음 20년 동안 미국에서 장애인수당과 교회의 자선에 의존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도중에 팀은 정신병원에서 감금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팀은 코카인이나 각성제 같은 마약을 흡입하기 했다. 팀은 위스콘신, 캘리포니아, 하와이를 전전하며 살았다. 마침내 약 6개월 전, 그는 하와이에서 그가 입양 온 나라인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9.11이후 까다로워진 미국의 정책에 의해서 미국국적이 없고 마약중독과 거래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팀은 미국의 한 주인 섬 하와이로부터 소위 본토인 대륙으로 입국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추방을 면할 수 있을까 하고 변호사를 고용하려했지만 팀의 양부모가 보낸 변호사 수수료는 400불에 불과했고, 그것은 턱없는 비용이었다. 팀의 양부모는 나와의 전화 통화에서"우리가 이제 팀에게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고, 팀은 미국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3살 때인 1977년 미국으로 입양 가서 34년 만에 미국정부에 의해서 한국으로 추방된 팀은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천애고아일 뿐이다. 팀은 34년 전 아마도 한국인 생부모에 의해 포기되었고, 한국 사회로부터 적출되었으며, 미국인 양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미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은 버림당함으로 얼룩졌다.
입양특례법은 해외입양아동의 국적삭탈절차를 명시하고 있다. 국가가 당사자의 동의에 의하지 않고 국적을 삭탈하는 일이 시민권과 인권을 거스르는 일이 아닌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최소한 이 법은 한국정부와 해외입양기관은 입양아동이 입양된 나라의 국적 취득 여부에 대한 확인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부도 입양기관도 이 의무를 책임 있게 실행해오지 않은 흔적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입양인들에게 별로 큰 손해가 아니어서 문제를 삼지 않아서 그렇지 국내로 돌아와서 장기 거주를 위해 재외동포비자를 받기 위한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많은 입양인들이 자신들이 입양국가의 국적을 취득하고 시민이 된 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주민등록 관청에서 자신들의 주민등록을 여전히 살려두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이는 결국 정부와 입양기관들이 해외입양을 보내고 나서, 이들의 시민권과 국적 취득 여부를 확인하는 일에 실제로 큰 게으름을 피워왔다는 점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팀과 같이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채로 살다가 한국으로 추방되는 입양인들을 발생시키는 이유이다. 생각해보라. 입양 간 나라에서 그 땅 사람들과 부대끼며 30년, 40년을 살고도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서 모국 아닌 모국으로 추방되는 입양인들의 가혹하고도 처참한 운명을. 언어도 가족도 문화도 낯선 땅에서 추방자로 사는 일의 참담함을.
정부와 입양기관들은 이런 인권 유린과 훼손에 어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입양이 마치 천사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 벌이는 선행인 것을 만천하에 주장하면서, 또 이 일로 온갖 사회적 존경과 찬사를 받으면서 벌여온 일임에랴!
무국적 노숙인 팀의 불가능에 가까운 국적 회복 과정
팀이 서울거리에서 내 친구에 의해서 노숙자로 발견되었을 당시 그는 신분증도 없었고 총재산은 1불도 안 되었고 행인들에게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팀은 복용할 약도 더 이상 없었고, 찢어진 바지에 짝짝이 신을 신고 있었다. 팀은 종이컵과 비닐봉지를 몇 개 갖고 있었다. 정신병 탓인지 팀은 자기 이름, 나이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팀과 차분하게 대화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팀은 자기가 더 이상 미국인이 아닌 것도 몰랐고 스스로를 "세계시민"으로 불렀다.
ⓒ프레시안(허환주)
우리 입양인들의 첫 번째 임무는 팀의 한국국적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었다. 미국국적이 없는 팀이 한국국적을 회복하면 극빈자 신분으로나마 최소한의 의료나 복지혜택 등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우리 입양인들은 해외입양인센터 <뿌리의 집>을 운영하는 김도현 목사님과 더불어 10여 곳이 넘는 정부 기관들을 며칠간 문자 그대로 뛰어다녔다. 그런 지난한 과정에서 우리가 겪은 답답한 관료주의를 말로 다 표현 하기는 불가능하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노숙인인 팀이 혼자 이런 과정을 밟기는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모국으로 국제 미아가 되어서 돌아온 해외입양인들의 생존권이 얼마나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은 정부예산에 의해서 운영되는 민간재단의 형태로 2009년 설립되었다. 사실상 법적인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작은 정부론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변명에 기초해서, 정부 예산으로 직원의 급여와 사업비가 지출되는 기이한 형태, 거의 불법에 가까운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기관의 불완전한 설립을 주도했던 정부 관리들은 자리를 옮겼고 이 기관의 설립을 주도하고 이 기관의 이사장이 된 이는 수수방관 내몰라라였다. 결국,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이 주도해서 이 기관의 설립근거를 담은 입양특례법 개정작업을 벌였고, 결국 지난 6월에 국회 통과를 이루어 냈다. 비로소 중앙입양정보원은 법적 근거를 확보한 것이었다.
사실상, 중앙입양정보원은 2009년 설립되기 전에도 같은 직원들,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거의 10년 동안 존재해왔다. 사실상 유명무실한 기관이었지만 입양기관이 사무실 비용을 대고, 정부가 민간기관 지원의 형태로 예산을 마련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정부 예산으로 급여를 받는 센터장과 직원의 임용권은 입양기관들에게 있었던 기형적인 단체였다. 이 입양정보센터가 중앙입양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전액 정부의 예산에 의해서 운영되기 시작한 후에도, 사실상 입양사후서비스라고 하는 중핵적인 사업에 있어서 아무런 진척도 전문성도 없이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만 있을 뿐이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 기관이 운영되어 왔다고 하면, 그것도 정부의 예산 지원에 기초해서 운영이 되었다고 하면, 그 전문성은 물론 사업의 목표가 착착 성취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어보는 이가 입이 아파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난 몇 주 동안 팀의 문제로 중앙입양정보원에서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중앙입양정보원은 해외입양인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전혀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앙입양정보원은 양부의 이름에 기초해서만 입양인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는 몇 주 전 팀에 대한 입양기록을 찾기 위한 방문약속을 잡고자 중앙입양정보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내가 팀의 이름을 이야기 했을 때 중앙입양정보원 직원은 팀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나를 만나는 약속을 잡을 수 없다고 했다. 대신 그 직원은 내게 이메일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가 알려준 주소로 메일을 보냈지만 반송되었다. 그래서 전화를 몇 번 다시 했지만 통화 중이었다. 결국 <뿌리의집> 김도현 목사님이 대신 전화를 해서 중앙입양정보원 사무총장과 통화를 요청했지만 그 날 외근 중이라 통화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우리는 팀을 김도현 목사님 차에 태우고 중앙입양정보원을 무작정 방문했다. 중앙입양정보원 직원 2명이 우리를 만났다. 한 직원은 입양정보센터시절부터 그곳에서 일해 왔었다. 그녀는 영어를 할 수 있었지만 팀을 쳐다보거나 팀에게 영어로 말하지 않았다. 한 직원은 영어를 좀 했지만 입양제도에는 전혀 문외한인 것 같았다. 우리 해외입양인들이 중앙입양정보원의 직원들이 해외입양사후서비스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인 입양인들로부터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여러 차례 했고, 나아가 입양인을 직원으로 채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수차례 피력했지만, 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팀과 영어를 할 줄 아는 2명의 한국인들과 중앙입양정보원을 방문했지만 해외입양을 다루는 기관의 직원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해외입양인을 만날 때는 영어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원칙으로 나는 반복적으로 직원들에게 팀을 보면서 영어로 팀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직원들은 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데 마치 팀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거의 대부분을 한국어로 이야기 하였다. 내가 만약 통역이 가능한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중앙입양정보원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이다.
중앙입양정보원의 두 직원은 해외입양인은 그 나라 국적을 취득 할 수 있다고 원론적인 말을 했다. 미국입양인 팀이 미국국적을 못 얻었고 다른 해외입양인들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나는 말했지만 그 두 직원은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의 어려움 끝에 우리는 가까스로 팀의 미국입양기록을 발견했고 중앙입양정보원 직원은 그 기록의 원본이 대한사회복지회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중앙입양정보원 설립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해외입양사후서비스의 원스톱서비스화가 아니냐, 지난 5월 입양의 날에 즈음하여 진영곤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이 해외입양에 관한한 원스톱서비스체계를 갖추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한 일이 신문에도 다 났는데,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거짓 보고를 한 것이냐, 그러니, 여기 중앙입양정보원을 통해서 우리가 그 서류를 받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직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낯설어 했지만 결국 우리 주장은 관철되었고 우리는 사설입양기관을 가지 않고도 팀의 고아호적등본에 유사한 서류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중앙입양정보원 직원들이 준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설입양기관의 권력과 관행에 주눅 든 채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권의 문제를 민간에 위탁한 지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남겨 놓은 이 땅 사람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어두운 유산인 것처럼 보였다. 자국민의 시민권에 관한 문제를 사설기관에 위탁해 놓은 나라의 슬픈 자화상을 나는 거기에서, 내 안에서 거친 파도처럼 일렁이는 분노 가운데서 목격해야 했다.
진정한 입양사후서비스기관은 입양인, 즉 국제적 미아가 된 팀이 한국국적을 회복하도록 지원하고 그래서 팀이 한국사회에 원만히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앙입양정보원 직원들은 팀에 관한 문서를 김도현 목사님에게 전달한 것으로 자기들의 일이 끝났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래서 김도현 목사님은 자기 자신의 시간을 들여서 팀의 한국국적을 회복해 주기 위해 10여개 기관을 여기저기 며칠 동안 돌아 다녀야 했다. 한국어를 못하는 팀이나 입양 보내어진 나라의 국적이 없는 해외입양인들이 김도현 목사님이 했던 것과 같이 그런 복잡한 국적회복과정을 밟기는 불가능하다. 국적이 없는 한국 해외입양인들의 국적을 회복해 주는 일은 중앙입양정보원 같은 국가기관이나 한국정부가 나서서 마땅히 할 일이지 어느 개인이 자기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중앙입양정보원 같은 한국정부기관이 국가기관간의 연계를 통해서 팀의 국적을 회복해 주도록 힘썼더라면 훨씬 더 시간과 노력이 단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무관심 때문에 한 개인이 그러한 수고를 하게 되었다. 더욱이 동사무소로부터 외교통상부로 가야 한다는 조언을 받고 우리가 외교부를 찾아 갔을 때는 정문을 지키는 경찰이 출입조차 못하게 했다. 중앙입양정보원으로 대표된 한국정부는 국적 없는 한국입양인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을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팀을 해외로 입양 보낼 때는 한국외교부에서 여권을 발행했을 것이고 재외공관, 입양관련기관 등등이 모두 관련되었을 것 아닌가? 우리가 팀의 한국국적을 회복 해 주기 위해서 여러 공무원들을 만났지만 이런 경우들 처음 본다며 모두 어떻게 할지를 몰라 했다.
간난신고 끝에 마침내 팀은 주민등록번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팀은 아직 주민등록증이 없다. 그래서 팀은 아직도 한국인 극빈자이자 고아이며 정신분열증 환자이지만 의료 등 사회복지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 한국정부는 자국민을 해외입양 보내는 데는 신속하고 의욕적으로 행동했지만 팀처럼 귀환한 자국민인 전 해외입양인을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몰랐고 할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미국으로 입양 갔다 34년 만에 추방된 입양인과 영어로 말하는 것조차도 말이다.
우리는 국제인권기관이 차라리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이 해외입양인들을 위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또는 안하고 있는지 점검해 주었으면 한다. 과거에는 심지어 사설입양기관이 한국아동을 해외에 판매한 돈으로 중앙입양정보원의 전신인 입양정보센터 같은 정부적 기능을 하는 기관에 재정을 지원해준 때도 있었다. 이것은 물론 이해충돌 행위다.
토비 도슨과 팀, 성공한 입양인만 환영하는 한국
팀의 경우를 통해서 또 생각해 볼 것은 한국에서 친생자녀양육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친부모들에 대해 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한국정부는 이제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팀이 3살 때 시장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은 팀의 가족이 그를 양육하고자 3년 동안은 노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팀의 가족은 팀을 양육하지 못할 상황이 되자 그를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몰래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단순히 시장 통에서 팀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스키 선수이자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 중의 하나인 토비 도슨처럼 말이다.
▲ 토비 도슨 ⓒ연합
사실 한국 정부나 사설입양기관들은 토비 도슨처럼 성공한 입양인에게는 열광하고 팀처럼 실패의 늪을 헤매고 있는 입양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존재화 시킨다. 국가가 무엇인가? 성공한 사람들에게 열광하라고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함께 힘을 모아 돌보자고 세운 것이 국가여야 하지 않은가? 시장 통에서 잃어버린 아기에 대해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회와 정부라면 당연히 가족의 품을 다시 찾아 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친생자녀를 키우기에 버거워 포기해야할 지경이라면, 먼저 생뚱맞고 냉정하게도 입양을 제안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도우면 친생가족이 친생자녀를 키울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토비 도슨의 경우 시장 통에서 잃어버린 아이였음에도 해외입양 보내졌다는 사실은 고의로 간과한 채 그의 성공 스토리에만 열광하고 제 2의 국익을 위해 그의 명성을 활용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이 땅의 사설입양기관과 정부와 사회다. 누구는 그러면 제 1의 국익은 뭐였냐고 할 것이다. 그것은 70년대와 80년대에는 한국 정부가 입양을 통해서 국가 재정에 보탬을 도모했었던 것이 제 1의 국익이었다고 할 것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행태에 다름이 아니다. 그것도 이 땅에 태어나는 영아들을 가지고 말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 (가)항은 아동입양과 관련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아동의 입양은, 적용 가능한 법률과 절차에 따라서 그리고 적절하고 신빙성 있는 모든 정보에 기초하여, 입양이 부모, 친척 및 후견인에 대한 아동의 신분에 비추어 허용될 수 있음을, 그리고 요구되는 경우 관계자들이 필요한 협의에 의하여 입양에 대한 분별 있는 승낙을 하였음을 결정하는 관계당국에 의하여만 허가되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현재 한국입양아의 90%는 미혼모 자녀다. 한국인들은 이런 현상은 유교문화 때문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유교문화에서 가장인 아버지는 자녀를 돌봐주어야 책임이 있지 않나? 또 군사부일체인 유교문화에서 정부는 그 백성을 돌보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 않나? 한국에서 미혼모가 아동의 양육을 포기하는 이유는 경제력 때문이다. 미혼모는 정부가 한 달에 미혼모에게 주는 양육비 5만 원으로 아동을 키우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국내입양의 경우 한국정부는 입양부모에게 한 달에 10만 원을 지원한다. 지난 5월에 열린 입양관련 컨퍼런스에서 정부관계자는 이 입양부모에게 지원하는 지원금을 상향 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부의 할 일은 국내입양이나 해외입양을 권장하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아동이 그 친부모와 생이별을 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팀은 자기의 친부모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시장 통에서 발견되어 고아호적이 만들어진 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출생등록제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출생등록제는 팀이 태어났을 때인 1970년대와 같다. 그것은 아이가 탄생한 병원에서 출생등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원해서 임의로 신고하게 되어있다. 그 말은 부모가 출생신고를 안 한 채로 해외로 보내진 많은 입양인들의 경우 한국에 누가 자신의 생물학적 의학적 어머니인지에 대한 자신의 출생사실에 부합하는 기록이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입양기관은 아동을 쉽게 입양 보내기 위해서 소급하여 고아호적을 만들어 준다.
이런 출생등록제의 허점 때문에 국내입양의 경우 양부모는 남의 아이를 자기 가족등록부에 자기 친자녀처럼 등록시킴으로써 그 아동의 출생을 비밀을 은폐할 수 있게 된다. 부모가 병원에서 발행된 출생증명서를 구청으로 가지고 가서 출생등록을 한다. 그러나 집에서 난 아동은 병원출생증명서가 없이도 출생등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현 제도 하에서는 미혼모가 낳은 아동을 양부모가 입양하되 마치 집에서 난 친자식처럼 출생등록을 할 수 있게 되어있다. 200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행 된 보고서에 의하면 2007년 한해에만 3014명의 아동들이 이런 불법 비밀입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도 정부에 의해서 인가가 난 사설입양기관의 중재를 통해서 자행된 일이다. 사실상 국내입양의 대다수는 이런 비빌입양이다. 온갖 변명과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렇게 해서 입양 아동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진실에 접근할 권리가 근원적으로 차단되며, 거짓 정보에 기초해서 자신의 인생을 구축해야 한다. 비록 입양이라는 선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존재의 근원과 그 의의를 훼손하는 이 제도는 입양 당사자에게는 야만적 인권유린에 다름이 아니지 않은가?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과 김도현 목사님이 운영하는 <뿌리의 집(KoRoot)>은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여 알리고, 친부모의 자녀양육보다 우선해서 제도적으로 입양을 권하는 한국입양제도를 허점을 보완하고자 일하고 있다. 국제공법상, 한국은 1991년 11월 20일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수용했지만 아동권리와 관련한 몇 가지 조항에 대해선 지난 20년간 여전히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국제사법상, 한국은 아직도 국가간 입양에 관한 헤이그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 해외입양인들은 유엔아동권리위원회를 통해 한국정부에 아래와 같은 압력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1) 한국의 모든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국정부는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입양제도를 인정하거나 허용하는 당사국은 아동의 최선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도록 보장하여야 하며, 입양이 권위 있는 관계 당국에 의해서만 허가되도록 해야 한다)와 40조(당사국은 형사피의자나 형사피고인 또는 유죄로 인정받은 모든 아동에 대하여, 아동의 연령 그리고 아동의 사회복귀 및 사회에서의 건설적 역할 담당을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점을 고려하고, 인권과 타인의 기본적 자유에 대한 아동의 존중심을 강화시키며, 존엄과 가치에 대한 아동의 지각을 촉진시키는데 부합하도록 처우 받을 권리를 가짐을 인정한다)에 대한 유보를 철회해야 한다.
2) 한국에서 태어난 아동이 해외입양되기 전 그 아동의 권리를 더 낫게 보호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국가간 입양에 관한 헤이그협약을 수용해야 한다.
3) 한국의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미혼모(가정)에 대한 사회복지지원을 실효적으로 늘려야 한다.
우리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이 한국의 입양문제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감시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국정부가 헤이그협약을 지키고 수용 한다면, 중앙입양정보원도 그에 걸맞게 한국사회의 약자인 미혼모와 그 자녀들의 권익을 위해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은 사설입양기관의 영향력 아래에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제인 정 트랜카 작가, 입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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