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4일 토요일

[ESSAY]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ESSAY]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 남호탁 / 예일병원 원장·일반외과 전문의

    입력 : 2012.07.12 23:30

    "장애 안고 태어난 1080g 아들… ‘아빠가 곁에 있으니 살아만 다오’
    세 살 되자 ‘청각 이상’ 청천벽력‘듣는다’는 유치원 교사에 힘 얻어
    온 가족 가짜 보청기, 치료 노력 관심과 손길이 장애 극복케 해"

    남호탁 / 예일병원 원장·일반외과 전문의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자궁 속의 아이는 교통사고로 막내딸을 잃은 우리 가족에게 희망이자 위로였다. 모처럼 온 가족이 웃음을 되찾은 벅찬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임신 7개월째 되던 어느 날 그만 아내가 임신중독증에 빠지고 말았다. 의사는 아이의 생명이 위태롭긴 하지만 수술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이 태어났다. 칠삭둥이, 1.08㎏, 미숙아였다.
    지금에야 많이 달라졌지만, 십여년 전만 해도 1080g은 생명을 유지하기에 벅찬 몸무게였다. 아이는 내 팔뚝만큼도 안 됐고, 담당 의사를 만날 때마다 의사의 입에서는 암울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 각오하라, 생명을 유지하더라도 정상아로 자라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아이에게선 호흡 곤란, 기흉, 뇌출혈 등 온갖 합병증이 발생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조차 버거운 나날들이었다. 생명을 부지하더라도 장애아로 자랄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부끄럽지만 그런 섬뜩한 생각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나는 비교적 자유로이 신생아중환자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 내가 수련의 생활을 한 병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하루 사투(死鬪)를 벌이는 아이에게 아비로서 뭐라도 해야겠기에 기도에서 분비물을 뽑아내고 환부를 소독하는 일을 자청했다. 그런데 아이와 접촉하며 관계를 맺어감에 따라 놀랍게도 생각이 바뀌어가는 게 아닌가. 어떤 장애가 생겨도 좋으니 살아만 달라, 아빠가 곁에 있어줄 테니 함께 살자. 나는 그때 아무리 아비라도 친밀한 접촉이 없으면 남과 별반 다를 게 없고 접촉과 관계를 통해 비로소 아비가 되는 것을 깨달았다.
    백일이 다 되어 아이는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해맑게 자랐다. 세 살이 지난 어느 날 아이가 말이 늦는다 싶어 병원을 찾은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이가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말이 늦을지언정 아이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흥얼대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런 아이가 듣지 못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전국에 안 다녀본 병원이 없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하나같이 아이가 듣지 못한다며 인공와우(蝸牛·달팽이관) 수술을 권유했다. 부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상태나 부모의 의견보다 기계가 뽑아낸 데이터를 더 신뢰하는 의사들을 바라보며 섭섭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은 아닐지언정 아이가 듣는다고 확신한 아내와 나는 수술을 거부하고 재활치료에 매달렸다. 보청기를 착용시키고 언어치료와 음악치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아내를 면담한 원장선생님은 "아이를 다른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넌지시 아내의 의중을 떠봤다. 불만을 가진 부모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펄쩍 뛰자 다른 반 선생님들도 아이가 잘 못 들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의견은 달랐다. "아이가 듣는 게 확실한데 무슨 소리냐"고 했다. 나는 그날 멀리서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얼굴을 맞대고 바라보는 것은 한참 다르다는 것을 또 한 번 또렷이 알게 되었다.
    주문한 아이의 보청기를 찾아오는 날 보청기 회사가 있는 대구에 강의하러 간 지인에게 찾아다 줄 것을 부탁했다. 연세 지긋한 그의 어머니가 같이 갔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란다.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그 소리를 전해 듣고 우리 가족은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아이가 거부감을 가질까 싶어 가족 모두가 함께 착용할 목적으로 가짜 보청기를 주문했던 것인데…. 웃고 있었지만, 아이에게 보청기를 끼워주는 아내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멋진 무대에 올라 또래 아이들과 독창 실력을 겨루기도 하고, 첼로를 연주하며 오케스트라 단원으로도 활동한다. "아빠 뭐해?" "운전 중이야." "그래? 아빠 위험해, 끊어." "응…." 아이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매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물기가 밴다.
    세상엔 고마운 분들이 참으로 많다. 소아과 의사, 신생아중환자실 간호사, 언어치료 선생님, 유치원 담임선생님, 동료와 이웃들…. 그분들이 없었다면 이렇듯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장애는 영어로 '디스오더(disorder)'나 '핸디캡(handicap)'이라고 부르지 '질병(disease)'이라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관심과 따뜻한 손길이 있으면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상태이기에 질병과 구분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와 함께 험난한 길을 헤쳐오며 나는 생생히 보았다. 장애가 질병과 같은 개념으로 취급되는 기이한 세상을.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많은 장애아들이 소외되고 외면당한 채 방치되는 기막힌 현실을.

  • [ESSAY]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가슴 뭉클한 이야기네요. 필자이자 아이 아버지인 남선생님도 의사이시지만 내 피붙이, 가족이 아니면 보통 일반 상식적인 수준에서 접근하게 되지요. …

    2012년 7월 13일 금요일

    엄마·아빠를 죽인 사람을 30년간… 충격과 경악

     

    엄마·아빠를 죽인 사람을 30년간… 충격과 경악

  • 이한수 기자
    反체제 인사 희생자 3만명 자녀, 軍가정에 강제 입양
    유아 500명, 부모와 이별… 현재 106명이 친부모 확인
    어머니회, 지속적 처벌 요구… 주범 비델라 前대통령 사면·실형 반복하다가 최근 징역 50년 중형선고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는 빅토리아 몬테네그로(35)는 어린 시절 저녁식사 때 신념에 찬 군인인 아버지 에르난 테츨라프 중령이 반체제 인사들을 잡아들여 죽이고 고문한 이야기를 들었다. 빅토리아는 "(고문당하고 죽은) 이들이 아르헨티나에 해를 끼치는 분자들"이라는 부친의 말을, "아르헨티나 군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주변의 말을 믿었다. 2000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빅토리아는 1997년 '테츨라프 중령이 친아버지가 아닐 수 있으니 친자 확인 검사를 받으라'는 법원의 통보를 받았다. 아르헨티나 당국은 1976~1983년 군부독재 집권 시절 '아기 납치' 혐의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빅토리아는 망설임 끝에 유전자 검사에 응했고 자신의 친부모가 군부 독재에 저항 운동을 벌이다 죽임을 당한 사실을 2000년 알게 됐다. 더 놀라운 것은 테츨라프 중령이 자신의 친부모 납치·살해 작전에 가담해 생후 13일 만에 납치된 자신을 입양했다고 고백한 사실이었다. 빅토리아는 올해 봄 친부모의 성 '몬테네그로'로 개명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집권 기간 동안 정권에 반대하는 지식인과 예술가 등 반체제 인사들을 무차별 구금·살해하고 그들의 아이를 빼앗아 군인 가정 등에 강제로 입양시켰다. 전 세계는 이 반인륜 만행을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고 불렀다.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3만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됐으며 강제 입양된 아이들은 500여명에 이른다. 빅토리아처럼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은 사람은 이제껏 106명이 됐다.
    군사정권이 아이를 빼앗은 과정은 인륜 파괴의 극한을 보여준다. 비밀수용소 수감자 중 임신한 여성들은 수갑과 족쇄를 찬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다. 산모는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지는 등 무참히 살해됐다. 갓난아이들은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군인·경찰 등 친정권 인사 집안에 보내졌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법원에서 지난 5일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1976~1983년 집권 기간 중 반대파들을 고문₩살해하는‘더러운 전쟁’을 벌일 당시 자행한‘아기 납치’관련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인권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법정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로이터 뉴시스

    왜 독재정권은 '반역자'의 아이들을 군인·경찰 등 체제의 수호자들이 입양하도록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스페인 정신과 의사 안토니오 발레요 나제라가 정당성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코 정권(1939~1975)을 위해 일한 나제라는 반정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 등의 이념은 일종의 정신 질환이며 이들로부터 아이들을 구출해 스페인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이론을 설파했다. 프랑코 정권도 집권 기간 반체제 인사의 아이 3만명을 납치해 친정부 인사 가정 등에 입양했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은 1970~80년대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볼리비아·파라과이·우루과이 등 6개국 군사정권이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벌인 '콘도르(남미에 사는 큰 독수리를 뜻함) 작전'의 일환이었다. 칠레 피노체트 정권(1973~1990년)이 3000여명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 남미 각국에서 최악의 인권 탄압이 벌어졌다.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의 반인륜적인 '유아 납치'는 1977년 실종 자녀를 찾아 달라며 시위를 시작한 어머니·할머니 등 14명이 '5월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알려졌다. 1983년 군부독재를 끝낸 라울 알폰신 정부는 호르헤 비델라 전 대통령 등 군사정권 인사 370여명에게 반인륜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90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국민화합을 내세워 이들을 전격 사면했다. 이후 2003년 좌파 지도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사면법을 폐기하고 이들을 다시 법정에 세웠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이 들어선 2011년 2월부터 재판이 빠르게 진행됐다.
    아르헨티나 법원은 지난 5일 이들 군사정권 책임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1976년 쿠데타를 일으켜 1981년까지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86)가 징역 50년,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레이날도 비뇨네(84)가 15년형을 받았다. 당시 '유아 납치'에 관여했던 수용소 책임자와 의사 등에게는 징역 15~40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11일 아르헨티나가 더러운 전쟁 책임자들이 죽기 전에 이들을 정의의 법정에 세우는 진전을 이뤘다고 보도했다

  • 엄마·아빠를 죽인 사람을 30년간… 충격과 경악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2년 7월 7일 토요일

    나의 에버노트(Evernote) 활용기

    많은 분들이 사용하고 계시겠지만 저는 이  "Evernote" (www.evernote.com) 를 사용하면서 편리한 점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간단히 설명드리면 이 클라우딩 프로그램은 컴퓨터-집,회사, 어디든, 스마트폰, 태블릿 등등
    정보기기에 상호간 즉각적인 저장 및 동기화-서로 자료가 일치하게 만드는-가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래 그림은 실제 제 에버노트 캡쳐그림인데 내 일상중에 만나는 자료들을 손쉽게 저장하고 스마트 폰에서 확인하여 활용하거나, 혹 회사 컴퓨터에서 업무중에 즉각적으로 메모 등을 해놓고 어디든지 찾아보는등에 도움이 됩니다

    특히 영어 관련 자료도 아래 그림처럼 MP3 자료도 드래그로 끌어당겨놓고 동기화놓으면 어디든지 에서 제 아이폰에서 확인해서 들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구글 크롬을 통해 인터넷 서핑을 하면 '에버노트로 클립 하기' 같은 보조 연동 프로그램이 있어 클릭만으로 인터넷 자료를 내 에버노트 서버로 저장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기능 써보시면 대단합니다. 화면에 보이는 모든자료를 (단 동영상 제외) 저장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awesome note와의 동기화도 가능합니다.

    쓰다보니 활용도가 좋아 현재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단, 폴더단위의 암호화 장치가 되어있지 않아 -문장단위 암호화는 가능- 개인의 중요자료는 조심해야 합니다

    (무자막 미드카페-http://cafe.naver.com/ddole/-에 제가 포스팅한 내용입니다)














    2012년 7월 6일 금요일

    "거짓과 날조를 파헤치고 싶나… 진실을 먼저 공부하라"

     

    "거짓과 날조를 파헤치고 싶나… 진실을 먼저 공부하라"

  • 파리=어수웅 기자

    입력 : 2012.07.07 03:10

    [세계적 석학 움베르토 에코 인터뷰] ① 인터넷의 역설 ② 내가 책 5만권 가진 이유
    장서가 작은 도서관 수준 - 언젠가 꼭 읽거나 참고하고 싶어 필요한 책들이라 보관하는 것
    소설 쓰는 이유는 - 내 욕망은 독자를 창조하는 것… 창작자로서 기쁨을 전하고 싶어
    책 다 쓰고나면 슬퍼져 - 자료 모으고 공부하는 즐거움이 완성의 기쁨보다 더 크기 때문
    별명이 '세상의 모든 지식' - 우주엔, 행동 사이엔 틈이 많아 빈틈을 활용해 사유 연습을 하지

    책 애호가이자 수집가로서 움베르토 에코(Eco·80)의 소망은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을 소장하는 것이다. 그는 동년배인 프랑스의 시나리오 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81)와의 대담집 '책의 우주'에서 자신의 장서가 5만권에 이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작은 도서관'이라 불러도 좋은 양이다.
    ―수치로 따지는 게 민망하지만 장서가 5만권이라고 들었습니다.
    "밀라노 집에 한 3만, 교외에 있는 집에 한 1만, 그리고 볼로냐대학 연구실과 여기(파리) 다 합치면 대략 5만부 정도 될 거요. 솔직히 다 세어 보지는 못했어요. 매일매일 엄청난 새 책이, 헌정본이 집으로 와요. 매월 날짜를 정해 박스에 담아 대학에 있는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보낸다오. 때로는 교도소에도 보내줍니다. 걱정이야, 못된 책으로 교도소 사람들을 오염시킬까 봐(웃음)."
    ―이 시점에서 무례한 질문 하나. 그 5만권을 진짜 다 읽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보통 뭐라고 대답하나요.
    "정말 다 읽었느냐고 무례하게 묻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대답하느냐고 묻다니. 질문이 철학적이군(웃음). 상대방의 기질과 취향에 따라 준비해둔 다섯 개의 대답이 있소. ①번은 "그보다 더 많이 읽었소!" ②"읽었으면 이 책들이 왜 여기 있겠소." ③ "읽은 책들은 다 치웠소. 다음 주에 읽을 것들만 여기 있지." 그러고 보니, ④번과 ⑤번은 생각이 안 나는군요. 어리석은 질문들이 많이 있었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혹은 읽어도 몇 권만 겨우 읽는 사람들은 왜 나 같은 사람들이 서재를 가지고 책을 보관하는지 모를 거요. 언젠가는 꼭 알고 싶고, 참고하며 필요한 책이라는 사실을."

    에코 박사(Dr. Eco), 미스터 에코(Mr. Eco), 아니면 어떤 호칭이 편하냐고 물었다. 그는 입술을 좁게 오므리고“휘익~”하는 소리를 낸 뒤, 휘파람으로 자신을 불러달라며 웃었다. 상대방의 긴장을 일거에 허물어뜨리는 파안대소였다. /파리=사진작가 성지연

    ―안 읽은 책을 갖고 있는 이유겠군요.
    "이런 일이 있어요. 30년 전에 산 책이고 나는 한 번도 읽은 기억이 없는데 내가 그 책을 완벽히 알고 있는 것 같은 경우가 있어요.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지.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일인데, 첫째는 내 지식이 점점 커지면서 이 책의 내용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요. 둘째는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읽다 보니 다 알게 되는 경우지. 셋째는 다른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쓴 책을 읽고 나서 마치 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경우요."
    ―생물학적으로는 팔순이지만, 소설가로는 삼십대입니다.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게 1980년이니까 소설가로서는 올해 서른둘?(웃음) '문학적 청춘'의 비밀은 뭔가요.
    "비밀이 있다고 한들 가르쳐 줄 것 같은가?(웃음) 비밀은 없어요. 단 창작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마음과 참을성이랄까. 내 소설은 6~8년마다 한 권씩 나왔소. 1년에 1권씩 책을 내는 사람은 다른 비밀이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비밀은 기다림의 미학이지. '장미의 이름' 이후 '푸코의 진자'까지 8년이 걸렸소. 쓰는 시간 그 자체가 기쁨이지요. 나는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져요. 완성의 기쁨이 아니라 책을 쓰는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게 더 즐겁죠. 내 소설의 서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는 쪽이죠. 갈릴레오에 관한 책을 읽다가 (세 번째 소설인) '전날의 섬'의 모티브를 찾았던 건데, 이런 조사와 공부가 좋아요. 그런데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 더 이상 관련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되잖소."
    ―소설가로서 독자에게는 어떤 즐거움을 주고 싶은가요.
    "내 욕망은 존재하지 않았던 독자들을 창조해내는 거요. 나는 '이상적 독자'(Model Reader)라는 에세이에서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작가는 은행 창구직원이 아니야. 셰익스피어 비극의 독자들은 셰익스피어가 원했던 독자들인 거야. 나는 창작자로서의 내 기쁨을 내 독자들도 똑같이 느끼기를 원해요. 물론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이 세상 모든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소?(웃음)"
    ―'장미의 이름'부터 곧 출간될 '프라하 공동묘지'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거짓의 힘' '날조의 메커니즘' '음모론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죠. 이유는?
    "그렇게 묻는다면, 왜 단테는 천국과 지옥에 관심을 쏟았고 반대로 발자크는 프랑스 사회문제를 썼느냐고 물을 수 있지요. 제임스 조이스는 왜 다른 곳이 아닌 더블린에 집착했느냐고 할 수 있겠고. 6권 중에서 '전날의 섬'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이 범주에 묶을 수 없을 거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일 뿐이지. 나는 위조와 날조에 관심이 많아요. 나는 철학자고, 철학자는 당연히 진실에 관심이 있는 법이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거짓인가. 거짓이나 위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진짜가 뭔지를 알고 시작해야 해요. 반쪽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어요. 둘은 연결되어 있지. 진실을 모른다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거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뫼비우스의 띠의 딜레마군요. 사람들은 선생을 '세상의 모든 지식'으로 부릅니다. 느낌은?
    "모두 다 위조고 날조야(웃음). 만약에 어찌 그리 정보가 많으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빈틈(empty space)을 이용한다고 말하겠어요. 이 우주에는 행동과 행동 사이, 이것과 저것 사이에 많은 빈틈이 있고, 그 틈을 활용해야 해요. 당신이 1층에서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기까지 3분이 걸렸어. 그동안 나는 어떤 생각을 했지. 일종의 사유 연습이오. 우리 인생은 비어 있는 시간들로 가득 차 있어. 우리 모두가 할 수 있어요. 화장실에 가 앉아 있으면 '빈틈'이 많을걸?"
    ―선생은 이제 80대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또 사회에게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느낍니까.
    "여전히 나는 글을 써요. 볼로냐대학에서는 은퇴했지만 칼럼뿐만 아니라 특강도 하지. 하지만 내 지혜는 너무 늙었어요. 여든 살 된 지식이지. 지난번에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뇌가 가장 좋을 때는 당신들 나이, 24세 때다. 뉴런이 그때가 제일 활발하고 좋을 때라고. 지금보다 더 똑똑할 수는 없다고. 나에게 지혜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혜는 스스로 얻는 거요."

    [새 소설 '프라하 공동묘지']
    세계 문학의 역사 통틀어서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 등장
    “세계 문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일 거요.”
    자신의 새 소설 주인공에 대해 묻자 에코는 이렇게 힌트를 줬다. 올가을 번역·출간 예정인 에코의 여섯 번째 소설 ‘프라하 공동묘지(Prague Cemetry·사진)’의 주인공 이름은 시모니니. 작가가 학자와 소설가로서 평생 천착해왔던 진실과 거짓, 날조의 메커니즘이라는 주제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다. 시모니니가 지닌 천부적 재능은 음모와 위작. 어렸을 때는 공증인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문서 위조의 달인이 되었고, 청년 시절에는 비밀 첩보원으로 일하며 음모를 스스로 창조해냈으며, 마침내는 반유대인 문서 위작에까지 몰두한다. 제목인 프라하 공동묘지는 유대인 랍비들이 비밀회의를 하는 장소. 이 역시 시모니니의 위작이자 창조다. 19세기를 배경으로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주인공이 일기 형식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플롯으로 꾸며졌다.
    [한국에 대한 인상]
    문화강국·출판강국… 알고 지내는 학자 많은데 그중엔 김씨가 너무 많아

    3년 전 에코 교수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요청으로 큐레이터를 맡아 ‘궁극의 리스트’라는 제목의 전시를 연 적이 있다. 삶은 유한하고 리스트(목록)는 무한하다는 문화적 주장이었다. 가령 ‘시적인 것’의 의미를 말할 때 한 줄의 정의를 말하는 것보다 호메로스적인 것, 셰익스피어적인 것 등등의 리스트로 이어가며 설명하는 게 더 합당하다는 얘기였다.

    움베르토 에코가 그린 자신의 캐리커처와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감사 메시지. 에코는 1930년대 이탈리아 만화의 마니아이기도 하다.

    문득 한국에 대한 ‘에코의 리스트’는 무엇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우선 문화강국·출판강국으로서의 한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과 연구를 함께하거나 연락하고 지내는 학자들이 무척 많다는 것. 그런데 한 가지, ‘킴(김씨)’이 너무 많다고 농담을 던졌다. 아마 리스트를 만들면 ‘킴킴킴’으로 이어질 것 같다며 웃었다. 초대 제안을 하자, “죽기 전에 한국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기는 해요. 그런데 너무 늦지 않았나 싶네”라고 말했다.
    에코의 파리 집은 생 슐피스(St. Sulpice) 성당 바로 옆에 있었다. 두 사람이 타면 껴안아야 할 만큼 비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조국 이탈리아 말고) 파리에도 집이 있는지는 몰랐다고 인사를 건네자, “얘기가 길다”면서 60년 전 추억을 들려줬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처음 파리에 왔어요. 내 아들은 네 살 때 처음 해외여행을 했지만, 우리 세대는 스무 살에 여행을 해도 매우 이른 것이었지. 그런데 처음 본 파리가 너무나 멋지더라고. 당시 난 철학도였는데, 파리에서 살 수 있다면 은행원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내 기질상 가장 안 맞는다고 생각한 직업이었거든. 결국 원한 지 40년 만에 소원을 이뤘어요(집을 샀어요). 다행인 것은 은행원을 하지 않고서도 꿈을 이뤘다는 거지. 소원을 이루려면 40년은 한결같이 원해야 하는가 보오(웃음).”

  • "거짓과 날조를 파헤치고 싶나… 진실을 먼저 공부하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2년 7월 2일 월요일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해외입양인, 말걸기] 친부모에 버림받고, 양부모에 버림받고…
    제인 정 트랜카 작가, 입양인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1-10-06 오후 4:08:15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 60년간 한국은 공식적으로 16만4894명의 아동해외입양 보냈고 2010년 한 해에만도 1013명의 아동을 해외입양 보냈다. 이 아동들은 한국정부가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 "국제간의 아동 입양은 자격을 갖춘 중앙정부기관에 의해서만 허가되어야 한다"를 유보한 상태에서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 또 한국은 '국가 간 아동 입양에 있어서 아동보호 및 협력에 관한 헤이그 협약'을 아직 비준하지 않았는데, 이 헤이그 협약에서는 해외입양을 중앙정부에서 관리해야 할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미국의 의사-레스토랑 주인 부부에게 입양됐던 팀
    입양프로그램에 대한 한국정부의 무책임과 관리 소홀의 결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입양인들은 피해를 입고 있다. 미국입양인이었던 팀(Tim)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팀은 1970년대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하지만 34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온갖 풍상과 우여곡절을 겪은 팀은 서울 이태원의 한 길거리로 흘러들어와 노숙인으로 살고 있었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팀은 우연히 길을 지나던 다른 한 해외입양인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1976년 한국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당시 한국은 사회복지보다는 경제발전을 최우선적 목표로 두고 있던 국가였다. 해외입양은 군사정권에 돈이 되는 좋은 사업이었다. 팀은 당시 한 재래시장에서 길을 잃고 고아원으로 가게 된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팀의 한국 이름은 모정보인데, 누가 그에게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알 수 없다. 친생부모가 모정보의 양육을 포기했다는 것을 증빙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팀의 입양을 촉진하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팀의 당시 호적(현 가족관계등록증)에는 팀 외에는 아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후 팀은 지금도 왕성하게 입양사업을 벌이고 있는 사설입양기관인 대한사회복지회에 의해서 미국 위스콘신주의 한 도시로 입양 보내졌다.
    팀의 미국 양부는 의사였고 양모는 예술가이면서 레스토랑 체인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팀의 양부모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양부모의 의무 중의 하나인 입양 자녀에 대한 미국국적 취득절차를 밟지 않았다. 양부모는 친자식 셋을 얻은 후 비교적 늦은 나이에 팀을 입양했다. 나는 지난 9월 팀으로부터 얻은 전화번호로 미국 위스콘신주에 살고 있는 양부모와 통화를 했다. 양부는 "팀은 다루기 힘들었고,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또 팀의 양모는 "팀이 친구들에게만 관심 있었는데 친구들은 흘러갈 뿐이고 가족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양부모는 팀이 8살 때 팀에게 리탈린(주의력결핍장애에 쓰이는 약)을 투여했다. 그리고 팀이 12살 때 그를 기숙식 군사학교에 보냈다. 양부모는 또 팀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팀에게 리튬을 투여했다. 팀이 18세가 되었을 때 양부모는 팀에게 "우리 이제 인연을 끊자. 집을 떠나라"는 말을 했고 결국 팀은 집을 나와야 했다.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팀은 그 다음 20년 동안 미국에서 장애인수당과 교회의 자선에 의존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도중에 팀은 정신병원에서 감금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팀은 코카인이나 각성제 같은 마약을 흡입하기 했다. 팀은 위스콘신, 캘리포니아, 하와이를 전전하며 살았다. 마침내 약 6개월 전, 그는 하와이에서 그가 입양 온 나라인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9.11이후 까다로워진 미국의 정책에 의해서 미국국적이 없고 마약중독과 거래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팀은 미국의 한 주인 섬 하와이로부터 소위 본토인 대륙으로 입국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추방을 면할 수 있을까 하고 변호사를 고용하려했지만 팀의 양부모가 보낸 변호사 수수료는 400불에 불과했고, 그것은 턱없는 비용이었다. 팀의 양부모는 나와의 전화 통화에서"우리가 이제 팀에게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고, 팀은 미국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3살 때인 1977년 미국으로 입양 가서 34년 만에 미국정부에 의해서 한국으로 추방된 팀은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천애고아일 뿐이다. 팀은 34년 전 아마도 한국인 생부모에 의해 포기되었고, 한국 사회로부터 적출되었으며, 미국인 양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미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은 버림당함으로 얼룩졌다.
    입양특례법은 해외입양아동의 국적삭탈절차를 명시하고 있다. 국가가 당사자의 동의에 의하지 않고 국적을 삭탈하는 일이 시민권과 인권을 거스르는 일이 아닌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최소한 이 법은 한국정부와 해외입양기관은 입양아동이 입양된 나라의 국적 취득 여부에 대한 확인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부도 입양기관도 이 의무를 책임 있게 실행해오지 않은 흔적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입양인들에게 별로 큰 손해가 아니어서 문제를 삼지 않아서 그렇지 국내로 돌아와서 장기 거주를 위해 재외동포비자를 받기 위한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많은 입양인들이 자신들이 입양국가의 국적을 취득하고 시민이 된 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주민등록 관청에서 자신들의 주민등록을 여전히 살려두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이는 결국 정부와 입양기관들이 해외입양을 보내고 나서, 이들의 시민권과 국적 취득 여부를 확인하는 일에 실제로 큰 게으름을 피워왔다는 점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팀과 같이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채로 살다가 한국으로 추방되는 입양인들을 발생시키는 이유이다. 생각해보라. 입양 간 나라에서 그 땅 사람들과 부대끼며 30년, 40년을 살고도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서 모국 아닌 모국으로 추방되는 입양인들의 가혹하고도 처참한 운명을. 언어도 가족도 문화도 낯선 땅에서 추방자로 사는 일의 참담함을.
    정부와 입양기관들은 이런 인권 유린과 훼손에 어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입양이 마치 천사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 벌이는 선행인 것을 만천하에 주장하면서, 또 이 일로 온갖 사회적 존경과 찬사를 받으면서 벌여온 일임에랴!
    무국적 노숙인 팀의 불가능에 가까운 국적 회복 과정
    팀이 서울거리에서 내 친구에 의해서 노숙자로 발견되었을 당시 그는 신분증도 없었고 총재산은 1불도 안 되었고 행인들에게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팀은 복용할 약도 더 이상 없었고, 찢어진 바지에 짝짝이 신을 신고 있었다. 팀은 종이컵비닐봉지를 몇 개 갖고 있었다. 정신병 탓인지 팀은 자기 이름, 나이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팀과 차분하게 대화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팀은 자기가 더 이상 미국인이 아닌 것도 몰랐고 스스로를 "세계시민"으로 불렀다.

    ⓒ프레시안(허환주)

    우리 입양인들의 첫 번째 임무는 팀의 한국국적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었다. 미국국적이 없는 팀이 한국국적을 회복하면 극빈자 신분으로나마 최소한의 의료나 복지혜택 등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우리 입양인들은 해외입양인센터 <뿌리의 집>을 운영하는 김도현 목사님과 더불어 10여 곳이 넘는 정부 기관들을 며칠간 문자 그대로 뛰어다녔다. 그런 지난한 과정에서 우리가 겪은 답답한 관료주의를 말로 다 표현 하기는 불가능하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노숙인인 팀이 혼자 이런 과정을 밟기는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모국으로 국제 미아가 되어서 돌아온 해외입양인들의 생존권이 얼마나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은 정부예산에 의해서 운영되는 민간재단의 형태로 2009년 설립되었다. 사실상 법적인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작은 정부론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변명에 기초해서, 정부 예산으로 직원의 급여와 사업비가 지출되는 기이한 형태, 거의 불법에 가까운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기관의 불완전한 설립을 주도했던 정부 관리들은 자리를 옮겼고 이 기관의 설립을 주도하고 이 기관의 이사장이 된 이는 수수방관 내몰라라였다. 결국,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이 주도해서 이 기관의 설립근거를 담은 입양특례법 개정작업을 벌였고, 결국 지난 6월에 국회 통과를 이루어 냈다. 비로소 중앙입양정보원은 법적 근거를 확보한 것이었다.
    사실상, 중앙입양정보원은 2009년 설립되기 전에도 같은 직원들,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거의 10년 동안 존재해왔다. 사실상 유명무실한 기관이었지만 입양기관이 사무실 비용을 대고, 정부가 민간기관 지원의 형태로 예산을 마련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정부 예산으로 급여를 받는 센터장과 직원의 임용권은 입양기관들에게 있었던 기형적인 단체였다. 이 입양정보센터가 중앙입양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전액 정부의 예산에 의해서 운영되기 시작한 후에도, 사실상 입양사후서비스라고 하는 중핵적인 사업에 있어서 아무런 진척도 전문성도 없이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만 있을 뿐이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 기관이 운영되어 왔다고 하면, 그것도 정부의 예산 지원에 기초해서 운영이 되었다고 하면, 그 전문성은 물론 사업의 목표가 착착 성취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어보는 이가 입이 아파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난 몇 주 동안 팀의 문제로 중앙입양정보원에서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중앙입양정보원은 해외입양인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전혀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앙입양정보원은 양부의 이름에 기초해서만 입양인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는 몇 주 전 팀에 대한 입양기록을 찾기 위한 방문약속을 잡고자 중앙입양정보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내가 팀의 이름을 이야기 했을 때 중앙입양정보원 직원은 팀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나를 만나는 약속을 잡을 수 없다고 했다. 대신 그 직원은 내게 이메일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가 알려준 주소로 메일을 보냈지만 반송되었다. 그래서 전화를 몇 번 다시 했지만 통화 중이었다. 결국 <뿌리의집> 김도현 목사님이 대신 전화를 해서 중앙입양정보원 사무총장과 통화를 요청했지만 그 날 외근 중이라 통화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우리는 팀을 김도현 목사님 차에 태우고 중앙입양정보원을 무작정 방문했다. 중앙입양정보원 직원 2명이 우리를 만났다. 한 직원은 입양정보센터시절부터 그곳에서 일해 왔었다. 그녀는 영어를 할 수 있었지만 팀을 쳐다보거나 팀에게 영어로 말하지 않았다. 한 직원은 영어를 좀 했지만 입양제도에는 전혀 문외한인 것 같았다. 우리 해외입양인들이 중앙입양정보원의 직원들이 해외입양사후서비스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인 입양인들로부터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여러 차례 했고, 나아가 입양인을 직원으로 채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수차례 피력했지만, 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팀과 영어를 할 줄 아는 2명의 한국인들과 중앙입양정보원을 방문했지만 해외입양을 다루는 기관의 직원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해외입양인을 만날 때는 영어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원칙으로 나는 반복적으로 직원들에게 팀을 보면서 영어로 팀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직원들은 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데 마치 팀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거의 대부분을 한국어로 이야기 하였다. 내가 만약 통역이 가능한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중앙입양정보원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이다.
    중앙입양정보원의 두 직원은 해외입양인은 그 나라 국적을 취득 할 수 있다고 원론적인 말을 했다. 미국입양인 팀이 미국국적을 못 얻었고 다른 해외입양인들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나는 말했지만 그 두 직원은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의 어려움 끝에 우리는 가까스로 팀의 미국입양기록을 발견했고 중앙입양정보원 직원은 그 기록의 원본이 대한사회복지회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중앙입양정보원 설립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해외입양사후서비스의 원스톱서비스화가 아니냐, 지난 5월 입양의 날에 즈음하여 진영곤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이 해외입양에 관한한 원스톱서비스체계를 갖추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한 일이 신문에도 다 났는데,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거짓 보고를 한 것이냐, 그러니, 여기 중앙입양정보원을 통해서 우리가 그 서류를 받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직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낯설어 했지만 결국 우리 주장은 관철되었고 우리는 사설입양기관을 가지 않고도 팀의 고아호적등본에 유사한 서류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중앙입양정보원 직원들이 준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설입양기관의 권력과 관행에 주눅 든 채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권의 문제를 민간에 위탁한 지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남겨 놓은 이 땅 사람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어두운 유산인 것처럼 보였다. 자국민의 시민권에 관한 문제를 사설기관에 위탁해 놓은 나라의 슬픈 자화상을 나는 거기에서, 내 안에서 거친 파도처럼 일렁이는 분노 가운데서 목격해야 했다.
    진정한 입양사후서비스기관은 입양인, 즉 국제적 미아가 된 팀이 한국국적을 회복하도록 지원하고 그래서 팀이 한국사회에 원만히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앙입양정보원 직원들은 팀에 관한 문서를 김도현 목사님에게 전달한 것으로 자기들의 일이 끝났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래서 김도현 목사님은 자기 자신의 시간을 들여서 팀의 한국국적을 회복해 주기 위해 10여개 기관을 여기저기 며칠 동안 돌아 다녀야 했다. 한국어를 못하는 팀이나 입양 보내어진 나라의 국적이 없는 해외입양인들이 김도현 목사님이 했던 것과 같이 그런 복잡한 국적회복과정을 밟기는 불가능하다. 국적이 없는 한국 해외입양인들의 국적을 회복해 주는 일은 중앙입양정보원 같은 국가기관이나 한국정부가 나서서 마땅히 할 일이지 어느 개인이 자기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중앙입양정보원 같은 한국정부기관이 국가기관간의 연계를 통해서 팀의 국적을 회복해 주도록 힘썼더라면 훨씬 더 시간과 노력이 단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무관심 때문에 한 개인이 그러한 수고를 하게 되었다. 더욱이 동사무소로부터 외교통상부로 가야 한다는 조언을 받고 우리가 외교부를 찾아 갔을 때는 정문을 지키는 경찰이 출입조차 못하게 했다. 중앙입양정보원으로 대표된 한국정부는 국적 없는 한국입양인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을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팀을 해외로 입양 보낼 때는 한국외교부에서 여권을 발행했을 것이고 재외공관, 입양관련기관 등등이 모두 관련되었을 것 아닌가? 우리가 팀의 한국국적을 회복 해 주기 위해서 여러 공무원들을 만났지만 이런 경우들 처음 본다며 모두 어떻게 할지를 몰라 했다.
    간난신고 끝에 마침내 팀은 주민등록번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팀은 아직 주민등록증이 없다. 그래서 팀은 아직도 한국인 극빈자이자 고아이며 정신분열증 환자이지만 의료 등 사회복지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 한국정부는 자국민을 해외입양 보내는 데는 신속하고 의욕적으로 행동했지만 팀처럼 귀환한 자국민인 전 해외입양인을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몰랐고 할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미국으로 입양 갔다 34년 만에 추방된 입양인과 영어로 말하는 것조차도 말이다.
    우리는 국제인권기관이 차라리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이 해외입양인들을 위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또는 안하고 있는지 점검해 주었으면 한다. 과거에는 심지어 사설입양기관이 한국아동을 해외에 판매한 돈으로 중앙입양정보원의 전신인 입양정보센터 같은 정부적 기능을 하는 기관에 재정을 지원해준 때도 있었다. 이것은 물론 이해충돌 행위다.
    토비 도슨과 팀, 성공한 입양인만 환영하는 한국
    팀의 경우를 통해서 또 생각해 볼 것은 한국에서 친생자녀양육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친부모들에 대해 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한국정부는 이제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팀이 3살 때 시장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은 팀의 가족이 그를 양육하고자 3년 동안은 노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팀의 가족은 팀을 양육하지 못할 상황이 되자 그를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몰래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단순히 시장 통에서 팀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스키 선수이자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 중의 하나인 토비 도슨처럼 말이다.

    ▲ 토비 도슨 ⓒ연합

    사실 한국 정부나 사설입양기관들은 토비 도슨처럼 성공한 입양인에게는 열광하고 팀처럼 실패의 늪을 헤매고 있는 입양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존재화 시킨다. 국가가 무엇인가? 성공한 사람들에게 열광하라고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함께 힘을 모아 돌보자고 세운 것이 국가여야 하지 않은가? 시장 통에서 잃어버린 아기에 대해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회와 정부라면 당연히 가족의 품을 다시 찾아 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친생자녀를 키우기에 버거워 포기해야할 지경이라면, 먼저 생뚱맞고 냉정하게도 입양을 제안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도우면 친생가족이 친생자녀를 키울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토비 도슨의 경우 시장 통에서 잃어버린 아이였음에도 해외입양 보내졌다는 사실은 고의로 간과한 채 그의 성공 스토리에만 열광하고 제 2의 국익을 위해 그의 명성을 활용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이 땅의 사설입양기관과 정부와 사회다. 누구는 그러면 제 1의 국익은 뭐였냐고 할 것이다. 그것은 70년대와 80년대에는 한국 정부가 입양을 통해서 국가 재정에 보탬을 도모했었던 것이 제 1의 국익이었다고 할 것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행태에 다름이 아니다. 그것도 이 땅에 태어나는 영아들을 가지고 말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 (가)항은 아동입양과 관련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아동의 입양은, 적용 가능한 법률과 절차에 따라서 그리고 적절하고 신빙성 있는 모든 정보에 기초하여, 입양이 부모, 친척 및 후견인에 대한 아동의 신분에 비추어 허용될 수 있음을, 그리고 요구되는 경우 관계자들이 필요한 협의에 의하여 입양에 대한 분별 있는 승낙을 하였음을 결정하는 관계당국에 의하여만 허가되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현재 한국입양아의 90%는 미혼모 자녀다. 한국인들은 이런 현상은 유교문화 때문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유교문화에서 가장인 아버지는 자녀를 돌봐주어야 책임이 있지 않나? 또 군사부일체인 유교문화에서 정부는 그 백성을 돌보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 않나? 한국에서 미혼모가 아동의 양육을 포기하는 이유는 경제력 때문이다. 미혼모는 정부가 한 달에 미혼모에게 주는 양육비 5만 원으로 아동을 키우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국내입양의 경우 한국정부는 입양부모에게 한 달에 10만 원을 지원한다. 지난 5월에 열린 입양관련 컨퍼런스에서 정부관계자는 이 입양부모에게 지원하는 지원금을 상향 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부의 할 일은 국내입양이나 해외입양을 권장하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아동이 그 친부모와 생이별을 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팀은 자기의 친부모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시장 통에서 발견되어 고아호적이 만들어진 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출생등록제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출생등록제는 팀이 태어났을 때인 1970년대와 같다. 그것은 아이가 탄생한 병원에서 출생등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원해서 임의로 신고하게 되어있다. 그 말은 부모가 출생신고를 안 한 채로 해외로 보내진 많은 입양인들의 경우 한국에 누가 자신의 생물학적 의학적 어머니인지에 대한 자신의 출생사실에 부합하는 기록이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입양기관은 아동을 쉽게 입양 보내기 위해서 소급하여 고아호적을 만들어 준다.
    이런 출생등록제의 허점 때문에 국내입양의 경우 양부모는 남의 아이를 자기 가족등록부에 자기 친자녀처럼 등록시킴으로써 그 아동의 출생을 비밀을 은폐할 수 있게 된다. 부모가 병원에서 발행된 출생증명서를 구청으로 가지고 가서 출생등록을 한다. 그러나 집에서 난 아동은 병원출생증명서가 없이도 출생등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현 제도 하에서는 미혼모가 낳은 아동을 양부모가 입양하되 마치 집에서 난 친자식처럼 출생등록을 할 수 있게 되어있다. 200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행 된 보고서에 의하면 2007년 한해에만 3014명의 아동들이 이런 불법 비밀입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도 정부에 의해서 인가가 난 사설입양기관의 중재를 통해서 자행된 일이다. 사실상 국내입양의 대다수는 이런 비빌입양이다. 온갖 변명과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렇게 해서 입양 아동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진실에 접근할 권리가 근원적으로 차단되며, 거짓 정보에 기초해서 자신의 인생을 구축해야 한다. 비록 입양이라는 선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존재의 근원과 그 의의를 훼손하는 이 제도는 입양 당사자에게는 야만적 인권유린에 다름이 아니지 않은가?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과 김도현 목사님이 운영하는 <뿌리의 집(KoRoot)>은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여 알리고, 친부모의 자녀양육보다 우선해서 제도적으로 입양을 권하는 한국입양제도를 허점을 보완하고자 일하고 있다. 국제공법상, 한국은 1991년 11월 20일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수용했지만 아동권리와 관련한 몇 가지 조항에 대해선 지난 20년간 여전히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국제사법상, 한국은 아직도 국가간 입양에 관한 헤이그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 해외입양인들은 유엔아동권리위원회를 통해 한국정부에 아래와 같은 압력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1) 한국의 모든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국정부는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입양제도를 인정하거나 허용하는 당사국은 아동의 최선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도록 보장하여야 하며, 입양이 권위 있는 관계 당국에 의해서만 허가되도록 해야 한다)와 40조(당사국은 형사피의자나 형사피고인 또는 유죄로 인정받은 모든 아동에 대하여, 아동의 연령 그리고 아동의 사회복귀 및 사회에서의 건설적 역할 담당을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점을 고려하고, 인권과 타인의 기본자유에 대한 아동의 존중심을 강화시키며, 존엄과 가치에 대한 아동의 지각을 촉진시키는데 부합하도록 처우 받을 권리를 가짐을 인정한다)에 대한 유보를 철회해야 한다.
    2) 한국에서 태어난 아동이 해외입양되기 전 그 아동의 권리를 더 낫게 보호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국가간 입양에 관한 헤이그협약을 수용해야 한다.
    3) 한국의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미혼모(가정)에 대한 사회복지지원을 실효적으로 늘려야 한다.
    우리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이 한국의 입양문제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감시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국정부가 헤이그협약을 지키고 수용 한다면, 중앙입양정보원도 그에 걸맞게 한국사회의 약자인 미혼모와 그 자녀들의 권익을 위해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은 사설입양기관의 영향력 아래에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제인 정 트랜카 작가, 입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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