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7일 수요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8] 아침이슬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8] 아침이슬

  • 윤형주

입력 : 2011.07.27 03:07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노래(꽃 피우는 아이)가 저항가요 찍혀
김민기, 마스터 테이프 뺏기고 1집 전량폐기… 세상은 그를 저항 문화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김민기는 서정적이고 해학적인 우리의 '귀한 민기'일 뿐이다
서울 명동 YWCA의 노래모임 '청개구리'에서 김민기를 처음 만난 후 교제가 시작됐다. 종종 같이 술을 마셨다. 일이 끝나면 늘 후배들을 몰고 다니며 술을 마시던 시절이었다. 어울리던 무리에서 내가 제일 돈을 잘 썼다. 학사 주점에서 낙지볶음을 안주로 소주나 막걸리를 마셨다. 김민기도 그 자리에 있었다. 워낙 술을 잘 마셨다. 잘 취하지도 않는 듯했다. 평소에 말이 없는 그는 술을 마셔도 조용했다. 간혹 던지는 말은 특이했다. 과실주를 마실 때면 보통 "과일 향이 나네" "술 맛 좋다"라고 말하기 마련이다. 그는 달랐다. 그에게 "술 맛이 어떠냐"고 물으면 이런 답변이 튀어나왔다. "관능적이군요."
▲ 1970년대 초 기독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민기(왼쪽)와 양희은.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로 유명한‘아침이슬’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돈을 빌려 달라고 말했을 때 깜짝 놀랐다. 친구가 군대를 가는데 송별회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의 첫 부탁이었다. 내가 말했다. "그냥 너한테 돈을 줄 수도 있는데, 기왕이면 네가 수고해서 번 돈으로 해주는 게 더 의미 있지 않겠어?" "제가 당장 무슨 수로 돈을 벌어요?"
사실이었다. 그의 노래는 묵직했다. 다방이나 술집에서 부를 만한 노래가 아니었으니, 아르바이트를 하기에도 막막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었다. 바로 이백천 선생님에게 전화했다. 그는 음악평론가이자 세시봉 시절부터 우리의 멘토였다. 당시 동양방송 '명랑백화점' PD로 활동하고 있었다. 회사나 부서 대항으로 게임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에 김민기를 출연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 선생님이 흔쾌히 허락했다. 그의 첫 방송 데뷔 무대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다. 무턱대고 부탁한 나나, 어울리지도 않는데 나간 김민기나, 흔쾌히 허락한 이백천 선생님이나, 셋 모두 대담했다. 어쨌든 그 프로그램에 출연해 김민기는 1500원을 받았다. 막걸리나 백반이 100원도 채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친구 송별회를 무사히 치렀다.

▲ 올해 2월 본지와 극단 학전 20주년 기념 인터뷰를 가진 김민기.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이후로 그와의 인연은 드문드문 이어졌으되 그의 인생은 굽이쳤다. 1971년 '아침이슬'을 담은 '김민기 1집'을 낸 그는 이듬해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꽃 피우는 아이'를 불렀다. 화근(禍根)이었다. 이 노래의 애잔한 가사를 당시 정권은 저항적이라고 판단했다. '무궁화 꽃을 피우는 아이/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중략)/꽃은 시들어 땅에 떨어져 꽃피우던 아이도 앓아 누웠네/누가 망쳤을까 아기의 꽃밭/그 누가 다시 또 꽃피우겠나(후략)'라는 내용이었다. 1집 앨범이 전량 폐기됐다. 마스터 테이프도 빼앗겼다.
그때부터 그는 연극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3년엔 김지하가 희곡을 쓴 연극 '금관의 예수' 전국 순회공연에 참여했다. 이듬해 소리굿 '아구'를 내놓고 군에 입대, 1977년 제대했다. 그러곤 그는 몇 년간 서울을 떠나 고향 전북 김제시에 거주했다. 거기서 수확한 감자나 고구마를 보내오곤 했다. 쌀을 보내면서 쌀값을 달라기도 했다. 연극 활동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 즈음으로 기억한다. 어느 하루는 그가 집에 놀러 왔다. 함께 술을 마셨다. 당연히 집에서 자고 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저녁 10시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5000원만 달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어디 가는데?" "탄광이요. 청량리에서 태백 가는 기차를 타야 돼요." "거긴 왜?" "한 석 달 정도 있으면서 일하려고요."
후에 알았다. 태백 탄광에선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사회 운동가로 보이는 김민기가 그들 탄광에서 일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태백을 떠나 충남 보령 탄광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여러 달 광부들과 생활했다.
그렇게 훌쩍 떠나곤 다시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불쑥 나타났다. 김민기의 성격이 그랬다. 서울 대학로의 '학전' 대표로 자리 잡고 나서야 우리는 종종 만났다. 그리고 지난 3월 30일 송창식과 윤형주, 김세환, 나, 조영남, 양희은 등이 모두 학전소극장에 모였다. 그의 환갑 생일과 학전 개관 20주년을 기념한 자리였다. 일찌감치 "나는 가수가 아니다"고 선언한 그는 그 자리에서도 '봉우리'의 가사를 낭독했을 뿐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세상은 그를 저항 문화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그가 '아침이슬'을 발표한 1970년을 저항 문화의 시작이라 보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내가 아는 김민기는 이와 거리가 멀다. 그는 서정적이고 해학적이다.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견을 주장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귀한 민기'다. 우리 모두 그에게 공연장 하나 지어주는 꿈을 잊지 않고 있다.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8] 아침이슬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주체 못할 정욕 ”가둬 주세요” - 중앙일보 뉴스

 

주체 못할 정욕 "가둬 주세요"
[CBS노컷] 입력 2011.07.21 10:18

40대 스님 충북경찰청에 애원
얼마 전 충북경찰청 상황실에 "오창 인근의 조그만 절에 있는 40대 스님인데 조만간 사고를 칠 것 같으니 며칠간 유치장에 가둬달라"는 신고가 접수됐다.
곧바로 이 신고는 청주상당경찰서 오창지구대로 연결됐고 사찰로 출동한 경찰관들은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이 스님은 "속리산 끝자락 깊은 산골의 유명 사찰에서 수행하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이곳 사찰에 왔는데 며칠 전부터 끌어 오르는 육체적 욕망을 주체할 수 없게 됐다"며 "절에 드나드는 여신도나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여성을 보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며칠간만 유치장에 가둬 달라"고 애원했다.
이 때문에 오창지구대는 임시대책 회의를 열어 낮 시간 동안 비어 있는 지구대 2층 방에 당분간 모시자는 의견 등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냈다.

결국 박용덕 대장은 대원들이 2시간에 한 번씩 교대로 사찰의 스님을 찾기로 하고 이를 실행해 첫날밤을 무사히 넘겼다.
다음날 절을 찾은 경찰관들은 새벽 일찍 스님이 다른 절을 찾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연이 사연인지라 사뭇 걱정이 됐으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 괜찮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긴장을 풀었다.
박 대장은 "처음 신고를 받고 장난인 줄 알았는데 스님을 만나보니 참으로 난감했다"며 "경찰들이 계속 찾는 게 미안했는지 주지스님에게 다른 절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을 억제하려고 무진 애를 쓰던 스님의 모습과, 그런 모습이 걱정돼 안절부절하지 못하시던 주지스님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충청타임즈 고영진 기자 / 노컷뉴스 제휴사

주체 못할 정욕 ”가둬 주세요” - 중앙일보 뉴스

고백만 늘어놓고 행하지 않으니 예수 냄새 안 난단 말 듣지요 - 중앙일보 뉴스

 

고백만 늘어놓고 행하지 않으니 예수 냄새 안 난단 말 듣지요
[중앙일보] 입력 2011.07.21 00:13 / 수정 2011.07.21 00:13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인가?” 청파교회(서울 용산구 청파동) 김기석(55) 담임목사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단추를 끼울 차례였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찾는가?” 김 목사가 대답했다. “한스 큉이라는 독일 신학자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책을 썼다. 분량이 방대했다. 그러나 결론은 짧았다. ‘참으로 인간이고자.’ 그게 답이다.”
18일 서울 용산 철길 옆 커피숍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그는 ‘젊은 목회자들의 영적 멘토’로 통한다. 최근 『일상순례자』(웅진뜰)도 냈다. 김 목사는 거룩함·경배 같은 크고 묵직한 단어를 고르지 않았다. 일상이란 두 글자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말했다. “참으로 인간이 되고자, 나는 일상을 순례한다.”

김기석 목사가 18일 서울 용산의 철로를 걷던 중 뒤를 돌아보고 있다. 그는 “우리의 일상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숨 쉬는 통로”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리스도를 만나는 비밀 통로, 그게 우리의 일상인가.
“그렇다. 그걸 위해 우리는 살아있는 씨앗이 돼야 한다. 사람들은 ‘내가 큰 씨앗인가, 작은 씨앗인가’만 따진다. 그게 아니다. ‘ 산 씨앗인가, 죽은 씨앗인가’ 를 따져야 한다.”
-산 씨앗이 되려면.
“세상의 반(反)기독교인들은 ‘너희에게서 예수 냄새가 안 난다’고 비판한다. 정확하게 본 거다. 교회 내부에서 아무리 ‘나는 이런 사람이다’고 규정해도 의미가 없다. 외부에서 보는 게 객관적인 거다. 왜 그런 말을 듣는 걸까.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에게선 예수 냄새가 좀 나야 한다.”
-예수 냄새가 나려면.
“크리스천은 ‘예수는 나의 길’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끝이다. 고백만 하고 길은 안 걷는다. 그 길은 나의 외부에 있고, 나와 상관이 없고, 나의 길이 아니라고 여긴다. 예수가 선택한 길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자기 부정이고, 자기 지움이다. 힘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백만 하고 길을 가진 않는다. 그러니 예수 냄새가 나겠는가.”
-예수 냄새가 나는 것, 그게 신앙생활인가.
“그렇다. 신앙은 고백이다. 뭘 고백하나. 사랑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거다. 그 고백을 나의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게 생활이다. 고백을 삶으로 옮기는 것, 그게 ‘신앙+생활’, 즉 신앙생활이다.”
-나의 고백이 나의 삶이 되려면.
“얼마 전 어떤 목사님과 식당에 갔다. 경건한 목회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야! 이리 와!’ 하며 종업원을 막 대하더라. 물 한 잔 시킬 때 어떤 언어를 쓰느냐, 신앙은 거기서부터 나온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존중할 수 있을까.”
-일상의 신앙생활을 더 풀면.
“가령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무거운 짐을 든 채 올라오고 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래도 가서 ‘무거우시죠. 들어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어본다. 아주머니가 떠난 뒤에도 ‘저분이 짐을 들고 무사히 집에 갈 수 있게 하소서’하고 짧은 기도를 한다. 그럴 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이 비로소 삶이 된다. 나의 고백이 나의 삶이 되는 거다. 그게 일상을 순례하는 거다.”
-일상의 순례, 그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열쇠인가.
“그렇다. 순례란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가는 거다. 크리스천의 뿌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다. 오늘의 내가 하나님의 형상다운가, 우리는 그걸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런 감동을 자아내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현존을 상기시켜주는 사람이 있다.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들이다.”
-‘뿌리’보다 ‘성장’을 좇는 목회자도 많다.
“가장 슬픈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가 배반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욕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삶을 연주하면서 우리가 기준음(基準音)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준음이라니.
“예수의 말씀이 기준음이 돼야 한다. 나의 삶을 거기에 맞춰서 조율하는 거다. 기준음을 놓쳤을 때는 ‘아, 내가 어긋났구나’를 알아차리고 다시 기준음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연주를 한다. 나의 욕망을 기준음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성경 속 말씀을 나의 욕망에 맞춰서 조율한다. 주객이 전도된 거다. 거기에는 행복이 없다. ”
글=백성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기석 목사=목회자이자 문학평론가. 감리교 신학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부터 청파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성경에서 길을 찾고, 고전과 문학에서 삶을 되짚는다. 젊은이와 네티즌 사이에서 ‘추천 설교’하면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올라간다. 목사가 목사들의 설교를 비평해 화제가 됐던 『꽉 찬 설교, 속 빈 설교』(정용섭 지음)에도 ‘김기석 목사의 설교’가 올라 있다.

고백만 늘어놓고 행하지 않으니 예수 냄새 안 난단 말 듣지요 - 중앙일보 뉴스

교회, 커피향에 취하다 :: 아이굿뉴스

 

교회, 커피향에 취하다

커피 한 잔에 복음 한 스푼


2011년 07월 15일 (금) 14:21:56
최창민 기자 charming@igoodnews.net

“청년들이 매주 5천 원짜리 커피를 사마시면서 해외 선교사에게 한 달에 1만 원 후원도 안하면 되겠습니까?”
커피 소비문화는 교회에서 종종 과소비나 낭비의 사례로 여겨지곤 한다. 사회에서도 형편에 어울리지 않게 비싸기로 유명한 모 회사 커피를 마시는 여자를 빗대 ‘된장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교회는 커피 소비문화는 활용하기에 따라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커피문화가 교회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최근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대화하고 소통하는 도구로 각광받고 있다. 또 커피를 매개로 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한 식품업체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이 마신 커피는 총 228억 잔. 1인당 452잔을 소비한 셈이다. 자판기 커피, 캔 커피, 테이크아웃 커피 등 종류와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이런 커피 열풍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각 교단에 신고하고 등록한 교회 카페만 8백여 개에 이른다. 등재하지 않고 운영하는 카페를 포함하면 1천개를 넘어선다는 전망도 있다. 그만큼 교회에서 커피문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가운데 카페를 운영하는 교회들이 모여 지난 3월 ‘커피미션 네트워크’를 발족했다. 효율적인 카페 운영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을 넘어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장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최근 교회카페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커피미션 상임대표 윤선주 목사는 “교인들을 위한 편의공간으로 생각되던 것이 이제는 사역적 측면에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교회카페를 통해 젊은 세대는 물론 지역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청교회(문희수 목사)는 교회 담을 허물고 카페를 세웠다. 삼청동 문화거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살려 깔끔하고 세련된 카페를 만들어 최상의 커피를 제공하고 있다. 또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1천여 권의 책을 비치해 놓고 있다.
대학로에 위치한 동숭교회(서정오 목사)에서 운영하는 카페 ‘에쯔’는 지역주민에게도 인기가 높다. 카페 공간을 활용해 CCM 공연, 기독교 가치관을 담은 영화 상영, 기독교 저자 초청 토론은 물론 각종 전시회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카페의 기능을 넘어 기독교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카페가 무조건 지역 주민들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때로 ‘교회가 돈벌이 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최근 강북의 모 교회는 교회카페 운영 수익금이 담임목사 개인 통장으로 들어가 논란이 됐다.
이에 대해 윤선주 목사는 “합법적으로 세금을 내면서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사회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자칫 세금 폭탄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윤 목사는 “교회카페의 수익금을 교회 예산이 아닌 제3의 기관에 기부하는 등 분명한 목적과 정당성을 보여주면 교인과 지역사회에서도 환영받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교회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에 복음을 담을 수도 있다. 제3세계 선교의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커피 무역에 비즈니스 선교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슬람권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를 통해 커피를 사오면, 선교사가 그 지역에 정착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고 커피 값을 낮추는 공정무역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아대책도 지난 12일 사회적기업 ‘행복한나눔’을 설립하고 공정무역 카페 1호점 ‘비마이프렌드(Be My Friend)’ 운영을 시작했다. 이 카페는 공정무역 커피만 판매하는 브랜드로, 지난 2009년부터 매년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 커피 농가로부터 직거래로 커피를 수입, 판매하고 있다.
고은아 행복한나눔 이사장은 “앞으로 기업, 교회를 대상으로 점포 수를 점차 확대해 착한소비 문화를 퍼트리는 지역사회 나눔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커피 현지 생산과 공정무역을 통해 마을 공동체를 세워가는 단체도 있다. 한국YMCA는 지난 2005년부터 동티모르 사메지역 로뚜뚜 마을 300여 가구, 가브라키 마을 120여 가구와 함께 가난한 생산자들에게 공정한 거래 기회를 부여하는 공정무역의 원칙을 가지고 커피 재배 활동을 벌이고 있다.
‘커피’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때로는 교회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교회로 들어온 커피문화가 음료에서 선교의 도구,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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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9일 화요일

미국 실리콘밸리 젊은 부자들, 검소한 생활 화제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미국 실리콘밸리 젊은 부자들, 검소한 생활 화제

  • 연합뉴스

입력 : 2011.07.20 07:52

“공익사업과 창업 등이 더 의미 있는 삶”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젊은 실업가들이 신분상승을 과시할 수 있는 전통적 상징인 스포츠카나 요트, 호화저택 등을 거부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고 있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19일 이에 따르면 2009년 자신이 창업한 개인재정상담 사이트 민트닷컴을 1억7천만달러(한화 1천796억원 상당)에 매각하고 현재 금융소프트웨어기업 인튜이트의 최고 경영자인 아론 패처(30)는 실리콘밸리 내 팔로알토 지역에서 600평방피트(56㎡상당) 크기의 방 1개짜리 소형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파트내 가구라고는 오래된 소파와 TV세트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신발은 물려받은 39년된 갈색 가죽 구두이며 평소 12달러짜리 이발소를 이용한다.
그는 최근 일제 SUV를 2만9천달러에 구입했지만 직전까지 주행 기록이 15만마일(24만1천㎞)인 1996년형 포드 승용차를 몰았다.
하버드대 동창이자 친구인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보다 8일 일찍 태어나 세계에서 가장 젊은 억만장자로 유명한 더스틴 모스코비츠도 대형 저택을 마다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80만달러(한화 8억4천만원 상당)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창업한 비즈니스용 소셜네트워크 소프트웨어업체인 ’아사나’까지 자전거로 출ㆍ퇴근한다. 항공여행 때도 일반석을 이용한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돈은 아끼지 않고 있으며, 저커버그와 마찬가지로 생전에 자신의 부를 모두 희사하겠다고 약속했다.
모스코비츠는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며 “명품 등을 갖고 있는 나를 상상해봤지만 이것들로 인해 보다 의미있는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저커버그도 최근에 700만 달러짜리 집을 구입하기 전까지 월세를 살았으며, 페이스북 관심사 코너에도 ’미니멀니즘(장식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최소한으로 표현한 양식)’.’욕망자제’를 게시해 놓고 있다.
그는 일제 중형 승용차를 이용하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부자’라는 별칭도 있지만 뉴저지주 뉴어크지역의 공립학교를 위해 1억 달러를 내놓았다.
뉴욕대에서 인터넷 기업가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원인 앨리스 머위크는 일각에서 이들의 이 같은 행동이 일반 대중들의 관심 등을 감안해 연출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연기가 아니라면서 이들이 신분상승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찾는 방식이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신문은 또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의 척도는 어떤 기업을 창업했는지에 대한 것이지, 그들이 무엇이 샀는지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클라우드스토리지업체인 드롭박스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드루 휴스턴은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것보다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대중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젊은 부자들, 검소한 생활 화제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년만에 만난 아버지와 딸이 연인 관계로…근친상간으로 철창행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년만에 만난 아버지와 딸이 연인 관계로…근친상간으로 철창행

입력 : 2011.07.19 10:24

▲ 니콜라 예이츠

가족찾기 웹사이트를 통해 20년 간 헤어졌던 딸과 아버지를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앤드루 버틀러(46)와 니콜라 예이츠(26)는 6년 전 '진즈 리유나이티드'(Genes Reunited)라는 웹사이트를 통해 20년만에 아버지와 딸을 만나는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축복받은 만남이 아니었다. 버틀러와 예이츠가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아니라 연인 관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법적인 성관계를 갖다 경찰에 체포돼 다음달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두 명 모두 징역 2년 형에 처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고 영국 데일리 메일이 18일 전했다.
영국 버임엉에 살고 있는 이들이 부녀 간 불법 성관계를 가진 혐의로 체포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버틀러와 예이츠는 4년 전인 2007년에도 같은 혐의로 체포됐었다. 회사원인 예이츠는 당시 18개월 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버틀러는 4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도 두 사람의 관계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예이츠와 버틀러는 2008년부터 다시 사랑을 불태웠다.예이츠가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한 버틀러와 함께 찍은 외설스러운 사진을 그녀의 여동생 나탈리(19)가 발견해 엄마인 카트리나에게 보여주면서 이들의 관계는 들통났다. 카트리나는 예이츠가 버틀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아야 했다. 버틀러가 카트리나의 전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이츠를 낳은 뒤 버틀러와 헤어졌고 이후 현재의 남편을 만나 다시 가정을 꾸린 상태였다.
카트리나의 신고로 결국 예이츠와 버틀러는 지난해 9월 경찰에 체포됐다. 예이츠는 법원에서 둘 사이의 관계를 모두 시인했다. 그녀는 버틀러를 처음 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으며 이러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예이츠와 버틀러의 관계는 '유전적 성적 이끌림'(Genetic Sexual Attraction) 현상으로 설명된다. 부모-자식의 관계나 남매 관계더라도 아주 어린 시절 헤어져 오래 만나지 못하다가 성인이 된 후 처음 만나게 되면 상대방에게 성적으로 큰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을 경우 상대방에게 성적 파트너로서 매력을 느끼는 GSA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것이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깨뜨리고 근친상간을 가져오는 GSA 현상을 부르는 것이다.

20년만에 만난 아버지와 딸이 연인 관계로…근친상간으로 철창행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7월 13일 수요일

"부모 모시는 문제로 파경", 한 주부의 글 인터넷 달구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부모 모시는 문제로 파경", 한 주부의 글 인터넷 달구다

입력 : 2011.07.12 21:39 / 수정 : 2011.07.13 09:42

▲ 출처=조선일보DB
양가 부모 부양 문제로 남편과 갈등을 빚은 뒤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한 주부가 올린 글이 온라인 공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과거 거동이 불편해진 시어머니를 함께 모시자는 남편의 요구를 거부한 지 2년 만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 1년 뒤 이번에는 자신의 친정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친정 어머니가 홀로 남게 돼 남편에게 모시자고 요구했으나 남편이 거친 욕설과 함께 이를 거부해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4월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제가 벌을 받는 것일까요? 남편과의 이혼이 힘겹습니다…’란 제목으로 올라온 이 글은 원본 글만 조회 수가 16만 건이 넘었고, 이후 최근까지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로 옮겨지며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이 글을 읽은 네티즌 사이에서는 “너무나 극적이어서 꾸며낸 이야기 같다”는 의심도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내용이 구체적이고 심리 표현 등이 사실적이란 점에서 진실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댓글을 올리고 있다.
글에 대한 대체적인 반응은 ‘분노’와 ‘비난’. 그러나 일부 네티즌들은 이 여성을 비난하면서도 “나를 돌이켜 보게 된다”는 반응도 보이고 있다. 또 부모 부양에 대한 전통적 관념이 퇴색돼가는 현 세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평가도 나온다.
아래는 해당 게시글 전문(全文).
“저 이제 남편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니 준비라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요구를 한다는게 맞겠네요. 남편은 계속 비웃으면서 "어디 니 맘대로 해봐"라면서 제 마음을 아프게 하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내가 벌을 받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남편과 10년전에 결혼을 했고 아들 2명과 같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살았습니다. 그런데 약 5년여전 문제가 생겼지요. 홀로 사시던 시어머니가 큰 수술을 하신후 거동이 많이 불편해지셨지요. 걷지 못하시는건 아니고 절룩거리며 걷는다고 해야 맞겠네요 당뇨도 있으셔서 병원도 정기적으로 다니셔야 하고요.
그때 남편이 이제 어머니를 모시고 살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암담하더군요
그래서 남편한테 가까운데 어머니 방을 얻어드리고 자주 찾아뵙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그럴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시어머니한테 자식이라곤 제 남편 한명 뿐이니 남편이 그러는 게 이해는 갔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건 너무 싫었지요. 그때 남편과 사네 못사네 그러며서 다투다가 결국 어머니를 모시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후 2년이 지나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때 장례식에서 남편이 얼마나 통곡을 하던지요. "어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 못해서 죄송해요"하고 울던 남편의 그 모습에 죄책감도 느꼈고요.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빨리 세상을 버리실줄 알았으면 모시고 살걸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이 저한테 닥쳤습니다. 제 친정엄마도 몸이 좋지 않으시시지요. 아버지가 엄마와 같이 살면서 어머니를 간호하고 보샬펴 주셨는데 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졸지에 몸이 안좋은 엄마만 남았지요.
그래서 오빠 2명한테 엄마를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새언니들이 모두 엄마를 모시고 살거면 이혼도장부터 찍으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엄마 모실 엄두를 못낸다고 하더군요. 순간 머리가 띵하더군요. 꼭 그때의 내 모습이 생각나서요. 하지만 울 엄마 나를 특히 예뻐하셨어요. 아들인 울 오빠들보다 더를 더 많이 챙겨주시고 교육 시켜 주시고. 나마저 엄마를 외면할 수 없어 남편한테 엄마를 우리가 모시고 살면 안될까라면서 염치는 없지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남편의 대답이 "너 사람 맞냐? 울 어머니 아프시고 자식 나 하나인데도 모시기 싫타고 해놓고 형님들 다 놔두고 우리가 모시자고? 이거 미친× 아냐?" 라는 쌍소리와 함께요. 아마 시어머니 때가 생각난 모양입니다.
네! 남편한테 그런 소리들어도 할말 없지요. 엄마 못 모신다는 새언니들 이야기 듣고 저도 새언니들을 속으로 그렇게 욕했으니까요. 하지만 엄마는 하루 하루 계속 아프시고 누구 하나 곁에서 돌봐 드리는 사람 없이 둘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한테 "그래 나 당신이 보면 나쁜×에 미친× 맞아 하지만 나 울 엄마 저렇게 둘 수 없어 우리 이혼하고 재산분할해"하면서 말했습니다.
남편이 비웃으면서 말하더군요 "너 진짜 미쳐서 분간 못하는구나 내가 왜 이혼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바람을 피웠니 너를 때리기를 했니? 돈을 안벌어 왔니? 이혼 사유가 없는데 내가 이혼을 왜 해?" "정 이혼하고 싶으면 해줄께 대신 니가 일방적으로 원하는 거니까 너는 몸만 나가 재산분할? 웃기고 자빠졌네. 우리 애들 너한테 배울까봐 애들은 내가 키워 너 혼자 나가" 세상에 나하나만을 사랑해주고 우리 가족의 든든한 방패막이 였던 남편의 그런 말을 들으니 하늘이 무너지더군요
아무리 내가 과거에 잘못했어도 나를 이해해주길 바랫는데 나의 욕심이었나 봅니다 주위에 알아보니 저같은 경우에는 이혼소송을 할 수도 없다고하더군요. 소송거리 자체가 안된다나요. 합의 이혼밖에는 없다고 하는데 남편은 내가 재산 포기하고 애들 포기하면 해주겠다는 말만합니다.
저는 정말 어떡해 해야할까요? 합의 이혼이라도 하고 엄마와 같이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남편이 용서하고 이해해줄때까지 빌고 또 빌어야 할까요. 제가 시어머니 외면해서 벌받는 걸까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남편과 끝낼수도 없고 엄마를 모른체 할수도 없고 새언니들와 오빠한테 아무리 말하고 부탁해도 해결책은 나오지 않아요.
정말 하루 하루 눈물만 납니다.”

"부모 모시는 문제로 파경", 한 주부의 글 인터넷 달구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입양한 조카딸 11년간 성추행한 목사에 법원 철퇴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입양한 조카딸 11년간 성추행한 목사에 법원 철퇴

입력 : 2011.07.12 12:42

▲ 출처=조선일보DB
목사가 6살짜리 5촌 조카딸을 입양해 10년 이상 데리고 살면서 상습 성추행하고, 성인이 된 조카딸이 문제를 제기하자 그의 남자친구 등을 찾아다니며 오히려 조카딸을 비방했다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또 성범죄자 신상정보 리스트에도 이름이 올라갔다.
서울중앙지법은 1997년 이종사촌 동생에게서 입양한 5촌 조카딸 A(20)씨를 작년까지 11년간 2~3일에 한 번꼴로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경남 밀양시 모 교회 담임목사 김모(51)씨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했다고 12일 밝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된 추행, 커지면서 빈도·수위 높아져
법원에 따르면, 김 목사의 성추행이 처음 시작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이던 A씨가 감기에 걸린 1999년의 어느 날이었다. 김 목사는 A씨에게 “이불을 푹 덮고 땀을 내면 감기가 낫는다”며 돌봐주는 척하면서 A씨의 바지에 손을 집어넣어 성추행했다. 김 목사를 친아버지로 알았던 A씨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추행은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A씨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김 목사의 이런 행동이 잘못된 것이란 것을 알게 됐지만, 문제를 제기하진 못했다. ‘엄마’(김 목사의 아내)에 비해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김 목사가 더 좋았고, 김 목사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집에서 쫓아낸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또 중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A씨는 수사 기관에서 밝혔다.
김 목사는 A씨가 중학생이 된 뒤로는 1주일에 2~3번씩, 대학생이 된 뒤 작년 말에는 거의 매일 “공부 잘하고 있느냐”, “리포트 준비 잘 돼가느냐” 등의 말을 건네며 다가와 추행을 일삼았다. A씨가 성숙해질수록 추행의 빈도와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김 목사 “A씨가 요구했다. 마지못해 해준 것”
A씨가 김 목사의 성추행을 폭로하게 된 것은 평소 고모로 알고 지내던 B씨가 자신의 친모임을 알게 된 작년 12월.
A씨는 친모에게 그간의 악몽을 털어놨고, 둘은 김 목사를 찾아가 사실을 확인한 뒤 성폭력 신고센터에 신고했다. 당시 김 목사는 모든 것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했다. A씨에게는 “음란도 사랑인 양 살아왔던 죽을죄를 회개한다. 미안하다”는 문자 메시지도 보냈다. A씨 모녀는 김 목사에 대한 신고를 취소하려 했다.
하지만 김 목사의 ‘회개’는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수사기관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A가 자신의 가슴·허벅지 등을 만져 자위행위를 도와달라고 했다. 거절하면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봐 마지못해 해준 것” 등의 궤변을 늘어놨다. A씨의 남자친구와 대학교수까지 찾아가 이런 주장과 함께 “A가 길러준 아버지를 모함한 것”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모녀는 김 목사에 대한 법적 대응을 강행했다.
◆법원 “반인륜적 범행, 뉘우치는 기색도 전혀 없어”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부장 정영훈)는 김 목사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 목사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러 A씨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도 전혀 뉘우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며 “김 목사는 범행을 부인한 것을 넘어 A씨와 그의 생모를 터무니없는 이유로 매도하고 모욕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판부는 김 목사의 자위행위 주장에 대해서도 “A씨가 특별한 정신병적·반사회적 성향을 지닌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할 수 없다”며 “설령 A씨가 요구했다 하더라도 ‘응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어떠한 종교나 신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입양한 조카딸 11년간 성추행한 목사에 법원 철퇴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