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8] 아침이슬
입력 : 2011.07.27 03:07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노래(꽃 피우는 아이)가 저항가요 찍혀
서울 명동 YWCA의 노래모임 '청개구리'에서 김민기를 처음 만난 후 교제가 시작됐다. 종종 같이 술을 마셨다. 일이 끝나면 늘 후배들을 몰고 다니며 술을 마시던 시절이었다. 어울리던 무리에서 내가 제일 돈을 잘 썼다. 학사 주점에서 낙지볶음을 안주로 소주나 막걸리를 마셨다. 김민기도 그 자리에 있었다. 워낙 술을 잘 마셨다. 잘 취하지도 않는 듯했다. 평소에 말이 없는 그는 술을 마셔도 조용했다. 간혹 던지는 말은 특이했다. 과실주를 마실 때면 보통 "과일 향이 나네" "술 맛 좋다"라고 말하기 마련이다. 그는 달랐다. 그에게 "술 맛이 어떠냐"고 물으면 이런 답변이 튀어나왔다. "관능적이군요."
김민기, 마스터 테이프 뺏기고 1집 전량폐기… 세상은 그를 저항 문화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김민기는 서정적이고 해학적인 우리의 '귀한 민기'일 뿐이다
- ▲ 1970년대 초 기독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민기(왼쪽)와 양희은.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로 유명한‘아침이슬’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돈을 빌려 달라고 말했을 때 깜짝 놀랐다. 친구가 군대를 가는데 송별회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의 첫 부탁이었다. 내가 말했다. "그냥 너한테 돈을 줄 수도 있는데, 기왕이면 네가 수고해서 번 돈으로 해주는 게 더 의미 있지 않겠어?" "제가 당장 무슨 수로 돈을 벌어요?"
사실이었다. 그의 노래는 묵직했다. 다방이나 술집에서 부를 만한 노래가 아니었으니, 아르바이트를 하기에도 막막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었다. 바로 이백천 선생님에게 전화했다. 그는 음악평론가이자 세시봉 시절부터 우리의 멘토였다. 당시 동양방송 '명랑백화점' PD로 활동하고 있었다. 회사나 부서 대항으로 게임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에 김민기를 출연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 선생님이 흔쾌히 허락했다. 그의 첫 방송 데뷔 무대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다. 무턱대고 부탁한 나나, 어울리지도 않는데 나간 김민기나, 흔쾌히 허락한 이백천 선생님이나, 셋 모두 대담했다. 어쨌든 그 프로그램에 출연해 김민기는 1500원을 받았다. 막걸리나 백반이 100원도 채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친구 송별회를 무사히 치렀다.
- ▲ 올해 2월 본지와 극단 학전 20주년 기념 인터뷰를 가진 김민기.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이후로 그와의 인연은 드문드문 이어졌으되 그의 인생은 굽이쳤다. 1971년 '아침이슬'을 담은 '김민기 1집'을 낸 그는 이듬해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꽃 피우는 아이'를 불렀다. 화근(禍根)이었다. 이 노래의 애잔한 가사를 당시 정권은 저항적이라고 판단했다. '무궁화 꽃을 피우는 아이/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중략)/꽃은 시들어 땅에 떨어져 꽃피우던 아이도 앓아 누웠네/누가 망쳤을까 아기의 꽃밭/그 누가 다시 또 꽃피우겠나(후략)'라는 내용이었다. 1집 앨범이 전량 폐기됐다. 마스터 테이프도 빼앗겼다.
그때부터 그는 연극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3년엔 김지하가 희곡을 쓴 연극 '금관의 예수' 전국 순회공연에 참여했다. 이듬해 소리굿 '아구'를 내놓고 군에 입대, 1977년 제대했다. 그러곤 그는 몇 년간 서울을 떠나 고향 전북 김제시에 거주했다. 거기서 수확한 감자나 고구마를 보내오곤 했다. 쌀을 보내면서 쌀값을 달라기도 했다. 연극 활동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 즈음으로 기억한다. 어느 하루는 그가 집에 놀러 왔다. 함께 술을 마셨다. 당연히 집에서 자고 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저녁 10시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5000원만 달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어디 가는데?" "탄광이요. 청량리에서 태백 가는 기차를 타야 돼요." "거긴 왜?" "한 석 달 정도 있으면서 일하려고요."
후에 알았다. 태백 탄광에선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사회 운동가로 보이는 김민기가 그들 탄광에서 일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태백을 떠나 충남 보령 탄광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여러 달 광부들과 생활했다.
그렇게 훌쩍 떠나곤 다시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불쑥 나타났다. 김민기의 성격이 그랬다. 서울 대학로의 '학전' 대표로 자리 잡고 나서야 우리는 종종 만났다. 그리고 지난 3월 30일 송창식과 윤형주, 김세환, 나, 조영남, 양희은 등이 모두 학전소극장에 모였다. 그의 환갑 생일과 학전 개관 20주년을 기념한 자리였다. 일찌감치 "나는 가수가 아니다"고 선언한 그는 그 자리에서도 '봉우리'의 가사를 낭독했을 뿐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세상은 그를 저항 문화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그가 '아침이슬'을 발표한 1970년을 저항 문화의 시작이라 보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내가 아는 김민기는 이와 거리가 멀다. 그는 서정적이고 해학적이다.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견을 주장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귀한 민기'다. 우리 모두 그에게 공연장 하나 지어주는 꿈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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