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5일 금요일

[오늘의 세상] 말라위의 '나이팅게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오늘의 세상] 말라위의 '나이팅게일'

  • 기사

입력 : 2011.02.26 03:01

아프리카 奧地에 '최고 병원' 세운 간호사 백영심씨… 故이태석 신부와 닮은 삶
[21년 전 무작정 아프리카로] "더 어려운 환자들 찾아가자" 마사이族 '소똥 집' 살며 봉사
[병 고쳐주는 '시스터 백'] 500명 사는 마을에 진료소… 소문 나자 하루 100여명 몰려
[병원 지었지만… 자신은 癌에] 대양상선 정유근 회장 쾌척
전 세계 NGO들이 장비 기증… 암투병 중에도 환자 곁으로
"2009년 여름 병원에 한 산모가 급히 실려왔습니다. 세 쌍둥이를 출산했는데 저체중이었던 아이들과 출혈이 심했던 산모가 위독했어요. 인큐베이터가 없어 아이를 둘 곳이 없었는데, 한 간호사가 주도해 플라스틱으로 임시 인큐베이터를 만들어 세 아이를 살려냈습니다. 건강하게 눈을 뜬 산모와 가족은 '예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며 연방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어요."
몇해 전까지만 해도 치료받지 못한 아이들이 하루가 멀다고 죽어나가던 아프리카 말라위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인구 5만명당 의사 1명이라는 열악한 의료 환경을 가진 말라위에서 최고(最高) 시설을 갖춘 '대양누가병원'에서다. 이 병원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말라위의 천사'로 불리는 한국인 간호사 백영심(49)씨다.
▲ 백영심씨 제공

제주도에서 태어난 백씨는 제주여고와 제주간호대를 졸업하고 1984년부터 고려대 부속병원에서 내과 간호사로 일했다.
하지만 더 어려운 환자를 위해 일하고 싶었던 그는 한국의 큰 병원에 머물지 못했다. 의료 선교에 나서기로 작정하고 1990년 28세의 나이에 아프리카 케냐로 갔다. 케냐 마사이 부족에서 소똥으로 집을 짓고 의료 봉사를 하던 그는 1994년 다시 케냐보다 의료 환경이 더 열악한 말라위 치무왈라로 떠났다.
주민 500명이 살고 있던 치무왈라에 도착한 백씨가 맨 먼저 시작한 일은 현지인들 도움을 받아 벽돌을 직접 만들어 약 99㎡(30평) 규모 진료소를 짓는 일이었다. 옥수수 가루로 죽을 만들어 먹을 때도 있었고 고향 생각날 때는 쌀밥을 지었다.
구릉지였던 곳에 진료소가 생기자 하루 100명 이상이 몰렸다. "아침 문을 열기 전부터 와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픈 것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죠."
치무왈라에 병을 고쳐주는 '시스터 백'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다른 마을에서도 진료를 와달라고 요청했다. 2004년 여름 말라위에서 처음 백씨를 본 뒤 한국과 말라위를 오가며 봉사하는 홍민희 을지대 간호학과 외래교수는 "149㎝의 작은 키에 하얀색 가운을 입은 한국 여인은 누구보다 추진력이 강했다"고 했다.
그러나 진료소는 직원과 약품 모두 부족했다.
"5살짜리 어린아이가 엄마 등에 업혀 들어왔습니다. 수술에 필요한 도구도 모자랐고 수혈해 줄 피도 없었어요.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아이는 숨졌죠. 무릎 꿇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저들을 도와줄 수 있는 큰 병원을 지어 달라고요." 백씨는 그때부터 큰 병원 건축을 도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2005년 하반기 어느 날 외래진료를 가기 위해 차를 몰고 있던 백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홍 교수는 "백 간호사가 전화를 끊고 차를 멈추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양상선 정유근 회장이 백씨 소문을 듣고 사재를 털어 현지에 큰 병원을 짓고자 전화한 것이다. 정 회장은 '나중 돈을 벌면 아프리카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고 다짐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말라위 한인 교민을 만나 백씨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2008년 2월, 정 회장의 33억원이 들어간 '대양누가병원'이 말라위 릴롱궤에 완공됐다. 완공식엔 무타리카 말라위 대통령이 참석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80병상으로 시작한 이 병원은 이후 200병상으로 증축됐다.
개원 첫날 이 병원엔 346명의 환자가 몰렸고, 2009년 한 해 1333명의 신생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현지인들은 이 병원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병원 설립 취지를 들은 일본 NGO는 CT 촬영 기계를 기증했고, 한국 정부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를 통해 초음파 의료장비를 줬다. 대만·노르웨이·스코틀랜드 등 여러 나라 NGO 단체도 병원에 힘을 보탰다. 대양상선에서는 지금도 한 달에 최소 1억원 이상 지원한다. 작년 10월엔 병원 옆에 간호대학도 세웠다.
작년 말 한국에 잠시 들렀던 백씨는 최근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건강검진을 통해 '갑상선 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목의 통증은 여전하다고 했다. 치료를 위해 6개월에 한 번씩 한국을 들러야 한다.
목이 아파 크게 말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백씨는 지난 20일 인천공항을 통해 다시 말라위로 떠났다. 공항에서 백씨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의사가 부족합니다. 얼른 다시 돌아가 의과대학 설립 방안을 찾아야겠습니다."
백씨를 보고 아프리카 남(南)수단 톤즈에서 의료·교육봉사 활동을 펼쳐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이태석 신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신부는 작년 1월 48세의 나이로 선종(善終)했다. 이 신부의 활동은 지난해 개봉된 다큐 영화 '울지마 톤즈'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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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사진이냐 연극이냐"… 세계가 깜짝 놀란 월셋방 사진작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Why] "사진이냐 연극이냐"… 세계가 깜짝 놀란 월셋방 사진작가

입력 : 2011.02.26 03:04 / 수정 : 2011.02.26 14:46

잘나가던 건축학도서 실험 작가로… 쉰스터 "배고파도 꿈은 크다"

'쉰스터'(본명 신재희·32)는 서울 보문역 근처에 산다. 어른 한명 들어가면 꽉 찰 7평 월셋방에, 자기만의 맛집 5곳을 돌며 매 끼니를 해결하는 것만 봐선 영락없이 불쌍한 청춘 같지만 그는 세계가 주목하는 실험적 사진작가다. 쉰스터는 작년 7월 세계적인 공모전 '포맷(Format)'에서 최고상 '트로이카 익스포저 어워드(Troika Exposure Award)'를 탔다.

그의 작품은 카메라를 고정한 뒤 행인 수백명을 촬영해 편집한 '스트리트 드라마' 시리즈였다. "작가가 고른 배우들이 같은 시간에 있었던 것 같다. 연극처럼 드라마틱하다"는 평을 받은 그의 작품이 3월 4일부터 영국 런던 북쪽 도시 더비에서 전시된다. 최근 발간된 매거진 '포토먼스(Photo Month)' 커버에 실리기도 했다.
이 젊은 예술가의 생은 굴곡투성이다. 의사 부모로부터 독립했고 미국 명문대에서 '돈방석' 같은 자격증을 손에 넣기 1년 전 자진포기했고 팔다리가 굳었는데도 군에 자원해 분쟁지 동티모르까지 다녀왔다. 쉰스터 종횡기(縱橫記)다.

▲ 쉰스터

이탈
10·26사태 1주일 전 세상 빛을 본 쉰스터의 삶은 1994년까지 평탄했다. 울산에서 공부 잘하고 서예·미술상(賞)을 휩쓸던 그가 중학생 때 갑자기 부모에게 선언했다. "미국에 갈래. 예술가가 되고 싶거든. 한국선 공부만 해야 되잖아."
미국에 간 그는 펜실베이니아 힐스쿨, 뉴저지 로렌스 빌고(高)를 거쳐 '남부의 하버드'라는 라이스대(大) 5년제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부모는 잘나가는 아들을 보고 안도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건축에 염증을 느끼고 만 것이다.
쉰스터의 변(辯)이다. "미켈란젤로가 되려 했는데 지금은 그런 순수건축의 시대가 아닌 걸 알았어요. 제 구상이 유치하게 보일 것 같았고 자격증에 안주하는 것도 싫었고요.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설계를 교수들은 칭찬했지만."
4년만 마치고 귀국하려 하자 부모는 펄쩍 뛰었지만 쉰스터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전 유전자가 달라요, 돌연변이입니다!" 건축은 자길 포기한 쉰스터를 놔두지 않았다. 목공작업 중 다친 오른쪽 어깨의 후유증이 다리까지 미쳤다.
순례
그 몸으로 그는 2001년 3사관학교 기간병이 됐다. 그러곤 상록수부대 7진으로 동티모르에 갔다. 왜? "군에 가는 건 예술가의 자존심이랄까, 인간 진정성의 문제지요. 동티모르는 더운 데 가면 몸이 좀 풀릴까 해서 선택한 거고요."
거기서 예술을 향한 열정이 살아났다. "동티모르에서 부대 홍보영상을 만들었는데 호평받았어요. 한국에서 가져간 컴퓨터까지 동원해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지요. 이후 여러 분야를 기웃대다 2004년 손에 넣은 디카에 푹 빠졌지요."
그는 "카메라를 처음 잡은 순간부터 이게 내 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미국유학을 꿈꾸는 고교생들의 포트폴리오 촬영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매일 매일이 즐거웠다고 한다. 그의 장비도 놀랍다.
고가의 장비를 과시하는 남들과 달리 캐논 익수스450, G7 같은 '똑딱이'나 550D, 파나소닉 G1 같은 100만원대 미만의 DSLR만 쓰는 것이다. "결과물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걸로도 다 표현할 수 있어요. (작품을 보여주며) 보세요!"

▲ ‘러시 오브 우먼(Rush of Woman)’. 거리에 카메라를 고정한 채 행인들을 촬영한 뒤 합성했다. 아래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은 현대사회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권력을 상징한다. 쓸쓸히 퇴장하는 듯한 위쪽 남성들과 대비된다


재야생활 6년 만인 2010년 그는 뉴욕 포토페스티벌에 참가했다. 5명의 전문가가 작품을 비평해주는 것인데 거기 '귀인(貴人)'이 있었다. 루이스 클레멘츠, 영국 사진계를 주도하는 작가이자 2010대구사진비엔날레 심사위원이었다.
"쉰스터, 영국 '포맷'공모전에 응모해보지?" 그는 한국에 돌아와 1주일치 여비만 마련한 채 무작정 런던으로 가 길거리를 누볐다. 한 작품 완성하는 데 1000프레임 정도가 합성되는 것으로, 그의 사진은 질풍노도 같은 삶과 비슷하다.
"'스트리트 드라마'라는 말처럼 같은 공간을 움직인 사람들을 촬영한 뒤 합치는 겁니다. 아래쪽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과 위쪽 육교에서 쓸쓸히 퇴장하는 남자들은 현대의 여성상위(Rush of Woman)를 표현한 거고요, 이건…."
그에게 '사진 팔아 돈 벌었느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딱 한장 575파운드에 팔렸는데 세금 떼고 손에 쥔 건 167파운드였습니다." "부모에게 손 벌렸느냐"는 질문엔 이리 답했다. "제 유일한 후원자인 학원 선생님이 빌려줬습니다."
또 물었다. '그 돈 갚았느냐'고. "못 갚았다"는 그에게 아사(餓死)한 누구처럼 되겠다고 묻자 이런 답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직 괜찮습니다. 이젠 세계의 거리를 '스트리트 드라마'로 만들 겁니다. 명성과 돈은 자연히 따라오겠죠."

[Why] "사진이냐 연극이냐"… 세계가 깜짝 놀란 월셋방 사진작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2월 17일 목요일

무엇이 이 꽃다운 대학생들을 스러지게 하는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무엇이 이 꽃다운 대학생들을 스러지게 하는가

입력 : 2011.02.18 03:05

2008년 332명 자살…
대출받은 학자금 700만원 갚지 못하자 목매… 학비 없어 연탄불 자살도
공부 이전에 생계 문제… 자취방 난방비 아끼려 보일러 끄고 장갑끼고 자
우유 하나로 하루 버티기도
경기도의 한 대학 3학년 오모(25)씨는 매년 한 학기만 등록해서 다닌다.
시급(時給)이 싼 편의점·호프집·맥주 바 아르바이트를 해서는 반지하 방 월세 20만원과 생활비, 4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 반년은 대학 생활을 하고, 반년은 아르바이트에 매달린다. 그러다 보니 또래들은 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아직도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오씨는 17일 "시급 6000원짜리 토킹 바(talking bar)에서 술 취한 아저씨들과 밤새 얘기해야 할 때는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들어 왈칵 눈물이 솟기도 한다"고 했다. "밥 먹고 학교 다니는 게 이렇게 힘드니 차라리 죽는 게 편하겠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고도 했다. 취업난에 등록금, 생활비 압박에 시달리는 요즘 대학생들에게 오씨의 현실은 남의 일이 아니다. 저소득층이나 지방 출신 대학생들에게 아르바이트는 '생계'와 직결된 문제가 됐다.
서울 명지대 4학년 전모(26)씨는 이번 겨울 자취방에서 지내는 시간을 최소로 줄였다. 난방비 아끼려고 보일러를 아예 꺼 놓았기 때문이다. 따뜻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자취방에서는 장갑까지 끼고 잠을 잔다. 전씨는 "취업 준비에 올인하고 있지만 암울한 미래를 생각하면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보증금 100만원, 월세 23만원짜리 고시촌 단칸방에서 언니와 생활하는 서울대생 이모(23)씨는 "밥값이 아까워 우유 하나 먹고 하루를 버틴 적도 있다"면서 "월세 내려고 친구에게 돈을 빌렸을 때는 너무 창피해서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대학가 하숙촌마다 "누구는 학자금 대출 몇 번 받고 1000만원이 넘는 빚을 졌다더라"는 말이 돌아다닌다. 하루 2~3개씩 아르바이트를 돌다 보면 학점 관리도 쉽지 않다.
생활고에 쫓겨 극한 상황에 몰린 대학생들의 자살도 늘고 있다. 지난 8일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원룸에서는 대학 졸업반 유모(23)씨가 번개탄을 피우고 숨진 채 발견됐다. 방에서는 학자금 대출 관련 서류와 그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장의 즉석 복권이 발견됐다.
작년 11월 대구 서구 비산동 주택에서 대구 모 대학을 휴학 중인 강모(여·21)씨가 목을 매 숨졌다. 강씨는 대출받은 학자금 700만원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원리금 납입이 여러 차례 밀리는 등 심한 경제난을 겪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취직에도 실패한 강씨는 자살 전날에도 어머니를 붙잡고 울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했다고 한다.
17일 경찰청에 따르면 2009년 자살한 대학생은 249명이나 됐다. 정신적 문제가 있는 자살이 78건(31.3%)으로 가장 많았고, 경제 문제도 16건이었다. 2008년에는 전체 대학생 자살자 332명 중 175명(52.7%)이 염세·비관·낙망 등을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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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5일 화요일

[오늘의 세상] "평생 사랑을 말했지만 자식에겐 사랑을 감췄던 그 사람… 아버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오늘의 세상] "평생 사랑을 말했지만 자식에겐 사랑을 감췄던 그 사람… 아버지"

입력 : 2011.02.16 03:00 / 수정 : 2011.02.16 09:03

故 옥한흠 목사 장남 성호씨가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
"어쩌면 아버지는 없었던 것과 같아요. 늘 '빈자리'였습니다. 아버지를 필요로 할 때 존재감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부재(不在)를 부재로 느껴본 적도 없죠. 제가 아버지가 된 뒤로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뿐이고, 아버지는 속으로만 미안해했을 뿐이고…."
지난해 9월 별세한 고(故) 옥한흠 사랑의교회 목사는 한국 개신교계의 거인이었다. 2만여 목사·선교사 제자와 수만 신도들에게 그는 영적인 아버지와 같았다. 정작 그의 맏아들 옥성호(44)씨는 "나에게 아버지는 영원히 실종된 존재"라고 했다. 교회의 부흥을 이끈 그 거인은 집에선 '없는 존재'와 다름없었다. 언제나 일과 세상에 시달리던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그런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장남 옥성호씨가 책을 썼다. 제목은 '아버지, 옥한흠'(도서출판 국제제자훈련원).
밖에선 '큰 존재'… 가족에겐 '없는 존재'
성호씨가 아버지를 또렷이 기억하는 순간은 3년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아버지가 돌아온 때. 초등생 3형제는 어머니와 경남 진영에서 살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서먹해 '충성!'이라고 거수경례를 했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씻자"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시골집 앞마당 수돗가에서 어린 아들들을 씻겨줬다. 중학생이 된 성호가 감기를 앓고 있을 때, 아버지는 방에 들어와 젖은 수건을 몰래 널어주었다. 그가 기억하는 단 두 번의 '애정 표현', 그것으로 전부였다.
▲ 고(故) 옥한흠 목사의 사진 앞에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남 성호씨. 그는“아버지는 저희 형제들 학교 졸업식 때도 오지 않을 정도로 항상 교회와 신도가 가족보다 먼저였다”며“가족사진도 1998년에 촬영한 것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미국서 공부한 아버지가 택한 건 고통스러운 교회 개척의 길이었다. "월급 목사로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제자 훈련' 철학을 실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신 거죠. 안정된 생활을 원했던 어머니와 다투기도 많이 했어요. 어머니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가 너무 미웠죠." 성호씨는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를 할 때, 남의 집 2층에 세들어 사는 게 부끄럽고 싫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버지에겐 언제나 가족보다 교회와 성도가 먼저였다. 졸업식때도 아버지 얼굴은 보기 힘들었다. 가족사진도 13년 전 1998년 6월에 찍은 것이 마지막이다. 성호씨의 책 표지에 있는 옥 목사와 성호씨 모습 역시 "할아버지와 아빠 둘이 찍은 사진이 없어 섭섭하다"는 성호씨의 딸이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아버지는 '매주 가정 예배를 드리자'는 약속조차 지키지 못했다. 두세 번 하고 말았다. "고2 때, 새로 산 가정예배 교재에서 처음 재미를 느끼고 늦게 귀가하신 아버지 뒤를 쫓아 들어갔을 때, 옷도 벗지 않은 채 이부자리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힘없는 모습을 봤어요." 더 이상 가정예배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옥 목사는 생전 세 아들에게 줄곧 "너희가 목사가 되겠다고 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목회자의 자질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았던 아버지는 "너희는 모두 목회자로서 자질도 소명도 부족하다. 행여라도 아버지를 믿고 목회한다는 소리 할 생각 말라"고 했다. "목회자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다. 한국은 목사가 너무 쉽게 되고, 또 너무 많아서 문제다."
2007년 초 성호씨가 세태에 물든 신학을 비판하는 책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내려고 했을 때, 아버지의 말은 이랬다. "너는 왜 그렇게 세상을 삐딱하게 보니? 다른 건 몰라도 내 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사람으로 각인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성호씨는 아버지에게 '내지 않겠다'고 거짓말하고, 몰래 책을 펴냈다. 그러나 그 책이 개신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자 아버지는 마냥 기뻐했다. 아들의 재능을 본 여느 아버지가 그러하듯. 이후 성호씨는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로 두 권을 더 펴냈다.
강철 같기만 하던 아버지는 지난해 3월, 40여년 만에 처음 성호씨에게 눈물을 보였다. 지난해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금메달을 딴 뒤, 식사자리였다. "연아가, 연아가…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겠니. 너무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또 다른 눈물은 병실에서 봤다. 항암 치료차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옆 얼굴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호야, 내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나처럼 재미없게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성호씨는 "아빠 젊을 때 누가 카바레 가서 춤추자고 하면 재밌었을 것 같으세요? 아빠는 평생 자신에게 가장 만족을 주는 삶을 사신 거예요"라며 한참을 달래야 했다. 옥한흠 목사는 "그렇지, 그런 거지?" 하며 그제서야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 가치 널리 알리고 싶어 책 출간"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특허 관련 벤처기업 미국 지사장으로 일하던 성호씨는 미국 생활을 당분간 접고 지난달 귀국했다. "목회자가 될 생각은 없다"는 그는 현재 사랑의교회 출판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 개인이 아니라 목회자 옥한흠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성호씨는 안성의 아버지 묘소를 잘 찾지 않는다. 거기 가면 늘 '빈자리'였던 아버지의 그 '빈자리' 마저 사라졌음을 느끼게 될 것 같아서다.
성호씨의 휴대전화 번호는 옥 목사가 생전에 쓰던 그 번호다. 밖에서는 수만 신도를 이끌었지만 집에서는 한없이 무심했던, 평생 사랑을 설교했지만 자식에겐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던 그 아버지의 번호다.
☞ 옥한흠 목사는…
교회 연합과 갱신 운동을 이끈 개신교계 지도자. 1972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78년 사랑의교회를 개척했다. 그가 주도한 평신도 교육 프로그램 ‘제자훈련’은 ‘제2의 종교개혁’으로 불리며 교계 전반에 확산됐다. 대형 교회들이 세습 논란을 빚던 2003년 정년을 5년 남기고 만 65세에 조기 은퇴해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오늘의 세상] "평생 사랑을 말했지만 자식에겐 사랑을 감췄던 그 사람… 아버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2월 14일 월요일

500만 원 모아 연 '제과점'... 행복한 주부 사장 열 명 | Daum 미디어다음

 

500만 원 모아 연 '제과점'... 행복한 주부 사장 열 명

오마이뉴스 | 입력 2011.02.15 13:39 | 수정 2011.02.15 14:16 | 누가 봤을까? 50대 여성, 부산

[오마이뉴스 오창균 기자]
지난해 말 큰 파장을 일으킨 '쥐식빵' 사건은 한 업주의 양심을 져버린 상행위에 대한 충격과 함께 그 이면에 있던 대형 제과업체들의 무한경쟁에 따른 부작용의 한 단면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제는 동네빵집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만큼 대형 프렌차이즈에 잠식당한 제과시장에서 창업은 도박 만큼이나 위험한 업종이 되었다. 더구나 프렌차이즈 가맹점을 통한 창업에 가맹비와 매장 임대료, 인테리어와 설비를 갖추는 비용을 합치면 수억 원의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은 이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대형 프렌차이즈 제과점의 난립 속에서도 건재함을 유지하고 있는 동네빵집을 특집으로 다룬 어느 주간지에 소개된 '김탁구'들의 성공비결은 정직한 맛과 이웃에 대한 베품 그리고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쓴다는 것이었다. 지난 12일 토요일 이처럼 삼박자를 모두 갖추고 있는 한 제과점을 찾아가 보았다.
분당선 전철을 타고 미금역에서 내려 버스로 서너 정거장을 지나 도착한 곳. 주변에 아파트 단지만 있을뿐, 상가로 보일만한 건물이나 구멍가게도 없어 보이는 한적한 곳이어서 잘못 내린줄 알았다. 조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식당이 있는 건물에 들어서자 제대로 찾아왔음을 보여주는 한 가게 간판이 보였다. 그럼에도 주변의 정황으로 보아 상권이 보장될 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의구심을 쉽게 버리지 못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직접 인테리어하고, 학교 선생님께 배우고... 엄마들끼리 연 '제과점'

카페 내부장식도 열 명의 주부들 재능을 살려서 개성있게 꾸몄다.

ⓒ 오창균

며칠 전, 미리 취재요청을 했지만 서로 생각했던 토요일이 달랐던지, 약속을 한 당사자는 해외여행 중이라고 했다. 되돌아 가야 하나 하는 불길한 생각도 잠시, 토요일 근무에 나선 김혜장(51) 대표와 김은영(48)씨, 비번으로 찜질방에 가려고 했다는 신성애(48)씨가 매장으로 나왔다. 원두를 직접 갈아 내린 커피와 쿠키를 맛보면서 가게를 시작하게 된 경위를 묻자 창업을 주도한 신성애씨는 줄곧 일자리가 필요했다고 답했다.
"아이들의 학교(중·고등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알게 된 엄마들끼리 '아이들은 다 컸고, 그냥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일거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서로 통했어요, 그렇게 몇몇 엄마들과 일자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 보니 어떤 엄마가 밥보다 과자 만드는 것을 더 잘 한다는 거예요. 더구나 (아이들) 학교의 베이커리 선생님도 도와주겠다고 해서 매장을 얻고 설비 시설 등을 했어요."
학부모 다섯 명은 의기투합하여 500만 원씩 출자금을 걷어 2500만 원의 창업비용으로 보증금 없는 매장(5평)을 얻고 필요한 설비를 갖추었다. 각자의 재능을 살려 인테리어와 소품도 직접 준비해 지출을 줄였고, 케이크와 쿠키 만드는 기술은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에게 한 달간 배웠다. 창업 준비와 동시에 영업을 하게 됐는데 거기에는 동네 엄마들이 너도나도 사가는 극성을 부린 덕분에 일찍 매장을 열게 된 사연이 있다.

이날 당번근무를 한 김은영(48), 김혜장(51) 대표와 찜질방에 가려다 취재요청을 받고 나온 신성애(48)씨.(왼쪽부터)

ⓒ 오창균

주재료인 밀가루, 우유, 계란, 설탕 등 수급이 가능한 모든 재료는 유기농제품을 사용하며 커피, 코코아 같은 수입품은 공정무역 제품을 사용한다. 일반 재료에 비해서 세 배가 넘는 비용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고 신뢰받는 먹을거리를 만든다는 원칙을 세우고 좋은 재료만을 선택하여 손이 가더라도 일일이 직접 팥앙금을 끓이고 땅콩을 볶는다.
처음 시작할 때는 가족들과 이웃들의 '얼마나 오래가는지 두고보자'는 염려와 비아냥도 있었다. 하지만 매장을 연지 1년 만에 다섯 명의 이웃이 또 합류해 똑같이 500만 원씩 출자하고 매장을 옆으로 더 확장해 카페처럼 내부를 단장하고 동네 사랑방처럼 편하게 드나들 수 있게 만들었다.
실제로 매장에서는 물건을 맡기고 찾아가고 소식을 전해주고 받는 등, 여러가지 소통이 이뤄지고 있었다. 또 편하게 찾아와 담소를 나누고 뒷풀이를 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단다. 어느덧 가게는 때때로 영업마감 시간인 오후 10시를 넘겨 자정까지 아줌마들의 수다가 길어져도 불편하지 않은 곳이 되었다.
지역사회 '소통과 연대'를 꿈꾸는 아줌마 사장들

케이크와 쿠키에 들어가는 재료는 국내산 유기농과 공정무역으로 들어온 재료만을 사용한다.

ⓒ 오창균

가게에서는 매주 1회,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쿠키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쿠킹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음식을 팔아야 하는 손님에게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격이지만, 지역에서 소통과 연대를 다지는 다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단다.
또한, 지역의 소외계층을 돌보는 일에도 참여해 생일 때마다 케이크를 보내주고 있으며 좋은 일에는 무료로 바자회나 일일찻집 학생들의 실습공간으로 내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역에서 협동을 통한 공동체를 위한 일들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으며, 지금도 수익이 많든 적든 일정금액으로 돌봄단체를 후원하고 있단다.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이제는 열 명의 동업자가 모였으니 삐걱거림이 생기면 어떻게 해소를 할까?
"처음에는 많은 의견충돌이 있었죠. 테이블 위치에 대해서도, 식사는 공금으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여러 사소한 것들의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서로 일을 못하겠다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런 과정속에서 상대를 알게 되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도 되면서 서로를 배려하는 기술도 생긴 것 같아요."

조리실 내부는 외부에서 볼수 있게 되어 있으며 매우 청결했다.

ⓒ 오창균

크지 않은 매장에서 열 명이 조별로 주 2~3일씩 번갈아 순환식 근무를 하기 때문에 반죽을 치대고 재료를 직접 조리하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충분한 휴식시간이 있어서 항상 즐겁게 웃으면서 일한다고 한다. 입소문을 통해 멀리서도 찾아오는 손님이 생겨나는 등 매출은 꾸준히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다행이다. 가장 많은 지출을 차지하는 (유기농)재료비가 올라가는 것이 큰 걱정거리지만 판매가격에 재료 인상분을 반영하는 것은 조심스럽다고 한다.
창업한지 1년 6개월, 월 매출 700~800만 원에서 재료비와 운영비를 제하고 나면 각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직은 적은 몫이지만 이웃들에게 좋은 먹을거리와 즐거운 공간을 제공한다는 기쁨과 함께 자신들이 만든 일자리에 대한 애착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 듯 했다. 이들은 오늘도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란 희망으로 행복을 담은 쿠키를 굽는다.

500만 원 모아 연 '제과점'... 행복한 주부 사장 열 명 | Daum 미디어다음

2011년 2월 13일 일요일

北 기독인 최대 50만명 7만여명은 수용소 수감… 경제난 가속화 속 일부 주민 기독교에 관심 보이기도 | Daum 미디어다음

北 기독인 최대 50만명 7만여명은 수용소 수감… 경제난 가속화 속 일부 주민 기독교에 관심 보이기도 Daum 미디어다음
北 기독인 최대 50만명 7만여명은 수용소 수감… 경제난 가속화 속 일부 주민 기독교에 관심 보이기도
국민일보 | 입력 2011.02.13 19:21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강원





북한 선교단체들은 기독교인으로 발각되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북한의 교인 수가 적게는 20만명, 많게는 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예상했다.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이 중국 장백교회에 매달 헌금을 내고 있다는 대북 단파 라디오 '열린북한방송'의 최근 보도가 이를 입증한다고 이들 단체는 밝혔다.

국제 선교단체인 '오픈 도어스'는 "북한에 40만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5만에서 7만5000명이 신앙을 이유로 체포돼 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탈북민들이 출석하는 부산 장대현교회 임창호 목사는 "북한 주민들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가문의 신격화에 대한 허구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며 "최근 장백교회에 북한 돈 헌금이 들어오는 점을 볼 때 북한 주민들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마음속에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그들의 세상을 보는 눈 또한 바뀌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열린북한방송은 최근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이 중국 장백교회에 헌금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장백교회가 위치한 장백현은 북한 혜산시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국경도시로 북한 주민들이 탈북이나 무역 등을 하기 위해 오가는 길목이다. 방송은 "매월 말일이 되면 누군가 어김없이 장백교회 헌금함 앞에 10여개의 봉투를 놓고 가는데 그 안에 북한 돈이 들어 있다"고 전했다.

이 교회에 따르면 헌금 봉투를 놓고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2010년 11월부터 매달 헌금을 내고 있다. 헌금 봉투는 남한의 우편봉투 크기와 같은 것으로 액수는 북한 돈으로 몇 천∼몇 만원(대략 1∼30달러), 매번 다르지만 비교적 깨끗한 북한 화폐들이 들어 있다. 그래서 이 교회 담임목사는 헌금을 잘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북한 돈이 든 헌금봉투를 보여주며 "살기 힘든 북한 주민들도 성금을 보내 오고 있다"고 소개까지 한다는 것이다.

방송은 "10여개 봉투의 액수가 서로 달라 여러 사람들이 보내는 것이며 국경을 드나드는 사람이 헌금을 모아 전달하는 것 같다"며 "아마 이 헌금을 전달하는 사람은 북한 지하교회에 연결된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 "화폐개혁 이후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 부자의 기만 정치술에 당해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자 더는 북한 정치를 믿으려고 하지 않고 있다"며 "최근에는 일부 주민들 가운데 하나님이라도 믿어 보려는 종교관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인류가 축적한 정보량과 인간 DNA 비교하니 :: 네이버 뉴스

인류가 축적한 정보량과 인간 DNA 비교하니 :: 네이버 뉴스

인류가 축적한 정보량과 인간 DNA 비교하니
기사입력 2011-02-12 14:21 최종수정 2011-02-12 18:51
사람이 USB드라이브, CD,칩이 들어간 신용카드, 비디오카세트,도서관의 책, 바빌로니아 점토판을 모두 모으면 얼마만한 정보량이 될까?

11일자 사이언스지에 게재된 데이터를 특집을 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약 295 엑사바이트의 저장용량이 된다. 이 논문을 쓴 사우스캘리포니아대 마틴 힐버트와 프리슬리 로페즈연구원의 연구결과다.

그렇다면 인간이 현재 얼마나 많은 양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을까?

이들은 이에 대한 결론도 함께 내놓았다. 이들의 결론에 따르면 그 숫자는 크다.


▲ 데이터저장능력에 대한 특집을 실은 사이언스지 2월11일자 표지의 부분.

1엑사바이트는 1000페타바이트이고, 1페타바이트는 1000테라바이트이며, 1테라바이트는 오늘날 데스크톱 PC에 저장되는 데이터 양에 해당한다.

그리고 물론 그 숫자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연구결과 일반 목적의 컴퓨터 저장능력은 매년 58%씩 성장한다.

그러나 훨씬 더 크게 성장하는 숫자도 있다. 그리고 이들 연구원은 그만큼의 정보량 또한 소멸되고 있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인류가 2007년에는 약 1.9제타바이트의 정보를 TV쇼나 GPS위성데이터로부터 받았다고 말한다. 제타바이트는 1000엑사바이트이다.

그리고 비록 인류가 인상적인 하드디스크드라이브의 집합들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이 이룬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인류가 만들어 낸 저장 능력과 지금까지 축전한 데이터 총량도 인간 DNA가 가진 저장능력에 비하면 하찮다. 295엑사바이트 정보량은 DNA의 저장 능력의 10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Why] 늘푸른의료재단 이사장 박성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Why] 늘푸른의료재단 이사장 박성민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Why] 늘푸른의료재단 이사장 박성민분당=정성진 기자 sjchung@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100자평(5) 페이스북 트위터 미투데이 요즘 싸이 공감 잇글링 조선블로그 MSN 메신저스크랩메일인쇄입력 : 2011.02.12 03:02 / 수정 : 2011.02.13 10:19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장판을 뜯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던 아버지… 7년 투병 끝에 세상을 떴다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10여년이 지난 후그는 집안 재산을 털어 재활병원과 실버타운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노인 돌봄의 선구자' 라 부른다
박성민(45)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1년, 58세 아버지가 쓰러졌다. 당뇨 등이 누적된 뇌졸중이었다.

7남매의 막내인 박성민은 투병하는 아버지를 지켜봤다. 주유소를 여럿 운영하고 괜찮은 부동산도 갖고 있던 사업가 아버지였지만, 뇌졸중 앞에서 돈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병원은 급한 치료를 끝낸 뒤 퇴원하라고 재촉했고, 몸이 부분 부분 마비된 아버지를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할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는 서울 서초구의 집에서 지냈지만, 정확히 말해 병과 싸운 것은 아니었다. 싸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성민은 밤마다 안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버지와 그의 수족이 돼야 했던 어머니의 아픔과 괴로움이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 막내를 특히 귀여워했던 아버지를 위해, 박성민은 의사가 되기로 했다. 재수 끝에 가톨릭대 의대를 간 막내 박성민이 의사가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아버지는 투병한 지 7년째인 1987년 세상을 떠났다.

30년이 지난 지금 박성민은 그의 아버지와 비슷한 노인들이 재활을 위해 땀흘리는 늘푸른의료재단을 운영하는 이사장이다. 재단은 보바스기념병원을 2002년 열었지만, 지금은 병원만 있는 게 아니다. 이곳 대지 약 12만여㎡(3만6000여평)에는 24개 건물에 병원, 요양원, 시니어타운(실버타운)이 펼쳐져 있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CCRC(Continuing Care Retirement Community)다. 의료계에서는 '연속 케어형 노인 주거 및 의료 복합시설'로 해석된다(이하 복합시설). 이 분야의 국내 선구자가 바로 박성민이다. 1000명이 넘는 노인들이 이곳에서 의료진의 서비스를 받으며 인생의 후반을 보내고 있다.

지난 8일 경기 분당 금곡동 야산에 걸쳐 있는 단지에서 박성민을 만났다.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타고 톨게이트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큰 건물 단지가 이곳이다.



▲ 보바스기념병원에서 가장 활기찬 곳은 성인재활센터다. 치료사와 노인환자들이 일대일로 만나 함께 땀 흘리며 치료를 하기 때문이다. 8일 오후 재활센터에서 박성민 이사장(가운데)이 치료를 하는 환자와 치료사 사이에서 밝게 웃고 있다. / 이덕훈 기자 dhlee@chosun.com―아버지의 병이 본인에게 강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남았습니까.

"정확히 트라우마는 아니지만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정말 입원이 필요한 때는 쓰러진 다음이었는데, 병원은 뭘 해줄 수 없었죠. 마지막에 아버지는 괴로워도 괴로운 의사표현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장판까지 뜯으시더군요."

―그런데 의사가 아니라 재단 운영자가 되셨네요.

"가톨릭 의대 신경과 교수였죠. 아버지 때문에 신경과를 갔고. 그러나 관두고 병원을 세운 겁니다."

―계기가 있었습니까.

아버지 생각에… 의대서 신경과 전공

"다른 나라는 어떻게 쓰러진 환자를 돌보고 치료할까 항상 궁금증을 갖고 찾아다녔죠. 그러던 1990년대 말쯤 일본 오사카에 있는 보바스기념병원을 견학하다가 뒤통수를 한대 맞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 뇌졸중 환자는 발병 뒤 3개월이 지나면 재활이 소용없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거기 의사들은 '못 걷던 뇌졸중 환자를 걷게 한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아는 상식을 얘기하니 '니가 치료를 잘못한 건데, 왜 병 탓을 하느냐'라고 면박을 줬습니다. 그 뒤 보바스치료에 대해 더 공부하고 그걸 한국에 도입하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한국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까.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도되지는 않았죠. 보바스(Bobath)부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유태인들이었습니다. 남편은 신경과학자, 아내는 치료사였어요. 뇌졸중에 걸린 성인이나 어린이 뇌성마비 환자를 치료하는 법을 개발했는데 효과가 좋았습니다. 이 치료는 환자 한 명 한 명에 맞춰 신경을 재활시키는 1대 1 치료를 합니다. 마사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물리치료가 대표적이죠. 영국에 보바스재단이 있는데 제가 가서 취지를 이야기하고 설득을 해서 국내 사용권을 받았습니다. 매년 제대로 운영하는지 본부 재단으로부터 감사를 받죠. 전 세계에 보바스 병원은 우리를 포함해 5개 밖에 없습니다."

―땅이나 건물은 무슨 돈으로 사신 겁니까.

"아버지가 몸이 멀쩡할 때 모아놓으신 재산이 있었죠. 돌아가신지 한참 됐지만 남매끼리 나누지도 않았어요. 다들 어느 정도 성공해서 그다지 필요도 없고, 세금 문제도 있고요. 그냥 집안의 재산으로 남아있었죠. 제가 가족들에게 이런 병원을 하겠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많이 반대했어요. 특히 스무살 차이 나는 큰 형님은 '그냥 교수를 하지 왜 나오려고 하느냐'고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을 자꾸 얘기해 설득했죠. 아버지 이야기도 하면서. 가족들은 지금도 많이 도와줍니다."

―투자한 돈이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

"여기 2000년대 초기에 이곳 땅을 살 때만 해도 주변에 건물 하나 없었어요. 버스 정류장도 없었습니다. 싸게 샀죠. 어차피 여기는 병원밖에 안되니 다른 용도로는 가치가 없을 거에요. 지금까지 개인돈, 집안돈이 500억~600억원 정도 들어갔을 겁니다. 이걸 바탕으로 병원을 세우고 돌린 뒤에는 집안 재산을 담보로 빚을 지거나 형님들 사업체에서 기부를 받거나 했기 때문에, 실제 투입된 금액은 더 많죠."

뇌졸중 환자 ‘보바스 치료’ 도입

―병원에서 돈을 많이 버신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병원은 비영리법인이니까요, 부동산 개발이나 관리, 의료사업을 하는 회사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죠. 번 돈은 대부분 병원에 넣습니다. 병원은 적자거나 손익분기점을 딱 맞추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환자는 많습니까.

"노인전문 병원인 보바스기념병원의 경우 8년동안 단 한번도 병실이 비었던 적이 없습니다. 현재도 450개 병상이 있는데요, 500명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못 들어오고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병원을 벤치마킹 한다는 분들만 8000분 정도 오셨습니다. 건축과 학생들도 오더라구요. 다른 병원분들에게도 다 오픈합니다. 이런 병원이 많이 생겨야 노인분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하니까, 베끼고 싶으시면 똑같이 만들라, 이런 거죠."

―자신이 있으시네요.

"보바스기념병원에 환자가 450명인데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가 150명입니다. 아마 세계에서도 이렇게 치료사 많은 병원 없을 거에요. 월급을 더 많이 주는 것은 아닌데, 치료사 채용 경쟁률이 10대 1입니다. 여기서 팀장하면 딴 데 가서 실장 한대요. 장기요양보험 제도 만들 때 정부에서도 우리 병원을 세밀히 연구해보고 갔습니다. 종합병원에서 치매환자 관련 논문을 쓸 때도 우리 병원과 많이 제휴합니다. 대학병원에는 입원한 치매 환자가 없으니까요."

이 병원이 다른 요양병원과 확연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곳은 1층과 2층에 있는 성인재활센터다. 100여명의 치료사들이 같은 수의 노인환자들의 마사지하고, 부축을 하고, 특정 근육을 풀어주면서 땀을 흘리고 있다. 치료사 한 명이 노인 한 명을 담당한다. 일부 치료사들은 얼굴이 번쩍거린다. 땀 때문이다. 이 센터가 보바스치료의 핵심이다. 이들은 치료사 국가자격시험을 본 뒤, 이 병원에 있는 보바스치료협회로부터 3개월 이상 배운뒤 보바스치료사 자격증을 받은 사람들이다.

―걸어 나가시는 환자가 있습니까.

"꽤 많습니다. 100% 옛날로 완전히 돌아간다고는 얘기 못해도 말이죠. 의식은 대소변을 가릴 수 있지만 걷지 못해 대소변을 못 가리던 분들이 다시 걷고 대소변을 혼자 처리하시게 된 경우는 정말 많죠."

―부자만 오는 병원이라는 소문도 있더군요.

"이름이 희한하고 건물이 좋아보이니까 그런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제가 3000억원 유산을 받아 취미로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1000억원으로 병원 짓고 1000억원으로는 놀고, 1000억원은 다른 투자를 한다나요. 유산 받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죠. 저도 그렇게 돈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실제로 비용이 비싼 거 아닙니까.

"환자분마다 다르지만, 요양병원 한달 입원료가 간병인 비용까지 포함해 100만원대 후반에서 200만원 초반까지 나옵니다. 다른 요양병원보다 많으면 20~30% 비싸다고 하던데, 치료 수준을 생각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종합병원과 비교하면 3분의 1도 안되고요."

환자 450명에 치료사 150명

―주거용으로 분양하는 실버타운은 비싸잖아요.

"저는 실버타운이라는 말을 안 쓰고 시니어타운이라는 말을 씁니다. 실버라고 하면 노인분들이 별로 안 좋아하시더라구요. 한 평당 약 2000만원 정도에 입주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는 분들이 들어오는 곳은 아니죠. 다만 강남이나 분당 집값보다는 싸다고 말씀드릴 수 있죠. 2009년부터 분양했는데, 380여 세대 중에 85%는 입주했어요."

―어린이병원도 잘 됩니까.

"어린이병원은 항상 적자입니다. 선천적인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치료하는 병원입니다. 보바스치료가 이런 아이들에게도 효과가 좋거든요.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요. 적자 조금 보는 것은 상관 안 합니다."

―영리법인에서 그렇게 돈이 많이 남습니까.

"순이익 기준으로 10% 남을까 싶은데요.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한 회사가 아니고 병원 운영하기 위한 회사입니다."

―그러면 운영이 힘들텐데요.

"재단이나 병원에 돈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하기도 합니다. 건물을 싸게 지어주는 형태로 지원할 수도 있죠. 이것은 우리나라가 큰 병원은 비영리법인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기도 해요. 그래서 많은 병원들이 영리 법인을 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보바스기념병원 1층은 호스피스 병동이다. 현대의학으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환자들이 마지막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주로 말기암 환자가 많다. 치료보다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완화해주는 것이 목적이다. 박성민은 "노인들은 용도가 폐기된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를 키우고 우리 사회를 일으킨 분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사회의 성숙 정도를 알려주는 척도인지도 모른다.

―복합시설이 왜 좋은 겁니까.

"시니어타운에서 사는 분의 예를 들어볼게요. 일반 아파트에 살면 병원 가다가 낙상해 다칩니다. 여기서는 전화 한 통에 병원직원들이 와서 카트에 태워 바로 옆 병원으로 모셔가요. 그러다가 정말 아프면 요양병원에 입원합니다. 다시 나아지면 시니어타운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살아야 한다면, 요양원에 갑니다. 이게 다 한 단지에 있죠. 병원에는 모든 병력(病歷)이 다 있으니 검사를 반복해 할 필요도 없죠."

―돈 많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 아닌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복합시설은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병원, 주거단지, 요양원이 한 곳에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얏트 호텔도 미국에서 20곳의 복합시설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팔로알토에 있는 단지는 스탠포드 대학 안에 있어요. 병원은 스탠포드 병원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땅이 많아야 한다든지 돈이 많아야 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에서 다 해줄 수 있나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노인들에게 영구 임대 주택만 주는 것은, 노인에게 감옥을 주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는 주택의 수를 줄여 함께 살게 하더라도 식당을 지어주고 밥 지어줄 사람을 주고, 병원을 연계해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돈의 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밥의 질이 낮고 의약품의 단가가 낮을지는 몰라도, 그런 시스템 자체가 중요하지 돈의 많고 작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되겠습니까.

"신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입니다. 인력으로 보면, 40~50년 동안 가장 공부 잘하는 고교생들이 의사가 돼 왔어요. 병원 시설도 세계 최고지요. 그래서 아주 어려운 병도 고치잖아요. 이런데 못 할 이유가 없죠."

―의료 수준이 높으니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바탕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전 사회적으로 큐어(치료·cure)만큼 케어(돌봄·care)가 중요해지는 시점에 왔다는 걸 알고 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노인요양병원 병상수가 10만개를 넘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비교는 안되겠지만 3차 의료기관의 병상수가 4만 병상이 안되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는 고령화 때문입니다."

―고령화는 식상한 주제 아닌가요.

"현실이죠. 지금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분들이 은퇴하고 요양병원에도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게 뭘 뜻할까요. 2015년이면 지금보다 건강보험 예산이 10조원 더 필요하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전환을 해야죠. 복합시설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 합니다. 발상 전환만 하면 그게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돈 많은 사람이 오는 곳 아니다”

―기회라면.

"해외 진출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복합시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의료 수준 높으니까 거기다가 복합시설을 만들어본 경험만 축적되면, 의료 서비스와 시스템까지 다 수출할 수 있는 거죠."

―이사장님은 지금 하실 수 있겠네요.

"시도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인도네시아 쪽과 얘기하고 있어요. 인력부터 시스템까지 다 넣는 겁니다."

병원 입구에는 'OMNIBUS OMNIA'라는 말이 써 있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을 뜻하는 라틴어로, 헌신(獻身)을 뜻하는 가톨릭용어다. 이윤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의료사업을 하는 그에게 어울릴만한 모토다. 그러나 박성민은 종교가 없다. 작고 마른 그의 얼굴은 영적(靈的)이기보다는 이성적(理性的)이다. "수학 잘했었냐"고 물으니, "학력고사에서는 하나도 안 틀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욕심은 있다. 의료사업가로서 성공하고 싶다고 했다. 병만 고치는 소의(小醫), 사람만 고치는 중의(中醫)를 넘어, 사회를 고치는 대의(大醫)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중에 시니어타운에 들어가 살겠습니까.

"시니어 타운에 사는게 앞으로는 문화가 될 거라고 봅니다. 옛날에는 자식이 부양을 했지만 지금은 부양하는 시스템이 안됩니다. 여기 방 하나 잡아야겠죠."

―성공하신 겁니까.

"신발 신었다고 봅니다. 더 많은 병원을 세우고 싶죠. 턱없이 부족하잖아요. 복합시설의 완벽한 모델을 만들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삶의 목표와 도구를 다 주셨네요.

"그렇습니다. 결국 의사와 의료 사업가가 되고 싶게 하셨고 그걸 만들 밑천을 주셨으니까요."

2011년 2월 11일 금요일

[100세 쇼크 축복인가 재앙인가] 청소부 된 교장 선생님… 창업 돕는 부행장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100세 쇼크 축복인가 재앙인가] 청소부 된 교장 선생님… 창업 돕는 부행장님

입력 : 2011.02.12 03:01

[100세 쇼크 축복인가 재앙인가] [14] '100세 시대'의 희망을 찾는다
체면을 버려라…
처음엔 보직 없이 허드렛일 4개월 만에 청소부로 '승진'
방문객들에 가이드 역할도… "일하는 데 귀천이 없는 법"
경험을 살려라…
은퇴한 은행지점장·공장장… 베테랑 경력·노하우로 '창업'
서민들 상대로 컨설팅 해줘… "수익과 보람 두 토끼 잡아"
준비하는 이들에겐 '100세 시대'가 행복하다. '인생 80'에 맞춰진 시간표를 발 빠르게 재설계하며 희망을 키워가는 실험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60대 초반 교장직을 떠난 뒤 '체면'을 버리고 청소부로 변신해 '평생 근로'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고, 50대에 부행장, 지점장, 대기업 임원에서 은퇴하고 경험을 살려 서민 창업과 서민 대출을 도우며 보람을 찾기도 한다.
청소부가 된 교장 선생님
경기도 가평강원도 춘천의 경계에 반달 모양으로 생긴 남이섬. 드라마 '겨울연가'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이 섬에는 매일 아침 8시면 어김없이 빗자루와 집게를 실은 전동차를 몰고 오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신명호(71)씨. 14만평 남이섬 곳곳을 누비며 쓰레기를 치우는 입사 4년차 청소부다. 그는 9년 전 교장이었다.
"지금 건강이라면 여든 (살)이 넘어서도 일할 것 같습니다."
▲ 강원도 남이섬에 설치된‘천사의 날개’모형 앞에서 대학생들에게 이 섬의 명물들을 설명해주고 있는 전직(前職) 교장 선생님 신명호(71)씨. 그는“나이 여든이 돼도 일자리를 통해 멋지게 다시 한번 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신씨가 청소부가 된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2003년 3월 학생 수가 2000여명인 경기도 한 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만 62세에 정년 퇴임한 그는 노후를 놀면서 보내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격증을 따볼까 고민해봤지만, 자격증을 따더라도 예순이 넘은 사람을 뽑아줄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포기했다. 우선 맨발로 뛰어들었다. 집(가평) 근처 골프장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인 직원 동료들과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잡초도 뽑고 벙커 정돈도 했다. 마냥 노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는데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하루 일당 3만5000원은 아쉬웠지만 1년여 만에 그만뒀다. 서너 달 쉬는데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이번엔 동네에서 가까운 제지공장에 도전했다. 폐지를 모아서 다시 재생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40㎏ 뭉치의 폐지를 옮기는 일이 주된 업무였는데 힘이 부대꼈다. 2개월여 만에 그만뒀다.
그러던 중 남이섬을 관리하는 업체에서 정년 80세를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노인 재취업 프로그램이 잘돼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직접 찾아갔다. 연간 300여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개중엔 한류 열풍으로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다 신씨가 익숙한 중고생들도 많았다. 이만하면 일을 하면서도 보람도 있겠다 싶어 도전했다.
처음엔 보직 없이 허드렛일을 했는데, 4개월 만에 청소부로 '승진'했다. 그는 지난 2008년과 2009년엔 100여명의 직원 중 남녀 각 1명씩 뽑는 최우수 사원에 2년 연속 뽑히기도 했다. 늘 웃는 얼굴로 방문객들에게 좋은 가이드 역할까지 해내는 그를 높이 평가해준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청소부 한다면 좀 쑥스럽지 않나요. 남이섬에는 옛 동료 교사나 제자들도 올 텐데요."(기자) "예, 종종 만납니다. 그런데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일에는 귀천이 없는 법입니다. 더구나 100세 시대에는요."(신명호씨)
서민 대출 상담하는 부행장님
'희망도레미'. 소중한 꿈을 한 계단씩 키워가도록 돕는다는 뜻의 이 업체는 서울 충정로2가 한 빌딩의 4층에 있다. 주로 서민층을 상대로 창업하려는 사람들에게 컨설팅을 해주거나 서민금융 전문기관인 '신나는 조합'과 제휴를 맺어 대출 상담에 조언을 해주며, 컨설팅 비용을 받는 곳이다.
하지만 흔히 있는 업체와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전 직원 21명 모두가 은퇴자들이다. 더 놀라운 것은 21명의 면면이다. 전직 은행 부행장, 지점장, 대기업 공장장, 대형 제약사 이사, 고위 공무원…. 하나같이 50대(代) 한창나이에 직장에서 나왔다. 누구보다 낙담했을 법한 이들이 남들의 희망을 키워준다는 이름을 내걸고 기업을 차린 것이다.
저마다 직장에서 베테랑 경력을 갖고 있어 창업과 대출 과정에서 그들의 노하우와 경험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대출해간 업체를 대상으로 창업 후 방문을 통해 경영 노하우도 지도해 준다. 돈 빌려준 뒤 이자 떼먹을까 관리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성공을 돕는 확실한 사후관리(AS)까지 해주는 것이다. 서민들에게 이들의 정보와 지식은 제법 큰 도움이다. 2009년 5월에 문을 열었는데, 벌써 200여곳에 컨설팅을 해줬다.
"자양동에서 반찬가게를 하는 50대 아주머니를 위해 세종대 경영학과 학생들을 불러 마케팅 전략 등을 상의해줬는데, 대박을 터뜨렸죠."(목진호·61·전직 부동산신탁회사 임원)
"도봉구 번동의 소규모 아파트 단지 밀집 지역에서 세탁소를 하는 아주머니에게는, 세탁소가 없는 아파트 단지를 골라 집중 공략하라고 조언해 매출이 확 올랐습니다."(김광열·61·전직 은행지점장)
이들이 뭉치게 된 것은 한 시민단체에서 은퇴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희망도레미를 주도한 한석규 대표(65·전 외환은행 부행장)는 "나이 들어 봉사활동이나 취미생활로 소일할 게 아니라 돈도 벌고 사회에도 도움되는 일을 하자고 뭉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12명이 모였다. 각자 300만원씩 갹출했다. 책임감도 높이고 지속가능 모델을 위해서였다.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해 지금 21명까지 늘어난 것이다.
"은퇴 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정신적인 공황이 더 무섭더라고요. 내가 평생 매달린 지식과 경험을 한순간에 사장(死葬)시켜 버리고 그냥 놀아야 한다는 것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죠. 큰돈 벌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20년 살지 30년 살지 모르는 노후에 '수익과 보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좋은 모델을 만들고 싶습니다." 희망도레미 직원들의 꿈이다

[100세 쇼크 축복인가 재앙인가] 청소부 된 교장 선생님… 창업 돕는 부행장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2월 10일 목요일

돼지 수천마리가 발광…개울 옆에도 그냥 묻었어요: 야후! 미디어 - 세상을 만나는 창

 

돼지 수천마리가 발광…개울 옆에도 그냥 묻었어요"

[프레시안] 2011년 02월 11일(금) 오전 08:48

[살처분 일지] "침출수는 지하수로 들어간다. 여름에 어쩔지…"
[프레시안 윤후덕 민주당 파주지역위원장]
"비닐은 찢어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100kg이 훨씬 넘는 산 돼지 수백, 수천 마리가 안 죽으려고 좁은 구덩이에서 발광을 하는데 비닐이 무슨 수로 남아나겠습니까? 찢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면이 벗겨지고 말지요. 그냥 전후좌우로 침출수가 땅으로 지하수로 빨려 들어가겠지요.…개울 옆인 경우도 있었어요. 여름에 어쩔지 걱정입니다."
한 포클레인 기사가 윤후덕 민주당 파주지역위원장에게 한 말이다. 구제역 확산 속도가 주춤해졌지만 매몰지에서의 2차 오염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매몰 가축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돼지의 경우 생매장을 해 매몰과정에서의 매몰지 훼손이 심각한 상태다. 매몰지도 충분한 검토 없이 결정된 곳이 많다.
파주 지역에서 방역·살처분 자원봉사에 나섰던 윤후덕 위원장이 작성한 일지에 적힌 구제역 발생부터 매몰지 선정, 매몰 작업 과정을 보면 이와 같은 우려가 그대로 드러난다.
군에서도 땅을 내주지 않았고, 주민들은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기피했다고 한다. 매몰지 선정이 늦어져 돼지들은 더 심하게 감염이 됐고, 매몰 과정에도 "그냥 떨어지는 돼지는 없었"고 "방수 비닐은 잠깐 만에 볼품없이 찢겨졌다"고 한다. "비닐이 찢겨진 쪽 모퉁이에서부터 돼지들을 찍어내어 가운데로 몇 번이고 퍼내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진 돼지들의 비명소리가 웅덩이에서 공명이 돼 산 속으로 찢어져 나간" 처참한 풍경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윤 위원장의 일지 중 살처분·매몰에 관한 부분을 발췌했다. <편집자>

ⓒ윤후덕

12월 8일 살처분 작업에 들어가다.
농업기술센터로 오전 10시까지 오라는 연락이 왔다. 힘든 작업이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언론보도를 생각났다. 아침을 먹지 않은 빈 속이었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점심식사 전까지 버티려면 뭔가를 먹어두어야 한다. 가는 길에 교하단지 떡집에 들렀다. 먹기 쉬운 종류로 3가지를 급히 샀다. 차에서 꾸역꾸역 배가 든든하도록 떡을 집어넣었다.
농업기술센터에 도착하니 정 사무국장이 먼저 와있었다. 1층의 이 방 저 방을 들러보았다. 누군가를 만나야 살처분 장으로 이동을 받을 테니까. 농협의 여 지부장이 눈에 띄었다. 마침 나를 기다리던 기술센터소장과 함께 뭔가를 심각히 의논하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었다. 상황은 더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오늘 묻어야 할 곳이 8곳이고 필요한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소장은 파주읍으로 가서 읍장을 만나 배치를 받으라고 했다. 일일 살처분 계획서 한 장을 복사해 주었다. '파주읍 봉서리 돼지농가 1200마리 민주당 4명, 시설관리공단 15명.' 나는 소장이 복사해준 일일살처분 현황표를 받아 들고 일어섰다. 파주읍 사무소는 최근에 새로 지은 멋들어진 건물이다. 주민 문화공간이 함께 배치된 신형이다. 2층 읍장실로 바로 올라갔다. 늘 듬직하게 주민들을 살피시는 정 읍장은 읍내 살처분 현황과 어려운 점을 내게 설명했다.
"이번 구제역 극복에 군이 너무 도와주지 않는다. 보유한 훈련장 자투리땅도 내놓지 않아 매몰지 구하는데 어려움이 너무 많다."
"며칠 전에는 매몰지를 구하지 못해 난리가 났는데 기업인 한 분이 선뜻 자기 땅에 묻으라고 땅을 내놓았다. 천신만고 끝에 땅을 확보했는데 인접 주민들이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했다. 결국 땅을 내놓은 기업인이 서로 조금씩 도와주지 않으면 이 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며 설득을 했다. 그래서 간신히 묻을 수 있었다."
현장으로 가자고 읍장이 일어섰다. 봉서리에 있는 돼지 농가였다. 마을에서는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축사가 있었다. 차를 근방에 세워놓고 눈이 제법 쌓인 좁은 길을 걸어서 농장에 도착했다. 관리공단 직원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파주읍 총무팀장이 작업지시를 하면서 나를 인사를 시키고 인사말을 하게 배려를 해주었다. 정치하는 사람이 어느 모임에서건 소개받고 인사말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왜 그게 정치의 시작이기 때문에….
"오늘 하는 일이 살리는 일이 아니고, 죽이는 일이라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가적 재난이고 파주시의 재난이니 봉사하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합시다. 해지기 전에 끝내고 소주라도 한 잔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방역복을 입었다. 신발 위에 조금은 두꺼운 비닐 신발주머니를 신었다.
방역관이 몇가지 설명을 했다.
"작업이 완전히 종료되어 밖에 있는 소독차가 들어와서 여러분들을 소독해주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가능하면 해지기 전에 큰 돼지를 다 처분하고 이어서 작은 돼지를 하겠습니다."
인원이 부족하다고 읍장에게 팀장이 건의를 했다. 읍장은 읍 직원을 더 보내겠다고 했다.

ⓒ윤후덕

작업은 오전 10시 반에 시작되었다.
현장의 작업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시간제약이라는 조건을 넣고 살처분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을 바라보면 대체로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된다.
종돈과 모돈을 먼저 꺼냈다. 말 그대로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이고 어린 새끼돼지를 돌보는 어미돼지들이다. 큰 놈은 송아지보다 더 크다. 200kg, 300kg 하는 것들이다. 돈사는 우아한 말이고 돼지사육공장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어미돼지들과 새끼돼지들이 함께 생활하는 사육장은 한 세트가 한 평 반 정도 크기의 철근으로 만든 구조물이다. 한 평 반짜리 사육장이 수백 개 연이어 좌우 전후로 이어져 있는 곳이 돈사다.
어미돼지를 우리에서 꺼내어 좁은 통로를 통해 돈사 밖으로 몰이를 해 냈다. 근 50m를 더 몰아야 트럭에 싣게 되는 작업이었다. 어미돼지는 젖 먹이던 어린 새끼들을 두고 내쫒기는 이 돌발적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꿱꿱 꿱꿱 꿱꿱 꿱꿱 꿱꿱....."
온 돈사가 어미돼지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참 듣는 것조차 괴로운 어미돼지들의 거친 항의가 나의 온몸을 때렸다. 새끼들과 강제로 떼어져 내몰리는 어미돼지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나와 작업반원들은 저항하는 돼지들을 내모느라고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한 물리력을 행사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는 마쳐야 하는 작업일정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이…. 가느다란 막대기에서 시작된 몰이도구가 작대기로 몽둥이로 삽자루로 바뀌어 갔고 드디어 전기충격기가 도착했다.
"때리지 마!, 때리지 마!"
돼지 주인의 외마디가 작업장을 뒤덮었다. 때리지 말라는 외침의 뒷마디로 "우리 돼지 왜 때려!"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농장주인과 그의 아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 두 사람만이 돼지를 다룰 줄 알았다. 때리면 때릴수록 성질이 나서 더 버텨댄다는 것이었다.

▲ 윤후덕 위원장.

현장은 시간 싸움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번 구제역 방역실패의 핵심은 시간싸움에서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은 소와 돼지의 학살에 대한 휴머니즘적 연민과 2차 오염이 관심거리다.
시간이 지체되어 갔다. 구제역에 감염된 돼지는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잘 걷지를 못했다. 고열 때문에 추위를 심하게 타고 움직임이 크게 떨어졌다. 감염이 제법 진행된 돼지들은 걷지도 못하고 돈사에 누워서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널부러져 있었다. 입과 코에 걸어서 큰 고통을 주며 돼지를 끌고 나오는 쇠줄로 된 작업도구가 있었다. 죽어가는 돼지에 이 도구를 씌어서 한 마리씩 겨우 겨우 끌고 나왔다. 좁은 통로로 인해 한 사람이 한 마리씩 작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되고 많은 시간이 걸렸다.
주인 말로는 매몰 장소 선정 때문에 하루가 지연되었고 그로 인해 돼지들이 더 많이 더 심하게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제대로 걷지 못하는 돼지가 하루가 다르게 많아졌다. 주인 말로는 여기서 하루가 더 지체된다면 모든 돼지를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묶어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작업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단 하루 만(사실은 약 10시간 만에)에 돈사에서 꺼내어 트럭에 싣고나가 매몰을 완료해야 한다. 투입된 인원은 작업을 완전히 마쳐야만 현장에서 이탈할 수가 있다. 시작된 일은 새벽 1시가 되든 새벽 4시가 되든 완전히 마무리되어야 해산할 수 있다. 마무리 되는 것을 확인하고 방역관이 소독차량을 불러서 그 소독차가 들어와서 신발부터 온몸을 소독해주어야 그 장소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한 건의 살처분에 대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작업에 투입된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견디어낼 수 있는 시간 만큼이고 그리고 감염된 돼지를 끌어내는 데 투입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결국 전기충격기가 가장 긴요한 도구가 되었다. 전기충격기는 쓰러져 있는 돼지를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도구였다. 걷지 못하는 돼지를 걷게 만드는 도구였다. 트럭의 반대방향으로만 가려고 하는 저항돼지를 트럭 쪽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강력한 도구였다.
한 트럭에 15마리 정도를 한 차에 실어내었다. 종돈과 모돈은 워낙 커서 10마리 쯤 실으니 꽉 찼다. 비육돈은 20여 마리 정도를 실을 수 있었다. 끝물에는 아기돼지를 실어내었다. 점심시간 전후로 어미돼지를 끌어냈고 오후 6시 쯤부터 아기돼지들을 실어 냈다. 좁은 축사 안으로 들어가 참 귀엽기 그지없는 새끼돼지들을 한 손에 한 마리씩 잡아서 리어카에 던져 넣었다. 대여섯 마리를 한 부대에 집어넣고 리어카에 실었다. 그냥 리어카에 한 마리씩 던져 넣기도 했다. 이 작업은 큰 돼지를 일으켜 세워서 끌고 나가는 일보다는 훨씬 쉬었다.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를 머리 속으로 떠올리면서 "참말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죄책감이 내 가슴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리어카를 끌고 나와 트럭에 댔다. 새끼를 갓 넘은 조금 큰 것들은 몰이를 당해 이미 트럭에 실려 있었다. 아기돼지들은 마대자루 째 그대로 트럭에 던져 넣었다. 마대자루가 찢어져 집어던져지는 공중에서 아기돼지 한마리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꽥!" 하며, 비명을 지른다. 얼마나 아픈지 벌떡 일어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야단법석이다. 겨우 다시 잡아 트럭으로 내던져 넣었다.

ⓒ윤후덕

매몰장으로 가는 트럭에 올라탔다.
축산농가를 빠져나와 좁은 길을 돌아서 대로로 나왔다. 터널을 지나자마자 우측 편으로 매몰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구제역이 발생한 돈사에서 직선거리로 400m 쯤 떨어진 곳에 매립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7m 깊이로 좌우가 3m, 5m 정도가 되는 직사각형의 웅덩이였다. 밤새 포크레인이 동원되어 작업을 해냈다. 발생신고 당시 마련했던 돈사 옆 축산농가 자신의 땅은 파나가다가 물이 나와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매몰지를 다시 구하느라고 읍장께서 갖은 고생을 다했다. 읍에만 소와 돼지를 살처분한 곳이 30여 곳이다. 살처분하여야 한다는 것을 방역관이 결정한 순간부터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매립해야 한다.
특히 돼지의 경우 감염속도가 너무 빠르다. 확인된 시점에서는 이미 그 농장은 건질 게 없다. 매몰시킬 장소를 찾는 것이 가장 신속해야 한다. 발생지점에 묻어버리는 것이 현재의 원칙이다. 이동으로 인한 바이러스의 확산을 차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자기 집 앞마당에 수백 수천 마리의 소 돼지를 묻으려 하겠는가? 다행히 축산농가가 자기 땅이거나 자기 땅을 가지고 있으면 그 땅에 묻는다. 이런 일이 부락 안에서 이루어지면 아주 강한 민원이 제기된다. 동네 한 복판에 '혐오시설'이 생기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국공유지 그리고 국방부 땅을 찾아 나섰다. 해당 축산농가 주변이어야 하고, 민원이 제기되지 않을만한 한적한 곳이어야 한다. 이번에는 특히 부처간의 협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겨우겨우 수소문 끝에 민가가 없는 시유지를 찾아내어 그 곳으로 결정하고 포클레인을 투입했다.

ⓒ윤후덕

웅덩이 안에는 먼저 도착한 어미돼지들과 비육돈들이 수북이, 수북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트럭 적재함의 뒷문을 열었다. 적재함이 자동으로 들리는 트럭이 아니었다. 그냥 떨어지는 돼지는 없었다. 포클레인이 적재함에서 돼지들을 웅덩이로 밀어냈다. 7m 깊이의 매몰지로 돼지들이 떨어졌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운전석 쪽으로 돼지들이 몰렸다. 다시 포클레인이 이들을 밀쳐냈다. 채 떨어지지 않은 아기돼지 한 마리와 비육돈 한 마리가 난간 모서리에 걸려서 바둥바둥댔다. 다시 포클레인이 이들을 처냈다. 단호하게 처내는 수밖에 없었다. 웅덩이에는 큰 돼지 작은 돼지가 서로 엉켜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이미 좁아진 웅덩이에서 바닥에 깔리지 않고 위로 올라서려고 밀고 밀리고 기어오르다 떨어지는 발버둥질을 계속해 댔다. 아기돼지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깔려서 보이지도 않았다. 생지옥, 아비규환이란 말이 아마도 이런 지경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방수를 위해 설치한 비닐은 잠깐 만에 볼품없이 찢겨졌다. 트럭에서 떠밀리던 돼지 한 마리가 웅덩이 밖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통증은 잠깐이고 중간 크기의 그 돼지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감염된 한 사람이 전 세계를 바이러스로 떨게 했다는 식의 삼류영화에 찌들은 나는 '어 저 감염된 돼지를 놓치면 큰 일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추격이 시작됐다. 세 사람이 쫒아가 겨우 잡았다. 두 사람이 앞다리 뒷다리를 들어 웅덩이로 내던졌다.
바닥이 채워질수록 밑의 돼지들에 얹혀있는 큰 돼지들은 가라안지 안으려고 더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방수비닐의 한 쪽 면이 통째로 찢겨져 나갔다. 마침내 포클레인의 바가지가 웅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비닐이 찢겨진 쪽 모퉁이에서부터 돼지들을 찍어내어 가운데로 몇 번이고 퍼냈다.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진 돼지들의 비명소리가 웅덩이에서 공명이 되어 산속으로 찢어져 나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서 돌아섰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살리자고 한 일이 왜 이렇게 모두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뒷작업은 흙과 석회를 켜켜이 뿌려서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까지는 보질 못했다. 그것은 그 일을 맡은 업체의 사람들이 해나갔다. 침출수 문제로 언론에 부각된 정화조는 매몰 당일에는 설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다. 이틀 후에나 설치가 된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탈취제도 뿌리고 시간이 지나 서서히 정화조에 물이 차면 전문업체를 통해 수거해서 정화시설에 보내어 정화한다고 한다. 관련 공무원이 직접 3년을 관리한다고 한다.
그날 나와 우리들은 감염된 돼지와 감염되지도 않은 죄 없는 아기돼지 수 백 마리와 큰 돼지 1000여 마리를 이렇게 생매장을 시켰다.
인간이 이제는 짐승에게까지 죄를 짓고 사는구나…. 이 죄를 어떻게 속죄할 것인가? 반이라도 건졌어야지 다 죽이고 무슨 방역을 했다고 하냐는 국민들의 꾸지람이 나의 뒤통수를 때린다. 그래도 지방정부와 자원봉사에 나서신 분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윤후덕

2011년 1월 28일.
살처분 매몰지에서 작업한 포클레인 기사를 만났다. 한 면의 소 돼지 무덤을 거의 다 파고 묻었다고 한다. 50대 후반의 건실해 보이는 정 사장은 짐승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다.
"눈 뜨고 못 봐요. 참 아깝지요. 이왕 죽일거면, 백신이라도 일찍 접종했어야지요.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백신이 너무 늦은데다가 처음에는 백신 맞은 소들 중에서 발병을 하면 그 축사의 소는 다 살처분했는데, 지금은 발병한 소만 묻어요."
"돼지 8000마리를 묻는 작업이 제일 컸어요. 무덤을 두 개 팠어요. 40m, 5m짜리를 두 개 팠어요. 1만 두가 넘는 어느 집은 200m짜리가 있었다고 하네요. 5~7m 깊이로 팝니다. 비닐을 깔고 50cm 정도 흙을 깔고 석회를 뿌립니다. 덮을 때는 흙으로 덮다가 석회를 뿌리고 또 흙을 뿌리다가 석회를 뿌립니다. 그렇게 묻지요. 흙을 덮다보면 빠져 나오는 돼지들이 생깁니다. 할 수 없이 바가지로 찍어요."
"정화조요? 정화조는 묻지 않았는데. 글쎄요 정화조 작업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보죠?"
"비닐은 찢어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100kg이 훨씬 넘는 산 돼지 수백 수천 마리가 안 죽으려고 좁은 구덩이에서 발광을 하는데 비닐이 무슨 수로 남아나겠습니까? 찢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면이 벗겨지고 말지요. 안락사 시켜서 묻는 소의 경우는 비교적 비닐이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지요. 하지만 돼지의 경우에 비닐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그냥 전후좌우로 침출수가 땅으로 지하수로 빨려 들어가겠지요. 여름 되면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걱정이에요."
"개울 옆인 경우도 있었어요. 여름에 어쩔지 걱정입니다."

ⓒ윤후덕

정화조에 분해된 물이 차면 수거해서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일을 3년 동안 하게된다. 읍면동장 책임하에 관리된다고 한다.[끝]

"돼지 수천마리가 발광…개울 옆에도 그냥 묻었어요" : 야후! 미디어 - 세상을 만나는 창

가평高 졸업식 찾은 '특별한 손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가평高 졸업식 찾은 '특별한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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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2.11 03:01 / 수정 : 2011.02.11 04:38

6·25 전쟁 중 학교 설립한 美 40사단 대표단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미군 보병 제40사단은 경기도 가평에 주둔하고 있었다. 사단장 조셉 클리랜드(Joseph Cleland) 장군은 안쓰러운 장면을 만났다. 천막학교에서 학생 150여명이 오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학교를 새로 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1만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가평고(가평군 가평읍 대곡리)의 시작이다.
▲ 왼쪽부터 미군 제40사단 로만 사병 대표, 참전용사인 알 포펠과 드웨인 웨일리씨, 스캇 존슨 사단장 그리고 가평고 한병헌 교장. 뒤에 보이는 부조는 조셉 클리랜드 장군이다. /가평고 제공

전쟁과 가난에 찌든 이역만리 학생들에게 희망을 줬던 미군들이 소중한 인연을 60년째 이어가고 있다. 10일 제56회 졸업식에는 귀한 손님들이 왔다. 40사단을 대표한 스캇 존슨 사단장, 참전용사인 알 포펠(79)씨와 드웨인 웨일리(82)씨다. 이들은 졸업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오랜 우정을 되새겼다. 존슨 사단장은 축사도 했다.
당시 클리랜드 장군은 장병들의 정성을 모았다. 2달러 이상씩 십시일반으로 냈다. 공병부대가 건물을 짓고, 주민과 학생들도 나서 교실 10개와 강당 1개를 완성했다. 학교에 사단장의 이름을 붙이자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클리랜드 장군은 "처음 전사한 내 부하의 이름이 마땅하다"고 했다. 두 달 전에 19세로 산화한 케네스 카이저(Kenneth Kaiser Jr.) 하사다.
가평고는 '가이사중학원'으로 시작했다. 주민들은 '카이저'를 '가이사'라고 불렀다. 이후 가이사중, 가이사고를 거쳐 가평고로 바뀌었다. 건물도 새로 들어섰다. 그러나 우정은 전해졌다. 지금도 교정에는 '이 학교는 미 제40 보병사단 장병들이 대한민국의 장래 지도자들에게 봉헌한 것입니다. 1952년 8월 15일'이라고 새긴 표석이 있다.
1987년, 은퇴한 클리랜드 장군이 연금의 일부를 기부하러 다시 찾아왔다. 첫해 311만원을 내놓았고 1990년부터는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가 1997년 타계한 후에는 부인이, 다시 부인이 작고하자 40사단 후배 장병들이 뜻을 이었다. 사령부에 모금함을 설치하고 매년 장학금을 보태 기금이 3200만원으로 늘었다. 이번 졸업식에서도 '클리랜드 장군상'과 '가이사 장학금'이 전달됐다. 참전용사들은 졸업식에 앞서 미국서 가져온 태극기를 손수 게양했다.
가평고는 2008년 '가이사기념관'을 만들고, 작년에 새로 지은 기숙사를 '클리랜드홀'로 명명했다. 카이저 하사의 유족과 묘소를 수소문해 찾기도 했다. 한병헌 교장은 "미군들의 희망처럼 우리가 기숙형 명문 공립고로 성장해 더욱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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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상] TFA 아이디어, 대학 졸업논문에서 내… "가난은 교육으로 풀어야" 20년간 실천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오늘의 세상] TFA 아이디어, 대학 졸업논문에서 내… "가난은 교육으로 풀어야" 20년간 실천

입력 : 2011.02.11 03:00

▲ 웬디 코프
창업자 웬디 코프

'미국을 위한 교육(Teach for America)'의 창립자인 웬디 코프 최고경영자(CEO)는 9일 뉴욕 외신기자센터에서 창립 20주년 기자회견을 열었다.
코프는 1990년 프린스턴대 졸업반 때인 21세 때 TFA를 만들었다. '교사들의 평화봉사단을 만들어 빈민지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자'는 아이디어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후, 이를 아예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지도교수는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코프는 250만달러를 모았다. 첫해엔 뜻을 같이하는 25명이 힘을 합해 지원자를 모집했다. 무려 2500명이 몰려들어 그중 500명을 선발해 뉴욕, LA 등 6개 지역으로 파견했다. 코프는 자서전에서 "세상엔 엄청난 돈과 그 돈을 보람 있게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적고 있다.
―하버드, 예일 등 명문대 학생들이 왜 경쟁적으로 '미국을 위한 교육'에 참여하길 원하는가.
"큰 변화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교육을 해소하는 것을 우리 세대의 시민운동 이슈로 보고 있는 것이다. TFA에서 성공한 선생님들은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 졸업반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에너지를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여기에 써라'고 독려한다."
―물질주의가 우월한 미국에선 이례적인 현상 아닌가.
"우리 세대가 자기와 돈만 아는 '미 제너레이션(me generation)'만이 아니라는 것을 TFA는 증명하고 있다. 고액연봉을 받는 뉴욕의 월스트리트 대신 보람을 위해 단기간이지만 박봉의 TFA 교사 자리를 기꺼이 택하고 있는 것이다."
―'TFA'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인가.
"가난한 지역의 아이들을 끌어내 다른 궤도를 걷도록 교육하는 데 필요한 것은 결국 리더십이다. 이것은 점진적인 변화로는 안 되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교실이든 학교든 지역단위든 이런 변화는 아이들을 깊이 신뢰하며 아이들의 잠재력을 알고 이를 끌어내려는 강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 가져올 수 있다. 이런 통찰력이 TFA 사명의 핵심이다."
―어떤 사람을 뽑는가.
"우리는 어떤 기업보다도 공격적으로 대학 캠퍼스에서 채용 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리더십의 자질을 본다. 이를 전체적으로 평가해 사람을 뽑는다."
오바마 대통령도 미국 공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가난한 지역 아이들은 절반 정도밖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 이 나라에서 고교 졸업장이 없는 학생은 미래도 없다. 그런데 고교를 졸업한 학생도 수준은 중학생밖에 안 된다. 이렇게 해서는 의미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지난 20년간 이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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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상] 하버드·예일 졸업생 18%가 "빈민가 교사 하겠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오늘의 세상] 하버드·예일 졸업생 18%가 "빈민가 교사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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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2.11 03:00

TFA(가난한 아이 가르치는 봉사) 창립 20주년… 美 명문대생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원해도 합격률은 불과 20%… 미셸 리 前교육감도 이곳 출신, 가르친 학생들 성적도 뛰어나
미국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직장 '톱 10'에 들며 매년 신입사원의 15%를 하버드·예일·프린스턴 등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대 졸업생으로 채우는 곳. 하지만 이곳의 평균 연봉은 3만5000달러(약 3850만원).
치열하게 경쟁해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는 미국 땅에서 좀처럼 성립될 수 없어 보이는 이 직장의 이름은 '미국을 위한 교육(Teach for America)'이다.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교사양성 및 지원을 위한 비영리단체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 명문대 졸업생들이 5주간의 집중적인 훈련을 받고 미국 내 가장 가난한 지역에 교사로 배치돼 2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 미국 예일대 졸업생이자‘미국을 위한 교육(Teach For America)’소속 교사 줄리앤 칼슨(가운데)이 휴스턴의 한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계층 간 교육 불평등 해소를 목표로 하는 TFA는 명문대 졸업생들을 선발해 미국 내 가장 가난한 지역에 교사로 배치한다. 12일 창립 20주년을 맞는 TFA는 지난해 4500명을 뽑는데 무려 4만6000여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NYT

오는 12일 워싱턴DC에서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를 갖는 이 단체의 초급교사는 현재 8200명. 20년 전 불과 500명에서 16배로 늘었다. 지난해엔 4500명을 뽑는데 무려 4만6000여명이 몰려 10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하버드·예일대 졸업생 가운데 18%가 지원했으나 이 가운데 20%만 초급교사로 선발될 수 있었다.
미국 공교육 개혁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미셸 리 전 워싱턴DC 교육감이 TFA 3기생이고, 대안학교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KIPP'('아는 것이 힘이다' 프로그램)의 공동 창업자 마이크 파인버그와 데이브 레빈, '올해의 교사상'을 휩쓰는 이름들이 TFA가 배출한 2만명 동창생 명부에 올라 있다.
TFA가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 성공을 거둔 것은 탁월한 교육적 효과 때문이다. 미국 내 교육 연구 보고서들은 TFA 교사들이 가르친 학생들이 수학·독해·과학 등에서 정규 교사들이 가르친 학생들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지난 2004년 '매서매티카 폴리시 리서치'는 TFA 교사가 가르친 학생들의 수학성적이 다른 학생들보다 표준편차상으로 0.15 올랐고, 이는 한 달간 더 교육받은 효과와 같다는 결과를 게재했다. 지난 2008년 '어번 인스티튜트'도 "TFA 교사들은 고등학생 시험성적에서 비TFA 교사보다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며 "이는 다년간의 경험을 추월하며, 특히 수학과 과학에서 강한 효과를 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TFA의 경험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교사들의 인생도 근본적으로 바꿔놓곤 한다. 미셸 리 전 워싱턴DC 교육감은 지난해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 "볼티모어의 공립학교에서 TFA 교사로 일했던 경험이 나의 신념을 더욱 굳게 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아이들은 잠재력이 있고 또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며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라고 말했다.
TFA는 지난해 기부금을 모아 1억8900만달러의 예산을 확보했고, 이 가운데 75%는 뛰어나고 열정적인 TFA 교사를 받고 싶어하는 커뮤니티에서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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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9일 수요일

[앙코르 내 인생] 증권사 CEO에서 집짓기 운동 이창식(66)씨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앙코르 내 인생] 증권사 CEO에서 집짓기 운동 이창식(66)씨

입력 : 2011.01.12 23:29 / 수정 : 2011.01.13 10:36

26년 꾼 꿈 펼치려 퇴직하는데 "뭐? 쉬라고?"
증권사 영업부장으로 출세가도 들어서던 삼십대
급성간염이 찾아왔다…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인가'
망치와 톱을 들고 사랑의 집짓기에 나섰다
예순 살이 되던 2005년, 증권회사 부회장을 끝으로 38년간의 금융인 생활을 접었다. 말단 은행원에서 시작해 여러 증권사 사장을 거쳐 숨 가쁘게 달려왔다. 남의 돈을 맡아 한 푼이라도 더 수익을 올려주어야 되기에 늘 신경이 곤두섰던 날들이었다.
퇴직하던 날, 후배들은 퇴임인사를 하는 나에게 "이젠 취미생활하며 편하게 즐기라"고 했다. "쉬다니! 신명을 바쳐 내 시간을 고스란히 바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자"고 했다.
회사문을 나서며 26년 전 내 모습을 떠올렸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사회가 뒤숭숭하던 그때 나는 증권업계의 사관학교로 불리던 한 증권회사의 영업부장이었다. 이른바 '출세길'로 들어섰다는 그 순간 증권업계에 대란이 일어났다. 나는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짓눌렸다. 결국 급성간염이 찾아왔다. 펄펄 열이 끓어오르고 헛소리도 했다.
▲ 1999년 증권사 사장(맨 오른쪽) 시절 직원들과 함께 주식 시세를 살펴보고 있다.
몸이 아파서 쓰러지자 '나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정말 이렇게 사는 것이 전부인가'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출세를 향해 뛰어온 날들,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비틀거리고 있는 내 모습…. 그 후에도 26년을 더 금융 일을 했지만, 내 안에선 삶의 무게 중심이 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당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분이 고(故) 대천덕 신부님이다. 그분은 늘 "땅은 모두의 것이며, 누구나 삶과 가정을 지켜낼 터전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실천할 기회가 왔다.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도 불우 이웃에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주저 없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망치와 톱을 들고 집을 짓는 데 힘을 보탰다. 나는 후원자이기도 했다. 월세방을 전전하던 이들이, 수해로 집을 잃은 이들이 새집을 갖고 감격해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보람을 느꼈다. 특히 안정을 찾은 아이들이 공부할 분위기가 됐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퇴직한 날 이후 나는 6년째 아침 8시 반이면 서울 신당동의 한국 해비타트 사무실로 출근한다. 어려운 이웃에게 집을 지어주는 비영리민간단체(NPO)다. 50여명의 직원들이 일하는 사무실은 다소 어수선하지만 늘 에너지가 넘친다. 여느 시민단체나 소규모 건축사무소같이 떠들썩하면서도 특유의 자신감과 활기가 살아 있다.
1997년부터 이곳의 이사를 맡았지만, 퇴직하면서는 이사 15명을 대표하는 '운영회장'이란 직함을 달았다. 회사를 경영한 경험을 여기에서 살려보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잡일을 도맡는 총무나 마찬가지다. 젊은 직원들, 자원봉사자들과 어울리고, 현장에 나가 삽으로 땅을 고르고 톱질을 하고 시멘트를 갠다. 기업체를 돌며 "해비타트를 후원해 달라"고 부탁하고, 기부금을 관리하며 사업계획도 짜야 한다. 주춧돌이 놓이고 집이 하나하나 지어질 때마다 뿌듯해진다. 작년에만 327채를 지었다.
▲ 퇴직 후 충남 아산에서 궨사랑의 집짓기 운동궩에 참여해 원형 전기톱으로 목재를 자르고 있는 이창식씨.

금융회사 CEO로서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나를 평생 돈 굴리고 버는 일을 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놀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와 있을 뿐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류든 선의(善意)를 품고 산다고 생각한다. 사는 게 바빠서, 아니면 계기가 없어서 그런 마음과 기회를 흘려보내고 만다. 젊은이들은 "어떻게 그런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지금부터 생업 외에 취미든 봉사활동이든 자신이 즐거운 일에 꾸준히 투자해보라"고 대답해준다.
퇴직 후에 어떻게 살 것이냐를 퇴직할 때가 돼서 고민하면 너무 늦다. '제2의 인생'을 찾으려면 오랜 기간에 걸쳐 그 일의 내용을 파악하고 애착도 갖고 있어야 자연스럽게 투신할 수 있다. 그것은 돈 버는 일, 나와 내 가족만이 잘사는 일에 하루하루 매몰된 생활에서 벗어나 제대로, 건강하게 사는 길이기도 하다.
몇 년 전 베트남의 메콩강 유역에서 주택 174채를 짓는 일에 참가했다. 70·80대 노인들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와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고 떠올린 것은 "봉사하는 데는 정년이 없구나"였다. 해비타트에는 나 말고도 법률·회계 등 다양한 분야의 은퇴자들이 상근 직원이나 봉사자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비영리민간단체들은 경륜 있는 사람들의 손길을 목말라 하고 있다. 우리 한국 해비타트만 해도 연 180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어떻게 알뜰살뜰 운영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이다. 운전을 했든, 회계일을 했든, 영업을 했든 봉사하는 데는 모두 쓸모가 있다. 인생 2막을 열려면 '바로 지금' 도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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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8일 화요일

제자에게 신장을 기증한 야구 감독 ‘감동’ :: 네이버 뉴스

 

제자에게 신장을 기증한 야구 감독 ‘감동’

서울신문| 기사입력 2011-02-09 11:33 기사원문

[서울신문 나우뉴스]혈관염을 앓아 야구인생을 마감 할 제자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한 야구 감독의 사연이 미국을 감동시키고 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의 보도에 따르면 노스 캐롤라이나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야구단 외야수 케빈 조단이 앓고 있는 질병은 항중성백혈구 세포질성 자가항체 (Anti-Neutrophil Cytoplasmic Autoantibody, ANCA)에 의한 혈관염. 이 혈관염은 신장의 기능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일주일에 3번씩 투석을 하면서 야국선수 생활을 한 조단은 지난 1월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면서 매일 18시간에서 20시간의 투석을 하면서 야구인생을 마감할 지경에 이르렀다.
조단은 뉴욕 양키스의 지명을 받을 정도로 야구 기대주였다.
신장이식을 위해 조단의 가족과 친척이 신장 테스트를 받았지만 적당한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야구동료들이 테스트를 받고 나섰다. 기적적으로 조단에게 신장이식이 가능한 사람이 나왔으니 바로 조단의 야구 감독인 톰 월터(42).
톰 월터는 테스트 결과를 받자마자 조단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할 것을 결정했다. 그의 결정은 조단의 가족 뿐 만아니라 대학 내에서도 놀라움을 주었다.
7일(현지시간) 애틀랜타 에모리 대학 병원에서 신장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스승과 제자는 회복하는데 2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둘은 하루 빨리 다시 야구장으로 나가기를 고대하는 중.
워터는 “내가 데리고 있는 선수들은 내 가족이나 다름없다. 모든 감독들이 같은 생각일 것” 이라고 말했다.
사진=워싱턴 포스트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김경태 tvbodaga@hnam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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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전세 살아보니 심각성 체감…인상폭 물가상승률 2배로 제한&quot; > 국회.정당 :: 한경닷컴 ::

 

"전세 살아보니 심각성 체감…인상폭 물가상승률 2배로 제한"

원혜영 민주 전세특위원장

입력: 2011-02-08 17:23 / 수정: 2011-02-08 17:23

"전세 살아보면 요즘 전세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체감할 수 있다. 나부터 지난번 재계약 때 4000만원 올려줬는데 올 연말 재계약 때는 또 얼마나 올려 달라고 할지 걱정이다. "
민주당 전세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원혜영 의원(사진)은 8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세난 초반 정부가 '별거 아니다' '국지적이다'는 식으로 대응했는데 서민들의 현실을 정말 모르는 소리"라고 질타했다. 원 의원은 부인,아들 2명과 함께 부천시 여월동에서 1억8000만원짜리 전세를 살고 있다. 그는 "경기도 의왕에 사는 처제는 1억5000만원짜리 전세인데 집주인이 무려 1억원을 올려달라고 해서 딴 곳으로 이사가야 할 처지다. 그나마 아파트 사는 사람은 낫다. 4000만~5000만원짜리 다가구 세입자들은 1000만원만 올라도 돈 마련할 길이 없어 발을 동동구르고 있다"며 세입자들의 고충을 전했다.
원 의원은 시가총액이 1400억원에 달하는 풀무원 창업주다. 그런 그가 전세를 사는 이유는 1996년 정치를 시작하면서 보유지분 전량을 대학친구인 현 남승우 사장에게 넘기고 받은 20억원을 사회에 기부한 탓이다. 원 의원은 "어렸을 때 아버지(유기농의 대부로 풀무원 농장 설립자인 원경선씨)가 전쟁고아나 부랑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같이 살다시피해서인지 '내것 네것' 개념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며 웃었다.
이런 배경 덕분에 당내에서는 원 의원이 전세특위 위원장을 맡은 것을 두고 "세입자들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적임자"라고 입을 모은다. 전세특위는 현 세입자에 한해 전세금 상한폭을 물가상승률의 200%로 제한하고 갱신청구권을 주는 내용의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2월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원 의원은 "당초 상한제를 전체 전세계약에 도입하자는 급진적 안도 있었지만 시장논리를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실효성을 감안해 현 세입자에 한하기로 했다"며 "전세난에 대해 여당도 충분히 문제의식이 있는 만큼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정부 내 부정적 기류에 대해서는 "현 정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공공임대 주택물량을 반으로 줄이고 보금자리 분양으로 전환하면서 전세난을 부추긴 측면이 있지 않느냐"면서 "세 사는 사람이 국민의 절반 이상인데 최소한의 주거안정권을 보장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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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간 국가가 살인한 사람은 '2억 명' - 오마이뉴스

(서평) 더글러스 러미스가 쓴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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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감염실험, 출혈쇼크사 실험...잔인했던 '그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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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 뉴스 - 잠재부채 가구당 1억1756만원

 

잠재부채 가구당 1억1756만원

공공부문 포함 총부채 2038조원
MB정부 이후 45%나 늘어

기사입력 2011.02.08 17:34:46 | 최종수정 2011.02.08 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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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에게 돌아올 잠재적인 빚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개인이 직접 갚아야 할 가계 부채에 공공 부문 부채를 더하면 우리 국민이 총 2038조원의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공공 부채(국가 채무+공공기관 부채)는 당장 상환 부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 악화 시 세금 형태로 국민에게 부담이 전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국민 부채`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총가구가 1733만4000가구인 점을 고려하면 가구당 약 1억2000만원의 빚을 잠재적으로 떠안고 있는 셈이다.
잠재적 국민 부채는 증가 속도가 빨라 향후 우리 경제에 큰 짐이 될 것으로 염려된다. 2007년 말(1405조원)과 비교해 3년 만에 무려 633조원(45.0%)이나 증가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민의 잠재적 빚 부담이 해마다 210조원씩 늘어난 셈이다.
빚이 아무리 늘더라도 소득도 함께 증가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상황은 그렇지 않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잠재 부채비율이 2007년 144.1%에서 지난해 말 196.1%까지 높아져 잠재 부채가 GDP의 2배 수준으로 확대됐다. 부채 증가 속도가 소득 증가 속도에 비해 훨씬 빠르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 이 때문에 부채에 대한 구조조정 없이 이런 추세로 빚이 늘어나면 우리 경제가 감내할 수준을 벗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박형수 한국조세연구원 재정분석센터장은 "조세로 부담해야 하는 국가 채무는 물론 부실이 발생하면 정부가 갚아야 하는 공기업 부채도 결국은 국민 부담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잠재적 국민 부채 2038조원은 가계 부채(896조9000억원)와 국가 채무(400조4000억원), 공공기관 부채(최소 740조4000억원)를 더해 계산됐다.
가계 부채는 2010년 3분기 말 기준이며, 국가 채무는 정부 전망치, 공공기관 부채는 2009년 말 수치에 최근 3개년간 연평균 증가율(24.1%)을 곱해 추정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가계와 공공 부채의 단순 합계가 크긴 하지만 부채별로 보면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정부 주장에는 허점이 적지 않다. 가계 부채에 대해 정부는 GDP 대비 비율이 선진국에 비해 낮고, 연체율이 미미하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일본(92.7%) 미국(98.6%)과 비교해 한국의 가계부채비율(85.9%)만 현재도 상승 중이다. 또 주택담보대출 연체율(0.4%대) 하락 추세도 부채가 함께 늘어난 데 따른 착시현상이다. 연체금액은 지난해 상반기 11%나 증가했다.
공공기관 부채는 증가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어 더욱 큰 문제다. 2009년 전년 대비 28.7%나 급증했지만 `숨겨진 부채`여서 감시의 눈길에서 벗어나 있다. 정권 후반기 국책사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크게 늘어날 가능성도 높다는 지적이다.
[특별취재팀 = 이창훈 팀장 / 정혁훈 기자 / 송성훈 기자 / 박용범 기자 / 이상덕 기자 / 전정홍 기자]

mk 뉴스 - 잠재부채 가구당 1억1756만원

mk 뉴스 - `셜리`…7세 소녀를 지켜주는 개

 

`셜리`…7세 소녀를 지켜주는 개

기사입력 2011.02.08 13:40:15 | 최종수정 2011.02.08 1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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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병에 걸린 7살 소녀를 응급상황에서 구해주는 개가 있어 화제다.

7일(현지시간) 영국 텔레그라프 온라인판에 따르면 래브라도 종인 개 `셜

리`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주인 레베카 파바가 저혈당으로 혼수상태에 빠

질 때 그녀를 깨우는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셜리는 파바의 상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혼수상태에 빠지면 다가가 핥

는 등의 행동을 통해 깨운다. 만약 파바가 이같은 행동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의약품을 가지고 오도록 훈련받았다.

레베카의 어머니 클레어는 "딸이 잠들 무렵 저혈당 증세를 보이기도 하는

데, 그럴 때 셜리가 다리와 발을 핥아 혼수상태로부터 깨어나도록 도와준

다"고 말했다.

셜리는 1년 이상 의료 봉사견이 되는 훈련을 받았다. 셜리의 훈련을 담당

했던 클레어 게스트는 "셜리를 비롯한 의료견들이 주인의 상태를 살피도

록 훈련받는다"며 "개들은 특히 냄새를 통해서도 이를 쉽게 구분해 낼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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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13세 소년 ‘성행위로 에이즈’

 

 


●…대만에서 불과 13세 소년이 성행위를 통해 에이즈(AIDS·후천성면역

결핍증)에 걸린 최연소 환자로 기록됐다고 행정원 위생서(署) 질병통제국

이 31일 밝혔다. 이 소년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기간에 돈으로 유혹한 50

대 남자 사장과 성행위를 해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린딩(林

頂) 부국장이 밝혔다. 소년과 사장이 나란히 에이즈 양성 반응이 나타났으

며 소년들이 성인 동성애자들에 의해 ‘천채’(天菜·하늘에서 내려온 맛있는

음식)로 자주 지칭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박준우기자 jwrepublic@munhwa.com

무너지는 中가정… 지난해 결혼보다 이혼이 더 많아 - munhwa.com

 

<세상 만사-나라 밖>

무너지는 中가정… 지난해 결혼보다 이혼이 더 많아

한강우기자 hangang@munhwa.com | 게재 일자 : 2011-02-07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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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 동안 중국인들의 이혼이 결혼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개성화, 독립화, 자아의식 고조 등으로 이혼율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파즈완바오(法制晩報)의 6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200만쌍 가량의 중국인 부부가 각종 이유로 갈라섰다. 신문은 민정부 통계를 인용한 이 기사에서 지난 한 해 동안 결혼 등기를 마친 중국인은 모두 120만5000쌍으로 전했다. 그러나 이혼 등기를 마친 부부는 196만1000쌍에 달해 이혼 부부의 숫자가 결혼 부부보다 무려 62.7%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2010년 전국 31개 성, 시, 자치구 가운데 이혼 부부가 가장 많은 곳은 쓰촨(四川)성으로 모두 16만9294쌍이 이혼했다. 3만2982쌍인 베이징(北京)의 5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장쑤(江蘇)성과 산둥(山東)성도 각각 12만947쌍과 11만6386쌍으로 10만쌍을 넘어섰다. 특히 쓰촨성 등 농촌지역의 이혼 증가는 매년 1000만명 이상의 농민공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진출, 부부간의 장기 별거 등 불안정한 생활이 결국 이혼으로 이어지면서 농촌가정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으로 신문은 분석했다.
베이징 = 한강우특파원 hanga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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