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김혜숙씨 "北 참상 못 믿는 이들 답답"
[연합] 입력 2011.11.24 01:15 / 수정 2011.11.24 05:40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북한의 실상을 얘기해도 믿지 않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답답합니다."
지난 2008년 6월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과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에 정착한 김혜숙(50.여)씨는 23일 오후(현지시간) 제네바에서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배고픔의 고통이 어떤 건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면서 정치범수용소에서 보낸 28년의 세월과 목숨을 건 북한 탈출기를 풀어놓았다.
김씨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할아버지가 월남했다는 이유로 평양에서 180리 떨어진 평안남도 북창군 석산리 제18호 관리소에서 13살 때부터 41살까지 살았다면서 "1890년대에 태어나셔서 진작 돌아가신 할아버지 때문에 지금도 두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이 수용소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수용소에 있을 때 "할머니가 강냉이 가루를 빻으면 봉지 30개에 조금씩 나눠서 매일 풀을 섞어 죽을 끓여 먹으며 한 달을 살았다"며 "배가 고파 대동강 건너에 있는 14호 관리소에서 곡식과 야채를 훔치다 잡혀서 공개처형을 당하는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숱하게 봤다"고 전했다.
한 달에 평균 5~7건의 공개처형을 목격했다는 김씨는 "식량을 훔치거나 안전원에게 대들면 대부분 총살하는데 교수형을 하는 장면은 딱 두 번 봤다"면서 "다른 사람의 손금을 봐준 아줌마는 미신을 퍼트렸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당했고, 아내를 목졸라 죽인 남편은 소나무에 매달려 처형됐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토끼 30여 마리와 개 7 마리를 길러서 당 간부들에게 꾸준히 갖다 바친 공로로 수용소에서 `해제`됐다는 김씨는 "수용소에서는 살 집이라도 있었지만, 그곳을 나온 뒤에는 집도 없이 떠돌며 남의 집 담에 비닐을 쳐서 눈비를 막으며 사느라 개고생을 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수용소에서 두 명의 남편과 남동생을 탄광사고로 잃었고 수용소를 나온 뒤인 2003년 8월 홍수로 아들과 딸을 잃은 김씨는 "더는 북한에서 살 수는 없다"고 결심하고 2005년 중국으로 탈출, 옌지(延吉)에서 식당 일을 했다.
북한에서 돼지를 사오라는 중국인 식당 주인의 지시에 다시 북한에 들어간 김씨는 2007년 10월에 검문에 걸려 붙잡혔고, 6개월 노동단련형을 선고받고 18호 관리소에 재수용됐다가 이듬해 3월 양말만 신은 채 수용소를 탈출해 석달 후 또 한 번 두만강을 넘었다.
16살때부터 30살이 될 때까지 탄광에서 일했다는 김씨는 "진폐증이 심해서 말을 할 때도 숨이 가쁘다"며 "그래도 중국을 거쳐 한국에 온 뒤로 먹는 게 좋아지니 짐승이 털갈이하는 것처럼 온 몸의 껍질이 세 번 벗겨지면서 새 피부가 나오더라"며 수줍게 웃었다.
김씨는 이날 오전 제네바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등이 공동으로 주최한 `제11회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서 직접 손으로 그린 18호 관리소 일대의 약도를 펼쳐보이며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실태를 증언했다.
현재 북한정치범수용소철폐운동본부 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씨는 인터뷰에서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요청으로 캐나다, 미국, 일본 등을 다니며 수용소 실태를 알리는 일을 해왔는데 사람들이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며 "두고 온 동생들을 다시 만날 때까지 세상에 북한 수용소의 실상을 알리는 일을 계속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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