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망하자 전 재산 처분해 독립운동에 쓴 '갑부집'
[뉴데일리] 2011년 11월 16일(수) 오전 11:47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만주지방에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3,000여 명을 양성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우당 이회영선생 순국 79주기 추모식’이 17일 오후 2시에 서울 중구 남창동 상동교회에서 우당 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회장 홍일식) 주관으로 열린다고 16일 밝혔다.
추모행사는 모종률 서울북부보훈지청장, 안홍순 광복회 부회장, 김영종 종로구청장, 최창식 중구청장, 유족대표로 이규동(子), 이종찬(孫子) 前국정원장, 이종걸(孫子) 국회의원, 광복회원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부 추모예배, 2부 추모식 및 장학금 수여식, 3부 추모음악회로 이어진다.
우당장학회(이사장 윤장순)에서는 매년 우당 선생의 순국 주기에 맞추어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 올해 순국 79주기를 맞아 윤주연 애국지사(‘90년 애족장)의 손자 윤재환(한국외국어대) 학생 등 독립유공자 후손 52명에게 5,0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한다.
이회영 선생은 한말 이조판서를 지내던 이유승의 4남이다. 일제에 나라가 망하자 편안한 생활과 막대한 재산을 마다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0년 우당 선생 가족들은 당시 국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던 재산을 처분해 6형제 40명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우당 선생의 형제들은 모두 독립운동 하는 것에 적극 찬성, 재산을 처분한 뒤 중국으로 떠났다.
이때 급하게 처분했던 재산은 당시 40만 원. 이를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약 600억 원에 달한다. 집 한 채가 100원, 쌀 한 가마니가 3원이던 시절의 국민생활수준과 함께 고려하면 국내 10대 재벌이 가진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당 선생 가족들은 이 재산을 온전히 독립운동에 쓴다. 1910년 봄 신민회 등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장(鄒家莊)에 정착한 우당 선생은 1912년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1924년 4월 류자명이을규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 <정의공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1928년 7월 남경에서 열린 한중일필리핀대만베트남 등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인 ‘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식장에서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며, 1931년 정해리김광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과 관계를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우당 선생 집안의 재산은 독립운동을 하며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우당 선생은 재산이 다 사라지기 전 1932년 독립운동 세력을 모으고, 자신은 만주 주둔 일본군사령관을 암살하기 위해 만주로 가던 중 일제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받다 옥중에서 순국했다.
우당 선생의 가족들 또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형제 중 가장 재산이 많았던 이석영 선생은 만주에서 굶어죽었다. 6형제 중 광복 때까지 살아남은 다섯째 이시영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취임한다.
정부에서는 우당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전경웅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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