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6일 금요일

한국일보 : [조재우의 공감] 한비야 세계시민학교 교장

 

젊은 시절 난 지독한 루저였다… 그때 맷집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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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2.01.07 02:37:21
  • 한비야 세계시민학교 교장은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세계시민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불쏘시개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세계시민학교 교장 ' 취임
학교 만들려고 광고까지 출연, 재능 열정 인간관계 기부… 3년간 공익근무한다고 생각
서른셋에 떠난 여행
10살때부터 꿈 꿔 왔던 일, 걸어서 지구 세바퀴 돌아… 오지서 치한 만나 위기 순간도
가슴을 뛰게 하라
어떤 세상 만들고 싶나, 나서라… 이기기보다 멋진 경기가 좋아… 이제 50대, 전반전 끝났을 뿐
청소년의 롤모델로
칭찬이자 십자가… 그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어, '내가 뭐가 될까' 아직 진행형

'바람의 딸' 한비야는 이름 그대로 평생 세계의 들판을 날아다녔다. 날 비(飛)에 들 야(野).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 한국국제협력단 자문위원 등의 중책도 맡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직책은 정초에 취임한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이다. 그의 꿈을 펼칠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가 시원한 세상, 공평한 세상,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이다. 그의 말은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54세의 나이에도 그의 눈은 강렬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지독한 루저(패자)의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때 평생 받을 모욕과 차별을 다 받았다. 하지만 그 시절이 그의 인생을 단단하게 하는 뿌리가 됐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무엇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계속 꿈을 꾸기 때문이란다.
-요즘 활동이 많다.
"올해까지가 원래 안식년이다. 반은 중국, 반은 백두대간에서 보내고 내년 1월1일부터 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10월에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이 됐다. 갑자기 공적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미뤘던 일을 10월부터 하다 보니 바빠졌다. 직함이 많이 생겼다. 예전에는 월드비전 구호팀장, 그전에는 오지여행가, 바람의 딸, 희망의 딸이었다. 최근에 대박이 났다. 유엔 자문위원, 이화여대 초빙교수에다 국제구호요원자격증을 확보해서 정식 강사가 됐다. 거기에 고 이태석 신부가 있던 남부 수단 파견근무도 확정됐다. 코이카 자문위원도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시민학교 교장이다. 교장선생님이라는 직함이 좋다. 5,000만 국민이 재학생이다. 초대 교장으로 이 멋진 대한민국 국민이 세계시민으로서 책임과 역할, 즐거움 등을 느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 3년이 임기다."
-월급은 주나.
"그런 건 없다. 통 큰 기부다. 재능 열정 에너지 인간관계 기부다. 3년간 공익근무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저서 <그건 사랑이었네> 에 '왜 세계시민학교가 중요한가'라는 것이 나온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1,000~2,000원에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2001년에 월드비전에서 연락이 와서 처음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를 했다. 1년 중 반은 현장에 가고, 나머지 반은 그 현장 실태를 알려 도움을 청하고 모금을 해서 다시 갔다. 한번 방송에 나가면 6억원씩 걷혔다. 하지만 5년쯤 지나면서 이런 방식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좋지만, 내가 사람들을 자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장면을 내보내고 말로 잘 설득을 하는 것이다. '자극을 하니 그 반응으로 돈을 주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왜 이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인가'를 얘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잘 설명을 하고 이해를 시켜서 그것에 대한 실천이라는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했다. 월드비전에서도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다른 현안에 밀리고 있었다. 세계시민학교를 만들자고 했더니 회장이 나보고 돈 벌어오라고 했다. 그래서 생전 안하던 광고를 했다. 신발 등산복 광고는 꺼렸다. 마침 SK광고 섭외가 들어왔다. "
-세계시민의식이 뭔가.
"세계시민의식은 시대정신이고 이 시대의 화두가 될 수 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이 시대정신이다. 전쟁 때는 재난복구, 그 이후에는 산업화, 민주화 등으로 옮겨갔고 복지사회, 공정사회로 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라는 범위가 확 넓어져야 한다. 대한민국 수준은 안 된다. 우리가 필요한 나라 뿐 아니라 우리를 필요로 하는 나라도 골고루 있어야 한다. 도울 곳이 있으면 도와야 한다. 무역1조 달러, 경제력 10위 등으로 볼 때 이 일을 하는 것이 이 시대에 꼭 맞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유엔 자문위원은 어떤 역할을 하나.
"구호현장에는 3가지 주체가 있다. NGO, UN이나 적십자사, 국가 등이다. 이들이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효과적으로 구호활동을 할 수 있다. 이들이 정맥 동맥 실핏줄처럼 얽혀있다. 그래서 유엔을 가고 싶어했다. 자문위원이라는 것은 국가 대 국가라는 큰 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18명중에 한국사람 한 명이 들어간 것은 큰 영광이다. 풀타임은 아니다. 나는 현장사람이다. 나의 '베스트 페이스'는 현장에서 말라리아에 걸리기 직전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다. 자문위원도 현장을 발판으로 해야 한다. 세계 시민학교 교장도 그런 차원에서 맡은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자 세계시민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마중물, 불쏘시개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열정의 불이 붙어 세계로 확산되어 세계 전체가 사랑과 열정의 불바다가 되었으면 좋겠다."
-서른 셋에 왜 떠났나.
"어느 날 갑자기 떠난 것은 아니다. 10살 때부터 하고 싶었다. 세계지도를 보면서 전 세계가 나의 무대라는 생각을 했다. 부모님이 세계 무대로 살기를 원했다. 집에 세계 지도가 늘 붙어있었다. 세상을 한 바퀴 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한번 돌 거라고 생각했다. 걸어서 지구 세 바퀴를 돌았다. 7년간 오지여행을 했다. 33살부터 40살까지. 홍보회사에 있으면서 3년간 번 돈과 중간중간 기고한 것으로 여행했다."
-위험한 것은 없었나.
"많았다. 치한을 만나면 길거리에서 따귀를 갈긴다거나 소리를 질렀다. 오지에서 남자가 치근대면 에이즈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한다. 위험한 일을 당하면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가슴을 뛰게 하라고 강조하는데.
"한국일보 인터뷰를 한다고 했을 때 가슴이 뛰었다. 한국일보는 해외에 나가도 독자가 많다. 아버지가 한국일보 기자였다. 나중에 다른 신문사로 옮겼지만 가슴이 뛰었다. 바로 가슴이 뛰는 사람의 얼굴이 지금의 내 얼굴이다.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이야기 한다.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 누가 시켜서 대충하면 가슴이 뛰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100도로 끓어야 한다. 99도까지는 아무나 잘 끓을 수 있다. 하지만 100도로 끓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르다. 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예쁜 얼굴이다. 100도와 99도는 1도의 차이지만 끓느냐 안 끓느냐의 차이다. 1도는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를 매일 매일 생각하면서 그쪽으로 한발한발 다가가는 사람들이 내는 열기다. 한번 맛본 사람들은 그 뜨거움을 못 잊는다. 어느 정도 열심히 몰두해야 그 뜨거움을 맞볼 수 있는지를 안다."
-가슴이 뛰게 하는 방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습을 해야 한다. 스스로 꿈꾸는 세상이 먼저 있어야 한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거기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나는 모두가 시원한 세상, 공평한 세상,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것을 위한 각론은 구호팀장, 세계시민학교 교장, 유엔 자문위원이 되는 것이다. 수단일 뿐이지 목표는 아니다. 꿈으로 가는 하나의 길일 뿐이다. 50대라면 이제 전반전이 겨우 끝났다. 멋진 경기를 펼칠 시간이 남았다. 이기는 경기도 좋지만 나는 멋진 경기가 좋다. "
-구호활동은 언제부터 생각했나.
"처음 여행을 할 때는 그런 생각까지는 아니었다. 꿈은 내가 정말 관심이 가는 일, 남이 시키지 않아도 밤새는 일, 돈이 안되고 계속 기웃거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면 그 다음이 보인다. 나도 세계일주를 하면서 오지를 다니다 1,000원으로 죽고 살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말발, 글발이 있다. 이걸 나를 위해서만 쓸 수는 없다. 구호활동을 하다보니 너무 멋진 세상이 펼쳐졌다. 강자가 약자를 돌보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청소년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다.
"그게 놀랍다. 나는 아무런 타이틀이 없던 사람이다. 얼마 전까지 백수였다. 근데 어디서 조사를 하면 내가 롤모델이라고 한다. 남자 롤모델은 이순신, 여자 롤모델은 한비야였다. 농담으로 나에게 장군급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 진행형이다. 앞으로 내가 뭐가 될까 궁금하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칭찬이자 십자가다. 실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지도밖으로 행군하라>가 100만권이 팔렸다.
"살 빼자는 것도 돈 버는 얘기도 소설도 아닌데 그렇다. 하루아침에 크리넥스에 불붙듯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005년 이후 꾸준히 해서 100만권이다. 다른 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책이 100만권씩 팔린 예가 없다. 출판사 사람들이 외국에서 사람들 만나 얘기하면 깜짝 놀란다. 독자들이 신기하고 훌륭하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용 책도 나왔다. 수익금으로 유학도 하고 세계시민학교도 만들었다. 그 책을 한 권이라도 산 분은 나를 유학시킨 분들이다."
-젊은 시절 패자의 인생을 살았나 보다.
"고교를 졸업한 뒤 6년만에 대학을 갔다. 그 시기가 나를 가장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때 아르바이트라는 아르바이트는 다 해봤다. 클래식다방 DJ, 가정교사, 임시 세무공무원 등 별것 다했다. 그때 고졸 디스카운트를 알았다. 그때 평생 받아야 할 모욕과 차별을 다 받았다. 그때 생각했다. 사회적 약자를 이렇게 대하는 구나. 한글을 모르는 돈 많은 아줌마도 가르쳤다. 어찌나 거드름을 피우는지 토하고 싶을 정도로 거만했지만 참았다. 그런 6년 때문에 단단해졌다. 그때 인생의 뿌리가 생긴 거다. 뿌리를 내리는 작업은 괴롭고 힘들었다. 용광로에서 쇠를 달구는 작업이다. 그 기간을 자청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내린 것이었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그때 맷집이 강해진 것이다. 그랬더니 웬만한 것은 힘들지 않았다. 죽지만 않으면 강해지더라. 6년간 나를 홀대했던, 인간적인 가치와는 관계없이 고졸이라는 타이틀만으로 나를 하찮게 봤던 사람들이 지금은 고맙다. 그때는 그들이 미웠고 두고 보자고 했다. 내 평생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을 월드비전에서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내가 한비야를 잘 키웠다'고 했다. 가장 나를 심하게 대했던 사람이다. '고졸이 뭐가 되겠나'라고 폄하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람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 조련사였다. 지금은 모두를 용서했다."
-결혼은 왜 안했나.
"맨날 받는 질문이다. 지겨워죽겠다 정말. 누가 안하고 싶겠나. 사람을 찾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다정한 남자가 좋다. 돈은 정말 필요 없다. 무조건 연하가 좋다. 나랑 같은 스피드로 산을 타려면 나보다 젊어야 한다. 10년 정도 연하. 깔깔."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때문에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음에 드는 내가 좋아서 가슴 뛰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런 일을 할 때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찾지 말고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라. 그것부터 시작해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 한비야는 누구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영문과, 미국 유타대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국제홍보회사 버슨마스텔러에 근무하다 사표를 내고 33살에 오지여행을 시작, 7년간 지구를 세 바퀴나 돌았다. 그 때문에 '바람의 딸'이 됐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을 거쳐 지금은 세계시민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 한국국제협력단 자문위원 등도 겸하고 있다. 다양한 그의 저서 중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100만부 이상 팔렸다.

한국일보 : [조재우의 공감] 한비야 세계시민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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