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6일 목요일

안정된 교직 버리고 가난한 흑인 섬긴 '억척 엄마'

 

입력 : 2011.10.07 00:07

▲ 김용애 선교사
[남아공서 20년간 봉사, 김용애 선교사]
유치원 세워 아이들 가르치고 에이즈 고아들 거둬 길러…
11일 '언더우드 선교상' 수상
"힘들 때마다, 넘어지려 할 때마다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다 주시는데 내가 왜 걱정하나…."
공주사대를 나와 교사로 26년을 근무했다. 1991년, 안정적이고 행복했던 교직생활을 돌연 박차고 생면부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쪽으로 130㎞ 떨어진 포체프스트룸의 빈민가에 정착했다. 그 뒤로 20년간 그곳 사람들과 살았다. 결혼도 않고,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유치원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에이즈 고아들을 거둬 길렀다. 김용애(67) 선교사, '포체프스투룸의 억척 엄마'다.
오는 11일 연세대 '언더우드 선교상'을 수상하는 김 선교사를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얼굴과 손목 등에 아직 남아 있는 흉터들을 보여줬다. "지난 7월 12일 자정쯤이었어요. 숙소에 흑인 강도 6명이 들이닥쳤죠. 매주 약 2500명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거든요. 그러니까 대단한 부자라도 된다고 생각했나 봐요." 강도들은 김 선교사를 의자에 앉혀 두 손을 뒤로 묶고 5시간 동안 때리고 위협했다. 이들은 결국 약간의 음식과 옷가지, 먹을 것을 나눠줄 때 쓰는 자동차를 빼앗아 동트기 전 달아났다.
치료를 위해 한국에 휠체어를 타고 돌아온 김 선교사는 두 달간 입원했다가 최근에야 퇴원했다. "사고 소식이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더군요. 몸도 다 나았으니 이제 돌아가야죠."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듯 김 선교사가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고 살이 썩어들어가듯 퍼렇게 물들었다. 제대로 된 약도 없던 시절이었다. "의사가 '집에 데려가서 죽으면 묻어주라'고 어머니에게 절 안기셨대요. 하지만 어머니는 차마 묻을 수가 없어서 나를 눕혀 놓고 밤새 기도하셨다더군요." 하룻밤 뒤, 기적처럼 다시 숨이 붙었다.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김 선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모든 걸 다 버리고 따르겠다"고 결심했다.
▲ 20년 교직생활을 훌쩍 떠나 47세에 혼자 남아공으로 건너간 김용애 선교사는 이제 매주 2500여명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직업훈련센터와 유치원, 에이즈 보육원 등까지 운영하며 현지 흑인 빈민들과 함께 살아간다. 포체프스트룸의 에이즈 보육원 앞에서, 현지 아이들과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김 선교사 일행이 음식을 나눠주길 기다리는 모습. /포체프스트룸 뉴 비기닝 센터(PNBC) 제공

그렇지만 서울 연희동 원천교회를 다니던 1990년 처음 아프리카 선교사 제안을 받았을 때는 거절하고 싶었다. 가기 싫다고 울며불며 여섯달 동안을 매달리며 기도했다. "안 갈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해서 살려두셨는데, 하나님과 약속을 어길 수는 없잖아요." 1991년 2월 28일 학교에 사표를 내고, 3월 4일 남아공행 비행기를 탔다. 47세 때였다.
처음엔 한숨과 눈물뿐이었다. 학교 운영자로 초빙된 줄 알았는데, 정작 현지엔 함께할 교사도 학교 건물도 없었다. 맨바닥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김 선교사는 "억지로 기부를 요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때그때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착 3년 만에 구제와 선교 사역의 본부 격인 '포체프스트룸 뉴 비기닝 센터(PNBC)'를 세울 땐 병상의 아버지가 건물 부지를 기부했다. 돈이 필요할 때면 어디선가 기부가 들어왔다. 현지인들에게 나눠주는 음식도 모두 현지에서 기부받아 해결한다. 대형 수퍼마트 체인이 유효기간이 얼마 안 남은 빵, 채소, 고기, 조리 음식 등을 하루 소형 트럭 한 대 분량씩 넘겨준다. 닭공장에서 매주 월요일 닭을 한 차 실어오고, 현지 언론에 보도된 에이즈 보육원 기사를 보고 한 달에 10㎏짜리 옥수수 100포대를 기부하는 독지가도 생겼다.
지금은 PNBC 건물에 냉동고가 13개나 되고 일주일에 학교 3곳, 교회 5곳 등을 통해 2500여명의 흑인 빈민들에게 음식을 나눠 줄 정도로 규모도 커졌다. PNBC에서는 교회와 유치원, 목사 자격증을 줄 수 있는 신학 코스, 직업훈련학교, 에이즈 보육원 등을 운영한다.
선교는 쉽지 않았다. 흑인들은 "백인의 신은 죽어도 안 믿겠다"고 버텼다. "예수님이 흑인이냐 백인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 선교사는 말한다. "저 하늘의 해는 흑인의 해인가요, 백인의 해인가요? 태양이 어떤 인종의 것도 아니듯,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구하러 세상에 오신 거예요." 신기하게도 동양에서 온 자그마한 체구 여성의 말에 흑인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현지 교회도 9곳이나 개척했다.
남아공에는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많았다. 부모에게서 에이즈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열 살도 되기 전에 죽어갔다. 김 선교사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에이즈 고아 여섯 아이를 위탁받으면 집 한 채를 주는 방식을 고안했다. 현재 6채가 완공돼 6가족이 입주했고, 2채가 건설 중이다. 목표는 50채로 잡았다. 최소 300명의 에이즈 고아들이 새 부모를 만나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온 삶에 정말 후회는 없을까. "한 번은 하나님께 막 떼를 부렸어요. 너무 힘들다고. 왜 나한테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키시냐고. 그때 '내가 네게 준 것이 부족하냐'고 물으시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아뇨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하고 답했지요." 남아공으로 '귀국'을 준비하는 김 선교사가 해맑게 다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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