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4일 화요일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나도 '마누라'가 있었으면 좋겠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나도 '마누라'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력 : 2011.10.03 23:03 / 수정 : 2011.10.04 16:20

▲ 김윤덕 기획취재부 차장
부장 눈치보며 집으로 '출근'
애들 먹이고 씻기면 어느새 밤 10시
공부 못하는 아들 때문에 울컥했는데
새벽에 귀가한 남편은 느닷없이 '골프타령'
내게 '마누라'가 있었다면 진작에 출세했을 것이다
PM 7:00
"벌써 가?"
부장의 눈화살을 등짝에 다발로 맞으며 사무실을 나선다. 찬바람에 몸이 으슬으슬하다. 버스는 왜 이리 더디 오는지. 지금쯤 새싹반 선생님 눈꼬리는 V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이가 어린이집 신발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두 팔을 벌린다. "엄마아~."
아이 손을 잡고 마트로 간다. 큰애가 학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저녁밥을 지어야 한다. 현관문을 따고 들어서기 무섭게 전화벨이 울린다. "집에 왔냐? 저녁밥은 지었냐? 애비 반찬은 만들었냐?" 며느리는 회사에서 고스톱 치다 오는 줄 아시는 시어머니시다. 콩나물을 삶고, 계란을 부친다. 돼지 목살에 신 김치 숭숭 썰어 찌개를 끓인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배고파 죽겠다고 펄펄 뛰는 아이 앞에 밥상을 번개처럼 차려낸다. 입 짧은 둘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밥을 떠먹인다. 아이들이 남긴 반찬을 긁어모아 밥 위에 얹는다. 입안이 모래를 씹은 듯 까끌까끌하다. 아, 내게도 '마누라'가 있었으면. 고슬고슬 지은 밥에 따끈한 된장국 끓여주며 "오늘 고생했지? 많이 먹어" 하고 등 두드려주는 마누라가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PM 10:00
아이들 씻기고 이부자리 펼 때까지도, 대통령보다 바쁜 낭군님은 깜깜소식이다. 둘째를 재우고 큰아이 방으로 간다. 게임을 하다가 화들짝 놀란 녀석이 배시시 웃는다. 숙제 다 했어? 준비물은 챙겨놨어?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는 녀석의 책가방을 점검한다. 안쪽 주머니에서 수상한 물건이 만져진다. 꼬깃꼬깃 접힌 종이뭉치의 정체는 수학 단원평가 시험지다. 붉은 작대기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학기 초 담임의 충고가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초등학교 때 밀리면 영영 못 따라가는 거 아시죠?"
아이를 책상 앞에 앉힌다. 낼모레 중학생인 녀석의 곱셈·나눗셈이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설마 이것도 못 푼 거야?" 녀석이 입을 삐죽거린다. "맞벌이 아들이 이 정도면 잘한 거야, 엄마." 등짝을 냅다 후려친다. 함께 문제를 푼다. 엄마는 쩔쩔매고 아이는 하품을 한다. 편도선이 부었는지 목이 따끔거린다. 아, 내게도 '마누라'가 있었으면. "애들 공부는 내게 맡기고 당신은 회사일만 열심히 해" 하고 어깨 주물러주는 신사임당 같은 마누라가 있었으면 좋겠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AM 2:00
띵동! 초인종 소리에 선잠을 깬다. 열쇠를 못 찾을 만큼 만취하고도 집 찾아오는 실력은 노벨상감이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렇게 마셔? 일찍 들어와서 애 수학 좀 봐주면 안 돼? 누군 마시고 싶어 마시냐. 남자가 술 빼고 출세를 어떻게 하냐. 회식도 근무의 연장인 거 몰라? 야근수당도 안 나오는 회식이 어째서 근무의 연장인지, 회식만 잡히면 그대 눈은 어찌 그리 반짝이는지,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치고 출세한 사람 본 적이 없거늘. 정작 그대의 마누라는 부장 입에서 회식의 'ㅎ'자라도 나올까봐 가슴을 졸이고, 회식 자리에서도 시계만 쳐다보다가 "그럴 거면 애나 키우지, 뭐 하러 회사엘 다녀?" 소릴 듣고 다닌다는 걸 이 남자는 알까.
꿀물을 탄다. 소파에 대(大)자로 뻗은 남편의 양말을 벗겨낸다. 전골 국물 빨갛게 튄 와이셔츠 앞자락을 보며 옥시크린이 다 떨어졌음을 상기한다. 아, 내게도 '마누라'가 있었으면, 회식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모처럼 스트레스 좀 풀었어?" 하고 웃어주며 술국 끓여주는 마누라가 있었으면 좋겠다.
AM 6:00
알람이 쩌렁쩌렁 울린다. 오한에 천근만근 가라앉는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나간다. 물에 불린 황태를 들기름에 달달 볶아 북어국을 끓인다. 속앓이 한번 오지게 해봐야 술을 입에도 안 댈 것을, 미우나고우나 가장(家長)이니, 주여, 내 마음에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깨작깨작 밥알을 굴리던 남편이 느닷없이 골프 타령이다. "골프를 배워야겠어. 사장님 골프 시중들다 고속 승진한 사람이 수두룩하대." "골프톡(talk)은 가고 엘리베이터톡이 대세라던데?" "무식한 소리 좀 하지 마." 큰애 학교 보내고, 둘째는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나니 벌써 8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다. "중고 골프채 있으면 좀 빌려줄 수 있어? 나도 우리 남편 출세 좀 시켜보려고, 흐흐…." 민망함 때문인지, 몸살 때문인지 등짝에 식은땀이 흐른다.
아, 내게도 '마누라'가 있었으면. "애들은 내가 볼 테니 토요일 하루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하고 집에서 내쫓아주는 마누라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 열 가지 일은 자기가 하고, 난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게 팍팍 밀어주는 마누라가 있다면, 나는 골프 같은 거 안 치고도 진작에 상무님 되었을 것이다. 전무님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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