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E2면| 기사입력 2011-10-11 00:10 | 최종수정 2011-10-11 13:42
광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⑩ “배 앞을 보면 멀미 나지만, 몇백㎞ 앞을 보면 바다는 잔잔하다”
[중앙일보 이나리.심서현]
내 40대 초반은 화려했다. 19세 때 계획한 '1조 엔, 2조 엔 규모의 큰 승부를 한다'는 목표를 조기 달성한 셈이었다. 내 포부를 몽상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했던 이들도 그때쯤엔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쳐주었다. 1999년 소프트뱅크는 10여 개 자회사와 120개 이상의 손자회사를 둔 대그룹이 됐다. 야후를 비롯해 클릭 수가 세계 1, 4, 9, 12위인 사이트가 우리 소유였다.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50%가 여기서 발생했다. 매달 130종, 900만 부의 잡지를 찍어냈다. 한창 주가가 오를 땐 재산이 일주일에 1조원씩 불어나곤 했다. 그해 타임과 뉴스위크는 각각 나를 '올해의 아시아 인물'로 뽑았다. 그런데 이듬해 3월 '하늘'이 무너졌다. '닷컴 버블'이 한순간에 꺼져버린 것이다.
주당 1200만 엔(약 1억2000만원)을 넘나들던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다. 내 재산 또한 7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내려앉았다. IT기업가들은 졸지에 범죄자 취급을 당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야후의 제리 양,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창업자의 처지도 비슷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돈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빚이 재산보다 더 많았다. '아차' 싶었지만 또 그럴수록 전투력이 치솟았다.
나는 99년 이미 주주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앞으로는 인터넷 사업에 올인할 거다. 그 외 사업은 모두 정리하겠다. 전화·컴퓨터가 그랬듯 등장 5, 6년 만에 흑자를 내는 신사업은 없다. 우리도 한동안 적자를 각오해야 할 거다.”
# 디지털 정보혁명, 꿈을 버리지 않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랬다지만 2000년의 버블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그렇더라도 인터넷은 결국 부활할 거란 내 믿음엔 변함이 없었다. 외려 기업 가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이때야말로 투자의 적기라 판단했다. 2000년 한 해에만 투자사를 600여 개로 늘렸다. 나는 이전부터 “예측 못할 앞날은 없다”고 믿어왔다. 배를 타고 가며 바로 앞을 보면 멀미가 나지만, 몇백㎞ 앞을 내다보면 바다는 잔잔하고 뱃속도 편안해진다.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아울러 나는 진짜 큰 승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에 초고속 인터넷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일본 인터넷은 속도가 느리고 요금도 매우 비쌌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 사업을 처음 구상한 건 인터넷 주가가 한창 고공행진을 할 때였다. 돈이 없다고 지레 포기하긴 싫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밀어붙이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돈도 없다, 욕도 먹을 대로 먹었다, 겁날 게 뭔가.
계획을 밝히자 주위의 반대가 대단했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한다는 건 곧 일본 최대 IT기업인 NTT에 정면 도전함을 의미했다. 임원들은 여기 덧붙여 “경쟁사 좋을 일을 왜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맞다. 이 사업은 잘되면 나 하나 덕 보는 게 아니다. 야후재팬(소프트뱅크 자회사)의 경쟁자인 다른 인터넷 기업들도 톡톡히 혜택을 보게 돼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배포가 그리 작아서 어찌할 건가. 야후재팬이 잘되면 그만인 거지, 경쟁사 잘되는 것까지 왜 걱정이야? 야후재팬 이용자만 싸게 주자고? 이런 멍청한 놈들!”
# “당신을 믿는다” 주주 눈물에 이 악물어
내 뜻은 정말 그랬다. 소프트뱅크를 왜 만들었나.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싸고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까. 혹자는 “그렇게 애써봤자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누구 덕분이었는지 얼마 안 가 다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꾸했다.
“그럼 어떤가.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필요 없다는 남자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일본 개화기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한 말이다. 그렇듯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인간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주주들을 설득해야 했다. 안 그래도 주가 폭락으로 주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총일,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주주들 앞에 서서 그들의 비난과 타박, 호소를 마음으로 들었다. 시간을 이유로 말을 끊지도 않았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이 지나자 주주들의 표정이 한결 담담해졌다. 한 할머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남편 퇴직금을 몽땅 털어 소프트뱅크 주식을 샀어요. 그게 99% 하락해 1000만 엔이 10만 엔이 돼버렸어요. 절망스러웠는데 오늘 얘기를 듣고 보니 당신 꿈에 투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믿을게요. 부디 열심히 해주세요.”
주주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박수로 나를 격려해주었다. 깊이 감사의 절을 올리며 나는 이를 물었다. '저 마음, 저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결과로 돌려드리겠다'.
정리=이나리 기자
◆닷컴 버블(dot-com bubble)=인터넷을 중심으로 IT 분야에서 1995부터 2000년 초까지 이어진 거품 경제 현상. 2000년 3월 10일 미국 나스닥에서 절정을 이룬 버블(거품)은 그 다음 날부터 붕괴하기 시작해 단 6일 만에 주식가치의 9%가 사라졌다. 이후 2004년까지 살아남은 닷컴기업은 절반에 불과했다.
손정의·저커버그·베조스
WSJ '제2의 잡스' 꼽아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이 '포스트 잡스' 시대를 이끌 혁신가로 지목됐다. 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헨리 포드와 토머스 에디슨의 뒤를 이었듯 혜안을 지닌 또 다른 혁신가가 나타날 것이라며 손 사장을 주요 후보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의 끊임없는 기업가 정신과 도전이 잡스를 닮았다며, 2008년 애플을 설득해 일본의 대형 통신사 NTT도코모를 제치고 소프트뱅크의 아이폰 출시를 따낸 것을 한 예로 들었다. 중국 알리바바의 잭 마 사장도 '아시아의 잡스'로 주목받았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는 걸어온 길이 잡스를 닮은 '리틀 잡스'로 꼽혔다. 그도 잡스처럼 대학을 중퇴하고 창업가의 길을 택했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는 '잡스에 가장 가까우며 애플에 가장 위협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전자제품, 가구뿐 아니라 영화·음악 콘텐트를 유통하는 거대 온라인 업체로 키웠다.
WSJ는 '새로운 잡스'의 깜짝 등장 무대로는 에너지와 건강 진료시스템 분야를 주목했다.
심서현 기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