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9일 목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⑦ 주식 상장 성공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⑦ 주식 상장 성공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29 00:02 | 최종수정 2011-09-29 10:15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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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는 모험 아닌 과학 … 2만 페이지 분량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중앙일보 이나리]
중증 간염을 이겨내고 일선에 복귀했다. 1986년 5월, 스물아홉이 코앞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투병 중 나 대신 사장으로 일한 이가 애초 약속을 뒤집었다. 자리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이사회를 통해 '임원 40세 정년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했다. 40세가 넘은 임원은 재임용이 안 될 경우 퇴사 절차를 밟게 했다. 나는 정이 많은 편이다. 한번 준 맘은 쉬 거두지 않는다. 재능과 인품이 뛰어난 이를 보면 폭 빠진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다. 아픈 기억들이다.
#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여라
조직 문제만큼 골치 아픈 게 빚이었다. 무려 10억 엔. 다시 발명에 매달리기로 했다. 나는 미국 유학 시절 다중어번역기 개발로 사업 밑천을 마련한 경험이 있다.
발명의 요체는 '불편과 불합리를 해결하는 것'이다. 마침 당시 막 자유화된 전화 서비스에 주목했다. 고객이 새로 설립된 전기통신회사를 이용하려면 추가 번호를 눌러야 했다.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이 다 다른데, 그중 싼 회선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개발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 IT기업 포벌(Forval)의 오쿠보 히데오(57) 창업자와 뜻이 맞았다. 포벌은 현재 일본의 대표적 IT기업이다. 최근에는 한류 스타 원빈씨를 광고모델로 내세워 화제가 됐다. 우승자에게 명품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2년간 무상 대여하는 '포벌 스칼러십 콩쿠르'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오쿠보는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이다. 함께 제품을 개발한 게 87년이니 벌써 25년을 쌓아온 우정이다.
우리가 개발한 NCC BOX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유사품보다 훨씬 싸고 작은 데다 성능도 우수했다. 이 기기 덕분에 당시 일본의 통신 비용이 크게 줄었다. 회사엔 20억 엔의 로열티 수입이 생겼다. 빚을 갚고도 10억 엔이 남았다. 나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때까지 우리 회사의 정확한 이름은 '일본 소프트뱅크'였다. 나는 거기서 '일본'이란 단어를 떼어냈다. 이어 미국 IT업체들과 적극적 교류에 나섰다. 당시 내가 열심히 부르짖은 게 '타임머신 매니지먼트'다. 거창한 명칭이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당시 미국의 IT산업과 시장 환경은 일본을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미국의 제품·기술·서비스를 들여오면 몇 년 뒤 일본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 봤다. 열심히 태평양을 넘나들었다. 미국의 잘나가는 기업,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만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MS)와 노벨, 시스코시스템스다.
# MS 업고 일본 컴퓨터 업계 평정
80년대 후반 일본산(産) 컴퓨터들은 회사마다 운영체제(OS)가 다 달랐다. 나는 언젠가 대부분의 컴퓨터가 같은 OS를 탑재하리라 봤다. MS 윈도가 그중 가장 강력한 후보자였다. 90년을 전후해 나는 MS의 빌 게이츠 창업자를 여러 차례 만났다. 일본 내에서 MS 소프트웨어(SW)의 독점 판매권을 달라고 했다. 빌은 쾌히 응했다. 이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92년 MS가 내놓은 윈도3.1이 정말 일본 컴퓨터업계를 평정했다. 윈도상에서 구동하는 엑셀·파워포인트 같은 SW 또한 덩달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본 SW 시장 규모는 대략 한국의 스무 배다. 인구는 두 배가 좀 넘을 뿐이지만 저작권 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MS의 독점 판매권을 가진 우리 회사 매출도 쑥쑥 올랐다. 92년 1000억 엔이 넘었고, 93년엔 더 많이 벌었다. 95년에는 MS와 합작회사인 '게임뱅크'를 설립했다. 빌과 나는 1~3개월에 한 번씩은 꼭 만나는 사이가 됐다. 95년 말 그에게서 소포 하나가 왔다. 빌의 첫 저서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이었다. 표지 안쪽엔 그의 사인과 함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마사, 당신은 나와 같은 승부사다(Masa, You are as much risktaker as I am).”
그렇다고 소프트뱅크가 MS만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다. 90년 MS의 경쟁사인 노벨과 일본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2001년 파산한 노벨은 당시만 해도 MS와 어깨를 견주는 SW기업이었다. 이 회사의 마지막 최고경영자(CEO)가 바로 현재 구글 회장인 에릭 슈미트다. 94년에는 시스코시스템스 일본법인에 투자했다. 지금은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됐지만 20년 전엔 벤처 티를 막 벗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던 중 사업에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94년 7월 주식 공개에 성공한 것이다. 주당 1만8900엔. 당시 최고가였다. 소프트뱅크는 단번에 2000억 엔의 거금을 쥐게 됐다. 쓸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인수합병(M&A)이었다.
# 인터넷 세상 안내할 '보물지도'를 찾다
당시 일본에서 M&A는 생소함을 넘어 부정적인 무엇이었다. 대물림이 전통이요 가업을 생명처럼 여기는 문화다. M&A란 망한 기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거나, 다른 이가 애써 일군 기업을 '빼앗아가는' 행위일 뿐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디지털 정보혁명의 원대한 꿈을 이루려면 통상의 방식으론 안 된다. 주류 분야, 주류 시장으로 단번에 치고 나갈 기회를 잡아야 한다. 병법의 최고봉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아닌가.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게 바로 M&A다. 적대적 M&A란 것도 있지만 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요즘도 이런 방식의 사업 확장을 일종의 도박이나 '손 안 대고 코 푸는 일'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M&A야말로 가장 치열한 숫자 싸움이다. 무엇보다 어떤 기업에 얼마를 투자할지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나는 향후 시장을 60% 이상 점유할 가능성이 없는 회사, 이미 너무 많은 투자자가 침을 흘리는 회사, 현금 흐름(cash flow)이 위태로운 회사는 거들떠도 안 봤다. 비용 대비 효과를 가늠하기 위해 1만, 2만 페이지 분량의 시뮬레이션도 마다하지 않았다.
분야로 치자면 미래 금맥인 IT서비스, 그중에서도 '정보의 길목'을 장악하는 데 진력했다. 95년 초 내가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를 1800억 엔에 사자 다들 “돌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딜이 없었다면 야후 투자도, 야후재팬 설립도, 오늘날의 소프트뱅크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내겐 막 열린 인터넷 세상을 안내해줄 '보물지도'가 절실했고, 최신 IT정보의 집산지인 지프 데이비스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남들에겐 미친 짓이 내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던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의 일본 귀화=손정의 회장은 1990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손'이라는 성(姓)를 그대로 쓰려 하자 정부가 막았다. '한 사람만 쓰는 성을 허용할 순 없으니 일본 성을 쓰라'고 했다. 손 회장 부인이 나섰다. 본인이 먼저 성을 '손'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덕분에 한국식 성을 지킬 수 있었다. 손 회장은 귀화와 관련해 “두 딸이 생활하는 데 이런저런 불편이 없어졌고, 내 입출국 수속도 간편해졌다”는 식으로 심상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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