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피아노도 없었던 16세 한국 소녀… 세계적 음악학교서 모셔 가다
- 박세미 기자 runa@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기사
입력 : 2011.09.30 03:03
- ▲ 강채리양이 지난 4월 방한한 세계적 재즈 거장 퀸시 존스(오른쪽)를 만났다. /강호준씨 제공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팝음악 사관학교' 버클리 음대에 최연소 입학한 강채리양
2009년 10월, 서울 대학로 서울재즈아카데미 연습실에 14세 소녀가 들어섰다. 미국에서 온 음악 교수 3명이 그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다. 우수한 학생을 뽑으려고 미국 버클리음대(Berklee College of Music)에서 온 입학사정관들이었다.
교회 부목사의 딸 초등학교 졸업후 재즈 공부… 선교음악하던 엄마보며 사랑 전하는 음악 꿈 키워
팝의 거장 퀸시 존스, 연주 듣고 "언빌리버블!"
피아노 앞에 앉은 소녀는 일본 재즈 피아니스트 우에하라 히로미의 '톰과 제리'를 연주했다. 원곡을 직접 편곡한 완전히 새로운 곡이었다. 놀라운 표정의 교수들에게서 질문이 쏟아졌다. "훌륭하다. 블루스도 되느냐?" "청음(聽音)과 화성(和聲)은 어떤가?" 그날로 소녀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한 달쯤 뒤에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세계 팝음악 사관학교'라는 버클리음대(퍼포먼스학과)에 정규 음악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고 한국인 최초로 '총장 장학생(Presidential scholarship)'으로 입학한 강채리(16)양 이야기다. 그는 역대 한국인 입학생 가운데 최연소이고 현재 버클리음대 재학생 중에서도 가장 어리다. 이 학교는 퀸시 존스, 존 메이어 같은 세계적 팝스타와 하워드 쇼어('반지의 제왕') 등 세계적 영화음악가를 배출한 권위 있는 학교. 28일 전화로 만난 그는 "훌륭한 교수님과 위대한 뮤지션이 가득한 대학에 다니는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교회 부목사의 딸인 강양은 6세 때부터 교회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선생님은 선교 음악 활동을 하던 어머니였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돈을 내고 받는 전문적인 개인 교습은 꿈도 못 꿨고 집에 피아노도 없었다. 재즈음악을 시작하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교회에 다니던 한 음대생 언니가 "현대음악을 한번 해보라"며 가르쳐 준 게 계기였다. 단번에 재즈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학교를 다니면 음악 공부를 하는 데 제약이 많다. 중학교에 가지 않고 재즈 공부만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재즈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서울재즈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대학 입학에 필요한 중·고교 학력은 검정고시로 땄다.
강양은 원래 2010년 가을에 버클리음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등록금만 면제해 주는 '풀 튜이션(Full Tuition)' 장학금을 제안받은 것. 그러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 고(高)물가로 유명한 보스턴의 식비·주거비 등 생활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강양의 형편을 알게 된 대학 측이 올해엔 졸업 전까지 등록금은 물론 기숙사비·식비 등 생활비까지 모두 주겠다고 나섬에 따라 강양은 올가을 학기에 '지각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그사이 온갖 고민을 떠안으면서 전 더 성장했고, 더 좋은 일들이 생기더라고요."
강양이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멘토' 두 사람이 도움을 줬다. 재즈뮤지션인 정원영 호원대 실용음악과 교수는 2009년 가을 자라섬 국제재즈콩쿠르에서 최연소로 결선에 진출한 강양의 실력에 반해 무료로 사사(師事)하라고 자청했다.
- ▲ 14세 때인 2009년 자라섬 국제재즈콩쿠르의 결선 무대에 최연소로 진출해 연주하고 있는 재즈 피아니스트 강채리. /강호준(강채리 부친) 제공
다른 한 사람은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등 수많은 명반을 제작하고 연주한 팝과 재즈의 거장 퀸시 존스. 정 교수는 올 4월 방한한 퀸시 존스에게 '한국의 떠오르는 재즈 뮤지션 5인' 중 한 명으로 강양을 소개했고, 강양은 그의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연주를 마치자마자 퀸시가 '언빌리버블(unbelievable·믿을 수 없다)!' 하더라고요. 제가 버클리음대에 합격한 것을 알았는지 '네가 내 모교에 가게 됐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면서 뽀뽀도 세 번이나 하고…." 퀸시 존스는 강양과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고받는 이메일을 통해 "음악을 즐기면서 하라. 버클리에 들어온 이상 너도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즐기면서 하는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고 조언해줬다고 한다.
강양은 음악 활동 목표를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음악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부러지지 않는 희망과 사랑을 주기 위해 음악을 합니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아시죠? 빈민가 아이들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쳐 폭력과 가난으로 물든 사회를 교화했다는 오케스트라…. 그게 바로 제 음악의 최종 목표입니다."
- ▲ 2009 Seoul Jazz Academy Graduation Concert(강채리). /출처=유튜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