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6일 월요일

한국일보 : 홍미영 구청장 "무너지기 직전의 이웃 놔두고 나 혼자 편히 잠들 순 없었죠"

 

무너지기 직전의 이웃 놔두고 나 혼자 편히 잠들 순 없었죠"

[서화숙의 만남] ■ 빈민촌으로 이사 간 홍미영 인천 부평구청장
대학 때 뚝방촌 보고 충격… 빈민운동 뛰어들어
생활도 함께… 주민 더 잘 사는 행정이 목표죠

입력시간 : 2011.09.25 21:19:47
수정시간 : 2011.09.26 10:21:54
  • "가난하지만 부지런히 살려는 사람들, 무너져가는 집 앞에도 화분을 놓고 고추 파를 심고 꽃을 가꾸려는 이들에게 살 만한 집을 지어주세요."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인천시 부평구. 인구 57만명으로 전국에서 대구 달서구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자치구인 이곳은 가난한 사람이 많기로는 첫손에 꼽힌다. 부평구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일 십정동 빈민촌에 구청장이 살고 있다. 홍미영(56)구청장은 가족과 함께 살던 삼산동 아파트를 버리고 지난달 22일부터 방 두 칸(그 중 한 칸은 부엌을 겸한다), 화장실 하나인 십정동의 해님공부방에 얻어 살고 있다. 낮에는 공부방이라 밤 9시에 퇴근하고도 동네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어간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2009년에 이곳을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하고도 삽질은커녕 줄자 한 번 긋지 않는 사이에 올 여름 폭우로 집이 무너지는 등 동네 주민들이 위기에 처한 것이 뻔히 보이는데 구청장 혼자서 마음 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고 했다. 이곳은 '이대 나온 여자'인 홍 구청장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빈민운동을 새로 시작한 곳이자 1991년 초대 지자체 선거에서 그를 구의원으로 뽑아준 이웃들이 있는 곳이다. 그는 구의원에서 시의원을 거쳐 비례대표 국회의원(17대 열린우리당)을 지낸 후 지난해 7월에 부평구청장으로 부임했다. 벼룩이 처음 온 기자를 마구 물어대는 방 한 켠에서 가난한 동네를 살리겠다는 그의 의지를 들었다.
    _ 뭘 이사까지 하셨어요?
    "이곳은 40여년 전 인근 지역 개발로 쫓겨난 철거민들이 국공유지 야산에 무허가 주택을 지으면서 생겨난 마을입니다. 무너지기 직전의 집들이 많아서 당연히 주거환경개선사업의 우선 순위에 올라야 하는 곳입니다. 구청에서는 2005년부터 연차적으로 도시기반사업용 예산 165억원(국비 포함)을 LH에 지급했고요. 그런데도 수익성이 없다고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하지 않는 거예요. 지난 7월말에 집중호우로 산비탈에 있던 집 한 채가 무너져 내렸어요. 구청이 미리 알고 주민을 대피시키고 안전망을 세운 덕분에 인명사고는 나지 않았어요. 저는 그런 일이 터지면 LH에서 서둘러 해결책을 마련해줄 줄 알았더니 아무 반응이 없어요. 인천시조차 아직 주거환경개선지구 지정도 안된 다른 지역에 신경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내가 이 동네를 지켜주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겠구나 싶어서 짐 싸들고 들어왔어요. LH 이지송 사장에게 '영세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노후ㆍ불량주택을 신속히 개선하는 것이 이익 창출의 사업성보다는 우선하는 업무가 아니냐'고 현장 확인이라도 해달라고 지난 8일 문서를 보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어요. 원래 이런 공사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서민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일인데 엉뚱한 데 돈을 쓰고는 적자가 났다고 할 일을 외면하니 말이 되나요?"
    _ 언제까지 계실 예정인가요?
    "구청장 업무에 지장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무반응이라면 겨울까지 나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고 있어요."
    _ 원래 이 동네서 사셨다고요.
    "인천 만석동에서 빈민운동을 하다가 1986년에 이곳으로 왔어요. 1995년까지 살면서 애들도 다 이 동네 초등학교 중학교 다녔고요. 이 동네 분들은 다 제 피붙이 같은 분들이에요."(홍 구청장과 동네를 한바퀴 도는 동안 주민들은 그를 반겨 맞더니 동네 이웃끼리 그러듯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수다를 나누기도 했다)
    _ 원래는 서울의 부잣집 딸이었네요.
    "아버지가 자동차 배선 부품을 만드는 회사를 했어요. 집(회현동)에서 중학교(경기여중)까지 자가용 타고 다니고 피아노 치기 싫어서 도망 다니는 정도가 불만인 그런 시절을 살았어요. 대학(이화여대 사회학과)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세상 사람들이 다 나처럼 부모 덕에 웬만큼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효재 교수님이 지도하는 서클에서 중랑천 뚝방촌으로 활동을 나갔어요. 화장실도 공중화장실에 단칸방인데 애들은 코찔찔이에 맨발로 돌아다니고 아버지는 술마시고 누워있고 엄마들은 일하러 나가고. 엄청 충격을 받았지요. 그때부터 빈민지역 다니고 방학이면 농촌활동하고 사회구조에 대한 이론 공부하고. 집안의 통제를 벗어나 활동을 하려고 1978년 2월에 졸업하는 날로 학생운동 하던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기혼 딱지가 붙으니까 회사 입사도 안되고 모든 것이 다 스톱이에요. 시댁이라는 새로운 관계도 생기고 애들도 잇달아 태어나고. 1983년에 여성유권자연맹에 들어간 대학 선배(신혜수씨) 덕분에 겨우 얻은 일거리가 구로동 뚝방공단의 기혼여성 노동실태조사였어요. 그곳에서 또한번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모순이 빈민여성의 삶에 있구나. 그들은 아이를 돌보려고 아이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을 일터로 선택해요. 일하면서 점심값이라도 받으면 그걸 들고 집으로 뛰어와서 애들한테 뭐라도 먹이고 또 뛰어가고 하는 식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사는 이유는 자식들은 나 같은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인데 정작 아이들은 버려진 채로 있으니. 내가 기껏 밤에 이야기 듣고 볼펜 하나 드리고 고맙다고 하는 게 위선적이라 느껴졌어요."
    _ 그래서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나요?
    "세상이 달라지려면 여자들이 겪는 이중삼중의 문제부터 바뀌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했어요.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았는데 당시 여성단체 예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공부방 정도였어요. 서울에서는 이미 대부분의 지역에 빈민활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평우회 회원 하나가 추천한 인천 만석동으로 갔습니다. 작은 부두가 있고 동일방직과 대성목재 가운데 있는 동네인데 월남한 분들과 공장으로 온 이농인구, 갯벌에서 동죽이나 굴을 캐는 어민, 막노동 일꾼이 섞인 동네였어요."
    _ 유복하게 자라서 현장을 보면 오히려 겁을 먹게 되었을 텐데요.
    "제가 대학시절 활동을 하면서 한국 사회의 파이는 일정하다, 내가 받은 파이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파이가 아니라 부모 덕에 받은 파이고 우리 아버지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파이다, 주변 사회에서 덜 가진 사람이 받아야 할 파이다, 그런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런데 만석동에 살아보니까 그때까지 내가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만석동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웠어요."
    _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람들이 덜 받아요.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도 덜 받고 내줘요. 그러면서도 아글바글하지 않고."
    _ 딸을 키우는 게 무섭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애들은 정말 행복했고요. 저도 정말 거기서 인간이 되었어요. 저는 거기서도 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어요. 사람들이 끊임없이 희망을 가지려는 것을 보았어요. 사회가 당신들을 이렇게 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희망을 주는 사람과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 나누는 것을 봤어요. 여기 골목에 화분들 보셨지요? 이렇게 집이 무너져가도 스티로폼 상자라도 모아서 화분 만들고 고추 파 방울토마토 심고 꽃 가꿔요. 정말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려는 분들이에요. 공부방 할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김치해주고. '내 새끼 네가 봐주니까 니네 식구는 내가 챙겨준다' 이런 거지요. 저는 일이 조금 힘들면 게으름 피우면서 어디 나가면 홍선생님이라고 불리고 빈입으로 다녀도 굶지도 않고 여기저기서 어려운 일 한다고 좋은 이야기나 듣고. 그러니 이 분들이 덜 받으니까 나머지를 나눠가지는 거라는 걸 깊이 깨달았어요."
    _ 만석동에서 왜 십정동으로 옮겨왔나요.
    "만석동이 철거되면서 이리로 왔어요. 이제 대학졸업자의 머리가 아니라 이 분들한테 배운 지혜를 가지고 진짜 한번 해보겠다. 만석동에서는 '홍선생'이었고, 그 분들 답답하고 어려운 것을 이해했다는 고마운 존재였지만 여기서는 정말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낄 수 있어야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동력이 얼마만큼 나오고 꺾이는지를 알 것 같았어요. 공부방은 후배들한테 맡기고 저는 그냥 일일학습지를 돌리는 아줌마가 됐어요. 새벽에야 수돗물이 나오니까 그 물 나오기 기다리다가 잠깐 잠들어버리면 물이 끊어져요, 그러면 빨래도 못하고. 제일 힘든 건 쓰레기 버리는 일이에요. 쓰레기차가 아침에 오는데 그 시간을 놓치면 쓰레기를 못 버려요. 쓰레기차 지나가는 종소리가 들리면 애들 밥 주다가도 연탄재 몇 개 들어간 함지박을 이고 비탈길을 뛰어내려와야 하는데, 몇 분 늦었다고 그냥 가요. 그냥 가기만 하나? 침 뱉고 가요. 제가 그러면서 또 한번의 껍질을 벗었어요. 그런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정말 절실했어요."
    _ 그래서 구의원으로 나갔나요?
    "1년 정도 지나니까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보미 엄마가 공부방 선생들 대장이래, 이런 소리가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주민들 일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는데 3월 15일이 후보등록인데 3월 초순까지도 지역주민들 가운데 나갈 사람을 찾지 못해서 결국 제가 등떠밀려 나갔어요."
    _ 그런 진짜 빈민으로서의 삶이 구청장의 행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부평구의 시정목표를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세상'이라고 잡았어요. 구청 내부로는 일단 줄 잘 서면 출세한다, 이런 관행을 없앴어요. 일만 잘해라,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해라, 영혼이 있는 공무원이 되자, 그런 걸 강조해요. 공무원이 박봉인데 호의호식하고 자녀들에게 유산 물려주고 이러기는 힘들잖아요. 하지만 행정을 잘해서 세상이 보다 더 좋아지게 하는 것은 공무원으로 할 수 있잖아요. 구청장의 위세만 내세우는 토건사업은 절대 안한다, 주민들이 더 잘사는 행정을 한다, 이걸 제일 중요한 목표로 삼았어요. 그런데 이미 이전 구청장 때 너무 많은 토건사업을 벌여놓아서 그게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어요."
    _ 구의 규모에 비해 부평아트센터도 엄청 크던데요.
    "그게 연 운영비만 해도 70억원이에요. 연 40일밖에 안 쓰는 민방위교육장이 150억짜리 공사, 그 옆에 청소년수련관이라고 100억짜리, 기후변화체험관 50억짜리, 그 옆에 노인복지관이 또 100억짜리예요. 도서관도 30억짜리, 20억짜리, 10억짜리 여섯 개를 벌려놓았어요. 게다가 구 자체 예산으로 지어야 하는 동사무소까지 80억짜리 하고 40억짜리 두 개를 지었어요."
    _ 다시 국회의원을 하고 싶겠어요.
    "하지만 구의원 국회의원이 말해도 행정자치단체의 장이 안 들으면 소용없어요. 그런 점에서 정책을 실행해나간다는 보람이 있어요."
    _ 그래서 십정동은 어떻게 만들고 싶으세요?
    "십정동 마을에는 해님공부방과 열우물공동체 같은 것부터 아이들 공부방뿐 아니라 자수정이라고 '자주 만나 수다로 정들자'는 아주머니 모임도 있고, 공부방 선생으로 온 대학생이 주민과 결혼해서 정착도 하고, 공부방에서 배운 학생이 이제 교사가 되고, 또 공부방 교사로 자원봉사하던 이가 법무사가 되어서 전문적인 봉사를 하고, 할머니들 뽕작그룹도 있고 주부연극교실도 있고 주민밴드도 있어요. 일단 LH의 주거개선사업이 아파트를 짓고 주민들 분양분과 일반 분양분을 나누는 방식의 효율 중심으로 이뤄지더라도 그 가운데 이런 지역공동체 특성을 살리는 단체들을 어떻게 넣을 것인가를 고민해야지요."
    _ 이 아름다운 동네가 완전히 갈아엎어지고 결국은 아파트촌이 된다는 것도 참 안타깝고 아까운 일이네요.
    "그렇지요. 십정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열우물이 있어서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동네겠어요. 동네를 살리면서 공동체가 살아나는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정말 저도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일보 : 홍미영 구청장 "무너지기 직전의 이웃 놔두고 나 혼자 편히 잠들 순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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