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⑥ 병상에서 다시 만난 료마
E2면| 기사입력 2011-09-27 00:07 | 최종수정 2011-09-27 09:00
스물여섯에 5년 시한부 절망 … 책 4000권에서 평생 먹고살 25자를 건지다
[중앙일보 이나리]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의 손정의 회장. 그는 투병 중이던 20대 후반 특유의 경영전략을 완성했다. 손자병법에 자신의 생각을 곱했다는 뜻에서 '제곱병법'이라 이름 지었다. 손 회장은 기업 인수합병이나 중장기 사업 전략을 고민할 때 반드시 이 25자의 뜻과 일치하는지 자문한다고 한다. [소프트뱅크 제공]
초기 소프트뱅크의 성장세는 눈부셨다. 창업 8개월 뒤인 1982년 5월에는 출판사업도 시작했다. 기존 소프트웨어(SW) 유통업에 이어 또 하나의 인프라 비즈니스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 사업을 시작한 데엔 사연이 있다. 당시 한 유명 PC잡지에 소프트뱅크 광고를 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잡지는 SW 유통사업도 하는 '아스키'라는 기업 소유였다. 한마디로 '경쟁사 광고를 내줄 순 없다'는 거였다.
나는 직접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오! PC'와 '오! MZ'라는 정보기술(IT) 전문지를 창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창간호의 80%가량이 반품됐다. 한 잡지에 매달 1000만 엔씩 적자가 났다. 주력 사업에서 이 정도의 대적자라니,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출판부장이다. 1억 엔 정도를 과감히 투자해 잡지를 일신해 보자. 3개월 뒤에도 흑자가 안 나면 손 떼는 거다. 1억 엔을 투자했다 날리는 거나, 매달 2000만 엔씩 적자를 보며 질질 끌다 반 년 뒤 물러나는 거나 손해보긴 매한가지 아닌가.”
우선 독자의 요구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수만 장의 독자 카드를 일일이 분석해 지면에 반영했다. 매주 편집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정가를 680엔에서 580엔으로 내렸다. TV 광고까지 했다. 효과가 곧 나타났다. 5만 부에서 10만 부로 증쇄를 했음에도 판매 3일 만에 매진이 됐다. 이후 출판사업은 계속 성장해 3년 뒤에는 9종의 잡지를 매달 60만 부씩 발행하게 됐다.
#"료마도 나도 5년이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그렇게 한시름 놨을 즈음 뜻밖의 재앙과 맞닥뜨렸다. 83년 봄 회사 건강검진에서 만성 간염 판정을 받은 것이다. 상태가 위중했다. 의료진은 “길게 잡아도 5년이다. 그 이상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미친 듯 공부했다. 펄펄 끓는 열의로 회사를 세운 지 이제 1년 반이다. 딸은 겨우 갓난쟁이다. 해야 할 일이 산처럼 많다. 빚도 잔뜩 있다. 무엇보다 나를 믿는 고객은? 동료는? 직원들은?
진단받은 다음 날 바로 입원했다. 병상에서 울었다. 그저 살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면, 딸아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다면. 사실이 알려지면 은행에서 당장 융자금을 회수할까 봐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가 회의에 참석했다. 그 와중에도 회사 걱정을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때 료마를 다시 만났다. 시바 료타로 소설 『료마가 간다』를 정독했다. 열여섯 시절 내가 큰 뜻을 품게 해준 바로 그 책이다. 부끄러웠다. 료마는 33세에 죽었다. 마지막 5년 동안 엄청난 일을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 나도 5년이다. 그동안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것을 하자, 목숨 바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를 불태웠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왜 사업을 시작하는지,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되새겼다. 결국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딸의 미소, 가족의 미소, 직원들의 미소. 그런데 누구보다 고객들이 웃어주면 좋겠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오지, 얼굴에 흙 묻힌 꼬마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누구한테인지 모르지만 그저 “고맙습니다”라고 중얼거리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은 역시 '자기만족'이었다. 멋진 말, 어려운 말 다 필요 없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 그것은 역시 디지털 정보 혁명을 일으켜 수많은 이가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게 하는 것. 오늘날 트위터처럼 말이다.
#자금 압박·직원 배신, 독서로 이겼다
강렬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났다.
첫째, 병을 이긴다. 둘째, 사업을 지킨다.
말처럼 쉽진 않았다. 나는 이후 3년 반가량 입·퇴원을 반복했다. 일상적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할 수 없어 새 사장을 영입했다. 일본경비보장(지금의 세콤) 부사장이던 오모리 야스히코였다. 나는 회장으로 물러앉았다. 그렇더라도 회사 일에서 손 뗄 생각은 없었다. 병실에 PC와 팩시밀리·전화기를 설치했다. 의사에게 혼나가며 원격 경영을 시작했다. 새 사업도 열심히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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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이어졌다. 84년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 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이 실패했다. 타격이 컸다. 은행 융자로 급한 불을 끄는 나날이었다. 86년엔 이른바 '소프트뱅크 사건'이 터졌다. 신뢰해 온 유능한 임직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다. 독립해 회사를 차린다고 했다. 배신이었다. 나는 굴욕감을 누르며 끝까지 매달렸다. 그러나 잡지 못했다. 그들이 만든 회사는 결국 얼마 못 가 사라졌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배신한 사람은 절대 성공 못한다. 그들 외에도 여러 명이 경쟁사로 빠져나갔다. 고객들의 불만도 컸다. “그 사람 요즘 안 보이네. 의리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쇼크 요법으로 병 이기고 복귀
소프트뱅크가 창업 초기 발간한 잡지들.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 때마다 책을 폈다. 그렇게 읽은 책이 4000여 권. 평생 먹고살 지식을 얻은 셈이다. 소프트뱅크 특유의 경영 전략인 '제곱병법'도 이때 창안했다. 손자병법을 깊이 읽고 내 식대로 소화한 결과다. 핵심은 간단하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이길 싸움에서 이기는 거다. 전투는 도박이 아니다. 과학이며 이론이다. 또 하나. '싸우지 않고 이긴다'. 인수합병(M&A)이 바로 그렇다. 일본의 경영자나 언론 관계자들은 대부분 그런 내 전략을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종종 '모험'이니 '차익'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걸로 봐서 말이다. 각각의 딜이 얼마나 큰 비전에 따라, 과학적 분석하에, 긴 미래를 보고 이루어진 것인지는 차차 얘기하게 될 터이다.
그 와중에도 내 병세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84년 새 치료법을 만났다. 도라노몬병원의 구마다 히로미쓰 박사가 창안한 '스테로이드 이탈요법'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만성간염을 급성간염으로 변화시켜 인체 내부의 저항력을 일거에 끌어냄으로써 치료를 도모하는 일종의 쇼크 요법이다. 지금은 훨씬 나은 치료법이 많겠지만 당시로선 길이 별로 없었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 바이러스 수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나는 86년 5월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날 기다리는 건 10억 엔의 빚, 그리고 핵심 임원과의 고통스러운 갈등이었다.
정리=이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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