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9일 목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1면의 TOP기사입니다.1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1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15 03:02 | 최종수정 2011-09-16 07:30 기사원문

'일본 IT 신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도전 40년 '뜻을 높게!' 삶과 경영 연재
[중앙일보 이나리]
손정의 회장은 일본 정보통신기술(ICT)계의 료마로 불린다. 19세기 료마가 신사상신문물의 물꼬를 텄듯, 20세기 손 회장은 일본에 디지털 혁명의 불을 지폈다. [중앙포토]
손정의(54) 소프트뱅크 회장은 재일동포 3세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본 4위 부자. 연매출 3조 엔(약 43조원)의 아시아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ICT 업계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로 불린다. 료마는 메이지(明治) 유신의 초석을 놓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자 손 회장의 롤모델이다. 손 회장은 "내 거대한 꿈과 무모한 도전은 모두 그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손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한다. 그는 이를 기념해 직접 쓴 좌우명(志高く)을 보내왔다. '뜻(志)을 높게!'라는 의미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한 남자를 만났다. 내 인생의 좌표가 된 인물, 사카모토 료마다. 어느 날, 과외 선생님이 생소한 작품 한 편을 권해 줬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였다.
정신이 번쩍 났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최하급 무사로 태어났으나 강력한 의지와 비전으로 일본 근대화를 이끈 개혁가이자 탁월한 비즈니스맨이다. 그 삶에 비춰 보니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차별이니 인종이니,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자체가 얼마나 시시한지 깨달았다.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 대충 흘려보내도 되는 건가!
난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게 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뭔가 큰일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 인생을 불사를 만한 일에 이 한 몸 부서져라 빠져들고 싶다 '는 결심만큼은 가슴 깊이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나나 내 가족의 사리사욕이 아닌, 수천만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뭔가 큰일. 금전욕 따위가 아니다. 많은 이가 “그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값진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열여섯 소년이 품은 삶의 포부였다. 좌우명 '뜻을 높게!'는 그렇게 내 인생의 중심이 됐다.
정리=이나리 기자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사카모토 료마=시코쿠의 최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서구식 해군 양성과 무역, 근대정부 수립에 앞장섰다. 31세에 암살당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를 통해 일본의 국민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4면의 TOP기사입니다.4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4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15 03:02 | 최종수정 2011-09-25 18:58 기사원문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 쓰러진 아버지를 뒤로 하고 미국 유학길 올랐다
[중앙일보 이나리]
손정의 회장은 미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재학 당시 학비 마련을 위해 발명에 몰두했다. 왼쪽 사진은 손 회장(가운데)과 그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데 발벗고 나선 공대 연구원들. [소프트뱅크 제공]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직접 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석 달 전, 정말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청와대를 방문했고 기자 간담회도 열었다. 나로서는 한국에서 10년 만에 치른 공식 행사였다. 자리가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물었다.
“좌우명이 '뜻을 높게!'라고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고민이 참 많습니다. 이들이 뜻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꾸물대지 않고 답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라면 마음속에 늘 답을 품고 살아온 때문이다.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어떤 꿈이든 펼칠 수 있지요. 차나 집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꿈을 꾸세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고민할 때 세상을 바꾸고 본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말이다. 한데 난 정말 그런 생각으로 힘껏 살아 왔다. 방향을 확정한 건 열아홉 살 때이지만 씨가 싹튼 건 열여섯 살 적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엔 한 여성이 있다. 내 할머니다.
# 돼지 치는 집 아이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의 소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제공]
할머니는 열네 살 때 일본으로 왔다. 그 나이에 결혼도 했다. 상대는 무려 37세, 내 할아버지다. 대구 태생인 할아버지 역시 열여덟 적에 현해탄을 건넜다. 할머니는 일본 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진흙물로 아이들과 허기를 달래는 처절한 나날이었다. 열네 살이라니, 아직 어린애 아닌가. 그 나이에 친척 하나 없는 타향으로 홀로 시집 온 것이다. 할머니는 조선 국적에 일본말도 서툴렀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우리 아버지도 중학생 때부터 생업에 나섰다.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나 참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쳤다.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다. 1957년 8월이다.
당시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진 때였단다.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지만 집도 있었다. 규슈 사가현의 한인 집성촌에 살았다. 내 호적의 본적지 칸에는 '사가현 도수시 고켄도로 무번지(無番地)'라고 써 있다. 번지가 없으면 적지를 말지 굳이 무번지라고 할 건 또 뭔가. 제 땅이 아니라 국철 선로 옆 공터에다 양철지붕을 올리고 판자를 둘러쳐 살았으니 정식으로 호적을 인정해 줄 수 없었던 거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사형제 중 둘째인 나는 온전히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가 날 예뻐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가 “마사요시, 나갈 시간이데이-” 하면 겨우 서너 살인 나는 얼른 리어카에 올라타 떨어지지 않으려 꽉 매달렸다. 리어카는 까만색이었고 몹시 미끈거렸다. 반으로 자른 드럼통 서너 개가 실려 있었다. 음식 찌꺼기를 담는 통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역전 식당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얻어 와 돼지를 쳤다. 어린 내가 뭘 알겠는가. 난 그저 리어카 타고 나다니는 게 즐겁기만 했다. '아, 수레가 미끈둥대고 시큼한 내가 좀 나는구나. 바퀴가 웅덩이에라도 빠지면 꼼짝없이 미끄러지겠구나. 떨어지면 죽겠다'. 그런 생각으로 할머니가 “꼭 잡으래이-” 하실 때마다 리어카에 몸을 찰싹 붙이곤 했다.
그렇게 좋아한 할머니를 철이 들면서 죽도록 싫어하게 됐다. 할머니는 곧 '김치'였기 때문이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그 사실과 관련된 온갖, 내 삶을 고통으로 채웠던 것들. 숨을 죽여 가며,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어린 시절 손 회장의 일본식 성명)'란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 재일동포임을 감춰야 한다는 사실이 내겐 더더욱 콤플렉스였다. 할머니가 너무 싫었다. 일부러 피해 다녔다.
'차별'에 대해 보다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 건 어린 시절 한때 품은 꿈 때문이었다. 난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미카미 다카시라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영향이 컸다. 꿈을 밝히자마자 아버지는 재일교포로선 교육공무원도 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대뜸 “그럼 귀화시켜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초등학교 교사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넌 그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 다른 쪽으로 소질을 키워 보자”며 나를 달랬다. 그날 이후 며칠간 나는 아버지와 말을 끊었다. 고민 끝에 그 꿈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유의 일, 그보다 좀 가볍거나 혹은 심각한 아픔과 딜레마가 도처에서 출몰했다.
# 아버지 가게 살린 열두 살 고집

꿈 많은 소년이던 나는 그 외에도 화가·시인·정치가·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지금도 가끔 회의 중 화이트보드에 톰과 제리, 스누피 같은 만화 캐릭터들을 그리곤 한다. 남들이 제법 그럴듯하다고들 한다. 정치가가 되고 싶은 건 차별받는 재일교포 3세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 봤음직한 생각이다. 시인이란 직업도 아주 그럴듯하게 여겨졌 다.
그래도 그중 가장 현실적인 꿈은 역시 사업가가 되는 거였다. 나름대로 자질을 보이기도 했다. 열두 살 때 일이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제법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저런 장사에 손을 댔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작은 카페를 열었다. 한데 어린 내 눈에도 도무지 승산이 없어 보였다. 전철역에서 먼 데다 번화가도 아니었다. 커피 원료를 공급하는 회사마저 물건을 대길 꺼렸다. 장사를 시작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내가 꾀를 냈다. 아버지에게 “공짜 쿠폰을 잔뜩 찍어 역 앞에 뿌리자”고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꺼내지도 마라”고 했다. 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0장을 찍어 나눠줬다. 커피공급업자를 초대한 날, 덕분에 카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놀란 공급업자들은 아주 싼값에, 좋은 결제 조건으로 물건을 대주기 시작했다. 초기 비용은 많이 들었으나 얼마 안 가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었다. 가게는 갈수록 번창해 몇 년 뒤 상당히 높은 값에 매각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다. 가족의 위기였다. 한 살 위 형은 장남의 책임을 다하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버지 병원비를 댔다. 집안의 쇠락을 목도하며 내 마음도 급해졌다. 무슨 수를 쓰든 여기서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사카모토 료마를 만난 것이다.
# 사카모토 료마, 가슴에 불을 지피다
마음을 먹었으면 실천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일본 제1의 사업가가 되자.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가족의 어려움을 중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이어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건 말하자면 료마의 '탈번' 같은 행동이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경이적 시청률을 기록한 NHK 드라마 '료마전'에도 이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료마는 탈번을 고민한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실행하지 못한다. 이때 료마의 누이가 말한다.
“료마, 가라! 너는 초야에 묻히고 말 재목이 아니다. 나가서 더 큰 일을 하거라.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는 괜찮다. 떠나라!”
그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이 쏟아져 애를 먹었다. 내가 그토록 하염없이 운 건 그 스토리에 내 지난날이 겹쳐 떠오른 때문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와 소프트뱅크=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디지털 시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힌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도 막역한 사이인,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리더 중 한 명이다. 미국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졸업 뒤 1981년 일본에서 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95년엔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회인 컴덱스를 8억 달러에 인수한다. 이를 인연으로 야후에 투자한 뒤 96년엔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해 인터넷 열풍을 주도했다. 2001년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4년엔 재팬텔레콤(현 소프트뱅크텔레콤), 2006년에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 보다폰KK(현 소프트뱅크 모바일)를 1조7500억 엔(18조원)에 인수해 산업 판도를 뒤집었다.

◆탈번(脫藩)=에도 시대 일본의 무사가 소속된 지역인 번을 떠나는 행위를 말한다. 번주(주군)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돼 본인이 중벌을 받음은 물론 가족에까지 해가 미쳤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3면의 TOP기사입니다.3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3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16 01:34 | 최종수정 2011-09-16 16:18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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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미국 큰 땅서 큰 사업가 되겠다” … 고교 자퇴, 퇴로 끊어
[중앙일보 이나리]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가족·친척·선생님 결국 설득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 여름, 나는 한 달간 미국으로 영어 연수를 다녀왔다. 눈이 트였다고 할까. 당시 미국은 정말 크고, 힘이 넘치고,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한마디로 빛이 나는 나라였다. 료마는 말했었다. “바다 건너 외국에 가 보고 싶다. 미국에 가 보고 싶다. 유럽을 보고 싶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어떻게든 가보고 싶어 한 곳에 내가 간 거다. 실제로 보니 얼마나 놀랍던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서 나는 한동안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큰 사업가가 되기로 한 이상 난 그 땅에 가야 했다. 사업을 일으킬 뭔가를 찾아와야 했다.
#“10년 뒤를 위해 … 이 맘은 안 바뀝니다”
예상대로 주변의 반대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다. 가정 경제는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붙였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 아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유학이라고? 네 한 놈 잘되자고 가족을 내팽개치냐?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에요. 국적이니 인종이니, 세상엔 고민만 하는 이들이 널렸지만 난 실제 일본 제일의 사업가가 돼 보이겠어요. 손 마사요시(손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어머니는 매일 눈물바람이었다. 할머니도 울며 불며 매달리셨다.
“가지 마라, 마사요시. 거기가 어디라고…. 한 번 가면 못 돌아온다, 가지 마라!”
어머니에게도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버지는 안 죽는대요.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살 수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 몇 년, 집안을 생각하면 여기서 착실히 공부해야겠지요. 하지만 몇십 년을 생각하면 가족을 위해서도, 또 제 자신이 뭔가 이루기 위해서라도 인생을 바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전 떠날 거예요. 이 맘은 절대 안 바뀝니다.”
학교에도 직접 자퇴서를 냈다. 마침 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참이라 선생님들의 반대가 컸다. 정 갈 거면 휴학을 해라, 자퇴까지 할 게 뭐냐는 설득을 거듭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전 유약한 남잡니다. 미국에 간다지만 영어를 못 해요.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곤란이 닥치면 좌절하고 마음이 흔들릴 텐데, 그때 돌아올 곳이 있으면 바로 포기할지도 몰라요. 퇴로를 끊지 않으면 어찌 고난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 내게 졌다. 가족과 친지들은 십시일반, 최소한의 학비와 생활비를 모아줬다.
#할머니 손 잡고 헐벗은 모국으로
미국행이 결정된 뒤 나는 할머니와 마주앉았다.
“할머니, 절 끔찍이 아끼시는 줄 잘 알면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한 걸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한국에 데려가 주세요. 미국으로 가기 전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조상의 나라,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할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되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더없이 기뻐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한국에 갔다. 2주 정도의 짧은 여행이었다. 조부모님의 고향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대구 인근의 시골 마을이었다. 내놓을 것이라곤 사과밖에 없는 동네. 그마저도 땅이 척박해서인지 알이 조그마했다. 저녁이면 우리는 촛불 침침한 친척집 안방에서 상을 받았다.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차림이었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가져온 헌 옷가지들을 내놨다. 팔꿈치가 닳은 스웨터, 기운 자국이 있는 바지. 그런 것들을 마을 사람들은 한껏 기뻐하며 받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할머니 얼굴에도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이전부터 할머니는 늘 말했었다.
“우리가 이만치나 사는 건 다 다른 사람들 덕분이데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 때에도 도와 주는 분들이 꼭 있었으이까네. 그라이, 절대 남을 원망하믄 안 된데이. 모두 남들 덕분인 기라.”
그런 말씀들, 또 평생 처음 찾은 모국에서 할머니가 보여준 미소와 행동은 내게 큰 영감을 줬다. 뭔가 큰일, 다른 이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도움 받은 상대가 몰라도 좋다. 그저 누군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느끼고 행복할 수 있다면. 당시 깨달음은 내가 몇 년 뒤 '정보기술(IT)로 인간을 행복하게!'라는 소프트뱅크의 창립 이념을 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본 땅에 산다고 왜 성을 바꿔야 하나”
잠시 딴 얘기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종종 “모국 생각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1999년 한국에서 첫 기자간담회를 열었을 때도 한 기자가 비슷한 질문을 했다. “마음의 고향이 어디냐”는 거였다. 나는 짧게 답했다.
“제 마음의 고향은 인터넷입니다.”
상대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비록 일본에 귀화했지만 내가 '손(孫)'이라는 한국 성을 고수하기 위해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아는 듯했다. 당연히 “한국”이라거나 “모국”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으리라. 한데 내가 '손씨'를 고집한 건 꼭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건 내 '자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20년 넘게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단지 내 신체가 속한 국가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그걸 바꿔야 하는가.
난 어디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고, 묻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할아버지의 고향, 내 존재의 뿌리.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 부친의 교육열=손정의 회장의 부친인 손삼헌씨는 교육열이 높았다. 손 회장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대도시인 후쿠오카로 이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손 회장은 그곳에서 명문고 진학률이 높은 조난중학교에 다녔다. 이어 지역 명문인 구루메대학 부설고에 합격해 가족을 기쁘게 했다.
▶기자 블로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③ “변명 따위 않겠어 … 목숨 걸고 공부한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③ “변명 따위 않겠어 … 목숨 걸고 공부한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3면의 TOP기사입니다.3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3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17 01:13 | 최종수정 2011-09-17 13:28 기사원문

“어떻게 온 미국인데” … 2주 만에 고교 3년 뗐다
[중앙일보 이나리]
외환 위기 당시인 1998년 6월 나란히 방한한 손정의 회장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한국이 경제 위기를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는 김대중 대통령의 물음에 손 회장은 “첫째도, 둘째, 셋째도 브로드밴드(초고속인터넷)”라고 답했다. 게이츠 창업자 역시 “정답”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2000년대 한국이 인터넷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배경엔 이들의 만남이 있었다. [중앙포토]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1974년 초 드디어 미국 유학을 떠났다. 57년 8월생인 나는 아직 만 16세였다. 홈스테이를 하며 6개월간 어학 연수를 받았다. 그해 여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세라몬테고등학교 10학년으로 편입했다. 10학년은 한국 학제로 치면 고교 1학년에 해당한다.
내 마음은 급했다. 정말 어렵게, 무리해서 추진한 유학이다. 어떻게든 빨리 대학에 가 치열하게 공부하고 싶었다. 일주일간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10학년 교과서를 모조리 읽었다. 물론 다 이해한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영어 실력이 없었다. 하지만 핵심과 맥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10학년 교과서를 다 봤습니다. 11학년 수업을 듣게 해주세요.”
무리한 요구였다. 한데 선생님은 의외로 선선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줬다. 11학년 교과서를 모두 구했다. 이어 사흘간 전체를 섭렵했다. 또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11학년도 됐어요. 12학년으로 가겠습니다.”

다시 3일 뒤, 교장선생님께 선언했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치겠습니다.”
이번엔 선생님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해 봐라”고 했다. 속으론 아마 합격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어쨌거나 나는 얼마 뒤 검정시험을 치러 갔다. 눈앞이 캄캄했다. 문제의 양, 해독해야 할 문장이 너무 많았다. 손을 번쩍 들고 감독관에게 말했다.
“전 일본에서 왔습니다. 아직 영어가 서툴러요. 이 시험은 영어가 아닌 학업 수준을 테스트하려는 것 아닙니까. 일영사전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게 공정합니다.”
감독관은 한마디로 딱 잘라 “안 된다”고 했다.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겐 그런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시험장 밖으로 나갔던 감독관이 돌아와 말했다.
“ 교육청 허락을 받았으니 사전을 써도 좋다.”
원래 시험은 오후 5시에 끝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손을 들었다.
“사전을 찾아야 해 시간이 배로 필요합니다. 종료 시간을 늦춰주십시오.”
이번에도 감독관이 졌다. 나는 자정까지 시험을 쳤다. 그리고 합격했다. 미국에 온 지 1년도 안 돼 고교과정을 마친 것이다.

# 19세, 인생 50년 계획을 세우다
하지만 바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도 나는 미국에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이란 게 있다는 걸 몰랐다. SAT 성적 없이도 갈 수 있는 학교를 찾아야 했다. 한국의 2년제 대학에 해당하는 홀리네임스칼리지에 들어갔다. 2년 동안 전 과목 A학점을 받았다. 덕분에 77년 여름 드디어 UC버클리대 경제학과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19세. 나는 웅대한 그림을 그렸다. 이름하여 '손정의 인생 50년 계획'이다. 20대부터 60대까지, 앞으로 50년 동안 내가 도전할 것들, 이뤄내야 할 것들에 대한 비전을 완성한 것이다. 이후 내 삶은 온전히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바쳐졌다. 계획을 바꾼 적도, 목표치를 낮춘 적도, 이를 달성하지 못한 적도 없다. '신중히 계획하되, 반드시 실행한다'. 이것은 내가 평생을 두고 지켜온 원칙이다.
# 우연히 본 사진 … 감격해 울었다
인텔의 1974년 작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
대학에 입학한 뒤엔 정말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시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없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업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항상 맨 앞줄에 앉아 교수 얼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화장실에 갈 때도 교과서를 손에 들고,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밥을 먹을 때도 손에서 교과서를 놓지 않았다. 왼손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 포크를 움직이며 눈은 교과서에 못 밖은 채 아무 것이나 짚이는 대로 입에 넣었다.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두 눈으로 음식을 내려다보며 여유 있게 식사하는 사치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폐렴에 걸린 줄도 몰랐다. 기침이 계속 터져 나오고 목에선 쌕쌕 소리가 났지만 참고 공부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도 그저 책만 봤다. 쉬는 시간은 오직 잠 잘 때뿐. 그마저도 최소화했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가 잘 안 된다, 돈이 없다, 그런 자기 위안 따위 허락할 수 없었다. 피 토하는 아버지, 오열하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온 유학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왜 우는 소리를 낸단 말인가. 물론 일본에 있을 땐 나도 불평 많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그럴 수 없었다. '학생의 본업은 공부다. 본업 중의 본업에 목숨을 걸자. 죽어라 공부하지 않으면 벌 받을 거야!' 그런 각오로 나 자신을 몰아쳤다.
그 무렵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충격적 사건을 접했다. '일렉트로닉스'라는 과학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무슨 미래도시의 설계도 같은 컬러 사진이었다. '이게 뭐지? 희한하게 생겼네?' 다음 페이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인텔이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기사를 읽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온몸이 마구 저렸다. '인류가 드디어 이런 엄청난 일까지 해냈구나.' 굉장한 감격을 느꼈다. 이 작은 부품 하나가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꿔갈지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발명이다. 컴퓨터다. 그 길을 가겠다.' 소프트뱅크 창업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 회장의 삶과 경영'은 다음 주 부터 경제섹션에 주 2회 게재합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③ “변명 따위 않겠어 … 목숨 걸고 공부한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④ 매일 5분 발명 … 1억 엔짜리 아이디어 짜내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④ 매일 5분 발명 … 1억 엔짜리 아이디어 짜내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20 00:02 | 최종수정 2011-09-20 11:40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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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대학생 사업가, 교수·기업을 설득하다
[중앙일보 이나리]
열아홉 살, 어렵게 들어간 미국 UC버클리대에서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한편으로 발명에 몰두했다. 잡지에서 우연히 본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사진과 기사에 완전히 매료됐기 때문이다. 사진을 오려 매일 들고 다녔다. 잘 때는 베개 밑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이 작은 칩 하나가 인류의 미래를 바꿀 것이다. 나도 여기, 컴퓨터에 걸겠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당시 집에선 내 유학자금으로 학비를 포함해 매달 평균 20만 엔가량의 돈을 보내주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상황에서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5분을 발명에 할애하기로 했다. 5분.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걷고 밥 먹을 때조차 책을 볼 만큼 목숨 걸고 공부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하루 한 가지씩을 고안한 뒤 그중 가장 가능성 높은 것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한 1000만 엔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대범한 계획을 세웠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쏟아졌다. “비현실적이다” “차라리 학교 앞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라”는 얘기들이 나왔다. 난 흔들리지 않았다.
'마쓰시타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창업자도 작은 발명을 토대로 회사를 일으켰다. 나라고 못할 리 없어. 반드시 할 수 있다.'
#공대 교수에게 “당신을 고용하겠다”
정말 매일 하나씩 뭔가를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세 가지 접근법을 택했다. 첫째, 주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는다. 둘째,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둥근 것을 네모난 것으로 바꿔보는 식의 변환을 시도한다. 셋째,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조합해본다. 그러기를 100일, 150일…. 대부분 시시한 것들이었지만 그중 하나, 말이 될 법한 것이 있었다. 음성발신기와 사전, 액정화면을 결합한 제품. 다중어 번역기였다.
나는 경제학도다. 엔지니어링 지식이 부족하다. 시간도 없다. 나는 아이디어를 면밀히 다듬은 뒤 다짜고짜 공대의 포레스터 모더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음성 발신 기술의 권위자였다.
“선생님, 절 좀 도와주십시오. 근사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돈도 시간도, 기술도 부족합니다. 절 위해 팀을 꾸려 이 제품을 만들어주세요.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모더 교수는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나를 봤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상 같은 건 싫어하니까 일당은 선생님께서 정하세요. 특허가 팔리면 바로 정산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품 개발에 실패하면 선생님 몫도 없습니다. 공짜로 일한 게 되는 거죠. 이런 조건, 어떠십니까?”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한 얘기지만 어디 한번 해 보자”고 했다. 곧 내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한 팀이 꾸려졌다. 이들은 내게 매일 “헤이, 보스. 오늘은 뭘 하지?” 하고 묻곤 했다. 나도 가능한 모든 시간을 짜내 개발에 매달렸다. 내가 유독 관심을 쏟은 건 '사용자 시각'이었다. 나 자신 영어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사전만 찾아선 정확한 영어 발음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아쉬움을 발명과 연결시킨 게 바로 번역기 아이디어였다. 그런 만큼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나냐'가 아닌 '사용하기에 얼마나 편리하냐'에 초점을 맞췄다. 1977년 특허를 땄고, 이듬해 시제품을 완성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홍루(중국 이름 루훙량)와 '유니손 월드'라는 벤처기업도 차렸다. 78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일본으로 갔다. 특허를 팔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비웃던 발명, 대박을 치다
먼저 오사카에 있는 마쓰시타전기를 찾았다. 마쓰시타 측은 “이미 제품을 개발 중이다. 관련 특허도 있다”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산요전기도 방문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수십 개 회사를 전전했다. 샤프 본사를 찾았을 때 우연히 미국에서 안면을 튼 사사키 다다시 중앙연구소장을 만났다. 사사키 소장은 내 열정을 높이 샀다. 시제품에도 큰 흥미를 보였다. 마침 일본·미국·영국의 여러 회사가 다국어 번역기 개발에 착수한 상황이었다. 사사키 소장은 선뜻 2000만 엔을 내놨다.
“이건 일·영 번역기 기술에 대한 개발비입니다. 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 그렇게 주요 언어에 대한 기술을 개발할 때마다 이만큼씩 더 내놓겠습니다. 희망을 갖고 열심히 해 주십시오.”
그렇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샤프에 넘긴 특허는 79년 이 회사가 출시한 전자사전 'IQ3000'의 기반 기술이 됐다.
이를 포함해 나는 모더 교수 팀과 한 프로젝트를 통해 최종적으로 1억 엔(현재 환율로 약 15억원) 이상을 벌었다. 애초 목표였던 1000만 엔의 10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말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일본의 중고 게임기를 수입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카페 등지에 이 기기를 설치한 뒤 위탁 운영을 했다. 이 사업과 기타 소프트웨어 개발을 통해 다시 1억5000만 엔 이상의 수익을 거뒀다. 모두가 비웃던 발명을 통해 학비, 생활비는 물론 사업 밑천까지 마련한 것이다.
#결혼식 지각, 증인도 급조
스물한 살, 나는 번역기 개발 이상으로 크고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결혼이다. 상대는 미국에서 만난 두 살 연상의 일본인 유학생 유미. 너무 바빠 도서관에서 짬짬이 얼굴을 보는 게 다였지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그녀가 내 아내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열아홉 살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운 뒤 흥분한 나머지 일장연설을 한 것도 그녀 앞에서였다.
나는 유미와 미국에서 약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주례와 증인만 입회한 가운데 간단한 절차만 밟았다. 처음 잡은 날 번역기 개발에 몰두하느라 그만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주례가 화를 내며 가버려 새로 날을 택해야 했다. 두 번째로 잡은 날에도 결국 지각을 했지만 다행히 주례가 기다려줘 식을 마칠 수 있었다. 증인 섭외를 깜빡하는 바람에 교회 문지기에게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80년. 마침내 학교를 마친 나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요즘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성적이 우수한 대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한다. 나 역시 모교인 UC버클리는 물론 하버드·스탠퍼드·MIT 같은 학교들로부터 전액 장학생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미련 없이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대학만 졸업하면 돌아가겠다고 했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정리=이나리 기자
◆마이크로프로세서(microprocessor)=컴퓨터 시스템의 중앙처리장치(CPU) 기능을 대규모 집적회로 칩에 탑재한 것. 인텔이 1971년 개발한 i4004가 효시다. 이로부터 컴퓨터의 대중화·소형화 시대가 열렸다.
손정의 발명법
① 주변 문제를 해결하는 답 찾아라
② 큰 것은 작게, 네모는 둥글게 변환
③ 기존의 것을 새롭게 조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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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⑦ 주식 상장 성공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⑦ 주식 상장 성공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29 00:02 | 최종수정 2011-09-29 10:15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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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는 모험 아닌 과학 … 2만 페이지 분량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중앙일보 이나리]
중증 간염을 이겨내고 일선에 복귀했다. 1986년 5월, 스물아홉이 코앞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투병 중 나 대신 사장으로 일한 이가 애초 약속을 뒤집었다. 자리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이사회를 통해 '임원 40세 정년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했다. 40세가 넘은 임원은 재임용이 안 될 경우 퇴사 절차를 밟게 했다. 나는 정이 많은 편이다. 한번 준 맘은 쉬 거두지 않는다. 재능과 인품이 뛰어난 이를 보면 폭 빠진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다. 아픈 기억들이다.
#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여라
조직 문제만큼 골치 아픈 게 빚이었다. 무려 10억 엔. 다시 발명에 매달리기로 했다. 나는 미국 유학 시절 다중어번역기 개발로 사업 밑천을 마련한 경험이 있다.
발명의 요체는 '불편과 불합리를 해결하는 것'이다. 마침 당시 막 자유화된 전화 서비스에 주목했다. 고객이 새로 설립된 전기통신회사를 이용하려면 추가 번호를 눌러야 했다.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이 다 다른데, 그중 싼 회선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개발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 IT기업 포벌(Forval)의 오쿠보 히데오(57) 창업자와 뜻이 맞았다. 포벌은 현재 일본의 대표적 IT기업이다. 최근에는 한류 스타 원빈씨를 광고모델로 내세워 화제가 됐다. 우승자에게 명품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2년간 무상 대여하는 '포벌 스칼러십 콩쿠르'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오쿠보는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이다. 함께 제품을 개발한 게 87년이니 벌써 25년을 쌓아온 우정이다.
우리가 개발한 NCC BOX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유사품보다 훨씬 싸고 작은 데다 성능도 우수했다. 이 기기 덕분에 당시 일본의 통신 비용이 크게 줄었다. 회사엔 20억 엔의 로열티 수입이 생겼다. 빚을 갚고도 10억 엔이 남았다. 나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때까지 우리 회사의 정확한 이름은 '일본 소프트뱅크'였다. 나는 거기서 '일본'이란 단어를 떼어냈다. 이어 미국 IT업체들과 적극적 교류에 나섰다. 당시 내가 열심히 부르짖은 게 '타임머신 매니지먼트'다. 거창한 명칭이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당시 미국의 IT산업과 시장 환경은 일본을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미국의 제품·기술·서비스를 들여오면 몇 년 뒤 일본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 봤다. 열심히 태평양을 넘나들었다. 미국의 잘나가는 기업,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만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MS)와 노벨, 시스코시스템스다.
# MS 업고 일본 컴퓨터 업계 평정
80년대 후반 일본산(産) 컴퓨터들은 회사마다 운영체제(OS)가 다 달랐다. 나는 언젠가 대부분의 컴퓨터가 같은 OS를 탑재하리라 봤다. MS 윈도가 그중 가장 강력한 후보자였다. 90년을 전후해 나는 MS의 빌 게이츠 창업자를 여러 차례 만났다. 일본 내에서 MS 소프트웨어(SW)의 독점 판매권을 달라고 했다. 빌은 쾌히 응했다. 이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92년 MS가 내놓은 윈도3.1이 정말 일본 컴퓨터업계를 평정했다. 윈도상에서 구동하는 엑셀·파워포인트 같은 SW 또한 덩달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본 SW 시장 규모는 대략 한국의 스무 배다. 인구는 두 배가 좀 넘을 뿐이지만 저작권 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MS의 독점 판매권을 가진 우리 회사 매출도 쑥쑥 올랐다. 92년 1000억 엔이 넘었고, 93년엔 더 많이 벌었다. 95년에는 MS와 합작회사인 '게임뱅크'를 설립했다. 빌과 나는 1~3개월에 한 번씩은 꼭 만나는 사이가 됐다. 95년 말 그에게서 소포 하나가 왔다. 빌의 첫 저서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이었다. 표지 안쪽엔 그의 사인과 함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마사, 당신은 나와 같은 승부사다(Masa, You are as much risktaker as I am).”
그렇다고 소프트뱅크가 MS만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다. 90년 MS의 경쟁사인 노벨과 일본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2001년 파산한 노벨은 당시만 해도 MS와 어깨를 견주는 SW기업이었다. 이 회사의 마지막 최고경영자(CEO)가 바로 현재 구글 회장인 에릭 슈미트다. 94년에는 시스코시스템스 일본법인에 투자했다. 지금은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됐지만 20년 전엔 벤처 티를 막 벗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던 중 사업에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94년 7월 주식 공개에 성공한 것이다. 주당 1만8900엔. 당시 최고가였다. 소프트뱅크는 단번에 2000억 엔의 거금을 쥐게 됐다. 쓸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인수합병(M&A)이었다.
# 인터넷 세상 안내할 '보물지도'를 찾다
당시 일본에서 M&A는 생소함을 넘어 부정적인 무엇이었다. 대물림이 전통이요 가업을 생명처럼 여기는 문화다. M&A란 망한 기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거나, 다른 이가 애써 일군 기업을 '빼앗아가는' 행위일 뿐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디지털 정보혁명의 원대한 꿈을 이루려면 통상의 방식으론 안 된다. 주류 분야, 주류 시장으로 단번에 치고 나갈 기회를 잡아야 한다. 병법의 최고봉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아닌가.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게 바로 M&A다. 적대적 M&A란 것도 있지만 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요즘도 이런 방식의 사업 확장을 일종의 도박이나 '손 안 대고 코 푸는 일'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M&A야말로 가장 치열한 숫자 싸움이다. 무엇보다 어떤 기업에 얼마를 투자할지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나는 향후 시장을 60% 이상 점유할 가능성이 없는 회사, 이미 너무 많은 투자자가 침을 흘리는 회사, 현금 흐름(cash flow)이 위태로운 회사는 거들떠도 안 봤다. 비용 대비 효과를 가늠하기 위해 1만, 2만 페이지 분량의 시뮬레이션도 마다하지 않았다.
분야로 치자면 미래 금맥인 IT서비스, 그중에서도 '정보의 길목'을 장악하는 데 진력했다. 95년 초 내가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를 1800억 엔에 사자 다들 “돌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딜이 없었다면 야후 투자도, 야후재팬 설립도, 오늘날의 소프트뱅크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내겐 막 열린 인터넷 세상을 안내해줄 '보물지도'가 절실했고, 최신 IT정보의 집산지인 지프 데이비스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남들에겐 미친 짓이 내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던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의 일본 귀화=손정의 회장은 1990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손'이라는 성(姓)를 그대로 쓰려 하자 정부가 막았다. '한 사람만 쓰는 성을 허용할 순 없으니 일본 성을 쓰라'고 했다. 손 회장 부인이 나섰다. 본인이 먼저 성을 '손'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덕분에 한국식 성을 지킬 수 있었다. 손 회장은 귀화와 관련해 “두 딸이 생활하는 데 이런저런 불편이 없어졌고, 내 입출국 수속도 간편해졌다”는 식으로 심상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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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피아노도 없었던 16세 한국 소녀… 세계적 음악학교서 모셔 가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집에 피아노도 없었던 16세 한국 소녀… 세계적 음악학교서 모셔 가다

  • 기사

입력 : 2011.09.30 03:03

▲ 강채리양이 지난 4월 방한한 세계적 재즈 거장 퀸시 존스(오른쪽)를 만났다. /강호준씨 제공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팝음악 사관학교' 버클리 음대에 최연소 입학한 강채리양
교회 부목사의 딸 초등학교 졸업후 재즈 공부… 선교음악하던 엄마보며 사랑 전하는 음악 꿈 키워
팝의 거장 퀸시 존스, 연주 듣고 "언빌리버블!"
2009년 10월, 서울 대학로 서울재즈아카데미 연습실에 14세 소녀가 들어섰다. 미국에서 온 음악 교수 3명이 그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다. 우수한 학생을 뽑으려고 미국 버클리음대(Berklee College of Music)에서 온 입학사정관들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소녀는 일본 재즈 피아니스트 우에하라 히로미의 '톰과 제리'를 연주했다. 원곡을 직접 편곡한 완전히 새로운 곡이었다. 놀라운 표정의 교수들에게서 질문이 쏟아졌다. "훌륭하다. 블루스도 되느냐?" "청음(聽音)과 화성(和聲)은 어떤가?" 그날로 소녀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한 달쯤 뒤에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세계 팝음악 사관학교'라는 버클리음대(퍼포먼스학과)에 정규 음악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고 한국인 최초로 '총장 장학생(Presidential scholarship)'으로 입학한 강채리(16)양 이야기다. 그는 역대 한국인 입학생 가운데 최연소이고 현재 버클리음대 재학생 중에서도 가장 어리다. 이 학교는 퀸시 존스, 존 메이어 같은 세계적 팝스타와 하워드 쇼어('반지의 제왕') 등 세계적 영화음악가를 배출한 권위 있는 학교. 28일 전화로 만난 그는 "훌륭한 교수님과 위대한 뮤지션이 가득한 대학에 다니는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교회 부목사의 딸인 강양은 6세 때부터 교회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선생님은 선교 음악 활동을 하던 어머니였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돈을 내고 받는 전문적인 개인 교습은 꿈도 못 꿨고 집에 피아노도 없었다. 재즈음악을 시작하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교회에 다니던 한 음대생 언니가 "현대음악을 한번 해보라"며 가르쳐 준 게 계기였다. 단번에 재즈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학교를 다니면 음악 공부를 하는 데 제약이 많다. 중학교에 가지 않고 재즈 공부만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곧바로 재즈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서울재즈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대학 입학에 필요한 중·고교 학력은 검정고시로 땄다.
강양은 원래 2010년 가을에 버클리음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등록금만 면제해 주는 '풀 튜이션(Full Tuition)' 장학금을 제안받은 것. 그러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 고(高)물가로 유명한 보스턴의 식비·주거비 등 생활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강양의 형편을 알게 된 대학 측이 올해엔 졸업 전까지 등록금은 물론 기숙사비·식비 등 생활비까지 모두 주겠다고 나섬에 따라 강양은 올가을 학기에 '지각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그사이 온갖 고민을 떠안으면서 전 더 성장했고, 더 좋은 일들이 생기더라고요."
강양이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멘토' 두 사람이 도움을 줬다. 재즈뮤지션인 정원영 호원대 실용음악과 교수는 2009년 가을 자라섬 국제재즈콩쿠르에서 최연소로 결선에 진출한 강양의 실력에 반해 무료로 사사(師事)하라고 자청했다.
▲ 14세 때인 2009년 자라섬 국제재즈콩쿠르의 결선 무대에 최연소로 진출해 연주하고 있는 재즈 피아니스트 강채리. /강호준(강채리 부친) 제공

다른 한 사람은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등 수많은 명반을 제작하고 연주한 팝과 재즈의 거장 퀸시 존스. 정 교수는 올 4월 방한한 퀸시 존스에게 '한국의 떠오르는 재즈 뮤지션 5인' 중 한 명으로 강양을 소개했고, 강양은 그의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연주를 마치자마자 퀸시가 '언빌리버블(unbelievable·믿을 수 없다)!' 하더라고요. 제가 버클리음대에 합격한 것을 알았는지 '네가 내 모교에 가게 됐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면서 뽀뽀도 세 번이나 하고…." 퀸시 존스는 강양과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고받는 이메일을 통해 "음악을 즐기면서 하라. 버클리에 들어온 이상 너도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즐기면서 하는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고 조언해줬다고 한다.
강양은 음악 활동 목표를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음악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부러지지 않는 희망과 사랑을 주기 위해 음악을 합니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아시죠? 빈민가 아이들에게 악기 연주를 가르쳐 폭력과 가난으로 물든 사회를 교화했다는 오케스트라…. 그게 바로 제 음악의 최종 목표입니다."

▲ 2009 Seoul Jazz Academy Graduation Concert(강채리). /출처=유튜브

집에 피아노도 없었던 16세 한국 소녀… 세계적 음악학교서 모셔 가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9월 27일 화요일

[오늘의 세상] 철가방 아저씨는, 이 쪽방에서 '낮은 곳'을 보듬었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오늘의 세상] 철가방 아저씨는, 이 쪽방에서 '낮은 곳'을 보듬었다

  • 기사

입력 : 2011.09.28 03:05 / 수정 : 2011.09.28 11:36

매달 70만원 벌며 기부… 세상을 떠난 후, 세상을 부끄럽게 하다
짜장면 배달원 김우수씨의 마지막 흔적
그의 책상, 외롭지 않았던… 후원했던 아이들 3명의 사진
액자 속에 덩그러니… 서랍엔 보물같은 아이들 편지
그의 옷, 부끄러움 없었던… 대통령 초청때도 배달복 입어 "평소의 모습이 제일 떳떳해"
그의 일상, 외로움과 싸웠던… 휴대폰엔 저장된 번호 없어, 영화 관람이 유일한 취미
한달 70만원 벌이의 변두리 중국집 배달부. 창문도 없는 4.95㎡(약 1.5평)짜리 고시원 쪽방에 살면서 어려운 형편의 어린이들을 돕던 후원자. 7세 때 고아원에 버려져 지난 24일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이틀간 아무도 찾지 않은 병실에서 쓸쓸하게 숨진 사람. 김우수(54)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중국집 '동보성'은 김씨가 지난 5년간 주말마다 배달부로 일한 곳이다.
가게는 33㎡(약 10평) 크기에 불과하다. 주인 이금단(45)씨는 "김씨 아저씨는 출근 시각보다 한 시간 일찍 가게에 나와 영업 준비를 하던 사람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이 쪽방에 몸 누이고… 책상엔 후원했던 아이들 사진이… 김우수씨가 살던 서울 논현동의 고시원방. 창문도, 화장실도 없는 이 방은 1인용 침대와 간이 책상과 옷장 하나가 들어갈 공간이 전부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성실했던 김씨는 유품이 된 지갑 속에 5000원권 3장과 1000원권 45장을 남겼다. 다음 날 배달에 필요한 거스름돈으로 쓰려고 미리 준비해 놓은 돈이었다. 김씨는 주말마다 오전 8시부터 13시간 배달일을 하고, 오후 9시 일당 9만원을 받아 마을버스를 타고 아무도 없는 고시원 쪽방으로 돌아갔다.
월세 25만원 고시원 쪽방
동보성에서 마을버스 열다섯 정거장 떨어진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고시원 구석 방. 김씨는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서 4년 전부터 월세 25만원을 내고 살았다.
27일 주인을 잃은 방 한쪽에 놓인 책상 위에는 그가 후원해 온 아동 3명의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가 놓여 있었다. 책상 서랍에는 후원했거나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받은 감사편지들이 보물처럼 놓여 있었다. "용돈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게임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매일 노는 것은 아니에요." "보내주신 14.25달러로 가족을 위한 옷과 농작물을 구입했습니다. 항상 후원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에티오피아 후원아동)" "후원자님 언제나 저의 마음을 알아주셔서 감사드려요."

▲ 김우수씨의 책상에는 후원하던 아이들로부터 받은 편지가 보관돼 있었다. 철자법도 틀린 편지들이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그의 외로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는 이 사연들을 몇 번이나 읽었을까.

김씨는 158㎝, 55㎏의 작은 체격이었고, 웃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2~3벌뿐인 옷은 언제나 깨끗이 빨아서 입었다.
동보성 주인 이씨는 "2009년 연말에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들을 대통령이 초청한 적이 있어요. 다들 잘 차려입고 가라고 했지만, '평소 내 모습이 제일 떳떳하다'면서 배달 일할 때 입는 검은색 옷을 입고 갔어요. 꾸미지 않는 사람이었어요"라고 했다. 고시원 총무 박모(34)씨는 "월세도 한 번 밀린 적 없고, TV를 볼 때면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볼륨을 최대한 줄여서 보던 사람"이라고 김씨를 기억했다.
하루 담배 두 갑 피우던 사람이…
김씨는 지난 2006년부터 매달 5만~10만원을 어린이재단을 통해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후원하는 데 썼다. 하루에 담배 2갑을 피우고, 소주 2병을 마셨지만, 아이들 후원을 시작하면서 "술, 담배 살 돈이면 1명 더 도울 수 있다"며 모두 끊었다.

▲ 대통령 초청에도… "평소 내 모습으로"… 김우수(오른쪽 두번째)씨는 지난 2009년 12월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으로 선정돼 청와대 오찬에 초대받았다. 주변에서는 “대통령 만나는데 잘 차려입고 가라”고 했지만, 그는 배달일을 할 때 입는 검은색 옷에 모자를 쓰고 갔다. 그는 “평소의 내 모습이 제일 떳떳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이재단 관계자는 "고인이 형편이 좋을 때는 국내·외 아동 5명을 후원하다가 최근에는 생활이 어려워져 1명으로 줄였지만, 한 번도 후원금이 밀린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나머지 돈으로는 매달 20만원씩 납입하는 연금보험과, 12만1000원을 붓는 종신보험을 들었다. 종신보험 4000만원은 어린이재단이 받도록 해놨다. 사후 장기 기증도 서약했다.
동료 배달원 황대식(31)씨는 "김씨 아저씨는 언제나 '내가 인생을 제대로 살게 된 건 후원아동 덕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했다.
배달일을 하지 않는 평일에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신문 경제면을 보면서 전 재산인 300만원어치 주식이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하는 조조영화를 혼자서 보는 것이 낙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영화를 봤다.
영화관을 나서면서는 2000원짜리 스포츠복권을 1장 사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집 동료들은 "'당첨금액이 큰 로또를 사지 그러느냐'고 말하면, '내 운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을 것 같다'며 웃곤 했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자전거로 한강변을 달렸고,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의정부, 속초 등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집 근처 풍물시장에서 혼자 쇼핑하면서 1만~2만원짜리 운동화, 옷가지를 샀다. 동료 박산(37)씨는 "'좋은 물건 샀다'며 새 시계를 찬 팔목을 불쑥 내밀던 아이같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고아원에 버려졌던 인생인데
가족이 없는 김씨의 시신은 장례 절차를 밟지 못하고 27일까지도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 영안실에 있다. 김씨가 일했던 중국집 동보성 이금단 사장은 "평생 외롭게 산 사람인데 죽어서까지 가족 없는 설움을 받는다"면서 눈가를 훔쳤다. 어린이재단이 김씨의 장례를 치르기로 해 28일 빈소가 서울 대림동 서울복지병원에 마련된다.
그는 평생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단 하나의 단축 번호도 저장돼 있지 않았다. 단 한 통의 문자 메시지도 없었다. 부산이 고향인 김씨는 미혼모의 아이였고, 7세에 고아원에 맡겨졌다.
12세 때 고아원을 뛰쳐나온 탓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구걸, 양조장 허드렛일, 시장 지게꾼 등 어렵고 힘든 생활을 했다고 주변에서 말했다. 소년원도 몇 차례 다녀왔고, 지난 2005년에는 한 술집에서 "나를 무시하느냐"며 불을 지르려다 1년 6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자포자기했던 김씨는 감방 안에서 어린이재단이 발간한 잡지 '사과나무'를 읽고 인생을 새로 살기로 했다. 주위 사람들은 "잡지에서 불우한 환경에 처해있는 어린이들의 사연을 읽고 며칠을 울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돕고 싶은 아이들이 생기자 제대로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제2의 인생, 그의 마지막 5년은 세상 누구보다 뜨거웠다. 쪽방 구석 사진 속의 그가 기자에게 물었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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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6일 월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⑥ 병상에서 다시 만난 료마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⑥ 병상에서 다시 만난 료마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27 00:07 | 최종수정 2011-09-27 09:00 기사원문

스물여섯에 5년 시한부 절망 … 책 4000권에서 평생 먹고살 25자를 건지다
[중앙일보 이나리]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의 손정의 회장. 그는 투병 중이던 20대 후반 특유의 경영전략을 완성했다. 손자병법에 자신의 생각을 곱했다는 뜻에서 '제곱병법'이라 이름 지었다. 손 회장은 기업 인수합병이나 중장기 사업 전략을 고민할 때 반드시 이 25자의 뜻과 일치하는지 자문한다고 한다. [소프트뱅크 제공]
초기 소프트뱅크의 성장세는 눈부셨다. 창업 8개월 뒤인 1982년 5월에는 출판사업도 시작했다. 기존 소프트웨어(SW) 유통업에 이어 또 하나의 인프라 비즈니스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 사업을 시작한 데엔 사연이 있다. 당시 한 유명 PC잡지에 소프트뱅크 광고를 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잡지는 SW 유통사업도 하는 '아스키'라는 기업 소유였다. 한마디로 '경쟁사 광고를 내줄 순 없다'는 거였다.
나는 직접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오! PC'와 '오! MZ'라는 정보기술(IT) 전문지를 창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창간호의 80%가량이 반품됐다. 한 잡지에 매달 1000만 엔씩 적자가 났다. 주력 사업에서 이 정도의 대적자라니,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출판부장이다. 1억 엔 정도를 과감히 투자해 잡지를 일신해 보자. 3개월 뒤에도 흑자가 안 나면 손 떼는 거다. 1억 엔을 투자했다 날리는 거나, 매달 2000만 엔씩 적자를 보며 질질 끌다 반 년 뒤 물러나는 거나 손해보긴 매한가지 아닌가.”
우선 독자의 요구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수만 장의 독자 카드를 일일이 분석해 지면에 반영했다. 매주 편집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정가를 680엔에서 580엔으로 내렸다. TV 광고까지 했다. 효과가 곧 나타났다. 5만 부에서 10만 부로 증쇄를 했음에도 판매 3일 만에 매진이 됐다. 이후 출판사업은 계속 성장해 3년 뒤에는 9종의 잡지를 매달 60만 부씩 발행하게 됐다.

#"료마도 나도 5년이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그렇게 한시름 놨을 즈음 뜻밖의 재앙과 맞닥뜨렸다. 83년 봄 회사 건강검진에서 만성 간염 판정을 받은 것이다. 상태가 위중했다. 의료진은 “길게 잡아도 5년이다. 그 이상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미친 듯 공부했다. 펄펄 끓는 열의로 회사를 세운 지 이제 1년 반이다. 딸은 겨우 갓난쟁이다. 해야 할 일이 산처럼 많다. 빚도 잔뜩 있다. 무엇보다 나를 믿는 고객은? 동료는? 직원들은?
진단받은 다음 날 바로 입원했다. 병상에서 울었다. 그저 살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면, 딸아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다면. 사실이 알려지면 은행에서 당장 융자금을 회수할까 봐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가 회의에 참석했다. 그 와중에도 회사 걱정을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때 료마를 다시 만났다. 시바 료타로 소설 『료마가 간다』를 정독했다. 열여섯 시절 내가 큰 뜻을 품게 해준 바로 그 책이다. 부끄러웠다. 료마는 33세에 죽었다. 마지막 5년 동안 엄청난 일을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 나도 5년이다. 그동안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것을 하자, 목숨 바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를 불태웠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왜 사업을 시작하는지,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되새겼다. 결국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딸의 미소, 가족의 미소, 직원들의 미소. 그런데 누구보다 고객들이 웃어주면 좋겠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오지, 얼굴에 흙 묻힌 꼬마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누구한테인지 모르지만 그저 “고맙습니다”라고 중얼거리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은 역시 '자기만족'이었다. 멋진 말, 어려운 말 다 필요 없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 그것은 역시 디지털 정보 혁명을 일으켜 수많은 이가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게 하는 것. 오늘날 트위터처럼 말이다.

#자금 압박·직원 배신, 독서로 이겼다
강렬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났다.
첫째, 병을 이긴다. 둘째, 사업을 지킨다.
말처럼 쉽진 않았다. 나는 이후 3년 반가량 입·퇴원을 반복했다. 일상적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할 수 없어 새 사장을 영입했다. 일본경비보장(지금의 세콤) 부사장이던 오모리 야스히코였다. 나는 회장으로 물러앉았다. 그렇더라도 회사 일에서 손 뗄 생각은 없었다. 병실에 PC와 팩시밀리·전화기를 설치했다. 의사에게 혼나가며 원격 경영을 시작했다. 새 사업도 열심히 구상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위기가 이어졌다. 84년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 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이 실패했다. 타격이 컸다. 은행 융자로 급한 불을 끄는 나날이었다. 86년엔 이른바 '소프트뱅크 사건'이 터졌다. 신뢰해 온 유능한 임직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다. 독립해 회사를 차린다고 했다. 배신이었다. 나는 굴욕감을 누르며 끝까지 매달렸다. 그러나 잡지 못했다. 그들이 만든 회사는 결국 얼마 못 가 사라졌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배신한 사람은 절대 성공 못한다. 그들 외에도 여러 명이 경쟁사로 빠져나갔다. 고객들의 불만도 컸다. “그 사람 요즘 안 보이네. 의리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쇼크 요법으로 병 이기고 복귀
소프트뱅크가 창업 초기 발간한 잡지들.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 때마다 책을 폈다. 그렇게 읽은 책이 4000여 권. 평생 먹고살 지식을 얻은 셈이다. 소프트뱅크 특유의 경영 전략인 '제곱병법'도 이때 창안했다. 손자병법을 깊이 읽고 내 식대로 소화한 결과다. 핵심은 간단하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이길 싸움에서 이기는 거다. 전투는 도박이 아니다. 과학이며 이론이다. 또 하나. '싸우지 않고 이긴다'. 인수합병(M&A)이 바로 그렇다. 일본의 경영자나 언론 관계자들은 대부분 그런 내 전략을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종종 '모험'이니 '차익'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걸로 봐서 말이다. 각각의 딜이 얼마나 큰 비전에 따라, 과학적 분석하에, 긴 미래를 보고 이루어진 것인지는 차차 얘기하게 될 터이다.
그 와중에도 내 병세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84년 새 치료법을 만났다. 도라노몬병원의 구마다 히로미쓰 박사가 창안한 '스테로이드 이탈요법'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만성간염을 급성간염으로 변화시켜 인체 내부의 저항력을 일거에 끌어냄으로써 치료를 도모하는 일종의 쇼크 요법이다. 지금은 훨씬 나은 치료법이 많겠지만 당시로선 길이 별로 없었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 바이러스 수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나는 86년 5월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날 기다리는 건 10억 엔의 빚, 그리고 핵심 임원과의 고통스러운 갈등이었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⑥ 병상에서 다시 만난 료마 :: 네이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