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무사히…" 일 시작전 입버릇처럼
■ 감정 노동자들의 비애
생떼…모욕…성희롱 다반사강희경기자 kstar@hk.co.kr
감정노동자들은 손님에게 성희롱 등 모욕적인 일을 당해도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이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1 2
감정노동자들은 손님에게 성희롱 등 모욕적인 일을 당해도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이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야 이 XX야, 이 곰팡이 안보여?" 지난주 서울의 한 대형 마트. 30대 남성이 떡국용 떡에 곰팡이가 생겼다며 욕설과 함께 떡 봉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던 40대 여성 판매원 A씨는 조심스럽게 "고객님, 떡을 냉장고에 보관하셨죠?"라고 물었다. 남성은 "겨울이라 밖에 뒀는데, 뭐가 문제냐"고 받았다. 날짜를 따져 보니 열흘 이상 떡을 상온에 방치한 것이다.
A씨는 화가 치밀었지만 자세를 가다듬고 환불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 남성은 "언론사에 제보하겠다"며 목청을 더 높였다. 그는 서너 시간 동안의 실랑이 끝에 5만원짜리 상품권을 받고서야 돌아갔다. A씨는 "이런 손님이 어쩌다 나타나야 '희한한 사람 다 있다'생각할 텐데,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런 일을 당하니 마트에는 이상한 사람만 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매일 '오늘도 무사히'라고 기도하며 일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의 계산원 판매원, 호텔이나 음식점의 종업원 등 감정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미소 뒤에는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통이 숨어 있다. 제품에 하자가 있다며 화를 내며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환불을 요구하거나 보상을 바라는 고객은 부지기수고, 제품 구입 후 마음이 바뀌자 수 차례 배송과 반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모욕적인 언사에 성희롱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고통조차 가슴에 묻고 미소로 고객을 맞아야 하는 게 감정노동자들의 슬픈 운명이다.
백화점에서 가구를 판매하는 윤모(51)씨는 얼마 전 '진상' 고객에게 걸렸다. 67만원짜리 식탁을 배송했는데 고객이 사소한 하자를 문제삼아 교환을 요구했다. 일단 반품 조치하고 새 제품을 재배송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품 다리와 패널이 완벽하게 맞지 않아 틈새가 생긴다며 교환을 요구했다. 윤씨가 온갖 항의를 들으며 배송과 반품을 반복한 것만 10여 차례. 배송팀과 함께 제품을 들고 고객 집을 직접 방문해 식탁 위에 널브러진 반찬통까지 정리해 냉장고에 넣고 새 제품 설치와 걸레질까지 해주고 온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윤씨는 허리 굽혀 사과해야 했다. 그러나 고객은 끝내 환불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윤씨는 "처음부터 환불을 요구하면 될텐데 끝까지 판매원을 괴롭히며 물고 늘어지는 손님이 있다"며 "백화점이나 고객 모두 판매원에게만 서비스와 판매 책임의 짐을 모두 지우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성희롱까지 당하는 사례도 있다. 부산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는 이모(40)씨는 몇 해 전 밤 늦게 호텔 바에서 주문을 받던 중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손님 한 명이 다리에 손을 갖다 댄 것. 이씨가 반사적으로 손을 쳐내며 화를 냈지만 손님은 술을 다 마시고 바를 떠날 때쯤에야 건성으로 사과를 했다. 지금도 당시의 굴욕감과 당혹감이 생생하다는 이씨는 "손님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를 하려면 직장을 그만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감정 노동자들의 감정은 세월에 닳아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의 말처럼 감정 노동자들은 인간적 모멸, 모욕에도 참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하루 11시간 근무에 월80만~90만원(대형 마트 계산원 기준)의 박봉이지만 그나마 해고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유영자 홈플러스 노조 지부장은 "대부분의 감정 노동자가 저임금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아 늘 회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며 "정신적 스트레스, 우울증 증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어도 상담 한 번만으로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는 않을까 무서워 혼자 속으로만 삭이며 넘어가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