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구급차에 길 안 터주면 과태료’ 시행 첫날, 사이렌 울려도… 꿈쩍않는 시민의식
A1면| 기사입력 2011-12-10 03:18 | 최종수정 2011-12-10 09:52
[동아일보]
소방차나 119구급차 등 긴급자동차에 길을 비켜주지 않으면 2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개정 도로교통법이 9일 시행됐다. 하지만 별반 달라진 게 없어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여전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긴급자동차의 진로를 막으면 과태료를 물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운전자가 드문 데다 어떻게 길을 비켜줘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를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아무리 위급해도 “내 일 아니다”
9일 오전 10시 17분 응급 환자를 수송하려고 출동한 서울 강남소방서 삼성119안전센터 구급차는 여러 차례 아찔한 상황을 맞아야 했다. 서울 영동대교 부근에서 아무리 사이렌을 울려도 앞에 가는 승용차 5대와 트럭 1대가 길을 터주지 않았다. 최용범 소방장(41)은 위험을 무릅쓰고 중앙선을 넘어야 했다. 영동대교에 진입하자 다시 앞선 차량들에 막혔다. 사이렌을 울리고 “좌우로 비키세요”라는 안내방송을 하고 나서야 느릿느릿 차량들이 길을 터주었다. 이 틈을 노려 구급차 앞뒤로 끼어든 차량만 4대였다.
도로교통법 29조는 긴급자동차가 접근할 경우 일반 운전자들은 도로 가장자리로 피해 차량을 일시 정차하거나 진로를 양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날 실제로 운전자들이 먼저 이 같은 방법으로 길을 터 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사이렌을 울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긴급출동 중이니 양쪽으로 비켜주세요”라고 방송을 하고 경적을 크게 몇 번씩 울려야 길을 열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9시 21분 중부소방서 무학119안전센터 이광석 소방교(38)와 곽명세 소방사(40)는 중구 황학동의 응급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나섰지만 도로교통공단 앞 사거리에서 발이 묶였다. 이곳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지만 1차로에 먼저 와서 신호를 기다리던 차량 10여 대가 사이렌 소리에도 꿈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운전자들 “비키고 싶어도 못비키는 때 많아” ▼
소방청 “고의성 명백한 경우만 딱지 뗄 것”
곽 소방사는 “비켜주기만 기다리다가는 현장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다”며 결국 차로를 변경해 교차로에 진입한 다음 반대편 차로에서 직진해 오는 차량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좌회전했다. 주택가 골목에서는 인근 점포에 물건을 내리는 트럭 때문에 잠시 멈췄지만 운전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굼뜨게 차를 빼줬다. 현장에서 만난 응급환자 보호자는 “1초가 급한데 왜 이제 도착하느냐”며 발을 굴렀다.
○ 과태료 부과 사실 모르는 시민 많아
시민들은 소방차 등의 신속출동에 협조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과태료 부과에는 불만을 표시했다.
개인택시 운전사 김모 씨(60)는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사실은 방송 뉴스 등을 통해 얼핏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인 줄은 몰랐다”며 “꽉 막힌 도로에서 어떻게 비켜주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회사원 이모 씨(46·여)도 소방차 등의 진로를 막을 경우 과태료를 물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이 씨는 “제도가 생겼으면 따라야 하겠지만 도로나 교통상황을 고려해 과태료를 물렸으면 한다”며 “차로가 넓고 피해줄 공간이 충분하면 모르겠지만 길이 완전히 막힌 상태라면 앞차와의 간격이 좁아 비켜주고 싶어도 비켜주기 힘들다. 이럴 때 과태료 딱지가 날아오면 황당할 것 같다”고 말했다.
소방방재청도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계속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진로를 방해하는 경우 등 ‘제3자가 봐도 고의적으로 길을 비켜주지 않는 것이 명백한 경우’에만 단속할 방침이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현장에 신속하게 출동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차량 체증이 심하거나 신호대기로 꼼짝할 수 없는 경우까지 단속 대상에 포함할 순 없다”고 말했다.
○ 아무리 막혀도 피해줄 길 있다
현장 소방관들은 과태료 부과에 앞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운전습관을 개선하는 등 긴급차량 출동에 대한 협조의식이 높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긴급자동차가 접근할 경우 피해주는 방법을 운전자들이 미리 잘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소방차나 119구급차가 뒤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올 경우 가능한 한 도로 우측 가장자리로 진로를 변경해 운행하거나 일시 정지해 진로를 터주어야 한다. 편도 3차로 이상의 도로는 긴급차량이 진행하는 차로를 피해 좌우 차로로 비켜주면 된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터주는 시민의식이 발휘되면 소중한 이웃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홍 기자 no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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