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상] "내 癌 분석을" 의사의 눈물로… 새 폐암 유전자 찾았다
김철중 의학전문기자 입력 : 2011.12.23 03:11 | 수정 : 2011.12.23 04:09
[서울대·서울성모병원 연구진, 세계 최초 발견]
폐암 4기 판정받은 30대 의사 "담배도 안 피우는 내가 왜… 유전자에 뭔가 있을 것이다"
서울대에 연구 요청… 전체 폐암 환자의 6% '근본적 치료' 새 길 열어
- 서정선 교수(사진 왼쪽)와 강진형 교수.
젊은 나이에 폐암에 걸린 한 의사의 간절한 요청과 학술적 열정이 새로운 폐암 유발 유전자를 세계 최초로 발견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서울대 의대 유전체의학연구소 서정선 교수팀은 22일 "폐암 환자의 유전체 분석을 통해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유전자 변이를 발견했다"며 "이 사실을 유전자 분야 국제학술지 '게놈(genome·유전체) 연구' 최신호에 발표했다"고 밝혔다. 국내 연구진이 '폐암 유전자'를 찾아낸 것은 처음이다.
이번 연구는 폐암에 걸린 젊은 의사의 애절한 요청으로 시작됐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영상의학과 의사로 근무하는 김모(34)씨는 지난해 우연히 폐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폐암은 발견 당시 이미 간과 뼈에 전이(轉移)돼 있었다. 암 병기 1~4기 중 4기였다.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담배를 한 번도 피우지 않았는데다, 폐암에 걸리기에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폐암은 주로 60세 이상 흡연자에서 발생한다. 폐암의 종류도 여성들이 주로 걸리는 '폐 선암(腺癌)'이었다. 이는 전체 폐암의 40%를 차지하며 비(非)흡연자에게 많이 발생한다.
김씨는 서울과학고를 나와 카이스트(KAIST)를 졸업한 수재였다. 이후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해 전문의의 길을 걷던 전도유망한 의학도였다. 마침 대학 선배가 서울대 유전체의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유전자 염기서열 전체를 분석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특이한 유전자 변이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폐암 발생을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유전자 변이가 발견됐다. 김씨의 폐암 조직에서 정상 폐에서는 발현되지 않는 'RET 암 유전자'가 기존의 'KIF5B'라는 유전자와 융합돼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된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RET 융합 유전자'가 김씨에게 폐 선암을 일으킨 것이다. 서울대 연구팀은 동일한 형태의 폐암을 보인 두 명의 여성 환자에게서도 같은 유전자 변이 현상을 확인했다. 새로운 '폐암 유전자'가 입증된 순간이다. 지금까지 폐암 유발 유전자 변이로는 알크(ALK)·EGFA 등 3개만 발견됐다.
김씨의 주치의인 서울성모병원 종양내과 강진형 교수도 이번 연구에 공동 참여했다. 강 교수는 "폐암 유발 유전자를 찾아냈으니 치료에도 희망이 보인다"며 "'RET 융합유전자'를 억제할 것으로 예상하는 항암제를 김씨에게 투여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줄곧 기존의 항암제로 치료를 받아 왔으나 병세가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팀은 앞으로 'RET 융합유전자'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약물을 개발할 계획이다. 기존에 발견된 알크(ALK)유전자가 일으키는 폐 선암은 전체 환자의 약 4%인 반면, 'RET 유전자' 관련 환자는 그보다 많은 6%로 파악된다. '알크 유전자 신약(新藥)'은 다국적제약회사 화이자가 개발해 현재 임상시험 중인데, 시판 시 의약품 시장 규모는 50억달러(한화 약 5조8000억원)로 추산된다. 이런 약물을 쓰기 위해서는 폐암 환자가 어떤 유전자 변이를 가졌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폐 선암 환자가 유전자 진단을 받게 되는데, 그 진단 기술에 한 사람당 수백 달러가 쓰인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폐암은 매년 161만명에서 발생하며, 그 중 138만명이 사망한다. 통상 특정 유전자를 억제하는 약물을 개발하는 데는 2~3년 걸린다.
서정선 교수는 "이번 발견의 의미는 암 환자를 대상으로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를 효과적으로 찾아내 그 환자에게 맞는 맞춤형 암 치료를 적용하는 새로운 의료 혁명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폐암 말기에도 희망을 놓지 않은 한 젊은 의사의 열정과 노력이 폐암 치료의 획기적 전기(轉機)를 마련할 것인지 의료계가 주목하고 있다.☞유전체(genome)
각각의 생물학적 고유 기능을 발휘하는 개별 유전자(gene)와 유전자 묶음인 염색체(chromosome)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한 개인이 가진 유전 정보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유전 정보는 약 60억 쌍의 염기 서열로 구성돼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를 통칭해 유전체라 부른다. 현재 한 개인의 유전체 정보를 모두 분석하는 데는 약 500만원의 비용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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