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5일 토요일

사기쳤다가는 여기선 끝입니다 - 오마이뉴스

 

사기쳤다가는 여기선 끝입니다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교육강국 핀란드의 힘⑬] 신뢰와 투명성이 그들을 만들었다

11.01.15 10:18 ㅣ최종 업데이트 11.01.15 10:23
윤정현 (starrynight)

유러피언드림, 핀란드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다섯 번째 이야기는 교육 강국 핀란드에 관한 이야기다. 인구 530만 명의 핀란드는 수준 높은 복지와 교육제도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핀란드는 1960년대부터 40년 동안 꾸준히 '누구에게나 질 좋은 교육을'이라는 목표를 실현시켜 왔다. 그 결과는 2000년부터 국제학력평가시스템(PISA) 4번 연속 최상위권 기록으로 나타났다. 경쟁과 획일적인 시험이 거의 없지만,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 핀란드. 그들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복지제도와 삶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편집자말>

글 : 윤정현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핀란드편' 특별취재팀

핀란드 헬싱키 인근 에스포시 주변의 겨울 풍경. 쌓인 눈은 4월이 돼야 녹는다.

ⓒ 임정훈

유러피언드림

핀란드에서는 운동이 일상생활이다. 겨울이면 눈쌓인 거리에서 크로스컨트리를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 임정훈

유러피언드림

아침부터 제설차가 눈 치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여기는 핀란드. 백야 때문에 아무리 일해도 야근을 할 수 없는 여름과 달리 해가 짧아 아침부터 야근하는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 요즘엔 저 정도 소리는 들어줘야 정신이 번쩍 든다.

샤워를 하다가 목이 말라 샤워기를 틀어놓고 물을 마셨다. 여기에선 수돗물을 바로 마시는데 식당에서도 수돗물을 받아서 마실 물로 갖다준다.

아침을 먹고 논문 진도를 빼 볼 요량으로 학교로 향했다. 자전거를 타고 갈까 하다가 눈이 와서 그냥 걷기로 했다. 이 곳에선 자전거나 스케이트, 스키를 타는 게 아이가 걸음마를 배워 걸어다니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한국 입시교육이 낳은 전형적인 '문제 사례'로, 할 줄 아는 운동이 거의 없었던 내가 핀란드에서 자전거를 배워 등하교는 물론 버스가 끊기고 난 밤에도 자전거로 귀가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휴가 때 업무용 메일 절대 체크하지 않는 사람들

공기는 금방 숲에서 뿜어져 나온 듯 청량하다. 한국에서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수업을 하는 직업(교사)을 가졌던 데다가 대도시의 매연과 업무 스트레스가 더해져 늘 인후염을 달고 살았는데 여기서 지병이 사라졌다. 오후 4시에 퇴근길 정체가 일어나고, 오후 9시가 되면 슈퍼마켓이 문을 닫으며, 24시간 편의점과 퀵서비스는 당연히 없고, 휴가가 되면 업무용 메일은 절대 체크하지 않은 채 자연을 벗삼아 사우나를 즐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 핀란드에서 나 역시 한국보다는 다소 '느린 삶'을 살고 있다.

사우나에서 나와 몸에 김이 나는 상태로 바닷물에 뛰어 드는 사람들. 핀란드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사우나를 즐기는 방식이다. 겨울철에는 얼음을 깨고 호수에 들어가기도 한다.

ⓒ 윤정현

사우나

경제규모 세계 11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국회에서 결식아동을 위한 급식 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시키고, 세계적인 도시를 만들겠다고 장담하던 인구 1000만이 넘는 도시의 시장은 그 지역 초등학생들의 전면 무상급식이 세금을 축내는 포퓰리즘 정책이라며 팔을 걷어붙이고 반대하는 일이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다.

한편, 2차 세계대전 직후 가난에 시달렸던 핀란드에서는 하루 한 끼만이라도 모든 아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무상 급식을 시작했고, 역시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학생 수당을 만들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었을까? 2009년부터 핀란드 교육 탐방을 하러 오신 한국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핀란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외국 유학생의 눈으로 이 곳 사회를 관찰한 결과, 바로 핀란드 교육과 사회의 바탕에는 신뢰와 투명한 사회 시스템이 형성되어 있으며, 바로 그것이 지금의 핀란드 사회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투르크 대학 교육학부 건물 1층에는 외투나 소지품을 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학생들이 늘 이용하고 있다.

ⓒ 윤정현

핀란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핀란드는 추운 나라답게 공공 건물에 들어서면 대개 외투를 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도 사람들은 그 곳에 옷과 다른 소지품을 걸어놓은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가거나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간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내심 놀랐다. 누군가가 내 물건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전제로 했을 때만 사람들은 그 공간을 마음놓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을 이용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갑을 잃어 버렸습니다. 돈은 괜찮으니 신분증만이라도 돌려주세요'라는 문구가 자주 벽에 붙어있는 것을 말이다. 이곳에서는 옷이나 소지품을 개방된 공간에 걸어놓아도 안전하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정작 내가 그런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개인이 자기 것을 눈 부릅뜨고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가 모두가 모두의 것을 돌보는 시스템에 적응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핀란드 헬싱키 시내를 운행하는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트램. 표 검사를 잘 하지 않지만, 무임승차가 발각되면 낭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 임정훈

핀란드

만약 헬싱키에서 지하철이나 전차(트램)를 탈 일이 있다면 검표 시스템이 상당히 느슨하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쩌다가 '나 검표원이오'라고 알리는 듯한 복장을 한 사람이 차량 안을 돌아다니긴 하지만 말이다. 약간의 요령을 터득한다면 무임승차도 가능하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 재수가 없으면 벌금을 엄청나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벌금이 아니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자칫 신용을 잃어버릴 수 있다. 핀란드 사람들은 고의로 부정을 저지르거나 사기를 치는 행위를 아주 싫어해서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이렇게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투명성이 그 사회의 기본 작동 원리로 정착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감시 및 질서 유지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엄청나게 절감할 수 있다.

지난 달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취재팀은 코디 곽수현씨(핀란드 거주)의 자동차를 이용해 이동했다. 핀란드인과 결혼해 9년째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곽씨는 길에 자동차를 주차할 때마다 대충 주차하는 법이 없었다. 혹 있을지 모르는 주차위반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항상 주차 영수증을 끊어서 움직였다. 잠시 자리를 비울 경우 아무렇게나 길에 주차하는 풍경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풍경이었다.  

특이하게 보였던 '서비스업 종사 노동자들'

핀란드 헬싱키 중심가인 만에르헤임 거리 스톡만 백화점 앞에 있는 동상. 헬싱키의 최중심 번화가에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을 세워놓았다는 것이 참 인상적이다.

ⓒ 윤정현

핀란드

핀란드에 처음 도착해서 마주했던 운전 기사들의 표정과 행동은 나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커피나 시끄러운 음악으로 피곤을 달래지 않으면 안 되는 한국의 운전 기사들과는 달리 그들에게서는 직업에 대한 당당함과 자신감 그리고 여유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장거리 고속버스 기사들은 손님들이 아주 작은 정류장에 하차할 때에도 따라 내려서 일일이 큰 짐가방을 꺼내 줄 정도로 친절한 편이다. 식당의 종업원을 비롯한 다른 서비스 업종 종사 노동자들 역시 손님에게 굽신거리는 법이 없다.

물론, 그런 태도는 과중한 노동 강도와 열악한 처우에서 비롯되는 불친절과는 성격이 다르다. 핀란드 사람들 자체가 감정을 표정으로 쉽게 드러내는 성향이 아닌 데다가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절대 지나친 감정 노동 서비스를 손님에게 베풀 것을 강요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학교 근처 공사장에서 일하시는 아저씨들이 학생 식당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대학생들 속에 섞여 식사하는 모습을 가끔 보는데, 그 모습 또한 전혀 어색함 없이 당당하다. 식당의 계산원들은 학생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어도 계산에 앞서 손님들에게 일일이 '헤이'라고 인사를 건넬 정도로 이들의 노동에서는 여유가 묻어난다. 소비자의 권리 못지않게 노동자의 권리도 중요하며 육체노동 또한 존중받는 곳, 그래서 육체노동자들의 인건비가 비싸고, 고등학생들 모두가 기를 쓰고 대학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닐까.

한 중국인 친구가 내게 말했다. 핀란드 남자들은 얼굴에 표정 변화도 거의 없고, 너무 수줍음이 많고, 말수도 적고 게다가 더치 페이까지 하니 정이나 매력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비록 사석에선 쪼잔하게 더치 페이를 할지언정 사회 구성원 모두가 최소한의 사회 안전 장치 속에서 보호 받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험 부담을 세금이라는 형태로 서로가 나눠갖고 있는 이 핀란드 사람들이 과연 개인주의적이며 동양 문화에서 미덕이라고 일컫는 '정'이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내 이웃의 삶이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이런 연대의식을 납세를 통한 공공 복지 강화와 같은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가족, 친척, 친구들 경조사를 꼬박 꼬박 챙기며 부조금을 내미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정' 의 기준이 아닐까.'

"세금 선순환 구조가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퇴근시간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편이다. 오후4시만 되면 교통정체가 시작된다. 사진은 헬싱키 중앙역 부근의 모습.

ⓒ 임정훈

유러피언드림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만난, 그리고 내가 1년 넘게 이곳에 지내면서 알게 된 핀란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도 혜택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세금을 기꺼이 낼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수입의 50% 가까이를 세금으로 내는 고소득자 역시 불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스템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며 쿨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낸 세금이 쓸데없는 토목공사에 들어가지 않고, 교육과 의료를 무상으로 해결해 주고, 10대 후반에 독립할 수 있는 학생수당이 통장으로 들어오는 걸 경험한 이들에게 세금은 가장 중요한 '약속'인 셈이다. 그래서 탈세하는 사람을 살인범 못지않은 파렴치범으로 취급한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핀란드에 살고 있는 교민 신선아씨는 "우리나라는 세금을 내면 뭔가 빼앗기는 느낌인데, 여기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면서 "세금 선순환 구조가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물론 핀란드도 사람 사는 동네이긴 마찬가지여서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공교육 선진국으로 불리는 이 곳에서도 시장 논리로 교육 정책을 입안하려는 움직임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핀란드 정책 입안자들이 특히 대학교육 분야에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강력하게 권고하는 교육 시장화 모델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핀란드 학자들의 우려 섞인 연구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다만, 교육의 상품화, 수월성 교육 혹은 경쟁력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아직은 소수라는 것이 중론이다. 기자 역시 핀란드 교육을 너무 미화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면서도, 핀란드 교육이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집이 가난한 학생, 부진 학생 단 한 명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그 정신을 계속 이어나가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다.

또한, 길고 추운 겨울 날씨를 닮아서인지 낯선 사람만 보면 시선을 피해 버리는 이네들의 '얼음 공주' 같은 표정과 다소 은둔하려는 성향이 있는 이들의 생활방식은, 남에게 관심 많고 시끌벅적한 남쪽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5개월 정도로 상당히 길게 이어지는 추위와 동지를 기준으로 급격하게 길어지는 밤도 적응을 어렵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핀란드 한 종합학교의 급식시간 풍경. 핀란드는 2차대전 직후부터 학교에서 모든 아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 임정훈

핀란드

핀란드 사회의 '신뢰'와 투명성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 호기심 어린 관찰자의 시선으로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유학생인 필자가 갖고 있는 목표 중 하나이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서 한국 사회의 심각한 악순환 구조를 선순환 구조로 바꾸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핀란드편을 취재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핀란드 친구들과 현지 학교와 기관 관계자들, 현지에서 취재를 도와준 코디 곽수현씨, 취재팀에게 여러가지로 조언을 주신 교민 신선아씨 부부와 장원철씨 부부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핀란드편' 특별취재팀 : 박수원 기자(팀장), 임정훈 시민기자, 윤정현 해외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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