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하던 10대 소녀들이 갑자기 왜 매춘부로?
전병근 기자 입력 : 2012.05.19 03:09 | 수정 : 2012.05.19 07:29
美 대통령·인턴 스캔들 빈발하는 이유는 뭘까
의회 인력 절반이 인턴… 디즈니랜드에서는 '감정 노동'까지…
이력서 한 줄 위해 저당잡힌 청춘의 꿈청춘 착취자들
로스펄린지음|안진환 옮김|사월의 책|352쪽|1만5000원
"인턴들이 총파업을 벌이면 이 나라는 망할 거야."
미국 수도 워싱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정부·의회에서 실무를 맡은 사람 중 상당수가 20대 무보수 인턴들이다. 매년 약 2만명의 지망생이 워싱턴에 모여들고 그중 6000명이 의회에 채용된다. 의원 1명당 100명이 넘는 꼴. 200~300개 자리인 백악관 인턴에는 연 6000명이 지원한다. 대학생들은 인턴 경력에 혈안이다. 4년제 대학 재학생(약 950만명)의 75%가 졸업 전 인턴을 경험한다. 그 중 절반 이상이 무보수 혹은 최저임금보다 못한 돈을 받고 일한다. 그 덕에 미국의 각 조직은 합쳐서 연 20억달러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다. '인턴 국가(Intern Nation)'. 이 책의 원제목이다.
◇인턴 공화국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성추문 상대인 르윈스키만 (백악관) 인턴이었던 게 아니다. 클린턴 자신도 1967년 상원 의원 인턴을 거쳤다. 그가 존경한 케네디 전 대통령도 19세 인턴과 애정 행각을 벌였다. 인턴과의 스캔들이 주기적인 뉴스가 되는 건 그만큼 인턴 숫자가 많다는 증거다.
잡다한 행정부터 커피 심부름까지 온갖 허드렛일이 이들 몫이다. 백악관 예산엔 아예 인턴 보수 항목이 없다. 무보수란 얘기다. 이런 관행을 비판하는 공화당 의원 사무실에도 인턴 수십명이 대가 없이 일한다. 정부·의회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주류에 입문했다. 월가 큰손도, 문화예술계 거목도 마찬가지다.
◇'수련의'에서 '값싼 인력'으로
인턴은 원래 의료계 용어였다. 병원 내 상주 수련의와 보조 의사를 통칭해 프랑스어 'interne'이라 불렀다. 1960년대 들어 각 분야로 퍼졌고, 20세기 말 탈산업화와 함께 '가변적 노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각종 비영리 단체까지 무보수 인턴 덕분에 굴러간다.
세계 최대의 인턴십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디즈니랜드. 검표원, 모노레일 기관사, 미키마우스 가면을 쓴 배우까지 직원 절반(연간 7000~8000명)이 인턴이다. 유니폼은 지급되지 않고, 파랑과 흰색이 섞인 가슴 명찰로만 식별될 뿐이다. 지원서에는 희망 부서를 셋까지 쓸 수 있지만 말 그대로 희망일 뿐이다. 인기 쇼인 '캐리비안의 해적' 공연에 캐스팅될 수도 있다는 말에 왔다가 화장실 청소나 햄버거 굽기만 하다 가는 경우도 있다.
계약서엔 업무도 보수도 언급이 없다. 하지만 일의 강도는 정규직 수준이다. 대개 12시간 교대제이나 실제는 오전 6시에 시작, 자정 넘어 끝난다. 그래도 항상 활짝 웃는 '디즈니 얼굴'에 '디즈니 말투'까지 갖추지 않으면 해고다.
산학 협동 모델로 칭찬받기도 한다. 실제로는 값싼 노동력을 편법적으로 확보하는 기회로도 활용된다. '인턴 채용 정신'에 부합하려면 전문적인 직무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지만 디즈니랜드엔 없다. 최저임금(시간당 7달러25센트) 외에 혜택은 놀이동산 무료이용권. 그래도 인턴들은 견딘다. 이력서에 디즈니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다.
인턴 세계는 문어발처럼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고등학생부터 중년 퇴직자들까지 뛰어든다. 인턴십 인터넷 경매도 성업 중이다. 뉴욕 베르사체 인턴십은 5000달러, 영국 허핑턴포스트 블로깅 인턴직은 1만3000달러에 낙찰됐다. 2010년 4월 미국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와 함께하는 1주일 인턴십 낙찰가는 4만2500달러였다.
- /토픽이미지
◇통과 의례 혹은 진입 장벽
흔히 인턴 과정은 고등교육과 직업 세계를 잇는 통로라고 말한다. 인재 선발·양성의 기회로 활용하는 모범 프로그램도 있다. 빌 게이츠는 매년 여름 1000명이 넘는 인턴들을 위해 '바비큐 행사'까지 연다. 하지만 저자는 더 많은 인턴제의 어두운 실상을 조명한다. 인격 모욕에 성희롱까지 위험 수위를 넘나든다. 뉴욕 극장 인턴은 사장 소변 샘플을 병원에 가져다준 일도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학교서 내준 '사회적 인턴십' 경험 쌓기 숙제를 오해한 10대 소녀들이 매춘부 생활을 하는 사건도 있었다. 인턴 인권은 법률 사각지대에 있다. 노동자 신분도 인정받지 못해 노동 소송의 당사자로 법정에서 권익을 따질 수도 없다.
기회의 문이어야 할 인턴제가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기도 한다. 조건과 전망이 좋은 유명 인턴직일수록 돈과 인맥이 든든한 특권층 자녀 손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정규직으로 이어질 확률도 높다. 반면 빈곤층은 형편상 무보수 인턴 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 기회가 주어져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업을 겸해야 한다. 화이트칼라 진입을 위해 대가 없이 일하면서 당장 생계를 위해서는 블루칼라 세계에서 임금을 받고 노동해야 하는 역설이 일어난다.
'경험'을 위해 일하는 인턴들이 늘어날수록 '생계'를 위해 돈 벌어야 하는 이들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그런데도 모두가 침묵한다. 대학도 의회도 사회단체도 '인턴 사용자'이기 때문이다. 이력서의 '빛나는 한 줄'을 위해 인턴 당사자나 부모들도 다 부당한 구조를 참는다.
◇인턴 권리장전 만들어야
저자는 제대로 된 인턴제를 위한 모두의 각성을 촉구한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하는 인턴법 제정과 최저임금제가 필수라고 역설한다. 청년들에게는 부당한 관행으로 얼룩진 지금의 인턴 세계에 대한 미련을 떨치라고 말한다. 기업들에는 인턴 채용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인턴 프로그램에 실질적인 연수와 멘토링 측면을 보강하라고 요구한다.
'인턴 대국' 미국에서는 출간 직후부터 화제였다. 2008~2010년 사이 디즈니월드에서 실리콘밸리, 아이비리그 캠퍼스, 중국 본토의 산업 현장까지, 중세 도제제도부터 뉴딜을 거쳐 신경제주의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아우르는 취재와 연구가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인턴에 적잖이 의존하는 미 언론계도 "모두가 침묵해왔던 '불편한 문제'를 본격 공론화했다"며 주목했다. 우리 사회는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가, 책을 덮고 자문하게 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