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0일 수요일

[서울신문] [김문이 만난사람] 아리랑 연구 30년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문이 만난사람] 아리랑 연구 30년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한민족 아리랑, 中 무형문화재 등재는 문화전쟁 서막”

누구나 부른다. 남녀노소 할 것 없다. 우리의 역사요 한이다. 영혼의 울림이다. 언제 어디서나 방방곡곡 퍼져나가는 마음의 메아리로 늘 존재한다. 남과 북은 물론 해외에 사는 모든 동포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바로 ‘아리랑’이다. 새달 2일 경기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4만 5000명이 아리랑 대합창을 부른다. 생각만 해도 감동적이다. 이 광경은 전 세계에 알려진다. 한국 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객원교수는 이 장면을 모아 미국 뉴욕의 번화가 타임스스퀘어에 아리랑 광고를 할 예정이다. 따지고 보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여기서 잠깐, 중국은 지난해 5월 국무원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무형문화재)으로 지린성 옌볜 자치주의 아리랑(阿里郞)을 등재했다. 왜? 동북공정의 일환이라는 정치적 의도가 당연히 깔려 있다. 2004년 고구려의 고분벽화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킨 사실을 되돌아볼 때 아리랑 역시 중국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화할 수순을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체육관광부는 새달 10일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할 예정이다. 아울러 8월쯤 실사과정을 거쳐 올 연말 등재여부가 판가름나게 된다.

▲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아리랑 자료실에서 만난 김연갑씨가 ‘네가 아리랑을 아느냐’라는 글씨와 여러 아리랑 관련 자료를 배경으로 아리랑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이런 상황에서 어느 때보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이 있다. 30여년간 아리랑만을 연구해 온 김연갑(58)씨. 그의 공식 직함은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이사장 이윤구) 상임이사이지만 ‘아리랑 박사’, ‘아리랑 연구가’로 통한다.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연합회 자료실에서 그를 만났다. 들어서자마자 ‘네가 아리랑을 아느냐’라는 붓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속으로 ‘어떻게 답을 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글씨는 아리랑을 사랑하는 한 지인이 지난해 써줬단다. 아울러 자료실 안에는 온통 아리랑 관련 책자와 음반, 그리고 각국에서 수집한 자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몇 권 정도 되는지 묻자 “2만권 정도 되는데 이만 한 넓이의 아리랑 자료실이 정선과 서울 등 세 곳에 있다.”고 했다. 30여년 동안 정성껏 모아 온 자료들이란다.
●‘아리랑 기행단’이 연합회 모태
아리랑연합회는 1979년 김씨가 중심이 된 ‘아리랑 기행단’에서 출발했다. 이후 허규, 박재삼, 고은 선생 등과 함께 ‘모임 아리랑’(1983), ‘전국아리랑보존연합회’(1989)에 이어 1994년 사단법인으로 재창립된 이후 지금까지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각종 문헌 연구, 자료 수집 등을 하면서 아리랑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일에 매진해 왔다.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10월 1일을 ‘아리랑의 날’로 제정하고 남북 아리랑 모음 음반 출반 등 아리랑에 관련된 갖가지 기념사업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 아리랑의 세계화와 국가 브랜드 사업을 연동시키는 일도 하고 있다. 연합회는 전국 14개 지부와 해외 지부를 두고 활동 중이다.
“노래로서의 아리랑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세계화는 아리랑의 3대 정신(저항·대동·상생)을 보편가치로서 강조하는 데 있지요.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닙니다. 음악적인 것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신앙이 담겨 있죠. 아주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해 온 이 노래는 남과 북은 물론 전 세계 145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사회 구성원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는 아리랑입니다. 어느 민족도, 어느 국가도 이처럼 불려지는 노래는 아리랑 외에는 없습니다.”
하여 아리랑은 어떤 노래도 갖지 못한 ‘민족의 노래’, ‘조국 정서의 어머니’라는 위상을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중국이 지난해 아리랑을 자국의 무형문화재로 등록했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신청을 하게 됐다는 것. 그는 이에 대해 “판소리, 전통가곡 등에 이어 아리랑도 등재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전망했다. 왜냐 하면 2009년 정선아리랑을 단독으로 신청했으나 정선 외에 진도, 밀양 등 여러 아리랑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계류상태에 있다가 이번에 문화부가 보완 신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등재를 장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중국이 저러고 있는 마당에 어차피 국민정서상 반드시 등재돼야 할 일”이라고 부연했다. 이번에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 불려지는 아리랑으로 범위를 넓히는 선언적 의미도 함께 담겨 있어 뜻이 깊다고 말했다.
●전세계 145개국 동포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
“다시 말하지만 아리랑의 3대 정신은 저항, 대동, 상생입니다. 이 정신에 따라 광복 직후에는 좌·우익이 ‘아리랑’으로 애국가를 대신했고, 1961년 ‘국토통일학생총동맹’에서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규정했습니다. 1953년 휴전회담 조인식 직후 북한과 유엔군이 동시에 아리랑을 연주했습니다. 아울러 1989년 3월 판문점에서 남북이 아리랑을 단일팀 단가로 하기로 합의했으며 2002년 아리랑 축전과 월드컵대회를 통해 상생의 노래가 됐지요.”
따라서 아리랑을 통해 남북문제는 물론 해외동포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동시에 아리랑 정신을 세계적 보편정신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중국이 조선족 문화를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자국 무형문화재로 등재, ‘아리랑 사태’를 야기시켰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는 인접 국가 간 문화전쟁의 서막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북한과 함께 합작 영화 ‘아리랑’을 만들었습니다. 중국 청년이 북한의 아리랑 축전을 보러 왔다가 북한 처녀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항일운동 등 과거의 혁명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줄거리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동북3성과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 무대로 알려진 지역 등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요. 고구려 고분군을 북·중 공동으로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리랑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북한과 해외동포를 포괄한다는 선언적 문구를 반드시 삽입해야 하며 ‘아리랑상’을 복원하는 등 동일한 권위의 상을 제정, 운영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중국이 부러워하는 문화국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우리가 ‘아리랑’을 얘기할 때는 본조아리랑(~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을 가리킨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역별 아리랑을 쓸 때 지명 접두어(밀양, 정선, 진도 등)를 사용한다.”면서 본조아리랑은 아리랑 전승의 역사, 광범위한 문화적 파장, 대중적 호응력, 현대문화와 문학에 끼친 영향력까지 엄청난 콘텐츠를 가진 작품이라고 역설한다. 아리랑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지역적이면서도 국제적이고, 구비적이면서 기록적이고, 전통적이면서 최첨단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언제부터 불려졌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본조아리랑은 오래전에 백두대간 강원·경상지역 메나리조 아라리가 문경아리랑으로 불려지다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 공사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시름을 달래기 위해 전국의 소리꾼들을 불러들여 위로의 노래를 들려 주는 과정에서 아리랑이 나옵니다. 이후 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밀양, 진도 등 지역 아리랑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역사책에 보면 1894년 매천야록에 아리랑 관련 내용도 나오구요.”
●광복 직후에는 아리랑이 애국가 대신

김씨와 아리랑과의 인연은 군복무 때 시작됐다. 1975년 강원도 철원 북방 6사단 철책근무를 할 때 북한에서 보내는 대남방송을 자주 들었다.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해 뜨고 달 뜨고 별도 뜨네~’ 남쪽에서 듣지 못한 아리랑 노래를 들으면서 귀가 솔깃했다. 제대하자마자 양주동·이병도 박사의 아리랑 관련 논문을 단숨에 읽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아리랑 고장을 순회·기행했다. 특히 당시 사북사태 때 노동자들이 아리랑을 불렀다는 사실에 ‘찐한’ 감동을 받았다. 이후 시위가 있는 곳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찾아갔다. 시위 끝무렵에는 항상 아리랑이 나왔고 이 장면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진도아리랑은 여성성이 강하고, 밀양아리랑은 남성적이며, 정선아리랑은 삶을 노래했고, 해외동포의 아리랑은 눈물이며 조국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저의 꿈은 비무장지대(DMZ) 안에 남북 공동의 ‘아리랑 박물관’을 만드는 일입니다. 지난 30여년 동안 모아 온 모든 자료들을 평화롭게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아울러 아리랑 공동체를 통해 세계 보편화정신을 널리 펴는 것입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서울신문] [김문이 만난사람] 아리랑 연구 30년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2012년 5월 29일 화요일

달지 않은 복숭아 혈당지수 높고, 사과는 달지만 낮다

 

달지 않은 복숭아 혈당지수 높고, 사과는 달지만 낮다

음식과 혈당
과일 당도로 위험 알 수 없어… 반드시 혈당지수 확인해야
먹는 방법에 따라서도 변해… 채소·과일은 날로 먹고, 떡·피자는 두유와 함께

입력 : 2012.05.30 08:14

식후 혈당이 220㎎/dL 정도이던 당뇨병 환자 오모(44·경기 수원시)씨는 어느날 혈당 수치가 300㎎/dL으로 치솟아 병원에 달려갔다. 의사는 오씨의 식습관을 물어보고, "복숭아를 많이 먹어서 혈당이 갑자기 오른 것"이라고 말했다. 별로 달지 않다고 복숭아를 하루에 한 개씩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당뇨병 환자는 식품의 '혈당지수'를 정확히 알고 먹어야 한다. 혈당지수란, 포도당 100g이 올리는 혈당치를 100으로 놓고, 다른 식품 100g이 올리는 혈당치를 이와 비교해 지수화한 것이다. 최근 한국인이 많이 먹는 식품의 혈당지수를 분석한 연구 결과가 나왔다.
혈당지수와 식사량 함께 고려해야
가톨릭대 식품영양학과 송윤주 교수팀이 한국인이 많이 먹는 식품 653가지를 선정한 뒤, 각 식품의 혈당지수를 분석했다.

당면(96), 쌀 음료(92), 찹쌀(86), 껌(85), 국수·가래떡·찹쌀떡(82), 피자·볶음밥·덮밥(80) 등이 고혈당 식품이었다. 혈당지수 70 이상은 고혈당 식품, 56~69은 중혈당 식품, 55 이하는 저혈당 식품이다〈〉. 송윤주 교수는 "단, 혈당지수는 100g이 기준이므로, 체내에서 실제로 올라가는 혈당치는 먹는 양에 따라 달라진다"며 "자주 먹는 식품의 혈당지수와 식사량을 함께 생각해서 식단을 짜라"고 말했다.
과일 달지 않다고 혈당지수 낮은 것 아냐
경희대 국제동서의학대학원 조여원 교수팀은 사과·귤·배·수박·감·포도·참외·복숭아 등 8가지 과일의 당도와 혈당지수를 비교했다. 비교 결과, 당도와 혈당지수는 비례하지 않았다. 과일 당도란, 과일 100g에 포함된 당분의 양이다. 당도는 사과(14.4Brix)→포도(13.46)→감(12.93)→참외(12.33)→귤(10.75)→복숭아(10.41)→수박(10.34)→배(10.31) 순서로 높았다. 반면, 혈당지수는 복숭아(56.5)→수박(53.5)→참외(51.2)→귤(50.4)→포도·감(48.1)→배(35.7)→사과(33.5) 순이었다. 조여원 교수는 "당뇨병 환자들은 달지 않은 과일은 혈당을 높이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한다"며 "과일은 당도보다 혈당지수를 보고 골라 먹으라"고 말했다.

▲ 신지호 헬스조선 기자 spphoto@chosun.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차움 푸드테라피센터 이기호 교수는 "과일은 하루에 한두 번 식후 30분이 지난 뒤에 먹되, 사과 3분의 1쪽, 귤 한개, 감 반쪽, 배·복숭아 4분의 1쪽 중 한 가지만 먹으라"고 말했다.
◇만들어 먹는 방법도 중요
같은 식품이라도 조리하는 방법과 식사법에 따라서 혈당지수가 달라진다.
영남대 영양관리학과 서정숙 교수는 "대부분의 식품은 가열·분쇄·건조 등의 과정을 거치면 혈당지수가 높아진다"며 "당뇨병 환자는 채소·과일은 날로 먹고, 쌀과 국수는 많이 익히지 말라"고 말했다. 이기호 교수는 "탄수화물은 콩 등 식물성 단백질과 함께 먹으면 혈당 상승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며 "국수, 떡, 피자 등을 먹을 때는 콩 반찬이나 두유를 곁들이라"고 말했다. 또, 음식을 천천히 먹거나 식사 전에 물 한 컵을 마시면, 포만감이 생겨서 덜 먹게 되므로 혈당 상승을 억제할 수 있다.

/ 이금숙 헬스조선 기자 lks@chosun.com
한희준 헬스조선 기자 hj@chosun.com

달지 않은 복숭아 혈당지수 높고, 사과는 달지만 낮다 - 당신의 건강가이드 헬스조선

2012년 5월 25일 금요일

도쿄서 노숙하던 22세 한국男 '170억' 대박

 

도쿄서 노숙하던 22세 한국男 `170억` 대박

입력: 2012-05-25 17:16 / 수정: 2012-05-25 17:46

지구촌 리포트 - 특파원이 만난 사람 < 구철 日삼겹살 전문점 '돈짱' 사장 >
외환위기때 실패가'약', 사업망해 98년 다시 일본행
친구들에 삼겹살 구워주다가 "도쿄에 없는데 해보자"
월드컵의 행운, 2002년 한국팀 연승행진에
응원 손님 몰려들어 TBS맛집 대회 1위 뽑혀
창업 대박의 비결, 반찬은 한국식으로 무한리필
종업원들에게 업계 최고 대우…지진났을때도 홀로 불켜고 장사

일본 도쿄 신오쿠보에 있는 삼겹살 전문점 돈짱은 관광객들의 필수 순례코스다. 평일 오전 11시 무렵인데도 돈짱 앞에는 줄이 길다. /안재석 특파원

일본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한류 성지’로 불리는 이곳의 땅값은 3.3㎡당 1000만엔(1억4000만원)을 넘는다. 도쿄 전체에서 최근 1년 새 공시지가가 상승한 곳은 세계 최고 높이의 전파탑 ‘스카이트리’가 들어선 스미다구와 신오쿠보 둘뿐이다. 그만큼 유동인구가 많고, 장사가 잘된다.
그중에서도 ‘돈짱’이라는 가게는 독보적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줄을 선다. 주말 저녁엔 1시간 이상씩 기다리는 것도 예사다. 이 가게의 주인인 구철 사장(46)은 도쿄 전역에 10개의 돈짱 점포를 갖고 있다. 작년 매출은 12억엔(170억원). 삼겹살이라는 단순한 메뉴 하나로 재팬 드림을 일궈냈다.
잘 곳이 없어 도쿄 시내 공원에서 쪽잠을 자던 22세 부산 청년은 20여년 만에 일본에 사는 한국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장님’ 반열에 올랐다. 최근 주일 한국대사관이 외교통상부에 한국음식 문화를 알린 유공자로 구 사장을 추천했다. 성공의 비결을 물었다. 듣고 보니 단순했다. 그러나 실천은 어려운 항목들. ‘내 입이 만족하는 음식을 만든다’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다’ ‘고객을 감동시켜라’ 등.
‘맨땅에 헤딩’한 구 사장의 20년 일본 생활을 신오쿠보 돈짱 한편에서 들었다. 언젠가 많이 들은 듯한 이야기, 그러나 언제부턴가 뜸해진 ‘밑바닥’ 성공 스토리에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일본에 오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집안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한 뒤 앞일이 막막했습니다. 군대부터 가자는 생각에 해병대를 지원했는데, 두 번이나 떨어졌습니다. 평발 판정을 받았습니다. 방위병으로 출퇴근하면서 남는 시간에 소일삼아 일본어를 조금씩 독학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에 사비 유학을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제대 후에 곧바로 일본으로 갔습니다.”
▷고생이 많았을텐데….

“1989년에 도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말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왔습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 자리부터 찾았습니다.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파칭코부터 시작해 택배 배달원, 술집 웨이터 등 돈 되는 일은 다 했습니다. 처음엔 집 구할 돈이 없어서, 도쿄 시내 공원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일본어 학원은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나름 미래를 위한 투자였죠. 그러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단칸방을 구했습니다. 거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둘이 부둥켜안고 자도 좁은 방에 선배 한 명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하하.”
▷원래 요식업을 하고 싶으셨나요.

“처음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1991년엔 늦깎이로 일본의 한 대학 경영학부에 입학했습니다. 변명이지만 아르바이트 하느라 7년 만에 겨우 졸업했습니다. 일본에서 하도 고생을 해 한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조그만 무역회사를 차렸습니다. 한때는 잘나갔습니다. 일본 100엔숍에서 팔리는 아기자기한 그릇 등을 가져다 팔았습니다. 그러나 잘된다는 소문이 돌자 금방 대기업 한 곳에서 똑같은 물품을 들여왔습니다. 게다가 외환위기까지 터졌습니다. 결국 회사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 일본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삼겹살 가게를 열게 된 계기 같은 게 있었습니까.

“일본에 돌아온 뒤엔 간혹 집에 친구들을 불러모아서 조촐한 삼겹살 파티를 열곤 했습니다. 근데 이게 생각보다 번거로웠습니다. 일단 우리 입맛에 맞는 삼겹살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본인들은 삼겹살을 먹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도쿄에 삼겹살 전문점이 없는지 찾아봤는데, 그 당시만 해도 한 곳도 없었습니다. ‘어라, 이거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부터 잘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요. 일단 가게 위치가 좋지 않았습니다. 임대료가 싼 곳을 찾다보니 러브호텔이 잔뜩 들어서 있는 이른바 ‘우범지대’ 한편에 가게를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낮에도 위험하다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그러다가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린 거죠. 입소문을 타고 한국 회사 직원들이 가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TV를 보면서 회식하기 딱이잖아요. 게다가 한국팀이 계속 승리하면서 ‘돈짱에서 응원하면 항상 이긴다’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습니다. 돈짱에 날개가 달린 시점이죠.”
▷장사엔 운도 필요한가 봅니다.

“물론입니다. 월드컵 이후에 또 한 번 운이 따라줬습니다. 일본 공중파 방송국인 TBS에 한국 여배우 윤손하 씨가 출연하는 ‘임금님의 브런치(王樣のブランチ)’라는 인기 맛집 소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여기에 나온 것입니다. 매일 한 곳의 유명 음식점을 소개한 뒤 연말에 최고 인기상을 뽑는 프로그램이었죠. 2003년 한 해 동안 423개의 메뉴가 방송을 탔는데, 연말 대상에 돈짱이 1등으로 뽑혔습니다. 방송에 나간 뒤 본격적으로 일본 손님들이 밀려들었습니다. 어떤 일본 손님은 삼겹살을 먹어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어, 안 믿어지세요? 진짠데.”
▷맛의 비결이라도 있나요.

“일단 한국과 똑같은 맛을 내도록 노력했습니다. 일본인 입맛에 아부해서는 승부가 안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처럼 각종 밑반찬도 풍족하게 내놓고, 무한정 리필도 해줬습니다. 아시겠지만, 일본은 단무지 하나도 돈을 따로 받는 문화입니다. 하지만 돈짱은 손님이 감동할 정도로 잔뜩 퍼주자는 원칙을 지켜나갔습니다. 가격도 대폭 떨어뜨렸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한식집 메뉴가 2000엔 정도했는데, 돈짱은 900엔에 상추 등 야채까지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대박이 터지나요.
“하하. 꼭 그런 건 아니겠죠. 우리 가게의 또 다른 장점은 친절한 종업원입니다. 어느 곳보다도 살갑게 손님을 대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그만큼 좋은 대우를 해줍니다. 업계 최고 대우라고 자부합니다. 종업원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들어온 유학생들입니다. 모두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친구들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들어올 때 필요한 비행기값이나 학원 수업료, 집세 등은 원할 경우 언제든 미리 가불해줍니다. ”
▷종업원과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얘기죠.

“저 혼자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가게 아이들은 절 믿고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가게의 경쟁력이죠.”
종업원 얘기를 하다 말고 구 사장은 책상 서랍을 열어 신문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작년 7월18일자 도쿄신문. 1면에 삼겹살 접시를 들고 환하게 웃는 구 사장의 사진과 함께 큼지막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동일본 대지진이 터진 뒤에도 돈짱 한 곳만 꿋꿋하게 영업을 계속했다는 것. 다른 가게들은 모두 아르바이트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문을 닫았지만 돈짱은 지진이 터진 다음날에도 홀로 불을 켜고 장사를 했다. 구 사장은 모두 종업원들의 덕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뒤로 일본인 단골 손님들이 부쩍 더 늘었다고 했다.
▷혹시 또 다른 비결은 없나요.

“삼겹살집은 무엇보다 고기맛이 첫째입니다. 그래서 가게 세울 때 일본 전역의 축사(畜舍)를 돌아다녔습니다. 보통 가게 주인들은 그냥 도매상하고만 거래하는데 전 발품을 팔았습니다. 결국 이거다 싶은 곳을 찾았고, 지금도 그곳에서만 고기를 받습니다. 거기 사장님도 의리를 지켜서 지금은 우리하고만 거래를 합니다. 그리고 김치 공장도 하나 따로 차렸습니다. ”

도쿄=안재석 특파원

인터뷰 말미에 일본에 불고 있는 ‘한류’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물었다. 구 사장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창한 것은 얘기할 주제가 못 된다고. 다양성이 부족하지만 잘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자신했다. “음식과 음악에 대한 습관은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한번 길들여지면 계속 찾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한류성지를 지키는 ‘삼겹살 전도사’ 구 사장의 희망이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도쿄서 노숙하던 22세 한국男 '170억' 대박

2012년 5월 19일 토요일

구글직원과 결혼한 한국인 30대女 "남편이 매일…

 

구글직원과 결혼한 한국인 30대女 "남편이 매일…"
[세계 속으로] 여기는 구글 취리히 오피스 … 구글러 부부의 하루 중앙일보 | 입력 2012.05.19 00:15 | 수정 2012.05.19 08:03

문화 다양성이 엿보이는 구글 내부 용어
● 구글러(Googler): 구글 직원
● 쿠글러(Koogler): 구글코리아 직원
● 주글러(Zoogler): 구글취리히 직원
● 누글러(Noogler, New + Googler): 신입 구글 직원
● 스푸글러(SPoogler, Spouse+Partner+Googler): 구글러의 배우자, 동거인
● 게이글러(Gaygler, Gay+Googler): 동성애자 구글러
● 그레이글러(Greygler, Grey+Googler): 일정 나이 이상의 구글러
'구글러' 호세 두아르트의 하루
근무시간 20% 딴짓 … 구글맵 그렇게 탄생
내 팀장은 닉네임 대면 누구나 아는 해커
가장 일하고 싶은 회사로 손꼽히는 구글(Google). 구글 스위스 취리히 오피스에서 보안 엔지니어로 일하는 '구글러' 호세 두아르트(34)와 그의 아내인 '스푸글러(구글 직원의 배우자)' 김진경(30) 전 중앙일보 기자가 구글의 하루를 생생하게 전한다.
일어나면 구글폰으로 일과 확인

한 구글러가 점심을 먹기 위해 2층에서 1층 식당으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사진 구글]
 오전 8시. 잠에서 깨자마자 누운 채로 '구글폰'을 집어든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회사에서 받은 삼성 갤럭시 넥서스 최신형이다. 회사에선 매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시장에 출시되기 직전의 신제품을 주곤 한다. 구글러들에게 먼저 피드백을 받기 위해서다. '구글 캘린더' 메뉴를 확인한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정이 많다. 3개월에 한 번씩 있는 근무 평가일인 데다 팀 회의도 있다.
출퇴근 탄력적인 '캠퍼스'

호세 두아르트 오전 10시. 취리히 브란트셴케 거리에 있는 구글 오피스에 도착했다. 1층에 있는 식당에 들러 시리얼과 과일로 아침식사를 한 뒤 2층 내 자리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10시30분, '올빼미족'인 나는 이때쯤 늘 일을 시작한다. 운동을 좋아하는 내 동료는 아직 출근 전이다. 오전 내내 산악 자전거를 타다가 회사 1층 피트니스센터에서 마무리 운동까지 하고 점심 때쯤 나온다. 구글러들의 출퇴근 시간은 들쭉날쭉이다. 오전 7시에 출근해 점심을 먹고 퇴근하는 직원도 있다.
 내 옆자리 팀장은 한창 작업 중이다. 그의 책상은 늘 비스킷 접시와 커피잔, 아이스크림 컵 따위로 지저분하다. 독일인인 그는 닉네임을 대면 누구나 다 알 만한 세계적인 해커다. 사무실은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가르치다 온 교수, 해커들 사이에 교과서처럼 쓰이는 책의 저자 등 '고수'들로 가득하다. 구글에서 일하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모르는 것이 생겼을 때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는 전문가들과 매일 함께 일하다 보면 직장이 아니라 학교에 다니는 기분이다. 구글러들이 회사 건물을 '캠퍼스'라고 부르는 이유다.
맛있는 건강식이 하루 세 번 공짜

게임룸에서 구글러들로 구성된 밴드가 공연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 구글]
 점심시간이 됐다. 회사 식당으로 간다. 오늘은 생선 코너 앞이 북적거린다. 커다란 연어들이 통째로 얼음 위에 놓여 있다. 회칼을 든 요리사 3명이 내가 좋아하는 생선회를 떠서 나눠주고 있다. 접시에 가득 담은 뒤 채식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채식 버거와 파스타를 담고 있는데 영양사가 다가와서 살펴본다. "이 정도면 아주 건강한 식단이에요. 잘 선택하셨네요."
 취리히 구글 식당에선 샐러드·육류·생선·곡류와 채식주의자를 위한 별도 메뉴 등 매번 30여 가지의 음식을 제공한다. 모든 음식 앞에는 재료에 대한 설명과 함께 빨간색·노란색·초록색의 세 가지 색깔로 지방·나트륨 함유량 등 건강지수가 표시돼 있다. 대부분의 재료는 유기농이다. 총 36명의 요리사들이 이곳에서 일하는 구글러 800여 명의 건강을 책임진다. 아침·점심·저녁 식사가 모두 공짜다. '밥 먹기 위해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한다'는 구글러들도 있다. 해마다 조사하는 회사에 대한 만족도에서도 가장 반응이 좋은 것은 구내식당의 음식이다.
언제나 즉석토론, 회의는 50분씩

1층 식당에서는 아침·점심·저녁 식사를 모두 무료로 제공한다. [사진 구글]
 식당을 나서는데 복도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최근 구글이 공개한 안경 형태의 스마트 기기인 '프로젝트 글라스'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었다. 생각보다 가벼워 좋다느니, 카메라 화소를 더 높여야 한다느니, 나라별 개인정보 보호 정책이 걸림돌이 될 거라느니 하는 얘기가 오갔다. 토론 중 한 구글러가 복도 벽에 붙은 화이트보드에 업그레이드된 프로젝트 글라스의 모양을 예상해 그려가며 설명을 한다. 늘 이런 식으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업무 토론을 벌이는 구글러들 때문에 카페나 복도의 화이트보드는 항상 각종 그래프와 수학 부호들로 빽빽하다.

구글러들은 사무실 곳곳에 부착된 화이트보드를 이용해 언제 어디서든 토론을 한다. [사진 구글]
 오후 3시. 팀장이 회의를 하러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전원 참석하라는 e-메일이 왔었다. 전원이라고 해봐야 팀장과 나, 옆자리 동료까지 단 3명이다. 구글의 평균 팀인원은 3.5명이다. 팀원 사이의 소통을 중시하는 '구글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회의 장소는 바로 맞은편에 있는 카페다. 영국 런던의 지하철처럼 만들어놨다. 벽 타일도 런던 지하철 역에서 쓰는 것을 가져왔다고 한다.
 회의 시작한 지 50분이 지났다. 휴식 시간이다. 원래는 한 시간 단위로 회의를 했었는데 래리 페이지가 CEO가 된 뒤 시스템을 바꿨다. 회의를 한 시간 꽉 채워 하면 끝난 뒤 메모하고 정리하느라 20∼30분이 또 훌쩍 가는데 50분에 끝내면 마무리 작업을 10분 안에 마치려는 심리적 효과가 발생해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이유다.
내부 통신망으로 서로의 업무 알고 있어
 회의가 끝난 뒤 팀장과 나만 남았다. 3개월에 한 번씩 있는 업무 성취도 면담을 하기 위해서다. 구글은 직원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그래야만 최대의 성과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신 분기마다 면담을 통해 성과를 평가한다. 팀장에게 지난 3개월 동안의 업무 내용과 진척 사항에 대해 설명한 뒤 다음 3개월 동안의 계획에 대해 상의했다. 계획한 내용을 초과 달성하면 보너스나 승진 등의 대가가 돌아온다.
 구글러들은 내부 통신망을 통해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각자의 캘린더에 하루 단위, 일주일 단위로 업무 계획과 성과 등을 기록해 두는데 구글러라면 누구나 다른 구글러들의 계획을 열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누가 구글 프로젝트 글라스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지, 지메일(Gmail) 보안에 관한 일은 누가 하는지 등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이디어를 교환하거나 동료의 협조를 구하는 게 훨씬 쉬워진다.
'20% 룸' 으로
 면담이 끝난 후 1층에 있는 '20%룸'으로 향했다. 구글러들은 근무 시간의 20%를 자기 업무가 아닌 개인 관심 분야에 쓸 수 있다. '20% 프로젝트'는 서로 다른 팀 소속이라도 관심 분야가 같은 구글러들이 별도의 팀을 만들어 진행할 수 있다. 이런 제도는 결국 회사에도 득이 됐다. 구글의 대표적 서비스인 지메일이 바로 이 20%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졌다. 2004년 전 구글 직원인 폴 부크하이트가 개인적으로 팀을 이뤄 회사 내부용으로 시작했다가 반응이 좋자 회사에서 대표 상품으로 키운 것이다. 현재 지메일 이용자는 전 세계 3억5000만 명을 넘어섰고 54개 언어로 서비스되고 있다. 지도 서비스인 구글맵스(Google maps), 채팅 서비스인 구글토크(Google talk)도 20%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됐다.
 20%룸 컴퓨터에서 스탠퍼드대 온라인 강의 프로그램에 접속했다. 요즘 부쩍 관심이 가는 암호학 수업을 듣기 위해서다. 최근 구글러들 사이에선 온라인 대학 강의를 듣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옆 동료 역시 수학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오후 6시. 절반은 퇴근하고 없다.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오후 9∼10시까지 일하는 '저녁형 인간'들이다. 컴퓨터를 끄고 전신 아로마 마사지를 받으러 회사 내 마사지룸으로 향했다. 6개월 전 아기가 태어난 뒤로 어깨와 허리에 근육통이 가실 날이 없다. 구글 마사지룸에선 일반 마사지 가게의 10분의 1 가격으로 전문가에게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인기가 좋아 일주일 전 예약은 필수. 생일엔 무료 마사지 서비스도 해준다. 오후 7시. 오늘도 칼퇴근이다. 구글러의 짧고도 긴 하루가 저물었다.
구글러의 고민
 이런 회사를 떠나는 구글러들도 물론 있다. 그만둔 동료가 회사를 창업해 잘 키운 뒤 수백만 달러를 받고 큰 기업에 매각한 스토리는 구글러들 사이에서도 늘 화제다. 덩치가 큰 회사에 있으면 멋진 아이디어가 있어도 매니저·팀장과 늘 상의를 해야 한다. 회의하고 보고서 만들다 보면 타이밍을 놓치기 쉽다. IT 시장 자체에 대한 고민을 가진 구글러들도 있다. 구글은 14년 전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회사다. 그동안 급성장을 했지만, 앞으로 14년 뒤엔 어떻게 돼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구글러 아내 '스푸글러' 김진경씨의 하루
남편이 저녁마다 '구글 도시락' 싸와
회사인지 복지단체인지 헷갈린다

김진경오후 7시. 스위스 취리히 시내의 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12명의 여성이 모였다. 한국 출신인 나를 포함해 미국·스페인·독일·우크라이나·중국 등 12명의 국적이 모두 달랐다.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한다. "전 스위스에 온 지 4년 됐어요. 네 살 된 딸이 하나 있고요, 얼마 전엔 일도 시작했어요." 중국계 미국인인 하이디(35)의 말에 질문이 쏟아졌다. "어느 에이전시를 통해 직업을 구했나요?" "일하는 동안 아이는 어디에 맡기나요?" 하이디가 4년 동안의 스위스 정착기를 들려주는 동안 다들 귀를 쫑긋 세웠다. 스페인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마리아(32)가 "독일어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어본다. 이날 모임을 주도한 루마니아 출신의 아이다(29)가 "구글에서 지원하는 독일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동성애자도 트랜스젠더도 '스푸글러'
 나를 포함한 12명은 모두 구글과 떼놓을 수 없는 '스푸글러'들이다. 구글 직원들을 구글러(Googler), 그들의 배우자(Spouse)와 동거인(Partner)을 스푸글러(SPoogler)라고 부른다. 구글러의 남편이나 아내는 물론이고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사이도 인정하는 것이다. 구글엔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직원이 모두 있다. 이들의 파트너도 모두 다른 직원들의 정식 배우자와 마찬가지로 구글에서 의료보험이나 어학교육 비용 등의 지원을 받는다. 글로벌 기업인 구글의 직원들은 업무에 따라 여러 나라의 지사를 옮겨다니며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낯선 외국 생활은 구글러에게는 물론 함께 사는 가족에게도 스트레스다. 구글이 진출한 나라별로 스푸글러 그룹을 만들어 이들의 정착을 물심양면 지원하는 이유다.
산후조리는 '구글 도시락'으로
 내가 구글에서 보안 엔지니어로 일하는 남편과 함께 취리히로 이사온 건 지난해 6월. 임신 5개월 무렵이었다. 구글의 자유로운 근무 시간 덕에 산부인과 진료 때마다 남편과 함께 갈 수 있었다. 든든했다. 하지만 한국 직장의 강도 높은 업무에 익숙했던 나로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루는 남편에게 "이러다 잘리는 거 아니야?"라고 물었다. 남편은 웃으며 "우리 팀장은 집에 냉장고가 고장 나서 수리공을 불러야 한다고 재택근무 한대"라고 답했다.
 지난해 11월 초 아기가 태어났다. 남편은 바로 회사에 출산휴가를 신청했다. 남성 구글러들은 아내가 출산했을 때 4주간의 출산휴가를 쓸 수 있다. 남편은 여기에다 지난해 쓰고 남은 정기 휴가 2주를 덧붙여 총 6주 휴가를 냈다. 산후 조리를 해야 하는 6주 동안 집에 함께 있어 준 것이다. 구글의 출산 지원책에는 음식도 포함돼 있다. 갓 출산한 부부가 집에서 요리해 먹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식사 비용을 500프랑(약 62만원)까지 지원한다.
 6주가 지나 업무에 복귀한 뒤에는 남편이 매일 저녁 식사를 회사에서 포장해 왔다. 구글은 하루 세 끼를 모두 공짜로 제공하는데 저녁 식사는 집에 포장해 갈 수도 있다. 혼자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독신자나 장 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맞벌이 부부, 내 남편처럼 갓 출산한 아내를 둔 구글러를 위한 배려다. 퇴근하는 남편에게서 매일 다른 종류의 스테이크와 샐러드·생선요리 등이 담긴 도시락을 받아들면서 가끔은 구글이 회사인지 복지단체인지 헷갈렸다.
스푸글러 전용 공간도
 취리히의 스푸글러는 약 400명. 정기적으로 저녁 식사 모임, 커피 모임, 공동육아 모임, 여행 모임 등을 연다. 공동 메일링 리스트를 만들어 취리히의 학교나 병원·레스토랑 등에 관련된 정보도 나눈다. 누군가가 좋은 소아과를 추천해 달라는 전체 e-메일을 보내면, 금세 지역이나 경험에 따라 의사를 추천하는 답 메일이 쏟아지는 식이다.
 처음 취리히에 왔을 때, 나는 임신으로 인한 편두통과 입덧으로 고생하다 스푸글러들에게 e-메일을 보냈다. 하루 만에 30여 통의 답장이 쏟아졌다. 허브 차와 요가 등 각자 자기 나라에서 쓰는 각종 민간요법을 추천했다. 이후 출산할 병원을 고를 때나 아기 용품을 구입할 때도 스푸글러들의 조언은 유용했다.
 좀 더 전문적인 정보를 나누기 위해 구글은 6개월에 한 번씩 스푸글러들을 위한 세미나인 '테크토크(Tech-Talk)'를 연다. 지난 3월 열린 테크토크의 주제는 '스위스의 교육'. 전문가를 초빙해 초·중등교육 제도를 설명하고 학교별 장단점과 특징을 소개했다. 회사에도 스푸글러를 위한 공간이 따로 있다. 취리히 오피스 홍보 담당자 사무엘 라이더는 "구글은 직원의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것은 곧 가족의 행복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가끔 나도 구글 오피스로 간다. '소셜(Social) TGIF'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 구글 오피스에선 매주 금요일 오후 TGIF(Thanks God It's Friday) 행사를 연다. 구글러들이 함께 맥주를 마시며 직급이나 팀에 관계없이 서로 질문하고 답한다. 취리히 오피스에선 한 달에 한두 번 이 행사를 '소셜 TGIF'로 확대해 구글러의 가족 및 친구에게도 문을 연다. 곳곳에 게임룸, 미끄럼틀, 실내 간이 축구장 등을 갖춰 놀이동산을 연상시키는 구글 오피스는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다.
유럽·중동·아프리카 채용 매니저 르네 라플란테
LGBT 모여 … "다양성 위해 구직자 출신지·대학 묻지 않아"
유럽·중동·아프리카 전역에서 구글의 인재 채용을 총괄하는 르네 라플란테 매니저를 지난달 19일 취리히 구글 오피스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의 개 '피니'와 함께였다.
●개를 매일 데리고 출근하나.
 "그렇다. 낮엔 집에 피니를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회사에 데리고 온다. 우리 팀엔 나 말고도 개를 데리고 출근하는 직원이 한 명 더 있다."
●애완동물 때문에 동료 간에 분쟁이 생기진 않나.
 "구글은 동료와의 '오픈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 개 알레르기가 있거나 개를 싫어하는지 동료들과 미리 충분히 대화를 했다. 또 다른 팀원이 데리고 오는 개와 피니를 밖에서 미리 만나게 해 친해지도록 했다. 미국 뉴욕 오피스에선 한 직원이 애완용 뱀을 데리고 출근했지만 동료들이 불편해해서 며칠 못 갔다고 하더라."
●'구글리'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팀워크와 소통을 잘하는 사람, 긍정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다. 또한 IT 분야의 변화 속도에 맞춰 일할 수 있는 사람, 변화를 즐기는 사람, 소매를 걷어붙이고 새로운 일에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뽑는가.
 "구글은 전 세계에서 매년 200만 통 이상의 이력서를 받는다. e-메일, 전화인터뷰, 4~5차례의 면접, 채용위원회 회부 순으로 진행된다. 함께 일할 동료나 다른 팀의 매니저도 면접을 본다. 의사 소통 능력이나 팀워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구글 인터뷰는 질문이 독특하기로 유명한데.
 "왓(What)이 아니라 하우(How)가 중요하다. '독일에선 주말마다 축구장에서 몇 개의 골이 터질까'란 질문에 정확히 답할 필요는 없다. 독일의 대략적인 축구 팀과 선수 숫자, 경기 수, 한 경기마다 예측되는 골 수를 추측해 답을 유도해내는 과정을 보여주면 된다."
●인터뷰 원칙이 있나.
 "지원자에게 종교나 인종은 물론 출신 지역과 대학을 묻는 것도 금지돼 있다. 우리에겐 '다양성(Diversity)'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왜 중요한가.
 "우리의 고객은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이다. 상상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해 검색을 하는 그들의 수요에 맞추려면 구글의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구글의 검색 엔진 언어는 2007년에 이미 40개를 넘어섰다. 대략 70개국,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의 약 99.3%를 커버한다. 다양성은 구글의 DNA다."
●미끄럼틀 등 사무실 환경이 독창적이다.
 "최고의 아이디어는 책상에 앉아있을 때가 아니라 카페에서 동료와 수다를 떨다가, 스카이라운지에서 멋진 경치를 바라보다가 나온다. 서로 더 자주 얼굴을 보고 대화하고, 다른 팀의 일에도 쉽게 관여할 수 있을 때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구글 사무실엔 칸막이가 없고 복도·카페 등 어디에나 화이트보드가 설치돼 있다."
●취리히 오피스는 직원이 800명이 넘는다. 구글리한 문화가 유지되나.
 "엔지니어만 따지면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크지만 조직 문화는 수직적이지 않고 자유롭다. 매주 금요일 오후 CEO와 직원 대부분이 1층 식당에 모여 함께 맥주를 마시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다. 누구든지 CEO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 있다. 미국 마운틴뷰 본사를 비롯해 전 세계 구글 오피스가 이런 식이다. CEO 래리 페이지가 본사 행사 때 답한 내용은 전 세계 구글러들에게 영상으로도 공개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으로 옮기는 구글러들도 있다.
 "구글은 복지 정책이 훌륭하지만 인재들에겐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 구글은 그들의 열정과 커리어를 충족시킬 수 있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글 코리아
구글의 자유로운 기업 정신이 아시아의 수직적 조직 문화와 공존할 수 있을까. 2004년 설립된 구글코리아에선 인턴부터 임원까지 직급에 관계없이 서로의 이름 끝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인사부 김지영 상무는 "구글의 기업 문화를 한국에 구현하기 위해 처음에 가장 고심한 부분이 호칭이었다. 신입 직원이 내게 '상무님' 대신 '지영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유로운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남성 직원은 아내가 출산할 경우 4주의 유급 출산휴가를 쓸 수 있고, 출산한 산모에겐 50만원의 식사비를 지원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집에서 근무하거나 출퇴근 시간을 개인 일정에 맞춰 조정하는 유연 근무제를 실시한다. 직원들의 외국어 교육비는 물론 석·박사 학위 비용과 해외 콘퍼런스 참가 비용도 지원한다. 복지 혜택은 직책에 관계없이 구글 직원이라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진다.
숫자로 보는 구글

● 14년: 구글 역사
● 380억 달러: 지난해 매출액
● 3만2467명: 지난해 기준 직원 수
● 30개국: 진출한 나라
● 200만 통: 매년 받는 이력서 수
● 3.5명: 팀당 평균 인원
● 75개국: 구글 스위스 취리히 오피스 직원의 출신 국적 수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 jeenkyungkimgmail.com >
▶기자 블로그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구글직원과 결혼한 한국인 30대女 "남편이 매일…" | Daum 미디어다음

신선하다..

[Weekly BIZ] [Cover Story] 세계 휴대폰시장 호령했던 1등기업 몰락 비밀?

 

[Weekly BIZ] [Cover Story] 세계 휴대폰시장 호령했던 1등기업 몰락 비밀?
이카루스 패러독스(기존 성공의 틀에 매여 혁신 못하는 1등 기업의 역설) 노키아 떨어뜨리다 "노키아는 1등 기업 몰락 과정의 전형… 비용관리에만 신경 쓰다 혁신을 죽였다" 노키아 글로벌 컨설팅 부서장 역임한 토미 에이호넌 인터뷰 조선비즈 | 홍콩 | 입력 2012.05.19 03:04 | 수정 2012.05.19 09:22

이달 4일 영국 런던 쇼핑 번화가인 옥스퍼드 스트리트. 약 99㎡(30평) 규모의 휴대폰 유통매장인 카폰웨어하우스(Carphone Warehouse)에 들어서자 벽면을 가득 메운 삼성 갤럭시S2, 애플 아이폰4S 같은 상품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 진열된 58대의 스마트폰 가운데 노키아폰은 단 두대. 그것도 최근 노키아가 야심작으로 내놓은 윈도폰 루미아(Lumia) 시리즈였으나, 이 제품에 관심을 보이는 소비자들은 거의 전무(全無)했다.

↑ 그래픽=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해가 지지 않을 듯한 기세로 20년 가까이 세계 1위 휴대폰 메이커로 군림했던 '휴대폰 왕국' 노키아의 몰락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5년 전 글로벌 스마트폰시장의 절반을 차지했던 노키아의 올 1분기 점유율은 8%로 급감했다.
선진국 시장에서는 애플 아이폰과 삼성 등의 구글 안드로이드폰에, 중·후진국에서는 중국 ZTE, 화웨이 등 신흥 제품에 각각 치여 협공당하고 있는 탓이다. 노키아는 올 1분기 피처폰(일반휴대폰)을 포함한 전체 순위에서도 14년 만에 2위로 밀려났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는 아예 노키아의 신용등급을 투기(정크·junk)등급으로 강등했다. 주가는 10여년 전의 20분의 1로 줄었고, 시장 조사기관 '밀워드브라운'이 매긴 노키아의 브랜드 순위는 2008년 세계 9위에서 지난해 81위로 추락했다. 정확히 3년 만에 벌어진 '사건'이다.
1998년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1위 휴대폰 기업이 된 노키아는 경이로운 '성공 기업'의 대명사였다. 한때 북유럽 핀란드 전체 수출액의 23%를 혼자 일궈낸 '국민 기업'이자 520만 핀란드 국민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던 노키아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처지가 된 데 대해 많은 분석이 있지만, 공통된 결론은 1등 기업의 영원한 숙제, 즉 '이카루스의 패러독스(Icarus Paradox)'를 피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루스'는 깃털로 만든 날개를 밀랍으로 몸에 붙인 다음 하늘을 날지만, 너무 높이 올라 태양의 뜨거운 열에 밀랍이 녹아 바다에 추락해버린 비운(悲運)의 주인공이다. 기업으로 치면 현장의 혁신능력을 상실한 채 스스로 만든 덫에 빠져 망한다는 얘기다.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 절반까지 차지… 많은 MBA서 성공 사례로 제시됐지만…
과거 성공의 공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드웨어 위주의 비즈니스 틀 고수
1위 뺏기고 주가 10년 새 20분의 1 토막
노키아는 '1등 기업의 저주'에 맞서 발버둥쳤다. 1996년부터 스마트폰을 꾸준히 선보였고 애플 아이폰 출시 2년 전인 2005년에는 터치스크린폰도 내놓았다. 그러나 '터치스크린폰은 소비자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고 연구를 중단했다. 애플 아이폰이 세상을 평정한 후인 2008년 말 노키아는 터치스크린폰 제품을 다시 내놓았지만 너무 늦었다. 노키아폰의 운영체계였던 심비안은 구글 안드로이드나 아이폰보다 정교함이 훨씬 떨어졌다.
'통화 위주 휴대폰을 핵심으로 하고 인터넷 같은 서비스는 덧붙이면 된다'는 기존 비즈니스 성공 틀에 사로잡혀 외부 변화에 둔감했던 게 결정적으로 발목을 잡았던 셈이다.
글로벌 1등 자리에서 쫓겨나 평범한 회사가 된 모토로라·소니 같은 기업들의 전철(前轍)을 노키아도 따라갈 것인가? 강고한 철옹성 같던 노키아가 쇠락한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 가운데 10년 만에 3분의 1은 사라져버리는 냉혹한 글로벌 비즈니스 정글에서 노키아는 또 하나의 제물이 된 것일까? WeeklyBIZ가 이를 진단한다.
'1등기업 노키아의 쇠퇴'를 주제로 한 인터뷰 제의를 하자 그는 "할 말이 많다. 언제든 오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모바일 경영컨설턴트인 토미 에이호넌(Ahonen)이다. 핀란드인인 그는 노키아 본사의 글로벌 컨설팅 부서장으로 3년 동안 일해 전 세계 여느 IT전문가보다 노키아 내부 사정에 정통하다. 지난달 말 홍콩섬 중심가인 셩완(上環)에 있는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노키아 사례는 1등기업의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범"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보는 노키아의 결정적인 패인(敗因)은 '전략적 실수'와 '전술적 실수'를 동시에 범했다는 점이다. '전략적 실수'란 1등기업 유지를 위한 비용관리에만 집중하다 보니 조직의 현실 안주(安住)화와 보수성을 초래했다는 것. '전술적 실수'로는 경영진의 판단 미스를 꼽았다. 세계 유명 MBA(경영대학원)의 성공사례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해온 노키아가 어떻게 사망의 길에 접어들었는지부터 물었다.
◇조직 비대화로 비용관리 집중→혁신 종말
―노키아는 원래 '혁신 조직'이었는데 왜 경직된 조직이 됐는가.
"노키아의 최전성기인 2006년, 올리 페카 칼라스부오(Kallasvuo)가 CEO가 된 후 관료화 현상이 본격화됐다. 법률·회계전문가인 그는 어떤 사업을 하건 '비용관리'를 제1원칙으로 내세웠다. 그러다 보니 엔지니어보다 재무 파트의 발언권이 세졌다. 주요 시장인 인도에선 휴대폰 수리 조직을 아웃소싱하는 바람에 소비자들이 예전과 같은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품질은 좋아지지 않는데 소비자 불만은 쌓여간 것이다."
―글로벌 1등이 되면 '관료화'를 불가피하게 겪게 되나?
"노키아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매우 실행력 강한 '혁신 회사'였다. 예컨대 그럴 듯한 아이디어를 내면 얼마 안 가 이탈리아·미국·싱가포르 등 세계 각지의 노키아 연구소에서 같은 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매우 놀라운 조직이었다. 이후 노키아 종업원 수는 두 배가 커져 한때 13만명까지 늘었다. 이 과정에서 관료화는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회사가 비용관리에만 신경을 쓰자 조직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 직원들이 속출했고 특히 창의적인 중간 간부 중 상당수가 퇴사하기 시작했다. 유능한 모바일 인력들은 노키아를 떠나 애플과 삼성, 블랙베리 등으로 몰려갔다."
―애플 아이폰이 2007년에 처음 나왔을 때 노키아의 반응은?
"아이폰을 일종의 '조크(joke)'라고 봤다. 그다지 매력적인 제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키아는 아이폰이 나오기 2년 전 터치스크린폰을 내놓았다가 시장에서 실패를 맛봤다. 그래서 터치스크린폰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한손으로 작동시키기 힘든 폰을 왜 만드느냐는 식이었다. 물론 오판(誤判)이었다."
―업계 1등이었다가 쇠락한 소니, 코닥 등과 노키아와의 다른 점이 있다면?
"자동차·TV·필름 등 대부분의 시장에서 1등의 몰락은 항상 존재했다. 그런데 모바일 산업에서 1등의 추락 그래프는 훨씬 더 가파르다. 모바일 제품 시장의 평균 사이클은 15개월인데, 모바일 제품 하나를 개발하는 데 18개월이 걸린다. 만약 이제 막 개발한 제품이 소비자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면? 이를 만회할 길이 없다. 지금 홍콩·싱가포르·브라질 등 전 세계에서 기존 노키아 사용자들이 삼성·애플·HTC 등으로 휴대폰을 바꾸는 이유다."
◇경영진의 전술적 실수
에이호넌은 스티븐 엘롭(Elop) 등 노키아 현 경영진의 '전술적 실수'도 지적했다. 노키아 CEO 엘롭은 취임 후 6개월 만인 작년 2월 "노키아 심비안 운영체계를 버리고 MS 윈도폰을 주력으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노키아폰의 추락은 한층 가속화했다.
―왜 당시 발표가 실수였나.
"정작 엘롭 CEO가 얘기한 MS윈도폰은 그해 10월이 돼서야 나왔다. 윈도폰이 나올 때까지 8개월 동안 공백이었다. 소비자들 입장에선 앞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하는 심비안폰을 누가 사겠는가. 영락없는 '오스본 효과(Osborne effect)'였다.(※1983년 오스본 컴퓨터 회사의 창업주인 아담 오스본은 계획 중인 차세대 휴대용 컴퓨터를 시장에 발표했다. 그러자 소비자들은 앞으로 나올 신형 모델을 구입하려고 구형 모델의 구매를 미뤘다. 그러자 회사에 현금이 돌지 못해 부도가 났고 이를 '오스본 효과'라고 한다.)"
―지금 노키아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은?
"정말 어렵다. 노키아는 너무 많은 공장과 직원을 갖고 있다. 구조조정이 급선무이다. 물론 노키아는 인도와 아프리카·브라질 등지에 로우 엔드(low end·低價)'폰에서 강점이 있다. 하지만 이 분야에 집중하면 PC산업처럼 매우 낮은 이익률을 올릴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하이엔드(high end) 스마트폰에서 경쟁하는 것인데 지금으로선 애플이나 구글 안드로이드폰과 맞서기 힘들다."
노키아의 전략적 실수 - 회사 규모 커지면서 관료화
재무파트 발언권이 세지자 창의적인 직원들은 떠나가
노키아 자리 누가 차지할까 - 애플, 자동차로 치면 포르쉐
세계 1등은 될 수 없어 전체 시장에선 삼성이 1위
◇삼성은 도요타, 애플은 포르쉐
―노키아의 자리는 누가 차지할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애플은 세계 1등이 될 수 없다. 자동차 산업으로 보면 애플은 포르쉐다. 삼성은 도요타나 다름없다. 도요타가 택시·지프·전기차·패밀리카·스포츠카 등 모든 것을 만드는 것처럼 삼성도 대규모로 스마트폰뿐 아니라 피처폰도 만든다. 스마트폰에서는 삼성과 애플이 비슷할 수 있어도 전체 휴대폰에서는 삼성이 1위다. 애플은 앞으로도 프리미엄폰처럼 가장 돈을 잘 버는 분야에만 집중할 것이다."
―10년 후 모바일 산업계에서 살아남을 회사 3곳을 꼽는다면?
"애플은 10년 후 휴대폰 회사가 아니라 TV, 로봇회사가 돼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안전하게 톱3 안에 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때쯤 아이폰11이 나올까. 모바일에만 집중하는 구글도 안전하다. 2005년 에릭 슈미트는 미래는 인터넷 모바일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과적으로 다 들어맞았다. 삼성은 회장부터 말단까지 회사 가치를 공유하고 근면성으로 세계 시장을 정복하고 있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만 확실하지 않다."
토미 에이호넌은 미국 뉴욕의 세인트존스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노키아 등을 거쳐 현재 홍콩에서 모바일 분야 전문 컨설턴트로 활약 중이다. '7번째 매스미디어로서의 모바일(Mobile as 7th of the Mass Media)' '디지털 코리아(Digital Korea)'등 14권의 저서를 냈다.

2012년 5월 18일 금요일

[Weekly BIZ] [Cover Story노키아 '선발자의 불이익' 당한 셈… 스마트폰 가장 먼저 만들고도 아이폰 좋은 일만 시켜줘

 

Weekly BIZ] [Cover Story] 노키아 '선발자의 불이익' 당한 셈… 스마트폰 가장 먼저 만들고도 아이폰 좋은 일만 시켜줘
초기엔 와이파이 등 여건 부족… 10년간 고생만 하고 재미 못봐 IT기술은 빠른게 능사 아니야 조선비즈 | 조 신·지식경제부 | 입력 2012.05.19 03:04

노키아의 위기에 대해 많은 진단이 나오고 있다. 그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즉, 저가 휴대폰을 파는 데 급급해 스마트폰 시대의 도래를 예측하지 못했고, 뒤늦게 대응하면서도 허둥지둥 실수를 연발하다가 이제는 투기등급까지 신용이 하락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노키아는 명색이 20여년 동안 휴대폰 시장을 이끌어 온 강자였다. 그런 노키아가 스마트폰에 대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다가 당했을까? 노키아는 누구보다도 먼저 스마트폰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는 스마트폰이 활성화될 여건이 갖춰지지 못했다. 말하자면 노키아는 '선발자의 불이익(First Mover's Disadvantage)'을 당한 셈이다.

↑ 조 신·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 정보통신산업MD

노키아는 궁극적으로 스마트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고 1996년부터 꾸준히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어떤 이들은 그건 오늘날의 스마트폰과는 다른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출시된 노키아 스마트폰들은 성능이나 기능 면에서 지금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적어도 스마트폰 자체의 기술적인 제약 때문에 오늘날만큼 스마트폰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 판매량은 어떤가? 노키아는 2004년 1200만대, 2005년 2850만대, 2006년 3900만대를 판매했다. 당시 노키아의 시장점유율은 50%를 상회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아이폰이 2007년 6월 출시된 이래 2008년 1162만대, 2009년 2073만대, 2010년 3998만대 판매된 것과 비교하면 노키아의 '2004~06년' 판매실적은 놀라운 것이다.
문제는 스마트폰에 걸맞은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당시엔 앱스토어나 모바일용 웹사이트가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PC용 웹사이트를 보는 것은 너무 불편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모바일 환경에 적합한 SNS도 없었다. 비용과 편리성 면에서 스마트폰에 필수 기능인 와이파이가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대가 곧 온다고 하면서 10년이 지났고, 이 10년간 노키아는 계속 시장을 이끌어갔다.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이것이 기술적인 가능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지만, 주변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선발자가 겪는 어려움의 전형적인 예이다. 한 기업이 혼자서 생태계와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선발자는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면 자원은 분산되고 전략도 색깔이 애매해진다. 그러니 새로운 길을 닦느라 힘은 많이 드는데 얻는 것은 없고, 뒤따라오는 경쟁자에게 길을 열어주기만 할 수도 있다.
후발자는 선발자의 경험과 자산을 공유하면서 전략적인 요충지만을 골라 집중할 수 있어 도리어 유리할 수 있다. 애플의 예를 보자. 노키아의 주도적인 노력 덕에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할 때는 스마트폰 여건이 훨씬 좋아졌다.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언급한 와이파이·모바일 웹사이트·SNS가 보편화되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애플은 앱스토어 구축과 터치스크린 등 UI 개선에 집중하여 선발자 대비 차별화 포인트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조직 관점에서 보면 혼자서 시장을 끌고 가는 선발자는 지쳐 추진동력을 잃을 수 있다. 더 나쁜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관성적으로 대응하는 경우이다. 물론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제품 개선도 해 나가지만 기존 틀을 깨지는 못한다. 조직 전체에 매너리즘과 냉소주의가 흐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설사 경쟁력 있는 후발자가 등장하더라도 선발자가 더 빨리 달아나면 될 텐데, 이게 어려운 이유가 조직 이슈 때문이다. 외부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그거 내가 다 경험한 거야"라는 답이 돌아온다. 경쟁자가 새로운 전략을 들고 나와도 "그거 내가 해 봤는데, 잘 안 돼"라고 무시하게 된다. 소위 '겪어 본 일, 해 본 일(Been There, Done That) 증후군'이다. 그러는 사이 후발자는 선발자를 제치고 앞으로 나선다.
노키아의 스마트폰 사례는 선발자가 겪을 수 있는 불이익을 잘 보여준다. 특히 IT산업처럼 기술변화가 빠른 분야에서는 흔히 시장, 소비자, 정부 정책 등을 무시하고 기술에만 매몰돼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조건 먼저 나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모든 환경을 잘 고려해 경쟁자보다 반발자국만 앞서 가면 된다.
조신 MD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워싱턴대 대학원(경제학 박사)을 졸업했다. SK브로드밴드 사장을 역임했다.

인턴하던 10대 소녀들이 갑자기 왜 매춘부로?

 

인턴하던 10대 소녀들이 갑자기 왜 매춘부로?

  • 전병근 기자

    입력 : 2012.05.19 03:09 | 수정 : 2012.05.19 07:29

    美 대통령·인턴 스캔들 빈발하는 이유는 뭘까
    의회 인력 절반이 인턴… 디즈니랜드에서는 '감정 노동'까지…
    이력서 한 줄 위해 저당잡힌 청춘의 꿈

    청춘 착취자들
    로스펄린지음|안진환 옮김|사월의 책|352쪽|1만5000원
    "인턴들이 총파업을 벌이면 이 나라는 망할 거야."
    미국 수도 워싱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정부·의회에서 실무를 맡은 사람 중 상당수가 20대 무보수 인턴들이다. 매년 약 2만명의 지망생이 워싱턴에 모여들고 그중 6000명이 의회에 채용된다. 의원 1명당 100명이 넘는 꼴. 200~300개 자리인 백악관 인턴에는 연 6000명이 지원한다. 대학생들은 인턴 경력에 혈안이다. 4년제 대학 재학생(약 950만명)의 75%가 졸업 전 인턴을 경험한다. 그 중 절반 이상이 무보수 혹은 최저임금보다 못한 돈을 받고 일한다. 그 덕에 미국의 각 조직은 합쳐서 연 20억달러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다. '인턴 국가(Intern Nation)'. 이 책의 원제목이다.
    ◇인턴 공화국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성추문 상대인 르윈스키만 (백악관) 인턴이었던 게 아니다. 클린턴 자신도 1967년 상원 의원 인턴을 거쳤다. 그가 존경한 케네디 전 대통령도 19세 인턴과 애정 행각을 벌였다. 인턴과의 스캔들이 주기적인 뉴스가 되는 건 그만큼 인턴 숫자가 많다는 증거다.
    잡다한 행정부터 커피 심부름까지 온갖 허드렛일이 이들 몫이다. 백악관 예산엔 아예 인턴 보수 항목이 없다. 무보수란 얘기다. 이런 관행을 비판하는 공화당 의원 사무실에도 인턴 수십명이 대가 없이 일한다. 정부·의회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주류에 입문했다. 월가 큰손도, 문화예술계 거목도 마찬가지다.
    ◇'수련의'에서 '값싼 인력'으로
    인턴은 원래 의료계 용어였다. 병원 내 상주 수련의와 보조 의사를 통칭해 프랑스어 'interne'이라 불렀다. 1960년대 들어 각 분야로 퍼졌고, 20세기 말 탈산업화와 함께 '가변적 노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각종 비영리 단체까지 무보수 인턴 덕분에 굴러간다.
    세계 최대의 인턴십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디즈니랜드. 검표원, 모노레일 기관사, 미키마우스 가면을 쓴 배우까지 직원 절반(연간 7000~8000명)이 인턴이다. 유니폼은 지급되지 않고, 파랑과 흰색이 섞인 가슴 명찰로만 식별될 뿐이다. 지원서에는 희망 부서를 셋까지 쓸 수 있지만 말 그대로 희망일 뿐이다. 인기 쇼인 '캐리비안의 해적' 공연에 캐스팅될 수도 있다는 말에 왔다가 화장실 청소나 햄버거 굽기만 하다 가는 경우도 있다.
    계약서엔 업무도 보수도 언급이 없다. 하지만 일의 강도는 정규직 수준이다. 대개 12시간 교대제이나 실제는 오전 6시에 시작, 자정 넘어 끝난다. 그래도 항상 활짝 웃는 '디즈니 얼굴'에 '디즈니 말투'까지 갖추지 않으면 해고다.
    산학 협동 모델로 칭찬받기도 한다. 실제로는 값싼 노동력을 편법적으로 확보하는 기회로도 활용된다. '인턴 채용 정신'에 부합하려면 전문적인 직무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지만 디즈니랜드엔 없다. 최저임금(시간당 7달러25센트) 외에 혜택은 놀이동산 무료이용권. 그래도 인턴들은 견딘다. 이력서에 디즈니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다.
    인턴 세계는 문어발처럼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고등학생부터 중년 퇴직자들까지 뛰어든다. 인턴십 인터넷 경매도 성업 중이다. 뉴욕 베르사체 인턴십은 5000달러, 영국 허핑턴포스트 블로깅 인턴직은 1만3000달러에 낙찰됐다. 2010년 4월 미국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와 함께하는 1주일 인턴십 낙찰가는 4만2500달러였다.

    /토픽이미지

    ◇통과 의례 혹은 진입 장벽
    흔히 인턴 과정은 고등교육과 직업 세계를 잇는 통로라고 말한다. 인재 선발·양성의 기회로 활용하는 모범 프로그램도 있다. 빌 게이츠는 매년 여름 1000명이 넘는 인턴들을 위해 '바비큐 행사'까지 연다. 하지만 저자는 더 많은 인턴제의 어두운 실상을 조명한다. 인격 모욕에 성희롱까지 위험 수위를 넘나든다. 뉴욕 극장 인턴은 사장 소변 샘플을 병원에 가져다준 일도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학교서 내준 '사회적 인턴십' 경험 쌓기 숙제를 오해한 10대 소녀들이 매춘부 생활을 하는 사건도 있었다. 인턴 인권은 법률 사각지대에 있다. 노동자 신분도 인정받지 못해 노동 소송의 당사자로 법정에서 권익을 따질 수도 없다.
    기회의 문이어야 할 인턴제가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하기도 한다. 조건과 전망이 좋은 유명 인턴직일수록 돈과 인맥이 든든한 특권층 자녀 손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정규직으로 이어질 확률도 높다. 반면 빈곤층은 형편상 무보수 인턴 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 기회가 주어져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업을 겸해야 한다. 화이트칼라 진입을 위해 대가 없이 일하면서 당장 생계를 위해서는 블루칼라 세계에서 임금을 받고 노동해야 하는 역설이 일어난다.
    '경험'을 위해 일하는 인턴들이 늘어날수록 '생계'를 위해 돈 벌어야 하는 이들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그런데도 모두가 침묵한다. 대학도 의회도 사회단체도 '인턴 사용자'이기 때문이다. 이력서의 '빛나는 한 줄'을 위해 인턴 당사자나 부모들도 다 부당한 구조를 참는다.
    ◇인턴 권리장전 만들어야
    저자는 제대로 된 인턴제를 위한 모두의 각성을 촉구한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하는 인턴법 제정과 최저임금제가 필수라고 역설한다. 청년들에게는 부당한 관행으로 얼룩진 지금의 인턴 세계에 대한 미련을 떨치라고 말한다. 기업들에는 인턴 채용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인턴 프로그램에 실질적인 연수와 멘토링 측면을 보강하라고 요구한다.
    '인턴 대국' 미국에서는 출간 직후부터 화제였다. 2008~2010년 사이 디즈니월드에서 실리콘밸리, 아이비리그 캠퍼스, 중국 본토의 산업 현장까지, 중세 도제제도부터 뉴딜을 거쳐 신경제주의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아우르는 취재와 연구가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인턴에 적잖이 의존하는 미 언론계도 "모두가 침묵해왔던 '불편한 문제'를 본격 공론화했다"며 주목했다. 우리 사회는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가, 책을 덮고 자문하게 된다.

  • [Why] [김윤덕의 사람人] 김대중·빌클린턴 통역 후 출세한 미모의 여성

     

    [Why] [김윤덕의 사람人] 김대중·빌클린턴 통역 후 출세한 미모의 여성

    입력 : 2012.05.19 03:09 | 수정 : 2012.05.19 14:12

    北에 '통영의 딸' 답장 받아낸 유엔 인권기구… 이 한국 여인이 진두지휘
    DJ의 통역사, 코피 아난도 인정한 추진력

    지난 16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만난 강경화 부대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그는 “나도 실패한 적 많다. 성공의 한길로 달린 욕심 많은 사람으로 오해하지 말아달라”며 밝게 웃었다. /김영근 기자

    '원조 나승연'이란 말에 '나승연이 누구냐?'고 되물어 웃음이 터졌다. 강경화(57)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부대표는 16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세계인권도시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날아왔다. 오전 세션을 마친 뒤 잠시 시간을 낸 그녀는 "인터뷰실 같은 데 말고 그냥 (로비)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얘기하자"며 활짝 웃었다.
    강경화는 한국 여성으로는 유엔에서 가장 높은 직책에 있다. 사무총장이 임명하는 직급 중 둘째로 높은 ASG(사무차장보)다. 유엔 진출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그는 최고의 본보기이다. 비(非)외무고시 출신이라 더욱 주목받았다. IMF 외환 위기 직후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외교부 국제 전문가로 특채, 김대중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의 통화 통역을 훌륭하게 해내면서 '출세 가도'에 올랐다. 외교부 장관 특보, 국제기구심의관을 거쳐 외교부 국제기구국장에 올라 다자 외교의 여성 파워를 보여준 그는 2007년 1월 제네바에 본부를 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부대표로 임명됐다.
    첫 직업이 KBS 영어 방송 아나운서였다는 것 때문에 강경화는 종종 '영어와 미모를 무기로 운 좋게 성공한 여성'쯤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유엔여성지위위원회(CSW) 위원장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탄생의 숨은 공신으로, 유엔 최고 인권 기구인 OHCHR을 6년째 이끌며 보여준 생명력은 강경화의 리더십을 재평가하게 했다.
    기자와 마주 앉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중동 문제로 가득 찬 듯했다. 이날도 시리아 정부군이 난민 캠프를 공격한 일이 발생했다.
    DJ의 명통역사
    ―언제부턴가 매스컴에 반백의 헤어스타일로 등장해 놀라는 사람이 많다.
    "친정엄마도 놀란다. 당신이 민망해 죽을 노릇이니 제발 염색 좀 하라신다.(웃음) 2008년인가, 새해 결의 중 하나로 정한 게 염색 안 하기였다. 본모습을 뭔가로 가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일하고 있는 제네바는 워낙 다양한 인종에 머리 색깔이 천차만별이라 내 반백 머리에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웃음)"
    ―나승연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멋지게 해내 스타가 된 여성이다. 영어 실력과 미모라는 공통점 때문에 '원조 나승연'으로 표현해봤다.
    "아, 그분 기억난다. 하지만 난 대학까지 서울에서 나온 토박이다.(웃음) 출세하려고 영어에 매달린 건 아니고 프랑스어, 독일어 등 그냥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좋았다. 아무래도 아버지(강찬선 전 KBS 아나운서) 유전자가 있는 것 같다."
    ―어느 정도로 영어를 잘해야 유엔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나도 유엔 발령받고 들어갈 때는 영어 구사력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직원들 영어를 내가 고쳐줘야 했다. 문법 위주의 한국식 영어 교육도 나름대로 효과가 있더라.(웃음) 유엔에서는 논리적인 사고와 글쓰기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 특히 우리 OHCHR은 글 잘 쓰는 인재들이 절실하다. 제네바에서 나오는 공식 문서 중 60%가 우리 기구에서 나온다. 어떤 보고서는 국가 간 매우 민감한 사안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가 정확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 통역사로 3년간 의전을 수행한 것이 크게 도움됐을 것 같다.
    "물론이다. 김 대통령께서 영어로 연설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셔서 그때 (영어) 연설문을 많이 썼다. (매사추세츠 주립대) 대학원에서 학위 밟을 때 지도교수님이 글쓰기를 아주 까다롭게 가르치셔서 그때 고생하며 연습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역대 대통령 통역사 중 강경화는 명통역으로 꼽힌다.
    "당시 국가적 과업이 경제 위기 극복과 대북 포용 정책이었다. 수많은 정부 수반과 기업 CEO가 대통령을 만나러 오니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늘 부족하다는 생각에 행사 직전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다행히 김 대통령께서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말씀하는 분이라 오히려 통역이 쉬웠던 것 같다. 대통령께선 늘 조그만 메모지 한 장을 손에 쥐고 계셨다. 그 안에 당신이 하실 말씀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그거 한 장 가지고 세계의 리더들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말씀을 이어가셨다."

    외교부 국제 전문가로 특채돼 김대중 대통령의 영어 통 역사로 활약하던 시절의 강경화. /조선일보DB

    반기문 총장과 UN 동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2007년 나란히 유엔에 입성한 '동기'다.
    "반 총장님은 2007년 1월 1일에 뉴욕 본부에서, 나는 1월 15일에 제네바 OHCHR에서 일을 시작했다.(웃음) 반 총장님 선거 일을 돕는 중에 OHCHR 부대표직 공개 모집 소식을 들었다. 유엔 친구들이 꼭 지원해보라고 해서 용기를 얻었다."
    ―외교부에서 국제기구 국장을 맡을 때였다. 굳이 유엔으로 간 이유는 뭘까.
    "인권에 관한 분야라 도전해보고 싶었다. 헌신하며 봉사할 수 있는 자리라 원서를 냈고, 별자리가 잘 섰는지 일이 잘 풀렸다.(웃음)"
    ―인권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갖게 됐나.
    "출발은 여성 인권이었다. 국회의장실에서 국제담당비서관으로 일하던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다. 정부, NGO가 함께 꾸린 대표단의 대변인으로, 우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는 등 2주 동안 정말 신나게 일했다. 그때 처음 내 문제가 나만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 공동 의제(議題)를 세우고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일을 유엔이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이 강경화의 추진력을 높이 샀다는 후문이 있다.
    "2004년 유엔여성지위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할 때 눈여겨보신 것 같다. 베이징 대회 10주년이던 2005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를 당시 위원장이던 내가 주재했다. 유엔 장애인협약에 여성 장애인 관련 내용을 별도 조항으로 만들어 넣는 것을 3년에 걸쳐 추진해 성사시킨 것도 좋게 보신 것 같더라."
    ―OHCHR은 지난 3월 중국 정부의 탈북자 송환 조치가 국제사회 이슈로 떠올랐을 때 그 중심에 있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선영 의원 등 우리 국회단이 제네바로 날아가 국제사회 협력을 촉구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서 '귀환시켜선 안 된다'는 공식 성명을 냈고, 우리(OHCHR)도 중국 대표부를 만나 '비귀환'을 간곡히 요청했다. 한편으로 북한과 계속 접촉하면서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북한 자체가 인권이사회의 결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진전은 없다. 질의 서한을 보내도 전혀 반응이 없다. 다만 탈북자 송환 조치 문제로 북한의 인권 문제가 전 세계에 부각된 것은 확실하다."
    ―북한에 억류돼 있는 '통영의 딸' 신숙자씨 가족과 관련해서는 얼마 전 OHCHR에 일곱 줄짜리 답변을 보냈다.
    "'신숙자씨는 간염으로 사망했고, 두 딸은 오길남씨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공식 답변에 신뢰성이 있는지를 두고 현재 우리 기구 산하 '임의적 강제 구금에 대한 실무 그룹'이 평가 중이다. 6월 중 그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고 유엔의 후속 조치가 나올 것으로 안다."

    지난 2월 제네바에서 열린 ‘시리아 사태 긴급토론회’에 참석한 강경화 부대표(왼쪽). 옆에 앉은 여성이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의 수장인 나바네템 필레이다. /AFP

    신숙자, 그리고 시리아
    ―요즘은 중동 문제로 바쁜 모양이다.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의 시민단체들로부터 SOS(긴급구조요청)가 수없이 들어온다. 북아프리카 인권 상황도 매일 체크해야 한다.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시리아 상황을 직접 살펴봐야 해서 입국을 시도하고 있는데 정부로부터 거절당하고 있다."
    ―현장에 자주 나가나?
    "우리 기구에 소속된 인권 공무원 1700명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가 현장 관찰이다. 유엔이 결의해 규범으로 정한 것이 현장에서 지켜지고 있는지 감시하고, 세계 도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권에 대한 갈망과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뛴다. 문제는 유엔이 과격분자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2003년 바그다드 유엔본부에서 OHCHR 대표가 습격당한 이후 유엔 활동가들의 안전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지난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우리 국가인권위원회에 쓴소리를 했다.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도 여전히 심각하다고 본다. 지난해 고려대 의대생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을 보면서 문제를 최소화하려는 대학 당국의 행태에 크게 실망했다. 법 규정은 다 있는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 사고방식은 성희롱, 사소한 성추행 정도는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작은 문제부터 엄격히 해결돼야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중국 동포 오원춘의 20대 여성 살인 사건으로 사형제를 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극악한 범죄자라도 범죄자이기 전에 인간이고 최소한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게 인권 헌장의 취지다. 사람 목숨을 다른 사람이 앗아간다는 게 옳지 않고, 사람의 판단이라는 건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사형제를 없애자는 게 유엔의 입장이다."
    ―6년째 OHCHR의 부대표직을 수행하고 있다.
    "3년이 기본 임기였고 1년씩 연장 임명돼 왔다. 보람이 크다. 인권은 국가권력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한 국가의 정체성을 꿰뚫는 데 가장 효과적인 프리즘이다."
    남수단에서 만난 여성
    ―반기문 총장이 연임에 성공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다. 고위직 공무원은 대개 명예가 훼손될 위험이 있는 일은 하지 않는데, 반 총장님은 이건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냥 밀고 나가신다. 유엔여성(UN WOMEN)이라는 여성 담당 총괄 기구를 만든 것, 소리 없이 유엔 개혁을 이끌고 있는 점이 그렇다. 서양식 지도자에게 익숙했던 직원들이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움직이는 반 총장의 동양적 리더십에 처음엔 당혹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워낙 부지런하시고.(웃음)"
    ―국제기구의 한국인 진출이 활발하다. 2002년 219명에서 2011년 398명으로 갑절가량 늘었더라.
    "국제무대에 대한 한국 젊은이들의 열망이 뜨겁다는 걸 체감한다. 지난해 남수단에 갔다가 한국인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유엔V'라는 자원봉사자 그룹 일원으로 그 오지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았다. 남들이 모르는 길을 뚫어 국제사회에 헌신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했다."
    ―'유엔의 본질은 뉴욕과 제네바가 아니라 현장'이란 말을 평소 강조해왔다.
    "유엔의 실체는 그라운드에 있다. 뉴욕이나 제네바에서 화려한 말잔치를 벌이는 것이 유엔이라고 믿고 있다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거다. 유엔에 입성하는 것도 현장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훨씬 빠르다. 2년 이상의 현장 경험이 박사 학위보다 높이 평가받는다."
    ―'유엔 문화'라는 게 있다더라.
    "나도 답답할 때가 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만난 사람들이라 오히려 소통이 안 되고 신뢰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함께 일하기 힘든 직원도 있어서 오래 설득하고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히려 내부 직원을 끌고 가는 게 내겐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웃음)"
    ―승승장구 비결이 뭘까.
    "승승장구 아니다. 박사 학위 받고 돌아왔는데 어느 대학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5년간 보따리 강사 했다. 3남매 양육 때문에 직장 그만두고 1년간 전업주부로도 살아봤는데, 나도 아이들도 별로 행복해지지 않길래 다시 일을 시작했다.(웃음) 운도 따랐다. 내 사회생활 초창기는 여성들에게 기회가 막 열리는 시기였다. 누구는 내가 욕심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비고시 출신이라 외교부 내에서 소외당한 적은 없는지.
    "진골이 아닌 데서 오는 소외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다만 평가라는 건 언제든 업무 수행 능력에서 온다고 믿었다. 열심히 노력했고, '잘한다' 소리 들었다."
    ―절망하는 20대에게 한 말씀 해달라.
    "주제넘은 말이지만, 좀 더 길게 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100세 시대 아닌가. 조급해하지 말고 기량을 갈고 닦으며 기다려라. 어떤 실패도, 어떤 세월도 그냥 날아가지 않는다. 거름이 된다. 기회는 반드시 온다."
    ―우리 정치권에 여성 리더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대단히 환영할 일이다. 다만 여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섰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2012년 5월 16일 수요일

    [학교 폭력, 이젠 그만] 고교생의 아버지, 학교서 여교사 은밀히 불러내 손에 든 우산으로… 충격

     

    [학교 폭력, 이젠 그만] 고교생의 아버지, 학교서 여교사 은밀히 불러내 손에 든 우산으로… 충격

  • 김연주 기자

    입력 : 2012.05.17 03:12

    [일진에… 학부모에… 수난당하는 교사들]
    "네가 뭔데? 선생이면 다야?" 막무가내로 찾아가 때리고 사생활 뒷조사 후 괴롭히기…
    "교육청·청와대에 민원" 협박, 반성문 쓰라며 모욕감 주기도

    폭력 학생, 버르장머리 없는 학생 뒤에는 폭력 학부모, 몰상식한 학부모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학부모들의 교사 폭행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자녀의 잘못을 고쳐주려는 선생님을 찾아가 막무가내로 폭행하는가 하면, 교사 사생활을 뒷조사해서 괴롭히고 협박하는 학부모들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학부모는 교사를 존중해주고 자녀 교육을 위해 적극 협조하고 있다고 교사들은 전한다.
    ◇봉변당하는 교사들
    서울의 한 고교 A교사는 3학년 수업 중에 B양이 수행평가를 해오지 않아 교실 뒤에 10여분간 서 있게 했다. 다음 날 오전 학교 교무실로 B양의 아버지 C씨가 찾아왔다. C씨는 A교사에게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자"며 밖으로 불러냈다.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특별활동실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갑자기 문을 잠그더니 손에 들고 있던 긴 우산으로 A교사를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했다. C씨는 A교사에게 "대학 가려면 언어·수학·외국어만 잘하면 되지, 그까짓 수행평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애를 벌주느냐"고 소리질렀다. 얻어맞던 김 교사는 소리를 지르며 벽을 손으로 쳤다. 옆방에 있는 교사들에게 'SOS'를 친 것이다. 마침 옆 교실에 있던 교사들이 벽 치는 소리를 듣고 문을 따고 들어와 C씨를 말렸다.

    지난해 7월 강원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한 학부모(중간)가 교사(맨 오른쪽)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 이 학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학급 반장을 시켜주지 않았다는 것, 자식이 교내 대회에서 장려상밖에 못 탄 것, 수련회 때 휴대전화를 수거한 것 등을 따지며 학생들 앞에서 교사를 폭행했다. 학부모는 교사에게 “네가 뭔데? 선생이면 선생이지 나한테까지 선생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영상 캡처

    김 교사는 이런 봉변을 당하고도 참았다. '엄마가 학부모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아이가 알게 되면 충격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 김 교사는 두어달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사소한 일로 교사에게 항의하거나 교육청·청와대에 '민원'을 넣겠다고 협박하는 일은 부지기수라고 교육계 관계자들은 전한다.
    지난 3월 중순 대전 지역의 중학교 교무실에 2학년 D양의 부모와 할머니가 찾아왔다. 전날 D양이 다른 학생을 때려 생활지도부장이 경위서를 받았는데, 이를 항의하러 온 가족이 '출동'한 것이다. 이들은 교무실에서 "(우리 애가 다른 애랑) 같이 싸웠다는데 왜 우리 애한테만 경위서를 내라고 하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경위서를 쓰게 한 생활지도부장에게는 "아이들 앞에서 우리 애한테 공개 사과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교사에게 "반성문 써내라"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서울 강남 지역의 중학교 E영어교사는 시험 문제를 낼 때마다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힘들다. 지난해 중간고사가 끝나고 한 학부모가 전화 와서 "우리 애 답도 맞다고 해줘야 한다"고 우겼다. 미국에서 3년간 살았다는 그 학부모는 "우리 애가 쓴 답도 미국에서는 가끔씩 쓰이는 말이다. 미국에서 살아보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채점을 하느냐"고 모욕을 줬다.

    E교사는 "교육열 높은 곳일수록 고(高)학력 학부모가 많고, 일부는 자기 지식이나 지위를 내세우며 교사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도 한다"며 "과거처럼 교사라고 대접받고 존경받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최소한 인권은 보장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최근 수업 중에 심하게 떠들고 장난치는 4학년 학생을 몇 분간 일어서 있도록 했다. 다음 날 학생 학부모는 "별것 아닌 일로 내 자식에게 횡포를 부렸다. 깡패 교사냐"고 항의하며 교사에게 "반성문을 써내라. 안 쓰면 법적 대응하겠다"고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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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구무언2….

    2012년 5월 8일 화요일

    “6년간 알바하며 학자금 빚 1600만원 갚았는데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가장 슬퍼”

     

    “6년간 알바하며 학자금 빚 1600만원 갚았는데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가장 슬퍼”
    김진우 기자 jwkim@kyunghyang.com

    ㆍ민주, 청년유니온과 간담
    “여태까지 일하면서 가장 가슴 아프게 들었던 말이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아프다고 이야기하는데….”
    “올해 32세로 구직 중”이라는 청년유니온 송화선 조직팀장은 자신의 사례를 얘기하는 도중 복받치듯 울음을 쏟아냈다. 회의장은 순간 숙연해졌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시울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겨우 감정을 다잡은 송 팀장은 “그 목소리를 들어주셨으면 좋겠다”고 호소하면서 또 울었다.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128호는 아픔과 눈물로 메워졌다. 저임금과 고용불안, 실업에 고통받는 청년들의 절절한 사연들이 생생하게 증언됐기 때문이다. 민주통합당 좋은일자리본부가 세대별 노조인 청년유니온을 초청한 간담회 자리였다.

    송 팀장은 대학 3학년 때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대출받은 학자금 빚 1600만원을 갚기 위해 졸업과 동시에 ‘묻지마 취업’을 했다. 그는 쇼핑몰 사무보조, 영화제 사무국, 방송국 사무보조 등 “구할 수 있는 게 모두 사무보조였다”면서 “이게 사는 건가 싶었다”고 씁쓸해했다.
    송 팀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일 하나만 하지 않았다. 이 일 끝나면 다시 다른 데 출근하길 6년을 해서 지난해 학자금 빚을 갚았다”고 했다. 그는 “청년들이 가장 많이 가는 파견직의 상황은 심각하다. 전면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29세의 정재형 조합원은 20세 때 어머니가 카드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되고 자신도 신용불량자가 됐다. 정 조합원은 “바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게 아르바이트뿐이어서 그걸로 이자 갚고 월세 내고 겨우 목숨을 연명했다”고 말했다. 편의점, 오토바이 배달, 식당, 노점상, 공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급 개 사료를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는 “계란말이 두 개 먹고 나왔는데, 개들이 먹는 고기를 싸갈까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 나아지겠지, 나도 다시 대학 가겠지 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았다”며 한숨지었다.
    청년유니온 양호경 정책팀장은 “지금 청년들이 육체노동, 파견직으로 일하게 되면 그 소득으로 30대에 전세 살고, 40대에 집을 사는 꿈을 키울 수 없는 구조”라면서 “병사로 들어가서 34년 일해도 병장으로 끝까지 남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청년 노동은 그림자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8%로 잡히지만 40%에 달한다”며 “카페베네(커피체인점)의 화려한 불빛 아래 일하지만 그 회사 사람이 아니고, 삼성전자의 가전기기 고치는 일을 하는 곳도 파견업체”라고 밝혔다. 청년유니온 김영경 전 위원장은 “수치에 들어가지 않는 청년들의 절망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길 바란다”며 “이제 절망을 그만 팔고 희망을 사들일 수 있는 세대가 되도록 함께해 달라”고 호소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민주당 당선자들은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 반성한다”(한정애 당선자)며 울먹였고, “민주당이 너무 무책임했다”(우윤근 당선자), “기성세대로서 미안하다”(문재인 당 좋은일자리본부장) 등의 반응을 내놓았다.

    “6년간 알바하며 학자금 빚 1600만원 갚았는데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가장 슬퍼” - 경향신문

    유구무언….

    2012년 5월 7일 월요일

    [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데모하는’ 아들 걱정한 교수에게 아버지는…

     

    [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데모하는’ 아들 걱정한 교수에게 아버지는…

    기사입력 2012-05-07 03:00:00 기사수정 2012-05-07 1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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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익 받을까 걱정 말고,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먼저 따져라”

    풀무원농장에서 망중한을 보내고 있는 원경선-원혜영 부자. 아들은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를 읽으며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했다.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인 라비는 거름(humus) 인류애(humanity) 겸손(humility)이 언어학적으로 같은 뿌리라며 유기농의 생태철학적 의미를 강조했다. 원혜영 의원 블로그

    자식이 환갑이 넘도록 살아계신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 흔치는 않겠지만 아주 보기 드문 경우도 아닐 것이다.
    그럼, 그 자식이 아버지와 함께한 60년을 기리며 “참 좋았다”고 반추하는 부자지간(父子之間)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아버지의 백수연(白壽宴)을 여는 자식은 또 얼마나 될까? 백수(白壽)는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나이, 그러니까 99세다.
    풀무원농장을 만들고 한국 유기농 농업의 창시자로 존경받는 아버지 원경선 옹(翁)의 백수연 얘기가 나오자 아들 원혜영 민주통합당 의원(61)은 뜬금없이 골프 무용담부터 꺼냈다. 구력(球歷)이 15년이나 되지만 아직도 평균 타수는 110타 정도인데, 홀인원을 두 번이나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회혼례(回婚禮)와 부친의 백수연을 ‘홀인원의 홍복(洪福)’에 비유했다. 알 것 같았다.

    부친의 백수연(4월 17일)을 치른 지 보름여 지난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원 의원을 만났다. 아들에게서 아버지 얘기를 듣고 싶었다.
    ―백수연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죠? 제가 정말 복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옛날 분들 중에서도 늦게 결혼하신 편입니다. 2002년에 두 분 회혼례를 할 때도 친구들이 정말 구경거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백수잔치까지 했으니…. 저도 들어본 적이 없고, 가본 적도 없습니다. 잔치를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냥 친척이나 친지 대상으로 하면 어디까지 초대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아버님하고 직접 관련된 단체, 개인으로 손님을 국한했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 국제기아대책, 유기농업단체인 정농회(正農會), 그리고 환경정의와 아버님이 50년 가까이 이사장을 맡으신 거창고 분들을 모셨습니다. 문희상 의원은 제 경복고 직계 선배시고,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 제정구 전 의원 등과 함께했던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의 좌장이셨는데 신문에서 백수연 소식을 보고 ‘왜 나한테도 연락을 안 했느냐’고 하셔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버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워낙 말을 못 알아들으시기 때문에 글로 써서 보여드렸는데 그냥 씩 웃으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당일엔 단상에 올라가셔서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말을 하셨고….”
    ―지금은 경기도 포천 농장에서 지내시죠.
    “충북 괴산의 풀무원농장에 훗날 ‘원경선 기념관’으로 쓰려고 건축가 승효상 씨가 지은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지내시다가 2년 전 뇌경색으로 몇 달간 누워 계신 뒤 포천으로 옮겼습니다. 둘째 여동생 부부가 농사지으면서 아버님을 돌보고 있는데 워낙 강인하셔서 재활치료를 받고 난 뒤에는 지팡이 짚고 마당 산책도 하고, 또 자동차로 한두 시간 드라이브하시는 것도 좋아하십니다.”
    ―아들의 감회도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광복 직후 정착하신 곳이 바로 지금 제가 사는 곳입니다. 그때는 행정구역이 ‘부천군 오정면’이었는데 지금은 ‘부천시 오정구’입니다. 제가 시장(부천시장)을 두 번 하고, 국회의원을 4번째 하는데 바로 아버지가 정착하신 제 고향 군, 면에서 한 겁니다. 전통적인 시골이라면 그런 게 별일 아니겠지만 대도시에 그런 뿌리를 가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제가 복을 많이 받은 거죠. 그런 생각을 하니 감사한 마음이 한층 더했습니다.”
    그는 재작년 ‘원경선·원혜영 부자의 풀무원 인생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 ‘아버지, 참 좋았다’(비타베아타 출판)를 펴냈다. 그런데 책의 첫 장이 ‘풀무원 창업자는 아버지가 아닌 나’였다. 사람들은 자기를 풀무원 창업주의 아들로 ‘2세 기업인 출신 정치인’이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에도 그렇게 올라와 있지만 아버지는 농장을 했을 뿐 ‘풀무원’이라는 식품회사를 창업한 건 자신이라는 얘기부터 썼다.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뭔가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라는 일종의 경쟁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천군 오정면’에서 ‘부천시 오정구’로 이어지는 끈을 통해 아버지의 유산(遺産)을 새삼 느끼는 듯했다. 그 유산은 바로 아버지의 삶이었다.
    ―책 제목이 ‘아버지, 참 좋았다’인데,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습니다.
    “책 마지막 문장에 쓴 말이긴 하지만 출판사에서 제목을 잘 뽑은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이 먹으면서 내가 능력이나 노력에 비해 참 복을 많이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복의 근원은 좋은 부모 만나서 잘 배우고, 잘 자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스스로 보기에 당당하지 못한 점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제가 우리 사회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덕분입니다. 아버지한테 가장 일관되고, 핵심적인 게 있다면 바로 실천가이셨다는 겁니다. 초등학교만 간신히 마쳐 콤플렉스가 없지 않으셨겠지만 그만큼 지적 욕구가 강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좋다, 쓸모 있다, 바른 것이다’ 싶으면 바로 받아들이셨습니다.”
    1914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난 아버지 원경선은 열일곱에 소년가장이 됐다. 원경선의 아버지, 그러니까 원 의원의 할아버지는 소 두 마리 값에 해당하는 빚만 남기고 가셨다. 그런데 어느 날, 군청에서 농촌자력갱생운동의 수혜자로 선정됐으니 영농자금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신청한 적도 없는 자금이었다.
    알고 보니 보통학교 6학년 때 장학금을 아껴 쓰고 남은 돈은 학교에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감동한 일본인 교장선생님의 추천 덕분이었다. 땅도 사고 집도 마련했다. 그러나 신앙이 독실했던 원경선은 ‘주일날’ 농장 시찰을 나오겠다는 일본인 관료와 갈등을 빚게 되자 두말없이 땅문서를 돌려주고 농장을 포기한다.
    ―아버님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옳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실천하는 게 당신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유기농이 지금은 친환경 비즈니스로 자리를 잡았지만 아버지는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기농은 일본 기독농민 모임인 ‘애농회’ 발간 잡지에서 처음 보셨는데, 아버지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생명농사라는 점에 ‘필’이 꽂히신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게 성경 말씀인데 농약과 화학비료로 이웃을 ‘간접살인’하는 농사를 지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제가 풀무원을 창립할 때 아버지한테 ‘제가 하려는 것은 비즈니스이지 (생명농사) 운동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아버님의 생활신조가 원 의원의 민주화운동에는 혹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감옥생활은 물론이고 서울대에서 세 번 제적, 네 번 복학이라는 사상 초유의 과정을 겪고 입학한 지 25년 만에야 졸업장을 쥐게 됐지만….
    “사실 저는 굉장히 소심한 사람인데 민주화운동을 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버지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서울대에 입학한 후 1학년 교양과정부 학생과장인 김진세 교수가 부천 집으로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경인철도를 타고 부천역에 내려도 우리 집은 역에서 10리나 떨어져 있었고, 버스도 하루에 서너 번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걱정돼 찾아오신 거죠. 김 교수님이 아버지에게 ‘데모를 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게 된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데모를 하는 게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져야 하는 것 아니냐. 잘못하는 일도 아닌데 손해 보니까 하지 말라는 말을 아비가 어떻게 자식한테 하느냐‘면서 딸기나 드시고 가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웃으며) 아버지가 (아들의 학생운동을) 부추긴 거나 마찬가지죠.”
    ―풀무원을 친구인 남승우 현 ㈜풀무원홀딩스 총괄사장에게 맡기고 정치를 한다고 할 때는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아버님은 평소 ‘정치는 도덕 이하’라고 말씀하셨다던데….
    “하나님 기준으로 바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기준으로 잘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사람의 기준으로는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돈의 유혹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기에 ‘돈이 필요하면 사업을 계속하지 왜 정치를 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죠. 아버지는 제 뜻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낸 60년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참 좋았다’고 하는 건 어찌 보면 ‘기억의 재구성’ 같은 것인데, 살아오면서 갈등은 없었습니까.
    “아버지가 농장에 정착한 직후부터 우리 집은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농사에 뜻을 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쟁통에 오갈 데 없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희 형제(2남 5녀)를 포함해 늘 20명 안팎이 머물렀죠. 반찬이 왜 이러냐고 불만을 털어놓기 일쑤였고…. 여하튼 저는 남자라 그런 일이 없었지만 누나나 여동생들은 매일 아침 교복을 갈아입을 곳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누나들에게 ‘강원도 가서 감자만 캐 먹더라도 우리끼리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어머니가 그 얘기를 전해 듣고 가슴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웃으며) 그 덕분에 저는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생활이란 게 이상은 좋지만 얼마나 엉터리인지 너무 실감나게 겪었거든요.”
    ―책에 보니 ‘아버지는 농사만 유기농으로 했던 것이 아니라 아들도 유기농으로 지으신 분이었다’고 써놓으셨던데,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습니다.
    “유기농이란 화학비료나 농약이 아니라 땅의 본성을 살려 그 힘으로 농사를 짓는 겁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데 제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원경선이라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일찍이 저의 본성을 알고 그걸 살려주셨습니다. 나대로의 길을 가게 해주신 거죠. 그리고 아버지는 무슨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 자식에게 배우고 따라하게 했습니다.”
    거창고 교장을 지낸 전성은 선생은 원경선 옹을 ‘영원한 이사장’이라고 부른다. 전 선생은 ‘아버지, 참 좋았다’라는 책의 서문에 “이 책은 원혜영의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가 아니다. 정신은 이어져 간다는 이야기다”라고 썼다.
    아버지의 정신이 아들에게 이어진다는 것, 그게 바로 영원한 삶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래도 인터뷰 내내 기자의 머릿속을 채운 건 ‘아버지, 참 좋았다’라는 그 한마디였다.
    ● 아버지 원경선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서울YMCA에서 3개월 영어과정을 듣다
    ▽배화여고보를 졸업한 신여성 지명희와 결혼하다
    ▽1949년 경기 부천에 정착해 농장을 설립하다
    ▽1957년 미국인 홀트 씨와 전쟁고아 돕기에 나서다
    ▽1961년 거창고 설립자인 전영창 선생의 부탁으로 재단 이사장을 맡다
    ▽1974년 유기농에 눈을 뜨고 2년 뒤 정농회(正農會)를 만들다
    ▽1989년 정농회, 풀무원 식구들과 함께 국제기아대책 한국지부 설립 운동을 시작하다
    ▽1993년 경실련 환경정의시민연대 이사장을 맡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데모하는’ 아들 걱정한 교수에게 아버지는… : 오피니언 : 뉴스 : 동아닷컴

    소박한 농부이셨던 원경선 이사장님을 27년 전쯤 거창에서 만났다.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감수성이 예민했던 우리들에게 그분은 “하나님, 땅, 정의, 진실”

    같은 말씀을 해 주셨던 것 같다.  풀무원 기업이전 풀무원 공동체에 갔을땐 메뚜기 천지인 논,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

    라”란 공동체 정신 에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분은 마치 묵묵한 이 나라의  황토 같은 분 이였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