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1일 금요일

13세에 끌려가 마취없이 임신중절까지…日에 짓밟힌 소녀의 꿈

 

13세에 끌려가 마취없이 임신중절까지…日에 짓밟힌 소녀의 꿈
한국… 중국… 동남아… 日, 군홧발 닿는 곳마다 여성 짓밟았다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 위안소 웹지도’로 본 日帝 반인도적 국제범죄 실태 동아일보 | 입력 2012.08.31 03:18 | 수정 2012.08.31 17:20
  • "연극단원을 모집한다기에 갔다가 보르네오 섬으로 끌려갔다. 48명의 소녀 중 절반은 극장이나 식당으로,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교외의 어떤 집으로 갔다. 거기서 신체검사를 하던 군의관에게 먼저 성폭행을 당했다. 그때 나이 13세. '모모에'라는 이름으로 위안소의 11호실에 넣어졌고, 일본 패전까지 3년 남짓 하루에 10∼15명의 일본군에게 계속 성폭행을 당했다. 15세 때는 임신 5개월 상태에서 마취도 없이 중절수술을 당했다."(인도네시아 마르디엠 씨)

일본 정치인들이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많은 역사자료와 증언들은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태평양지역 여성을 성폭행하고 위안부로 삼은 국제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침공하는 국가마다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자료는 피해국뿐 아니라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에 의해서도 꾸준히 축적돼 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은 일본의 여성인권단체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과 협약을 맺고 WAM이 수집한 약 3000건의 문건과 서적, 증언록 등을 바탕으로 2010년 8월 '일본군 위안소 웹 지도'를 작성했다. WAM은 일본 여성운동가 고 마쓰이 야요리(松井耶依)의 뜻을 이어받아 2005년 8월 도쿄에서 발족한 단체다.
위안소 웹 지도에 따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국가는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미국 한국 등 22개국에 이른다. 지도에는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1245건, 일본 군인들의 직·간접 증언 1231건, 공문서 702건, 목격담 등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
위안부와 위안소의 정확한 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아 최대 피해국인 한국은 일제 36년 동안 약 20만 명이 위안부로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태지역 각국 위안부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은 한국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비슷하다. 일자리를 주겠다고 속이거나 강제로 끌고 갔다. 10대 소녀이든 신혼의 새댁이든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구타와 성병, 임신 등으로 고통을 겪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을 당했다. 일본군은 중국에서 대규모 부대에 설치하는 위안소와 별개로 소규모 분대가 중국 여성을 납치 및 감금해 성폭행하는 이른바 '강간소'도 운영했다. 런민(人民)일보는 지난달 중국 내 위안부가 약 20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위안소 웹 지도 제작 업무를 맡았던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위안소 웹 지도를 보면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및 태평양의 20여 개국이 피해를 본 국제범죄라는 것이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최근에 있었던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비뚤어진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중국 홍콩 언론도 비판에 나섰다. 홍콩 원후이(文匯)보는 30일 칼럼을 통해 "일본이 정상 국가가 되고 싶으면 반드시 정상적인 언행을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략자라는 추악한 이미지를 씻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앞서 29일 관영 신화(新華)통신도 "일본이 한국인 위안부를 죽은 후까지 욕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곳곳에 널려 있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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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0일 금요일

"행복하단 사람 없는 한국… 우리 더 나눕시다"

 

"행복하단 사람 없는 한국… 우리 더 나눕시다"

  • 이태훈 기자

    입력 : 2012.08.11 03:12

    [만해실천대상 두봉 주교]
    욕심내지 않는 삶이 행복 - 밭농사 짓고는 "맘껏 따가라" "한국, 잘사는 나라 됐지만
    요즘 필요한 건 가난의 영성"
    평생 한국 농민들 위한 삶 - 군사정권에 폭행당한 농민 전국에 알리다 추방당할 뻔
    "두려운 건 폭력 아닌 양심"

    "상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받을 공적도 없는데, 고맙고 감사할 뿐이지요. 실천 부문 상이라는데, 아마 농사지으며 농민들과 함께 살아서 주시는 건가 봐요. 하하하."
    오는 12일 만해실천대상을 받는 두봉(杜峰·83·프랑스명 르네 뒤퐁) 주교는 축하 인사에 "스님들하고도 친하게 지내고, 절에 가면 합장 인사도 곧잘 하니 좋게 보신 것 같다"며 마냥 쑥스러워했다. 두봉 주교는 스물다섯 청년 사제로서 6·25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에 온 뒤, 평생을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해왔다. 1969년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돼 주교 서품을 받은 그에겐 주교의 '특권'인 문장(紋章)과 사목표어가 없다. 처음부터 "시골 신부가 뭐 그런 게 필요하냐"며 사양했기 때문이다. 교구장 재임 중에도 "한국의 교구장은 한국인 사제가 해야 한다"고 교황청에 네 차례 탄원했다. 지금은 경북 의성의 농촌 마을에서 손수 지은 농사로 밥을 지어 먹고살며, 늘 "갖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소중하다"는 자신의 말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두봉 주교를 10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만났다.
    5년 만에 프랑스 고향 마을에 갔다가 이날 아침 귀국한 두봉 주교에게 '오랜만의 고향 나들이는 어떠셨나' 물었더니 언제나처럼 얼굴 한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젠 프랑스가 외국 같아요. 대화도 낯설고 길도 잘 모르겠고…. 내 고향은 대한민국 안동인가 봐요, 하하하."
    천주교 농민 사목의 대부(代父)
    두봉 주교는 프랑스 오를레앙의 전형적 농촌 가정 출신이다. 지금도 직업 농사꾼 못지않은 농사 솜씨는 어려서 익힌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그는 한국에 온 뒤 대전 본당사목을 거쳐 1969년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될 때 초대교구장이 됐고, 1990년 은퇴했다.
    안동에서 그는 본당은 물론 공소까지 찾아다니며 교구민들의 생활을 챙겼다. 지역민들이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문화회관을, 병들고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병원을 세웠고,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재활시설 건립에도 온갖 정성을 다했다. 상주에 상지여중·고를 설립하고, 안동에 가톨릭상지대학을 세우는 일도 주도했다. "제가 아니라 교회가 한 일이에요. 소외된 사람들을 먼저 돌보는 것이 교회의 원래 역할이니까요."

    올해 만해실천대상을 받는 프랑스 출신 두봉 주교. 프랑스에서 25년, 한국에서 58년을 산 그는 “전쟁 후 잿더미였던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며 “갖는 것보다 나누는 것을 우선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무엇보다 그를 '한국 천주교 농민 사목의 대부'로 만든 것은 1979년 '안동농민회 사건'이었다. 군청에서 나눠준 불량 감자씨 때문에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보상을 요구했는데, 기관원들이 농민 대표를 납치해 초주검이 되도록 폭행했다. 안동교구와 정의구현사제단이 이를 전국에 폭로했고,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은 두봉 주교에게 사실상의 추방령인 출국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교황청이 강력 반발하고 국제사회 여론까지 악화되자 추방령도 철회됐다. 이 사건은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과 함께 시대적 약자의 편에 섰던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제가 아니라 김수환 추기경님이 훌륭하게 대처하신 거예요. 두려운 건 폭력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저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내 할 일을 다하자, 떳떳하자고 생각했을 뿐. 교회가 약자를 돌보지 못하는 것은 소금이 짠맛을 잃고 누룩이 발효를 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행복은 소유가 아닌 나눔"
    두봉 주교는 요즘 유기농으로 양파, 상추, 배추, 당근, 감자 등 밭농사를 짓는다. 그는 "올해는 특히 감자 농사가 잘됐다. 나 혼자 먹는 건 아주 조금이면 되니까, 모두 이웃들에게 '필요하면 언제든 따가라'고 한다"고 했다. "얼마 안 되지만 가진 걸 나누면 서로가 좋아요. 만나고 싶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고, 더 나누고 싶고. 그렇게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지. 돈과 물질은 많이 가져봐야 더 많이 갖고 싶을 뿐 행복해지지 않지요."
    두봉 주교는 그런 면에서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가난의 영성'"이라고도 했다. "제가 처음 올 때를 생각하면, 한국은 물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하고 풍요로워졌어요. 그런데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람은 오히려 만나기 어려워졌습니다. 정치인들은 '무슨 혜택을 주겠다' '돈 많이 벌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요. 주님이 날 만드셨으니 필요한 건 다 주님이 주십니다. 갖는 것보다 나눔이 우선이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어요." 주름진 얼굴에 가득한 노(老)주교의 미소가 인제 보니 안동의 하회탈을 닮았다.
    올해 만해대상 시상식은 12일 오후 2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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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가난의 영성'" 이란 말씀에 감동을 느낍니다. 이분 같은 삶을 저도 살수 있을까요?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 세계적 콩쿠르 우승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 세계적 콩쿠르 우승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2.08.11 03:11

    17세 문지영양, 동네 교회·학원 돌며 혼자 연습
    예술中 합격통지서 받았지만 돈 없어 입학 포기
    저소득층 지원 행사서 눈에 띄어 교수 지도 받아

    전남 여수에서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온 문지영(17)양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부모님은 장애 2·3급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서 한 달에 80만원씩 정부 지원을 받는다. 4년 전 서울에 있는 예술중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학교 다니는 데 돈이 많이 들어 입학은 하지 않았다. 대신 지영이는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피아노가 있는 동네 교회와 학원을 돌아다니며 하루 8시간씩 피아노 연습에 몰두했다.
    이런 지영이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8일(현지 시각) 독일에서 열린 제13회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중국의 스타 연주자 랑랑(1994년), 한국의 손열음(2000년)과 김선욱(2004년) 등이 모두 이 대회에서 우승하며 세계적 연주자로 발돋움했다. 지영의 연주를 접한 대회 심사위원단은 "음악적 상상력이 17세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고 평했다. 한국 출신으로는 세 번째 대회 우승이다. 20세 이하 청소년을 대상으로 격년으로 열리는 이 대회에는 올해 세계 40개국의 청소년 연주자 251명이 참가했다.

    지난 8일(현지시각) 독일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피아니스트 문지영(17)양.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음악 콩쿠르 제공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졸라서 여섯 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운 지영이는 열두 살까지 여수의 피아노학원에서 배웠다. 열두 살 때는 선화 음악콩쿠르 대상과 음악춘추 콩쿠르 3위에 입상하며 음악 영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 뒤 2년간 선화음악영재아카데미에 다녔다. 2009년 폴란드에서 열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도 공동 1위에 올랐다. 10일 독일 에틀링겐에서 전화를 받은 문지영양은 "아무리 힘들거나 떨려도 피아노 건반 앞에 앉으면 모든 걸 잊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고교 2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벌써 검정고시로 고교 과정을 마쳤다. 어머니 이복례(49)씨는 "부모로서 뒷받침을 제대로 못 해줘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인데 아이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대견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자칫 ‘가능성 있는 음악 영재’ 정도에서 멈출 뻔했던 지영이가 음악적으로 도약할 기회를 맞은 건 3년 전. 당시 한국메세나협의회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예술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자는 취지로 ‘아트 드림 콩쿠르’를 처음 개최했다. 이 대회 중등부 대상을 받은 지영이는 피아니스트 김대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올해 3월 지영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입학, 이들 사제의 만남은 지속되고 있다. 스승 김 교수는 “연습하기 싫다고 투정 부리기 쉬운 나이인데도, 지영이는 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늘 목말라 있었다. 이 때문에 아이의 피아노에서는 어른스러운 깊이가 묻어났다”고 말했다. 예술 각 분야의 영재를 조기 발견하기 위해 2008년 설립된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수업료 전액을 국비로 지원한다.
    다행히 수업료 걱정은 덜었지만, 지영이는 교통비도 아끼기 위해 고속철도(KTX) 대신 무궁화호를 탔다. 열차를 타면 5~6시간씩 걸리다 보니 여수에는 새벽에 도착하는 날이 많았다. 이틀 연속 서울에서 공부할 때는 찜질방에서 잔 적도 있다. 이런 사연을 접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발전재단 이사회에서는 최근 지영에게 피아노를 사주기로 결정했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문지영은 5000유로(700만원)의 상금과 함께 독일에서 독주회를 열 기회를 얻었다. 말수가 적은 지영이 전화기 너머로 수줍게 말했다. “러시아의 명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를 하는 것이 꿈이에요.”

  •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 세계적 콩쿠르 우승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자신의 운명은 만들어 간다는 것을 입증한 멋있는 학생이다. 노력하는 자가 도약할 수 있는 (그 기회가 아주 적고, 작을 수 있지만) 도약대가 또한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