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3일 월요일

[월요인터뷰] '독도는 한국땅' 진실 찾아 귀화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독도는 한국땅` 진실 찾아 귀화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조용한 외교는 끝났다…명확한 근거로 일본을 교육시키자"
日 노다 총리 3가지 논거 대지만 최근 발견된 사료로 충분히 반박 가능
日 국민에 알려주면 대부분 수긍할 것
韓·日 선거 앞두고 타협 불가능해…끌려다니지 말고 국제홍보 강화해야
日 은폐 알고 진실 택해 한국에 귀화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의 억지 주장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증거와 논리를 적극적으로 내세워야 국제적으로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일본은 보수화·우경화돼 가고 있어요. 그 선봉에 서 있는 일부 정치인들은 그것을 이용해 인기를 끌고 있고요. 한국은 가만히 있기보다 그런 사안이 터질 때마다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야 합니다. 일본 국민들은 한국 국민이 침묵하고 있으면 ‘인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 겸 독도종합연구소장(56)에게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일본 국적을 버리고 한국으로 귀화한 그에게 일본인의 ‘심중’을 전해 듣고 싶어서가 아니다.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妄言)’에 대해 누구보다 분노하고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을 바로잡는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 있는 연구실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를 인터뷰했다. 그는 독도를 둘러싼 ‘저 일본인들’의 억지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우리 한국인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 냉철하게 얘기했다.
▷일본의 억지주장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8년 전부터 방위백서에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적어놓고 2008년 이후 역사·지리 등 사회과 교과서에도 같은 내용을 담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때마다 강력하게 대응했습니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다는 건 사실 틀린 얘기입니다. ”
▷한국 정부의 대응에 일관성이 있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어요.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아계실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죠. 그러자 일본 정부가 엉뚱하게 독도 문제를 언급한 겁니다. 일종의 맞불작전이었어요. 한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해결 요구에 대해 성의 있는 행동을 보이지 않고, 외교 문서에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내용을 삭제하라는 무례한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정부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강행한 것입니다. ”
▷일본 정부의 강경 대응이 ‘국내 정치용’ 도발이란 얘기도 있는데요.
“그것은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오는 11월 중의원 선거를, 한국은 12월 대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
▷일본은 왜 억지 주장을 계속하죠.

“사실 한국인들은 일본이 무슨 논리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지 잘 몰라요. 일본의 주장을 정확히 알아야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노다 총리는 세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첫 번째가 17세기 중반 에도막부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시킨 역사적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는 겁니다. 1620년대부터 일본 어민들이 에도막부로부터 울릉도에 건너갈 수 있는 도해(渡海) 면허를 받아 조업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905년 일본은 법률을 통해 독도를 정식으로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이후 실질적으로 지배해 오던 독도를 일본 영토로 재확인했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2차세계대전 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를 일본이 포기해야 할 한국 영토로 명기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그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첫 번째와 관련해 17세기 후반 ‘돗토리본’의 문서를 보면, 에도막부는 일본인의 울릉도·독도 도해금지령을 내리면서 두 섬은 조선의 부속도서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이런 사실은 ‘1877년 태정관(일본 내각의 전신) 지령’에서도 확인됩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에 ‘울릉도와 독도(外一島)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지시했어요. 두 번째인 1905년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했다는 주장에 반박하려면 그 이전에 대한제국이 확실하게 독도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필요하죠. 오랫동안 나오지 않다가 최근 2년 새 그 증거가 다수 나왔어요. 1897년부터 대한제국은 울릉도·독도에서 전복 등 어패류를 채취한 일본인들에게 세금을 매겼어요. 세금 징수는 국제법상 땅을 실효 지배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17세기 중반에 독도에 대한 실효 지배권을 확립했다는 바보 같은 주장을 하고 있어요. 반박도 쉽게 할 수 있는데 한국 정부가 안 하는 게 문제입니다.”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런 주장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노다 총리는 자신들의 주장을 세계에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어요. 반면 한국 정부가 이에 대해 공식적인 반박을 한 적이 있나요. 한국 정부의 유일한 논거는 독도는 역사·지리·국제법적으로 한국의 고유 영토이다, 이것뿐이에요. 1945년 이후 한국 소유로 돌아왔고, 지금까지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우리 주장을 해야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본이 ‘한국 정부는 사실 대답할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ICJ(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120%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은 억지 주장을 계속할텐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일본의 논리를 확실히 극복하고, 일본 국민들이 이를 알 수 있게 홍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홍보를 할 필요가 없다는 우리 측 주장도 많아요. 일본의 ‘유치한’ 거짓말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지요. 해명하고 반박하다 보면 오히려 일본 주장에 말려들어갈 것이란 우려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나 국민들은 ‘독도는 원래 우리 땅인데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하냐’며 공부할 생각을 안 해요. 이러니 세계적으로도 일본 주장만 돌고 있지요. 미국도 독도를 한국 땅으로 보다가 2008년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했지요.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다른 나라들이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일본의 주장이 애초에 잘못돼 있으니 일본 정부와 국민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조용한 외교’는 끝났습니다. 앞으론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명확한 근거를 세계적으로 홍보해야 합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설명해주면 수긍할까요.

“일부는 감정적으로 반발하겠죠. 하지만 경험적으로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입니다. 일본 정부는 독도 문제에 대한 자료를 70%만 공개합니다. 나머지 30%를 밝힌다면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귀화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일본이 독도 관련 사료를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귀화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학자라면 무엇보다 진실을 알리는 게 중요한 임무이니까요. 일본 내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어요.”
▷귀화한 일본인으로서 한국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진 않나요.

“아니오. 외국 경험이 많은 교수 사회에서 지내다 보니 특별히 외롭거나 힘들진 않습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1956년 일본 도쿄 출신이다. 도쿄대 3학년 재학 중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한·일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198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편입, 2000년 고려대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분석: 조선과 만주, 대만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일 관계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2008년부터는 독도종합연구소장도 맡고 있다. ‘대한민국 독도’ ‘일본 고지도에도 독도 없다’ 등 독도가 한국 땅임을 밝히는 저서를 여럿 썼다. 2003년 한국인으로 귀화했으며, 1989년 한국인과 결혼해 딸·아들 3남매를 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귀화 결심을 굳히게 된 주요한 동기였다”고 말한다. 일본을 방문할 때는 이대호(오릭스 버펄로스)를 응원하기 위해 야구장을 찾기도 한다고 했다.

[월요인터뷰] '독도는 한국땅' 진실 찾아 귀화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2012년 8월 31일 금요일

13세에 끌려가 마취없이 임신중절까지…日에 짓밟힌 소녀의 꿈

 

13세에 끌려가 마취없이 임신중절까지…日에 짓밟힌 소녀의 꿈
한국… 중국… 동남아… 日, 군홧발 닿는 곳마다 여성 짓밟았다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 위안소 웹지도’로 본 日帝 반인도적 국제범죄 실태 동아일보 | 입력 2012.08.31 03:18 | 수정 2012.08.31 17:20
  • "연극단원을 모집한다기에 갔다가 보르네오 섬으로 끌려갔다. 48명의 소녀 중 절반은 극장이나 식당으로,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교외의 어떤 집으로 갔다. 거기서 신체검사를 하던 군의관에게 먼저 성폭행을 당했다. 그때 나이 13세. '모모에'라는 이름으로 위안소의 11호실에 넣어졌고, 일본 패전까지 3년 남짓 하루에 10∼15명의 일본군에게 계속 성폭행을 당했다. 15세 때는 임신 5개월 상태에서 마취도 없이 중절수술을 당했다."(인도네시아 마르디엠 씨)

일본 정치인들이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많은 역사자료와 증언들은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태평양지역 여성을 성폭행하고 위안부로 삼은 국제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침공하는 국가마다 위안소를 설치하고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자료는 피해국뿐 아니라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에 의해서도 꾸준히 축적돼 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은 일본의 여성인권단체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과 협약을 맺고 WAM이 수집한 약 3000건의 문건과 서적, 증언록 등을 바탕으로 2010년 8월 '일본군 위안소 웹 지도'를 작성했다. WAM은 일본 여성운동가 고 마쓰이 야요리(松井耶依)의 뜻을 이어받아 2005년 8월 도쿄에서 발족한 단체다.
위안소 웹 지도에 따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국가는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미국 한국 등 22개국에 이른다. 지도에는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1245건, 일본 군인들의 직·간접 증언 1231건, 공문서 702건, 목격담 등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
위안부와 위안소의 정확한 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아 최대 피해국인 한국은 일제 36년 동안 약 20만 명이 위안부로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태지역 각국 위안부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은 한국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비슷하다. 일자리를 주겠다고 속이거나 강제로 끌고 갔다. 10대 소녀이든 신혼의 새댁이든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구타와 성병, 임신 등으로 고통을 겪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을 당했다. 일본군은 중국에서 대규모 부대에 설치하는 위안소와 별개로 소규모 분대가 중국 여성을 납치 및 감금해 성폭행하는 이른바 '강간소'도 운영했다. 런민(人民)일보는 지난달 중국 내 위안부가 약 20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위안소 웹 지도 제작 업무를 맡았던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위안소 웹 지도를 보면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및 태평양의 20여 개국이 피해를 본 국제범죄라는 것이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최근에 있었던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비뚤어진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중국 홍콩 언론도 비판에 나섰다. 홍콩 원후이(文匯)보는 30일 칼럼을 통해 "일본이 정상 국가가 되고 싶으면 반드시 정상적인 언행을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침략자라는 추악한 이미지를 씻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앞서 29일 관영 신화(新華)통신도 "일본이 한국인 위안부를 죽은 후까지 욕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곳곳에 널려 있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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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0일 금요일

"행복하단 사람 없는 한국… 우리 더 나눕시다"

 

"행복하단 사람 없는 한국… 우리 더 나눕시다"

  • 이태훈 기자

    입력 : 2012.08.11 03:12

    [만해실천대상 두봉 주교]
    욕심내지 않는 삶이 행복 - 밭농사 짓고는 "맘껏 따가라" "한국, 잘사는 나라 됐지만
    요즘 필요한 건 가난의 영성"
    평생 한국 농민들 위한 삶 - 군사정권에 폭행당한 농민 전국에 알리다 추방당할 뻔
    "두려운 건 폭력 아닌 양심"

    "상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받을 공적도 없는데, 고맙고 감사할 뿐이지요. 실천 부문 상이라는데, 아마 농사지으며 농민들과 함께 살아서 주시는 건가 봐요. 하하하."
    오는 12일 만해실천대상을 받는 두봉(杜峰·83·프랑스명 르네 뒤퐁) 주교는 축하 인사에 "스님들하고도 친하게 지내고, 절에 가면 합장 인사도 곧잘 하니 좋게 보신 것 같다"며 마냥 쑥스러워했다. 두봉 주교는 스물다섯 청년 사제로서 6·25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에 온 뒤, 평생을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해왔다. 1969년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돼 주교 서품을 받은 그에겐 주교의 '특권'인 문장(紋章)과 사목표어가 없다. 처음부터 "시골 신부가 뭐 그런 게 필요하냐"며 사양했기 때문이다. 교구장 재임 중에도 "한국의 교구장은 한국인 사제가 해야 한다"고 교황청에 네 차례 탄원했다. 지금은 경북 의성의 농촌 마을에서 손수 지은 농사로 밥을 지어 먹고살며, 늘 "갖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소중하다"는 자신의 말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두봉 주교를 10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만났다.
    5년 만에 프랑스 고향 마을에 갔다가 이날 아침 귀국한 두봉 주교에게 '오랜만의 고향 나들이는 어떠셨나' 물었더니 언제나처럼 얼굴 한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젠 프랑스가 외국 같아요. 대화도 낯설고 길도 잘 모르겠고…. 내 고향은 대한민국 안동인가 봐요, 하하하."
    천주교 농민 사목의 대부(代父)
    두봉 주교는 프랑스 오를레앙의 전형적 농촌 가정 출신이다. 지금도 직업 농사꾼 못지않은 농사 솜씨는 어려서 익힌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그는 한국에 온 뒤 대전 본당사목을 거쳐 1969년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될 때 초대교구장이 됐고, 1990년 은퇴했다.
    안동에서 그는 본당은 물론 공소까지 찾아다니며 교구민들의 생활을 챙겼다. 지역민들이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문화회관을, 병들고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병원을 세웠고,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재활시설 건립에도 온갖 정성을 다했다. 상주에 상지여중·고를 설립하고, 안동에 가톨릭상지대학을 세우는 일도 주도했다. "제가 아니라 교회가 한 일이에요. 소외된 사람들을 먼저 돌보는 것이 교회의 원래 역할이니까요."

    올해 만해실천대상을 받는 프랑스 출신 두봉 주교. 프랑스에서 25년, 한국에서 58년을 산 그는 “전쟁 후 잿더미였던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며 “갖는 것보다 나누는 것을 우선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무엇보다 그를 '한국 천주교 농민 사목의 대부'로 만든 것은 1979년 '안동농민회 사건'이었다. 군청에서 나눠준 불량 감자씨 때문에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보상을 요구했는데, 기관원들이 농민 대표를 납치해 초주검이 되도록 폭행했다. 안동교구와 정의구현사제단이 이를 전국에 폭로했고,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은 두봉 주교에게 사실상의 추방령인 출국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교황청이 강력 반발하고 국제사회 여론까지 악화되자 추방령도 철회됐다. 이 사건은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과 함께 시대적 약자의 편에 섰던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제가 아니라 김수환 추기경님이 훌륭하게 대처하신 거예요. 두려운 건 폭력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저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내 할 일을 다하자, 떳떳하자고 생각했을 뿐. 교회가 약자를 돌보지 못하는 것은 소금이 짠맛을 잃고 누룩이 발효를 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행복은 소유가 아닌 나눔"
    두봉 주교는 요즘 유기농으로 양파, 상추, 배추, 당근, 감자 등 밭농사를 짓는다. 그는 "올해는 특히 감자 농사가 잘됐다. 나 혼자 먹는 건 아주 조금이면 되니까, 모두 이웃들에게 '필요하면 언제든 따가라'고 한다"고 했다. "얼마 안 되지만 가진 걸 나누면 서로가 좋아요. 만나고 싶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고, 더 나누고 싶고. 그렇게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지. 돈과 물질은 많이 가져봐야 더 많이 갖고 싶을 뿐 행복해지지 않지요."
    두봉 주교는 그런 면에서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가난의 영성'"이라고도 했다. "제가 처음 올 때를 생각하면, 한국은 물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하고 풍요로워졌어요. 그런데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람은 오히려 만나기 어려워졌습니다. 정치인들은 '무슨 혜택을 주겠다' '돈 많이 벌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요. 주님이 날 만드셨으니 필요한 건 다 주님이 주십니다. 갖는 것보다 나눔이 우선이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어요." 주름진 얼굴에 가득한 노(老)주교의 미소가 인제 보니 안동의 하회탈을 닮았다.
    올해 만해대상 시상식은 12일 오후 2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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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가난의 영성'" 이란 말씀에 감동을 느낍니다. 이분 같은 삶을 저도 살수 있을까요?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 세계적 콩쿠르 우승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 세계적 콩쿠르 우승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2.08.11 03:11

    17세 문지영양, 동네 교회·학원 돌며 혼자 연습
    예술中 합격통지서 받았지만 돈 없어 입학 포기
    저소득층 지원 행사서 눈에 띄어 교수 지도 받아

    전남 여수에서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온 문지영(17)양 집에는 피아노가 없다. 부모님은 장애 2·3급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서 한 달에 80만원씩 정부 지원을 받는다. 4년 전 서울에 있는 예술중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학교 다니는 데 돈이 많이 들어 입학은 하지 않았다. 대신 지영이는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피아노가 있는 동네 교회와 학원을 돌아다니며 하루 8시간씩 피아노 연습에 몰두했다.
    이런 지영이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8일(현지 시각) 독일에서 열린 제13회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중국의 스타 연주자 랑랑(1994년), 한국의 손열음(2000년)과 김선욱(2004년) 등이 모두 이 대회에서 우승하며 세계적 연주자로 발돋움했다. 지영의 연주를 접한 대회 심사위원단은 "음악적 상상력이 17세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고 평했다. 한국 출신으로는 세 번째 대회 우승이다. 20세 이하 청소년을 대상으로 격년으로 열리는 이 대회에는 올해 세계 40개국의 청소년 연주자 251명이 참가했다.

    지난 8일(현지시각) 독일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피아니스트 문지영(17)양.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음악 콩쿠르 제공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졸라서 여섯 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운 지영이는 열두 살까지 여수의 피아노학원에서 배웠다. 열두 살 때는 선화 음악콩쿠르 대상과 음악춘추 콩쿠르 3위에 입상하며 음악 영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 뒤 2년간 선화음악영재아카데미에 다녔다. 2009년 폴란드에서 열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도 공동 1위에 올랐다. 10일 독일 에틀링겐에서 전화를 받은 문지영양은 "아무리 힘들거나 떨려도 피아노 건반 앞에 앉으면 모든 걸 잊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고교 2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벌써 검정고시로 고교 과정을 마쳤다. 어머니 이복례(49)씨는 "부모로서 뒷받침을 제대로 못 해줘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인데 아이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대견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자칫 ‘가능성 있는 음악 영재’ 정도에서 멈출 뻔했던 지영이가 음악적으로 도약할 기회를 맞은 건 3년 전. 당시 한국메세나협의회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예술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자는 취지로 ‘아트 드림 콩쿠르’를 처음 개최했다. 이 대회 중등부 대상을 받은 지영이는 피아니스트 김대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올해 3월 지영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입학, 이들 사제의 만남은 지속되고 있다. 스승 김 교수는 “연습하기 싫다고 투정 부리기 쉬운 나이인데도, 지영이는 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늘 목말라 있었다. 이 때문에 아이의 피아노에서는 어른스러운 깊이가 묻어났다”고 말했다. 예술 각 분야의 영재를 조기 발견하기 위해 2008년 설립된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수업료 전액을 국비로 지원한다.
    다행히 수업료 걱정은 덜었지만, 지영이는 교통비도 아끼기 위해 고속철도(KTX) 대신 무궁화호를 탔다. 열차를 타면 5~6시간씩 걸리다 보니 여수에는 새벽에 도착하는 날이 많았다. 이틀 연속 서울에서 공부할 때는 찜질방에서 잔 적도 있다. 이런 사연을 접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발전재단 이사회에서는 최근 지영에게 피아노를 사주기로 결정했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문지영은 5000유로(700만원)의 상금과 함께 독일에서 독주회를 열 기회를 얻었다. 말수가 적은 지영이 전화기 너머로 수줍게 말했다. “러시아의 명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를 하는 것이 꿈이에요.”

  •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 세계적 콩쿠르 우승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자신의 운명은 만들어 간다는 것을 입증한 멋있는 학생이다. 노력하는 자가 도약할 수 있는 (그 기회가 아주 적고, 작을 수 있지만) 도약대가 또한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다.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ESSAY]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ESSAY]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 남호탁 / 예일병원 원장·일반외과 전문의

    입력 : 2012.07.12 23:30

    "장애 안고 태어난 1080g 아들… ‘아빠가 곁에 있으니 살아만 다오’
    세 살 되자 ‘청각 이상’ 청천벽력‘듣는다’는 유치원 교사에 힘 얻어
    온 가족 가짜 보청기, 치료 노력 관심과 손길이 장애 극복케 해"

    남호탁 / 예일병원 원장·일반외과 전문의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자궁 속의 아이는 교통사고로 막내딸을 잃은 우리 가족에게 희망이자 위로였다. 모처럼 온 가족이 웃음을 되찾은 벅찬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임신 7개월째 되던 어느 날 그만 아내가 임신중독증에 빠지고 말았다. 의사는 아이의 생명이 위태롭긴 하지만 수술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이 태어났다. 칠삭둥이, 1.08㎏, 미숙아였다.
    지금에야 많이 달라졌지만, 십여년 전만 해도 1080g은 생명을 유지하기에 벅찬 몸무게였다. 아이는 내 팔뚝만큼도 안 됐고, 담당 의사를 만날 때마다 의사의 입에서는 암울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 각오하라, 생명을 유지하더라도 정상아로 자라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아이에게선 호흡 곤란, 기흉, 뇌출혈 등 온갖 합병증이 발생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조차 버거운 나날들이었다. 생명을 부지하더라도 장애아로 자랄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부끄럽지만 그런 섬뜩한 생각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나는 비교적 자유로이 신생아중환자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 내가 수련의 생활을 한 병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하루 사투(死鬪)를 벌이는 아이에게 아비로서 뭐라도 해야겠기에 기도에서 분비물을 뽑아내고 환부를 소독하는 일을 자청했다. 그런데 아이와 접촉하며 관계를 맺어감에 따라 놀랍게도 생각이 바뀌어가는 게 아닌가. 어떤 장애가 생겨도 좋으니 살아만 달라, 아빠가 곁에 있어줄 테니 함께 살자. 나는 그때 아무리 아비라도 친밀한 접촉이 없으면 남과 별반 다를 게 없고 접촉과 관계를 통해 비로소 아비가 되는 것을 깨달았다.
    백일이 다 되어 아이는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해맑게 자랐다. 세 살이 지난 어느 날 아이가 말이 늦는다 싶어 병원을 찾은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이가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말이 늦을지언정 아이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흥얼대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런 아이가 듣지 못한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전국에 안 다녀본 병원이 없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하나같이 아이가 듣지 못한다며 인공와우(蝸牛·달팽이관) 수술을 권유했다. 부모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상태나 부모의 의견보다 기계가 뽑아낸 데이터를 더 신뢰하는 의사들을 바라보며 섭섭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은 아닐지언정 아이가 듣는다고 확신한 아내와 나는 수술을 거부하고 재활치료에 매달렸다. 보청기를 착용시키고 언어치료와 음악치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아내를 면담한 원장선생님은 "아이를 다른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넌지시 아내의 의중을 떠봤다. 불만을 가진 부모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펄쩍 뛰자 다른 반 선생님들도 아이가 잘 못 들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의견은 달랐다. "아이가 듣는 게 확실한데 무슨 소리냐"고 했다. 나는 그날 멀리서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얼굴을 맞대고 바라보는 것은 한참 다르다는 것을 또 한 번 또렷이 알게 되었다.
    주문한 아이의 보청기를 찾아오는 날 보청기 회사가 있는 대구에 강의하러 간 지인에게 찾아다 줄 것을 부탁했다. 연세 지긋한 그의 어머니가 같이 갔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란다.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그 소리를 전해 듣고 우리 가족은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아이가 거부감을 가질까 싶어 가족 모두가 함께 착용할 목적으로 가짜 보청기를 주문했던 것인데…. 웃고 있었지만, 아이에게 보청기를 끼워주는 아내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멋진 무대에 올라 또래 아이들과 독창 실력을 겨루기도 하고, 첼로를 연주하며 오케스트라 단원으로도 활동한다. "아빠 뭐해?" "운전 중이야." "그래? 아빠 위험해, 끊어." "응…." 아이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매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물기가 밴다.
    세상엔 고마운 분들이 참으로 많다. 소아과 의사, 신생아중환자실 간호사, 언어치료 선생님, 유치원 담임선생님, 동료와 이웃들…. 그분들이 없었다면 이렇듯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장애는 영어로 '디스오더(disorder)'나 '핸디캡(handicap)'이라고 부르지 '질병(disease)'이라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관심과 따뜻한 손길이 있으면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상태이기에 질병과 구분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와 함께 험난한 길을 헤쳐오며 나는 생생히 보았다. 장애가 질병과 같은 개념으로 취급되는 기이한 세상을.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많은 장애아들이 소외되고 외면당한 채 방치되는 기막힌 현실을.

  • [ESSAY] 어쩜, 가족이 다 못 듣는다니!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가슴 뭉클한 이야기네요. 필자이자 아이 아버지인 남선생님도 의사이시지만 내 피붙이, 가족이 아니면 보통 일반 상식적인 수준에서 접근하게 되지요. …

    2012년 7월 13일 금요일

    엄마·아빠를 죽인 사람을 30년간… 충격과 경악

     

    엄마·아빠를 죽인 사람을 30년간… 충격과 경악

  • 이한수 기자
    反체제 인사 희생자 3만명 자녀, 軍가정에 강제 입양
    유아 500명, 부모와 이별… 현재 106명이 친부모 확인
    어머니회, 지속적 처벌 요구… 주범 비델라 前대통령 사면·실형 반복하다가 최근 징역 50년 중형선고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는 빅토리아 몬테네그로(35)는 어린 시절 저녁식사 때 신념에 찬 군인인 아버지 에르난 테츨라프 중령이 반체제 인사들을 잡아들여 죽이고 고문한 이야기를 들었다. 빅토리아는 "(고문당하고 죽은) 이들이 아르헨티나에 해를 끼치는 분자들"이라는 부친의 말을, "아르헨티나 군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주변의 말을 믿었다. 2000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빅토리아는 1997년 '테츨라프 중령이 친아버지가 아닐 수 있으니 친자 확인 검사를 받으라'는 법원의 통보를 받았다. 아르헨티나 당국은 1976~1983년 군부독재 집권 시절 '아기 납치' 혐의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빅토리아는 망설임 끝에 유전자 검사에 응했고 자신의 친부모가 군부 독재에 저항 운동을 벌이다 죽임을 당한 사실을 2000년 알게 됐다. 더 놀라운 것은 테츨라프 중령이 자신의 친부모 납치·살해 작전에 가담해 생후 13일 만에 납치된 자신을 입양했다고 고백한 사실이었다. 빅토리아는 올해 봄 친부모의 성 '몬테네그로'로 개명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집권 기간 동안 정권에 반대하는 지식인과 예술가 등 반체제 인사들을 무차별 구금·살해하고 그들의 아이를 빼앗아 군인 가정 등에 강제로 입양시켰다. 전 세계는 이 반인륜 만행을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고 불렀다.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3만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됐으며 강제 입양된 아이들은 500여명에 이른다. 빅토리아처럼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은 사람은 이제껏 106명이 됐다.
    군사정권이 아이를 빼앗은 과정은 인륜 파괴의 극한을 보여준다. 비밀수용소 수감자 중 임신한 여성들은 수갑과 족쇄를 찬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다. 산모는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지는 등 무참히 살해됐다. 갓난아이들은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군인·경찰 등 친정권 인사 집안에 보내졌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법원에서 지난 5일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1976~1983년 집권 기간 중 반대파들을 고문₩살해하는‘더러운 전쟁’을 벌일 당시 자행한‘아기 납치’관련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인권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법정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로이터 뉴시스

    왜 독재정권은 '반역자'의 아이들을 군인·경찰 등 체제의 수호자들이 입양하도록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스페인 정신과 의사 안토니오 발레요 나제라가 정당성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코 정권(1939~1975)을 위해 일한 나제라는 반정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 등의 이념은 일종의 정신 질환이며 이들로부터 아이들을 구출해 스페인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이론을 설파했다. 프랑코 정권도 집권 기간 반체제 인사의 아이 3만명을 납치해 친정부 인사 가정 등에 입양했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은 1970~80년대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볼리비아·파라과이·우루과이 등 6개국 군사정권이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벌인 '콘도르(남미에 사는 큰 독수리를 뜻함) 작전'의 일환이었다. 칠레 피노체트 정권(1973~1990년)이 3000여명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 남미 각국에서 최악의 인권 탄압이 벌어졌다.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의 반인륜적인 '유아 납치'는 1977년 실종 자녀를 찾아 달라며 시위를 시작한 어머니·할머니 등 14명이 '5월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알려졌다. 1983년 군부독재를 끝낸 라울 알폰신 정부는 호르헤 비델라 전 대통령 등 군사정권 인사 370여명에게 반인륜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90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국민화합을 내세워 이들을 전격 사면했다. 이후 2003년 좌파 지도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사면법을 폐기하고 이들을 다시 법정에 세웠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이 들어선 2011년 2월부터 재판이 빠르게 진행됐다.
    아르헨티나 법원은 지난 5일 이들 군사정권 책임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1976년 쿠데타를 일으켜 1981년까지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86)가 징역 50년,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레이날도 비뇨네(84)가 15년형을 받았다. 당시 '유아 납치'에 관여했던 수용소 책임자와 의사 등에게는 징역 15~40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11일 아르헨티나가 더러운 전쟁 책임자들이 죽기 전에 이들을 정의의 법정에 세우는 진전을 이뤘다고 보도했다

  • 엄마·아빠를 죽인 사람을 30년간… 충격과 경악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2년 7월 7일 토요일

    나의 에버노트(Evernote) 활용기

    많은 분들이 사용하고 계시겠지만 저는 이  "Evernote" (www.evernote.com) 를 사용하면서 편리한 점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간단히 설명드리면 이 클라우딩 프로그램은 컴퓨터-집,회사, 어디든, 스마트폰, 태블릿 등등
    정보기기에 상호간 즉각적인 저장 및 동기화-서로 자료가 일치하게 만드는-가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래 그림은 실제 제 에버노트 캡쳐그림인데 내 일상중에 만나는 자료들을 손쉽게 저장하고 스마트 폰에서 확인하여 활용하거나, 혹 회사 컴퓨터에서 업무중에 즉각적으로 메모 등을 해놓고 어디든지 찾아보는등에 도움이 됩니다

    특히 영어 관련 자료도 아래 그림처럼 MP3 자료도 드래그로 끌어당겨놓고 동기화놓으면 어디든지 에서 제 아이폰에서 확인해서 들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구글 크롬을 통해 인터넷 서핑을 하면 '에버노트로 클립 하기' 같은 보조 연동 프로그램이 있어 클릭만으로 인터넷 자료를 내 에버노트 서버로 저장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기능 써보시면 대단합니다. 화면에 보이는 모든자료를 (단 동영상 제외) 저장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awesome note와의 동기화도 가능합니다.

    쓰다보니 활용도가 좋아 현재는 프리미엄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단, 폴더단위의 암호화 장치가 되어있지 않아 -문장단위 암호화는 가능- 개인의 중요자료는 조심해야 합니다

    (무자막 미드카페-http://cafe.naver.com/ddole/-에 제가 포스팅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