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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1일 금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17) 60대 목표 ‘회사 물려주기’ 이미 시작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17) 60대 목표 ‘회사 물려주기’ 이미 시작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1-03 00:06 | 최종수정 2011-11-03 10:22 기사원문

손정의 후계자 찾기 … 젊다면 보너스 100억 엔쯤 요구할 배포 있어야
[중앙일보 이나리]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 홈페이지(http://www.softbank.co.jp/academia)에 게시된 입교생 모집 광고. 소프트뱅크 그룹의 후계자 양성을 위해 개원한 아카데미아엔 직원뿐 아니라 누구라도 지원 가능하다. 국적·성별은 물론 소속 조직도 따지지 않는다. 이미 여러 명의 경쟁사 직원, 외국인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손정의 회장의 직강은 종종 인터넷 개인화 방송 서비스인 '유스트림'을 통해 온라인 생중계된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지난해 6월 25일 제30회 정기 주주총회 자리에서 '소프트뱅크 신(新)30년 비전'을 발표했다. 예상대로 이런저런 의문과 비아냥이 쏟아졌다. 요지는 “30년 뒤 세계 톱10 기업이 되겠다, 계열사를 5000개로 늘리겠다면서 왜 구체적인 실행계획은 없느냐”는 거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실은 그런 질문이 외려 좀 답답하게 여겨졌다. 30년 비전을 통해 나는 소프트뱅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했다. 우리 본업은 마이크로칩 제조도, 소프트웨어 판매도 아니다. 정보혁명을 추진하는 것이다. 미래에 도달해야 할 이미지도 확실히 그려 놨다. 그를 위한 전술, 즉 구체적 방법론은 시대와 더불어 변하며 도구도 달라진다. 사업상 라이벌도 현재와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니 방법론이란 건 큰 원칙 정도만 제시해 두면 된다. 물론 확실히 준비해야 할 것도 있다. 새 시대에 맞는 이른바 '웹(Web)형 조직'이다. 구성체들이 자율·분산·협조의 원칙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각 구성체는 적재적소에서 자기 역할을 하며 타 조직들과 연대한다. 특정 브랜드·기술·사업모델에 매이지 않는 '멀티형 조직'이기도 하다. 이런 구상의 핵심에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가 있다.
30년 비전을 발표한 한 달 뒤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를 개원했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를 본뜬 이 학교의 제1 목표는 '손정의 2.0'을 만드는 것이다. 나 대신 소프트뱅크를 이끌어갈 차세대 최고경영자(CEO)를 배출하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열아홉 살 때부터 계획한 일이다. '인생 50년 계획' 중 60대의 목표가 바로 '다음 세대에 사업을 물려준다'는 거였다.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돈이나 명예보다 사람을 남기고 싶다. 누군가를 통해 내 뜻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 나이 올해 쉰 넷, 35년을 숙성시킨 목표를 이루려면 이제쯤엔 발동을 걸어야 한다. 그런 비상한 각오로 문을 연 것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다.
#'소프트뱅크 DNA'는 피보다 진하다
 내겐 두 딸이 있다. 모두 맞벌이 주부다. 성실한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사랑하는 딸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준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인류 역사상 300년 이상 존속한 국가는 의외로 드물다. 동로마제국, 중국의 청나라를 포함해 11개국 정도다. 이들은 하나같이 장자 상속을 포기했다. 능력과 상관없이 큰아들이라, 혹은 내 핏줄이란 이유로 후계자로 삼는 건 매우 위험하다.
 그렇다고 내가 '오너십'을 가벼이 여기는 건 아니다. 대기업 샐러리맨 사장의 임기는 기껏해야 4~5년이다. 이래서야 자기 임기 동안 책임질 수 있는 정도의 계획밖에 세우지 않는다. 큰 시야로 사업을 펼 수도 없다. 대업을 이루려면 역시 20~30년의 시간 축으로 생각해야 한다.
#회장보다 '교장 선생님'으로 남고 싶어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는 바로 그런 큰 스케일로 미래를 그려갈 후계자를 기르는 곳이다. 무슨 사업부장 같은 리더를 키우기 위한, 일반 회사에서 시행하는 사원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다. 정원은 일단 300명. 그중 200명은 소프트뱅크 그룹 내에서, 나머지 100명은 외부에서 선발했다. 트위터를 통해서도 신청을 받았다. 무려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패기 만만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개중엔 우리 경쟁사 직원도 있고 외국인도 있다. 후계자가 꼭 사내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 30년 뒤 소프트뱅크를 지금의 100배 규모로 키우려면 보통의 생각으론 불가능하다. 밖에 큰 인물이 있다면 당연히 데려와야 한다.
 이들은 말 그대로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전 교육'을 받는다. 수강생 각자는 '내가 소프트뱅크 CEO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도록 훈련받는다. 매주 수요일 오후 5시부터 4~5시간 진행하는 교육은 힘 닿는 한 내가 직접 수행한다. 말하자면 내가 교장인 셈이다. 사실 교장 선생님이 되는 건 내 오랜 꿈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의 교장으로 죽고 싶다. '사장'이나 '회장'이라 불리며 죽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수강생의 긴장도는 상당하다. 6개월마다 한 번씩 프레젠테이션 경연을 한다. 일종의 '물갈이 전쟁'이다. 소프트뱅크 CEO로서 사업 전략과 성장 전략, 투자 전략을 공개한다. 수강생들이 직접 채점한다. 이를 통해 하위 10%를 솎아낸다. 빈자리는 다시 새 수강생으로 채운다. 밀려난 사람이라도 원하면 언제든 재도전할 수 있다.
#소프트뱅크, 웹형 조직으로 거듭나야
 이 학교에 대해 내가 그리는 이미지는 '도장(道場)'이다. 검도에서 되받아치기를 하듯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통해 강한 미래 경영자로 거듭난다. 물론 내가 사범이다. 전성기에 접어든 검도 선수의 근육은 점차 약해진다. 하지만 경험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니까 젊은 검도 선수들의 솜씨를 보며 '근육이 좋군' 하고 읊조리는 위치에 서는 거다. 멋지지 않나.
 물론 내 후임이 될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렇더라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후보군은 여러 명 둘 생각이다. 그 외 인재들도 모두 소중하다. 소프트뱅크가 진정한 웹형 조직으로 자리 잡으려면 각 소조직의 리더가 될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 또한 나와 소프트뱅크의 DNA를 품고 있기를 희망한다. 30년 뒤 소프트뱅크 5000개 자회사의 CEO 중 상당수는 바로 여기서 탄생하지 않을까.
 참고로 내 후계자, 소프트뱅크그룹의 CEO가 될 사람에게는 스톡옵션으로 100억 엔 정도를 줄 생각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20대, 30대 젊은이라면 배포를 크게 가졌으면 한다. '보너스로 한 100억 엔(약 1430억원) 정도 받아볼까?' 하는 정도가 딱 좋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가 생각하는 '기업 지배권' =손정의 회장은 세계적인 인수합병(M&A) 전문가다. 이런 그가 기업 지배권 확보에 집착하지 않는 건 뜻밖의 일이다. 손 회장은 “흔히 기업을 인수할 때 소유 지분을 51%로 하니 마니 하는 얘기들을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51%를 가지면 본업이고 그 이하면 본업이 아닌 건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지배권에 집착하는 건 일방적·이기적 판단이며 상하관계를 고집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머릿속이 봉건사회에서 못 빠져나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소유 지분이 50% 이하라도 파트너십으로 맺어진 조직이라면 문제 없다는 것. 요컨대 “내 안에는 지배권 운운하는 정의 따윈 아예 없다”는 게 그의 공언이다.
◆아카데메이아(Akademeia)=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기원전 400년께 만든 교육기관. 왕·장군 같은 차세대 통치자를 육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주로 철학을 가르쳤다. 진정한 통치자가 되려면 수학·과학을 배우는 이상으로 철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인 메디치가에서 이를 '플라톤 아카데미'란 이름으로 부활시킨 적이 있다. 손정의 회장 또한 이를 본떠 후계자 양성기관인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를 열었다. 고대 아카데메이아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지나지 말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손 회장은 이에 착안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의 문에는 '디지털 정보혁명에 뜻이 없는 자, 이 문을 지나지 말라'는 문구를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17) 60대 목표 ‘회사 물려주기’ 이미 시작 :: 네이버 뉴스

2011년 10월 20일 목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20 00:34 | 최종수정 2011-10-20 10:39 기사원문

소프트뱅크를 알려라 … 100억엔 들여 프로야구단 인수 결단
[중앙일보 이나리] 손정의(왼쪽) 소프트뱅크 회장이 2005년 초 소프트뱅크 호크스 왕정치 당시 감독(오른쪽), 소속 선수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손 회장은 왕 감독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구단 운영의 전권을 맡겼다. [소프트뱅크 제공]
경쟁의 힘은 놀라웠다. 2003년 드디어 일본의 초고속인터넷 요금이 한국보다 싸졌다. '작지만 매운 고추' 소프트뱅크와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가 치열하게 겨룬 결과다. 물론 고비도 있었다. 2004년 2월 가입자 정보 425만 건이 유출됐다. 나는 단호히 대응했다. 범인의 협박전화를 받자마자 경찰에 알렸다. 용의자 체포 뒤 피해 규모를 파악하곤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이 막 본궤도에 오른 참이었다. 임원들은 내가 전면에 나서는 걸 말렸다. 이를 뿌리치고 카메라 앞에 섰다. “보안 시스템이 허술했다. 고객정보 취급 부서가 비정규직 위주로 짜여 있었다”고 곧이곧대로 알렸다. 비난이 쏟아졌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도 토 달기 힘든 과감한 대책들을 잇따라 내놨다. 그중엔 고객정보 담당 정규직 3000명 채용 계획도 있었다. 그대로 시행했음은 물론이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소프트뱅크의 도전으로 일본에 초고속인터넷 세상이 열린 뒤 나는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까 세상이 문제네, 정치가가 잘못이네, 경기가 나쁘네, 그런 푸념 따위 해본들 소용 없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불평은 결국 본인의 그릇을 작게 만드는 거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목숨 던질 각오로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왕정치 … 소년 시절 우상을 만나다

2004년 12월 나는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깜짝 놀랄 만한 뉴스를 발표했다. 다이에 호크스 구단을 인수키로 한 것이다. 호크스 구단의 근거지는 후쿠오카. 내가 태어나고 또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거기서 보낸 어린 시절 나는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내겐 하늘 같은 우상이 있었으니 바로 왕정치(王貞治·오 사다하루) 선수였다. 마침 매물로 나왔을 당시 다이에 호크스 감독은 왕정치였다. 그와 함께 팀워크를 맞춰볼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총 100억 엔에 이르는 딜에 뛰어들 순 없는 일이었다. 사업적 필요도 분명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하기 전까지 소프트뱅크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회사가 아니었다. 야후재팬이 일본 사이버 스페이스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유명한 건 '야후'이지 '소프트뱅크'가 아니었다. 초고속인터넷 브랜드를 소프트뱅크BB가 아닌 야후BB로 지은 연유다. 소프트뱅크가 대중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또한 일본프로야구협회의 새 구단주 영입 심사는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3개월간 기업의 재무상태는 물론 오너의 도덕성, 주요 납품처가 어디인지까지 따진다. 그런 만큼 일본에서 프로야구 구단주가 된다는 건 그만큼 깨끗하고 믿을 만한 기업이란 뜻이다.
“드라마 '겨울연가'처럼 운영하겠다”
2004년 11월 30일 구단 인수를 공식 발표하며 나는 드라마 '겨울연가' 얘기를 꺼냈다. 당시 일본에선 한창 한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 중심에 겨울연가와 '욘사마(연기자 배용준)'가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시절의 왕정치. “겨울연가 제작진은 하루 2~4시간밖에 못 자는 강행군 속에서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팬들의 의견을 매회 반영해 스토리를 다듬었다고 합니다. 저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하겠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발맞춰 구단과 팬 사이에도 양방향 의견 교환이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 것이다. 그 바탕엔 '야구 팬도 고객'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구단주 회의 내용을 언론에 투명하게 알리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음 날 '스포츠닛폰' 신문은 이런 논평을 내놨다. '욘사마는 수일 전 폭풍처럼 일본에 왔다 곧 돌아갔지만 손사마(손정의)의 개혁은 일본 야구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게 틀림없다”고.

인수 한 달 뒤 나는 주주총회를 열고 구단 이름을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바꿨다. 이어 왕정치 감독을 부사장 겸 제너럴 매니저로 승격시켰다. 현역 프로야구 감독으론 일본에서 두 번째로 임원이 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오 간도쿠(왕 감독), 뭐든 당신이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구단 운영의 전권을 넘긴 것이다. 2006년 왕 감독이 위암 투병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냈다.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자발적으로 나서 쾌유를 비는 종이학을 접어 전달했다. 위의 90%를 잘라내고도 그는 초인처럼 다시 일어섰다. 2008년 퇴임할 때까지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대만 국적으로 온갖 차별과 역경을 딛고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신이 된 왕정치. 내가 그에게 품은 마음은 단지 존경심이 아닌 어떤 동류의식일지 모른다. 왕 감독의 피와 땀이 스민 호크스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일본 퍼시픽리그에서 우승했다. 후쿠오카인의 구단 사랑 또한 대단하다. 500만 주민 중 절반이 소프트뱅크 모바일 가입자일 정도다.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2006년 설립한 이동통신기업이다. 이제 일본 역사상 최대 빅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꼴찌' 이통사, 일본 역사상 최대액 인수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인수하던 해 나는 마흔일곱 살이었다. 곧 해가 바뀌었고 50대가 2년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또 한 번의 결전을 준비했다. 일본 '꼴찌' 이동통신사인 보다폰재팬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이동성이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동통신은 피할 수 없는 승부처였다.
2005년 말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500만 명을 넘어서자 나는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이번에도 단번에 전 재산을 던져야 할까 숙고했다. 답은 “그렇다”였다. 당시 소프트뱅크 시가총액은 2조 엔으로 회복돼 있었다. 야후BB 시작 때 2000만 엔까지 떨어졌던 것이 5년여 만에 열 배로 불어난 것이다. 그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로 했다. 11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2006년 3월 인수를 마무리 지었다. 가격은 1조7500억 엔. 당시까지 일본 역사상 최고액의 인수합병 프로젝트였다. 여기저기서 “손정의가 이번엔 정말 미쳤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렇든 말든 나는 직접 새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기로 했다. 다시 백척간두의 사투가 시작됐다.
정리=이나리 기자
◆왕정치(王貞治) =일본 이름 '오 사다하루', 중국 이름 '왕전즈'. 대만 국적을 가진 일본 최고의 홈런왕이다. 1940년 중국계 부친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이란성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났다. 쌍둥이 누나는 출생 1년3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도 몸이 약해 세 살 때까진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학교 입학 뒤 야구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몸담았던 와세다실업고를 고시엔(선발 고교 야구) 정상에 올려놓았다. 최고 몸값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처음 3년간은 성적이 나빠 '왕은 왕인데 3진왕'이란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다. 초인적 노력으로 슬럼프를 극복, 통산 홈런 868개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의 첫 수상자가 된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 요미우리 구단에 이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으로서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소프트뱅크가 호크스를 인수한 뒤엔 손정의 회장의 절대적 신임하에 구단 전체의 경영까지 책임진다. 2006년 위암 발병으로 2008년 결국 현역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여전히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사회 회장이자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 네이버 뉴스

2011년 10월 18일 화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18 00:40 | 최종수정 2011-10-18 10:47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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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인터넷 올인하자, 믿었던 기타오 회사 살림 걱정하며 떠나
[중앙일보 이나리]
2001년 6월 19일, 드디어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보다 훨씬 빠른 서비스를, 그 8분의 1 요금에 제공한다고 선언했다. 야심 찬 출발이었지만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회선과 기지국을 빌려 줘야 할 NTT는 느리고 비협조적이었다. 가입 과정은 복잡했고 고객들의 인식도 낮았다. 서비스 체계 또한 손볼 곳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이 모두를 개선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돈이 없었다. 융자를 얻고 싶었지만 은행들이 상대해 주지 않았다. 증자도 여의치 않았다. 나는 가진 걸 팔기로 했다. 전략사업이라 생각해 온 것들까지 내놨다. 미국 야후 본사 주식도 넘겨 버렸다. 야후BB(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위해 설립한 야후재팬 자회사)를 살리는 게 소프트뱅크가 살 길이요, 내가 꿈꾸는 디지털 정보혁명에 성큼 다가서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산매각 과정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고통과 맞닥뜨렸다. 최고재무책임자(CFO)인 기타오 요시타카(北尾吉孝)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 것이다. 노무라증권 뉴욕지점장 출신인 기타오는 1990년대 초부터 나와 정말 많은 일을 같이 해온 '동지'였다. 수많은 인수합병(M&A) 뒤엔 어김없이 기타오와 그가 이끄는 무적의 재무팀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내게 등을 돌린 것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초고속인터넷에 '몰빵'하느라 회사 재무상태를 심각한 상황으로 모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
# 초고속인터넷 '몰빵'에 회사 뛰쳐나간 CFO
2002년 결국 기타오는 이사회멤버로서의 권한을 이용해 소프트뱅크 본사 일부분을 뚝 떼어내 독립했다. SBI홀딩스란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창업자의 오른팔이자 재무책임자가 회사를 떠나다니, 주가는 떨어지고 뒷소문이 난무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나는 서둘러 새 CFO를 물색했다. 후지은행 부사장으로 은퇴한 65세의 가사이 가즈히코(笠井和彦)를 영입했다. 기존 임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령인 데다 평생을 대형 은행에 몸담았다 명예롭게 퇴임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안정적이고 발도 넓어 기타오가 떠난 후유증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었다.
사업하는 이에게 재무책임자의 의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돈 계산만을 앞세우다가는 도약을 위한 혁신과 모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기타오는 다시 없이 탁월한 인물이지만 내가 무턱대고 그의 의견만 따랐다면 오늘의 소프트뱅크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기타오를 만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신다. 여전히 그의 고견을 고맙게 듣는다. 하지만 판단을 하고 책임을 지고 미래를 여는 건 결국 내 몫이다.
# 사장실 버리고 회의실서 하루 19시간 집무
그렇게 돈 마련하랴, NTT로 정부 부처로 뛰어다니랴 새 사업을 시작한 지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2001년 말 지금까지 실적을 체크하는 8시간 마라톤 회의를 진행했다. 나는 절망했다.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개통된 사용자는 2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업 시작 1년 안에 100만 가입자를 모으겠다고 큰소리 친 나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비서에게 “앞으로 1년간은 그 누구와도 골프 일정을 잡지 마라”고 말했다. 또 "내일부터 내 집무실은 야후BB 추진팀이 있는 4층 회의실이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나는 골프광이다. 집 지하에 세계 10대 골프장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깔아놓은 개인 연습실까지 마련했을 정도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그 연습실을 보고 반한 나머지 시애틀 집에 똑같은 시설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런 내가 1년 동안 골프채를 잡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회의 참석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다음 날부터 나는 정말 손바닥만 한 4층 소회의실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 열다섯 시간, 열아홉 시간…. 내가 누군가에게 “3시에 보지”라고 말하면 그건 꼭 오후 3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새벽 3시에도 회의를 소집했고, 필요하면 언제든 밤을 새웠다. 사무실엔 온통 직원들의 땀 냄새, 며칠 동안 목욕을 못한 나의 시큼한 냄새가 가득했다.
# 승리로 끝난 '오케하자마 전투'
그렇게까지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나에게 초고속인터넷 사업은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였다. 일본 전국시대,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단 2000명의 병사로 수만 대군을 물리친 역사적 전투다. 당시 나와 소프트뱅크의 '적'은 NTT였다. 규모도, 노하우도, 자금도 비교가 안 되는 회사에 맞서 일본에 진정한 인터넷 시대를 열겠다는 일념으로 싸우고 있었다. 또 우리는 자신이 있었다. NTT는 거인이다. 그래서 무겁고, 느리고, 따져야 할 것도 많다. 우리는 몸이 가볍다. 소수 정예 결사대다. 서로를 동지라 믿고 함께 몸을 던진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듯 죽도록 노력한 결과 정말 11개월 만에 우리는 100만 가입자를 유치했다. 그 사이사이 진행된 강렬한 프로모션들도 효과가 컸다. 지하철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가정용 초고속인터넷 셋톱박스를 나눠줬다. 가당치 않게도 “가입 신청 뒤 개설까지 열흘 안에 끝내 드린다”는 '10영업일 집중' 캠페인도 벌였다. '규모의 경제'와 혁신의 모습으로 시장과 소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지려 애썼다.
그렇게 매년 1000억엔 씩 적자를 보는 사업을 4년간 흔들림 없이 진행했다. 경쟁사들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떻게든 소비자들이 야후BB로 가는 걸 막는 데 치중하던 그들이 본격적 서비스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적은 적이 아니었다. 소프트뱅크와 NTT는 넓은 의미에서 소비자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일종의 '친구'가 된 것이다. 2004년 6월 소프트뱅크는 일본텔레콤 인수에 성공했다. 일본텔레콤은 철도선을 따라 개설된 전화 네트워크를 보유한 일본 내 주요 통신사업자다. 덕분에 야후BB의 서비스는 빠르게 안정화돼 갔다. 2005년에는 드디어 흑자 전환이 이루어졌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이베이와 야후재팬의 8년 전쟁=소프트뱅크가 초고속인터넷 분야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데엔 야후재팬의 힘이 컸다. 2000년 초 닷컴버블 붕괴와 시장의 불신 속에서도 야후재팬은 성장을 거듭했다. 1999년 8월 시작한 인터넷경매 사업이 주요 동력이 됐다. 손정의 회장은 애초 일본 진출 예정인 세계 최대 인터넷경매 기업 이베이와 조인트벤처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협상이 여의치 않자 이베이가 일본법인이 설립되기 한 달 전 서둘러 경매사업을 시작했다. 이베이재팬이 본격 영업을 시작할 때쯤엔 이미 야후재팬이 시장을 선점한 뒤였다. 초기 야후재팬은 모든 경매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직원들은 “서버 운영비라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손 회장은 '공짜'를 고집했다. 적자 상황에서도 뚝심을 발휘해 먼저 시장 키우기에 몰두했다. 사업 시작 2년여 뒤에야 조금씩 유료화를 진행했다. 일본 인터넷경매 시장은 이미 야후재팬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이때부턴 이베이재팬이 “수수료 무료!”를 외치며 대대적 반격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베이는 2002년 3월 결국 일본 사이트를 폐쇄하고 철수했다. 2007년 12월, 야후재팬과 이베이는 “새 시장 창출을 위해 제휴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베이가 일본 시장 진출을 위해 택한 카드는 결국 야후재팬이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13 00:03 | 최종수정 2011-10-13 13:23 기사원문

사업 막혀 “분신하겠다”는 내게 … 공무원 “여기선 하지 말게”
[중앙일보 이나리]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미지의 분야에 신규 투자할 때 작게 시작할까, 아니면 크게 밀어붙여야 할까. 열 중 아홉은 '작게 간다'가 답일 것이다. 하지만 한두 번쯤은 큰 승부를 걸어야 한다. 소프트뱅크로 보자면 2001년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할 때가 그랬다. 일본 최초로 전국 규모의, 기존보다 5~10배 빠른 서비스를 선뵈는 일이다. 일본 최대 IT기업 NTT의 텃세를 이겨야 한다. 정부 정책도, 네트워크도 미비하다. 경험은 없고 시장도 아직 활성화돼 있지 않다. 누군가는 “그럴수록 반찬 간 보듯 조심스레 가야 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내 생각은 달랐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그만큼 경쟁자가 적다는 뜻이다. 당장의 시장은 작지만 곧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터이다. 압도적 공세로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나는 폭풍처럼 몰아쳐 해일처럼 집어삼키기로 했다. 손정의가 아니면, 소프트뱅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리라 마음먹었다.
주가 폭락에도 소프트뱅크 주주들은 '일본 최초 초고속인터넷 사업'이란 도전에 박수를 쳐주었다. 2000년 여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사장실을 뛰쳐나가 사흘 만에 100여 명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통신 분야 엔지니어라면 무조건 데려다 놨다. 회사 조례 중 “거기 서 있으니 자네가 이 일을 하게” 하며 차출하기도 했다. 초고속인터넷 전문 통신업체 '야후BB'의 시작이었다(BB는 초고속인터넷을 뜻하는 '브로드밴드'의 약자다).
# 2000년 포브스 선정 '올해의 비즈니스맨'
이때 한국의 도움이 컸다. 나는 “디지털 사업에서 한국이 나의 스승”이란 말을 종종 한다. 당시 한국은 이미 ADSL 방식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전면 도입한 상황이었다. 네트워크 설계부터 장비 구매, 서비스 운용까지 한국 기업과 전문가들로부터 많이 배웠다.

새 사업 준비로 바쁘던 2000년 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나를 '올해의 비즈니스맨'으로 선정했다. 이유는 이랬다. '일본의 경기 회복 지연 속에서도 회사를 의욕적으로 키웠다. 파산한 일본채권은행(현 아조라은행)을 인수해 벤처·중소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융자를 해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규 사업에 힘을 쏟았다.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하려면 NTT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법에 따라 NTT는 신규 업체에 기지국을 임대해주고 네트워크 구축도 대행해줘야 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힘들었고 이런저런 기술적 난관 또한 적지 않았다.
2001년 6월, 드디어 도쿄 시내에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전국 서비스를 하고 싶었다. 임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NTT와의 협상이 어려운 데다 기술적 검증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비스 출시 행사 전날, 나는 야후BB의 모회사이자 서비스 신청 접수를 대행할 야후재팬으로 달려갔다. ADSL 접수 홈페이지 담당자를 직접 찾아 도쿄에서만 서비스 신청을 하게 돼 있는 공지 내용을 전국에서 가능한 것으로 고쳐버렸다. 큰 승부를 위해,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다음 날인 2001년 6월 19일, 출시 행사가 열리는 도쿄 오쿠라호텔 연회장은 1000여 명의 기자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로 붐볐다. 나는 분홍색 셔츠와 흰 바지 차림으로 당당히 무대에 올랐다. 나는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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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T의 IDSN보다 5배 빠른 초고속인터넷을 NTT 요금의 8분의 1인 월 990엔에 서비스하겠습니다. 초기 설치비는 무료, 프로모션 기간 중엔 가정용 모뎀을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엄청난 선언을 했건만 박수 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아랑곳 않고 외쳤다.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소프트뱅크는 곧 파산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 제 방식대로 세상을 봅니다. 이 사업은 성공합니다!”
# 모건스탠리 “아무리 노력해도 적자” 전망

2007년 5월 한 일본 남성이 소프트뱅크 통신 서비스에 대한 광고 이미지로 감싸여 있는 기둥에 기대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2001년 출시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조기 안착시키면서 단번에 일본의 주요 통신업체로 부상했다. NTT와 경쟁하며 초고속인터넷 2위 업체가 됐고, 2004년 6월에는 일본 국토의 80%를 커버하는 유선전화 네트워크사 일본텔레콤을 인수했다. 2006년에는 보다폰재팬 인수로 이동통신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블룸버그]
매스컴의 반응은 과연 비판 일색이었다. 모건스탠리는 “소프트뱅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최소 1억2000만 달러의 영업손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달랐다. 도쿄는 물론 전국 여기저기서 서비스 신청이 빗발쳤다. 두 달여 만에 신청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문제는 네트워크였다. 8월 시작하기로 한 정식 서비스를 9월로 미뤘으나 답을 찾기 어려웠다. 신청자들의 항의가 쏟아져 정상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가장 큰 이유는 NTT의 지극히 비협조적인 자세였다. 나는 총무성(한국의 행정안전부에 해당)으로 달려갔다. 담당 과장을 찾아 책상을 내리치며 피 토하듯 소리쳤다.
“여기서 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내 손으로 불을 지르겠소! 총무성 당신들이 NTT에 똑바로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독점적 네트워크를 무기로 이런 불법 행위를 일삼는 걸 묵인한다면 100만 고객을 볼 면목이 없는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총무성 관료는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게. 제발 여기서만은 일을 벌이지 말아주게!”
나는 더더욱 악에 받쳤다. 그럼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서 죽으면 된단 말인가?
“무슨 소리요? 지금 그게 문제요? 당신들이 책상이나 차지하고 앉아 책임을 회피할 때 우리는 피가 마른단 말이오!”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우고서야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 과장은 지친 목소리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댁들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인허가권이 있지 않나. NTT 사장에게 전화해 공정하게, 법대로 하라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요청했다. 과장은 그대로 했고, 덕분에 간신히 파국을 면할 수 있었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의 '늑대론'=손정의 회장은 벅찬 목표에 도전하는 임직원들에게종종 '늑대론'을 강조한다. “호랑이나 버펄로가 왜 늑대를 두려워하는지 아는가? 늑대는 한 마리로 안 되면 떼로 덤비고, 그래도 안 되면 그룹으로 에워싸 상대가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여러분이 경영하는 회사는 늑대 한 마리가 될 수도, 늑대 떼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덤비다 아예 죽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가 똘똘 뭉쳐 열정과 비전으로 몰아붙이면 언젠가 반드시 승리한다. 가족, 친구, 동료에게 존경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늑대의 정신을 본받아 열정을 다해 일하라.
◆ADSL과 ISDN=2000년 당시 일본 최대 통신사인 NTT는 인터넷 전송방식으로 ISDN을 채택하고 있었다.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4배가량 빨랐다. 소프트뱅크가 이에 맞서 내놓은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가 바로 ADSL이다. 진화한 ADSL은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100배 이상 빠르다. 손정의 회장은 “한국이 1990년대 말 ADSL를 적극 도입해 인터넷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에 큰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 네이버 뉴스

2011년 10월 10일 월요일

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 네이버 뉴스

 

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11 00:10 | 최종수정 2011-10-11 13:42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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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⑩ “배 앞을 보면 멀미 나지만, 몇백㎞ 앞을 보면 바다는 잔잔하다”
[중앙일보 이나리.심서현]
내 40대 초반은 화려했다. 19세 때 계획한 '1조 엔, 2조 엔 규모의 큰 승부를 한다'는 목표를 조기 달성한 셈이었다. 내 포부를 몽상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했던 이들도 그때쯤엔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쳐주었다. 1999년 소프트뱅크는 10여 개 자회사와 120개 이상의 손자회사를 둔 대그룹이 됐다. 야후를 비롯해 클릭 수가 세계 1, 4, 9, 12위인 사이트가 우리 소유였다.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50%가 여기서 발생했다. 매달 130종, 900만 부의 잡지를 찍어냈다. 한창 주가가 오를 땐 재산이 일주일에 1조원씩 불어나곤 했다. 그해 타임과 뉴스위크는 각각 나를 '올해의 아시아 인물'로 뽑았다. 그런데 이듬해 3월 '하늘'이 무너졌다. '닷컴 버블'이 한순간에 꺼져버린 것이다.
주당 1200만 엔(약 1억2000만원)을 넘나들던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다. 내 재산 또한 7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내려앉았다. IT기업가들은 졸지에 범죄자 취급을 당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야후의 제리 양,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창업자의 처지도 비슷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돈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빚이 재산보다 더 많았다. '아차' 싶었지만 또 그럴수록 전투력이 치솟았다.
나는 99년 이미 주주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앞으로는 인터넷 사업에 올인할 거다. 그 외 사업은 모두 정리하겠다. 전화·컴퓨터가 그랬듯 등장 5, 6년 만에 흑자를 내는 신사업은 없다. 우리도 한동안 적자를 각오해야 할 거다.”
# 디지털 정보혁명, 꿈을 버리지 않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랬다지만 2000년의 버블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그렇더라도 인터넷은 결국 부활할 거란 내 믿음엔 변함이 없었다. 외려 기업 가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이때야말로 투자의 적기라 판단했다. 2000년 한 해에만 투자사를 600여 개로 늘렸다. 나는 이전부터 “예측 못할 앞날은 없다”고 믿어왔다. 배를 타고 가며 바로 앞을 보면 멀미가 나지만, 몇백㎞ 앞을 내다보면 바다는 잔잔하고 뱃속도 편안해진다.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아울러 나는 진짜 큰 승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에 초고속 인터넷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일본 인터넷은 속도가 느리고 요금도 매우 비쌌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 사업을 처음 구상한 건 인터넷 주가가 한창 고공행진을 할 때였다. 돈이 없다고 지레 포기하긴 싫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밀어붙이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돈도 없다, 욕도 먹을 대로 먹었다, 겁날 게 뭔가.
계획을 밝히자 주위의 반대가 대단했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한다는 건 곧 일본 최대 IT기업인 NTT에 정면 도전함을 의미했다. 임원들은 여기 덧붙여 “경쟁사 좋을 일을 왜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맞다. 이 사업은 잘되면 나 하나 덕 보는 게 아니다. 야후재팬(소프트뱅크 자회사)의 경쟁자인 다른 인터넷 기업들도 톡톡히 혜택을 보게 돼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배포가 그리 작아서 어찌할 건가. 야후재팬이 잘되면 그만인 거지, 경쟁사 잘되는 것까지 왜 걱정이야? 야후재팬 이용자만 싸게 주자고? 이런 멍청한 놈들!”
# “당신을 믿는다” 주주 눈물에 이 악물어
내 뜻은 정말 그랬다. 소프트뱅크를 왜 만들었나.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싸고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까. 혹자는 “그렇게 애써봤자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누구 덕분이었는지 얼마 안 가 다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꾸했다.
“그럼 어떤가.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필요 없다는 남자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일본 개화기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한 말이다. 그렇듯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인간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주주들을 설득해야 했다. 안 그래도 주가 폭락으로 주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총일,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주주들 앞에 서서 그들의 비난과 타박, 호소를 마음으로 들었다. 시간을 이유로 말을 끊지도 않았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이 지나자 주주들의 표정이 한결 담담해졌다. 한 할머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남편 퇴직금을 몽땅 털어 소프트뱅크 주식을 샀어요. 그게 99% 하락해 1000만 엔이 10만 엔이 돼버렸어요. 절망스러웠는데 오늘 얘기를 듣고 보니 당신 꿈에 투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믿을게요. 부디 열심히 해주세요.”
주주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박수로 나를 격려해주었다. 깊이 감사의 절을 올리며 나는 이를 물었다. '저 마음, 저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결과로 돌려드리겠다'.
정리=이나리 기자
◆닷컴 버블(dot-com bubble)=인터넷을 중심으로 IT 분야에서 1995부터 2000년 초까지 이어진 거품 경제 현상. 2000년 3월 10일 미국 나스닥에서 절정을 이룬 버블(거품)은 그 다음 날부터 붕괴하기 시작해 단 6일 만에 주식가치의 9%가 사라졌다. 이후 2004년까지 살아남은 닷컴기업은 절반에 불과했다.
손정의·저커버그·베조스
WSJ '제2의 잡스' 꼽아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이 '포스트 잡스' 시대를 이끌 혁신가로 지목됐다. 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헨리 포드와 토머스 에디슨의 뒤를 이었듯 혜안을 지닌 또 다른 혁신가가 나타날 것이라며 손 사장을 주요 후보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의 끊임없는 기업가 정신과 도전이 잡스를 닮았다며, 2008년 애플을 설득해 일본의 대형 통신사 NTT도코모를 제치고 소프트뱅크의 아이폰 출시를 따낸 것을 한 예로 들었다. 중국 알리바바의 잭 마 사장도 '아시아의 잡스'로 주목받았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는 걸어온 길이 잡스를 닮은 '리틀 잡스'로 꼽혔다. 그도 잡스처럼 대학을 중퇴하고 창업가의 길을 택했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는 '잡스에 가장 가까우며 애플에 가장 위협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전자제품, 가구뿐 아니라 영화·음악 콘텐트를 유통하는 거대 온라인 업체로 키웠다.
WSJ는 '새로운 잡스'의 깜짝 등장 무대로는 에너지와 건강 진료시스템 분야를 주목했다.
심서현 기자

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 네이버 뉴스

2011년 10월 7일 금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E2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E2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10-06 00:04 | 최종수정 2011-10-06 10:34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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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 200만 달러 야후에 1억 달러 투자 … “일본 거품남” 비아냥 쏟아졌다
[중앙일보 이나리]
1994년 7월 소프트뱅크의 주식 공개 뒤 1년6개월간 나는 미국에서 총 31억 달러 규모의 인수합병(M&A)을 진행했다. 덕분에 세계 최대 IT 전시·출판 그룹의 수장이 됐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이제 겨우 인터넷 세상을 헤쳐갈 보물지도와 나침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95년 가을, 막 인수한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의 에릭 히포 사장에게 주문했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하면 없어서는 안 될 회사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지프 데이비스의 정보력을 동원해 물색해 주세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한 회사를 추천했다. “야후라는 벤처가 있습니다. 창업한 지 반년밖에 안 됐지만 아주 유망해요. 실리콘밸리의 가장 믿을 만한 벤처투자사인 세콰이어캐피털이 이미 200만 달러를 집어넣었답니다.”
야후. 드디어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야후가 있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공동 창업자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 직원 여남은 명이 늦도록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콜라와 피자를 시켜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열 살 때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는 제리 양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나는 곧 투자를 결정했다. 우선 5% 지분을 확보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야후의 대주주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걸림돌이 많았다. 창업자들도, 기존 주주들도 내가 거액을 투자해 대주주로 올라서는 걸 원하지 않았다. 주도권을 내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다음해 1월 다시 제리 양을 만나 간곡하게 말했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선점이 중요합니다. 라이코스, AOL 같은 경쟁사들이 속속 치고 올라오고 있어요. 하루빨리 더 큰 자본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해야 해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또 컴덱스와 지프 데이비스를 통해 전방위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5시간의 지루한 협상 끝에 결국 내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1억 달러를 더 투자해 야후 지분 29%를 추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거래를 완료하기 전 나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넷스케이프의 짐 클락, 시스코의 존 챔버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매닐리 최고경영자(CEO)에게 e-메일을 보냈다. '야후의 대주주가 되려 한다. 하지만 당신들 중 누구라도 적극 반대한다면 포기하겠다. 의견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IT업계 생리를 잘 알았다. 이후의 여러 비즈니스를 위해 이런 거물들과 척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모두 내 투자에 오케이 사인을 보내줬다. 당시 야후는 연 매출 100만 달러에 적자가 200만 달러인 보잘것없는 회사였다. 그런 야후가 불과 한두 해 뒤 세계 인터넷 시장을 석권하리라는 걸 이들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투자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언론들은 나를 '일본에서 온 거품남'이라며 대놓고 비웃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외려 서둘러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했다. 소프트뱅크가 지분 51%, 야후 본사가 49%를 보유한 합작 회사였다. 나는 야후재팬을 아시아 최대 인터넷 포털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야후재팬은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나는 미디어산업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세계 최대 미디어재벌은 호주의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었다. 96년 4월 미국 할리우드에 있는 머독 회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일본에 오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2개월 뒤 정말 머독에게서 “도쿄에서 파티를 열려 하는데 인사말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파티 전날 저녁, 도쿄 긴자의 한 고급 일식당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머독은 일본에서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기회를 낚아챘다.
“나와 함께합시다. 일본엔 강력한 경쟁자가 많아요. 이들과 싸우려면 최소 2000억 엔은 필요합니다. 내가 1000억 엔을 대지요.”
머독은 내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만남이 있은 지 열흘 만에 합병회사를 설립했다. 머독과 나는 417억 엔을 투입해 오분샤 미디어가 보유한 테레비아사히 지분 21%도 매입했다.
그러나 이 거래는 “소프트뱅크가 외국 자본과 손잡고 일본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는 비난에 부닥쳤다. 다음해 나는 지분을 미련 없이 재매각했다. 대신 머독과 함께 설립한 위성방송 J스카이B 운영에 매진했다. 97년엔 또 다른 일본 내 위성방송 퍼펙트TV와 합병을 실현했다. 이로써 나는 유통·인터넷·미디어·전시회에 이르는 주요 디지털 인프라를 손에 쥐게 됐다. MS·시스코와의 합작, 미국 메모리보드 시장의 60%를 장악한 킹스턴테크놀로지 인수 등으로 네트워크와 테크놀로지 인프라 부문에서도 세계적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처럼 숨가쁜 투자와 M&A의 결과는 곧 '돈'으로 나타났다. 96년 5월 30일 야후 본사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됐다. 97년에는 야후재팬이 일본 자스닥에 상장됐다. 두 회사 주가는 그야말로 고공 행진을 계속했다. 99년 말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야후 주식 총액은 1조4586억 엔에 이르렀다. 초기 투자액의 360배였다. 같은 시기 야후재팬 주식도 주당 1050만 엔까지 올랐다. 나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E트레이드·지오시티즈 같은 실리콘밸리 유망 벤처에 잇따라 투자했다. 재산은 점점 불어나 99년 가을에서 2000년 2월까지는 “손정의의 재산이 또 10억 달러 늘었다”는 기사가 세계 언론에 종종 보도됐다. 단 사흘이지만 빌 게이츠를 누르고 IT업계 제1 부자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졌다. 백화점에 가도 '이 건물을 통째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쇼핑할 재미가 나지 않았다. 97년엔 지금껏 살던 임대주택에서 나와 40억 엔을 들여 새로 지은 3층 집으로 이사도 했다. 세계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부와 명성의 절정을 누렸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00년 3월,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가 시작됐다.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고, 나는 사기꾼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세상과의, 나 자신과의 진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야후(Yahoo!)=1995년 4월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이던 제리 양, 데이비드 파일로가 창업한 포털. '야후'는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종족 이름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세계 1위 검색 포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이후 구글에 밀려 현재 미국 검색 시장 점유율은 16% 안팎이다. 소프트뱅크는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기 전인 2001년 야후 주식 대부분을 매각했다. 이 자금으로 일본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 네이버 뉴스

2011년 9월 29일 목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1면의 TOP기사입니다.1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1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15 03:02 | 최종수정 2011-09-16 07:30 기사원문

'일본 IT 신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도전 40년 '뜻을 높게!' 삶과 경영 연재
[중앙일보 이나리]
손정의 회장은 일본 정보통신기술(ICT)계의 료마로 불린다. 19세기 료마가 신사상신문물의 물꼬를 텄듯, 20세기 손 회장은 일본에 디지털 혁명의 불을 지폈다. [중앙포토]
손정의(54) 소프트뱅크 회장은 재일동포 3세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본 4위 부자. 연매출 3조 엔(약 43조원)의 아시아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ICT 업계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로 불린다. 료마는 메이지(明治) 유신의 초석을 놓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자 손 회장의 롤모델이다. 손 회장은 "내 거대한 꿈과 무모한 도전은 모두 그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손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한다. 그는 이를 기념해 직접 쓴 좌우명(志高く)을 보내왔다. '뜻(志)을 높게!'라는 의미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한 남자를 만났다. 내 인생의 좌표가 된 인물, 사카모토 료마다. 어느 날, 과외 선생님이 생소한 작품 한 편을 권해 줬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였다.
정신이 번쩍 났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최하급 무사로 태어났으나 강력한 의지와 비전으로 일본 근대화를 이끈 개혁가이자 탁월한 비즈니스맨이다. 그 삶에 비춰 보니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차별이니 인종이니,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자체가 얼마나 시시한지 깨달았다.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 대충 흘려보내도 되는 건가!
난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게 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뭔가 큰일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 인생을 불사를 만한 일에 이 한 몸 부서져라 빠져들고 싶다 '는 결심만큼은 가슴 깊이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나나 내 가족의 사리사욕이 아닌, 수천만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뭔가 큰일. 금전욕 따위가 아니다. 많은 이가 “그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값진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열여섯 소년이 품은 삶의 포부였다. 좌우명 '뜻을 높게!'는 그렇게 내 인생의 중심이 됐다.
정리=이나리 기자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사카모토 료마=시코쿠의 최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서구식 해군 양성과 무역, 근대정부 수립에 앞장섰다. 31세에 암살당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를 통해 일본의 국민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4면의 TOP기사입니다.4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4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15 03:02 | 최종수정 2011-09-25 18:58 기사원문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 쓰러진 아버지를 뒤로 하고 미국 유학길 올랐다
[중앙일보 이나리]
손정의 회장은 미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재학 당시 학비 마련을 위해 발명에 몰두했다. 왼쪽 사진은 손 회장(가운데)과 그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데 발벗고 나선 공대 연구원들. [소프트뱅크 제공]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직접 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석 달 전, 정말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청와대를 방문했고 기자 간담회도 열었다. 나로서는 한국에서 10년 만에 치른 공식 행사였다. 자리가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물었다.
“좌우명이 '뜻을 높게!'라고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고민이 참 많습니다. 이들이 뜻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꾸물대지 않고 답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라면 마음속에 늘 답을 품고 살아온 때문이다.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어떤 꿈이든 펼칠 수 있지요. 차나 집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꿈을 꾸세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고민할 때 세상을 바꾸고 본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말이다. 한데 난 정말 그런 생각으로 힘껏 살아 왔다. 방향을 확정한 건 열아홉 살 때이지만 씨가 싹튼 건 열여섯 살 적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엔 한 여성이 있다. 내 할머니다.
# 돼지 치는 집 아이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의 소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제공]
할머니는 열네 살 때 일본으로 왔다. 그 나이에 결혼도 했다. 상대는 무려 37세, 내 할아버지다. 대구 태생인 할아버지 역시 열여덟 적에 현해탄을 건넜다. 할머니는 일본 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진흙물로 아이들과 허기를 달래는 처절한 나날이었다. 열네 살이라니, 아직 어린애 아닌가. 그 나이에 친척 하나 없는 타향으로 홀로 시집 온 것이다. 할머니는 조선 국적에 일본말도 서툴렀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우리 아버지도 중학생 때부터 생업에 나섰다.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나 참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쳤다.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다. 1957년 8월이다.
당시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진 때였단다.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지만 집도 있었다. 규슈 사가현의 한인 집성촌에 살았다. 내 호적의 본적지 칸에는 '사가현 도수시 고켄도로 무번지(無番地)'라고 써 있다. 번지가 없으면 적지를 말지 굳이 무번지라고 할 건 또 뭔가. 제 땅이 아니라 국철 선로 옆 공터에다 양철지붕을 올리고 판자를 둘러쳐 살았으니 정식으로 호적을 인정해 줄 수 없었던 거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사형제 중 둘째인 나는 온전히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가 날 예뻐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가 “마사요시, 나갈 시간이데이-” 하면 겨우 서너 살인 나는 얼른 리어카에 올라타 떨어지지 않으려 꽉 매달렸다. 리어카는 까만색이었고 몹시 미끈거렸다. 반으로 자른 드럼통 서너 개가 실려 있었다. 음식 찌꺼기를 담는 통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역전 식당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얻어 와 돼지를 쳤다. 어린 내가 뭘 알겠는가. 난 그저 리어카 타고 나다니는 게 즐겁기만 했다. '아, 수레가 미끈둥대고 시큼한 내가 좀 나는구나. 바퀴가 웅덩이에라도 빠지면 꼼짝없이 미끄러지겠구나. 떨어지면 죽겠다'. 그런 생각으로 할머니가 “꼭 잡으래이-” 하실 때마다 리어카에 몸을 찰싹 붙이곤 했다.
그렇게 좋아한 할머니를 철이 들면서 죽도록 싫어하게 됐다. 할머니는 곧 '김치'였기 때문이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그 사실과 관련된 온갖, 내 삶을 고통으로 채웠던 것들. 숨을 죽여 가며,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어린 시절 손 회장의 일본식 성명)'란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 재일동포임을 감춰야 한다는 사실이 내겐 더더욱 콤플렉스였다. 할머니가 너무 싫었다. 일부러 피해 다녔다.
'차별'에 대해 보다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 건 어린 시절 한때 품은 꿈 때문이었다. 난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미카미 다카시라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영향이 컸다. 꿈을 밝히자마자 아버지는 재일교포로선 교육공무원도 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대뜸 “그럼 귀화시켜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초등학교 교사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넌 그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 다른 쪽으로 소질을 키워 보자”며 나를 달랬다. 그날 이후 며칠간 나는 아버지와 말을 끊었다. 고민 끝에 그 꿈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유의 일, 그보다 좀 가볍거나 혹은 심각한 아픔과 딜레마가 도처에서 출몰했다.
# 아버지 가게 살린 열두 살 고집

꿈 많은 소년이던 나는 그 외에도 화가·시인·정치가·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지금도 가끔 회의 중 화이트보드에 톰과 제리, 스누피 같은 만화 캐릭터들을 그리곤 한다. 남들이 제법 그럴듯하다고들 한다. 정치가가 되고 싶은 건 차별받는 재일교포 3세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 봤음직한 생각이다. 시인이란 직업도 아주 그럴듯하게 여겨졌 다.
그래도 그중 가장 현실적인 꿈은 역시 사업가가 되는 거였다. 나름대로 자질을 보이기도 했다. 열두 살 때 일이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제법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저런 장사에 손을 댔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작은 카페를 열었다. 한데 어린 내 눈에도 도무지 승산이 없어 보였다. 전철역에서 먼 데다 번화가도 아니었다. 커피 원료를 공급하는 회사마저 물건을 대길 꺼렸다. 장사를 시작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내가 꾀를 냈다. 아버지에게 “공짜 쿠폰을 잔뜩 찍어 역 앞에 뿌리자”고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꺼내지도 마라”고 했다. 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0장을 찍어 나눠줬다. 커피공급업자를 초대한 날, 덕분에 카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놀란 공급업자들은 아주 싼값에, 좋은 결제 조건으로 물건을 대주기 시작했다. 초기 비용은 많이 들었으나 얼마 안 가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었다. 가게는 갈수록 번창해 몇 년 뒤 상당히 높은 값에 매각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다. 가족의 위기였다. 한 살 위 형은 장남의 책임을 다하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버지 병원비를 댔다. 집안의 쇠락을 목도하며 내 마음도 급해졌다. 무슨 수를 쓰든 여기서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사카모토 료마를 만난 것이다.
# 사카모토 료마, 가슴에 불을 지피다
마음을 먹었으면 실천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일본 제1의 사업가가 되자.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가족의 어려움을 중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이어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건 말하자면 료마의 '탈번' 같은 행동이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경이적 시청률을 기록한 NHK 드라마 '료마전'에도 이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료마는 탈번을 고민한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실행하지 못한다. 이때 료마의 누이가 말한다.
“료마, 가라! 너는 초야에 묻히고 말 재목이 아니다. 나가서 더 큰 일을 하거라.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는 괜찮다. 떠나라!”
그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이 쏟아져 애를 먹었다. 내가 그토록 하염없이 운 건 그 스토리에 내 지난날이 겹쳐 떠오른 때문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와 소프트뱅크=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디지털 시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힌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도 막역한 사이인,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리더 중 한 명이다. 미국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졸업 뒤 1981년 일본에서 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95년엔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회인 컴덱스를 8억 달러에 인수한다. 이를 인연으로 야후에 투자한 뒤 96년엔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해 인터넷 열풍을 주도했다. 2001년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4년엔 재팬텔레콤(현 소프트뱅크텔레콤), 2006년에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 보다폰KK(현 소프트뱅크 모바일)를 1조7500억 엔(18조원)에 인수해 산업 판도를 뒤집었다.

◆탈번(脫藩)=에도 시대 일본의 무사가 소속된 지역인 번을 떠나는 행위를 말한다. 번주(주군)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돼 본인이 중벌을 받음은 물론 가족에까지 해가 미쳤다.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네이버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중앙일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3면의 TOP기사입니다.3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3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1-09-16 01:34 | 최종수정 2011-09-16 16:18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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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 志高く '뜻을 높게 !'
“미국 큰 땅서 큰 사업가 되겠다” … 고교 자퇴, 퇴로 끊어
[중앙일보 이나리]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가족·친척·선생님 결국 설득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 여름, 나는 한 달간 미국으로 영어 연수를 다녀왔다. 눈이 트였다고 할까. 당시 미국은 정말 크고, 힘이 넘치고,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한마디로 빛이 나는 나라였다. 료마는 말했었다. “바다 건너 외국에 가 보고 싶다. 미국에 가 보고 싶다. 유럽을 보고 싶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어떻게든 가보고 싶어 한 곳에 내가 간 거다. 실제로 보니 얼마나 놀랍던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서 나는 한동안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큰 사업가가 되기로 한 이상 난 그 땅에 가야 했다. 사업을 일으킬 뭔가를 찾아와야 했다.
#“10년 뒤를 위해 … 이 맘은 안 바뀝니다”
예상대로 주변의 반대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다. 가정 경제는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붙였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 아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유학이라고? 네 한 놈 잘되자고 가족을 내팽개치냐?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에요. 국적이니 인종이니, 세상엔 고민만 하는 이들이 널렸지만 난 실제 일본 제일의 사업가가 돼 보이겠어요. 손 마사요시(손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어머니는 매일 눈물바람이었다. 할머니도 울며 불며 매달리셨다.
“가지 마라, 마사요시. 거기가 어디라고…. 한 번 가면 못 돌아온다, 가지 마라!”
어머니에게도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버지는 안 죽는대요.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살 수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 몇 년, 집안을 생각하면 여기서 착실히 공부해야겠지요. 하지만 몇십 년을 생각하면 가족을 위해서도, 또 제 자신이 뭔가 이루기 위해서라도 인생을 바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전 떠날 거예요. 이 맘은 절대 안 바뀝니다.”
학교에도 직접 자퇴서를 냈다. 마침 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참이라 선생님들의 반대가 컸다. 정 갈 거면 휴학을 해라, 자퇴까지 할 게 뭐냐는 설득을 거듭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전 유약한 남잡니다. 미국에 간다지만 영어를 못 해요.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곤란이 닥치면 좌절하고 마음이 흔들릴 텐데, 그때 돌아올 곳이 있으면 바로 포기할지도 몰라요. 퇴로를 끊지 않으면 어찌 고난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 내게 졌다. 가족과 친지들은 십시일반, 최소한의 학비와 생활비를 모아줬다.
#할머니 손 잡고 헐벗은 모국으로
미국행이 결정된 뒤 나는 할머니와 마주앉았다.
“할머니, 절 끔찍이 아끼시는 줄 잘 알면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한 걸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한국에 데려가 주세요. 미국으로 가기 전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조상의 나라,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할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되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더없이 기뻐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한국에 갔다. 2주 정도의 짧은 여행이었다. 조부모님의 고향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대구 인근의 시골 마을이었다. 내놓을 것이라곤 사과밖에 없는 동네. 그마저도 땅이 척박해서인지 알이 조그마했다. 저녁이면 우리는 촛불 침침한 친척집 안방에서 상을 받았다.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차림이었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가져온 헌 옷가지들을 내놨다. 팔꿈치가 닳은 스웨터, 기운 자국이 있는 바지. 그런 것들을 마을 사람들은 한껏 기뻐하며 받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할머니 얼굴에도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이전부터 할머니는 늘 말했었다.
“우리가 이만치나 사는 건 다 다른 사람들 덕분이데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 때에도 도와 주는 분들이 꼭 있었으이까네. 그라이, 절대 남을 원망하믄 안 된데이. 모두 남들 덕분인 기라.”
그런 말씀들, 또 평생 처음 찾은 모국에서 할머니가 보여준 미소와 행동은 내게 큰 영감을 줬다. 뭔가 큰일, 다른 이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도움 받은 상대가 몰라도 좋다. 그저 누군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느끼고 행복할 수 있다면. 당시 깨달음은 내가 몇 년 뒤 '정보기술(IT)로 인간을 행복하게!'라는 소프트뱅크의 창립 이념을 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본 땅에 산다고 왜 성을 바꿔야 하나”
잠시 딴 얘기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종종 “모국 생각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1999년 한국에서 첫 기자간담회를 열었을 때도 한 기자가 비슷한 질문을 했다. “마음의 고향이 어디냐”는 거였다. 나는 짧게 답했다.
“제 마음의 고향은 인터넷입니다.”
상대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비록 일본에 귀화했지만 내가 '손(孫)'이라는 한국 성을 고수하기 위해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아는 듯했다. 당연히 “한국”이라거나 “모국”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으리라. 한데 내가 '손씨'를 고집한 건 꼭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건 내 '자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20년 넘게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단지 내 신체가 속한 국가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그걸 바꿔야 하는가.
난 어디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고, 묻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할아버지의 고향, 내 존재의 뿌리.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 부친의 교육열=손정의 회장의 부친인 손삼헌씨는 교육열이 높았다. 손 회장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대도시인 후쿠오카로 이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손 회장은 그곳에서 명문고 진학률이 높은 조난중학교에 다녔다. 이어 지역 명문인 구루메대학 부설고에 합격해 가족을 기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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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네이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