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6일 월요일

5년간 월급 70만원 중 5만~10만원씩 기부해오다가… 어느 중국집 배달원의 쓸쓸한 죽음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5년간 월급 70만원 중 5만~10만원씩 기부해오다가… 어느 중국집 배달원의 쓸쓸한 죽음

입력 : 2011.09.27 03:06

▲ 중국집 배달원으로 어렵게 살면서도 어린이들을 돕던 김우수씨. /연합뉴스
배달 일하다 교통사고… 연고자 없어 홀로 숨 거둬

지난 23일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던 한 중국집 배달원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서울 강남구의 한 교차로에서 김우수(54)씨가 몰던 오토바이가 유턴을 하던 중 맞은편에서 오던 아반떼 승용차와 충돌했다. 119구조대는 김씨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처음부터 살아날 가망은 없었다. 사고 이틀 뒤인 25일 오후 11시쯤 아무런 연고가 없던 김씨는 병실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26일 어린이재단에 따르면 강남의 한 고시원 쪽방에 살면서 중국집 배달부로 일했던 김씨는 빠듯한 생활비를 쪼개 형편이 더 어려운 어린이들을 후원해 왔다. 월급이 70만원 안팎에 불과했지만, 지난 2006년부터 매달 5만∼10만원씩 5년째 어린이재단을 통해 소년 가장 등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도와왔다. 재단 앞으로 보험금 4000만원의 종신보험을 들었다. 보험금도 아이들을 위해서 쓰라는 뜻이었다.
어린이재단 관계자는 "일곱 살 때 고아원에 버려져 세상을 미워했던 김씨가 홧김에 저지른 방화 사건으로 교도소에 갔다가 출소 직전 어린이재단을 알게돼 줄곧 인연을 이어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생전에 장기기증 의사도 비쳤지만 무연고자인 탓에 가족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장기가 손상돼 기증하지 못했다.
재단 관계자는 "김씨가 최근 형편이 어려워져 매월 내는 후원금을 3만원으로 줄였지만 꼬박꼬박 내왔다"며 "가족이 없어 빈소도 못 차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안타깝다"고 했다. 어린이재단이 장례를 치를 것으로 알려졌다.

5년간 월급 70만원 중 5만~10만원씩 기부해오다가… 어느 중국집 배달원의 쓸쓸한 죽음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한국일보 : 홍미영 구청장 "무너지기 직전의 이웃 놔두고 나 혼자 편히 잠들 순 없었죠"

 

무너지기 직전의 이웃 놔두고 나 혼자 편히 잠들 순 없었죠"

[서화숙의 만남] ■ 빈민촌으로 이사 간 홍미영 인천 부평구청장
대학 때 뚝방촌 보고 충격… 빈민운동 뛰어들어
생활도 함께… 주민 더 잘 사는 행정이 목표죠

입력시간 : 2011.09.25 21:19:47
수정시간 : 2011.09.26 10:21:54
  • "가난하지만 부지런히 살려는 사람들, 무너져가는 집 앞에도 화분을 놓고 고추 파를 심고 꽃을 가꾸려는 이들에게 살 만한 집을 지어주세요."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인천시 부평구. 인구 57만명으로 전국에서 대구 달서구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자치구인 이곳은 가난한 사람이 많기로는 첫손에 꼽힌다. 부평구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일 십정동 빈민촌에 구청장이 살고 있다. 홍미영(56)구청장은 가족과 함께 살던 삼산동 아파트를 버리고 지난달 22일부터 방 두 칸(그 중 한 칸은 부엌을 겸한다), 화장실 하나인 십정동의 해님공부방에 얻어 살고 있다. 낮에는 공부방이라 밤 9시에 퇴근하고도 동네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어간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2009년에 이곳을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하고도 삽질은커녕 줄자 한 번 긋지 않는 사이에 올 여름 폭우로 집이 무너지는 등 동네 주민들이 위기에 처한 것이 뻔히 보이는데 구청장 혼자서 마음 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고 했다. 이곳은 '이대 나온 여자'인 홍 구청장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빈민운동을 새로 시작한 곳이자 1991년 초대 지자체 선거에서 그를 구의원으로 뽑아준 이웃들이 있는 곳이다. 그는 구의원에서 시의원을 거쳐 비례대표 국회의원(17대 열린우리당)을 지낸 후 지난해 7월에 부평구청장으로 부임했다. 벼룩이 처음 온 기자를 마구 물어대는 방 한 켠에서 가난한 동네를 살리겠다는 그의 의지를 들었다.
    _ 뭘 이사까지 하셨어요?
    "이곳은 40여년 전 인근 지역 개발로 쫓겨난 철거민들이 국공유지 야산에 무허가 주택을 지으면서 생겨난 마을입니다. 무너지기 직전의 집들이 많아서 당연히 주거환경개선사업의 우선 순위에 올라야 하는 곳입니다. 구청에서는 2005년부터 연차적으로 도시기반사업용 예산 165억원(국비 포함)을 LH에 지급했고요. 그런데도 수익성이 없다고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하지 않는 거예요. 지난 7월말에 집중호우로 산비탈에 있던 집 한 채가 무너져 내렸어요. 구청이 미리 알고 주민을 대피시키고 안전망을 세운 덕분에 인명사고는 나지 않았어요. 저는 그런 일이 터지면 LH에서 서둘러 해결책을 마련해줄 줄 알았더니 아무 반응이 없어요. 인천시조차 아직 주거환경개선지구 지정도 안된 다른 지역에 신경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내가 이 동네를 지켜주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겠구나 싶어서 짐 싸들고 들어왔어요. LH 이지송 사장에게 '영세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노후ㆍ불량주택을 신속히 개선하는 것이 이익 창출의 사업성보다는 우선하는 업무가 아니냐'고 현장 확인이라도 해달라고 지난 8일 문서를 보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어요. 원래 이런 공사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서민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일인데 엉뚱한 데 돈을 쓰고는 적자가 났다고 할 일을 외면하니 말이 되나요?"
    _ 언제까지 계실 예정인가요?
    "구청장 업무에 지장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무반응이라면 겨울까지 나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고 있어요."
    _ 원래 이 동네서 사셨다고요.
    "인천 만석동에서 빈민운동을 하다가 1986년에 이곳으로 왔어요. 1995년까지 살면서 애들도 다 이 동네 초등학교 중학교 다녔고요. 이 동네 분들은 다 제 피붙이 같은 분들이에요."(홍 구청장과 동네를 한바퀴 도는 동안 주민들은 그를 반겨 맞더니 동네 이웃끼리 그러듯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수다를 나누기도 했다)
    _ 원래는 서울의 부잣집 딸이었네요.
    "아버지가 자동차 배선 부품을 만드는 회사를 했어요. 집(회현동)에서 중학교(경기여중)까지 자가용 타고 다니고 피아노 치기 싫어서 도망 다니는 정도가 불만인 그런 시절을 살았어요. 대학(이화여대 사회학과)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세상 사람들이 다 나처럼 부모 덕에 웬만큼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효재 교수님이 지도하는 서클에서 중랑천 뚝방촌으로 활동을 나갔어요. 화장실도 공중화장실에 단칸방인데 애들은 코찔찔이에 맨발로 돌아다니고 아버지는 술마시고 누워있고 엄마들은 일하러 나가고. 엄청 충격을 받았지요. 그때부터 빈민지역 다니고 방학이면 농촌활동하고 사회구조에 대한 이론 공부하고. 집안의 통제를 벗어나 활동을 하려고 1978년 2월에 졸업하는 날로 학생운동 하던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기혼 딱지가 붙으니까 회사 입사도 안되고 모든 것이 다 스톱이에요. 시댁이라는 새로운 관계도 생기고 애들도 잇달아 태어나고. 1983년에 여성유권자연맹에 들어간 대학 선배(신혜수씨) 덕분에 겨우 얻은 일거리가 구로동 뚝방공단의 기혼여성 노동실태조사였어요. 그곳에서 또한번 충격을 받았어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모순이 빈민여성의 삶에 있구나. 그들은 아이를 돌보려고 아이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을 일터로 선택해요. 일하면서 점심값이라도 받으면 그걸 들고 집으로 뛰어와서 애들한테 뭐라도 먹이고 또 뛰어가고 하는 식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사는 이유는 자식들은 나 같은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인데 정작 아이들은 버려진 채로 있으니. 내가 기껏 밤에 이야기 듣고 볼펜 하나 드리고 고맙다고 하는 게 위선적이라 느껴졌어요."
    _ 그래서 빈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나요?
    "세상이 달라지려면 여자들이 겪는 이중삼중의 문제부터 바뀌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했어요.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았는데 당시 여성단체 예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공부방 정도였어요. 서울에서는 이미 대부분의 지역에 빈민활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평우회 회원 하나가 추천한 인천 만석동으로 갔습니다. 작은 부두가 있고 동일방직과 대성목재 가운데 있는 동네인데 월남한 분들과 공장으로 온 이농인구, 갯벌에서 동죽이나 굴을 캐는 어민, 막노동 일꾼이 섞인 동네였어요."
    _ 유복하게 자라서 현장을 보면 오히려 겁을 먹게 되었을 텐데요.
    "제가 대학시절 활동을 하면서 한국 사회의 파이는 일정하다, 내가 받은 파이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파이가 아니라 부모 덕에 받은 파이고 우리 아버지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파이다, 주변 사회에서 덜 가진 사람이 받아야 할 파이다, 그런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런데 만석동에 살아보니까 그때까지 내가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만석동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웠어요."
    _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람들이 덜 받아요.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도 덜 받고 내줘요. 그러면서도 아글바글하지 않고."
    _ 딸을 키우는 게 무섭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애들은 정말 행복했고요. 저도 정말 거기서 인간이 되었어요. 저는 거기서도 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어요. 사람들이 끊임없이 희망을 가지려는 것을 보았어요. 사회가 당신들을 이렇게 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희망을 주는 사람과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 나누는 것을 봤어요. 여기 골목에 화분들 보셨지요? 이렇게 집이 무너져가도 스티로폼 상자라도 모아서 화분 만들고 고추 파 방울토마토 심고 꽃 가꿔요. 정말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려는 분들이에요. 공부방 할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김치해주고. '내 새끼 네가 봐주니까 니네 식구는 내가 챙겨준다' 이런 거지요. 저는 일이 조금 힘들면 게으름 피우면서 어디 나가면 홍선생님이라고 불리고 빈입으로 다녀도 굶지도 않고 여기저기서 어려운 일 한다고 좋은 이야기나 듣고. 그러니 이 분들이 덜 받으니까 나머지를 나눠가지는 거라는 걸 깊이 깨달았어요."
    _ 만석동에서 왜 십정동으로 옮겨왔나요.
    "만석동이 철거되면서 이리로 왔어요. 이제 대학졸업자의 머리가 아니라 이 분들한테 배운 지혜를 가지고 진짜 한번 해보겠다. 만석동에서는 '홍선생'이었고, 그 분들 답답하고 어려운 것을 이해했다는 고마운 존재였지만 여기서는 정말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낄 수 있어야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동력이 얼마만큼 나오고 꺾이는지를 알 것 같았어요. 공부방은 후배들한테 맡기고 저는 그냥 일일학습지를 돌리는 아줌마가 됐어요. 새벽에야 수돗물이 나오니까 그 물 나오기 기다리다가 잠깐 잠들어버리면 물이 끊어져요, 그러면 빨래도 못하고. 제일 힘든 건 쓰레기 버리는 일이에요. 쓰레기차가 아침에 오는데 그 시간을 놓치면 쓰레기를 못 버려요. 쓰레기차 지나가는 종소리가 들리면 애들 밥 주다가도 연탄재 몇 개 들어간 함지박을 이고 비탈길을 뛰어내려와야 하는데, 몇 분 늦었다고 그냥 가요. 그냥 가기만 하나? 침 뱉고 가요. 제가 그러면서 또 한번의 껍질을 벗었어요. 그런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정말 절실했어요."
    _ 그래서 구의원으로 나갔나요?
    "1년 정도 지나니까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보미 엄마가 공부방 선생들 대장이래, 이런 소리가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주민들 일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는데 3월 15일이 후보등록인데 3월 초순까지도 지역주민들 가운데 나갈 사람을 찾지 못해서 결국 제가 등떠밀려 나갔어요."
    _ 그런 진짜 빈민으로서의 삶이 구청장의 행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부평구의 시정목표를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세상'이라고 잡았어요. 구청 내부로는 일단 줄 잘 서면 출세한다, 이런 관행을 없앴어요. 일만 잘해라,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해라, 영혼이 있는 공무원이 되자, 그런 걸 강조해요. 공무원이 박봉인데 호의호식하고 자녀들에게 유산 물려주고 이러기는 힘들잖아요. 하지만 행정을 잘해서 세상이 보다 더 좋아지게 하는 것은 공무원으로 할 수 있잖아요. 구청장의 위세만 내세우는 토건사업은 절대 안한다, 주민들이 더 잘사는 행정을 한다, 이걸 제일 중요한 목표로 삼았어요. 그런데 이미 이전 구청장 때 너무 많은 토건사업을 벌여놓아서 그게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어요."
    _ 구의 규모에 비해 부평아트센터도 엄청 크던데요.
    "그게 연 운영비만 해도 70억원이에요. 연 40일밖에 안 쓰는 민방위교육장이 150억짜리 공사, 그 옆에 청소년수련관이라고 100억짜리, 기후변화체험관 50억짜리, 그 옆에 노인복지관이 또 100억짜리예요. 도서관도 30억짜리, 20억짜리, 10억짜리 여섯 개를 벌려놓았어요. 게다가 구 자체 예산으로 지어야 하는 동사무소까지 80억짜리 하고 40억짜리 두 개를 지었어요."
    _ 다시 국회의원을 하고 싶겠어요.
    "하지만 구의원 국회의원이 말해도 행정자치단체의 장이 안 들으면 소용없어요. 그런 점에서 정책을 실행해나간다는 보람이 있어요."
    _ 그래서 십정동은 어떻게 만들고 싶으세요?
    "십정동 마을에는 해님공부방과 열우물공동체 같은 것부터 아이들 공부방뿐 아니라 자수정이라고 '자주 만나 수다로 정들자'는 아주머니 모임도 있고, 공부방 선생으로 온 대학생이 주민과 결혼해서 정착도 하고, 공부방에서 배운 학생이 이제 교사가 되고, 또 공부방 교사로 자원봉사하던 이가 법무사가 되어서 전문적인 봉사를 하고, 할머니들 뽕작그룹도 있고 주부연극교실도 있고 주민밴드도 있어요. 일단 LH의 주거개선사업이 아파트를 짓고 주민들 분양분과 일반 분양분을 나누는 방식의 효율 중심으로 이뤄지더라도 그 가운데 이런 지역공동체 특성을 살리는 단체들을 어떻게 넣을 것인가를 고민해야지요."
    _ 이 아름다운 동네가 완전히 갈아엎어지고 결국은 아파트촌이 된다는 것도 참 안타깝고 아까운 일이네요.
    "그렇지요. 십정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열우물이 있어서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동네겠어요. 동네를 살리면서 공동체가 살아나는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정말 저도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일보 : 홍미영 구청장 "무너지기 직전의 이웃 놔두고 나 혼자 편히 잠들 순 없었죠"

    2011년 9월 23일 금요일

    "이런 의사 키워주세요"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이런 의사 키워주세요"

    입력 : 2011.09.23 19:02 / 수정 : 2011.09.24 00:16

    ▲ /연합뉴스
    美 80대 부부, 따뜻한 진료 받고 500억원 기부

    의사의 정성스러운 진료에 감동한 미국의 80대 부부가 그 병원에 "훌륭한 의사가 많이 나오기 바란다"며 4200만달러(약 490억원)를 기부했다.
    시카고대학병원에서 진료받아온 매튜(85)와 캐롤린(82·사진 왼쪽) 벅스봄 부부는 내과의 마크 시글러(70·오른쪽) 박사의 따뜻한 진료에 감동해 거액을 기부했다. 이 병원 설립 이래 최대 금액이다.
    캐롤린 벅스봄은 "남편이 큰 수술을 받게 됐을 때 시글러 박사는 적절한 수술진을 찾기 위해 진심으로 애썼고 남편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등 정성을 다했다"면서 "환자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집에까지 전화 걸어 이야기를 들어주는 훌륭한 의사"라고 말했다.
    남편 매튜 벅스봄은 미국에서 둘째로 큰 쇼핑몰 체인을 거느린 부동산투자회사 설립자다. 그는 기부금을 전하면서 "시글러 박사를 모델로 의료진과 의대생을 교육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의료윤리학자이기도 한 시글러 박사는 "의사가 질병에만 관심 두고 환자를 소외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좋은 진료는 환자와 인간적 관계를 맺을 때 나온다"면서 "그래야 치료 효과도 놀랄 만큼 커진다"고 했다. 시카고대학병원은 이 기부금으로 의사·환자의 소통을 위한 교육센터 '최고의 진료를 위한 벅스봄 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을 시글러 박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런 의사 키워주세요"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9월 22일 목요일

    [오늘의 세상] 파브르를 꿈꾼 소년, 내신 8등급에도 延大 수시門 뚫었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오늘의 세상] 파브르를 꿈꾼 소년, 내신 8등급에도 延大 수시門 뚫었다

    입력 : 2011.09.23 03:10

    [시스템생물학과 합격한 춘천고 차석호군]
    곤충에 빠진 소년 - 틈나면 산에서 새벽까지 채집
    잘못 알려진 곤충 6종 찾아내 생물연구학센터에 신고하기도
    교수들이 놀라다 - 시신경 이상으로 성적 저조, 수학 능력 의심한 교수들
    면접본 뒤 "천재… 꼭 뽑자"… 작년 논문, 학부생 수준 넘어서
    "지금은 딱정벌레목(目) 하늘솟과(科) 곤충들이 궁금해요. '기주식물(기생동물의 숙주가 되는 식물)'이 종마다 다른데 생물학적으로 드문 경우거든요."
    강원도 춘천고에 다니는 차석호(17)군은 '곤충 박사'로 통한다. 고등학생으로는 유일하게 포스텍(POSTECH)의 국가지정 생물연구학정보센터(Bric·브릭)에서 외부 동정(同定·생물의 분류학상 소속·명칭을 정하는 것)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4월 브릭의 홈페이지에서 잘못 동정된 곤충을 알려주면 기념품으로 티셔츠를 준다는 공지를 보고 6종(種)이나 찾아내 알려준 것이 계기였다.
    ▲ 춘천고 차석호(17)군은 알아주는 곤충박사다. 걸그룹 소녀시대는 잘 모르지만 어려운 곤충의 학명은 줄줄 꿰고 있다. 내신 8등급이면서도 곤충 분류학 지식으로‘창의 인재 전형’을 통해 연세대에 합격한 차군은“생물학 전반을 폭넓게 공부해 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그의 고교 내신은 전체 9등급 중 최하위 수준인 8등급. 차군의 내신 성적이 바닥인 것은 '안구진탕(nystagmus)'이라는 선천적인 안과 질환 때문이다. 시신경에 이상이 생겨 사물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거나 겹쳐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곤충에 대해서는 전문가나 다름없다. 그는 지난 7일 연세대 수시 모집 창의인재 전형으로 시스템생물학과에 합격했다. 올해 처음 시행된 이 전형은 수능과 내신성적 없이 추천서와 본인의 창의성을 입증하는 자료만으로 선발했는데 경쟁률이 60.6대1에 달했다. 내신 열등생인 그가 한국의 파브르('곤충기'의 저자 앙리 파브르)를 꿈꾸는 특별한 학생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알아본 것이다.
    연세대 입학처장 김동노 교수는 "내신 8등급으로 연세대에 들어온 경우는 차군이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연세대, "곤충박사 모셔라"
    22일 춘천고에서 만난 차군은 어눌한 말투에 눈을 내리깔고 말하는 버릇 때문에 수줍은 인상이었다. 또래들이 열광하는 '소녀시대' 멤버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친구들이 소녀시대에 열광할 시간에 산에 가서 곤충들을 보기 때문이다.
    연세대 전형 때 면접관들은 차군이 지난해 쓴 논문을 보고 감탄했다. 딱정벌레목의 산맴돌이거저리라는 곤충의 배(背) 끝마디가 숟가락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것이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쳤는지를 규명해 낸 것이다. 차군은 복잡한 실험과 다양한 가설을 거쳐 산맴돌이거저리의 배 끝마디가 다른 곤충의 위협을 막기 위한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교수들은 차군의 논문을 보고 "이미 학부생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평했다. 연세대 입학처 관계자는 "처음엔 차군의 능력을 의심했던 교수들이 '이 학생은 천재다. 반드시 뽑아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차군의 담임인 김기원(44) 교사는 "솔직히 이 아이가 쓰는 전문적인 곤충 관련 글은 거의 이해를 못할 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했다.
    곤충이 궁금한 초등학생, 생물학자의 길로 들어서다
    차군은 강원도 홍천 근처에 살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곤충에 빠졌다. 곤충의 모든 것이 신기해서 시간만 나면 산으로 곤충 채집을 나섰다고 한다.
    "고교 진학 후에는 밤에도 산에 가요. 곤충의 주광성(走光性·빛의 자극에 반응하는 성질)을 관찰할 수 있거든요." 새벽 3시가 넘도록 채집을 하는 건 보통이라고 했다. 한번은 새벽에 채집하다가 멧돼지 소리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친 적도 있었다.
    차군은 작년 9월 강원도 춘천시 대룡산 해발 900m에서 국내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딱정벌레목 밑빠진벌레과의 파라메토피아(parametopia)종으로 추정되는 곤충을 발견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이 종의 전공자가 없어서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농식품부에서 일하는 앤드루 클라인(Cline) 박사에게 메일을 보내 조언을 받았다.
    차군은 "클라인 박사로부터 이 종이 파라메토피아로 보인다는 의견을 받았는데, 아직 국내에서 유전자 확인 작업이 어려워 아쉽다"고 말했다.
    벌써 대학 생물 교과서를 읽고 있는 차군은 "언제가 파브르 곤충기처럼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고전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그는 "나처럼 하나의 재능만 가진 사람도 충분히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의 세상] 파브르를 꿈꾼 소년, 내신 8등급에도 延大 수시門 뚫었다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⑤ “오를 산을 정하라, 인생의 반이 결정된다” - 중앙일보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⑤ “오를 산을 정하라, 인생의 반이 결정된다”
    [중앙일보] 입력 2011.09.22 00:01 / 수정 2011.09.22 00:01
    직원 2명 앞에서 “30년 뒤 1조엔 매출” 연설했더니 … 두달 뒤 “미친 놈”하며 떠나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 손정의 회장이 임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직원 두 명으로 시작한 소프트뱅크는 한때 부도위기까지 몰렸다가 손 회장의 도박과 같은 마케팅에 힘입어 기사회생했다. 첫 고객을 잡은 지 한 달 만에 직원수가 15명으로 늘었고, 또 한 달 뒤에는 100명 규모의 회사가 됐다. 1년 뒤 소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매스컴은 손 회장에게 ‘괴물 실업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소프트뱅크 제공]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1980년 3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현지에서 운영하던 소프트웨어(SW) 업체 ‘유니슨 월드’는 친구이자 동업자인 홍 루에게 넘겼다. 그는 훗날 중국의 대표적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UT스타컴을 창업했다. 귀국 뒤 1년6개월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으리라. 친척들은 수군거렸다. “마사요시가 미국에서 뭘 배워왔다는 거야?” 정작 내 머리와 가슴속엔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 부모가 시켜서, 갑작스러운 인연으로, 돈이나 벌겠다는 욕심에 뭔가를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길을 한번 정하면 바꾸기 힘들다. 우왕좌왕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오르고 싶은 산을 정하라. 그러면 인생의 반은 결정된다’. 이 한 생각을 돛대 삼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 꿈은 사업가다.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뭘까. 남이 안 하는 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최고가 될 수 있는 일. 또한 절로 열의가 샘솟으며,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고, 기술 혁신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야여야 했다. 결론은 ‘디지털 정보혁명’. 그것으로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케 해 인류에 공헌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 스물세 살 청년이 마침내 찾은 큰 뜻이었다.
    # 디지털혁명의 도구, 소프트웨어 유통

    누군가는 허황되다고 비웃을지 모른다. 물론 작은 목표부터 차근차근 이뤄가는 것도 좋다. 세상 99%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그리고 작은 성공을 거둔다. 하나 정말 큰 꿈,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다면 접근방식부터 달라야 한다. 먼저 큰 비전을 세운 뒤 그 실현을 위한 시간표를 미래에서부터 현재를 향해 거꾸로 돌린다. 오늘 아닌 내일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대기업 못지않은 배포로 승부하며, 그에 걸맞은 투명성과 경영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 어쨌거나 난 자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혁명의 도구’로 택한 건 SW 유통. 치밀한 분석의 결과였다.
    창업 전 나는 40여 개의 아이템을 검토했다. 80년대 초 일본은 PC 대중화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PC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우수한 SW가 있어야 한다. 미래는 SW 세상이 될 게 분명했다. 직접 SW 개발에 뛰어들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승률이 너무 낮았다. 운영체제(OS) 분야는 세계 표준을 주도하는 미국 기업이 선점해 버렸다. 남은 건 응용 SW 분야인데, 이건 마치 모든 신곡이 히트칠 수 없듯 톱10 안에 들어가는 것만 대박을 치는 구조였다. 그래서 난 개별 상품 대신 인프라를 택하기로 했다. 이익은 적을지 모르나 생명력은 확실히 길다. 또한 압도적 지위를 획득할 경우 업계 성장에 정비례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승률 70%. 나는 100여 개의 경영 포인트를 검토한 뒤 그렇게 결론 내렸다.
    # 선풍기는 도는데, 직원은 둘뿐인데

    노다 가즈오

    81년 9월, 고향 가까운 후쿠오카현 오도시로시에서 소프트뱅크를 창업했다. 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건물 2층. 직원 두 명을 구했다. 첫날 그들을 앞에 놓고 귤 상자에 올라 한 시간가량 열변을 토했다. 곁에선 낡은 선풍기가 윙윙 돌았다.
    “우리 회사는 세계 디지털 혁명을 이끌 거다. 30년 후엔 두부가게에서 두부를 세듯 매출을 1조(엔), 2조(엔) 단위로 세게 될 거다. 사업을 하겠다는 자가 1000억이니 5000억이니 하는 걸 숫자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두부가게 운운한 건 일본에서는 두부 한 모를 ‘1조’라 발음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둘 다 완전히 기가 질린 듯했다. 그들은 결국 두 달을 못 채우고 나가버렸다. “저 인간 제정신이야?” “미친 놈!” 하면서.
    그렇게 파리만 날리고 있을 때 샤프사의 사사키 다다시 전무가 소중한 조언을 해주었다. “SW 사업은 정보 밀도가 높은 곳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3년 전 내가 미국에서 발명한 다국어 번역기 기술을 거액에 선뜻 구매해 준 이였다. 나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도쿄 고지마치 4번가에 있는 ㈜경영종합연구소의 방 한 칸을 빌렸다. 이어 연구소의 노다 가즈오 회장을 찾았다. 명함을 건네며 “손 마사요시입니다. 재일 한국인입니다”하고 인사했다. 나는 미국 유학 이후 ‘야스모토’란 일본식 가짜 성(姓) 대신 진짜 성을 쓰기 시작한 터였다. 노다 회장은 내 구상을 듣더니 “장래성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세계적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이론을 일본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런 인물이 격려해 주다니, 뛸 듯이 기뻤다. 이후 그는 사사키 전무와 함께 경험 없고 인맥 부족한 나의 귀한 멘토가 돼주었다.
    # ‘괴물 실업가’ 태어나다
    도쿄로 옮긴 얼마 뒤 나는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졌다. 창업자금 1000만 엔 중 800만 엔을 털어 전자전시회인 ‘일렉트로닉쇼’에 참가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뜯어말렸다. 회사라곤 달랑 이름뿐, 제품도 실적도 없었다. 난 못 들은 척 행사장에서 가장 큰 부스를 빌렸다. 거길 화려하게 꾸민 뒤 부스 없는 SW업체들에 무료로 대여했다. 대중의 눈길을 끌면 광고 효과가 크리라 봤다. ‘PC 시대엔 SW가 중요하다, 그 SW를 나 손정의가 판매한다’는 사실을 열심히 알렸다. 흔한 카탈로그 대신 아예 잡지를 만들어 돌렸다. 전시회가 끝나자 회사는 파산 지경이 됐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조신전기입니다. 일렉트로닉쇼에서 귀사의 부스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오사카에 일본 최대 컴퓨터 매장을 내는데 거기에서 쓸 SW를 납품해 주시겠습니까.”
    일면식도 없는 회사였다. 유통업은 신뢰가 중요한데, 거래 실적 하나 없는 우리를 믿고 연락해 준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물건을 떼 오려면 큰돈이 필요하다. 소프트뱅크는 당시 무일푼이었다. 나는 조신전기 사장을 찾아갔다. 내 비전과 아이디어를 설명하며 선수금을 청했다. 그 의지, 열정이 통한 걸까. 상대는 쾌히 지원을 약속했다. 사사키 전무의 도움도 컸다. 그가 집까지 담보로 넣어가며 보증을 선 덕분에 다이이치칸교은행으로부터 무려 1억 엔을 빌릴 수 있었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갔다. 5000만 엔을 들여 일본 최대 SW업체이던 허드슨과 독점 판매 계약을 맺은 것이다. 유통의 힘은 제품 수급력에서 나온다. 당장은 5000만 엔이 큰돈이지만 그 투자로 인해 더 큰 기회가 올 것을 확신했다.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첫 매출을 올린 지 1년 만에 소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 기업이 됐다. 83년 ‘주간 아사히’는 나를 ‘괴물 실업가’로 소개했다. ‘컴퓨터로 거부를 쌓은 신데렐라 보이’. 난 신이 났다. 곧 닥쳐올 불행은 꿈에도 모른 채.
    정리=이나리 기자

    ◆100번의 노크(100 Knocks)=손정의 회장이 창업 전부터 구상한 경영 진단 시스템. 특정 사업에 대한 100가지 지표를 그래프화해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했다. 검토 항목을 1만 개까지 늘릴 수 있다. “무엇이든 골이 빠개지게 생각한다”는 손 회장의 치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⑤ “오를 산을 정하라, 인생의 반이 결정된다” - 중앙일보 뉴스

    2011년 9월 20일 화요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 중앙일보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중앙일보] 입력 2011.09.15 03:00 / 수정 2011.09.16 07:28
    ‘일본 IT 신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도전 40년 ‘뜻을 높게!’ 삶과 경영 연재

    손정의 회장은 일본 정보통신기술(ICT)계의 료마로 불린다. 19세기 료마가 신사상신문물의 물꼬를 텄듯, 20세기 손 회장은 일본에 디지털 혁명의 불을 지폈다. [중앙포토]

    손정의(54) 소프트뱅크 회장은 재일동포 3세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본 4위 부자. 연매출 3조 엔(약 43조원)의 아시아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ICT 업계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로 불린다. 료마는 메이지(明治) 유신의 초석을 놓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자 손 회장의 롤모델이다. 손 회장은 "내 거대한 꿈과 무모한 도전은 모두 그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손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한다. 그는 이를 기념해 직접 쓴 좌우명(志高く)을 보내왔다. ‘뜻(志)을 높게!’라는 의미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한 남자를 만났다. 내 인생의 좌표가 된 인물, 사카모토 료마다. 어느 날, 과외 선생님이 생소한 작품 한 편을 권해 줬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였다.
    정신이 번쩍 났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최하급 무사로 태어났으나 강력한 의지와 비전으로 일본 근대화를 이끈 개혁가이자 탁월한 비즈니스맨이다. 그 삶에 비춰 보니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차별이니 인종이니,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자체가 얼마나 시시한지 깨달았다.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 대충 흘려보내도 되는 건가!
    난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게 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뭔가 큰일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 인생을 불사를 만한 일에 이 한 몸 부서져라 빠져들고 싶다 ’는 결심만큼은 가슴 깊이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나나 내 가족의 사리사욕이 아닌, 수천만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뭔가 큰일. 금전욕 따위가 아니다. 많은 이가 “그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값진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열여섯 소년이 품은 삶의 포부였다. 좌우명 ‘뜻을 높게!’는 그렇게 내 인생의 중심이 됐다.
    정리=이나리 기자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사카모토 료마=시코쿠의 최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서구식 해군 양성과 무역, 근대정부 수립에 앞장섰다. 31세에 암살당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를 통해 일본의 국민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 중앙일보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 중앙일보 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중앙일보] 입력 2011.09.15 03:00 / 수정 2011.09.16 07:30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 쓰러진 아버지를 뒤로 하고 미국 유학길 올랐다

    손정의 회장은 미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재학 당시 학비 마련을 위해 발명에 몰두했다. 왼쪽 사진은 손 회장(가운데)과 그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데 발벗고 나선 공대 연구원들. [소프트뱅크 제공]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직접 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석 달 전, 정말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청와대를 방문했고 기자 간담회도 열었다. 나로서는 한국에서 10년 만에 치른 공식 행사였다. 자리가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물었다.
    “좌우명이 ‘뜻을 높게!’라고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고민이 참 많습니다. 이들이 뜻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꾸물대지 않고 답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라면 마음속에 늘 답을 품고 살아온 때문이다.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어떤 꿈이든 펼칠 수 있지요. 차나 집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꿈을 꾸세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고민할 때 세상을 바꾸고 본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말이다. 한데 난 정말 그런 생각으로 힘껏 살아 왔다. 방향을 확정한 건 열아홉 살 때이지만 씨가 싹튼 건 열여섯 살 적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엔 한 여성이 있다. 내 할머니다.
    # 돼지 치는 집 아이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의 소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제공]

    할머니는 열네 살 때 일본으로 왔다. 그 나이에 결혼도 했다. 상대는 무려 37세, 내 할아버지다. 대구 태생인 할아버지 역시 열여덟 적에 현해탄을 건넜다. 할머니는 일본 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진흙물로 아이들과 허기를 달래는 처절한 나날이었다. 열네 살이라니, 아직 어린애 아닌가. 그 나이에 친척 하나 없는 타향으로 홀로 시집 온 것이다. 할머니는 조선 국적에 일본말도 서툴렀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우리 아버지도 중학생 때부터 생업에 나섰다.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나 참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쳤다.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다. 1957년 8월이다.
    당시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진 때였단다.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지만 집도 있었다. 규슈 사가현의 한인 집성촌에 살았다. 내 호적의 본적지 칸에는 ‘사가현 도수시 고켄도로 무번지(無番地)’라고 써 있다. 번지가 없으면 적지를 말지 굳이 무번지라고 할 건 또 뭔가. 제 땅이 아니라 국철 선로 옆 공터에다 양철지붕을 올리고 판자를 둘러쳐 살았으니 정식으로 호적을 인정해 줄 수 없었던 거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사형제 중 둘째인 나는 온전히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가 날 예뻐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가 “마사요시, 나갈 시간이데이-” 하면 겨우 서너 살인 나는 얼른 리어카에 올라타 떨어지지 않으려 꽉 매달렸다. 리어카는 까만색이었고 몹시 미끈거렸다. 반으로 자른 드럼통 서너 개가 실려 있었다. 음식 찌꺼기를 담는 통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역전 식당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얻어 와 돼지를 쳤다. 어린 내가 뭘 알겠는가. 난 그저 리어카 타고 나다니는 게 즐겁기만 했다. ‘아, 수레가 미끈둥대고 시큼한 내가 좀 나는구나. 바퀴가 웅덩이에라도 빠지면 꼼짝없이 미끄러지겠구나. 떨어지면 죽겠다’. 그런 생각으로 할머니가 “꼭 잡으래이-” 하실 때마다 리어카에 몸을 찰싹 붙이곤 했다.
    그렇게 좋아한 할머니를 철이 들면서 죽도록 싫어하게 됐다. 할머니는 곧 ‘김치’였기 때문이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그 사실과 관련된 온갖, 내 삶을 고통으로 채웠던 것들. 숨을 죽여 가며,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어린 시절 손 회장의 일본식 성명)’란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 재일동포임을 감춰야 한다는 사실이 내겐 더더욱 콤플렉스였다. 할머니가 너무 싫었다. 일부러 피해 다녔다.
    ‘차별’에 대해 보다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 건 어린 시절 한때 품은 꿈 때문이었다. 난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미카미 다카시라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영향이 컸다. 꿈을 밝히자마자 아버지는 재일교포로선 교육공무원도 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대뜸 “그럼 귀화시켜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초등학교 교사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넌 그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 다른 쪽으로 소질을 키워 보자”며 나를 달랬다. 그날 이후 며칠간 나는 아버지와 말을 끊었다. 고민 끝에 그 꿈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유의 일, 그보다 좀 가볍거나 혹은 심각한 아픔과 딜레마가 도처에서 출몰했다.
    # 아버지 가게 살린 열두 살 고집
    꿈 많은 소년이던 나는 그 외에도 화가·시인·정치가·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지금도 가끔 회의 중 화이트보드에 톰과 제리, 스누피 같은 만화 캐릭터들을 그리곤 한다. 남들이 제법 그럴듯하다고들 한다. 정치가가 되고 싶은 건 차별받는 재일교포 3세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 봤음직한 생각이다. 시인이란 직업도 아주 그럴듯하게 여겨졌 다.
    그래도 그중 가장 현실적인 꿈은 역시 사업가가 되는 거였다. 나름대로 자질을 보이기도 했다. 열두 살 때 일이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제법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저런 장사에 손을 댔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작은 카페를 열었다. 한데 어린 내 눈에도 도무지 승산이 없어 보였다. 전철역에서 먼 데다 번화가도 아니었다. 커피 원료를 공급하는 회사마저 물건을 대길 꺼렸다. 장사를 시작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내가 꾀를 냈다. 아버지에게 “공짜 쿠폰을 잔뜩 찍어 역 앞에 뿌리자”고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꺼내지도 마라”고 했다. 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0장을 찍어 나눠줬다. 커피공급업자를 초대한 날, 덕분에 카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놀란 공급업자들은 아주 싼값에, 좋은 결재 조건으로 물건을 대주기 시작했다. 초기 비용은 많이 들었으나 얼마 안 가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었다. 가게는 갈수록 번창해 몇 년 뒤 상당히 높은 값에 매각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다. 가족의 위기였다. 한 살 위 형은 장남의 책임을 다하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아버지 병원비를 댔다. 집안의 쇠락을 목도하며 내 마음도 급해졌다. 무슨 수를 쓰든 여기서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사카모토 료마를 만난 것이다.
    # 사카모토 료마, 가슴에 불을 지피다

    마음을 먹었으면 실천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일본 제1의 사업가가 되자.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가족의 어려움을 중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이어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건 말하자면 료마의 ‘탈번’ 같은 행동이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경이적 시청률을 기록한 NHK 드라마 ‘료마전’에도 이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료마는 탈번을 고민한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실행하지 못한다. 이때 료마의 누이가 말한다.
    “료마, 가라! 너는 초야에 묻히고 말 재목이 아니다. 나가서 더 큰 일을 하거라.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는 괜찮다. 떠나라!”
    그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이 쏟아져 애를 먹었다. 내가 그토록 하염없이 운 건 그 스토리에 내 지난날이 겹쳐 떠오른 때문이다.
    정리=이나리 기자
    ◆손정의와 소프트뱅크=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디지털 시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힌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도 막역한 사이인,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리더 중 한 명이다. 미국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졸업 뒤 1981년 일본에서 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95년엔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회인 컴덱스를 8억 달러에 인수한다. 이를 인연으로 야후에 투자한 뒤 96년엔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해 인터넷 열풍을 주도했다. 2001년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4년엔 재팬텔레콤(현 소프트뱅크텔레콤), 2006년에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 보다폰KK(현 소프트뱅크 모바일)를 1조7500억 엔(18조원)에 인수해 산업 판도를 뒤집었다.

    ◆탈번(脫藩)=에도 시대 일본의 무사가 소속된 지역인 번을 떠나는 행위를 말한다. 번주(주군)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돼 본인이 중벌을 받음은 물론 가족에까지 해가 끼쳤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 중앙일보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