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6일 금요일

"거짓과 날조를 파헤치고 싶나… 진실을 먼저 공부하라"

 

"거짓과 날조를 파헤치고 싶나… 진실을 먼저 공부하라"

  • 파리=어수웅 기자

    입력 : 2012.07.07 03:10

    [세계적 석학 움베르토 에코 인터뷰] ① 인터넷의 역설 ② 내가 책 5만권 가진 이유
    장서가 작은 도서관 수준 - 언젠가 꼭 읽거나 참고하고 싶어 필요한 책들이라 보관하는 것
    소설 쓰는 이유는 - 내 욕망은 독자를 창조하는 것… 창작자로서 기쁨을 전하고 싶어
    책 다 쓰고나면 슬퍼져 - 자료 모으고 공부하는 즐거움이 완성의 기쁨보다 더 크기 때문
    별명이 '세상의 모든 지식' - 우주엔, 행동 사이엔 틈이 많아 빈틈을 활용해 사유 연습을 하지

    책 애호가이자 수집가로서 움베르토 에코(Eco·80)의 소망은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을 소장하는 것이다. 그는 동년배인 프랑스의 시나리오 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81)와의 대담집 '책의 우주'에서 자신의 장서가 5만권에 이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작은 도서관'이라 불러도 좋은 양이다.
    ―수치로 따지는 게 민망하지만 장서가 5만권이라고 들었습니다.
    "밀라노 집에 한 3만, 교외에 있는 집에 한 1만, 그리고 볼로냐대학 연구실과 여기(파리) 다 합치면 대략 5만부 정도 될 거요. 솔직히 다 세어 보지는 못했어요. 매일매일 엄청난 새 책이, 헌정본이 집으로 와요. 매월 날짜를 정해 박스에 담아 대학에 있는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보낸다오. 때로는 교도소에도 보내줍니다. 걱정이야, 못된 책으로 교도소 사람들을 오염시킬까 봐(웃음)."
    ―이 시점에서 무례한 질문 하나. 그 5만권을 진짜 다 읽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보통 뭐라고 대답하나요.
    "정말 다 읽었느냐고 무례하게 묻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대답하느냐고 묻다니. 질문이 철학적이군(웃음). 상대방의 기질과 취향에 따라 준비해둔 다섯 개의 대답이 있소. ①번은 "그보다 더 많이 읽었소!" ②"읽었으면 이 책들이 왜 여기 있겠소." ③ "읽은 책들은 다 치웠소. 다음 주에 읽을 것들만 여기 있지." 그러고 보니, ④번과 ⑤번은 생각이 안 나는군요. 어리석은 질문들이 많이 있었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혹은 읽어도 몇 권만 겨우 읽는 사람들은 왜 나 같은 사람들이 서재를 가지고 책을 보관하는지 모를 거요. 언젠가는 꼭 알고 싶고, 참고하며 필요한 책이라는 사실을."

    에코 박사(Dr. Eco), 미스터 에코(Mr. Eco), 아니면 어떤 호칭이 편하냐고 물었다. 그는 입술을 좁게 오므리고“휘익~”하는 소리를 낸 뒤, 휘파람으로 자신을 불러달라며 웃었다. 상대방의 긴장을 일거에 허물어뜨리는 파안대소였다. /파리=사진작가 성지연

    ―안 읽은 책을 갖고 있는 이유겠군요.
    "이런 일이 있어요. 30년 전에 산 책이고 나는 한 번도 읽은 기억이 없는데 내가 그 책을 완벽히 알고 있는 것 같은 경우가 있어요.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지.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일인데, 첫째는 내 지식이 점점 커지면서 이 책의 내용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경우요. 둘째는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읽다 보니 다 알게 되는 경우지. 셋째는 다른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 쓴 책을 읽고 나서 마치 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경우요."
    ―생물학적으로는 팔순이지만, 소설가로는 삼십대입니다.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게 1980년이니까 소설가로서는 올해 서른둘?(웃음) '문학적 청춘'의 비밀은 뭔가요.
    "비밀이 있다고 한들 가르쳐 줄 것 같은가?(웃음) 비밀은 없어요. 단 창작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마음과 참을성이랄까. 내 소설은 6~8년마다 한 권씩 나왔소. 1년에 1권씩 책을 내는 사람은 다른 비밀이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비밀은 기다림의 미학이지. '장미의 이름' 이후 '푸코의 진자'까지 8년이 걸렸소. 쓰는 시간 그 자체가 기쁨이지요. 나는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져요. 완성의 기쁨이 아니라 책을 쓰는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게 더 즐겁죠. 내 소설의 서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는 쪽이죠. 갈릴레오에 관한 책을 읽다가 (세 번째 소설인) '전날의 섬'의 모티브를 찾았던 건데, 이런 조사와 공부가 좋아요. 그런데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 더 이상 관련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되잖소."
    ―소설가로서 독자에게는 어떤 즐거움을 주고 싶은가요.
    "내 욕망은 존재하지 않았던 독자들을 창조해내는 거요. 나는 '이상적 독자'(Model Reader)라는 에세이에서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작가는 은행 창구직원이 아니야. 셰익스피어 비극의 독자들은 셰익스피어가 원했던 독자들인 거야. 나는 창작자로서의 내 기쁨을 내 독자들도 똑같이 느끼기를 원해요. 물론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이 세상 모든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소?(웃음)"
    ―'장미의 이름'부터 곧 출간될 '프라하 공동묘지'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거짓의 힘' '날조의 메커니즘' '음모론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죠. 이유는?
    "그렇게 묻는다면, 왜 단테는 천국과 지옥에 관심을 쏟았고 반대로 발자크는 프랑스 사회문제를 썼느냐고 물을 수 있지요. 제임스 조이스는 왜 다른 곳이 아닌 더블린에 집착했느냐고 할 수 있겠고. 6권 중에서 '전날의 섬'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이 범주에 묶을 수 없을 거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일 뿐이지. 나는 위조와 날조에 관심이 많아요. 나는 철학자고, 철학자는 당연히 진실에 관심이 있는 법이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거짓인가. 거짓이나 위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진짜가 뭔지를 알고 시작해야 해요. 반쪽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어요. 둘은 연결되어 있지. 진실을 모른다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거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뫼비우스의 띠의 딜레마군요. 사람들은 선생을 '세상의 모든 지식'으로 부릅니다. 느낌은?
    "모두 다 위조고 날조야(웃음). 만약에 어찌 그리 정보가 많으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빈틈(empty space)을 이용한다고 말하겠어요. 이 우주에는 행동과 행동 사이, 이것과 저것 사이에 많은 빈틈이 있고, 그 틈을 활용해야 해요. 당신이 1층에서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기까지 3분이 걸렸어. 그동안 나는 어떤 생각을 했지. 일종의 사유 연습이오. 우리 인생은 비어 있는 시간들로 가득 차 있어. 우리 모두가 할 수 있어요. 화장실에 가 앉아 있으면 '빈틈'이 많을걸?"
    ―선생은 이제 80대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또 사회에게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느낍니까.
    "여전히 나는 글을 써요. 볼로냐대학에서는 은퇴했지만 칼럼뿐만 아니라 특강도 하지. 하지만 내 지혜는 너무 늙었어요. 여든 살 된 지식이지. 지난번에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뇌가 가장 좋을 때는 당신들 나이, 24세 때다. 뉴런이 그때가 제일 활발하고 좋을 때라고. 지금보다 더 똑똑할 수는 없다고. 나에게 지혜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혜는 스스로 얻는 거요."

    [새 소설 '프라하 공동묘지']
    세계 문학의 역사 통틀어서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 등장
    “세계 문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혐오스러운 주인공일 거요.”
    자신의 새 소설 주인공에 대해 묻자 에코는 이렇게 힌트를 줬다. 올가을 번역·출간 예정인 에코의 여섯 번째 소설 ‘프라하 공동묘지(Prague Cemetry·사진)’의 주인공 이름은 시모니니. 작가가 학자와 소설가로서 평생 천착해왔던 진실과 거짓, 날조의 메커니즘이라는 주제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다. 시모니니가 지닌 천부적 재능은 음모와 위작. 어렸을 때는 공증인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문서 위조의 달인이 되었고, 청년 시절에는 비밀 첩보원으로 일하며 음모를 스스로 창조해냈으며, 마침내는 반유대인 문서 위작에까지 몰두한다. 제목인 프라하 공동묘지는 유대인 랍비들이 비밀회의를 하는 장소. 이 역시 시모니니의 위작이자 창조다. 19세기를 배경으로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주인공이 일기 형식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플롯으로 꾸며졌다.
    [한국에 대한 인상]
    문화강국·출판강국… 알고 지내는 학자 많은데 그중엔 김씨가 너무 많아

    3년 전 에코 교수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요청으로 큐레이터를 맡아 ‘궁극의 리스트’라는 제목의 전시를 연 적이 있다. 삶은 유한하고 리스트(목록)는 무한하다는 문화적 주장이었다. 가령 ‘시적인 것’의 의미를 말할 때 한 줄의 정의를 말하는 것보다 호메로스적인 것, 셰익스피어적인 것 등등의 리스트로 이어가며 설명하는 게 더 합당하다는 얘기였다.

    움베르토 에코가 그린 자신의 캐리커처와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감사 메시지. 에코는 1930년대 이탈리아 만화의 마니아이기도 하다.

    문득 한국에 대한 ‘에코의 리스트’는 무엇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우선 문화강국·출판강국으로서의 한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과 연구를 함께하거나 연락하고 지내는 학자들이 무척 많다는 것. 그런데 한 가지, ‘킴(김씨)’이 너무 많다고 농담을 던졌다. 아마 리스트를 만들면 ‘킴킴킴’으로 이어질 것 같다며 웃었다. 초대 제안을 하자, “죽기 전에 한국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기는 해요. 그런데 너무 늦지 않았나 싶네”라고 말했다.
    에코의 파리 집은 생 슐피스(St. Sulpice) 성당 바로 옆에 있었다. 두 사람이 타면 껴안아야 할 만큼 비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조국 이탈리아 말고) 파리에도 집이 있는지는 몰랐다고 인사를 건네자, “얘기가 길다”면서 60년 전 추억을 들려줬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처음 파리에 왔어요. 내 아들은 네 살 때 처음 해외여행을 했지만, 우리 세대는 스무 살에 여행을 해도 매우 이른 것이었지. 그런데 처음 본 파리가 너무나 멋지더라고. 당시 난 철학도였는데, 파리에서 살 수 있다면 은행원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내 기질상 가장 안 맞는다고 생각한 직업이었거든. 결국 원한 지 40년 만에 소원을 이뤘어요(집을 샀어요). 다행인 것은 은행원을 하지 않고서도 꿈을 이뤘다는 거지. 소원을 이루려면 40년은 한결같이 원해야 하는가 보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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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7월 2일 월요일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해외입양인, 말걸기] 친부모에 버림받고, 양부모에 버림받고…
    제인 정 트랜카 작가, 입양인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1-10-06 오후 4:08:15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 60년간 한국은 공식적으로 16만4894명의 아동을 해외입양 보냈고 2010년 한 해에만도 1013명의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 이 아동들은 한국정부가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 "국제간의 아동 입양은 자격을 갖춘 중앙정부기관에 의해서만 허가되어야 한다"를 유보한 상태에서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 또 한국은 '국가 간 아동 입양에 있어서 아동보호 및 협력에 관한 헤이그 협약'을 아직 비준하지 않았는데, 이 헤이그 협약에서는 해외입양을 중앙정부에서 관리해야 할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미국의 의사-레스토랑 주인 부부에게 입양됐던 팀
    입양프로그램에 대한 한국정부의 무책임과 관리 소홀의 결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입양인들은 피해를 입고 있다. 미국입양인이었던 팀(Tim)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팀은 1970년대 미국으로 입양 보내졌다. 하지만 34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온갖 풍상과 우여곡절을 겪은 팀은 서울 이태원의 한 길거리로 흘러들어와 노숙인으로 살고 있었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팀은 우연히 길을 지나던 다른 한 해외입양인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1976년 한국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당시 한국은 사회복지보다는 경제발전을 최우선적 목표로 두고 있던 국가였다. 해외입양은 군사정권에 돈이 되는 좋은 사업이었다. 팀은 당시 한 재래시장에서 길을 잃고 고아원으로 가게 된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팀의 한국 이름은 모정보인데, 누가 그에게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알 수 없다. 친생부모가 모정보의 양육을 포기했다는 것을 증빙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팀의 입양을 촉진하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팀의 당시 호적(현 가족관계등록증)에는 팀 외에는 아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후 팀은 지금도 왕성하게 입양사업을 벌이고 있는 사설입양기관인 대한사회복지회에 의해서 미국 위스콘신주의 한 도시로 입양 보내졌다.
    팀의 미국 양부는 의사였고 양모는 예술가이면서 레스토랑 체인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팀의 양부모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양부모의 의무 중의 하나인 입양 자녀에 대한 미국국적 취득절차를 밟지 않았다. 양부모는 친자식 셋을 얻은 후 비교적 늦은 나이에 팀을 입양했다. 나는 지난 9월 팀으로부터 얻은 전화번호로 미국 위스콘신주에 살고 있는 양부모와 통화를 했다. 양부는 "팀은 다루기 힘들었고,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또 팀의 양모는 "팀이 친구들에게만 관심 있었는데 친구들은 흘러갈 뿐이고 가족이 중요하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양부모는 팀이 8살 때 팀에게 리탈린(주의력결핍장애에 쓰이는 약)을 투여했다. 그리고 팀이 12살 때 그를 기숙식 군사학교에 보냈다. 양부모는 또 팀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팀에게 리튬을 투여했다. 팀이 18세가 되었을 때 양부모는 팀에게 "우리 이제 인연을 끊자. 집을 떠나라"는 말을 했고 결국 팀은 집을 나와야 했다.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팀은 그 다음 20년 동안 미국에서 장애인수당과 교회의 자선에 의존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도중에 팀은 정신병원에서 감금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팀은 코카인이나 각성제 같은 마약을 흡입하기 했다. 팀은 위스콘신, 캘리포니아, 하와이를 전전하며 살았다. 마침내 약 6개월 전, 그는 하와이에서 그가 입양 온 나라인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9.11이후 까다로워진 미국의 정책에 의해서 미국국적이 없고 마약중독과 거래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팀은 미국의 한 주인 섬 하와이로부터 소위 본토인 대륙으로 입국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추방을 면할 수 있을까 하고 변호사를 고용하려했지만 팀의 양부모가 보낸 변호사 수수료는 400불에 불과했고, 그것은 턱없는 비용이었다. 팀의 양부모는 나와의 전화 통화에서"우리가 이제 팀에게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고, 팀은 미국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3살 때인 1977년 미국으로 입양 가서 34년 만에 미국정부에 의해서 한국으로 추방된 팀은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천애고아일 뿐이다. 팀은 34년 전 아마도 한국인 생부모에 의해 포기되었고, 한국 사회로부터 적출되었으며, 미국인 양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미국 정부로부터 추방되었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은 버림당함으로 얼룩졌다.
    입양특례법은 해외입양아동의 국적삭탈절차를 명시하고 있다. 국가가 당사자의 동의에 의하지 않고 국적을 삭탈하는 일이 시민권과 인권을 거스르는 일이 아닌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최소한 이 법은 한국정부와 해외입양기관은 입양아동이 입양된 나라의 국적 취득 여부에 대한 확인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부도 입양기관도 이 의무를 책임 있게 실행해오지 않은 흔적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입양인들에게 별로 큰 손해가 아니어서 문제를 삼지 않아서 그렇지 국내로 돌아와서 장기 거주를 위해 재외동포비자를 받기 위한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많은 입양인들이 자신들이 입양국가의 국적을 취득하고 시민이 된 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주민등록 관청에서 자신들의 주민등록을 여전히 살려두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이는 결국 정부와 입양기관들이 해외입양을 보내고 나서, 이들의 시민권과 국적 취득 여부를 확인하는 일에 실제로 큰 게으름을 피워왔다는 점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팀과 같이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채로 살다가 한국으로 추방되는 입양인들을 발생시키는 이유이다. 생각해보라. 입양 간 나라에서 그 땅 사람들과 부대끼며 30년, 40년을 살고도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서 모국 아닌 모국으로 추방되는 입양인들의 가혹하고도 처참한 운명을. 언어도 가족도 문화도 낯선 땅에서 추방자로 사는 일의 참담함을.
    정부와 입양기관들은 이런 인권 유린과 훼손에 어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입양이 마치 천사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 벌이는 선행인 것을 만천하에 주장하면서, 또 이 일로 온갖 사회적 존경과 찬사를 받으면서 벌여온 일임에랴!
    무국적 노숙인 팀의 불가능에 가까운 국적 회복 과정
    팀이 서울거리에서 내 친구에 의해서 노숙자로 발견되었을 당시 그는 신분증도 없었고 총재산은 1불도 안 되었고 행인들에게 이상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팀은 복용할 약도 더 이상 없었고, 찢어진 바지에 짝짝이 신을 신고 있었다. 팀은 종이컵과 비닐봉지를 몇 개 갖고 있었다. 정신병 탓인지 팀은 자기 이름, 나이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팀과 차분하게 대화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팀은 자기가 더 이상 미국인이 아닌 것도 몰랐고 스스로를 "세계시민"으로 불렀다.

    ⓒ프레시안(허환주)

    우리 입양인들의 첫 번째 임무는 팀의 한국국적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었다. 미국국적이 없는 팀이 한국국적을 회복하면 극빈자 신분으로나마 최소한의 의료나 복지혜택 등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우리 입양인들은 해외입양인센터 <뿌리의 집>을 운영하는 김도현 목사님과 더불어 10여 곳이 넘는 정부 기관들을 며칠간 문자 그대로 뛰어다녔다. 그런 지난한 과정에서 우리가 겪은 답답한 관료주의를 말로 다 표현 하기는 불가능하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노숙인인 팀이 혼자 이런 과정을 밟기는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모국으로 국제 미아가 되어서 돌아온 해외입양인들의 생존권이 얼마나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은 정부예산에 의해서 운영되는 민간재단의 형태로 2009년 설립되었다. 사실상 법적인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작은 정부론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변명에 기초해서, 정부 예산으로 직원의 급여와 사업비가 지출되는 기이한 형태, 거의 불법에 가까운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 기관의 불완전한 설립을 주도했던 정부 관리들은 자리를 옮겼고 이 기관의 설립을 주도하고 이 기관의 이사장이 된 이는 수수방관 내몰라라였다. 결국,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이 주도해서 이 기관의 설립근거를 담은 입양특례법 개정작업을 벌였고, 결국 지난 6월에 국회 통과를 이루어 냈다. 비로소 중앙입양정보원은 법적 근거를 확보한 것이었다.
    사실상, 중앙입양정보원은 2009년 설립되기 전에도 같은 직원들,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거의 10년 동안 존재해왔다. 사실상 유명무실한 기관이었지만 입양기관이 사무실 비용을 대고, 정부가 민간기관 지원의 형태로 예산을 마련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정부 예산으로 급여를 받는 센터장과 직원의 임용권은 입양기관들에게 있었던 기형적인 단체였다. 이 입양정보센터가 중앙입양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전액 정부의 예산에 의해서 운영되기 시작한 후에도, 사실상 입양사후서비스라고 하는 중핵적인 사업에 있어서 아무런 진척도 전문성도 없이 그냥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만 있을 뿐이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 기관이 운영되어 왔다고 하면, 그것도 정부의 예산 지원에 기초해서 운영이 되었다고 하면, 그 전문성은 물론 사업의 목표가 착착 성취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어보는 이가 입이 아파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난 몇 주 동안 팀의 문제로 중앙입양정보원에서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중앙입양정보원은 해외입양인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전혀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앙입양정보원은 양부의 이름에 기초해서만 입양인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는 몇 주 전 팀에 대한 입양기록을 찾기 위한 방문약속을 잡고자 중앙입양정보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내가 팀의 이름을 이야기 했을 때 중앙입양정보원 직원은 팀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나를 만나는 약속을 잡을 수 없다고 했다. 대신 그 직원은 내게 이메일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가 알려준 주소로 메일을 보냈지만 반송되었다. 그래서 전화를 몇 번 다시 했지만 통화 중이었다. 결국 <뿌리의집> 김도현 목사님이 대신 전화를 해서 중앙입양정보원 사무총장과 통화를 요청했지만 그 날 외근 중이라 통화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우리는 팀을 김도현 목사님 차에 태우고 중앙입양정보원을 무작정 방문했다. 중앙입양정보원 직원 2명이 우리를 만났다. 한 직원은 입양정보센터시절부터 그곳에서 일해 왔었다. 그녀는 영어를 할 수 있었지만 팀을 쳐다보거나 팀에게 영어로 말하지 않았다. 한 직원은 영어를 좀 했지만 입양제도에는 전혀 문외한인 것 같았다. 우리 해외입양인들이 중앙입양정보원의 직원들이 해외입양사후서비스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인 입양인들로부터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여러 차례 했고, 나아가 입양인을 직원으로 채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수차례 피력했지만, 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팀과 영어를 할 줄 아는 2명의 한국인들과 중앙입양정보원을 방문했지만 해외입양을 다루는 기관의 직원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해외입양인을 만날 때는 영어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원칙으로 나는 반복적으로 직원들에게 팀을 보면서 영어로 팀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직원들은 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데 마치 팀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거의 대부분을 한국어로 이야기 하였다. 내가 만약 통역이 가능한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중앙입양정보원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 했을 것이다.
    중앙입양정보원의 두 직원은 해외입양인은 그 나라 국적을 취득 할 수 있다고 원론적인 말을 했다. 미국입양인 팀이 미국국적을 못 얻었고 다른 해외입양인들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나는 말했지만 그 두 직원은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의 어려움 끝에 우리는 가까스로 팀의 미국입양기록을 발견했고 중앙입양정보원 직원은 그 기록의 원본이 대한사회복지회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중앙입양정보원 설립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해외입양사후서비스의 원스톱서비스화가 아니냐, 지난 5월 입양의 날에 즈음하여 진영곤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이 해외입양에 관한한 원스톱서비스체계를 갖추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한 일이 신문에도 다 났는데,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거짓 보고를 한 것이냐, 그러니, 여기 중앙입양정보원을 통해서 우리가 그 서류를 받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직원들은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낯설어 했지만 결국 우리 주장은 관철되었고 우리는 사설입양기관을 가지 않고도 팀의 고아호적등본에 유사한 서류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중앙입양정보원 직원들이 준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설입양기관의 권력과 관행에 주눅 든 채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권의 문제를 민간에 위탁한 지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남겨 놓은 이 땅 사람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어두운 유산인 것처럼 보였다. 자국민의 시민권에 관한 문제를 사설기관에 위탁해 놓은 나라의 슬픈 자화상을 나는 거기에서, 내 안에서 거친 파도처럼 일렁이는 분노 가운데서 목격해야 했다.
    진정한 입양사후서비스기관은 입양인, 즉 국제적 미아가 된 팀이 한국국적을 회복하도록 지원하고 그래서 팀이 한국사회에 원만히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앙입양정보원 직원들은 팀에 관한 문서를 김도현 목사님에게 전달한 것으로 자기들의 일이 끝났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래서 김도현 목사님은 자기 자신의 시간을 들여서 팀의 한국국적을 회복해 주기 위해 10여개 기관을 여기저기 며칠 동안 돌아 다녀야 했다. 한국어를 못하는 팀이나 입양 보내어진 나라의 국적이 없는 해외입양인들이 김도현 목사님이 했던 것과 같이 그런 복잡한 국적회복과정을 밟기는 불가능하다. 국적이 없는 한국 해외입양인들의 국적을 회복해 주는 일은 중앙입양정보원 같은 국가기관이나 한국정부가 나서서 마땅히 할 일이지 어느 개인이 자기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중앙입양정보원 같은 한국정부기관이 국가기관간의 연계를 통해서 팀의 국적을 회복해 주도록 힘썼더라면 훨씬 더 시간과 노력이 단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무관심 때문에 한 개인이 그러한 수고를 하게 되었다. 더욱이 동사무소로부터 외교통상부로 가야 한다는 조언을 받고 우리가 외교부를 찾아 갔을 때는 정문을 지키는 경찰이 출입조차 못하게 했다. 중앙입양정보원으로 대표된 한국정부는 국적 없는 한국입양인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을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팀을 해외로 입양 보낼 때는 한국외교부에서 여권을 발행했을 것이고 재외공관, 입양관련기관 등등이 모두 관련되었을 것 아닌가? 우리가 팀의 한국국적을 회복 해 주기 위해서 여러 공무원들을 만났지만 이런 경우들 처음 본다며 모두 어떻게 할지를 몰라 했다.
    간난신고 끝에 마침내 팀은 주민등록번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팀은 아직 주민등록증이 없다. 그래서 팀은 아직도 한국인 극빈자이자 고아이며 정신분열증 환자이지만 의료 등 사회복지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 한국정부는 자국민을 해외입양 보내는 데는 신속하고 의욕적으로 행동했지만 팀처럼 귀환한 자국민인 전 해외입양인을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몰랐고 할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미국으로 입양 갔다 34년 만에 추방된 입양인과 영어로 말하는 것조차도 말이다.
    우리는 국제인권기관이 차라리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이 해외입양인들을 위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또는 안하고 있는지 점검해 주었으면 한다. 과거에는 심지어 사설입양기관이 한국아동을 해외에 판매한 돈으로 중앙입양정보원의 전신인 입양정보센터 같은 정부적 기능을 하는 기관에 재정을 지원해준 때도 있었다. 이것은 물론 이해충돌 행위다.
    토비 도슨과 팀, 성공한 입양인만 환영하는 한국
    팀의 경우를 통해서 또 생각해 볼 것은 한국에서 친생자녀양육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친부모들에 대해 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한국정부는 이제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팀이 3살 때 시장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은 팀의 가족이 그를 양육하고자 3년 동안은 노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팀의 가족은 팀을 양육하지 못할 상황이 되자 그를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몰래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단순히 시장 통에서 팀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스키 선수이자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 중의 하나인 토비 도슨처럼 말이다.

    ▲ 토비 도슨 ⓒ연합

    사실 한국 정부나 사설입양기관들은 토비 도슨처럼 성공한 입양인에게는 열광하고 팀처럼 실패의 늪을 헤매고 있는 입양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존재화 시킨다. 국가가 무엇인가? 성공한 사람들에게 열광하라고 국가를 세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함께 힘을 모아 돌보자고 세운 것이 국가여야 하지 않은가? 시장 통에서 잃어버린 아기에 대해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회와 정부라면 당연히 가족의 품을 다시 찾아 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친생자녀를 키우기에 버거워 포기해야할 지경이라면, 먼저 생뚱맞고 냉정하게도 입양을 제안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도우면 친생가족이 친생자녀를 키울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토비 도슨의 경우 시장 통에서 잃어버린 아이였음에도 해외입양 보내졌다는 사실은 고의로 간과한 채 그의 성공 스토리에만 열광하고 제 2의 국익을 위해 그의 명성을 활용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이 땅의 사설입양기관과 정부와 사회다. 누구는 그러면 제 1의 국익은 뭐였냐고 할 것이다. 그것은 70년대와 80년대에는 한국 정부가 입양을 통해서 국가 재정에 보탬을 도모했었던 것이 제 1의 국익이었다고 할 것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행태에 다름이 아니다. 그것도 이 땅에 태어나는 영아들을 가지고 말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 (가)항은 아동입양과 관련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아동의 입양은, 적용 가능한 법률과 절차에 따라서 그리고 적절하고 신빙성 있는 모든 정보에 기초하여, 입양이 부모, 친척 및 후견인에 대한 아동의 신분에 비추어 허용될 수 있음을, 그리고 요구되는 경우 관계자들이 필요한 협의에 의하여 입양에 대한 분별 있는 승낙을 하였음을 결정하는 관계당국에 의하여만 허가되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현재 한국입양아의 90%는 미혼모 자녀다. 한국인들은 이런 현상은 유교문화 때문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유교문화에서 가장인 아버지는 자녀를 돌봐주어야 책임이 있지 않나? 또 군사부일체인 유교문화에서 정부는 그 백성을 돌보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 않나? 한국에서 미혼모가 아동의 양육을 포기하는 이유는 경제력 때문이다. 미혼모는 정부가 한 달에 미혼모에게 주는 양육비 5만 원으로 아동을 키우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국내입양의 경우 한국정부는 입양부모에게 한 달에 10만 원을 지원한다. 지난 5월에 열린 입양관련 컨퍼런스에서 정부관계자는 이 입양부모에게 지원하는 지원금을 상향 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부의 할 일은 국내입양이나 해외입양을 권장하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아동이 그 친부모와 생이별을 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팀은 자기의 친부모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시장 통에서 발견되어 고아호적이 만들어진 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출생등록제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출생등록제는 팀이 태어났을 때인 1970년대와 같다. 그것은 아이가 탄생한 병원에서 출생등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원해서 임의로 신고하게 되어있다. 그 말은 부모가 출생신고를 안 한 채로 해외로 보내진 많은 입양인들의 경우 한국에 누가 자신의 생물학적 의학적 어머니인지에 대한 자신의 출생사실에 부합하는 기록이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입양기관은 아동을 쉽게 입양 보내기 위해서 소급하여 고아호적을 만들어 준다.
    이런 출생등록제의 허점 때문에 국내입양의 경우 양부모는 남의 아이를 자기 가족등록부에 자기 친자녀처럼 등록시킴으로써 그 아동의 출생을 비밀을 은폐할 수 있게 된다. 부모가 병원에서 발행된 출생증명서를 구청으로 가지고 가서 출생등록을 한다. 그러나 집에서 난 아동은 병원출생증명서가 없이도 출생등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현 제도 하에서는 미혼모가 낳은 아동을 양부모가 입양하되 마치 집에서 난 친자식처럼 출생등록을 할 수 있게 되어있다. 200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행 된 보고서에 의하면 2007년 한해에만 3014명의 아동들이 이런 불법 비밀입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도 정부에 의해서 인가가 난 사설입양기관의 중재를 통해서 자행된 일이다. 사실상 국내입양의 대다수는 이런 비빌입양이다. 온갖 변명과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렇게 해서 입양 아동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진실에 접근할 권리가 근원적으로 차단되며, 거짓 정보에 기초해서 자신의 인생을 구축해야 한다. 비록 입양이라는 선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존재의 근원과 그 의의를 훼손하는 이 제도는 입양 당사자에게는 야만적 인권유린에 다름이 아니지 않은가?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과 김도현 목사님이 운영하는 <뿌리의 집(KoRoot)>은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여 알리고, 친부모의 자녀양육보다 우선해서 제도적으로 입양을 권하는 한국입양제도를 허점을 보완하고자 일하고 있다. 국제공법상, 한국은 1991년 11월 20일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수용했지만 아동권리와 관련한 몇 가지 조항에 대해선 지난 20년간 여전히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국제사법상, 한국은 아직도 국가간 입양에 관한 헤이그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 해외입양인들은 유엔아동권리위원회를 통해 한국정부에 아래와 같은 압력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1) 한국의 모든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국정부는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입양제도를 인정하거나 허용하는 당사국은 아동의 최선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도록 보장하여야 하며, 입양이 권위 있는 관계 당국에 의해서만 허가되도록 해야 한다)와 40조(당사국은 형사피의자나 형사피고인 또는 유죄로 인정받은 모든 아동에 대하여, 아동의 연령 그리고 아동의 사회복귀 및 사회에서의 건설적 역할 담당을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점을 고려하고, 인권과 타인의 기본적 자유에 대한 아동의 존중심을 강화시키며, 존엄과 가치에 대한 아동의 지각을 촉진시키는데 부합하도록 처우 받을 권리를 가짐을 인정한다)에 대한 유보를 철회해야 한다.
    2) 한국에서 태어난 아동이 해외입양되기 전 그 아동의 권리를 더 낫게 보호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국가간 입양에 관한 헤이그협약을 수용해야 한다.
    3) 한국의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는 미혼모(가정)에 대한 사회복지지원을 실효적으로 늘려야 한다.
    우리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이 한국의 입양문제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감시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국정부가 헤이그협약을 지키고 수용 한다면, 중앙입양정보원도 그에 걸맞게 한국사회의 약자인 미혼모와 그 자녀들의 권익을 위해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중앙입양정보원은 사설입양기관의 영향력 아래에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제인 정 트랜카 작가, 입양인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 프레시안

    2012년 6월 25일 월요일

    THE SCIENCE : ‘노벨상은 아무나 타나’…주류 과학계의 핍박을 극복한 연구들

     

    ‘노벨상은 아무나 타나’…주류 과학계의 핍박을 극복한 연구들

    [강기자의 과학카페]<48> 배리 마셜, 스탠리 프루시너, 피터 미첼

    2011년 10월 10일

    결정에서 보이는 다양한 대칭성. 3각형, 4각형, 6각형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만 5각형은 반복성이 없다. 올해 노벨화학상은 원자의 일부가 5각형으로 배열된 준결정을 발견한 이스라엘공대 다니엘 셰흐트만 교수에게 돌아갔다. (제공 노벨재단)

    1984년 호주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33세의 내과 의사 배리 마셜 박사는 위점막에서 발견한, 나선형으로 생긴 한 박테리아에 매료돼 있었다. 난치성 질환이었던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 환자 대부분이 헬리코박터 파이로리라고 불리는 이 박테리아에 감염돼 있다는 걸 발견한 그는 헬리코박터가 궤양을 일으킨다는 가정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다.

    헬리코박터 배양액을 직접 먹어 이 박테리아가 위궤양을 일으킴을 ‘증명’한 배리 마셜 박사.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제공 C. Northcott)

    강한 산성 환경인 위 안에 박테리아가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당시 주류 의학계는 여기에 한 술 더 떠 박테리아가 궤양을 일으킨다는 그의 주장을 일축했다. 따라서 그의 논문은 게재가 거부되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동물을 감염시켜 위궤양을 일으키려는 실험은 잘 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마음이 갑갑해진 마셜 박사는 어느 날 자신이 직접 헬리코박터가 우글거리는 배양액을 마셔보기로 했다. 동물실험 결과도 있고 해서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곧 위궤양 증세를 보였다. 위내시경으로 충분한 ‘증거’(벌겋게 충혈된 위점막)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항생제를 먹었고 2주만에 궤양이 나았다.
    그는 이 경험을 그에게 처음 헬리코박터 연구를 해보라고 제안했던 로빈 워런 박사에게 얘기했고 다음날 워런 박사는 이 얘기를 우연히 통화를 하게 된 미국의 선정적 신문인 ‘스타’지의 기자에게 다소 과정을 섞어(마셜 박사가 죽다 살아났다는) 들려줬다.
    다음날 이 스토리는 ‘기니아-피그 의사가 위궤양의 새로운 치료법과 원인을 밝혀냈다’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됐다. 이 보도 이후 헬리코박터와 위궤양의 관계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고 곧이어 위궤양 환자를 대상으로 한 항생제 치료의 효과를 알아보는 대규모 임상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2005년 마셜 박사와 워런 박사는 헬리코박터가 위궤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바이러스가 아니라 변형된 프리온 단백질이 감염성 질환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힌 스탠리 프루시너 박사. 199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개인 실험실 차려 가설 입증하기도
    197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의대 신경과에서 레지던트를 시작한 스탠리 프루시너 박사는 어느 날 특이한 환자 한 명을 만났다.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CJD)이라는 희귀질환을 앓던 이 환자는 기억력이 점차 떨어지며 몸을 가누지 못하다 결국 사망했다. 병의 치료는커녕 원인도 전혀 알 수 없었던 이 사례를 겪으며 프루시너 박사는 방대한 문헌을 섭렵했고 그 뒤 이 병의 원인을 밝히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는 1950년대 동남아시아 뉴기니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걸린 풍토병인 쿠루의 증상이 CJD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쿠루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그 결과 쿠루는 죽은 자의 뇌를 먹은 아이나 여성들이 주로 걸렸으며 이 풍습을 없애자 거의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양에서 보이는 스크래피라는 증상도 사람의 CJD와 비슷했다. 그러나 쿠루나 스크래피를 일으키는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프루시너 박사는 스크래피에 걸린 양의 뇌조직에서 병원체를 추출하는 지루한 실험을 10여 년 반복했고 결국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생명체’가 병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프리온이라는 단백질 조각이 병원체라는 과감한 주장을 1982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었다. 이 논문이 나가자 생명체는 DNA나 RNA 같은 핵산을 유전자로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무시했다며 많은 생물학자들이 격분했고 프루시너 박사는 학계에서 생매장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프루시너 박사는 스크래피에 감염된 햄스터의 뇌에서 프리온 단백질을 분리하는데 성공했고 1986년 프리온 단백질의 유전자를 찾아냈다. 또 1990년 프리온의 구조가 밝혀짐에 따라 구조가 변형된 프리온이 병원체임이 입증됐다. 결국 프루시너 박사는 1997년 ‘새로운 감염 인자인 프리온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다.

    사설연구소를 차려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밝힌 피터 미첼 박사. 1978년 노벨화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제공 노벨재단)

    1978년 화학삼투이론으로 생체에너지의 전달을 설명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한 피터 미첼 박사는 자신의 이론을 비난하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직장(영국 에딘버러대)을 그만두고 풀이 죽어 있다가 마음을 다잡고 개인 연구소를 차려(다행히 그는 부유했다) 실험을 계속해 마침내 성공한 경우다.
    미첼 박사는 세포가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과정, 즉 세포호흡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이미 세포에서 호흡을 담당하는 기관은 미토콘드리아라는 건 알려져 있었지만 문제는 미토콘드리아가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어내느냐는 것.
    미첼 박사는 1961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낸 논문에서 세포호흡이 화학삼투 짝지움에 의해 일어난다고 제안했다. 즉 미토콘드리아의 막 사이에 양성자 농도의 차이가 있어 삼투압이 생기고 그 결과 양성자가 막을 가로질러 이동할 때 에너지 분자인 ATP가 만들어진다는 것.
    당시 세포호흡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생물학자였기 때문에 화학삼투 같은 전기화학 용어가 난무하는 그의 논문은 해독불가였고 결국 그의 생각은 묵살되거나 정신나간 소리로 치부됐다. 게다가 미첼 박사는 다혈질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을 차분히 설명하기보다는 ‘물리나 화학에 무식한’ 생물학자들과 말다툼을 하며 적을 계속 만들어갔다.
    그 결과 그 자신 위궤양이 극도로 악화돼 학교를 떠났고 집에서 쉬면서 폐허로 방치돼 있던 18세기 건물을 개조해 사설연구소인 ‘글린연구소’를 열었다(1964년).
    이곳에서 그는 소수의 연구자들과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는 실험에 들어갔고 그 뒤 10여년 동안 확고한 데이터들을 하나둘 내놓았다. 그동안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1978년 노벨화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는 “새로운 과학개념이 승리하게 되는 이유는 반대론자들을 설득해서가 아니라 반대론자들이 죽기 때문”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1982년 준결정의 전자회절 사진을 처음 얻은 다니엘 셰흐트만 박사. 올해 노벨화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제공 이스라엘공대)

    ●결정학 교과서 건네기도
    올해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이스라엘공대 다니엘 셰흐트만 교수 역시 노벨상에 이르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노벨재단에서 일반인을 위해 만든 자료를 보면 그는 새로운 가설을 내놓다가 면전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에서 학위를 마치고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에서 박사후과정에 있던 그는 알루미늄과 망간 합금을 연구하고 있었다.
    1982년 4월 8일 아침, 그는 전자현미경으로 합금을 들여다보다 희한한 패턴을 발견했다. 전자의 회절패턴이 10각형의 꼭짓점 자리에 배열돼 방사상으로 퍼져 있었던 것. 이 결과에 그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정학에서 10이라는 숫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결정이란 물질 전체에 걸쳐 일정한 구조가 반복돼 있는 상태다. 따라서 이런 반복이 가능하려면 가능한 도형은 3각형, 4각형, 6각형 뿐이다. 그런데 10각형이 나왔으니 아무리 짜내도 이게 어떤 구조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 그는 실험을 반복했지만 결과는 같았고 다른 각도에서 찍어본 결과까지 고려할 때 합금이 5각형 대칭구조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5각형 역시 기존 결정 구조에는 없는 배열이다.
    셰흐트만 박사가 동료들에게 실험결과를 말하자 다들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아마도 쌍정(twin crystal, 두 개의 결정이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 결합해 있는 구조)을 찍은 것일 거라고 대답했다.심지어 실험실 보스는 그에게 결정학 교과서를 건네 주기도 했다. 결정학의 기본부터 다시 배우라는 얘기다. 이런 소동이 마음에 안 들었던 보스는 급기야 그를 불러 실험실을 떠나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셰흐트만 박사는 일란 블레흐라는, 특이한 현상에 호기심이 많은 동료와 연구를 계속했고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해 1984년 여름 '응용물리학저널'에 제출했지만 즉각 반송됐다.
    셰흐트만 박사는 애초에 자신을 NIST로 부른 저명한 물리학자 존 칸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공사다망했던 칸은 프랑스의 결정학자 데니스 그라티아스에게 논문을 검토해보도록 부탁했다. 그라티아스는 논문에 하자가 없다고 답했고 이에 흥미를 느낀 칸이 본격적으로 개입해 다시 논문을 써 이해 11월 저명한 물리학 저널인 ‘피지컬리뷰레터스’(PRL)에 논문이 실리게 된다.
    이 논문으로 결정학계가 발칵 뒤집혔지만 불과 한 달 뒤 물리학자 폴 스타인하르트와 도브 르바인이 이들의 결정 패턴이 펜로즈 타일의 패턴과 유사하다는 결과를 역시 PRL에 실었다. 이들은 국소적으로는 패턴을 보이지만 규칙적으로 반복되지는 않는 이런 구조에 준결정(quasicrysta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결국 1992년 열린 국제결정학총회에서 결정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게 된다. 즉 “원자나 분자, 이온이 규칙적인 순서로 채워져 3차원 패턴으로 반복되는 물질”이라는 기존의 정의에서 “독특한 회절 패턴을 보이는 고체”로 바뀐 것이다.
    셰흐트만 박사가 제안한 준결정에 대해 가장 심하게 반대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학자로 195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이었다고 한다. 그 자신 누구보다도 혁신적인 생각의 소유자였지만(종이를 말아보다가 단백질의 알파구조를 생각해낸 사람이 바로 폴링이다!) 어느새 기존 패러다임을 옹호하는 완고한 과학자가 돼 버린 것이다. 프리온을 발견한 프루시너 박사의 아래 말처럼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과학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과학 지식의 틀에 맞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과학자들이 회의적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최고의 과학은 현재의 패러다임과 맞지 않는 결과들을 주의 깊게 모아 놓은 상황에서 튀어나옵니다.”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

    THE SCIENCE : ‘노벨상은 아무나 타나’…주류 과학계의 핍박을 극복한 연구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패러다임

    기존 상식과 다를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중요할 것 같다.

    2012년 6월 22일 금요일

    美최고 암전문의 ”한국인 먹는 흰쌀밥…” 충격

     

    美최고 암전문의 "한국인 먹는 흰쌀밥…" 충격
    [중앙일보] 입력 2012.06.23 00:56 / 수정 2012.06.23 11:53
    [사람 속으로] 미국 최고 암병원 MD앤더슨 종신교수 김의신
    담배보다 나쁜 게 동물성 기름 … 나이 들수록 삼겹살은 피하라

    미국 대표적인 암 전문 병원 MD앤더슨 암센터의 종신교수인 김의신 박사는 “동물성 기름을 섭취하면 서양인은 피하지방이 되고 동양인은 내장지방으로 쌓인다. 그러니 올리브 오일 같은 식물성 기름을 많이 먹어라. 우리가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보리밥·된장·고추장 등이 돌이켜보면 모두 건강식이었다”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미국 최고의 암 전문 병원-텍사스대학교의 MD앤더슨 암센터다. 연간 연구비용만 6000억원이 넘는다. 단일 연구기관으로선 암 연구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암 연구비의 15%는 기부금으로 채워진다. 세상이 MD앤더슨에 거는 기대는 그만큼 크다. MD앤더슨이 암 연구의 최전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종신교수가 된 한국인이 있다. 김의신(71) 박사다. 그는 1991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최고의 의사(The Best Doctors in America)’에 뽑히기도 했다. 연간 MD앤더슨을 찾는 한국인 암환자는 약 600명이다. 그중에는 대기업의 오너들도 있다. 김 박사는 “9·11 이전만 해도 외국에서 오는 환자가 3분의 1이었다. 중동의 왕족들도 많이 왔다. 9·11 이후에는 미국 입국이 어려워져 이들의 발걸음이 확 줄었다”고 말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재력 있는 암환자들이 찾아가는 곳이 MD앤더슨이다.
    김 박사는 세계적인 핵의학 전문가다. 의료 선진국에서 한국인 의사의 명예를 드높였다는 이유로 국민훈장 동백장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런 김 박사가 18일 인천의 가천 길병원을 찾았다. 암센터 11층 가천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암 이야기’ 강연을 했다. 청중석에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병원복을 입은 환자들, 또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염려하는 이들이 앉아 있었다. 김 박사는 30년 넘는 세월 동안 암 연구를 하며 꿰뚫은 ‘암에 대한 통찰’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때로는 직설적이었고, 때로는 유머가 넘쳤다. 강연을 마친 그와 마주 앉았다.

    김의신 박사가 종신교수로 있는 MD앤더슨 암센터.

    “담배보다 몸에 나쁜 것이 동물성 기름이다. 피자나 핫도그 등 기름에 튀긴 음식, 지방이 많은 삼겹살 등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청중의 눈이 동그래졌다. 삼겹살은 한국인에게 친근한 음식이다. 그런데 피하라니.
    ●주장이 과격하게 들린다. 왜 삼겹살을 피하라고 하나.
     “미국에선 그런 음식이 베이컨이다. 젊을 때는 괜찮다. 20대에는 동물성 기름을 먹어도 분해 효소가 왕성하게 분비돼 문제가 없다. 그런데 40대가 넘어서면 달라진다. 동물성 기름을 소화하는 효소가 적게 나온다. 그래서 기름이 몸 안에 쌓이게 된다. 서양인들이 동물성 기름을 먹으면 피부 아래 지방이 쌓이는 피하지방이 된다. 그래서 뚱뚱해진다. 동양인은 다르다.”
    ●동양인은 어떻게 다른가.
     “동양인은 겉모습이 그다지 뚱뚱해지진 않는다. 대신 기름기를 많이 먹으면 내장에 기름이 찬다. 내장지방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뚱뚱하지 않으니까 먹어도 되겠지’라고 다들 생각한다. 그건 큰 착오다.”
    ●왜 착오인가.
     “나이가 들수록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쌓인다. 혈관벽에 기름이 찬다. 그런데 그게 들러붙어 있다가 어느 순간 뚝 떨어진다. 그리고 몸 안을 돌다가 조그만 모세혈관에 가서 달라붙는다. 뇌에 가서 들러붙으면 중풍이 오고, 치매가 온다. 간에 기름이 끼면 지방간이 되고, 간암이 된다. 췌장에 기름기가 차면 당뇨병이 생긴다.”
    ●그럼 어떻게 먹어야 하나.
     “40대가 넘어가면 몸에서 분해 효소도 적게 나오고, 인슐린도 적게 나온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식사량을 줄여야 한다. 소식(小食)해야 한다. 삼겹살도 양을 줄여야 한다. 몸은 40대인데 20대 때 먹던 습관대로 먹으면 곤란하다. 나도 예전에는 배가 아플 만큼 많이 먹었다. 이젠 식사량을 줄였다.”
     김 박사는 “암보다 더 무서운 게 혈관성 병”이라고 했다. “나쁜 암은 진단 후 1년 안에 사망한다. 거기서 끝이다. 그런데 치매나 중풍 같은 혈관성 병은 10~20년씩 투병하며 가족을 힘들게 한다.” 혈관성 병을 예방하다 보면 암 예방도 된다는 지적이었다.
     김 박사는 ‘암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꼬집기 시작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치료하기 힘든 암환자가 한국인이다. 그들은 암으로 죽기 전에 굶어서 죽는다. 치료를 견디지 못해서 죽는다”고 말했다.
    ●굶어 죽는다니. 무슨 뜻인가.
     “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잘 먹어야 한다. 고기도 먹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병원에서는 암환자에게 고기를 못 먹게 한다고 들었다. 항암 치료는 독하다. 일종의 독약을 먹는 셈이다. 그게 몸에 손상을 많이 준다. 우리 몸의 단백질을 파괴한다. 그래서 단백질을 보충해야 한다. 단백질이 가장 많은 게 고기다.”
    ●암 진단 후의 방사선 치료도 마찬가지인가.
     “그렇다. 쉽게 말해 방사선 치료는 우리 몸을 확 구워버리는 거다. 불고기 굽는 것과 똑같다. 기운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때 고기를 먹으면서 기운을 차려야 치료를 견딜 수가 있다. 그런데 채식만 하거나 잘 먹지 못하면 체중이 빠진다. 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나 방사선 치료에 들어가면 절대 체중이 빠져선 안 된다. 입맛이 없고 체중이 떨어지면 항암 치료제도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는 암환자는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치료를 견디지 못해 죽게 된다.”

    암 환자에게 권하는 오리고기와 현미잡곡밥.

    ●어떤 고기가 좋은가.
     “나는 개고기나 오리고기를 권한다. 동물성 기름이 적거나 불포화지방이기 때문이다. MD앤더슨에서 항암 치료를 하다가 두 환자에게 2~3개월간 쉬라고 했다. 기운이 너무 떨어져서 그냥 쉬다 오라고 했다. 한 사람은 하와이에 가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건강 숙소’에 가서 채식만 하다 왔다. 얼굴이 반쪽이 돼서 왔더라. 또 한 사람은 한국에 가서 개고기 먹고서 체력을 보충하고 왔다. 이후 항암 치료를 두 번째 사람이 훨씬 잘 받았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물을 많이 마시라”고 주문했다. 독한 약을 먹는 만큼 물을 많이 마셔야 속에서 희석이 된다는 얘기다.
     그는 암을 대하는 자세도 중요하다고 했다. 한국인과 미국인은 아주 다르다고 했다. MD앤더슨에는 한국의 재력가도 꽤 온다. 김 박사는 “한국인 암환자들이 의사에게 꼭 묻는 질문이 있다. 미국인들은 그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운을 뗐다.
    ●그 질문이 뭔가.
     “‘선생님, 제가 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다. 나는 미국인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의사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그건 하나님만 아는 거다.”
    ●그 물음에 미국 의사들은 뭐라고 답하나.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럼 한국인 암환자들은 ‘여기가 세계 최고의 병원인데, 어떻게 그것도 모르느냐?’고 따진다. 내가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미국인 의사의 말이 맞다. 몇 년이나 살지 그걸 의사가 어떻게 알겠나. 그런데 재미있는 건 한국인 환자 중에 직업이 의사인 사람들이 그걸 더 많이 물어본다.”
     그 말 끝에 김 박사는 “한국인 암환자 중에 의사 말을 가장 안 듣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저었더니 그는 “의사와 간호사, 약사, 변호사들이다. 그런 직업을 가진 암환자를 치료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왜 그들을 치료하기가 어려운가.
     “그냥 시골에서 온 순박한 사람들은 의사가 처방한 대로 따라온다. 그런데 의사 직업을 가진 한국인 암환자에게 항암약을 처방하면 집에 가서 밤새 인터넷을 한다. 약에 대한 성분과 부작용을 조사한다. 그런데 부작용 내용을 보다 보면 어김없이 ‘죽을 수도 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럼 그 다음날 병원에 와서 따진다. 왜 내게 이런 약을 처방하느냐고 말이다.”
    ●환자 입장에선 그렇게 따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약을 의심하고, 의사를 의심하면 환자의 마음이 닫힌다. 마음이 닫히면 몸도 닫힌다. 그럼 치료가 안 먹힌다. 그게 진짜 문제다. 한국 사람은 ‘얼마나 사느냐, 이 치료법이 내게 잘 듣겠는가’만 묻는다. 그런데 그동안 복용한 약명과 용량을 정확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인 환자는 반대다. 그들은 앞의 질문은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지금껏 복용한 약명과 양을 정확하게 적어서 온다. 병실에 가도 한국인과 미국인 암환자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제 동료 중에도 암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 병문안 가서 나는 우는 걸 본 적이 없다. 31년 동안 숱하게 암환자를 대하면서도 미국인 환자나 가족이 우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인 환자나 가족은 대화를 나누다가 울음이 복받쳐서 얘기를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다른 건가.
     “미국인은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은 신이 결정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병은 전적으로 의사에게 맡긴다. 자신은 마음과 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집중할 뿐이다. 그래서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한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회사에 출근을 한다. 죽기 전날까지 일을 하는 경우도 봤다. 그럼 암에 대해서 걱정하는 시간이 훨씬 줄어든다. 미국인 암환자들은 항암 치료를 받으며 구역질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한국인은 다르다. 암에 걸리면 일단 직장부터 그만둔다. 그리고 하루종일 암과 죽음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건 환자의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인 환자는 대부분 구역질을 한다.”
     김 박사는 30년 넘게 암을 연구하고, 암 환자를 상대하고, 암 치료를 해왔다. 그가 보는 암의 원인은 뭘까. “우리 몸에는 좋은 성분과 나쁜 성분이 늘 같이 있다. 그 둘이 균형을 이루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떤 요인에 의해 균형이 깨지면 병이 생기는 거다. 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균형을 깨뜨려 암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너무 많아서 암의 이유를 딱히 뭐라고 지적할 수는 없다.”
     그는 공기를 예로 들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에는 균이 잔뜩 있다는 거다. 똑같은 곳에서 공기를 마셔도 어떤 사람은 감기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다. “호르몬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에게는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함께 있다. 둘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여성 호르몬이 너무 많으면 유방암이나 자궁암이 생긴다. 반면에 남성 호르몬이 너무 많으면 전립선암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 몸 안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 박사는 “하얀 쌀밥을 조심하라”고 강조했다. “흰 쌀밥은 완전히 흰 설탕이라고 보면 된다. 설탕을 숟가락으로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 쌀밥을 오래 씹어 보라. 그럼 단맛이 난다. 내가 직접 실험도 해봤다. 흰 쌀밥만 먹고 나서 당을 측정하면 확 올라간다. 그런데 잡곡밥을 먹고 당을 측정하면 내려간다. 그런데 한국의 식당에 가면 대부분 쌀밥만 나온다. 보리밥이나 잡곡밥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 병원에서도 식단에 흰 쌀밥을 내놓는 곳이 있다. 그건 상식 이하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차원에서라도 식당에서 흰 쌀밥이 나오면 곤란하다. 미국은 전체 예산의 17%가 의료비로 나간다. 그게 앞으로 25%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니 예방의학이 얼마나 절실하고 중요한 일인가. 흰 쌀밥 대신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먹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중요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몸도 함께 변한다. 늘 청춘이 아니듯이. 김 박사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의 기관에 탄력성이 줄어든다. 탄력성이 줄면 구불구불하게 주름이 잡힌다. 그럼 구불한 지점에 변 같은 배설물이 고인다. 그럼 거기에 염증이 생기고, 암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암에도 기적이 있나.
     “있다. 암에도 기적이 있다. 지금껏 나는 기적적인 환자를 최소한 20명 정도 봤다. 우리 병원에서도 모두 포기하고 임종을 위해 호스피스동으로 간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죽음을 기다리는데 안 죽더라.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검사를 해보니 암이 없어진 건 아니더라. 다만 암이 활동을 멈추고 있더라. 그건 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거다. 또 난소암 4기인 한국인 여성도 있었다. 정상인은 암 수치가 40~60 정도다. 당시 그 여성은 암 수치가 800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수치가 점점 떨어졌다. 그러더니 정상치가 됐다. 검사를 해보면 암 덩어리는 그대로였다. 어떤 덩어리는 더 커진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껏 18년째 잘 살고 있다.”
    ●기적적인 치유를 한 환자들의 공통점이 있나.
     “있다. 겸손이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에게 모든 걸 맡기기도 했다. 그럴 때 뭔가 치유의 에너지가 작동했다.”
    ●독자들이 암을 예방할 수 있게 조언해 달라.
     “암의 원인은 정확히 모른다. 그런데 암은 유전적 성향이 있다. 그래서 가족력에 암이 있는 사람은 유심히 봐야 한다. 가령 아버지가 위암에 걸린 적이 있다든가,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린 적이 있다면 그 암에 대해 특별히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런 암이 왜 생겼는지 알아야 한다. 담배를 많이 피운 게 원인이라면 본인은 절대 담배를 피워선 안 된다. 그리고 해당하는 암에 대한 정기 검진도 자주 해야 한다. 남다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암은 예방이 최고다.”
    ●그래도 암에 걸린 사람은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나.
     “나는 크리스천이다. 기독교인의 눈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암에 걸리는 것은 뭔가 시련을 줘서 나를 단련시키고자 함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어느 순간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암에 걸린 덕분에 내가 소중한 뭔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치유의 에너지가 작동한다. 그런데 ‘암 걸린 게 억울해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힘들다. 오히려 암이 더 악화하기 쉽다. 그러니 마음 가짐이 얼마나 중요한가.”
    김의신 박사는
    김의신 박사는 전북 군산 출신이다. 가천대학교 이길여 총장과 동향이다. 서울대 의대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그는 “나와 이길여 총장은 앞날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지나간 일에 대해 돌아보지 않는 점이 닮았다. 미국에서 쌓은 연구 노하우를 미래 암치료를 짊어진 한국의 젊은 의사들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31년간 몸담았던 MD앤더슨을 올해 떠나는 김 박사는 이런 인연으로 9월부터 가천 길병원에서 석좌교수로 일할 예정이다.
     김 박사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가정교사를 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그와 동급생이었다. 전교 1등이던 그에게 교장 선생님이 아들 방에서 함께 지내길 권했다. 그렇게 시작한 가정교사 생활은 대학 졸업 때까지 계속됐다. 군의관으로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서울대에서 예방의학을 전공한 그는 1966년 서울대 의과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와 워싱턴대를 거쳐 존스홉킨스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과, 임상의학, 핵의학 등 세 분야의 전문의다. 텍사스대 의과대학 내과 교수, MD앤더슨 암센터 종신교수, 미주 한인의학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김의신 박사가 말하는 암 예방법
    ① 가족력에 암이 있는 사람은 해당하는 암을 공부하라. 그리고 해당 암에 대한 정기검진을 자주 하라.
    ② 동물성 기름 섭취를 피하라. 흰 쌀밥도 마찬가지다. 카레에 담긴 카카민이란 성분은 항암 효과가 크다. 카레를 자주 먹어도 좋다. 고기는 기름이 적은 개고기나 오리고기가 좋다.
    ③ 40대가 지나면 몸에서 분해효소도 적게 나온다. 적게 먹어라.
    ④ 적당한 운동을 하라. 걷는 운동이 좋다. 심장에 무리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⑤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죽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는 데는 종교가 도움이 된다.

    美최고 암전문의 ”한국인 먹는 흰쌀밥…” 충격 - 중앙일보 뉴스

    2012년 6월 19일 화요일

    THE SCIENCE : 美 국립보건원 노벨상 수상자 130명 배출 비결은…

     

    美 국립보건원 노벨상 수상자 130명 배출 비결은…

    [과학벨트의 미래 사람에 달렸다]<3> 박정현 미국국립보건원 박사

    2011년 09월 02일

    “정년 없고 풍족한 연구비 지원, 시간 걸리는 기초연구에 최적”

    “문턱을 넘긴 힘들지만 일단 연구원으로 채용되면 전폭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정년제도도 없습니다.”
    2001년부터 미국국립보건원(NIH)에서 교수급 연구책임자(PI)로 있는 박정현 박사는 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NIH의 강점을 이같이 말했다. 박 박사는 NIH 내 한인 과학자협회(NIH-KSA) 회장을 맡고 있다. 협회에는 한인 박사급 연구원 250여 명이 소속돼 있으며 이 가운데 PI는 11명이다. 국가과학자인 이서구 이화여대 석좌교수도 NIH의 PI 출신이다.
    NIH는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시에 있다. 1887년 미국 이민자들의 검역을 담당했던 조그만 방역소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1.3km²(약 40만 평)가 넘는 광활한 터에 27개 연구소가 들어선 대형 연구기관으로 성장했다.
    올해 NIH 예산은 310억2000만 달러(약 33조5000억 원)에 이른다. 한국의 전체 연구개발(R&D) 예산이 약 16조 원인데 이 예산의 두 배나 되는 돈을 한 연구기관에서 주무르는 셈이다. 이 가운데 약 90%는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 의대 병원 연구소 등 3000여 곳, 32만5000여 명의 연구자에게 돌아간다. 이런 지원 정책 덕분에 NIH에서 연구비를 지원 받아 노벨상(주로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130명이 넘는다.
    예산의 10%가량은 NIH 소속 연구원 6000여 명의 연구비로 지원된다. 박 박사처럼 연구를 총괄하는 PI로 발탁되면 자신의 실험실을 만들 수 있다. PI는 함께 연구할 연구원의 월급과 연구장비, 실험 소모품을 사는 데 필요한 연구비를 풍족하게 지원받는다. 박 박사는 “연구원 1명당 연간 2만3000달러(약 2500만 원)가 지원되고 첫해에는 1억 원 정도가 별도로 지원된다”면서 “4년 동안 이 정도 규모의 연구비를 매년 받는다”고 말했다.
    NIH의 이런 제도는 ‘내부연구단’ 프로그램으로 불린다. 내부연구단은 미국 내에서도 NIH만 운영하는 독특한 연구지원제도다. NIH가 요구하는 연구 역량만 검증되면 연구자가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금전적 뒷받침을 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매년 한 쪽 분량으로 연구 진행 상황만 알리면 된다. 다만 4년 뒤 실험실 현장 실사에서 우수하다고 평가를 받아야 지원이 유지된다. 박 박사는 “연구 결과보다는 연구내용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하는 분위기”라면서 “이런 연구환경 덕분에 ‘하이리스크-하이리턴(고위험 고수익)’ 연구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정년제도도 없다. 박 박사는 “20대 연구자와 70대 연구자가 한 연구소에 있는 게 NIH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광경”이라며 “80세가 넘은 연구원도 종종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년이 없는 만큼 NIH 연구원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초연구를 다각도로 마음껏 할 수 있다. 박 박사는 “소장이 됐다가도 보직을 끝내면 다시 일선 연구자로 돌아와 연구 경험을 후배에게 전수하고 이것이 후배에겐 또 다른 자극제가 된다”고 말했다.
    이 덕분에 NIH가 내놓는 연구 수준은 세계 최고다. NIH는 전 세계 기초의학과 생명공학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병 등 NIH가 다루는 연구 주제만 229개에 이른다. NIH는 미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이지만 원장과 NIH 산하 국립암연구소(NCI) 소장은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다. 나머지 소장직은 외부 공모로 채용한다. 27개 연구소 예산은 소장들이 직접 의회활동으로 확보한다. 그만큼 독립성이 보장된다는 뜻이다. 박 박사는 “노벨상 수상자라도 경영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소장을 맡기지 않는 게 NIH의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현경 동아사이언스 기자 uneasy75@donga.com

    THE SCIENCE : 美 국립보건원 노벨상 수상자 130명 배출 비결은…

    2012년 6월 12일 화요일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 눈물의 회개… "아들에게 교회 세습한 건 최대 실수"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 눈물의 회개… "아들에게 교회 세습한 건 최대 실수"

  • 입력 : 2012.06.13 13:01 | 수정 : 2012.06.13 13:39

    서울 역삼동 충현교회 전경 / 조선일보 DB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준 서울 충현교회 김창인 원로목사가 공개적으로 세습을 회개했다.
    김창인 원로목사는 12일 경기도 이천의 한 교회에서 열린 원로 목회자 예배 모임에서 긴급성명서를 발표하고 “충현교회 제 4대 목사를 세우는 과정에 관여하면서 목회 경험이 없고, 목사의 기본 자질이 돼 있지 않은 아들 김성관 목사를 무리하게 지원해 위임목사로 세운 것을 나의 일생일대 최대의 실수로 생각한다”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저의 크나큰 잘못이었음을 회개한다”고 말했다. 
    김 원로목사는 “더 늦기 전에 나의 잘못을 한국교회 앞에 인정하고, 그와 더불어 충현 교회가 회복되는 것을 나의 마지막 사명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 1953년 교회를 개척한 김 원로목사는 1980년에 은퇴해 원로목사가 됐지만 1997년 뒤늦게 신학을 공부한 아들 김성관 목사를 담임 목사로 세웠다.  이후 아버지와 아들은 교회운영방향을 놓고 계속 갈등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제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충현교회 회복을 위한 긴급성명서 /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김 원로목사는 “김성관 목사는 지난 4월20일자로 은퇴연령(만 70세)이 지났기 때문에 12월31일 부로 충현교회 당회장과  재단이사장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직책에서 떠나고, 임기연장을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또 “그동안 김성관 목사는 교회를 부흥시키기는 커녕 거룩한 성전 강단을 수없는 거짓과 욕설로 채웠고, 자기만이 복음을 소유한 자라고 외치면서 모든 목회자와 교계를 모욕했다”며 “아버지가 20억원을 들여서 일본 칼잡이를 고용해 아들을 죽이려했다는 거짓설교를 수년 동안 해오면서 선량한 교인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고, 교회를 현저하게 쇠락케했다”고 주장했다.
    김 원로목사는 “김성관 목사는 충현교회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자격이 없으므로 악한 일을 더 이상하지 말고 자숙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교회를 떠나라”고 말했다. 그는 성명서 낭독을 마친 뒤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도 했다.
    이와 관련 CBS 노컷뉴스는 교회관계자들은 서울 역삼동에 있는 교회와 경기도 광주 기도원 및 공동묘지 부지, 현금등을 합하며 충현교회의 재산은 1조원대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 눈물의 회개… "아들에게 교회 세습한 건 최대 실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012년 6월 9일 토요일

    80만원으로 美횡단한 한국 대학생 "숙식은…"

     

    [Why] [한현우의 커튼 콜] 80만원으로 美횡단한 한국 대학생 "숙식은…"

  • 입력 : 2012.06.09 03:32 | 수정 : 2012.06.10 06:54

    독도·히말라야·아마존·美대륙… 세계가 좁다는 이 청년, 최종 꿈은 NASA

    토익이 인생 전부인가_대학에 앉아만 있기 지루해 마라톤 도전 3개월 죽어라 뛰어 3시간 50분 만에 완주 "나도 할 수 있구나, 뼛속까지 바꿔보자"
    20대를 불태우리라_철인3종 대회 해낸 뒤 내친김에 해병대 독도까지 헤엄치고, 아마존·히말라야… 최근 美대륙 자전거 무전여행까지 블로그엔 "매일매일 기막히게 특별했다"
    실패한 도전_어릴 적 꿈 배드민턴 국가대표 도전 런던 금메달 목표였지만 선수 벽 못 넘어 가르친 감독들 "너 같은 또라이는 처음"
    아직 남은 꿈_ 여행 중 만난 어느 교수가 "네 경력에 좀 더 보태면 하버드 간다" 중·고교 땐 꿈도 못 꾼 하버드大 단독비행 세계일주 성공하면 도전

    무모함이 청춘의 특권이라지만 경희대 3학년생 이동진(24)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평범했던 건축공학과 학생이 히말라야 5700m 봉우리에 오르고, 울진~독도 240㎞ 수영 횡단을 했으며, 아마존 정글마라톤 222㎞를 완주하자마자 자전거로 미국 대륙을 횡단했다. 특히 자전거 미국 횡단 때는 숙식의 3분의 2를 길에서 만난 사람 집에서 무료로 해결했다. 그는 "대기업에 취직하지 못하면 낙오자 취급 하는 현실이 정말 싫다"며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기회를 찾는 데 나의 20대를 모두 연소(燃燒)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담대한 청년을 지난 4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의 도전이 자전거 미국 횡단입니까.
    "작년 10월 22일 뉴욕 맨해튼 46번가를 출발해 12월 20일 LA 한인타운까지 꼬박 60일 동안 자전거로 미국 6000㎞를 달렸습니다. 중간에 시카고에서 멤피스까지 900㎞ 구간은 버스를 탔고요."
    ―돈이 거의 들지 않았다면서요.

    자전거 미국 횡단 때 갖고 다녔던‘글로벌 철인3종’플래카드.

    "60일 중 40일을 여행 도중 만난 미국인들 집에서 잤습니다. 잘 곳을 구해야 할 시간이 되면 길에서 만난 아무나 붙잡고 '나는 대한민국 대학생이고 지금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해주면 내가 경험한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러면 짧게는 5분, 길게는 5시간 만에 숙식을 제공해주겠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어요. 잘 곳을 찾지 못하면 교회나 공원에서 야영을 했어요. 60일간 숙식에 든 비용이 30만원쯤 됩니다. 자전거와 노트북 수리비까지 합치면 총 80만원가량이 들었어요."
    그의 블로그 '가슴 뛰는 젊은이 미스터 리'를 보면 미국 횡단 첫날 숙소를 구하는 장면이 잘 묘사돼 있다. 해 질 녘 뉴저지의 작은 마을에서 미식축구 경기장을 찾은 그는 그곳에 모인 학부모 10여명에게 숙식을 부탁했으나 모두 거절당한다. 마지막에 그는 한 교회를 소개받아 그 교회 목사 집에서 첫날 밤을 보내게 된다. 그는 "늘 그런 식으로, 달리는 트럭을 세워서 물어보거나 동네에서 세차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룻밤 재워주면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제안해 숙소를 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전거 미국 횡단 직전인 작년 10월 9일부터 15일까지 브라질에서 열린 '아마존 정글마라톤'에 참가해 정글 222㎞를 완주했다. 총 15개국 45명이 출발한 이 마라톤의 완주자는 11명에 불과했다. 당시 그는 아시아나항공으로부터 브라질 왕복 항공 티켓과 300만원을 후원받았는데, 미국을 경유하는 이 티켓 덕분에 '자전거 미국 횡단'을 계획했다.
    "미국에 3개월이나 체류할 수 있는 티켓이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도 뭔가 도전해보자고 생각한 끝에 자전거 횡단을 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에 같은 과 친구(김현수)가 동행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정글마라톤을 마치고 뉴욕으로 갔고, 친구는 서울에서 출발해 뉴욕에서 만나 여행을 시작했지요." 두 사람의 여행은 40일째인 애리조나주 세도나까지 계속됐다. 그곳에서 두 친구는 "이제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마무리하자"며 각각 다른 루트로 대륙 횡단을 마쳤다.
    ―자전거 미국 횡단도 매우 힘든 일인데 어떻게 숙식을 공짜로 해결할 생각을 했나요.

    “도전할 때마다 두려움이 있지만 그 두려움 뒤에 얼마나 큰 기회가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도전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 대학생 이동진. 물불 가리지 않는 그의 도전기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왼쪽부터 1울진~독도 수영횡단 선상, 2아마존 정글마라톤 출발 모습, 3자전거 미국 횡단, 4히말라야 등정, 5정글마라톤 골인 모습. / 이동진 제공

    "정글마라톤을 마치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 돈이 30만원 정도밖에 없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것 무전여행으로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덤빈 거죠. 자전거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달고, 항상 웃으면서 말을 걸었어요. 우리가 거쳐온 곳의 지도와 사진을 보여주며 진심으로 대하면 사람들은 금방 마음을 열었어요. 어떤 사람은 모텔을 잡아주겠다고 하기도 했는데, 우리는 '모텔에 가려는 게 아니다. 당신 가족과 이야기를 통해 문화 교류를 하고 싶다'며 사양했지요. 여행 20일 만에 현금을 주는 사람도 만났는데, '밥과 잠자리를 주면 충분하다. 돈은 받을 수 없고 마음만은 받겠다'고 말했더니 그분이 눈물을 흘렸어요. 우리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는 미국 횡단 마지막 날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60일간 버스·트럭·승용차·요트·비행기·캠핑카를 탔고, 노숙자보호소부터 60억원짜리 집에서까지 잤다. 현지인 300여명을 길 위에서 만났다. 정말 매일매일이 기막히게 특별했다'.
    그는 여행 계획 당시 유명 자전거회사 5곳에 제안서를 보내 자전거 협찬을 의뢰했으나 답신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자전거 월간지의 주선으로 국내 자전거회사로부터 자전거와 용품을 후원받았다. 그의 미국 횡단기는 그 자전거 잡지에 현재 연재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이런 도전을 좋아했습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 흥사단에서 주최한 남해안 도보 일주에 참가했고, 6학년 때도 인천~강릉 도보 횡단을 했어요. 그때는 도전이라기보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참가했던 건데 고생을 많이 한 기억이 납니다. 중·고교 때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저의 도전은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를 결정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대입 재수가 첫 번째 도전이었군요.
    "저는 오지(奧地) 탐험가나 도전자가 아니에요. 고교 때 공부를 안 해서 대학에 떨어졌는데 제게 주어진 길은 세 가지였어요. 재수, 취업, 군대. 그래서 고깃집에서 하루 10시간씩 서빙하는 일을 했는데 너무 힘들고 무의미한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 인생의 마지막 공부를 해보자'며 재수를 택했죠. 1년간 친구 한 명도 안 사귀고 하루 17시간씩 공부를 했는데, 대입 공부가 정말 재미있다는 걸 알았어요. 제가 원하는 학교는 항공대였지만 시력 때문에 떨어지고 경희대에 합격했죠."
    ―그다음 도전은 무엇이었습니까.

    정글마라톤 완주 후 퉁퉁 부은 발.

    "대학에 들어가 교내 뮤지컬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제 재능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고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나를 깨보는 일을 찾고 싶었는데, 앉아서 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삶에 나를 던져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마라톤이었어요. 남들보다 특별히 운동을 잘한 것도 아니었지만 3개월간 열심히 훈련해서 2008년 마라톤 풀코스에 나갔는데 3시간 50분 만에 완주했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죠. '나도 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그 3개월 뒤에 철인3종 대회를 완주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약하고 소심하고 작은 것도 결정하지 못하던 내가 철인3종을 완주하다니. 그다음 생각한 게 군대였어요. 저는 군대야말로 나를 뼛속까지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해병대에 자원해서 포항 1사단에서 근무했습니다. 해병대 자원한 친구들이 나름대로 잘나고 힘세다 하는 친구들이었는데도 도전 의식은 강하지 않더라고요. 해병대 마라톤을 비롯해 힘든 훈련에 모두 자원해서 나갔어요. 전역을 앞두고 히말라야 원정단에 참가하기로 하고 제대 직후 히말라야 K2 옆의 곤도고로라(5700m) 원정을 다녀왔지요."
    ―주로 몸으로 하는 도전을 했군요.
    "몸으로 했지만 제 정신과 육체가 다 바뀌었어요. 마냥 앉아서 공부만 하는 친구들은 취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지만 '왜 사는가'에 대한 고민은 안 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가는 길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저를 바꾸고 제 인생을 바꾸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도전을 하면서 휴학을 하려고 교수님을 찾아갔더니 교수님이 처음엔 '나는 건축공학과 교수이고 학생들을 건설회사에 취직시키는 사람이다. 왜 이런 쓸데없는 일로 젊음을 낭비하느냐'고 하셨어요. 그러나 나중에는 '너에게 이제 대학은 의미가 없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라'면서 노트북 컴퓨터를 선물해주셨어요."
    ―작년 여름엔 독도까지 수영도 했다면서요.
    "해군에서 주최한 울진~독도 240㎞ 수영횡단팀에 지원해서 다녀왔어요. 총 33명이 번갈아가며 4박5일간 쉬지 않고 헤엄쳐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정글마라톤을 앞둔 훈련의 의미가 강했어요." 그는 울진~독도 수영 횡단과 아마존 정글마라톤, 자전거 미국 횡단을 묶어 스스로 '글로벌 철인3종'이라고 이름붙였다.
    ―모든 도전에 다 성공했습니까.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그렇지 않아요. 자잘한 실패와 좌절도 많았습니다. 가장 큰 실패는 배드민턴 국가대표에 도전한 것이었어요. 히말라야에 갔다 온 뒤 2010년 9월부터 2011년 1월까지 5개월간 하루 15시간씩 배드민턴 훈련을 했어요. 제 초등학교 때 꿈이 배드민턴 선수였거든요. 부모님이 말리셔서 못했던 것을 '더 늦기 전에 해보자. 지금부터 열심히 해서 국가대표가 되고, 2012년 런던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훈련하자'고 마음먹고 한국체대, 성남시청, 성남 중부초등학교 배드민턴 감독님들을 찾아다니며 배웠어요. 그렇지만 10년 넘게 운동을 해온 사람들의 벽을 제가 몇 개월 만에 넘기란 불가능했지요. 그때 저를 가르친 감독님들은 '배드민턴 경력 30년 만에 너 같은 또라이는 처음 본다'고 했어요. 주변에서도 미친 짓이라고 했고요. 그렇지만 저는 고정관념이란 게 자신의 경험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안된다고 하면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배드민턴은 성공할 수 없는 도전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게 많으니 대학 졸업도 늦어지겠군요.
    "저는 20대가 제 안의 가능성에 엄청난 기회를 줄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20대이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어요. 시간이 지난 뒤 '그때 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대학 1~2년 늦게 졸업한다고 낙오자 되는 것도 아니죠. 남들이 다 가는 길로 가서 후회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 저를 던져보고 싶어요.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말 궁금하거든요."
    ―부모님도 지원해 주시나요.
    "제가 해병대나 히말라야, 정글마라톤에 도전할 때마다 어머니가 말리셨지요. 절대 안 된다고요. 그렇지만 그때마다 저는 부모님 앞에서 한 시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요. '제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고 싶다. 제게 취업은 행복이 아니다'라고 말이죠. 이제 부모님은 '우리와 너의 삶은 너무 다른 것 같다. 네 뜻대로 해보라'고 하십니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입니까.
    "히말라야에 함께 올랐던 친구(김일영)와 함께 6월 말쯤 세계 일주를 떠날 겁니다. '나는 세계 일주로 경제를 배웠다'는 책을 쓴 코너 우드먼처럼 100만~200만원 정도의 자본금을 갖고 중국이나 인도로 출발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의 특산품을 다른 나라에 파는 형식으로 총 6개월간 '거래여행'을 할 생각이에요. 과연 우리가 얼마나 흑자를 낼지, 아니면 쫄쫄 굶다가 집에 올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가진 게 시간뿐인 우리는 20대라는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겁니다. 저는 파일럿이 되어 단독 비행으로 세계 일주 하는 꿈을 갖고 있어서 조만간 비행학교에 들어가 조종사 자격증을 딸 겁니다. 그리고 단독 비행 세계 일주 꿈을 이루면 하버드대에 도전해볼 생각이에요. 미국 여행 중에 만난 교수님이 '네 경력에 실력만 조금 보태면 하버드대도 갈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중·고등학교 때는 꿈도 꿔보지 못한 것이지만 하버드대에서 전 세계를 이끌어갈 친구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하버드를 졸업하면 보잉사에 입사하고, 결국엔 나사(NASA)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이 이 청년의 꿈이다. 언뜻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계획이지만 도서관에서 토익 점수에 매달려 있던 20대가 어느 날 "독도까지 헤엄치고 아마존 222㎞를 달린 뒤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하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덜 황당하게 들렸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에게 점심을 사주면서 그가 미국에서 숱한 이로부터 숙식을 거저 제공받은 까닭을 알 수 있었다.

  • [Why] [한현우의 커튼 콜] 80만원으로 美횡단한 한국 대학생 "숙식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멋지다’는 표현으로 부족한, 서글프기 까지 한 한 한국 대학생의 꿈틀거림. 그러나 그의 도전은 그의 ‘스펙’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도전으로 다가갈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