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6일 수요일

[학교 폭력, 이젠 그만] 고교생의 아버지, 학교서 여교사 은밀히 불러내 손에 든 우산으로… 충격

 

[학교 폭력, 이젠 그만] 고교생의 아버지, 학교서 여교사 은밀히 불러내 손에 든 우산으로… 충격

  • 김연주 기자

    입력 : 2012.05.17 03:12

    [일진에… 학부모에… 수난당하는 교사들]
    "네가 뭔데? 선생이면 다야?" 막무가내로 찾아가 때리고 사생활 뒷조사 후 괴롭히기…
    "교육청·청와대에 민원" 협박, 반성문 쓰라며 모욕감 주기도

    폭력 학생, 버르장머리 없는 학생 뒤에는 폭력 학부모, 몰상식한 학부모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학부모들의 교사 폭행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자녀의 잘못을 고쳐주려는 선생님을 찾아가 막무가내로 폭행하는가 하면, 교사 사생활을 뒷조사해서 괴롭히고 협박하는 학부모들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학부모는 교사를 존중해주고 자녀 교육을 위해 적극 협조하고 있다고 교사들은 전한다.
    ◇봉변당하는 교사들
    서울의 한 고교 A교사는 3학년 수업 중에 B양이 수행평가를 해오지 않아 교실 뒤에 10여분간 서 있게 했다. 다음 날 오전 학교 교무실로 B양의 아버지 C씨가 찾아왔다. C씨는 A교사에게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자"며 밖으로 불러냈다.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특별활동실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갑자기 문을 잠그더니 손에 들고 있던 긴 우산으로 A교사를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했다. C씨는 A교사에게 "대학 가려면 언어·수학·외국어만 잘하면 되지, 그까짓 수행평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애를 벌주느냐"고 소리질렀다. 얻어맞던 김 교사는 소리를 지르며 벽을 손으로 쳤다. 옆방에 있는 교사들에게 'SOS'를 친 것이다. 마침 옆 교실에 있던 교사들이 벽 치는 소리를 듣고 문을 따고 들어와 C씨를 말렸다.

    지난해 7월 강원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한 학부모(중간)가 교사(맨 오른쪽)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 이 학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학급 반장을 시켜주지 않았다는 것, 자식이 교내 대회에서 장려상밖에 못 탄 것, 수련회 때 휴대전화를 수거한 것 등을 따지며 학생들 앞에서 교사를 폭행했다. 학부모는 교사에게 “네가 뭔데? 선생이면 선생이지 나한테까지 선생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영상 캡처

    김 교사는 이런 봉변을 당하고도 참았다. '엄마가 학부모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아이가 알게 되면 충격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 김 교사는 두어달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사소한 일로 교사에게 항의하거나 교육청·청와대에 '민원'을 넣겠다고 협박하는 일은 부지기수라고 교육계 관계자들은 전한다.
    지난 3월 중순 대전 지역의 중학교 교무실에 2학년 D양의 부모와 할머니가 찾아왔다. 전날 D양이 다른 학생을 때려 생활지도부장이 경위서를 받았는데, 이를 항의하러 온 가족이 '출동'한 것이다. 이들은 교무실에서 "(우리 애가 다른 애랑) 같이 싸웠다는데 왜 우리 애한테만 경위서를 내라고 하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경위서를 쓰게 한 생활지도부장에게는 "아이들 앞에서 우리 애한테 공개 사과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교사에게 "반성문 써내라"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서울 강남 지역의 중학교 E영어교사는 시험 문제를 낼 때마다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힘들다. 지난해 중간고사가 끝나고 한 학부모가 전화 와서 "우리 애 답도 맞다고 해줘야 한다"고 우겼다. 미국에서 3년간 살았다는 그 학부모는 "우리 애가 쓴 답도 미국에서는 가끔씩 쓰이는 말이다. 미국에서 살아보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채점을 하느냐"고 모욕을 줬다.

    E교사는 "교육열 높은 곳일수록 고(高)학력 학부모가 많고, 일부는 자기 지식이나 지위를 내세우며 교사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도 한다"며 "과거처럼 교사라고 대접받고 존경받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최소한 인권은 보장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최근 수업 중에 심하게 떠들고 장난치는 4학년 학생을 몇 분간 일어서 있도록 했다. 다음 날 학생 학부모는 "별것 아닌 일로 내 자식에게 횡포를 부렸다. 깡패 교사냐"고 항의하며 교사에게 "반성문을 써내라. 안 쓰면 법적 대응하겠다"고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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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구무언2….

    2012년 5월 8일 화요일

    “6년간 알바하며 학자금 빚 1600만원 갚았는데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가장 슬퍼”

     

    “6년간 알바하며 학자금 빚 1600만원 갚았는데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가장 슬퍼”
    김진우 기자 jwkim@kyunghyang.com

    ㆍ민주, 청년유니온과 간담
    “여태까지 일하면서 가장 가슴 아프게 들었던 말이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아프다고 이야기하는데….”
    “올해 32세로 구직 중”이라는 청년유니온 송화선 조직팀장은 자신의 사례를 얘기하는 도중 복받치듯 울음을 쏟아냈다. 회의장은 순간 숙연해졌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시울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겨우 감정을 다잡은 송 팀장은 “그 목소리를 들어주셨으면 좋겠다”고 호소하면서 또 울었다.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128호는 아픔과 눈물로 메워졌다. 저임금과 고용불안, 실업에 고통받는 청년들의 절절한 사연들이 생생하게 증언됐기 때문이다. 민주통합당 좋은일자리본부가 세대별 노조인 청년유니온을 초청한 간담회 자리였다.

    송 팀장은 대학 3학년 때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대출받은 학자금 빚 1600만원을 갚기 위해 졸업과 동시에 ‘묻지마 취업’을 했다. 그는 쇼핑몰 사무보조, 영화제 사무국, 방송국 사무보조 등 “구할 수 있는 게 모두 사무보조였다”면서 “이게 사는 건가 싶었다”고 씁쓸해했다.
    송 팀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일 하나만 하지 않았다. 이 일 끝나면 다시 다른 데 출근하길 6년을 해서 지난해 학자금 빚을 갚았다”고 했다. 그는 “청년들이 가장 많이 가는 파견직의 상황은 심각하다. 전면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29세의 정재형 조합원은 20세 때 어머니가 카드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되고 자신도 신용불량자가 됐다. 정 조합원은 “바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게 아르바이트뿐이어서 그걸로 이자 갚고 월세 내고 겨우 목숨을 연명했다”고 말했다. 편의점, 오토바이 배달, 식당, 노점상, 공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급 개 사료를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는 “계란말이 두 개 먹고 나왔는데, 개들이 먹는 고기를 싸갈까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 나아지겠지, 나도 다시 대학 가겠지 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았다”며 한숨지었다.
    청년유니온 양호경 정책팀장은 “지금 청년들이 육체노동, 파견직으로 일하게 되면 그 소득으로 30대에 전세 살고, 40대에 집을 사는 꿈을 키울 수 없는 구조”라면서 “병사로 들어가서 34년 일해도 병장으로 끝까지 남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청년 노동은 그림자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8%로 잡히지만 40%에 달한다”며 “카페베네(커피체인점)의 화려한 불빛 아래 일하지만 그 회사 사람이 아니고, 삼성전자의 가전기기 고치는 일을 하는 곳도 파견업체”라고 밝혔다. 청년유니온 김영경 전 위원장은 “수치에 들어가지 않는 청년들의 절망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길 바란다”며 “이제 절망을 그만 팔고 희망을 사들일 수 있는 세대가 되도록 함께해 달라”고 호소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민주당 당선자들은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 반성한다”(한정애 당선자)며 울먹였고, “민주당이 너무 무책임했다”(우윤근 당선자), “기성세대로서 미안하다”(문재인 당 좋은일자리본부장) 등의 반응을 내놓았다.

    “6년간 알바하며 학자금 빚 1600만원 갚았는데 왜 더 열심히 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가장 슬퍼” - 경향신문

    유구무언….

    2012년 5월 7일 월요일

    [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데모하는’ 아들 걱정한 교수에게 아버지는…

     

    [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데모하는’ 아들 걱정한 교수에게 아버지는…

    기사입력 2012-05-07 03:00:00 기사수정 2012-05-07 1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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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익 받을까 걱정 말고,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먼저 따져라”

    풀무원농장에서 망중한을 보내고 있는 원경선-원혜영 부자. 아들은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를 읽으며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했다.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인 라비는 거름(humus) 인류애(humanity) 겸손(humility)이 언어학적으로 같은 뿌리라며 유기농의 생태철학적 의미를 강조했다. 원혜영 의원 블로그

    자식이 환갑이 넘도록 살아계신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 흔치는 않겠지만 아주 보기 드문 경우도 아닐 것이다.
    그럼, 그 자식이 아버지와 함께한 60년을 기리며 “참 좋았다”고 반추하는 부자지간(父子之間)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아버지의 백수연(白壽宴)을 여는 자식은 또 얼마나 될까? 백수(白壽)는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나이, 그러니까 99세다.
    풀무원농장을 만들고 한국 유기농 농업의 창시자로 존경받는 아버지 원경선 옹(翁)의 백수연 얘기가 나오자 아들 원혜영 민주통합당 의원(61)은 뜬금없이 골프 무용담부터 꺼냈다. 구력(球歷)이 15년이나 되지만 아직도 평균 타수는 110타 정도인데, 홀인원을 두 번이나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회혼례(回婚禮)와 부친의 백수연을 ‘홀인원의 홍복(洪福)’에 비유했다. 알 것 같았다.

    부친의 백수연(4월 17일)을 치른 지 보름여 지난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원 의원을 만났다. 아들에게서 아버지 얘기를 듣고 싶었다.
    ―백수연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죠? 제가 정말 복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옛날 분들 중에서도 늦게 결혼하신 편입니다. 2002년에 두 분 회혼례를 할 때도 친구들이 정말 구경거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백수잔치까지 했으니…. 저도 들어본 적이 없고, 가본 적도 없습니다. 잔치를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냥 친척이나 친지 대상으로 하면 어디까지 초대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아버님하고 직접 관련된 단체, 개인으로 손님을 국한했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 국제기아대책, 유기농업단체인 정농회(正農會), 그리고 환경정의와 아버님이 50년 가까이 이사장을 맡으신 거창고 분들을 모셨습니다. 문희상 의원은 제 경복고 직계 선배시고,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 제정구 전 의원 등과 함께했던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의 좌장이셨는데 신문에서 백수연 소식을 보고 ‘왜 나한테도 연락을 안 했느냐’고 하셔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버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워낙 말을 못 알아들으시기 때문에 글로 써서 보여드렸는데 그냥 씩 웃으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당일엔 단상에 올라가셔서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말을 하셨고….”
    ―지금은 경기도 포천 농장에서 지내시죠.
    “충북 괴산의 풀무원농장에 훗날 ‘원경선 기념관’으로 쓰려고 건축가 승효상 씨가 지은 건물이 있는데 거기서 지내시다가 2년 전 뇌경색으로 몇 달간 누워 계신 뒤 포천으로 옮겼습니다. 둘째 여동생 부부가 농사지으면서 아버님을 돌보고 있는데 워낙 강인하셔서 재활치료를 받고 난 뒤에는 지팡이 짚고 마당 산책도 하고, 또 자동차로 한두 시간 드라이브하시는 것도 좋아하십니다.”
    ―아들의 감회도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광복 직후 정착하신 곳이 바로 지금 제가 사는 곳입니다. 그때는 행정구역이 ‘부천군 오정면’이었는데 지금은 ‘부천시 오정구’입니다. 제가 시장(부천시장)을 두 번 하고, 국회의원을 4번째 하는데 바로 아버지가 정착하신 제 고향 군, 면에서 한 겁니다. 전통적인 시골이라면 그런 게 별일 아니겠지만 대도시에 그런 뿌리를 가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제가 복을 많이 받은 거죠. 그런 생각을 하니 감사한 마음이 한층 더했습니다.”
    그는 재작년 ‘원경선·원혜영 부자의 풀무원 인생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 ‘아버지, 참 좋았다’(비타베아타 출판)를 펴냈다. 그런데 책의 첫 장이 ‘풀무원 창업자는 아버지가 아닌 나’였다. 사람들은 자기를 풀무원 창업주의 아들로 ‘2세 기업인 출신 정치인’이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에도 그렇게 올라와 있지만 아버지는 농장을 했을 뿐 ‘풀무원’이라는 식품회사를 창업한 건 자신이라는 얘기부터 썼다.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뭔가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라는 일종의 경쟁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천군 오정면’에서 ‘부천시 오정구’로 이어지는 끈을 통해 아버지의 유산(遺産)을 새삼 느끼는 듯했다. 그 유산은 바로 아버지의 삶이었다.
    ―책 제목이 ‘아버지, 참 좋았다’인데,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습니다.
    “책 마지막 문장에 쓴 말이긴 하지만 출판사에서 제목을 잘 뽑은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이 먹으면서 내가 능력이나 노력에 비해 참 복을 많이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복의 근원은 좋은 부모 만나서 잘 배우고, 잘 자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스스로 보기에 당당하지 못한 점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제가 우리 사회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덕분입니다. 아버지한테 가장 일관되고, 핵심적인 게 있다면 바로 실천가이셨다는 겁니다. 초등학교만 간신히 마쳐 콤플렉스가 없지 않으셨겠지만 그만큼 지적 욕구가 강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좋다, 쓸모 있다, 바른 것이다’ 싶으면 바로 받아들이셨습니다.”
    1914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난 아버지 원경선은 열일곱에 소년가장이 됐다. 원경선의 아버지, 그러니까 원 의원의 할아버지는 소 두 마리 값에 해당하는 빚만 남기고 가셨다. 그런데 어느 날, 군청에서 농촌자력갱생운동의 수혜자로 선정됐으니 영농자금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신청한 적도 없는 자금이었다.
    알고 보니 보통학교 6학년 때 장학금을 아껴 쓰고 남은 돈은 학교에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감동한 일본인 교장선생님의 추천 덕분이었다. 땅도 사고 집도 마련했다. 그러나 신앙이 독실했던 원경선은 ‘주일날’ 농장 시찰을 나오겠다는 일본인 관료와 갈등을 빚게 되자 두말없이 땅문서를 돌려주고 농장을 포기한다.
    ―아버님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옳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실천하는 게 당신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유기농이 지금은 친환경 비즈니스로 자리를 잡았지만 아버지는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기농은 일본 기독농민 모임인 ‘애농회’ 발간 잡지에서 처음 보셨는데, 아버지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는 생명농사라는 점에 ‘필’이 꽂히신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게 성경 말씀인데 농약과 화학비료로 이웃을 ‘간접살인’하는 농사를 지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제가 풀무원을 창립할 때 아버지한테 ‘제가 하려는 것은 비즈니스이지 (생명농사) 운동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아버님의 생활신조가 원 의원의 민주화운동에는 혹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감옥생활은 물론이고 서울대에서 세 번 제적, 네 번 복학이라는 사상 초유의 과정을 겪고 입학한 지 25년 만에야 졸업장을 쥐게 됐지만….
    “사실 저는 굉장히 소심한 사람인데 민주화운동을 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버지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서울대에 입학한 후 1학년 교양과정부 학생과장인 김진세 교수가 부천 집으로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경인철도를 타고 부천역에 내려도 우리 집은 역에서 10리나 떨어져 있었고, 버스도 하루에 서너 번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걱정돼 찾아오신 거죠. 김 교수님이 아버지에게 ‘데모를 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게 된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데모를 하는 게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져야 하는 것 아니냐. 잘못하는 일도 아닌데 손해 보니까 하지 말라는 말을 아비가 어떻게 자식한테 하느냐‘면서 딸기나 드시고 가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웃으며) 아버지가 (아들의 학생운동을) 부추긴 거나 마찬가지죠.”
    ―풀무원을 친구인 남승우 현 ㈜풀무원홀딩스 총괄사장에게 맡기고 정치를 한다고 할 때는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아버님은 평소 ‘정치는 도덕 이하’라고 말씀하셨다던데….
    “하나님 기준으로 바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기준으로 잘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사람의 기준으로는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돈의 유혹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기에 ‘돈이 필요하면 사업을 계속하지 왜 정치를 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죠. 아버지는 제 뜻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낸 60년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참 좋았다’고 하는 건 어찌 보면 ‘기억의 재구성’ 같은 것인데, 살아오면서 갈등은 없었습니까.
    “아버지가 농장에 정착한 직후부터 우리 집은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농사에 뜻을 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쟁통에 오갈 데 없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희 형제(2남 5녀)를 포함해 늘 20명 안팎이 머물렀죠. 반찬이 왜 이러냐고 불만을 털어놓기 일쑤였고…. 여하튼 저는 남자라 그런 일이 없었지만 누나나 여동생들은 매일 아침 교복을 갈아입을 곳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누나들에게 ‘강원도 가서 감자만 캐 먹더라도 우리끼리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어머니가 그 얘기를 전해 듣고 가슴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웃으며) 그 덕분에 저는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공동체 생활이란 게 이상은 좋지만 얼마나 엉터리인지 너무 실감나게 겪었거든요.”
    ―책에 보니 ‘아버지는 농사만 유기농으로 했던 것이 아니라 아들도 유기농으로 지으신 분이었다’고 써놓으셨던데,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습니다.
    “유기농이란 화학비료나 농약이 아니라 땅의 본성을 살려 그 힘으로 농사를 짓는 겁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데 제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원경선이라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일찍이 저의 본성을 알고 그걸 살려주셨습니다. 나대로의 길을 가게 해주신 거죠. 그리고 아버지는 무슨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 자식에게 배우고 따라하게 했습니다.”
    거창고 교장을 지낸 전성은 선생은 원경선 옹을 ‘영원한 이사장’이라고 부른다. 전 선생은 ‘아버지, 참 좋았다’라는 책의 서문에 “이 책은 원혜영의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가 아니다. 정신은 이어져 간다는 이야기다”라고 썼다.
    아버지의 정신이 아들에게 이어진다는 것, 그게 바로 영원한 삶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래도 인터뷰 내내 기자의 머릿속을 채운 건 ‘아버지, 참 좋았다’라는 그 한마디였다.
    ● 아버지 원경선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서울YMCA에서 3개월 영어과정을 듣다
    ▽배화여고보를 졸업한 신여성 지명희와 결혼하다
    ▽1949년 경기 부천에 정착해 농장을 설립하다
    ▽1957년 미국인 홀트 씨와 전쟁고아 돕기에 나서다
    ▽1961년 거창고 설립자인 전영창 선생의 부탁으로 재단 이사장을 맡다
    ▽1974년 유기농에 눈을 뜨고 2년 뒤 정농회(正農會)를 만들다
    ▽1989년 정농회, 풀무원 식구들과 함께 국제기아대책 한국지부 설립 운동을 시작하다
    ▽1993년 경실련 환경정의시민연대 이사장을 맡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데모하는’ 아들 걱정한 교수에게 아버지는… : 오피니언 : 뉴스 : 동아닷컴

    소박한 농부이셨던 원경선 이사장님을 27년 전쯤 거창에서 만났다.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감수성이 예민했던 우리들에게 그분은 “하나님, 땅, 정의, 진실”

    같은 말씀을 해 주셨던 것 같다.  풀무원 기업이전 풀무원 공동체에 갔을땐 메뚜기 천지인 논,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

    라”란 공동체 정신 에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분은 마치 묵묵한 이 나라의  황토 같은 분 이였다고 느낀다. 

    2012년 4월 30일 월요일

    ´서울대 약대 女동기중 꼴찌´ 지금은 미국서…

     

    '서울대 약대 女동기중 꼴찌' 지금은 미국서…
    [중앙일보] 입력 2012.05.01 00:50 / 수정 2012.05.01 10:06
    서울 온 김희용 미 국립보건원 수석연구원

    “외국인 여성으로 미국에서 살면서 유리천장이 높았지만 스스로 약점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미국 NIH(National Institutes of Health·국립보건원) 수석연구원이자 세포신호연구실장인 김희용(57·사진) 박사가 대한약학회 초청으로 내한했다. 김 박사는 지난달 27일 모교인 서울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2001년 ‘오메가3’ 성분이 뇌세포 작용을 돕는 메커니즘을 처음으로 규명해 전 세계적인 ‘오메가3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NIH 역사상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종신재직권(테뉴어)을 받았다.
    서울대 약대 대학원을 나와 미국 텍사스 휴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부터 NIH에서 연구를 해왔다. 지방산 연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남편인 강길종(61) 박사는 미 식품의약국(FDA)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김 박사의 서울대 약대 동문(74학번)인 정진호 교수(약학대학장)는 “NIH에서 33년간 근무했던 이서구(69)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남성으로서, ‘국가과학자 1호’로 선정된 점에 견줘볼 때 50대 여성인 김 박사의 현재 NIH 내 위치는 대단히 높은 것”이라고 말했다.

     -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서울대 약대 74학번으로 당시 전체 80명 중 여자 동기가 7명 뿐이었다. 그 중에서 내가 공부를 가장 못했다. 다른 동기들은 졸업할 때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고 학점도 좋았던 데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보충수업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약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거기서 우원식(84) 명예교수님을 만난 뒤론 공부에 흥미가 생겼다. 같은 과 선배였던 남편과 결혼하면서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지금도 그때 동기들과 만나곤 하는데 대부분 살림하는 전업주부가 됐더라. 우리시대가 그랬다.”
     - 미국에서 공직자로 생활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나에게는 세 가지 약점이 있었다. 키가 작고, 외국인이며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유리천장’(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성별이나 인종 등 이유로 승진을 못하는 상황)이 높았다.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힘든 상황이 올수록 더욱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예상 외의 성과를 내니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당시 ‘결혼하면 집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미국에서 아이 둘 낳고, 연구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던 건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약학 연구로 당장 신약이 나오는 건 아니다. 메커니즘, 작용기전 등 기초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신약도 개발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이 그런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오메가3의 유효성분이 신경세포에 작용하는 원리를 알아낸 만큼 이를 다른 영양소와 어떻게 합성하고 치료제로 개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할 예정이다.”
    이지상 기자

    ´서울대 약대 女동기중 꼴찌´ 지금은 미국서… - 중앙일보 경제

    2012년 4월 28일 토요일

    5000㎞날아가는 ‘절대무기’…미·러가 95% 독점 ‘공포의 균형’

     

    5000㎞날아가는 ‘절대무기’…미·러가 95% 독점 ‘공포의 균형’

    한겨레신문에 게재되었으며 16면의 TOP기사입니다.16면신문에 게재되었으며 16면의 TOP기사입니다.| 기사입력 2012-04-27 21:15 기사원문

    [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정치학

    ▶ ICBM, SLBM, MRBM, IRBM… 미사일 용어들은 죄다 암호문 같다. 우주로 날아갔다가 초속 5~7㎞ 속도로 대기권에 재진입해 내리꽂히는 장거리 미사일은 민간인과 군인을 구별하지 않고 상대에 극한의 공포를 안겨준다. 뾰족한 창을 던져 사냥감을 잡던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들이 벌이는 ‘절대무기’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호모 에렉투스는 주먹도끼를 들고 사냥감에 다가가 때려잡았다. 그 뒤에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는 긴 창으로 찌르거나 던졌다. 결국 호모 에렉투스는 사라지고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하게 되었다. 다가가지 않고도 멀리서 사냥감을 잡을 수 있다는 건 인간의 존재 의미를 변혁시킨 심오한 사건이었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면서 오직 상대방에게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확보하게 되어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자로 자신을 격상시키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생존경쟁에서 절대강자가 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창에서 화살로 이어진 고대문명, 총과 대포로 진화한 근대문명, 미사일로 이루어진 현대문명은 “누가 얼마나 멀리서 타격할 수 있느냐”는 경쟁의 산물이었다. 오늘날 호전적인 국가는 군사 퍼레이드를 진행할 때마다 반드시 자신의 미사일을 과시한다. 멀리서 상대방을 응징하는 징벌자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창과 화살, 총과 대포, 그리고 미사일
    세계의 탄도미사일은 사정거리에 따라 크게 보면 단거리(1000㎞ 미만), 중거리(5500㎞ 미만), 장거리(5500㎞ 이상)로 구분된다. 발사대는 고정식과 이동식으로 나뉘며, 발사 형태에 따라 지상발사, 수중발사 미사일로 구분된다. 사용 연료에 따라 액체연료 방식과 고체연료 방식으로 나뉜다. 이런 여러 유형의 미사일을 다 망라하자면 수백 종은 족히 되는 다양한 생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생태계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북한만 해도 40년 동안 미사일을 개발해 오면서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미사일 체계를 완성하고 있고, 일부 미사일은 고체연료를 사용하고 있다. 세계 미사일들의 족보를 따지면 과거 미국과 소련이 그 종주국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치명적인 공중무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미사일은 특별한 무기다. 항공기는 만들기도 복잡하지만 미사일은 그 구조가 간단하여 만들기도 쉽다. 게다가 항공기는 사람이 타고 가서 때리고 돌아와야 하지만 미사일은 가서 폭발하면 그만인 간편한 수단이다. 미사일은 모든 것을 운반할 수 있다. 재래식 고폭탄뿐만 아니라 핵무기, 화학무기, 무엇이든 운반이 가능하다. 핵, 화학, 생물 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능력이 발전함에 따라 미사일은 공포를 쏘아올리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그것도 하나의 탄두가 아니라 여러 개의 탄두를 탑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미사일은 항공기보다 훨씬 빠르고 탐지도 어렵다. 우주로 날려보내 가속이 붙으면 최고속도 음속의 14배, 즉 초속 5~7㎞나 되는 속도로 대기권에 재진입하여 엄청난 화염과 함께 나선형으로 내리꽂히는 장거리 미사일은 군사 무기가 줄 수 있는 공포의 가장 극한에 서 있다. 사정거리가 5500㎞를 넘는 장거리 미사일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라고 한다. 북한이 쏘아올린 대포동 2호가 여기에 속한다. 북한이 로켓의 우주궤도 진입에만 성공한다면 발사 후 20분 만에 미국의 서해안에 떨어지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게 된다.
    군사시설을 정밀하게 타격하려면 장거리 탄도미사일은 적합한 무기가 아니다. 전투기가 직접 날아가 작전을 해야 정확하게 타격을 할 수 있고, 작전 결과를 직접 확인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사일은 부정확하기 때문에 주로 하나의 도시나 항구, 공항을 대량으로 파괴하거나 대량살상을 하는 데 동원된다. 이런 목적으로 개발된 미사일의 시초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개발한 ‘V-2’다. 당시에는 인접 국가를 향해 장거리를 날아가 타격할 수 있는 무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공포였다. 독일군은 1944년부터 9개월 동안 영국 런던과 벨기에 안트베르펜을 향해 탄도미사일 약 3200여발을 쏘았다. 그 결과 3만7000채의 민간인 주택이 완파됐고 150만채의 주택이 파손됐다. 약 9000명이 숨졌으며, 2만5000명이 다쳤다. 무차별적으로 발사된 미사일의 피해자는 주로 민간인이었다. 독일이 패전하면서 V-2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미사일은 민간인과 군인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 이 때문에 실제 파괴력과 관계없이 극심한 사회혼란과 공황을 불러일으킨다. 대표적 사례가 1981년에 시작된 이란과 이라크 간의 8년 전쟁이다. 이라크는 전쟁 중에 소련제 미사일 스커드 B의 사정거리를 서방 기술자의 도움으로 1000㎞까지 연장한 ‘알후세인’을 개발한다. 이에 이란은 북한으로부터 500㎞ 사정거리의 조잡한 화성5호 탄도미사일 100여발을 수입하게 된다. 교착 상태의 전쟁은 1988년 2월29일에 이라크가 총 189발의 알후세인 탄도미사일을 테헤란을 비롯한 이란의 주요 도시에 발사해 2000여명이 사망하고 6000여명이 부상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대도시에서 주민의 탈주 사태가 벌어지고 이란은 심각한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국가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된다. 물론 이란도 화성5호 탄도미사일 77발을 바그다드로 쏘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란은 정전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불려 나오게 된다. 미사일로 인한 사망자가 다른 무기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음에도 공포는 그 수십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962년 쿠바 미사일사태
    소련의 ICBM 배치 움직임에
    미국과 3차대전 위기까지
    그 뒤 양국 증강경쟁 불붙어

    68년 미·소의 미사일은
    지구를 30번 멸망시킬 괴력
    서로에게 공포 대상 되자
    무기감축 테이블에 마주앉아

    ‘제1격에 완전 몰살’…수량이 중요해져
    이 전쟁의 승리로 사담 후세인은 중동의 절대강자로 부상한다. 이스라엘을 징벌할 수 있는 미사일을 보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후세인은 아랍의 맹주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싹튼 후세인의 망상이 3년 뒤에 쿠웨이트 침공으로 치달은 것도 스커드 미사일이 없었다면 생각하기 어렵다. 반면 이라크의 미사일에 당한 이란은 이후부터 절치부심하며 미사일 개발에 매달리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이란의 미사일 문제로 이어진다.
    전세계의 지역 분쟁에서 미사일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이 남긴 유산이다. 이 두 강대국 미사일의 파생상품과 기술이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지역의 패권을 노리는 중간급 국가들의 미사일 경쟁이 거세졌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는 단지 쿠바에 소련의 장거리 미사일이 배치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미국을 충격에 빠뜨려 전 미군에 데프콘2, 즉 전쟁 직전의 단계까지 가게 했다. 만일 흐루쇼프(흐루시초프)가 미국으로부터 쿠바를 방위하기 위해서였다면 당시 사정거리 1760㎞의 중거리 탄도미사일(MRBMs)만 배치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소련은 여기에 더해 3600㎞의 중장거리 탄도미사일(IRBMs)까지 배치하려 했다. 쿠바 방위를 넘어 미국 전체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한 케네디는 쿠바의 해안 봉쇄를 선택하게 되고, 이로 인해 미-소 간의 충돌이 생기면서 자칫 3차 대전으로 거의 갔던 사건이다. 케네디는 위기가 끝나고 “핵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3분의 1과 2분의 1 사이였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가까운 곳에 전략 핵미사일이 배치된다는 건 미국이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였다.
    미국과 소련은 인류 문명의 전부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핵미사일 증강의 광기로 치달았다. 1961년 2월 초에 케네디 행정부의 국방장관이 된 로버트 맥나마라에게 전략공군사령관인 토머스 파워 장군은 미-소 간에 핵 맞대결이 있은 다음에 “미국인이 2명 살아남고 소련인이 1명만 살아남는다면 우리가 이긴다”고 말했다. 미국의 군부는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 그리고 중국의 모든 도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통해 적어도 사망자가 4억명에 달하는 전략 공격 능력을 보유할 것을 주장했다. 냉전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상되느냐에 대한 인간적인 측면보다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느냐는 군사적인 측면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대였다. 군사시설이든 민간시설이든 상관없이 1000개 이상의 목표물을 겨냥하여 중국과 소련의 전체 블록을 몰살시키는 계획이어야 한다는 게 파워 장군의 주장이었다. 세상을 끝장내는 이러한 파국은 어떤 중간단계나 경고도 없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질수록 좋다는 것이 미 전략공군사령부의 기본 생각이었다.
    이 당시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단순히 적국을 멀리서 파괴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핵무기로 보복하지 못하도록 ‘제1격’에 완전히 몰살시키는 데 그 초점이 있었다. 불완전한 공격으로 소련의 잔여 핵 보복 능력을 허용하면 미국이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은 핵탄두를 장착한 그 살상능력 못지않게 수량이 중요해졌다. 미국은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의 충격으로 소련한테 압도당할지도 모른다는 초조감 때문에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몰입했다. 또한 미국이 소련의 핵 공격을 받아 본토의 지상 발사 핵미사일이 파괴되어도 소련에 대한 핵 공격 능력을 계속 보유하는 능력, 즉 ‘제2격’으로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SLBM)을 갖춘다는 목적으로 핵미사일을 증강했다.
    미·러 “2018년까지 전략 핵탄두 1550개로”
    1960년대 초까지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능력은 4기밖에 안 됐고 폭격기도 200대에 불과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소련의 핵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핵미사일을 증강한 것이다. 케네디와 그의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이런 사상에 넌더리를 쳤으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면서 핵전쟁을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케네디는 절망적인 군비경쟁을 끝장내려고 했으나 1963년에 암살당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암살당하던 바로 그해 1월에 케네디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인류가 전쟁을 끝장내지 못하면 전쟁이 인류를 끝장낼 것”이라고 절규했다. 그 이후 소련도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급격히 증강하기 시작해, 1968년 무렵에 미·소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지구를 적어도 30번 이상 멸망시킬 수 있는 극한의 수준에 도달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 확실히 멸망시킬 수 있는 ‘상호확증파괴’(MAD) 능력을 보유한 ‘공포의 균형’에 이르게 된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상황이 미·소가 상대방의 보복을 우려하여 선제공격을 할 수 없는 불안한 평화로 이어져, 양국을 핵미사일 감축을 위한 길고도 지루한 협상의 테이블로 불러 모으게 된다.
    미국과 소련의 ‘전략무기제한협정’은 1972년에 최초로 합의되었다(SALTⅠ). 여기서 미사일 보유 상한선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미국 1054기, 소련 1618기로 제한하며 수중(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을 미국 710기, 소련 950기에서 동결하기로 했다.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Ⅱ)은 79년 6월1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정식 조인되었다. 내용은 양국의 전략무기 운반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 수중발사 탄도미사일, 전략폭격기, 공대지 탄도미사일(ASBM)의 총수를 조약 발효와 동시에 2400개 이하로, 다시 81년 말까지는 2250개 이하로 규제하면서 더이상 새로운 공격용 전략무기의 개발을 금지한 것을 뼈대로 했다. 82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제한’이 아닌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Ⅰ)을 제안하여 협상이 이어지다가, 91년 7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양국이 보유한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장거리 핵무기를 향후 7년간 각각 30%와 38% 줄인다는 내용의 1차 전략무기감축협정에 서명했다. 93년 1월 부시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양국 전략핵무기의 3분의 2를 감축해 핵탄두를 3500기 수준으로 줄이는 내용의 2차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Ⅱ)에 서명했으나 양국 의회가 모두 이 협정을 비준하는 데는 2000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99년부터 시작된 3차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Ⅲ)은 핵탄두를 각각 2000기 선으로 줄여나가는 협상으로 아직 진행중이다. 그러는 동안 미·러는 2002년에 핵탄두 수를 2012년까지 1700~2200기 사이로 감축하자는 전략공격무기감축협정(SORT)을 체결했다. 이렇게 줄여도 전세계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탄두의 95%는 미국과 러시아가 갖고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수중발사 탄도미사일, 폭격기를 미국은 812개, 러시아는 494개를 배치하고 있다. 전략 핵탄두도 미국은 1737기, 러시아는 1492기를 배치했다. 2011년 2월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한 미국과 러시아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 스타트)에 따르자면, 양국은 2018년까지 전략적 배치 수량을 발사 및 운송 장치는 700개까지, 전략 핵탄두는 1550기까지 줄여야 한다.
    ‘핵 없는 세상’을 외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대륙간탄도미사일 감축에 적극적이지만 핵과 미사일에 대한 냉전 식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은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Ⅲ을 450기, 수중발사 탄도미사일인 UGM-133A를 288기 배치하고 있다. 미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한 종류밖에 없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절대무기’는 종교적 전통이 강한 미국에서는 신이 부여한 평화유지의 수단으로 인식된다. 반면 러시아는 대륙간탄도미사일로 R-36M, UR-100, RT-2PM, RS-24, R-29, RSM-56 6종, 수중발사 탄도미사일로 TU-95, TU-160을 배치하고 있다. 여전히 공포의 균형 상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미·러·중·프·영 ‘ICBM 보유’
    자력으로 인공위성 쏘아올린
    일 등 4개국도 ‘잠재 보유국’

    북, 이번 로켓발사 실패로
    ICBM까지 10년쯤 늦춰졌지만
    이미 주변국엔 국제적 위협
    ‘좌시 않겠다’는 분위기와
    미 안보우산 줄서기도 본격화

    북한 ICBM, 기술적 실패가 더 큰 재앙 될 수도
    냉전은 전세계에서 총 5곳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국을 탄생시킨다.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으로 이들 5개국은 모두 핵보유국이다. 여기에다가 잠재적 장거리 미사일 보유국은 인공위성 자체발사에 성공한 일본, 이스라엘, 우크라이나, 인도를 합한 9개국이다. 북한이 이번에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면 10번째 국가로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이며, 잠재적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이란이 북한과 비슷한 속도로 로켓 발사에 뛰어들고 있다. 이렇듯 대륙간탄도미사일은 기존 보유국에 의한 강력한 과점체제로서 신규 가입국을 허락하지 않는 구조지만, 북한과 이란이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에 성공한다면 동북아, 나아가 전세계의 전략적 균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로켓 발사라는 점에서 인공위성 발사와 거의 유사하지만 3단계의 서로 다른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180~300초가 걸리는 발사 및 추진 단계는 추진체 연소가 종료되기까지의 단계로 지상 100㎞ 이상의 성층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당한 추력을 필요로 한다. 북한은 이 단계를 돌파하는 데 1998년과 2009년 발사에서는 성공했고, 2006년과 2012년 발사에선 실패했다. 즉 50%의 성공률을 갖고 있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의 성패는 산화제와 연료의 배합 및 분사가 제대로 이루어져 엔진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어야 하고, 연소된 추진체가 성공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기술적 과제를 극복해야 한다. 북한은 이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중간비행 단계는 우주에서 포물선을 그리면서 자유비행하는 단계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경우 약 20분이 소요된다. 북한은 이 단계에서 네번 다 실패했으나, 2009년 발사에선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간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분리되어야 할 2단과 3단의 분리에 실패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사유는 확실치 않다. 마지막으로 재진입, 즉 종말 단계는 목표 지점에 투하되도록 대기권으로 다시 들어오는 단계다. 대기와의 마찰로 온도가 수천도에 이를 때 탄두가 폭발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탄두의 끝부분에 특수 삭마제라는 소재를 사용한다. 또한 목표 지점 부근에서 대기권으로 재진입하자면 우주에서 추력을 조정해야 하는데 북한은 아직껏 이에 대한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정확도는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위성을 발사한 나라들도 탄두의 재진입 기술만 확보한다면 언제든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국으로 격상될 수 있다. 일본은 최근 북한의 로켓 발사에 자극을 받아 이 기술을 확보하겠다고 선언한 상황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액체 연료를 사용할 경우 연료와 산화제를 주입하는 데 1~2일이 소요되어 발사 시기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고체 연료를 쓸 경우 사전에 징후가 없기 때문에 더욱더 위협적이다. 고체 추진체는 산화제와 연료를 분말로 혼합하여 응결한 것인데, 북한은 이에 대해서도 기술을 축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역설적으로 북한 미사일의 항법장치와 추력 조절 등 기술이 정교하지 못한 점이 더 위협적이다. 어디로 날아갈지, 통제가 되는 미사일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실패했다고 안심할 상황은 못 된다. 나중에는 발사 후에 어떤 기술적 실패가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분간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북한이 액체 연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 미국은 첨단 감시정찰 장비를 통해 북한의 발사 징후를 포착하고 발사 단계에서 요격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다. 여기에는 조기경보기, DSP 조기경보위성, 엑스(X)밴드 레이더 등의 감시자산이 동원되고 이지스함의 스탠더드 요격미사일(SM-3), 패트리엇 요격미사일(PAC-3)이 동원된다. 미국은 바로 이 단계에서 미사일방어(MD) 체계에 한국도 참여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사일 요격은 총알로 총알 맞히기
    북한의 로켓이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로 솟아올라 초고속으로 날아오는 걸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의 정찰위성에서 본다면 북의 미사일은 하나의 정지된 점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 궤도와 연료의 양을 슈퍼컴퓨터가 계산하면 이론상으로는 요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2009년 4월에 북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을 때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추진체의 크기와 연료량, 속도, 궤도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입력하여 발사 후 30분 만에 “우주궤도 진입에 실패했다”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크게 흡족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이 어떤 미사일을 발사했더라도 탐지와 추적은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탐지는 잘했더라도 실제 요격은 단지 확률의 문제일 뿐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반드시 요격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미국은 1983년에 별들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을 발표하고 30여년간 천문학적인 요격 시스템을 구축하였으나 아직까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사일의 탄두를 미사일을 발사하여 요격한다는 것은 총알을 총알로 맞히는 것에 비견되는 과학의 극한점에 위치해 있다.
    그러면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게 되는 시기는 언제쯤일까? 원래 4~5년 내로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상황에서 이번 발사 실패로 그 시기는 ‘10년 후’쯤으로 연기되는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북의 로켓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과민한 반응들은 과거 세번의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는 비교되지 않는 ‘이상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시아 나라들한테 ‘북한 미사일의 정치학’이 작동하는 느낌이 든다. 이 정치학의 핵심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이 미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위협하는 ‘국제적 위협’으로 그 위상이 격상되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동안 북한의 위협은 한반도 내부의 문제였다. 그러나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북한의 위협은 더이상 한반도 문제를 ‘강 건너 불’로 보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북한 미사일은 주변 아시아 나라들에는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도록 하는 초대장인 셈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안보우산 속으로 들어가려는 아시아 국가들의 ‘줄서기 경쟁’이 본격화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대만, 일본, 필리핀은 북한 로켓에 대비한 미국과의 공조에 더 기울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북한이 아시아의 징벌자로 부상하고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 즉 호모 사피엔스의 군비경쟁 본성이 도사리고 있다.
    김종대/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5000㎞날아가는 ‘절대무기’…미·러가 95% 독점 ‘공포의 균형’ :: 네이버 뉴스

    2012년 4월 27일 금요일

    공짜로 뿌렸더니… 최고 SW 되더라

     

    공짜로 뿌렸더니… 최고 SW 되더라

    조선일보| 기사입력 2012-04-28 03:04 | 최종수정 2012-04-28 08:06 기사원문

    공짜로 뿌렸더니… 최고 SW 되더라
    "디지털 세상에 못 베낄 건 없어… 공개하니 수만 명이 고쳐줘"

    제품을 공짜로 뿌린다. 하지만 돈을 번다. 그것도 유료로 파는 기업보다 더 많이 번다!
    미국의 IT 전문지(誌)인 와이어드(Wired)의 편집장인 크리스 앤더슨(2009년 11월 28일자 WeeklyBIZ 인터뷰)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저서 '롱테일 경제학'과 '공짜 경제학'에서 21세기식 비즈니스 모델로 '프리미엄(Freemium·Free+ Premium)' 전략을 제시했다.
    프리미엄은 제품을 무료로 나눠주고 충성 고객 일부가 자발적으로 돈을 내도록 하는 방식이다. 가격을 '0'으로 만들어 최대한 많은 사람이 사용해 보도록 한다. 제품을 써본 소비자가 이를 외면해도 상관없다. 더 많은 사람이 제품을 쓰면 결국 일정 수의 소비자는 지갑을 열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이 전략을 확립한 기업으로 미국의 인터넷 검색업체 구글과 한국의 온라인 게임업체 넥슨을 꼽았다. 구글은 서비스를 공짜로 제공하고 맞춤형 광고를 붙이는 전략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 검색업체로 성장했다. 넥슨 역시 '부분 유료화'라는 프리미엄 전략을 통해 국내 최대의 온라인 게임업체로 성장했다. 이들의 방식은 모두 업계 표준이 됐다.
    하지만 '공짜' 전략을 훨씬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성공을 거둔 기업은 따로 있다. 인터넷 콘텐츠 매니지먼트 시스템(CMS) 소프트웨어인 '워드프레스(WordPress)'다. 콘텐츠 매니지먼트 시스템은 인터넷에 글·사진·동영상 등을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저장 및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를 일컫는다.
    워드프레스는 이 CMS를 만들어 공짜로 풀었다. 프로그램의 기능을 구현하는 방법을 담은 '소스 코드(source code)'까지 공개해 누구나 원하는 대로 프로그램을 개조해 쓸 수 있게 했다. 심지어 경쟁사도 얼마든지 워드프레스의 소스 코드를 가져다 쓸 수 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워드프레스의 프로그램을 가져다 쓰는 사람도 소스코드를 공개해야 한다는 것. 서로 모든 것을 공개하는 방식을 통해 경쟁 회사조차 워드프레스의 발전에 기여하는 '워드프레스 생태계'를 만든 것이다.
    '공짜 생태계 전략'을 바탕으로 워드프레스는 세계 최대의 콘텐츠 관리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미국의 인터넷시장 조사업체 'W3TECH'에 따르면, 워드프레스는 전 세계 CMS시장의 54%를 차지한다. 이는 전 세계 모든 인터넷 사이트의 17%에 해당한다. 뉴욕타임스(NYT)·월스트리트저널(WSJ)·CBS방송 등 대형 언론사도 워드프레스를 사용 중이다.
    워드프레스를 만들어 20대에 천만장자가 된 워드프레스의 창립자인 매트 뮬렌웨그(Mullenweg·28)를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WeeklyBIZ가 만났다. 그는 "디지털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공짜 속에서 사람들이 돈을 쓸 만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왜 무료로 공개했나
    나도 프로그래밍 하는법 인터넷서 공짜로 배워 당연히 그래야 한다 믿어
    돈은 어떻게 버는가
    우리제품 쓰는 사이트 우리에게 운영관리 맡겨 추가기능 서비스는 유료
    저커버그 부럽지 않나

    매트 뮬렌웨그 워드프레스 창립자는 올해 2월 휴가를 내 에티오피아에 가서 우물을 파고 왔다. 그는 “에티오피아에서는 아이들이 맑은 물을 구하러 다니느라 교육을 받지 못한다. 이들에게 우물을 선물하는 것은 이들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이라며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사업 방향을 정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샌프란시스코=이인묵 기자

    돈이란 어느 정도 넘으면 생활에는 별 차이 없어
    새로운 가치 창출하는 생태계 만드는 게 중요
    "집으로 오세요."
    워드프레스 창립자 매트 뮬렌웨그(Mullenweg)는 낯선 외국 기자에게 인터뷰 장소로 사무실 대신 샌프란시스코만(��) 근처에 있는 집 주소를 알려줬다. 그는 집에서 500m쯤 떨어진 사무실에는 매월 한두 번만 출근하고 대부분 4층짜리 빌라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28세의 인터넷 천만 장자인 그가 사는 집은 의외로 평범했다. 입구에 삼엄한 경비도 없었고, 문도 그가 직접 열어줬다. 크기는 200㎡(60평) 남짓. 벽에는 특별한 장식품도 없었다. 금문교가 보이는 창 밖의 경관과 거실에 있는 수제(手製) 대형 스피커만이 그가 부자인지를 언뜻 보여줬다. 그는 18세 때부터 타던 1990년식 쉐보레 중형 세단을 지금도 탄다.
    뮬렌웨그는 20대 초에 이미 인터넷 스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가 만든 워드프레스가 세계 최고의 '콘텐츠 매니지먼트 시스템(CMS)'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CMS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다. 도시로 비유하면 도로·수도·전기망 등 사회기반시설과 비슷한 존재로서 웹사이트에 글·사진·동영상을 싣고 저장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뮬렌웨그는 24세이던 2008년에 스티브 잡스(Jobs)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발머(Ballmer)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조스(Bezos) 아마존 CEO 등과 함께 비즈니스위크지(誌)가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뮬렌웨그는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인물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뉴욕타임스와 CBS 방송국 등 미국의 메이저 언론사들도 그의 회사에 투자했다. 2008년 당시 기세로 보면, 뮬렌웨그는 지금쯤 동갑내기인 마크 저커버그(Zuckerberg) 페이스북 창업자를 능가하는 부자가 됐을 법하다.
    하지만 뮬렌웨그는 그만의 남다른 길을 선택했다. 2010년 '워드프레스 재단'을 만들어 자신이 개발한 워드프레스 시스템을 모두 사회에 기부한 것이다. 스스로는 '오토매틱(Automattic)'이라는 워드프레스 관련 서비스 용역 회사를 창업했다. 자신이 만든 최고의 창작물을 기부한 후 자신 역시 '워드프레스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남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공짜 경제'를 실행하고 있는 그와 마주앉아 1시간20분 정도 인터뷰했다.
    ―왜 워드프레스를 공짜로 공개했는가?
    "처음에는 그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프로그램 짜는 법을 인터넷에서 공짜로 배웠다. 워드프레스를 시작하는 데 바탕이 된 'B2'라는 블로그 프로그램 역시 무료공개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든 것 역시 공짜로 인터넷 세계에 돌려주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워드프레스가 이렇게 큰 프로젝트가 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때 알았더라면, 전부 다 공개로 푸는 데는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웃음)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는 무료로 공개하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훌륭한 프로그램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무료 공개 덕분에 훌륭한 프로그램이 됐다고 생각하는가. 프로그램을 원본까지 공개하면 경쟁사들이 당신 프로그램을 베낄 수 있을 텐데.
    "복제는 피할 수 없다. 원본 프로그램을 공개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따라 할 수 있다. 서비스든 사업 모델이든, 디지털 세상에 남들이 베껴갈 수 없는 것은 없다. 하지만 생태계(Eco-system)는 복제할 수 없다. 워드프레스는 무료 공개를 통해 수많은 재능있는 사람들이 개발에 참여하는 하나의 생태계가 됐다. 워드프레스의 몇 가지 기능을 베끼기는 쉽지만 1만6000개에 달하는 보조 프로그램, 수백, 수천명의 자발적인 워드프레스 개발자를 대체할 수는 없다. 오픈소스(open source·프로그램 원본을 무료로 공개하는 것)는 제대로 운영하기만 하면 최고의 프로그램 개발 방식이다. 내가 공개하는 것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을 남들이 돌려주기 때문이다. 만약 오픈소스가 아니었다면 수백명이 월급을 받고 개발하는 다른 회사 프로그램보다 좋은 것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그램 원본을 무료로 공개한다고 해서 다 생태계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한국에서도 여러 회사가 생태계 만들기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생태계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일단, 재능 있는 개발자들이 참여할 만큼 혁신적이고 흥미로운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워드프레스를 개선하는 데에는 수만명이 참여하고 있지만, 이중 핵심이 되는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은 수백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99%는 이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테스트하고 문제점을 보고하는 사람들이다. 생태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핵심 인력(core team)이 다른 사람들이 보내오는 의견을 잘 검토하고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원본 프로그램을 무료로 공개한 다음에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하고 막연히 기다려서는 절대로 생태계가 생기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무료로 공개하면 당신은 어떻게 돈을 버는가?
    "워드프레스 자체는 무료다. 하지만 워드프레스로 웹사이트를 운영하려면 돈이 든다. 인터넷 서버도 마련해야 하고, 데이터베이스 시스템도 구축해야 하고, 디자인도 해야 한다. 내가 창업한 '오토매틱'은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받는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회사에는 워드프레스를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인터넷 업체가 우리에게 서비스 개발을 맡긴다. 이 외에도 악성 댓글(스팸)을 자동으로 걸러주는 기능처럼 개인에게는 꼭 필요하지 않지만 기업·정부 등 대형 웹사이트가 꼭 필요로 하는 기능은 유료로 제공한다."
    ―당신은 원래 사업을 할 생각이 없다고 들었다.

    "맞다. 나는 정말 우연히 사업가가 된 사람(accidental entrepreneur)이다. 워드프레스는 내가 처음으로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재즈 색소폰 연주자가 꿈이었고, 워드프레스를 개발한 2003년 여름에는 대학 신입생(휴스턴대 철학과)이었다. 그때 나는 여행에 다녀온 사진을 올리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블로그를 운영하는 데 쓰던 프로그램이 개발 중단됐다. 그래서 내가 쓸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개인적인 이유에서 시작한 것인데 여기까지 왔다."
    ―오토매틱은 직원 대부분이 재택근무를 한다고 들었다. 이런 식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당신이 우연히 사업가가 된 것과 관련이 있을까?
    "관련은 있지만 중요 이유는 아니다. 대부분 직원이 재택근무를 하는 것은 이 방식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오토매틱의 직원은 103명이다. 그중에 샌프란시스코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은 단 15명이다. 나머지는 아일랜드·덴마크·불가리아 등 세계 각국의 자기 집에서 일한다. 재택근무를 선택한 것은 전 세계에서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 쓰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오직 실리콘밸리 근처에서만 사람을 뽑는다. 실리콘밸리 본사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인구는 700만명이다. 아무리 이곳에 재능있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전 세계 인구 70억명 중에서 직원을 뽑는 것에 비할 수는 없다. 게다가 전 세계에 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회사의 개발 작업은 24시간 이뤄진다. 미국의 누군가가 작업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유럽이나 아시아의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작업을 이어간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해 뽑을 수가 있는가?
    "사실 이것도 워드프레스를 무료로 공개한 덕분에 생긴 장점인데, 오토매틱 직원의 대부분은 기존에 워드프레스를 개발하던 사람들이다. 자발적으로 워드프레스 개발에 참여하면서 워드프레스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명성을 쌓은 사람들을 뽑는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능력이 있고, 어떤 것을 잘하는지를 이미 알고 고용할 수 있다. 오토매틱의 첫 직원은 아일랜드에서 뽑았다. 그때까지 그와 실제로 대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몇 년 동안 워드프레스 개발을 놓고 많은 이메일·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은 사이였다. 나는 그가 훌륭한 개발자란 걸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는 훌륭히 일을 하고 있다."
    ―실제 만나지 않아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지 않나?
    "우리는 이메일·문자 메시지·화상 통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한다.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소통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실제로 전 직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1년에 단 한 차례뿐이다. 보통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나 캐나다의 퀘벡 같은 관광지에서 모이는데, 일주일 내내 축제를 벌인다. 주로 먹고 마시는 거지만, 전 직원이 함께하는 브레인스토밍도 한다. 여기서 일 년간의 개발 방향을 잡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가 부럽거나 질투가 나지는 않나? 당신도 그처럼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지 않나.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나는 마크 저커버그를 존경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페이스북같이 훌륭한 플랫폼을 만들었기 때문이지, 그가 돈을 많이 벌어서 존경하는 건 아니다. 돈이란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그 이후로는 얼마를 더 벌어도 생활에는 별 차이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워드프레스 생태계 전체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가 워드프레스를 재단으로 만든 것도 그래서다.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고, 나는 워드프레스를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발전시키는 방법을 고른 것이다. 워드프레스는 재단의 뒷받침 아래 개발자 커뮤니티를 통해 3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계속 더 나은 소프트웨어로 진화해 나갈 것이다."
    ▶매트 뮬렌웨그(Matt Mullenweg)
    ▲출생 : 1984년 미국 텍사스 휴스턴
    ▲학력 : 휴스턴 실용예술고(HSPVA·재즈 색소폰 전공) 졸업
    휴스턴대(철학·정치학 전공) 중퇴
    ▲경력 : 2003년 워드프레스 개발, 2004년 CBS 방송 계열사 'CNET' 입사, 2005년 소프트웨어 개발사 오토매틱 및 엔젤 투자사 오드레이 창업, 2010년 '워드프레스 재단' 창설
    ▲기타 :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최연소)'(2008년 '비즈니스위크'지), '온라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인'(2011년 '비즈니스 인사이더'), '미디어 업계의 떠오르는 스타'(2011년 '베니티 페어'), '소셜·모바일 분야 30세 이하 30대 인물'(2011년 '포브스')
    [샌프란시스코=이인묵 기자 redsox@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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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4월 26일 목요일

    나의 여행 이야기 ⑥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의 뉴칼레도니아

     

    나의 여행 이야기 ⑥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의 뉴칼레도니아
    [중앙일보] 입력 2012.04.27 03:30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박칼린에게 여행은 … 물이고, 시원한 생수고, 수도꼭지다.
    어딜 가나 티끌 하나 없다 … 청소부는 수많은 바닷게

    누구나 한번쯤은 느껴봤을 것이다. 일 년 내내 열심히 일하다가 잠깐 어느 계곡에서 하루를 보내더라도 물가나 계곡 같은 데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상상의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하게 되는 느낌 같은 걸. 해변에 갔을 때 발가락을 모래 속에 집어넣고 바다를 바라보다 짠내를 맡게 되는 순간. 그 한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느낌의 인스턴트적인 변화, 그 어느 다른 공간에 도착해서 낯설게 느끼는 그 매직! 이번에도 나는 바다를 찾았다. 그 열린 공간, 육체와 같은 온도의 바닷물, 은은한 바람에서 실려오는 바다 냄새, 그리고 햇살들은 나를 인스턴트 매직으로 인도해 준다. 나는 오세아니아 한복판에 바게트 빵처럼 길게 누워 있는 섬나라 뉴칼레도니아로 떠났다.
    글=박칼린(뮤지컬 음악감독) 사진=이병률(시인·여행작가)

    뉴칼레도니아의 무인도 노깡위. 누군가 햇빛을 피할 곳을 만들어 놓았지만 제 구실은 하지 않는다. 그냥 그 옆에 앉아 무인도의 정체를 실감하는 정도. 섬에 있는 내내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런 곳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그곳은 세상의 끝과 처음을 닮아 있었다.

    뉴칼레도니아는 그 어떤 섬나라보다 정리정돈이 잘돼 있어 어딜 가나 ‘깨끗한’ ‘가지런한’, 뭐 그런 단어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어딘가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차창으로 흘러 들어온 그 바닷바람에 난 딴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순간이동을 해 뉴칼레도니아로 빨려 들어갔다. 사방엔 형형색색의 바닷물! 섬 길 어디를 둘러보아도 볼 수 있는 바닷물과 경계선을 이루는 하얀 모래 해변, 희귀하고 멋지게 엉켜 있는 나무들이 있는 공원…. 누메아 어디를 가도 순간이동의 매직을 온종일 느꼈다.

     그러길 며칠. 어느 하루 난 멋진 남자를 한 명 만났다. 그날은 무인도 노캉위를 가기로 돼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은 뱃사공을 기다리다 앞에 놓여 있는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며 몇몇 희망사항이 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도대체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 대자연 속에서 매일매일 살아간다는 것, 그걸 감사할까?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을 버릴 수 없기에 비참한 존재일까? 은퇴하면 이런 곳에서 살까? 내 모든 것을 가지고 이런 곳으로 이민을 와버릴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은퇴는 몇 살일까? 이 아침뿐 아니라 뉴칼레도니아의 하루하루는 이런 극적인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때 저벅저벅 소리와 함께 나의 멋진 남자가 나타났다. 그날 배를 몰아줄 선장(사진).
     나는 그가 모는 4∼6인용 모터보트에 올라타고 무인도 노캉위와 빗처럼 생겨서 브러시 아일랜드라 불리는 섬 구경 길에 올랐다. 한마디 말도 없는 선장의 등만 지켜보며 우리는 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 30분 동안 달리는데 바닷물 색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무슨 색인지 설명하기 위해 온갖 단어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푸른, 파란, 옥색, 에메랄드, 연두색, 푸르스름한…. 내 언어 능력으론 부족하고 답답할 정도로 수많은 종류의 바다색이 몇 분 단위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았다.

    1 프랑스령인 뉴칼레도니아의 곳곳에서는 진한 원주민 색채를 느낄 수 있다. 문화적인 ‘새 것’과 토속적인 ‘오래된 것’들을 시처럼 버무려 놓았다.

     그 순간 멀리 뭔가 보였다. 거세고 푸른 파도 틈에 하얀 모래사장과 주변을 가볍게 둘러싸고 있는 작은 양의 산호초 더미 같은 것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었다. 선장은 여전히 말없이 손으로 ‘저기’라고 노캉위 섬을 가리켰다.
     이 섬 역시 길쭉한 바게트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모래섬이었다. 한쪽 끝엔 척박하지만 섬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와 키 작은 풀숲이 있었고 다른 쪽엔 하얀 모래가 쌓여 있었다.
     그냥 몇 발짝만 가면 사방으로 펼쳐진 바다. 그 바다 한가운데 작은 모래섬. 그것도 산호가 있는 게 아니라 얕은 지형이 몇 미터 정도 이어지다 한순간에 절벽처럼 깎아 내려지는 듯한 깊은 바다로 변하는, 그냥 세고 싶으면 마치 셀 수 있을 것 같은 양의 모래알이 모인 작은 섬이었다.
     한 자리에 서서 360도로 돌아 여기도 바다, 저기도 바다 하며 아무도 없는 섬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에 뛰어들었다.
     한 시간 남짓 섬에서 모래와 놀면서 내 딴엔 안전한 수심으로 보이는 곳까지만 물속을 구경하고 수영을 하면서 뜨거운 햇살 아래 몸을 그을렸다. 그때 우리 선장은 또 말없이 나타났다. 점심시간이 된 것이었다. 그림 속의 무인도를 뒤로한 채 우리는 또 다른 무인도를 갔다. 10~20분 정도를 달려 이번엔 낮은 숲이 우거진 또 다른 길쭉한 섬, 브러시에 도착했다.

    2 언제나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몸의 상태나 정신의 상태, 심지어 미래에 대한 생각들까지 엄청나게 달라진다. 우리의 몸이 그곳의 기운들을 잘 받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선장의 아내는 우리가 먹을 파파야 샐러드와 빵 그리고 허벅지만 한 랍스터와 함께 숯불에 구운 온갖 갑각류 해산물을 그냥 커다란 접시에 턱 하니 내려놓았다. 직접 잡은 건지, 사온 건지는 중요치 않았다.
     적당히 햇살을 가린 나무그늘 아래 평화로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선장이 끊임없이 무언가에 집중해 일을 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하는 선장의 아내가 간혹 들려준 짧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선장 부부의 삶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다.
     그때 들려오는 쿵쿵 소리. 선장은 일정한 속도로 무언가를 양동이에 담아 절구처럼 빻았고, 소풍 터 주변 나뭇가지를 주워 정리하고, 돌을 골라 길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흔적 없이 치우고 담고 날랐다. 그는 말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는 늘 그렇게 몸을 써 왔다고 얘기하는 듯했다. 우리는 선장의 등 근육의 근원을 마치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연세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상체야’ ‘군살 한 점 없는 것 같아’ ‘육십 남짓한 나이에 너무 건강한 모습이야’. 우리가 머물렀던 흔적을 치우고 있는 선장을 보며 우리는 이렇게 수군댔던 것 같다.

    그는 평화롭다. 그는 강인하고, 인자하며 따뜻했고 또 그윽했다. 오랫동안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자연을 정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에 누가 소풍을 와도 즐길 수 있도록 해놓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그렇게 음식을 먹으며 나오는 찌꺼기와 상다리 밑으로 흘리는 음식에 비해 섬이 너무나 깨끗한 상태인 게 믿기지 않았다. 그 섬엔 매일 오후 3시 정도가 넘어가면 수많은 바닷게로 섬이 뒤덮인다고 했다. 그 게들이 음식 찌꺼기를 모두 먹어 치워서 섬을 처음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선장의 아내는 말해 주었다.
     그날 오가는 배 위에서 우리는 선장과 그 가족과 삶에 대한 얘기를 조금 들을 수 있었다. 선장의 아내는 타히티에서 태어나 이곳 원주민인 남편과 결혼했고 자녀 여섯 명을 두었다. 남편은 배 대여업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아내는 그를 도와 살아간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들의 소박한 인생은 내가 바라본 60대 아저씨의 검게 그을린 탄탄한 등에 다 담겨 있다. 그의 등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평화롭고 행복한 청년의 모습에 가까웠다. 한순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잠시나마 그 선장과 사랑에 빠진 느낌이었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그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던 선장의 등이 그 열쇠다. 아주 잠깐, 선장 부부가 우리에게 보여준 삶은 멋졌다.

    3 뉴칼레도니아에서 처음 세그웨이를 배우면서부터 두근두근했다. 몸이 원하는 대로, 또 몸을 움직이는 대로 운전이 가능해 배우기가 쉬웠다. 4 무인도에서의 점심시간. 장작불을 피우더니 바닷가재를 구워내 왔다. 그 맛을 뭐라고 표현할까. 바다의 맛과 행복의 맛, 그리고 천국의 맛을 느꼈다면 당신은 믿을까. 5 일데팽 섬의 오로자연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자니 개 한 마리도 더웠는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물속에서 개를 만나다니.

     난 그렇게 며칠을 뉴칼레도니아에서 보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는 없는 멋진 바다를 보고 햇살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말이다. 원주민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한 명의 혁명가의 삶을 담은 치바우 문화센터(Tjibaou Cultural Center), 세그웨이(Segway)를 타고 돌아본 뉴칼레도니아의 자연생태계를 담은 동물원과 식물원, 강을 거꾸로 거슬러 1㎞ 정도를 걷다가 도착한 일데팽 섬의 오로 자연 풀장(Oro Natural Pool), 정말 맛있는 바나나 빵과 파파야 열매를 구한 일데팽의 시골 장터, 부유한 사람들만의 소유물인 요트를 타고 아무 말 없이 바닷바람을 느꼈던 두 시간, 바로 옆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는 선착장 레스토랑의 테라스, 원숭이처럼 오르내리며 구름다리를 건너고 줄을 타고 내려왔던 숲 속의 익스트림 어드벤처(Extreme Adventure). 아주 짧은 닷새 동안 매우 알차게 많은 것을 했다. 하나하나 더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 그냥 아름다운 자연에 여러 차례 마음이 흔들렸고 그 몇몇 추억들 때문에 수만 가지의 ‘wishful thinking(희망사항)’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뉴칼레도니아는 태국이나 발리 등 다른 휴양 여행지처럼 가까운 곳은 아니다. 비행기로 11시간 정도 거리다. 하지만 난 바로 그게 좋다. 아무리 내게 그곳이 환상적이고, 내가 그 평화를 원하고, 내 집 문을 열면 바로 해변이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더라도, 그게 멀리 있기 때문에, 내가 매일 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만큼 더 아낄 수가 있다.
     나는 만만하게 생각하는 내 도시가 아닌, 긴장하고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먼 곳에 도착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더 소중하게 그 시간을 보내고 싶다.
     만약 여행이 배움과 탈피와 자유와 쉼이 있는 것이라면, 나는 나의 현재와 절대로 똑같은 상황을 보고 느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멀리 가고 다른 지형을 찾고 다른 경험을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나는 뉴칼레도니아에서 참으로 완벽한 여행을 한 것 같다. 특히 자꾸 떠오르는 게 그 아저씨의 등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근육질 등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또 그 사람들의 그곳에서 삶과 지금 이곳에서의 나의 삶, 그렇게 다르고 아주 멀리 있기에 나는 그것을 오래 그리워할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다행이다. 내가 그 아름다운 곳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게.

    박칼린은 … 1967년 출생. 뮤지컬 음악감독. 대한민국 음악감독 1호로서 ‘명성황후’ ‘오페라의 유령’ ‘아이다’ ‘노트르담의 곱추’ ‘시카고’ 등 굵직한 뮤지컬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다. 최근엔 다수의 뮤지컬에서 연출과 연기를 겸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그냥』을 펴냈다. 현재 서울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취재 도움 주신 곳 뉴칼레도니아 관광청(new-caledonia.co.kr), 에어칼린(aircalin.co.kr. 매주 월·토요일 인천∼누메아 직항 운항)

    나의 여행 이야기 ⑥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의 뉴칼레도니아 - 중앙일보 뉴스

    자유인 박칼린. 그의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언제나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몸의 상태나 정신의 상태, 심지어 미래에 대한 생각들까지 엄청나게 달라진다. 우리의 몸이 그곳의 기운들을 잘 받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