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나의 에버노트 사용기: pdf 파일들을 문서목록으로 만드는 방법

아래와 같은 pdf 파일 폴더가 있을때 폴더의 파일목록을 읽었는지 확인하기위한 문서목록을 만들고자 하면 좀 난감하다파일들을 선택하여 MS word, 아래한글, text 편집기 등등 어떤 문서프로그램에 붙여넣어도 넣어지지 않고 결국 하나하나 파일이름을 복사하여 문서로 만들어야 하는데 좀 복잡하다 이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그림참조: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보입니다^^;)












2012년 11월 18일 일요일

'2011년 미.코 이성혜' 를 보고 느낀 점


실은 나는 '이성혜' 양을 만나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경로를 통해 그녀를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귀중한 인재' 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성혜양의 아버지는 내가 살고 근무하는 울산시에 위치한  병원 원장으로 계신 '선교사'이시다.
'병원원장' 과 '선교사' 가 동격으로 쓰이고 있는것에 의아해 하실 수도 있고 '선교사'에 내가 더 방점을 둔 것에  좀 궁금하실 것 같다.


아프리카 케냐에 미코 상금을 보태 구매한 모기장을 설치하고 있는 이성혜양


아프리카 아이들속의 이성혜양


그녀의 자서전


그분과의 만남은 나의 아버지를 통해서다. 몇년전 아버지께서 울산에 선교에 열심이신 훌륭한 의사분이 있는데 '너를 소개시켜줄 테니 형님처럼 생각하고 지냈으면 한다' 하시면서 관절통으로 불편하신 어머니를 아들의 병원이 아닌 '그분의 병원'에 입원시켜 놓으신 게 아닌가.
얼떨결에 문병가서 만나뵙게 된 그 분은 여러가지로 특이하신 분이셨다. 찾아간 병원안에 고갱의 '황색의 그리스도' 가 걸려있고



그분의 진료실에는 무슨 편지들이 벽면 가득히 빽빽하게 붙여져 있는것이 아닌가?. 몇개 읽어보니 중고등학생들의 감사편지 같은 것이었는데
'선교사님  언제언제 같이 대화해주시고  어찌어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감사하다는 내용이 주류였는데 당시에는 생전 처음보는 낯선 환경에 놀라기도 했고, 저런 편지를 왜 모두 다 보는 데 붙여놓은걸까?, 혹 과시하려고? 하면서 별의 별 생각을 하던 중에  오랬동안 못보았던 동생처럼 환대하시면서 당신은 의사일도 하지만 '청소년, 청년들의 사역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4대째 신앙을 이어오는 가정이었는데. 이선교사님의 아버지께서 부산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당시 부산에서 중,고등시절에 같이 활동했던 분들이 현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 같은 분들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의료봉사, 선교 활동을 하고 있고 그외 여러 신앙모임을 지도하고 있는데 진료와 이런 범인들이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활동들을 병행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들을 쪼개고 또 쪼개써야 하기에 가족들과의 시간도 희생해야 함을 어렵지않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성혜양의 책에서도 어릴때 그런 부모님을 잘 이해 못했을때의 서운함, 커서 이해하게 되었을때의 감사함 등이 나와있다. 후에 들으니 벽면의 편지들도 그들을 늘 잊지않고 기억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아무튼 감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이야기 꺼내기 부끄러울 지경의 나로서는 그 분의 사역과 헌신의 정도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지만 그 이후로 '동생처럼 아껴주시는 그 분의 배려'를 좀 '부담스러워' 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매개로 만남이 이어지게 되었는데 요즘은 쑥스러움이 좀 사라지고 흉금도 털어 놓을 수 있는 '형님-동생'으로서 지내고 있다. (물론 나는 그분을 멘토로 생각하고 있는데 실은 그분이 부족한 나를 전적으로 동생 대우를 해주신다)

2010년경인가 집사람과 선생님 내외간 점심식사를 한번 한적이 있는데 그때 '미국에서 학교다니고 있는 딸이 있는데 '미스코리아'에 나가려 한다. 미.코 가 되어 미의 대사로 선한 일들을 감당하려 한단다. 기도를 부탁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순간 이원장님의 얼굴과 사모님의 얼굴을 다시한번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이원장님을 닮았으면 좀 어려울 것 같고 사모님을 닮았으면 미.코.에 도전해 볼 수 있겠구나  하며 속으로 웃고 넘어 간적이 있었다.

그러다 이후 본격적으로 기도와 함께 준비한다는 소식과 함께 기도 부탁에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바쁘다는 핑게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지는 못했는데  미.코. 진에 당선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야 이거 놀라운 일이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현장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 이후 이성혜양의 어머니를 교회에서 뵐 때마다 근황을 듣게 되었는데 한번은 ' 미코 당선 상금 천만원인가를 아프리카에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모기장 보내기 운동에 내고 모금을 하고 있는데 모금액이 많이 늘었다'. 이번에는 '전달하러 직접 같이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심 '그곳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닐텐데 가서 고생하고 미스유니버스에 나가는데 차질이라도 생기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곳에 가서 내색하러 갔을때에 볼 수있는 몸사림, 드러냄 없이 어릴때 부터 청년사역의 모임속에 자랄 때 처럼 누추함과 더러움에 개의치 않고 더 열심히 헌신하고 돌아오게 되었고 그곳 아프리카를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는 현지인들로 구성된 젊은 청년사역자들과의 뜨거운 만남과 기도를 통해 우정을 나누고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미.코.들에 대한 그녀에게 가졌던 편견들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가 쓴 자서전인 "꽃은 과정으로 피어난다" 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초등 6학년때 유학시절 - 중고등시절의 방황 - 미국에서의 의대진학 후 아이비리그 도전을 위한 그녀의 노력들, 2 시간 이상 안 자면서 새벽기도에 안빠지고 기도하면서 이를 악물었던 시간들 - 이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이야기, 세계 3대의 실력을 인정받는다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학교에서의 노력들을 읽어보면서 그녀의 그 내면의 성숙함에 놀랐고 '정말  이 친구 하나님이 크게 쓰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온갖 무력과 공식, 비공식적인 압박으로 해결 안되는 세상의 분쟁과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면에서는 유엔사무총장이 가서도 해결 안되는 사안도 비공식적인 美 의 사절이 자신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들의 굳건히 닫힌 마음문도 열릴 수도 있다.

미의 기준도 점차 바뀔고 있음을 본다. 얼굴, 몸매의 아름다움 만이 아닌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려는 노력들을 미.코 과정에서도 책을 통해 엿 볼 수 있었다.

이런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은' 내면을 소유한 훌륭한 친구가 미스 유니버스에 당선되어 제인구달 여사((Dame Jane Goodall)와 같이, 오드리햅번(Audrey Hepburn) 같이 또는 에스더(Esther) 같이 세계의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이웃을 위해 선한 사명을 수행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많이 기대되고 기대하고 기도한다.

* CTS 7000 미라클 열방을향하여 - 말라리아 모기장 전달 미스코리아 이성혜 (http://www.youtube.com/watch?v=mVPtFgwXsJ0&feature=related)

* [C스토리 특강] 이성혜 (2011 미스코리아 진) : 하나님 두 손에-in his hand (http://www.youtube.com/watch?v=QEYTLFtrXDw)


2012년 10월 19일 금요일

"슈바이처 꿈 위해 '국경없는의사회'에 들어갔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슈바이처 꿈 위해 '국경없는의사회'에 들어갔죠"

  • 이지은 기자
  • 입력 : 2012.10.20 03:07 | 수정 : 2012.10.20 10:41

    지난 2월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 개설 후 활동 마치고 귀국한 첫 의료인 정상훈씨
    아르메니아에서 의료봉사 "가족 못 보는 생활 고돼도 생명 구할 수 있어 행복"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한 25%의 환자들을 대할 때면 무력감도 밀려왔지만, 나머지 75%의 환자들이 건강을 되찾은 것을 보람이자 희망으로 삼고 이겨냈어요."

    국경없는의사회 현장활동가 정상훈(41·의사)씨는 작년 11월부터 올해 9월까지 열 달간 아르메니아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귀국했다.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가 지난 2월 서울에 개설된 이후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첫 의료인이다. 현재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는 한국 의료인은 18명이다. 전 세계 활동가 3만6000명 중 아주 적은 숫자다.

    정상훈씨는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고등학생 때부터 자연스럽게 '한국의 슈바이처'를 꿈꿔왔다고 했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해 안정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반대의 길을 택했다. 전공의 과정을 마친 2003년부터 국내 의료봉사단체 '행동하는 의사회' 대표로 활동했다. 4년 동안 쪽방촌 노인과 중증 장애인, 노숙자들을 직접 찾아가 치료하는 일에 몸담았다.
    해외 봉사를 마치고 지난 9월 귀국한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의사 정상훈씨. 오른쪽 사진은 그가 작년 12월 아르메니아 북부 진료소에서 결핵 환자를 진찰 중인 모습이다.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정씨는 국경없는의사회 한국사무소가 아직 문을 열기 전인 작년 11월 국경없는의사회 일본사무소를 찾았다. 빈국(貧國)에서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료하고 싶은 오랜 꿈 때문이었다. 정씨가 맡은 첫 임무는 '아르메니아 다제내성 결핵 치료'였다. 결핵은 열악한 환경 및 영양 상태가 원인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가난의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다제내성 결핵'은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결핵으로, 일반 결핵보다 치료가 어렵고 완치까지 2년이 걸린다. 25%의 환자는 치료에 실패한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적으로 결핵 유병률이 높은 곳이다. 주민 대부분은 러시아로 건너가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이주노동자다. 정씨는 매일 밤늦게까지 구멍가게만 한 병원에서 주민들을 치료했다.

    "매일 20알도 넘게 약을 먹고 주사를 맞는 힘든 치료를 받으면서도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던 환자들 표정이 생생해요.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현장에서 활동할 거예요. 다음번엔 에이즈 문제가 큰 아프리카로 가려 해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에게 지급되는 월급은 860유로. 100만원 남짓한 돈이다.

    "넉넉한 생활은 아니지만 제 아들(10)은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럽대요. 열악한 시설에서 환자를 수백 명씩 보며 가족과 몇 년씩 떨어져 사는 생활은 고되지만, 생명을 구할 수 있기에 견딜만한 무게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내 딸, 아빠가…" 딸 상견례 앞두고 실종된 시각장애 남성, 발견된 곳은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사랑하는 내 딸, 아빠가…" 딸 상견례 앞두고 실종된 시각장애 남성, 발견된 곳은

  • 부산=권경훈 기자
  • 입력 : 2012.10.20 03:06 | 수정 : 2012.10.20 06:23
    시각장애 4급인 50대 남성이 딸의 결혼 상견례를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 "더 살아봤자 너희에게 부담만 될 것 같다"고 썼다. 이 남성의 아들도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3일 오후 5시 36분쯤 부산 강서구 대저동 낙동강 대저생태공원 습지에서 김모(57)씨가 물에 빠져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시각장애 4급으로 녹내장을 앓고 있었다.

    숨진 김씨는 추석 전날인 지난달 29일 아들(33)과 딸(30)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간 뒤 2주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시신이 발견된 후 김씨의 집 책상 서랍에서 아들과 결혼을 앞둔 딸에게 남긴 유서 1통씩이 발견됐다. 서랍 안에는 자신의 지갑과 휴대전화가 있었고, 영정 사진까지 준비돼 있었다.

    그가 남긴 유서 첫 문장은 각각 '사랑하는 아들에게'와 '사랑하는 딸에게'로 시작됐다. 그는 유서에 "더 살아봤자 너희에게 부담만 될 것 같다, 장님이 되고 뇌경색이 재발해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자살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아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썼다. 또 "장례비도 걱정이니 시체를 못 찾도록 생을 마감하겠다, 저승에서라도 너희를 돕겠다"고 글을 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장애가 있던 눈 상태가 악화되고 지난해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2개월간 병원치료를 받았다. 건강 문제로 생계를 지탱하던 회사 경비원 일까지 그만뒀다. 김씨는 이전에 가구 만드는 일을 하다가 여의치 않아 서울 등지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20여년 전 사별한 부인을 대신해 두 자녀를 혼자 키워왔다고 경찰은 말했다. 특히 김씨는 추석을 지낸 후 하게 될 딸의 결혼 상견례를 앞두고 자신이 결혼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김씨는 아들이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과 병든 자신 때문에 헤어진 것으로 보고 무척 마음 아파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들과 함께 은행에서 4000만원을 대출해 마련한 전세금으로 집을 얻은 것을 비롯해 뇌경색 치료비 등으로 1억원가량의 빚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어려운 가정 형편과 병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김씨의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귀농으로 밝힌 희망의 등불 - 시니어조선

    귀농으로 밝힌 희망의 등불

    • 입력 : 2012.10.17 10:49

    성주 참외로 제2의 성공인생을 이룬 경북 성주 정찬보 씨(45)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은 마을 어귀부터 달콤한 참외 향기로 가득하다. 성주군을 대표하는 특산물인 참외 하우스가 드넓게 펼쳐진 까닭이다. 도시에서 맛본 성공과 실패를 뒤로하고 고향에 터를 잡은 지 어느덧 9년 차에 접어든 정찬보 씨. 귀농으로 인생의 후반부를 멋지게 달려 나가는 그는 ‘좋은 농부’가 되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2012년의 봄을 맞이하고 있다.
    귀농을 결심하기 위해 치른 수고비
    정찬보 씨가 귀농을 결심하기까지는 다양한 성공과 실패가 뒤따랐다. 부침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냐마는 IMF의 그늘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1999년, 6년 동안 근무했던 대구 소재 백화점 역시 명예퇴직 바람이 한창이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할 수 없이 일터를 떠나는 모습을 보자 불현듯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내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대형할인마트을 차렸습니다. 당시 대형할인마트가 붐을 이룰 때라 처음엔 장사가 잘됐죠. 그런데 해가 갈수록 사정이 나빠지더군요. 의성·합천·대구를 거치면서 세 곳에 매장을 꾸려봤지만, 위치 및 경쟁 매장의 할인공세 그리고 유통 구조상의 문제로 제게 남은 돈은 고작 200만 원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땅을 담보로 대출받아 올인했던 사업이 하락세를 걷자 정씨는 결국 도시 생활을 정리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의 농사를 돕던 기억을 떠올리며, 땀과 노력의 대가를 배신하지 않는 것은 땅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캠퍼스 커플로 만난 아내 또한 방학이면 성주를 찾아 참외 농사를 도운 경험이 있었던터라 그의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인생의 재기를 꿈꾸며 찾은 시골은 그에게 희망을 되찾아 주었다. 달콤한 성공도 맛 봤지만 쓰디쓴 실패의 기억이 더 컸던 도시의 삶 덕분에 귀농하게 됐고 다시 한 번 재기할 기회를 얻었다는 정찬보 씨의 생생한 경험담을 듣노라면 그가 겪은 인생의 쓴맛은 귀농을 위한 수고비라 여겨도 무방할 듯싶다.

    귀농을 통해 평생직장을 얻으려면 초기자금은 기본
    20대 초반까지 직접 도왔던 참외 농사, 돌아가신 부모님의 향수가 배어 있는 집, 형님께서 빌려준 땅,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주민. 고향으로 돌아온 정씨는 그야말로 귀농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보다 참외에 대해 잘 안다는 자부심 또한 귀농에 자신감을 더했다. 그러나 피부로 맞닥뜨린 현실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즘 귀농을 꿈꾸시는 분들은 자료수집부터 품목을 결정하기까지 꼼꼼하게 준비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생계를 위해 무작정 내려온 경우였고, 무엇보다 참외 농사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하우스의 기본은 철근, 비닐, 덮개입니다. 당시 제 귀농자금의 전부인 200만 원은 철근값도 안 나왔어요. 그래서 알음알음 얻어온 중고 철근으로 하우스를 짓고 외상으로 빌린 덮개로 농작물을 덮었습니다. 하우스 작물은 보온이 생명이라 덮개가 굉장히 중요한데 아무래도 중고 덮개는 보온력이 떨어지니 타 농가와의 매출이 3배가량 낮았습니다. 적은 초기자금으로 의외의 복병을 만난 거죠.”

    가진 게 없으니 투자가 어려워 귀농한 지 3년이 되도록 이익을 얻기가 어려웠다는 게 정 씨의 설명. 트랙터며 수확에 꼭 필요한 장비를 살 수 없어 동네 형님 일을 도와주고 품앗이 값으로 장비를 빌려 쓰는 등 동분서주하다 보니 차차 수익이 늘었다. 귀농 4년째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설비를 갖출 수 있었던 정 씨의 참외하우스는 서서히 저력을 보여줬다. 이제는 겨울엔 기름 걱정 안 하고 아이들 학비 걱정 안 할 수 있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게 정 씨의 자랑 아닌 자랑이다.

    “귀농을 꿈꾸시는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농업 초기자금은 창업자금과 맞먹습니다. 아무런 시설 없이 노지에 농사지을 게 아니라면 말이죠. 최근 농자재며 제반 사항 관련 값이 오르는 추세인데요. 요즘 시세로 치면 7천~8천만 원정도는 준비하시는 게 좋습니다. 하우스 농사는 시설이 곧 수익과 직결된다고 해도 무방하니 특히 신경 써야 할 부분입니다. 저부터도 중고 시설로 참외를 재배할 때 보다 새 시설 짓고 장비 들여 재배한 참외가 훨씬 수확이 좋았거든요. 또한, 설비를 기계화하면 일손이 덜 들어 인건비가 적게 나갑니다. 덕분에 작년에는 귀농 이후 처음으로 연 수익이 1억을 넘겼습니다. 귀농 초기 투자만 확실히 한다면 연 수익 억대는 기본인 셈입니다.”

    이제는 농업도 브랜드 마케팅 시대
    “‘도시에서 할 일 없으면 시골 내려가 농사나 짓지 뭐’라는 우스갯소리는 통하지 않을 정도로 시대가 변했습니다. 농사도 사업이라는 마인드로 전문성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농부들도 무조건 생산만 할 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볼 시점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판매관리학을 전공해서인지 몰라도 ‘브랜드 마케팅’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삼한우’의 경우처럼 참외도 브랜드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정 씨가 구상한 마케팅은 ‘좋은 농부’라는 자부심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물론 참외 농사를 짓는 친구 세 명과 함께 만든 작목반을 통해 ‘좋은 농부들’이라는 브랜드 개발도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용암면농협공판장을 통한 경매 이외에도 인터넷 공동구매 판로를 개척한 상태다. 그의 브랜드 마케팅 최종 목표는 소비자와의 직거래다. 곧 도시의 부녀회와 연계해 성사될 예정이며 이는 할인마트 경영 이력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유통에 대한 자신감이 투영된 결과다.

    “생산자와 판매자 사이의 중간 유통 단계를 줄이면 가격이 30% 절약됩니다. 생산자와 판매자 모두에게 이로운 과정이죠. 더구나 직거래의 특성상 당일 생산된 참외를 당일 배송할수 있어 보다 신선한 농작물을 선물할 수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좋은 농부들’이라는 브랜드의 참외는 무조건 믿고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게 남은 숙제입니다.”

    최근 성주군을 찾는 젊은 귀농인들이 증가한다는 정 씨의 전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원인은 안정된 참외값에 있다. 딸기 철이 끝난 후 약 3~4개월 가량은 참외를 대체할 과일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농부들’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브랜드 마케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정찬보 씨의 미래는 참외 전성시대를 맞아 탄탄대로를 준비하고 있다.

    귀농으로 얻은 희망행진은 계속된다
    참외 농사는 의외로 섬세한 작업이 많아 여성의 힘이 절대적이다. 한여름이면 48℃에 이르는 하우스 작업은 피부의 수분을 앗아가기 충분한 조건. 아내의 상한 피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는 그는 산 전체를 펜션화해 야외캠핑장도 만들고 연못을 꾸려 낚시도 할 수 있는 전천후 체험장을 구상하고 있다.

    “요즘은 핵가족 시대잖아요. 귀농한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농사는 가족사업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소한 품이 많이 들어 혼자 감당하기는 벅차거든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귀농 생활을 통해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야외캠핑장 겸 펜션을 만드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먼 미래의 꿈이지만, 귀농 9년 만에 안정적인 정착을 이룬 만큼 곧 현실로 다가오리라 믿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참외로 당당히 재기에 성공한 그는 만족 대신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귀농을 통해 맛본 행복은 누가 뭐래도 화목한 가정이기에, 직접 조성한 펜션으로 도시의 가족에게도 행복을 전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비롯된 단꿈이다. 도시의 각박한 일상 대신 농촌의 여유로운 마음을 품은 정찬보 씨와 그의 가족이 이룬 희망행진은 앞으로도 힘찬 전진을 계속할 것이다.

    2012년 9월 15일 토요일

    "TED Translations Talks in 한국어" 로 영어공부하기


    혹 모르시는 분을 위해 내가 TED를 즐기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고자 한다

    TED가 원지 혹 모르신다면 (헉!!)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새로운 사고의 세계가 열리는 감동을 느끼실것입니다)

    저는 Translations Talks in 한국어 (http://www.ted.com/translate/languages/ko) 사이트를 통해

    자막을 영어로, 한국어로 또는 무자막으로 번갈아가며 TED 강연을 이해하고 청취하고 있다.

    우선 아래 사이트로 가면 다음 화면이 나오고




    다음 원하는 강연을 선택하면 (저는 문어 강의로 재미있는 Mike deGruy 의 강의를 검색했다)




    화면으로 마우스 커서를 올리면 21 language off라는 부위가 나오는데

    그곳을 클릭하여 English, Korean등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화면우측아래 show transcript 박스를 클릭하면 번역된 script가 아래처럼 나타난다


    그러면 그것릏 보면서 참고할 수도 있고 커서로 그래그 해서 저장하기 하여 문서로 저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만든 script 파일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또한 화면하단에 downlord를 클릭하면 동영상, mp3 파일을 저장할 수 있고 내 폰등에서

    시청, 청취 할 수  있다.

    (이내용은 제가 미드동-네이버카페에 올린글을 재편집하여 올렸습니다)

    2012년 9월 14일 금요일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신혼집 전·월세 싸게받는 집주인, 美·日처럼 세금 깎아주자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신혼집 전·월세 싸게받는 집주인, 美·日처럼 세금 깎아주자

  • 전문가 14명이 제시한 해법
  • 런던은 7년치, 뉴욕은 8년치 소득을 모으면 집 한 채 사는데, 한국 수도권은 9년치를 모아도 좀 모자란다. 더구나 다른 나라엔 없는 '전세' 제도 때문에 목돈 마련 부담이 크다. 제일 힘든 경우는 부모는 지방에 살고 자식은 수도권에 취직한 가족들이다.
    "그래도 출구는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부동산·은퇴·가족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이 네 차례 모여 구체적인 해법(解法)을 내놨다.

    ①보증금 5000·월세 50만원짜리 신혼집 많이 생기게

    이상영 명지대 교수는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을 내고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안정되게 살 수 있는 주택이 많아지면 그게 바로 주택 문제 해결"이라면서 "민간 임대시장을 활성화하자"고 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집주인이 2년 계약한 뒤 전셋값을 올릴 수 있다. 전셋값 안 올리고 오래 살게 해주는 집주인에게 세금을 깎아주거나, 낡은 건물 리모델링 비용을 저리(低利)로 빌려주는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있다. 안명숙 우리은행 부동산 팀장은 "미국과 일본은 이미 이런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주택을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②재개발 진행중인 지역, 방 두 개짜리 최대한 짓도록

    김희선 알투코리아 전무는 "작은 집이 사라진 게 제일 큰 문제"라고 했다. 2000년대 중대형 주택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해서 벌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평당 임대료만 따지면 대형 아파트보다 소형 아파트가 비싼 상황까지 벌어졌다.
    취재팀이 서울시 통계와 '부동산 114' 통계를 분석한 결과,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140~163㎡·42~49평) 월세는 평당 12만~19만원, 관악구 A 아파트(32㎡·10평)는 16만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서울 시내에 새로 들어설 아파트도 대부분 중대형이라는 점이다. 2000년 이후 주택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된 지역을 보면, 과거에는 10채 중 7채가 작은 집(60㎡·18평 이하)이었는데 재개발이 끝나면 10채 중 4채로 줄어들 전망이다. 변창흠 세종대 교수는 "이걸 방치하면 중대형은 수요도 없는데 자꾸 늘어 값이 더 떨어지고 소형은 집이 모자라 계속 오르는 현상이 더 심해질 것"이라며 "이러면 부모·자식 모두 괴로운 만큼, 현재 재개발이 진행 중인 지역은 이미 나온 사업계획을 수정해서라도 최대한 소형 주택을 많이 지어야 한다"고 했다.

    ③소형주택 주차장 지자체가 해결… 건설 단가 낮추자

    지금은 건설 업체가 작은 집을 많이 짓는 것보다 큰집을 적게 짓는 게 이익이 많다. 세대 수에 따라 건설 기준을 맞춰야하기 때문이다.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아파트 건설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저렴한 아파트를 많이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성수 주거복지연대 전문위원은 "일본에 가보면 우리처럼 아파트마다 주차장이 다 있거나 벽이 두껍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가 자칫 주민들이 '저질(低質)' 주택에 사느라 고생하게 되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주차장처럼 주민들이 함께 쓰는 시설을 지자체가 지으면 저렴한 소형 아파트를 더 공급할 수 있다"고 했다.

    ④대형 신도시보다 자투리 땅에 작은 집 짓는 시대로

    고성수 건국대 교수는 "정부가 신도시 지어 주택문제 해결하는 시대는 갔다"고 했다. 돈만 들고 효과는 적은 데다 남은 땅도 거의 없다. 또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머나먼 신도시 넓은 집에 사느니 도심 작은 집에서 여유 시간을 갖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 아이 키우려면 신혼부부 어느 한쪽 직장 근처나 양가 부모 사는 곳 근처에 살아야 할 필요도 있다. 김덕례 한국주택금융공사 주택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지자체가 각자 자기 동네에 맞는 모델을 만들어 낡은 집·구역을 정비할 때 다양한 형태로 소형 주택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⑤집으로 재테크도 옛말… 꼭 사야한다는 강박 버려야

    우리보다 저출산·고령화가 빨리 온 일본의 경우, 60대 부부가 각자 80~90대 부모로부터 팔리지도 않는 집을 한 채씩 물려받아 자기 집까지 두 채, 세 채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강민석 KB경영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우리도 앞으로 집값 올라서 재테크 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하미정 삼성증권 은퇴설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집을 '재산'이 아니라 '거처'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조주현 건국대 교수는 "정부도 시장도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저소득층은 비좁은 셋집에 살고 고소득층은 널찍한 자택에 산다고 생각한다. 외국은 고급 주택부터 허름한 주택까지 다양한 수준과 형태의 공공임대주택과 민간임대주택이 시장에 나와 있다. 개개인이 편의에 따라 집을 살지, 임대할지 선택하는 구조다. 월세 산다고 깔보지 않는 풍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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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청할 내용인것 같다